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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특히 아이들은 그쪽 식생활에 익숙해져 별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공부 열심, 일 열심 피가 끓어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처음엔 일본 부인 단체의 대표가 왔을 때 프랑스어 통역사로 동행했다. 그때부터 점점 관계가 깊어지면서 통역뿐 아니라 단체 대표도 맡게 되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국제회의로 분주한 나날이 많아졌다.

러시아 수프라 하면 일본인은 보르시치를 떠올릴 테지만 본디 우크라이나 요리다. 러시아인에게 가장 소중한 수프는 시치라는 양배추 절임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밖에도 소금에 절인 오이로 만드는 솔랸카, 신맛이 나는 라솔니크, 생선 수프인 우하, 호밀 등으로 만드는 여름 음료 크바스, 아크로시카크바스에 잘게 썬 야채와 고기 등을 넣은 수프 등이 있다.

겨울이 긴 나라는 채소가 많이 나는 시기에 보존식을 만들어 둔다. 러시아인은 오이 양배추 버섯류 등을 염장한다. 이것이 발효하면 묵은지 맛이 난다. 이 야채와 절임 국물을 더한 수프는 깊은 신맛이 중독될 정도로 맛있다. 점심에는 반드시 수프가 나왔다.

어머니는 그 뒤로 더욱 바빠졌다. 1963년에는 동베를린에 있는 국제민주 부인 연맹 본부의 사무국에 상주 일본 대표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일본으로 귀국하기까지 1년은 프라하에서 아버지와 우리 셋이 살았다. 어머니는 한 달에 한 번 휴가를 얻어 돌아왔다. 그때는 바츨라프 광장 가까운 프라하 역까지 셋이서 마중을 나갔다.

내가 참 좋아하고 지금도 가끔 만드는 요리 중에 스파넬스키 프 타체크(‘스페인의 작은 새’라는 뜻)라는 것이 있다. 스페인다운 점은 하나도 없다. 쇠고기 요리인데 어째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알 만한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지 못했다.
쇠고기 등심살을 가볍게 두드려 늘인 다음 한 면에 겨자를 바르고 햄이나 베이컨을 깐 뒤, 삶은 달걀 4분의 1, 소금에 절인 오이, 살짝 익힌 양파 4분의 1을 올려 고기와 베이컨으로 싼 다음 이쑤시개로 고정한다. 돼지기름을 둘러 달군 냄비에 이것을 넣어 노릇하게 굽는다. 이 냄비에 콩소메 수프를 붓고 뚜껑을 닫은 다음 고기가 다 익을 때까지 삶는다. ‘작은 새’를 냄비에서 꺼낸 다음 육수가 우러난 수프에다 버터에 볶은 밀가루를 넣어 소스를 만든다. ‘작은 새’에 크네들리키를 곁들여 소스를 얹으면 완성.
최근에 이베리아 항공기를 탔더니 이것과 똑같은 요리가 나와 서둘러 메뉴를 읽어보니, 그저 ‘쇠고기 롤 찜’이라고만 되어 있었다. 스튜어디스에게 물어보니 스페인 가정요리라고 가르쳐줘서 어릴 때의 의문이 풀려 기뻤다.
?「하루에 여섯 끼」 『미식견문록』

마리의 이 글을 읽고 꽤나 조사하고 찾아다녔으나 스페인에서도 이 요리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확증은 아직 찾지 못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체코처럼 흔히 먹는 가정 음식이지만.

쇠고기 요리인데 왜 작은 새라고 불리는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나는 귀국할 때까지 피아노를 배웠으나 마리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두었다. 언니가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에 쓴 책『문화편력기』(마음산책, 2009)에서 처음으로 그 이유를 알았다. 선생님이 너무 잘생겨서 창피했단다. 그랬다. 그 선생님은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아름다웠다.

그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인기는 러시아어로 흰버섯이라는 의미의 그물버섯이다. 프랑스어로 세프cepe, 이탈리아어로 포르치니porcini라 불린다. 이 버섯은 여간해서는 발견하지 못한다. 따라서 어쩌다 발견한 아이는 그날의 영웅이 된다. 유럽의 버섯류는 향기가 대단히 강하다. 요리사는 우리가 딴 버섯을 버터로 볶기도 하고 수프로도 만들어주었다.

잘 익은 체리는 너무 먹으면 조금 취하거나 배탈이 나기도 한다. 이미 경험해본 선배들이 누누이 주의를 주었지만, 체리를 눈앞에 두면 입도 손도 멈추지 못하게 된다. 돌아오는 길에 몇 명은 걸음이 꼬이곤 했다.

즐겁고 즐거운 캠프 생활에서 유일하게 우울했던 것이 ‘낮잠’ 시간이다. 오전 스케줄이 힘들지 않은 이상 낮잠을 자고 싶지 않다. 놀고 싶고 수다 떨고 싶다. 그러나 선생님은 반드시 둘러보러 오신다. 재수 없게 걸리면 오후 놀이에 가지 못한다. 선생님 눈을 피해 낮잠 시간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우리가 지혜를 모았다. 그렇다고 해서 별것은 없다. 옆방에 몰려 가서는 선생님이 오시면 옷장이나 침대 밑에 숨거나 공놀이를 하며 그저 몰래 하는 스릴을 즐길 뿐이었다.

호텔에서 샤워는 할 수 있지만 욕조는 없다. 비누 거품을 묻혀 강에 뛰어드는 샤워는 정말 최고였다.

식당 옆 작은방에는 책장이 있었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가져온 책들을 다 같이 돌려 읽었다. 재미있는 책은 금방 소문을 타고 다투어 읽고는 다 읽은 아이들의 수다에 끼어들고자 했다. 양서류로 개조되어 수중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주인공이 활약하는 소련의 SF소설 『양서인간』이 히트 친 해도 있었고, 체코 작가 하셰크의 『용감한 병사 슈베이크』에 다들 폭 빠졌더랬다.

