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의 집중력 문제에 관해 사람들은 보통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인을 선뜻 인정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똑같은 문제를 겪을 때,
지난 20년간 우리는 지나치게 단순한 이야기에 이끌렸다.
바로 아이들의 집중력 문제가 주로 생물학적 장애의 결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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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얼릿은 피아노 조율사가 젊은 시절에 결혼했다. 벨은 그가 늙었을 때 결혼했다.
사실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조율사는 바이얼릿을 아내로 선택하면서 벨을 거부했고, 두 번째 결혼이 알려졌을 때 모두 그 사실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뭐, 어쨌든 망가진 꼴로나마 그 남자를 차지하기는 했군." 이웃의 한 농부는 그렇게 한마디 던졌는데, 무슨 앙심을 품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본 대로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 생각도 비슷했는데, 물론 입을 열었다면 표현은 다 달랐을 것이다.

아니, 언젠가 장차 자기 집을 갖게 될 바이얼릿의 미래를 더 좋아한 거라고 그녀는 닭장에 대고 신랄하게 혼잣말을 했다.

벨은 나중에 피아노 조율사를 안내하며 함께 걸어가는 그녀를 볼 때마다, 바이얼릿이 그가 하는 일을 죄다 돌봐주고 그에게 삶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런 마음이 들곤 했다. 뭐, 그녀도 그렇게 해줄 수 있었겠지만.

조율사는 여러 사람의 익숙한 손을 잡고 흔들며 마음의 눈으로 첫 번째 아내가 묘사해준 얼굴을 보았다. 1951년과 마찬가지로 한여름이라 해는 이마와 뺨, 그리고 묵직한 예복을 뚫고 몸까지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그와 바이얼릿은 아이를 갖고 싶어 했지만 낳지는 못했다. 남편이 마누라 자식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곤 했는데 벨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약이 올랐다. 자신이라면 그에게 자식을 낳아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점을 확신했다.

그 시절 조율사는 맹인이었기 때문에 구호금을 받았으며, 이따금씩 일이 들어오는 대로 등받이 없는 의자나 일반 의자의 해초를 엮은 좌판을 배운 기술로 수리하거나, 이런저런 행사에서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사준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하지만 바이얼릿은 결혼과 함께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오언 드롬굴드는 바이올린 연주를 즐겼으며 돈이 생기든 안 생기든 어디에서나 연주했다. 하지만 바이얼릿은 돈에 예민했다.

"앵초는 화려하지 않아." 바이얼릿이 말했다. "짚이나 시골 버터 같고 한가운데 색깔 있는 점이 있을 뿐이야." 그러면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고, 알게 되었다. 연기처럼 연한 푸른빛, 그녀는 산을 두고는 그렇게 말했다

앵초의 한가운데 점은 빨강이라기보다는 오렌지색. 그는 연기도 그녀가 말해준 것만을 알았다. 하지만 소리는 구별할 수 있었다. 그는 소리 때문에 빨강이 뭔지 안다고 우겼다. 오렌지는 맛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색을 안다고 우겼고. 그는 에소 간판에서 빨강을, 앵초에서 오렌지색 점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 거부를 당했을 때부터 벨은 질투를 떨쳐버릴 수 없었으며, 바이얼릿과는 달리 외모를 내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분개했고, 실명이라는 벌罰이 그녀에게도 벌이 된 것 같았기 때문에 괴로웠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이 감수해야 하는 어둠을 벌이라고 하지 달리 뭐라고 부르겠는가? 그녀의 아름다움에 어둠이 드리운 것이 벌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벌 받을 죄는 짓지 않았으니 그들은, 그녀와 오언 드롬굴드는 멋진 부부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비로운 행동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일은.

세월이 흐르면서 벽시계와 손목시계는 배터리를 갈아주는 일밖에 남지 않았고, 그에 따라 선물 쪽 사업이 확장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도 읍에는 그녀가 바이얼릿에게 빼앗긴 남자에게 밀리지 않을 만한 남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실망감에 젖은 삶은 오래전에 벨의 일부가 되었고, 조카들이 보기에 그것은 그녀의 전부였다. 그런 실망감은 벨의 눈에 담겨 있었으며, 어떤 사람들이 눈여겨보았듯이 그 때문에 그녀의 아름다움이 더 짙어진다는 느낌마저 있었다.

