왁스 캔버스와 가죽이 섞인 아름다운 내 가방에 손을 뻗어 베유의 글 모음집을 꺼낸다. "신을 사랑하기 위해 학교 공부를 올바르게 활용하는 방안에 관한 성찰"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펼친다. 특이한 제목이다.
대표적 무신론자인 알베르 카뮈는 베유를 "우리 시대의 유일한 위대한 영혼"13이라 불렀다. 카뮈는 노벨문학상을 받기 위해 스톡홀름행 비행기를 타기 전 파리에 있는 베유의 아파트에서 한 시간 동안 명상을 했다.
집중은 수축한다. 관심은 확장한다. 집중은 사람을 피로하게 한다. 관심은 피로를 회복시켜준다. 집중은 생각을 한곳에 모으는 것이다. 관심은 생각을 유보하는 것이다. 베유는 이렇게 쓰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생각은 텅 빈 채로 기다려야 하고 그 무엇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저 자신의 생각에 침투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이 문장이 그리 당혹스럽지 않다면, 베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문제는 수동성의 결여에서 생겨난다"라고 선언한다.
베유는 진정한 관심이란 일종의 기다림과 같다고 믿었다. 베유에게 이 두 가지는 사실상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가장 귀중한 선물을 얻는 것은 그것을 찾아 나설 때가 아니라 그것을 기다릴 때다." 관심의 반대말은 산만함이 아니라 조급함이다.
우리는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한편으로 이런 정신적 분류는 반드시 필요하다. 분류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윌리엄 제임스가 말한 것처럼 "부산스럽게 만발하는 혼란 상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너무 빨리, 너무 충동적으로 분류 작업을 하면 귀중한 보석을 놓칠 위험이 있다.
우리가 종종 너무 서둘러 판단을 내리듯이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는 데도 너무 성급하다. 어떤 대상이나 생각에 너무 빨리 혹하고, 그 대가를 치른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아름다움이나 친절한 행동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유는 알지 못하는 상태,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최대한 오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베유가 살던 시대에는, 심지어 오늘날에는 더욱더 드문 것이다.
베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소하다 여길 문제에 크나큰 관심을 기울였다. 예를 들면 손 글씨 같은 것. 베유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였던 시몬 페트르망에 따르면 고등학생 때 베유는 자신의 "엉성하고 경망스러우며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손 글씨"14를 바꿔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부어오르는 손의 통증과 두통에도 불구하고 지칠 줄 모르고 주의 깊게 노력했다. 휘갈겨 쓰던 베유의 손 글씨는 "점점 경직이 풀리고 유연해졌으며, 마침내 말년에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글씨를 얻게" 되었다.
인내심은 좋은 덕목이다. 최근 연구가 보여주듯이 인내심은 자신에게도 좋다. 여러 연구가 인내심 있는 사람이 안달 내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고 건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15 인내심 있는 사람은 더 이성적으로 행동할 확률이 높다. 이들은 대처 기술도 더 뛰어나다.
인내와 관용이라는 뜻을 동시에 갖는다. 무엇에 대한 관용일까? 물론 고통에 대한 관용이지만, 부족한 자신에 대한 관용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참을성을 보이지 못하는 사람이 스스로에게 참을성을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내 마음은 매우 계산적이다. 언제나 무언가를, 이왕이면 많이 원한다. 엄청난 아이디어, 기나긴 휴식, 푸짐한 아침 식사.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멀쩡해 보이는 알코올 중독자처럼 나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내 조급함을 숨길 수 있다. 대개는 그렇다. 가끔은 사람들이 나를 꿰뚫어 보기도 한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만난 네덜란드인 메시아처럼.
모든 말다툼은 오해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범주의 오류’에서 비롯된다. 양측이 같은 문제를 다르게 보는 것이 아니다. 양측에게는 각자 다른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한 사람에게는 그릇을 비효율적으로 넣어서 고성능 식기세척기의 세척력을 극대화하지 못하는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의 핵심 역량, 더 나아가 자신의 남성성이 후려침 당하는 상황일 수 있다. 전쟁과 심술은 바로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발견하기도 전에 내가 무엇을 찾는지 알았다. 나 자신의 욕망에 몰두해 있었다. 그건 언제나 위험하다.
지적 조급함은 물에 빠진 사람이 칼이라도 붙잡으려 하는 것처럼 나쁜 아이디어라도 붙잡으려고 한다. 베유는 우리의 모든 실수가 "생각이 아이디어를 너무 성급하게 붙잡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며, 이렇게 일찍 차단되면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아이디어를 숙고하는 것보다 포장하는 데 더 관심이 많고, 아이디어가 충분히 무르익기도 전에 세상에 내보낸다.