마리 님, 유리 님
1961년 7월 2일
프라하에서 이타루

일요일(7월 1일)에 가려고 했는데 못 가게 되어 짐만 부치기로 했어요. 크로지느에게도 다른 아주머니에게 부탁받았기 때문에 짐을 부칩니다.
어머니(미치코)는 아직 루마니아에서 안 돌아왔어요. 루마니아가 너무 좋아져서 프라하로 돌아오기 싫어졌나 봐요.
그런데 전보를 보니까 내일 화요일(7월 3일)에 돌아오실 듯해요. 돌아오시면 선물은 다음 주 일요일(7월 8일)에 가져갈게요. 그렇지만 만약 일이 생기면 아버지는 다음 일요일에도 못 갈지도 몰라요.
그리고 아버지(이타루)는 일이 생겨서 수요일(7월 4일)에 모스크바에 간답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지 모르니까 언제 프라하로 돌아올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어요.
짐 속에는 이런 물건들을 넣어둡니다.
1. 세탁한 셔츠 등(요전에 아버지가 프라하로 가져온 것을 모두 빨아서 넣어두었어요).
2. 손톱깎이(마리가 가방 속에 넣은 채로 잊고 있던 것입니다).
3. 무좀 약(마리가 부탁한 것).
4. 오렌지 두 봉지(이건 아버지의 선물).
5. 그림엽서(마리도 유리도 편지를 좀 더 쓰세요. 그래서 이걸 넣어둡니다).
6. 마리의 사진기와 거리를 재는 도구와 빛의 세기를 재는 도구(마리의 사진기는 아버지가 완전히 고쳐서 새 필름도 넣어두었어요. 이 필름은 36장이나 찍을 수 있으니까 돌아올 때까지 충분하겠지요. 빛의 세기를 재는 도구는 아버지가 독일에서 사온 소중한 것이니까 조심히 쓰세요. 이걸 빌려줄 테니 사진 선생님께 쓰는 법을 배워서 멋진 사진을 찍어보세요).
7. 유리의 사진기와 필름(유리의 사진기도 보냅니다. 마리에게 배워서 잘 찍어보세요).
그럼 안녕.
아버지는 모스크바에서 선물을 사올게요.

아이들도 이해하기 쉽게 아버지는 히라가나를 단어마다 띄어서 써주었다일본어는 히라가나와 한자를 섞어 써서 띄어 쓰지 않아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히라가나만 쓰면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한글 띄어쓰기 하듯 히라가나 단어마다 띄어 써서 이해하기 쉬웠다는 뜻.

일본에 돌아오니 뜀틀을 몇 단 뛰었다느니 죽마를 탄다거나 철봉 거꾸로 돌기를 하는 등 학교 체육에서 같은 과제를 두고 모두가 똑같이 해내야 한다는 점이 놀라웠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쌍꺼풀 있는 큰 눈을 동경했던 마리는 볼펜으로 사진을 수정했다.
수영복 차림 사진은 허리를 잘록하게 고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얄타에서 먹었던 포도다. 아버지가 "아버지는 포도를 참 좋아해"라고 하시며 송이째 베어 드셨던 광경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좋아하는 것을 드실 때면 늘 기쁜 듯이 "아버지는 이게 참 좋아"라고 말했다. 그 버릇은 유전이 되었는지 좋아하는 음식이 나오면 "나 이거 가장 좋아해"라거나 "내가 좋아하는 거다!"라고 말한다.

프로스토크바샤라는 유산음료

일본인은 점심 하면 다들 12시라는 통념이 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빨라야 1시, 대개는 2시 정도부터라서 점심까지 허기를 못 이겨 뭔가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러시아인은 자기 전에 프로스토크바샤라는 유산음료를 마신다. 이것이 하루의 마지막 여섯 번째 식사지만 그들은 유산균음료를 실로 자주 먹고 마신다. 우유와 요구르트 사이에는 많고 많은 종류와 형태가 있다.

벨로루시 수도 민스크의 어느 가정에서 케피어kefir라는 유산음료를 대접 받은 적이 있다. 그 집 아주머니가 "아니, 일본에는 케피어가 없다고? 가엽게스리"라며 동정했다. 하지만 그 말이 이해가 갔을 정도로, 거품이 조금 핀 상큼한 신맛의 케피어는 정말 잊지 못할 맛이었다. 최근에는 일본 슈퍼마켓에서도 케피어 종균을 본 적이 있다. 꼭 맛보길 권한다.

세 친구 모두가 가족을 포함하여 변함없이 친하게 지냈기에 내가 그리도 해맑게 지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단지 다른 학년과 함께 학교 행사를 치를 때, 옆을 지나가는 내게 상급생이 욕하는 투로 ‘키타이카(중국인)’라고 내뱉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때의 ‘중국인’이 욕이란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일본에 돌아와서 반 아이가 싸움하면서 ‘조선인!’이라고 했을 때도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당시 프라하에서 세계 정치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어릴 때 평등한 사회주의 체제라고 여겼던 곳에서 체험한 이런 사치는 시민사회 역사가 오랜 서유럽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있더라도 그런 사치는 일반 시민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었다. 역시 소련은 망할 운명에 있었다고 본다. 숭고한 이상을 걸고 황제나 영주의 압정에서 인민을 해방시켰을 터나 새로운 권력자의 표본이 자신이 타도했던 군주였던 것일까.

광동에서는 네 발 달린 것은 책상 외에 뭐든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이 식재료가 된다는 듯이 정말 갖가지 음식이 나왔다. 심지어 요리되기 전 뱀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까지 보여주는 불필요한 친절까지.
마리는 여기서 두 손 들었다. 알바니아에서도 익숙지 않은 음식에 괴로워했으나 광동에서는 먹을 만한 게 죽밖에 없었다. 이 죽도 그야말로 기막히게 맛있었다. 중국 측에는 북경에서 먹고 온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정신없이 먹다 보니 배탈이 났다고 해두었다.