벨은 아내가 되었을 때 닭을 가져가지 않았다. 닭은 이제 됐다고 말했다. 나중에는 그것을 후회했는데, 집에서 바이얼릿이 하던 일을 할 때마다 자신이 그녀가 이미 다 한 일을 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바이얼릿이 쓰던 도마에, 또 칼에 비치는 빛을 보며 스튜에 쓸 고기를 썰 때 그녀는 뒤쫓는 사람이 된 느낌을 받았다. 당근을 깍둑썰기 할 때는 바이얼릿은 얇게 썰었기를 바랐다.

늘 이렇게 둘로 나뉘었다. 유지할 것, 바꿀 것. 꽃밭을 돌보아주면 바이얼릿에게 굴복하는 걸까? 프라이팬과 나무 숟가락 세 개를 버리면 속 좁게 구는 걸까? 벨은 무엇을 하든 나중에는 자신을 의심하게 되었다. 바이얼릿의 땅딸막한 몸, 결국에는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 얼굴이 통통해지면서 작아진 눈이 짜증스럽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개와 텔레비전이 있어도, 집에 느는 살림과 없애는 살림이 있어도, 그녀를 사랑한다는 무척이나 신실한 다짐을 받아도, 착하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벨에게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남편의 팔을 잡아주었던 여자, 피아노를 살살 달래 되살아나게 하는 남편을 여러 집으로 방으로 안내한 여자가 여전히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있었다

성가신 유령, 불확실하게 존재하는 어떤 용서 없는 망령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일부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 안에 남겨진 것 같았다.

벨은 부러 이 모든 것을 기억해냈다. 등대의 찬장에서 꺼낸 존 제임슨 위스키 병을 보았고 민박집에서 들리던 목소리들을 들었다. 그는 이해했고, 그녀를 편안하게 해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애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바이얼릿이라면 어느 잎 색깔이 바뀌려고 하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바이얼릿이라면 썰물이 나간다거나 밀물이 들어온다고 전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너무 늦게 벨은 그것을 깨달았다. 바이얼릿은 이 맹인의 눈이었다. 바이얼릿은 그녀에게 숨 쉴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오언 드롬굴드는 나무껍질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는 나뭇잎의 윤곽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었다. 가시금작화 가시와 검은딸기 가시를 구별할 수 있었다. 노래로 새를 구별했고, 짖는 소리로 개를 구별했고, 다리에 닿는 감촉으로 고양이를 구별했다. 거기에 묘석의 글자, 오르간의 음전音栓, 그의 바이올린이 있었다. 그는 빨강을, 호랑가시나무와 섬개야광나무의 열매를 볼 수 있었다. 라벤더와 타임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을 그에게서 빼앗을 수는 없었다. 사실 하룻밤 새에 부엌 손잡이의 색깔이 바래버렸다 해도 상관없었다. 부엌의 자기 전등갓에 전에 들어보지 못한 금이 가 있다 해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꿈처럼 연약한 것이 입은 피해였다.

그 아내는 파리도 못 죽일 사람이었고 질투의 대상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전에 거기 있던 행복에 시달리고, 전에 거기 있던 소박함의 도전을 받는 것은 새 아내에게는 당연히 힘든 일이었다

그는 지금껏 두 여자에게 자신을 내맡겼다. 첫 번째 아내에게서 자신을 거두어들인 적이 없었고, 두 번째 아내에게서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결국 피아노가 있는 집마다 그 나름의 모순이 생겨났다. 늙은 퍼틸 부인이 찬 진주는 오팔이고, 킬리아스에 있는 문방구상의 창백한 피부에는 주근깨가 있고, 오그힐 위의 두 줄로 늘어선 떡갈나무가 사실은 너도밤나무라고? "아무렴, 아무렴." 오언 드롬굴드는 동의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공정했기 때문이다. 벨이 자기주장을 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었고, 그런 주장에 따라 피해를 입거나 파괴당하는 뭔가가 생기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늘 이기는 법이니 결국에는 벨이 이길 터였다. 그 또한 공정해 보였으니, 바이얼릿은 처음에 이겨 더 나은 시절을 누렸기 때문이다

필립이 문제가 아니다, 마지는 생각했다. 만일 필립이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쓰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결혼 자체였다. 그녀는 친구의 결혼 생활에 경악한 것이다.