머독은 그날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불안과 분노를 느끼며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하늘을 나는 황조롱이 한 마리가 보였다. 머독은 이렇게 말한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바뀐다. 자만심에 상처 입은 음울한 자신은 사라졌다. 이제 황조롱이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시 내 생각으로 돌아왔을 때, 다른 문제들은 전만큼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16
모든 부주의는 이기심의 한 형태다. 우리는 그게 무엇이든 간에 자기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나머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보다 더 흥미롭고 중요하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들이 그토록 부주의한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억눌려 있고, 정체되어 있다. 관심은 우리 삶의 피다. 피는 잘 돌아야 한다. 관심을 썩히는 것은 곧 삶을 죽이는 것이다.
가끔은 시작보다 끝이 더 많은 것을 드러낸다. 나는 시몬 베유 역시 그러했다고 생각한다. 베유의 마지막 몇 달은 마치 빨리감기한 한 편의 영화 같았다.
시몬 베유의 삶은 커피 스푼이 아닌 기차표로 측정되었다(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의 시에 "나는 내 삶을 커피 스푼으로 측정해왔다"라는 구절이 있다-옮긴이).
사람들은 셜록 홈스가 경고한 일종의 인지적 함정에 빠져 있었다. "필수적인 것은 무관한 것 밑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지하에서 지상의 삶으로 이행하는 것은 언제나 까다롭다. 방향 감각을 잃고 내가 어디 있는지를 알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며, 기이하게도 내가 누구인지도 함께 헷갈린다.
베유가 구상한 돈키호테식 계획 중에는 낙하산을 타고 나치 점령지로 뛰어내린 뒤 최전선에서 간호사로 이루어진 군대("온유함과 차가운 결단력을 모두 지닌 여성들")를 이끄는 것도 있었다.
담당의는 "굶주림으로 인한 건강 악화에서 비롯된 심부전"이 사망 원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베유의 장례식에는 일곱 명이 참석했다. 주로 친구들과 프랑스자유운동의 동료들이었다. 장례식을 집전하기로 한 목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부주의로 기차를 놓쳤던 것이다. 아마 너그러운 마음을 가졌던 시몬 베유는 분명히 용서해주었을 것이다.
관심은 질보다 양을 파악하기가 더 쉽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 가장 쉬운 것을 평가한다.
땅에 베유의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가 놓여 있다. 전에 본 것과 같은 사진이다. 제멋대로 휘어진 머리카락과 두꺼운 안경, 다 알고 있는 듯한 두 눈. 하지만 무언가 다른 것, 내가 전에는 보지 못한 것이 또 있다. 살짝 휘어져 미소의 기미를 언뜻 내비치는 입술이다. 무엇으로 이 미소의 기미를 설명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어쩌면 사진사가 농담을 했거나, 일류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전갈을 막 받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통스러운 두통과 천재 오빠와 다가오는 전쟁을 잠시나마 잊고 미소 짓는 것이었을지도 모른
우리의 자동차 키가, 지갑이, 마음이 그저 잘못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한 물건과 한때 소유했던 물건 사이를 나누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결코 가파르지 않은 것은 아닌 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비존재는 우리를 겁먹게 한다. 인지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상실’은 짧지만 위협적인 단어다. 명사계의 나폴레옹이다. 그 앞에 ‘몸무게’라는 단어가 붙지 않는 이상 거의 언제나 부정적인 뜻을 갖는다.
종이에 쓰인 생각은 가장 주의를 기울인 상태의 마음을 기록한 것이다. 이렇게 몰입한 순간은 하이가의 모래 개처럼 쉽게 부서지며, 한번 잃어버리면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 잃어버린 다이아몬드를 되찾는 것이 잃어버린 생각을 되찾는 것보다 더 쉽다.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반드시!) 내 공책을 찾아서 과거를 복구해야만 한다.
종류와 상관없이 어떤 것을 더 좋아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나를 쓰리게 하는 건 공책의 부재만이 아니다. 공책을 잃어버린 행동, 그 부주의가 보여주는 나의 모습도 마음을 쓰리게 한다. 좋을 게 없어. 나는 결론 내린다.(만성적으로 물건을 잃어버리는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가 있다. 루저loser. 가장 잔인한 꼬리표다.) 작가 메리 카는 최근 공책 한 권을 잃어버렸지만 디오니소스라는 이름의 섹시한 그리스인과 "데킬라에 적셔진 그의 자유분방한 심장"21이 모는 보트 위에서 잃어버리는 센스는 있었다.
나는 그 공책을 정말 찾고 싶은 게 아니다. 그 공책을 소유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욕망에 사로잡혔고, 욕망은 관심과 양립할 수 없다. 무언가를 욕망하는 것은 곧 거기에서 얻고자 하는 바가 있다는 뜻인데, 바로 그 상태가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문제는 늘 우리가 너무 적극적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수색에 나서고 싶어 한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계속 책을 읽어나간다. 베유가 말을 이어나간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대상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다. 오로지 간접적인 방법만이 효과가 있다. 우선 한 발짝 물러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체념 앞에 굴복했다. 체념은 변장한 절망이다.