마리는 미지의 것, 익숙지 않은 것은 못 먹었다. 먹을거리뿐 아니라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면 지레 겁을 내어 망설였다.

세계 각국에는 보수적인 식생활을 하는 혁명가도 있을 테고, 희한한 음식을 즐기는 보수정치가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사람이 본질적으로 보수적인지 혁신적인지를 점치기에는, 미지의 음식에 대한 태도를 보는 편이 혈액형보다 훨씬 더 잘 맞을 것 같다.
?「미지의 음식과 성향」 『미식견문록』

나는 언니가 어떤 누구보다 자유로운 정신의 주인이요, 그렇게 되도록 스스로 노력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언니는 미지의 음식에 대해서는 결코 용감하지 못했다. 마리의 이 가설은 언니 자신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어린이 때부터 마리가 보여온 미지의 경험에 대한 신중함은 첫째로 태어난 아이들의 공통점이 아닐까.

의외로 프로 요리인들이 오히려 일본 요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격, 태어나 자란 환경, 호기심, 불안감, 자신의 식문화에 대한 자긍심 등 여러 요인이 모여 음식에 대한 태도를 규정한다. 사상의 본질까지 부연하는 것은 조금 비약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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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식탁만큼 빈번하게 달걀 요리가 오르지는 않는다. 날달걀, 달걀말이, 달걀 프라이, 달걀찜, 고명, 다테마키다진 생선과 달걀을 섞어 얇게 부친 다음 김밥 모양으로 발에 말아낸 음식으로 설이나 잔치에 쓴다며 다마고토후달걀과 육수를 섞어 두부처럼 사각 틀에 찐 음식, 덮밥 등 텔레비전에서 뭔가 군침을 자아내는 장면이다 싶으면 어김없이 달걀 국물이 조르르 흘러내리곤 한다. 일본인은 정말 달걀을 좋아하니까 이런 장면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리라.

그렇다곤 하나 마리는 역시 달걀을 좋아했다. 중년에 들어설 무렵부터 언니는 ‘내 마음대로 다도’를 즐겼다. 말차의 쓴맛을 덜어줄 과자로 노란 팥소밤, 고구마의 전분으로 만든 흰 팥소白あん, 팥을 으깬 흑팥소?あん로 나뉘며 여기서는 흰 팥소에 달걀노른자를 섞은 것을 뜻함가 들어간 것을 먹을 때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고야 일본 과자를 즐기는 내가 선물로 자주 사는 ‘셋카노마이雪花の舞’며, 요나고에 사는 사촌 언니가 선물해주는 이즈모 지방의 ‘소모산’도 좋아했지만 어느 쪽이건 노란 팥소가 들어 있는 명과다.
양과자도 스펀지케이크보다 노른자가 많이 들어간 카스텔라를 좋아했다. 그리고 가장 좋아한 것은 ‘계란소면’이다. 달걀노른자를 물엿으로 굳힌 규슈 지방의 이 달달한 과자를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아니, 일본 삼대 명과를 모르시다니!"라며 일장 설교를 시작한다.

프라하로 가기 전인 1950년대 후반 즈음이었다. 우리 집에는 언제나 하숙생이 있었고 잠시 묵으러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시골에서 누가 올라오면 당연한 듯이 자고 갔다. 지금처럼 부담 없이 묵을 호텔이 흔치 않던 시절이어서 당시엔 어느 집에서도 빈번한 일이었다. 단지 우리 집의 경우 다른 집에 비해 그런 일이 유별나게 많았다.

온 일가가 다 모이게 되는 것은 결혼식이나 제사 때다. 요네하라 일가가 앉은 테이블과 다른 참석자들 테이블과는 음식 없어지는 속도가 완연히 달랐다. 입식 파티 때 새로운 요리가 올라오자마자 잽싸게 음식대 주위로 모여든다 싶어 보면 우리 친족들이다. 다들 오랜만에 만나서 회포를 푸느라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말이다.

할아버지는 부자라서 밖에서는 거하게 사주셨지만 치주 집에서는 검소하셨고 식탁에도 그저 흔한 계절 재료들만 오를 뿐이다. 그래도 밥이랑 집에서 만든 된장은 정말 맛있었다.

……내가 그런 꿈을 꾼 것은 먹성 좋은 나조차 적수가 못 될 정도로 어린 동생의 먹성이 특출 났기 때문이라고. 유년기에 2년 8개월이면 차이가 크다. 몸도 마음도 급격히 자라나는 시기이니, 아무리 발돋움을 해봐야 읽을 수 있는 글자 수이며 사회성이며 거의 모든 면에서 내가 동생보다 나은 것이 당연했다. 그 반대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데도 동생은 세 살이 채 되기도 전에 먹는 양과 속도에서, 다섯 살인 나를 제친 것이다.(중략)

어린 마음에도 네가 너무 어수룩해서 걱정스러웠던 거야. 그래서 나쁜 사람에게 걸려들지 않도록 훈련시킨 거라고."
이렇게 둘러댔지만 솔직히 반은 진심이었다. 먹는 거라면 얘는 부모 형제 친구뿐 아니라 제 양심조차 팔아치우지 않을까, 발을 잘못 들여놓으면 어쩌나 하고 향응에 약한 동생의 성격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먹성도 한 재주」 『미식견문록』

반론 1 간식 일화는 고구마가 아니라 바나나였다. 그리도 동경했던 바나나였으니 일시적으로 마리에게 내 몸을 팔았다. 고구마가 아니었다.
고구마 하니 생각난다. 체코로 가는 도중 파리의 호텔에서 우리 자매는 더블 침대에서 함께 잤다. 밤에 언니가 "야, 너 뭐 해. 기분 나빠" 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때 나는 군고구마 꿈을 꾸던 참이었다. 잠버릇이 안 좋아 180도 회전해서 마리 발을 물어뜯고 있었단다.