"아이들이 딸이었으면 좋겠어." 프란체스카가 토라진 목소리로 불평했다. "요즘엔 그런 생각을 자주 해."

아침 내내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돌본다면서 자기 아이들은 오후 내내 내팽개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당신에게 뭔가 부탁할 일이 한 가지 있다면," 마지막 가시돋힌 말이 던져졌다. "그건 아이들을 돌보는 거야, 프란체스카. 당신은 원하기만 하면 집안에서 어떤 도움이든 받을 수 있어. 내가 보기에는 부족한 게 별로 없을 것 같아." 앤디 코니그의 비디오 문제가 다시 나왔다. 제이슨은 그때 뻔뻔스럽게도 ‘사회 연구’ 과목 공부를 위해 본 것이라고 우겼다. 앤디 코니그의 비디오는 비디오플레이어에 꽂힌 채 빠지지 않는 바람에 여자가 수술실에서 옷 벗는 시퀀스가 끝도 없이 되풀이되지 않았다면 들키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은 거기에 뭐가 있는지 보지도 않았잖아"라는 비난이 또다시 되풀이되었으며, 물론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 얘기가 끝나자 마지막으로 이런 말이 따라나왔다. 이제 이 일은 잊을 거다. 그는 골프 가방을 차에 싣고 모트레이크 쓰레기장으로 갈 거다. 아이들은 30일간 텔레비전을 보지 못할 거고 사탕, 케이크, 과자도 없을 거다. "당신이 그걸 존중해주기를 바라, 프란체스카." 언쟁이 가라앉자 그녀는 코를 훌쩍여 마지막 눈물을 거두어들였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마지가 아까 라트로타에서 보았던, 여름옷을 입은 한 쌍이 이런 매물들 사이에서 소곤거리고 있었다. 다른 누군가의 아내와 함께 있는 남자, 다른 누군가의 남편과 함께 있는 여자. 마지는 즉시 알 수 있었다. "물론이죠." 둘러보아도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그들이 아무것도 사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은 거의 물건을 사지 않았다. "어머, 저거 예쁘지 않아?" 젊은 여자는 이제 액자에 담긴 단지 뚜껑에 마음을 빼앗겨 소곤거렸다 ? 1868년 윔블던의 라이플 시합이 천연색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언젠가 프란체스카는 그 남자와 결혼하기로 한 잘못된 판단 때문에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골프 가방을 둘러싼 소동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런 직감이 확인되었다고 느꼈다. 결혼 생활은 계속 나빠질 테고, 두 어린아이의 짓궂은 장난을 둘러싼 소동과 말다툼이 다른 모든 것에 관한 소동과 말다툼으로 번질 것이고, 편협함이 잔뜩 쌓이고, 존중이 모두 사라지고, 그와 더불어 한때 사랑처럼 보였던 것도 사라질 터였

"다시 들러주세요." 그녀는 단지 뚜껑을 사지 않고 나가는 여름옷 입은 남녀에게 권했다.
"고맙습니다." 남자가 말했고 여자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는데, 어쩌면 고맙다는 몸짓인지도 몰랐다.

그는 왜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지 의아해하다가 체면 때문임을 깨달았다

"마누라가 바람난 남편은 아무도 존중하지 않아."

그녀는 필립도 이렇게 느낀다고, 흐르는 시간 같은 평범한 것이 그가 지금 경험하는 강렬한 감정을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있다고 짐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이어 그들은 싸웠다. 그때까지 그들을 지배하던 고요는 곧 박살이 나고 아이들은 잠에서 깨 높아진 부모의 목소리를 들었다. 몰래, 은밀하게, 비열하게, 신뢰할 수 없게, 불명예스럽게, 천하게. 이런 말은 과거에는 한 번도 프란체스카를 묘사한 적이 없었지만 아침 빛이 찾아오기 전에 빠짐없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나온 모든 말에 장식을 보태듯 마지의 배신도 거론되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이 전혀 없었음에도 생긋생긋 웃으며 공모했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옷을 입었을 때 용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용서는 나중에 찾아왔다.