주의를 기울이는 삶은 위험하다. 결과가 늘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관심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아니 어디로 이끌기나 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베유가 주창한 것과 같은 순수한 관심에는 친구에게 좋은 인상을 주거나 출세하고 싶은 것과 같은 외부적 동기가 묻어 있지 않다. 무언가에 온전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그의 노력이 눈에 보이는 결실을 맺지 못한다 할지라도" 진전을 이룬 것이라고, 베유는 말한다.
잃어버린 원고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시몬 베유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우리가 가장 귀중한 선물을 얻는 것은 그것을 찾아 나설 때가 아니라 그것을 기다릴 때다." 베유의 말이 옳다. 나는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기다린다. 내가 상상한 것보다 더욱 기꺼이, 더욱 끈기 있게. 기다림은 그 자체가 보상이므로.
인도에서는 그 무엇도 마지막까지 끝난 것이 아니며, 심지어 마지막도 끝이 아니다. 모든 결말은 하나의 시작이다. 모든 피날레에는 암묵적인투 비 컨티뉴드to be continued가 들어 있다.
1은 인상적인 숫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곳은 0의 개념을 발명한 나라1이자, 무한함을 논하는 인도다. 숫자는 무엇인가? 마야maya(산스크리트어로 환영이라는 뜻-옮긴이)이자 환영이다.
간디는 목표보다 수단이 더 중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싸우느냐가 중요하다.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그곳에 어떻게 가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비행기를 타지 않을 것이다. 기차를 탈 것이다. 요가 익스프레스를 탈 것이다.
우리는 보도 위에 천을 깔고 앉아 있는 몇 명의 사람들 옆을 지난다. 여섯 살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책을 보고 있다. 아이는 맨발이고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 나이가 많지 않은 성인 두 사람이 책을 가리키며 힌디어로 아이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다. "개인 지도 교사예요." 카일라스가 설명해준다. 여자아이는 거지다. 아이는 한 번도 학교에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 자원봉사자들이 아이에게 학교를 가져다주었다. 간디는 이 이타적인 행동에 찬성했을 것이다. 이게 인도의 매력이다. 이 나라를 막 비난하려던 참에 뜻밖의 친절함을 만나게 되고, 신뢰는 다시 회복된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다.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요." 카일라스가 말한다. "사람은 똑같이 많을 거예요. 업무 시간이잖아요." 나는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인도잖아요." 마치 이 말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는 듯 카일라스가 말한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다. 우리는 열차에 몸을 욱여넣는다. 런던 여행 이후 듣지 못했던 쾌활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열차와 플랫폼 사이 간격을 조심하세요." 인도에서 그 간격은 더 넓고 더 위험하다. 정신 수양이 두 배로 요구된다.
내가 만난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간디는 지나친 속도를 염려했다.
"내 의무를 다하지 않고 인도로 돌아가는 건 비겁한 행동이다. 내가 당한 고난은 표면적인 것, 유색 인종에 대한 편견이라는 고질병의 한 증상일 뿐이다. 할 수 있는 한, 그 질병을 뿌리 뽑으려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고난을 겪어야 한다." 그 순간 간디는 나아갈 길을 선택했다. 돌부리에 걸리기도 하고 방향을 틀기도 하고 가끔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간디는 평생 그 길을 걸었다.
수십 년 후, 미국인 선교사 존 모트John Mott가 간디에게 평생 가장 창조적이었던 경험이 무엇이었냐고 묻자, 간디는 남아공에서 겪었던 기차 일화를 들려주었다. 조용한 결의의 순간을 창조와 동일한 것으로 본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악에 맞서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 모든 폭력은 상상력의 실패를 나타낸다. 비폭력은 창조성을 요구한다. 간디는 언제나 새롭고 혁신적으로 싸우는 방법을 찾아 헤맸다.
"전 절대로 길을 한 사람한테만 물어보지 않아요." 카일라스가 말한다. "언제나 두 명, 아니면 세 명한테 물어보죠." 인도에서 살아가는 데에는 끝없는 삼각법이 필요하다. 훌륭한 실험가였던 간디는 그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잘 알았다.
간디는 레몬과 꿀을 넣은 물 한 잔과 매일 마시는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간디의 식단은 간소하고 건강했다. 그는 오래 살고 싶어 했고(본인이 직접 125세까지 살고 싶다고 말했다) 자기 몸을 깨끗하게 정화하고 싶어 했다. 싸움하는 사람이 강해야만 싸움도 효과를 내는 법이다.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젖은 성냥개비로 어떻게 나무에 불을 붙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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