마리가 데이트에서 실패하고 온 적이 있다. 같이 밥을 먹던 상대방보다 먹는 속도가 워낙 빨라 일찌감치 식사를 끝낸 언니에게 아직 먹고 있던 상대가 자신의 접시를 들이밀며 "이거라도 좋으면 드시죠"라고 했나 보다. 이후 그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은 오지 않았다.

전쟁 전이었다면 무슨 일로 잡혀 들어가 말하지 않으면 굶긴다는 고문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비밀이고 뭐고 모조리 불었으리라. 전쟁 뒤에 태어나서 천만다행이다.

아버지가 16년간이나 무사히 도망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정말 다행이다. 혹시 잡혀서 먹는 걸로 고문받았다면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어릴 때부터 홀로 상상하곤 안도했다.

갱년기에 들어 원래부터 야윈 적이 없었건만 더욱 뚱뚱해졌을 때, 이미 많이 뚱뚱했던 언니에게 "나 요즘 5킬로그램이나 불었어. 어떡하지?"라고 투덜댔더니 "어머, 아버지의 유전자가 열심히 활동 중이니 좋은 거 아니니?"라는 소리가 돌아왔다. 이후, 마리의 이 말에 용기 얻어 오늘까지 난 열심히 먹고 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도 술을 마시면 밥이며 만쥬가 당긴다. 그럴 때면 연회 중에 나와서 밥통을 끌어안고 즐거운 듯 주걱으로 밥을 긁어 드시던 아버지 생각이 나서 나도 몰래 배시시 웃음이 삐져나온다. 그럼, 먹고 싶은 건 먹고 살아야지.

1코루나 20할레르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약 2~300엔쯤 되려나. 용돈에 조금 여유가 있을 때만 우리는 이 소시지를 사 먹었다. 자주 타던 노선 차비도 영화관 입장료도 생각나지 않는데 별로 사 먹지도 않은 이 소시지 값이 기억나는 것은 그만큼 먹고 싶어 했기 때문일까.

그런 상상과의 싸움에서 이긴 다음 이제 간신히 움직여볼 결심이 서기까지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은 힘과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그런 만큼 지금이다 싶을 때는 더없이 듬직했다.

언니는 사람들하고 말하다가도 갑자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버리는 버릇이 있다. 이 버릇은 평생 고치지 못했다. 가족 앞에서는 괜찮지만 타인과 함께 있을 때면 상대방의 기분을 해칠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마리가 상상했던 것은 실은 단지 공상이 아니라 지금 와서 생각하니 의외로 구체적인 것이 아니었나 싶다. 이건 어떤 구조일까, 이런 꾀를 내면 편리하겠다, 이런 도구가 있다면 재미있겠지 등등. 마리는 발명이나 아이디어 내는 걸 좋아했고 그런 것에 곧 골몰했다.

언니의 책 『발명 마니아』의 후기에도 쓰여 있지만 프라하 시절 아파트에서 마리는 내게 파마를 해주려 했다. 어머니의 헤어 컬러curler를 갖고 와서 적신 내 머리카락에 감은 뒤, 그 머리를 스팀 위에 올렸다. 유럽의 주택은 중앙관리형이라 각 집, 각 방에 설치된 스팀 패널을 통해 난방이 된다. 언니는 "뜨겁지만 참아, 곧 파마가 될 테니까"라고 했다.
마침 어머니가 방에 들어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으악! 너희 뭐 하니? 유리가 바보가 되잖아!" 하고 뜯어말렸다. 덕분에 나는 간신히 뜨거움에서 해방되었다. 하마터면 진짜 바보가 될 뻔했다.

마리는 심심하면 가구 배치를 바꾸곤 했다. 처음엔 둘이 쓰는 방이니까 나도 도왔다. 그러나 언니는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바꾸자고 하기 일쑤다. 언니 변덕에 휘말리기 싫어 어느 때부턴가 마리가 뭘 하든 내버려두었다. 마리는 타고난 집중력과 괴력을 발휘해 침대며 책장이며 피아노까지도 혼자서 옮겼다.

프랑스인 친구 치보(마리는 그에 대한 에세이를 남겼다)는 우리의 ‘추억 노트’에 "마리는 친구로서 최고다. 가구만 옮기지 않는다면. 유리는 멋쟁이다. 피아노만 잘 친다면"이라고 써주었다.

돌아와서 맨 처음 프라하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온통 먹는 얘기밖에 없었다.
"뭘 먹었네, 너무 먹어서 살쪘네, 그런 거밖에 없잖아. 일본 학교는 어떤지, 친구들은 어떤지 좀 더 제대로 써줘"라며 화가 난 친구가 보냈던 편지를 기억하고 있다.

체코의 빵은 호밀로 만든 검은 빵이다. 호밀빵은 유럽 중부, 북부, 더불어 러시아 등 밀이 자라기 어려운 추운 기후에서 먹는다. 호밀 100퍼센트인 새까만 빵에서부터 밀가루를 섞는 비율과 발효법이며 효모의 종류 등, 나라나 지역에 따라 만드는 법이 각양각색이다. 체코 빵은 독일 빵에 가깝다. 몇 가지 종류가 있으나 보통 가장 자주 먹는 것은 밀가루를 섞어 만든 베이지색 빵이다. 포장마차에서 소시지에 따라 오는 빵도 이 종류다.

