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품절


"하밀 할아버지, 왜 대답을 안 해주세요?"
"넌 아직 어려. 어릴 때는 차리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12~13쪽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69쪽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93쪽

아줌마에겐 아무도 없는 만큼 자기 살이라도 붙어 있어야 했다.
주변에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사람들은 뚱보가 된다.-95쪽

나는 마약에 대해서는 침을 뱉어주고 싶을 정도로 경멸한다. 마약 주사를 맞은 녀석들은 모두 행복에 익숙해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행복이란 것은 그것이 부족할 때 더 간절해지는 법이니까.-99쪽

행복이란 놈은 요물이며 고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놈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
빌어먹을, 나는 이제 행복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 그러다가 또 발작을 일으키면 큰일이니까. 그런데 하밀 할아버지는 내가 표현할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을 찾아야 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 바로 거기에 그것이 있다고 말했다.-99~100쪽

나는 너무 행복해서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손 닿는 곳에 잇을 때 바로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106쪽

나는 어떤 희망을 가지고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희망이란 것에는 항상 대단한 힘이 있다. 로자 아줌마나 하밀 할아버지 같은 노인들에게조차도 그것은 큰 힘이 된다. 미칠 노릇이다.-109쪽

하밀 할아버지는 인정이란, 인생이라는 커다란 책 속의 쉼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노인네가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소리에 뭐라 덧붙일 말이 없다. 로자 아줌마가 유태인의 눈을 한 채 나는 바라볼 때면 인정은 쉼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쉼표가 아니라, 차라리 인생 전체를 담은 커다란 책 같았고, 나는 그 책을 보고 싶지 않았다.-114쪽

여러분도 알겠지만,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나도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죽을 맛이었다. 이건 아닌데, 생이 이런 건 아닌데, 내 오랜 경험에 비춰보건대 결코 아닌데 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뇌리를 스쳐갔다. 사람들은 말없이 하나둘 줄을 지어 밖으로 나갔다.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2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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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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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몹시 비겁했던 적이 있다. 돌아보면 지금껏 비겁하기만 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아무것도 망가뜨리지 않을 수 있다고 믿었다. 덧없는 틀 안에다 인생을 통째로 헌납하지 않을 권리, 익명의 자유를 비밀스레 뽐낼 권리가 제 손에 있는 줄만 알았다. 삶은 고요했다. 그 고요한 내벽에는 몇 개의 구멍들만이 착각처럼 남았다.-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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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다의 환상 - 하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2월
절판


어째서 남자는 담배를 피울까. 그것은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다. 입을 다물고 있을 구실, 이야기를 중간에서 끊을 구실. 세상 남자들은 모름지기 무슨 구실을 찾고 있게 마련이다.-9쪽

이해할 수 없다. 노래를 못하면 가수가 될 수 있을 리가 없고, 성적이 나쁘면 갈 수 있는 대학의 범위가 좁아지는 것은 누구나 당연한 일이라고 이해한다. 일을 하기 시작하면, 자기가 어느 정도 출세 할 수 있을지 자기 기량을 알게 된다. 그런데 어째서 사랑에 관해서만은 자기에게도 언젠가 근사한 사랑이 찾아올 것이라고 천진하게 믿어 의심치 않는가.-14쪽

사랑받는 사람은 언제나 오만하다. 사랑하는 쪽이 자기를 깎아서 사랑을 쏟는 것을 모른다. 사람은 호의에는 민감하지만 사랑받고 있는 건 눈치채지 못한다.그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상대방에게 도달하지 않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고독하다. 사랑하는 행위만으로 벅차서 그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149~150쪽

친구. 우리는 이 말에 얼마나 큰 공포를 느끼고 살아왔을까. 이 악의 없고 진부한 말을 중얼거릴 때, 누구나 가슴속에 복잡하고 씁쓸한 감정을 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친구가 있어야 한다. 친구가 많은 아이는 좋은 아이라는 '상식'을 어른들은 계속해서 각인시킨다. 고독은 패배라고 협박한다.-164쪽

행복이 계속되면 어쩐지 불안해진다. 이런 행복이 계속될 리 없다. 어쩐지 너무 행복해서 무섭다.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상실을 예감하고 있다. 그 예감이 실현되면 '역시 그런 행복이 계속될 리가 없었다.'라며 멋대로 수긍한다. 그렇게 때문에 옛날이야기는 늘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말로 끝나는 것이다.-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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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하니 2008-03-24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가슴에 팍 새겨지는 줄긋기 덕에 책을 읽고 싶어지네요~~
친구에 대한 부분땜에 울 둘째를 늘 닥달하고 있는데...그러지 말아야되겠다,싶어요~~
근대..이상하게 별이 없어요..왜 그런거에요????ㅎㅎㅎ

