살인자들의 섬 밀리언셀러 클럽 3
데니스 루헤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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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에밀리는 나한테 시간이란 책갈피 같은 것이어서 내가 내 인생이라는 책 속을 이리저리 훌쩍훌쩍 뛰어다니면서 내게 흔적은 남긴 사건들이 있는 페이지로 자꾸만 되돌아간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11쪽

내게 시간이라는 게 정말로 책갈피 같은 거라면, 누군가가 책을 흔드는 바람에 누렇게 변한 종이 조각이며 찢어진 종이 성냥갑 껍데기며 납작해진 커피막대 같은 것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버리고, 내가 접어 놓았던 페이지들이 가장자리가 나달나달해진 채 그냥 매끈하게 펴진 것 같다.-12쪽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물건들이 그의 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아내의 기억에 성냥을 켰을 때처럼 불을 붙인다는 사실이 훨씬 더 잔인했다. 도대체 어떤 물건이 그런 짓을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소금 그릇일 수도 있고,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에서 본 낯선 여자의 걸음걸이일 수도 있고, 코카콜라 병일 수도 있고, 유리잔에 묻은 립스틱 자국일 수도 있고, 장식용으로 놔둔 쿠션일 수도 있었다.-37쪽

하지만 그려려면 돌로레스를 기억의 선반에 올려놓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녀에 대한 추억 위에 점점 먼지가 쌓여서 아픔이 누그러질 때까지. -273쪽

신뢰가 어디서 싹트는지 누가 알 수 있을까? 신뢰는 조금 전까지 없다가도 순식간에 생겨나는 법이었다. 테디는 전쟁 때 사귄 사람들에게 전장에서 자신의 목숨을 맡겼지만, 일단 전장을 떠난 후에는 그들에게 지갑을 맡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반면, 그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지갑은 물론 아내까지 맡겨도 좋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사람들에게 싸움에서 자신의 등 뒤를 지켜달라고 부탁하거나 뒤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문을 함께 열어보자고 한 적이 없었다.-325~326쪽

"내가 여기 만들어놓은 것은 아주 가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치 있는 것들이 당대에는 흔히 오해를 받곤 하죠. 모두들 빠른 해결책을 원합니다. 우리는 두려워하는 데도 지쳤고, 슬퍼하는 데도 지쳤고, 다른 사람들에게 압도당한 듯한 기분에도 지쳤고, 그렇게 지쳐하는 데도 지쳤습니다. 우린 과거가 다시 돌아오기를 원하지만, 과거가 어땠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모순되게도 우리는 미래를 향해 최고 속도로 밀고 나가고 싶어합니다. 진보의 발길 앞에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인내심과 자제력입니다. 이건 뭐 어제 오늘 일도 아니죠. 전혀. 항상 그랬으니까."-391~3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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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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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죽으면 어디에 묻혀 있는지가 중요할까? 더러운 구정물 웅덩이든, 높은 언덕 꼭대기의 대리석 탑이든 그게 중요한 문제일까? 당신이 죽어 깊은 잠에 들게 되었을 때, 그러한 일에는 신경쓰지 않게 된다. 기름과 물은 당신에게 있어 바람이나 공기와 같다. 죽어버린 방식이나 쓰러진 곳의 비천함에는 신경쓰지 않고 당신은 깊은 잠에 들게 되는 것뿐이다. 나도, 이제는 그러한 비천함의 일부가 되었다.-352~3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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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버 피치 - 나는 왜 축구와 사랑에 빠졌는가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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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윈든 전 이후, 나는 적어도 축구에 있어서 충성심이라는 것은, 용기나 친절 같은 도덕적 선택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사마귀나 혹처럼 일단 생겨나면 떼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결혼도 그 정도로 융통성 없는 관계는 아니다. 바람을 피듯이 잠깐 토튼햄을 기웃거리는 아스날 팬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축구팬에게도 이혼이 가능하기는 하지만(사태가 너무 심해지면 경기장에 가는 것을 그만둘 수는 있다.) 재혼은 불가능하다. 지난 23년 동안 아스날로부터 도망칠 궁리를 했던 적도 많았지만, 그럴 방법은 전혀 없었다. 창피스럽게 (스윈든, 트랜미어, 요크, 월솔, 로더햄, 렉스햄을 상대로) 패배할 때마다. 인내와 용기와 자제심을 총동원하여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달리 할 수 있은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불만으로 가득 차 몸을 비틀 따름이다.-56~57쪽