미국으로 망명한 러시아인 둘이서 고향 음식을 회상하며 쓴 『망명 러시아 요리』라는 책이 있다. 둘은 미국의 식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미국 빵처럼 맛없는 것도 없다. 러시아와 미국, 두 강대국이 서로 다른 점이 있다면 빵이라는 식품을 다루는 태도에 있다. 러시아에서 빵은 사랑받고 있었다. "빵은 생명처럼 소중하다"는 소련 공산당 정치부 당원들이 미국 곡물을 수입할 때 한 현명한 말이다. 미국인은 곡물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이어트에 열심이라 칼로리가 높은 곡물은 지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미국인이 만드는 그 면화처럼 말랑말랑한 것. 대체 어쩌면 그따위를 만들 수 있는 걸까. 그건 미국인이 빵을 미워하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된다. 그네들은 그걸 빵이라고 부르나 본데 정상적인 인간으로선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즈음부터 유럽의 식재료를 파는 가게며 레스토랑이 도쿄에 점점 늘어가기 시작했다. 미국을 거쳐 들어오는 것이 아닌 세계 각국의 식문화가 서서히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오야마에 프랑스 빵을 파는 ‘동크’가 개점하자, 바게트를 들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호밀빵을 두는 가게도 늘어나 프로인드리브 도쿄점이 히로오에 문을 열었다. 이제 필사적으로 찾아 다니지 않아도 빵이며 소시지며 치즈, 다른 재료도 대개의 것은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지진이 일어나고 몇 달 지났을 무렵이다. 어느 날 마리가 우리 집에 와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지원은 이거야!" 하며 책상에 프로인드리브의 카탈로그를 펼쳤다. 고베 본점이 피해를 입어 임시 점포에서 영업을 하며 본점을 재건하려 한단다. 그로부터 한참 동안 프로인드리브의 빵과 과자를 열심히 주문했다. 마리는 얇은 파이 위에 아몬드를 올려 구운 더치 크런치를 좋아했고, 나는 호두링 케이크를 계절 안부 선물로 주문했다. 우리 둘 다 그 옛날의 신세를 보은하려는 마음이었다.

체코 빵뿐 아니라 러시아 빵도 먹고 싶다. 그러나 독일 빵집은 생겨도 러시아 빵을 만드는 가게는 좀처럼 안 생겼다. 마리도 『미식견문록』에서 이렇게 썼다.

요즘 일본에서도 신맛 나는 독일식 호밀빵을 파는 가게가 늘었다. 러시아 흑빵은 독일 빵보다 신맛이 다섯 배는 더 강하다. 신맛은 효모를 발효시키는 과정에서 나는 맛이라 소화에 좋고 장아찌처럼 식욕 증진 효과가 있다. 실제로 러시아인의 빵 소비량은 다른 유럽 나라들의 평균 소비량의 3배에 조금 못 미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나조차도 불현듯 러시아 흑빵이 그리워질 때가 있으니, 러시아인에게는 얼마나 대단할까.
?「고국 음식의 위력」

신맛의 발효 식품은 습관성이 강하다. 즉 중독이 되는 것이다. 빵은 이스트 균(효모)으로 발효하지만 균은 생물이다. 빵집마다 그 가게만의 효모가 다르니 당연히 빵 맛도 가게마다 달라진다. 요새는 건조 이스트 균이 있어 어디서나 같은 맛을 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어떤 조건이 변하면 균의 활동도 변화되어 빵 맛도 달라진다. 따라서 발효 식품 세계는 속이 깊다. 고향을 떠올릴 때 많은 일본인이 된장이나 장아찌 맛을 떠올린다. 하지만 빵을 먹는 지역 사람들은 어릴 때 먹던 동네 빵집의 맛을 떠올린단다.

통역 일로 자주 러시아를 드나들던 마리는 언제부턴가 갈 때마다 그 무거운 흑빵을 대량으로 사들고 왔다. 그러곤 내게도 그 빵을 나누어준다.

마리는 향수를 뿌리는 습관이 있었다. 몸에만 뿌리는 게 아니라 서랍장에도 뚜껑을 연 향수병을 놓아두었다. 러시아 빵집, 아니 일본 이외의 어느 나라도 물건 하나에 몇 겹이나 포장을 해주는 곳은 드물다. 빵이라면 종이로 휘리릭 말아주는 게 전부다. 그러니 마리의 트렁크 안에서 향수가 스며든 옷과 함께 운반되는 빵에는 아무래도 향수 냄새가 배고 만다. 향수를 즐기지 않는 나는, 아니 즐긴다 해도 이건 좀 괴롭다. 서비스 정신이 왕성한 마리는 러시아에서 산 적이 있는 지인이나 동료 러시아 통역가에게 이걸 갖다 안겼으리라. 다들 받아서 잘 먹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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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스 캔버스와 가죽이 섞인 아름다운 내 가방에 손을 뻗어 베유의 글 모음집을 꺼낸다. "신을 사랑하기 위해 학교 공부를 올바르게 활용하는 방안에 관한 성찰"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펼친다. 특이한 제목이다.

대표적 무신론자인 알베르 카뮈는 베유를 "우리 시대의 유일한 위대한 영혼"13이라 불렀다. 카뮈는 노벨문학상을 받기 위해 스톡홀름행 비행기를 타기 전 파리에 있는 베유의 아파트에서 한 시간 동안 명상을 했다.

집중은 수축한다. 관심은 확장한다. 집중은 사람을 피로하게 한다. 관심은 피로를 회복시켜준다. 집중은 생각을 한곳에 모으는 것이다. 관심은 생각을 유보하는 것이다. 베유는 이렇게 쓰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생각은 텅 빈 채로 기다려야 하고 그 무엇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저 자신의 생각에 침투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이 문장이 그리 당혹스럽지 않다면, 베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문제는 수동성의 결여에서 생겨난다"라고 선언한다.

베유는 진정한 관심이란 일종의 기다림과 같다고 믿었다. 베유에게 이 두 가지는 사실상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가장 귀중한 선물을 얻는 것은 그것을 찾아 나설 때가 아니라 그것을 기다릴 때다." 관심의 반대말은 산만함이 아니라 조급함이다.

우리는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한편으로 이런 정신적 분류는 반드시 필요하다. 분류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윌리엄 제임스가 말한 것처럼 "부산스럽게 만발하는 혼란 상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너무 빨리, 너무 충동적으로 분류 작업을 하면 귀중한 보석을 놓칠 위험이 있다.