토트 2008-03-24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긋기는 별을 안 다는 거 같아요.ㅎㅎ
잘 지내셨어요?
이 책 볼만해요. 온다 리쿠 책이 기본적으로 재미는 있는거 같아요.ㅋ
 
흑과 다의 환상 - 상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2월
절판


여행. 우리는 왜 여행을 하는가?(...)우리는 무엇보다도 '비일상'을 원하는 것이다. 물론 '비일상'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평소와는 다른 장소의 일상, 평소에는 볼 일 없는 타인의 일상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무엇을 보든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법. 평소에는 환기되지 않는 기억을 찾아 우리는 여행을 한다. '자기 자신을 다시 생각한다'.자기 자신과 대면한다. 모두 내가 싫어하는 말이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과거를 되찾기 위해 여행한다.' -34~35쪽

사랑이 시작되었을 무렵의 침묵은 이야기되지 않는 말로 가득하다. 말 그대로 '말은 필요없다.' 그러나 사랑이 식었을 무렵의 침묵은 공허한 주제에 납덩어리처럼 무겁다. 그 무렵에는 말은 너무나도 무력해서, 어떤 말이든 블랙홀 같은 침묵이 삼켜버린다. 이 단계의 침묵은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이 침묵을 깨뜨리고 싶어한다. 그리고 아직 사랑이 남아 있는 쪽은 침묵을 깨뜨리기 위해 사랑이 남아 있지 않은 쪽에게 설명을 요구한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말이란 서비스고, 대가를 얻기 위한 수단이다. 이미 대가를 바라지 않게 된 사람에게 서비스해 봤자 소용없다.-100쪽

전에는 당신을 좋아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고, 당신도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보다 그 사람을 더 좋아한다.
죄는 아니다. 어느 말도 죄는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어째서 이렇게 아플까. 어째서 이렇게 가슴을 찢어놓는 말이 죄가 아닐까.-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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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절판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는 없었다. 중요하고 소중한 일은 약하디약한 얼음 조각 같은 것이고, 말이란 망치 같은 것이다. 잘 보이려고 자꾸 망치질을 하다 보면, 얼음 조각은 여기저기 금이 가면서 끝내는 부서져 버린다. 정말 중요한 일은, 말해서는 안 된다. 몸이란 그릇에 얌전히 잠재워 두어야 한다. 그렇다, 마지막 불길에 불살라질 때까지. 그때 비로소 얼음 조각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며 몸과 더불어 천천히 녹아흐른다.-46~47쪽

나는 나의 매일을 생각했다. 별 이렇다 할 것도 업이 싱겁게 지나가는 방대한 시간의 축적. 뭔가 소중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업다면, 그 무게에 짓눌려 버릴 것이다. 하지만, 겨우겨우 얻은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는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그 대답을 알고 있을 텐데, 나는 물을 수 없었다. 무서웠다.-54쪽

"언제부터 밤이 무서워진 걸까......"
나는 잠자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마, 상상력이 없어지기 시작했을 때부터일 거야. 나는 머리가 좋다고 착각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이 세계를 모두 알았다는 기분으로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것을 함부로 대하고......"-84쪽

그러니까 행복하고 싶으면 불필요한 통찰력이나 상상력은 없는 편이 나아. 그리고 눈앞에 존재하는 죽음 따위 싹 무시하고 쾌락을 좇으며 사는 편이 훨씬 낫지. 사람들 대부분은 그렇게 살아.-104쪽

정말 슬프고 비참한 기분이었다. 백 살까지 산다 한들, 진정 아끼고 소중히 여길 만한 기억을 얼마나 간직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런 기억을 가질 수 있을까?-154쪽

지금 내게는, 후회할 일이 하나도 없다.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기억만이 있을 뿐. 달리기 시합에서 출발하면서 넘어졌던 일, 밸런타인 데이에 채였던 일, 오키나와에서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일, 모두모두 사랑스럽다. 그 모든 기억을 간직하고, 다가올 겨울을 맞으리라.
차는 상태가 아주 좋다.
이 세상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이 세상은 멋지다.
나는 아무 상처 없이 돌아오리라.-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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