나는 축구를 보면서 즐거워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것들이 다 즐거웠고,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축구에 빠져든 것이다. 내게 꼭 필요했던 것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행이 마구 몰려오는 곳, 가만히 서서 근심에 사로잡힌 채 풀이 죽어 있을 곳이었다. 나는 울적했고, 아스날을 보고 있을 때면 잠시나마 울적한 속마음을 꺼내어 바람을 쐬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69~70쪽

여기에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확고한 신념(여기서도 이런 운명에 대한 소신을 자만심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거스 시저는 자만한 축구선수가 아니었다.)을 가진 지망자들에게 보내는 무시무시한 교훈이 담겨 있다. 소극장에서 연주한 경험이 있는 팝 밴드가 언젠가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연주하고 잡지 표지를 장식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듯이, 대형 출판사에 보낼 원고를 완성한 작가가 2년만 있으면 부커 상을 타게 될 거라고 생각하듯이, 거스도 자신의 실력을 믿었을 것이다. 우리는 인생에 대한 예감을 믿고, 그것이 보내주는 힘과 의지가 혈관 속에 헤로인처럼 퍼지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318~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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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즈데이 북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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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대한 건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서 보여진 유머와 엄청난 수다였다. 그런데 <둠즈데이 북>에 보여지는 건 페스트 시대의 비극이었다.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이 책은 우리가 보통 시간여행을 다룬 책에서 기대하는 긴강감 따위는 없다. 그러니까 미래에서 온 사람과 과거의 사람이 만나서 미래를 바꿀 만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하는 긴장감 따위는 애초에 없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 시간 여행은 인과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꺼운 책을 끌고 나가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재미가 있어야 했다. 그것이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서는 독특한 유머였지만 이 책에서는 페스트 시대에 놓여진 나약한 인간상에 대한 묘사로 나타난다. 그것이 세밀한 고증을 거친 중세시대의 모습과 함께 보여지는 이 책의 재미이다.

신을 위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닥친 재앙은 신에 대한 절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 절망속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건 인간이라는 존재가 나약하지만도, 어리석지만도, 이기적이지만도 않은 존재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게 이 두꺼운 책을 중간에서 덮지 않고 끝까지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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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영혼
필립 클로델 지음, 이세진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5년 2월
품절


나는 쓴다. 그게 다다. 그건 마치 자신에게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나와 대화한다. 지난 시간에 대한 대화. 나는 사람들의 초상을 낱낱이 기록한다. 손도 더럽히지 않고 무덤을 판다.-76쪽

"개새끼도 성자도,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완전히 시커먼 것도 없고, 완전히 새하얀 것도 없어. 있는 건 회색뿐이야. 인간들도, 그들의 영혼도, 다 마찬가지지. 너도 회색 영혼이야. 우리 모두처럼 빼도 박도 못할 회색이지."-122쪽

그는 자신의 회한 속으로 떠났고, 나는 나의 회한 속에 남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아마 그도 알 것이다. 사람은 어느 땅에 속해 살 듯, 회한 속에서도 살 수 있음을.-183쪽

코미디의 마지막 장은 언제나 피비린내 난다. 그 전 장이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우리는 결국 머리 위로 흙을 덮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되풀이된다.(파스칼 <팡세>중에서)-221쪽

죽은 자들을 죽이기란 너무 힘들다. 그들을 사라지게 하는 것도 힘들다. 나 역시 얼마나 숱한 시도를 했던가. 다른 종류의 일이기만 하면 그 무엇이든 이보다는 훨씬 쉬이 풀릴 것을.-245쪽

요컨대, 이건 결국 복수다. 손톱으로 땅을 후벼 파며 죽은 자들의 말을 들으려는 사람이 세상에 나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나 자신에게 말하는 방식이다. 아무리 공허해도, 우리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248~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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