우리가 종종 너무 서둘러 판단을 내리듯이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는 데도 너무 성급하다. 어떤 대상이나 생각에 너무 빨리 혹하고, 그 대가를 치른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아름다움이나 친절한 행동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유는 알지 못하는 상태,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최대한 오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베유가 살던 시대에는, 심지어 오늘날에는 더욱더 드문 것이다.

베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소하다 여길 문제에 크나큰 관심을 기울였다. 예를 들면 손 글씨 같은 것. 베유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였던 시몬 페트르망에 따르면 고등학생 때 베유는 자신의 "엉성하고 경망스러우며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손 글씨"14를 바꿔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부어오르는 손의 통증과 두통에도 불구하고 지칠 줄 모르고 주의 깊게 노력했다. 휘갈겨 쓰던 베유의 손 글씨는 "점점 경직이 풀리고 유연해졌으며, 마침내 말년에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글씨를 얻게" 되었다.

인내심은 좋은 덕목이다. 최근 연구가 보여주듯이 인내심은 자신에게도 좋다. 여러 연구가 인내심 있는 사람이 안달 내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고 건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15 인내심 있는 사람은 더 이성적으로 행동할 확률이 높다. 이들은 대처 기술도 더 뛰어나다.

인내와 관용이라는 뜻을 동시에 갖는다. 무엇에 대한 관용일까? 물론 고통에 대한 관용이지만, 부족한 자신에 대한 관용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참을성을 보이지 못하는 사람이 스스로에게 참을성을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내 마음은 매우 계산적이다. 언제나 무언가를, 이왕이면 많이 원한다. 엄청난 아이디어, 기나긴 휴식, 푸짐한 아침 식사.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멀쩡해 보이는 알코올 중독자처럼 나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내 조급함을 숨길 수 있다. 대개는 그렇다. 가끔은 사람들이 나를 꿰뚫어 보기도 한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만난 네덜란드인 메시아처럼.

모든 말다툼은 오해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범주의 오류’에서 비롯된다. 양측이 같은 문제를 다르게 보는 것이 아니다. 양측에게는 각자 다른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한 사람에게는 그릇을 비효율적으로 넣어서 고성능 식기세척기의 세척력을 극대화하지 못하는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의 핵심 역량, 더 나아가 자신의 남성성이 후려침 당하는 상황일 수 있다. 전쟁과 심술은 바로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발견하기도 전에 내가 무엇을 찾는지 알았다. 나 자신의 욕망에 몰두해 있었다. 그건 언제나 위험하다.

지적 조급함은 물에 빠진 사람이 칼이라도 붙잡으려 하는 것처럼 나쁜 아이디어라도 붙잡으려고 한다. 베유는 우리의 모든 실수가 "생각이 아이디어를 너무 성급하게 붙잡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며, 이렇게 일찍 차단되면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아이디어를 숙고하는 것보다 포장하는 데 더 관심이 많고, 아이디어가 충분히 무르익기도 전에 세상에 내보낸다.

머독은 그날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불안과 분노를 느끼며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하늘을 나는 황조롱이 한 마리가 보였다. 머독은 이렇게 말한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바뀐다. 자만심에 상처 입은 음울한 자신은 사라졌다. 이제 황조롱이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시 내 생각으로 돌아왔을 때, 다른 문제들은 전만큼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16

모든 부주의는 이기심의 한 형태다. 우리는 그게 무엇이든 간에 자기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나머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보다 더 흥미롭고 중요하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들이 그토록 부주의한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억눌려 있고, 정체되어 있다. 관심은 우리 삶의 피다. 피는 잘 돌아야 한다. 관심을 썩히는 것은 곧 삶을 죽이는 것이다.

가끔은 시작보다 끝이 더 많은 것을 드러낸다. 나는 시몬 베유 역시 그러했다고 생각한다. 베유의 마지막 몇 달은 마치 빨리감기한 한 편의 영화 같았다.

시몬 베유의 삶은 커피 스푼이 아닌 기차표로 측정되었다(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의 시에 "나는 내 삶을 커피 스푼으로 측정해왔다"라는 구절이 있다-옮긴이).

사람들은 셜록 홈스가 경고한 일종의 인지적 함정에 빠져 있었다. "필수적인 것은 무관한 것 밑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속도는 주의의 적이다.

지하에서 지상의 삶으로 이행하는 것은 언제나 까다롭다. 방향 감각을 잃고 내가 어디 있는지를 알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며, 기이하게도 내가 누구인지도 함께 헷갈린다.

베유가 구상한 돈키호테식 계획 중에는 낙하산을 타고 나치 점령지로 뛰어내린 뒤 최전선에서 간호사로 이루어진 군대("온유함과 차가운 결단력을 모두 지닌 여성들")를 이끄는 것도 있었다.

담당의는 "굶주림으로 인한 건강 악화에서 비롯된 심부전"이 사망 원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베유의 장례식에는 일곱 명이 참석했다. 주로 친구들과 프랑스자유운동의 동료들이었다. 장례식을 집전하기로 한 목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부주의로 기차를 놓쳤던 것이다. 아마 너그러운 마음을 가졌던 시몬 베유는 분명히 용서해주었을 것이다.

관심은 질보다 양을 파악하기가 더 쉽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 가장 쉬운 것을 평가한다.

땅에 베유의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가 놓여 있다. 전에 본 것과 같은 사진이다. 제멋대로 휘어진 머리카락과 두꺼운 안경, 다 알고 있는 듯한 두 눈. 하지만 무언가 다른 것, 내가 전에는 보지 못한 것이 또 있다. 살짝 휘어져 미소의 기미를 언뜻 내비치는 입술이다. 무엇으로 이 미소의 기미를 설명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어쩌면 사진사가 농담을 했거나, 일류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전갈을 막 받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통스러운 두통과 천재 오빠와 다가오는 전쟁을 잠시나마 잊고 미소 짓는 것이었을지도 모른

우리의 자동차 키가, 지갑이, 마음이 그저 잘못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한 물건과 한때 소유했던 물건 사이를 나누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결코 가파르지 않은 것은 아닌 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비존재는 우리를 겁먹게 한다. 인지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상실’은 짧지만 위협적인 단어다. 명사계의 나폴레옹이다. 그 앞에 ‘몸무게’라는 단어가 붙지 않는 이상 거의 언제나 부정적인 뜻을 갖는다.