프란체스카는 대답하지 않았고 마지는 접시의 생선을 쿡쿡 찔렀지만 이제는 먹고 싶지 않았다. 어떤 막연한 것이 의식 속에서 끈질기게 맴을 돌고 있었다. 어떤 진실, 전에는 몰랐고 지금도 알지 못하지만 흐릿하게 느끼고는 있는 진실이었다.

자존심을 지키는 것은 모욕을 당한 남편의 당연한 몫이었다.

모욕을 당한 남편, 그렇게 상처 입고 괴로움에 시달리는 남편이 어떻게 배신한 친구까지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시간이 좀 흐르면." 그녀는 입을 열었지만 말을 하면서도 시간이 흘러도 달라질 것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간은 그냥 흘러갈 것이고, 그러는 동안에도 프란체스카의 죄책감은 여전히 그대로일 것이다. 그녀는 언제까지나 마지의 이런 희생을 빚으로 여길 것이다. 그들은 필립을 속이지 않을 것이다. 프란체스카는 두 번 다시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친구들이 몰래 만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고, 연인들의 기만보다 더 지저분하다고 말할 것이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프란체스카가 말했다. "필립의 말에도 일리는 있어. 너한테도 그게 보인다고 말해줘, 마지."
"아 그럼, 보이지." 그녀는 얼른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전에, 모든 너그러움이 사라지기 전에 그렇게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또 자신이 그렇게 인정했다는 사실을 프란체스카가 언젠가 남편에게 전할 것임을 알았다. 프란체스카는 프란체스카였으니까. 진실을 말하고 기만에는 능숙하지 못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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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느님과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마태오복음 6장 24절

이다. 보마르셰Beaumarchais"의 말마따나 "작품을 만들려면 일단 밥부터 먹어야지"라고 대꾸할 수 있겠다. 욕심 많은 사람은사유와 글쓰기 분야의 일을 당장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돈은 프랑스어 ‘주화, 메달numismatique‘의 어원인 그리스어 ‘누미스마umisma‘에는 ‘법nomos‘을 뜻하는 어근이 들어 있다―사람들사이의 의존 관계를 나타낸다. 돈은 이질적 상품들 사이의 ‘공정한 비율‘로서정의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정함과 정확함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돈은 어느 편에도 피해를 입히지 않는 노동재분배일 뿐이다. "불의를 저지르는자는 자신이 가져야 할 것보다 많이 취하고 불의를 당하는 자는 자기가 받아야할 것보다 적게 받는다." 9 평등은 넘치는 자에게서 쳐낸 것을 모자라는 자에는돌려줌으로써 최고와 최저 사이에 균형을 잡는 일이다. 10 "정의로운 것이란 어떤 이익과 손실 사이의 중간이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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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의 집중력 문제에 관해 사람들은 보통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인을 선뜻 인정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똑같은 문제를 겪을 때,
지난 20년간 우리는 지나치게 단순한 이야기에 이끌렸다.
바로 아이들의 집중력 문제가 주로 생물학적 장애의 결과라는 것이다.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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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그로서는 드물게 벅찬 감정에 휩싸여 프롤레타리아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공산주의가 온 세상에 도래할 그날에,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중화장실에 황금 변기를 설치할 거라고. 그날에 황금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테니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일단,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가장 구저분한 공간도 부르주아의 대저택 못지않게 호화로울 거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날이 오면 노동자 계급이 인간의 탐욕을 저주받을 황금에 투영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일찍이 프로이트는 황금과 항문기의 연관성을 강조한 바 있다. 사회주의는 황금의 특수성을 없애는 동시에 이 금속을 자본주의보다 더 잘 사용할 것이다. 사소하지만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해볼까. 2014년에 미국의 여성 사업가 킴 카다시안과 그녀의 남편이자 유명 래퍼인 카니예 웨스트는 로스앤젤레스 자택에 실제로 황금 변기를 설치했다. 55만 달러는 그들에게 대수롭지 않은 비용이었다. 레닌의 서약은 이루어졌다. 자신의 서약을 이런 사람들이 이뤄주기를 바라진 않았겠지만 말이다.

돈은 빤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 중 하나다.