종이에 쓰인 생각은 가장 주의를 기울인 상태의 마음을 기록한 것이다. 이렇게 몰입한 순간은 하이가의 모래 개처럼 쉽게 부서지며, 한번 잃어버리면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 잃어버린 다이아몬드를 되찾는 것이 잃어버린 생각을 되찾는 것보다 더 쉽다.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반드시!) 내 공책을 찾아서 과거를 복구해야만 한다.

종류와 상관없이 어떤 것을 더 좋아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나를 쓰리게 하는 건 공책의 부재만이 아니다. 공책을 잃어버린 행동, 그 부주의가 보여주는 나의 모습도 마음을 쓰리게 한다. 좋을 게 없어. 나는 결론 내린다.(만성적으로 물건을 잃어버리는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가 있다. 루저loser. 가장 잔인한 꼬리표다.) 작가 메리 카는 최근 공책 한 권을 잃어버렸지만 디오니소스라는 이름의 섹시한 그리스인과 "데킬라에 적셔진 그의 자유분방한 심장"21이 모는 보트 위에서 잃어버리는 센스는 있었다.

나는 그 공책을 정말 찾고 싶은 게 아니다. 그 공책을 소유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욕망에 사로잡혔고, 욕망은 관심과 양립할 수 없다. 무언가를 욕망하는 것은 곧 거기에서 얻고자 하는 바가 있다는 뜻인데, 바로 그 상태가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문제는 늘 우리가 너무 적극적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수색에 나서고 싶어 한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계속 책을 읽어나간다. 베유가 말을 이어나간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대상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다. 오로지 간접적인 방법만이 효과가 있다. 우선 한 발짝 물러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체념 앞에 굴복했다. 체념은 변장한 절망이다.

주의를 기울이는 삶은 위험하다. 결과가 늘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관심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아니 어디로 이끌기나 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베유가 주창한 것과 같은 순수한 관심에는 친구에게 좋은 인상을 주거나 출세하고 싶은 것과 같은 외부적 동기가 묻어 있지 않다. 무언가에 온전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그의 노력이 눈에 보이는 결실을 맺지 못한다 할지라도" 진전을 이룬 것이라고, 베유는 말한다.

잃어버린 원고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시몬 베유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우리가 가장 귀중한 선물을 얻는 것은 그것을 찾아 나설 때가 아니라 그것을 기다릴 때다." 베유의 말이 옳다. 나는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기다린다. 내가 상상한 것보다 더욱 기꺼이, 더욱 끈기 있게. 기다림은 그 자체가 보상이므로.

인도에서는 그 무엇도 마지막까지 끝난 것이 아니며, 심지어 마지막도 끝이 아니다. 모든 결말은 하나의 시작이다. 모든 피날레에는 암묵적인투 비 컨티뉴드to be continued가 들어 있다.

1은 인상적인 숫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곳은 0의 개념을 발명한 나라1이자, 무한함을 논하는 인도다. 숫자는 무엇인가? 마야maya(산스크리트어로 환영이라는 뜻-옮긴이)이자 환영이다.

간디는 목표보다 수단이 더 중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싸우느냐가 중요하다.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그곳에 어떻게 가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비행기를 타지 않을 것이다. 기차를 탈 것이다. 요가 익스프레스를 탈 것이다.

우리는 보도 위에 천을 깔고 앉아 있는 몇 명의 사람들 옆을 지난다. 여섯 살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책을 보고 있다. 아이는 맨발이고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 나이가 많지 않은 성인 두 사람이 책을 가리키며 힌디어로 아이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다.
"개인 지도 교사예요." 카일라스가 설명해준다. 여자아이는 거지다. 아이는 한 번도 학교에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 자원봉사자들이 아이에게 학교를 가져다주었다. 간디는 이 이타적인 행동에 찬성했을 것이다. 이게 인도의 매력이다. 이 나라를 막 비난하려던 참에 뜻밖의 친절함을 만나게 되고, 신뢰는 다시 회복된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다.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요." 카일라스가 말한다. "사람은 똑같이 많을 거예요. 업무 시간이잖아요."
나는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인도잖아요." 마치 이 말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는 듯 카일라스가 말한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다.
우리는 열차에 몸을 욱여넣는다. 런던 여행 이후 듣지 못했던 쾌활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열차와 플랫폼 사이 간격을 조심하세요." 인도에서 그 간격은 더 넓고 더 위험하다. 정신 수양이 두 배로 요구된다.

내가 만난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간디는 지나친 속도를 염려했다.

"내 의무를 다하지 않고 인도로 돌아가는 건 비겁한 행동이다. 내가 당한 고난은 표면적인 것, 유색 인종에 대한 편견이라는 고질병의 한 증상일 뿐이다. 할 수 있는 한, 그 질병을 뿌리 뽑으려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고난을 겪어야 한다." 그 순간 간디는 나아갈 길을 선택했다. 돌부리에 걸리기도 하고 방향을 틀기도 하고 가끔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간디는 평생 그 길을 걸었다.

수십 년 후, 미국인 선교사 존 모트John Mott가 간디에게 평생 가장 창조적이었던 경험이 무엇이었냐고 묻자, 간디는 남아공에서 겪었던 기차 일화를 들려주었다. 조용한 결의의 순간을 창조와 동일한 것으로 본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악에 맞서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 모든 폭력은 상상력의 실패를 나타낸다. 비폭력은 창조성을 요구한다. 간디는 언제나 새롭고 혁신적으로 싸우는 방법을 찾아 헤맸다.

"전 절대로 길을 한 사람한테만 물어보지 않아요." 카일라스가 말한다. "언제나 두 명, 아니면 세 명한테 물어보죠." 인도에서 살아가는 데에는 끝없는 삼각법이 필요하다. 훌륭한 실험가였던 간디는 그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잘 알았다.

간디는 레몬과 꿀을 넣은 물 한 잔과 매일 마시는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간디의 식단은 간소하고 건강했다. 그는 오래 살고 싶어 했고(본인이 직접 125세까지 살고 싶다고 말했다) 자기 몸을 깨끗하게 정화하고 싶어 했다. 싸움하는 사람이 강해야만 싸움도 효과를 내는 법이다.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젖은 성냥개비로 어떻게 나무에 불을 붙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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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인 핀네는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칼을 무서워할까? 칼은 인류 최초의 도구고 인간은 250만 년에 걸쳐 칼에 익숙해졌는데도, 여전히 어떤 인간들은 인류가 나무에서 내려올 수 있게 해준 이 고마운 도구의 미덕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냥, 집, 농사, 음식, 방어. 칼은 생명을 앗아갔지만 그만큼 새 생명을 창조했다.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를 잃는 법. 이걸 이해하고 인류가 이뤄낸 결과와 그 기원을 수용한 자들만이 칼을 사랑할 수 있었다. 공포와 사랑. 역시나 동전의 양면이다.

그리고 무서웠다. 다행히도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로, 불행히도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고 그는 원래 이렇게 행복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라켈을 잃어버릴까 봐 무서웠다. 라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데 왜 지난밤 꿈에서는 그녀에게서 도망쳤을까?

좋은 사진이다. 같은 사진을 수많은 사람이 소유한다는 점, 집에 온 손님 중에 몇이 그 사진이 좋은 사진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이케아에서 샀다는 이유로 깔볼 수 있다는 점만 거슬리지 않는다면야 이런 액자를 걸어도 괜찮지 않나?

그는 주로 진지함과 재미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은 문양이 있는 넥타이를 골랐다.

스톨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맨해튼 사진 옆 책장을 보았다. "소설이군."
"네, 저도 봤어요." 해리가 말했다. 스톨레는 살인자들은 책을 읽지 않거나 읽더라도 논픽션만 읽는다는 가설을 세운 사람이다.

"외상을 입은 유형의 살인자에게는 앞의 일곱 가지 유형처럼 어떤 규정된 성격이 없어. 이 마지막 유형에서, 아니, 이 유형에서만 디킨스나 발자크를 읽는 살인자를 만날 수 있지."

"체념이라기보다는 겁먹은 사람처럼 들려요. 자백은 체념의 한 형태잖아요. 자백하고 나면 겁먹을 게 없어야죠."

옷장도 열어봤다. 아내 옷이 커다란 옷장 네 칸을 차지한 데 비해 남편 옷은 한 곳에 몰려 있었다. 속 깊은 남편. 딸 방에는 더 밝은 색상 벽지에 직사각형들이 있었다. 사춘기에 붙인 포스터를 열아홉이 된 최근에야 떼어내고 남은 흔적 같았다. 벽에 작은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리켄배커 전기기타를 목에 맨 청년의 사진이었다.

그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좋았다. 그녀의 목소리만큼 깊지 않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밝고 경쾌한 웃음소리.

해리는 자기도 알코올의존자였다면서 파티에서 콜라를 마시는 걸 보고 짐작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날 밤 그를 취하게 하는 건 그녀의 웃음이라고, 낭랑하고 진실하고 해맑은 그 웃음이라고, 오로지 그 웃음소리를 듣기 위해 기꺼이 그의 민낯을 드러내는 말들, 멍청한 말들을 하고 싶었던 거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지난 일요일에 올레그와 라켈과 셋이서 소풍을 갔다. 그러다 라켈의 손을 잡았다. 그러는 게 자연스러워서. 한참 후 라켈이 손을 뺐다. 올레그가 엄마의 새 친구와 테트리스 게임을 할 때 라켈이 음울하게 바라보는 눈길에서 해리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그녀가 떠나온 사람과 비슷한 알코올의존자가 지금 그녀 집에서 그녀의 아들과 같이 앉아 있다는 생각. 그래서 해리는 그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증명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가 몇 차례 무너지기도 했고, 서로 잠시 거리를 두거나 헤어지기도 했지만, 그들은 늘 서로에게 돌아갈 길을 찾았다. 서로에게서 웃음을 발견했으므로. 사랑, 절대적 사랑. 평생 한 번이라도 그들만의 배타적인 사랑을 경험하면, 그리고 서로 주고받는 관계라면, 엄청난 행운으로 생각해야 하는 그런 사랑이었다.

다시 그 길로 돌아갈 수 있을까? 차를 몰고 가파르고 구불구불하고 험한 길을 따라 라켈에게 가서 다시 그를 소개할 수 있을까? 그녀가 만난 적 없는 남자로 거듭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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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인 핀네는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칼을 무서워할까? 칼은 인류 최초의 도구고 인간은 250만 년에 걸쳐 칼에 익숙해졌는데도, 여전히 어떤 인간들은 인류가 나무에서 내려올 수 있게 해준 이 고마운 도구의 미덕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냥, 집, 농사, 음식, 방어. 칼은 생명을 앗아갔지만 그만큼 새 생명을 창조했다.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를 잃는 법. 이걸 이해하고 인류가 이뤄낸 결과와 그 기원을 수용한 자들만이 칼을 사랑할 수 있었다. 공포와 사랑. 역시나 동전의 양면이다.

그리고 무서웠다. 다행히도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로, 불행히도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고 그는 원래 이렇게 행복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라켈을 잃어버릴까 봐 무서웠다. 라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데 왜 지난밤 꿈에서는 그녀에게서 도망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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