돈은 그 자체로 당연해 보이지만 좀체 밝혀지지 않는 미스터리다. 단어에도 이 신기한 애매성이 녹아 있다. 프랑스어에서 돈argent은 오랫동안 화폐 주조에 쓰였던 금속(은)을 뜻한다.

돈은 천박하면서 고귀하고, 허구이자 현실이다. 돈이 사람을 갈라놓기도 하고 맺어주기도 한다. 돈은 너무 넘쳐나도 두렵고, 너무 모자라도 두렵다. 돈은 악을 행하는 선일 수도 있고, 선을 행하는 악일 수도 있다

역사학자들은 최초의 화폐가 기원전 3000년경 우르에서 등장했다고 본다.1 이 화폐에 새겨진 이슈타르는 다산과 죽음이라는 희한한 이원성의 여신이다.

자기 종교에 상관없이 돈은 사람을 즉각 개종시킬 수 있다.

돈은 원래 신뢰를 의미한다.

화폐는 어떤 국민이나 특정 공동체를 구체화하기 때문에 화폐의 후광에는 신성함이 깃들어 있다.

돈이 비난의 대상이 되면 옹호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돈을 옹호하면 공격하고 싶어진다.

性이 그렇듯이 돈도 너무 많은 의미로 넘쳐나면서 본질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동의어가 널리고 널렸다.(프랑스어에서 돈은 grisbi, fric, flouze, pepetes, picaillons, pognon, thune, fraiche 등이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언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돈은 창조주의 손을 벗어나 역으로 치고 들어온 창조물이라는 점에서 특히 매혹적이다. 말수 적던 자식이 성난 폭군이 되었다.

나는 행운의 여신께서 당신의 넉넉함으로 나를 품어주시리라 믿으며 오랫동안 베짱이처럼 살아왔다.

이 세상에서 돈이 제공하는 유일하게 정말로 귀한 값어치는 시간, 마르지 않는 시간의 풍부함이다.

나는 늘 밥벌이와 살아야 할 이유를 구분해왔다. 때로는 그 둘이 일치했지만 그래도 먹고살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행복한 젊은 날이 오래도 갔다. 그 시절에는 필요와 과잉 사이가 아니라 필요와 본질 사이에서 움직였다.

나는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서, 결핍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면서, 사회가 돈을 중심에 갖다놓으면서 돈이 근심거리가 된다고 곧잘 생각한다.

사람이 늙으면 계산의 이치, 잔금의 이치로 기울게 된다. 모든 것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가고 살날이 줄어든다. 이제 시간은 남아돌지 않는다. 시간은 훈계를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궁극의 사치는 고급 승용차나 호화로운 자택이나 별장이 아니라 공부하는 삶을 나이 들어서까지 연장할 수 있는 가망이라고 본다.

공부하는 삶이란 일상의 즉흥, 정처 없는 거리 산책 취향, 카페에서 죽치기, 초연함의 과시, 명예와 직책과 흐르는 세월을 피하려 주렁주렁 몸에 휘감는 상징적 패물에 무관심한 태도를 의미한다. 한마디로, 매일 아침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부조리하지만 꼭 필요한 환상이다.

나는 늘 권력의 유혹, 커리어에 대한 예속보다 나의 자유를 소중히 여겼다.

돈을 잊어버릴 만큼 부유했던 적도 없고, 돈을 멸시할 만큼 가난했던 적도 없다.

따라서 돈은 지혜를 추구하는 약속이다. 이 표현은 이중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돈을 갖는 것이 지혜라는 의미도 있고, 돈에 의문을 가져보는 것이 지혜라는 의미도 있다. 우리는 돈 때문에 원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늘 조율을 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돈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철학자가 된다. 잘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위해, 남을 위해 잘 쓰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돈 문제가 쉽고 편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 돈을 혐오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속으로는 돈을 우러러보기도 한다. 돈을 떠받드는 사람은 돈을 과대평가한다. 돈을 멸시하는 척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셈이다. 열광은 문제가 되지만 지탄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돈은 어려운 주제다. 하지만 지혜란 본디 만인에게 광기의 상징처럼 보이는 바로 그것을 공략하지 않는가? 그럴 게 아니면 철학이 무슨 효용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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