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옆의 작은 옻그릇에는 간 마, 작은 접시에는 매콤한 맛의 진한 미소와 잘게 썬 일본 갓이 담겨 있고, 대파가 듬뿍 들어간 맑은국, 그리고 보리밥이 있다.

쇼코는 마른 나무젓가락에 밥알이 붙은 걸 보고 국물을 마시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쇼코는 이쯤에서 간신히 잔을 들어 맥주를 꿀꺽꿀꺽 마셨다. 단번에 반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하…… 하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오늘 같은 날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맛있는 음식을 몸속에 가득 채워넣고 싶었다.

한번 마덮밥을 먹으면 더이상 돌이킬 수 없다. 레드와인을 마시면 화이트와인으로 돌아갈 수 없듯이.

"옆에서 보면 무엇 하나 불편함 없는 생활이 오히려 도움이 안 될 때도 있어."

쇼코는 타인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규칙을 정해놨지만, 거꾸로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는 타인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누군가 걸음을 내디디면 길가의 작은 돌멩이가 움직이지. 공기도 흔들리고. 어떤 일이든 아무 변화가 일지 않는 건 없어."

그저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꿀꺽꿀꺽 맥주를 마시고, 씹는 맛이 있는 음식을 입에 마구 집어넣고 싶었다.

‘마도 탄수화물이네. 오늘은 탄수화물로 몸과 마음을 채우자.’

‘나는 먹고 마시며 살아갈 거야. 살아 있으면 뭔가가 변할 테고, 그게 어디선가 그 아이에게 이어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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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아저씨가 됐어도, 부모는 부모고 자식은 자식이라니까. 당신, 자식은 있어?"

"미안해요. 요즘은 이런 거 너무 물어보면 안 되는 건데 말이지. 아들한테도 주의를 받았는데. 사람은 저마다 사정이 있는 거라고. 그런데 당신은 꽤 평범하고, 굳이 말하자면 참해 보여서. 예쁘기도 하고."

참하고 예쁜 여자는 이혼하지 않는다는 법도 없는데, 하고 마음속으로 살짝 반발하면서.

"아이가 생겨서 결혼했는데, 결혼은 남녀의 결합이 아니라 가족의 결합이라는 걸 잘 몰랐어요."

"시부모님과 같이 살았는데 며칠마다 시어머니의 화가 폭발했어요. 아주 차갑게 구실 때가 있었어요. 그래도 나쁜 분이 아니라 제게 금방 미안해하고, 그다음엔 오히려 착 달라붙어 살갑게 대했죠. 그래서 한시름 놓고 있으면 갑자기 또 냉담해지고. 그런 일의 반복이었어요. 언제 기분이 언짢아질지 모르니 저는 늘 신경이 곤두섰고 너무 무서워 견딜 수 없었어요."

시어머니가 쇼코의 친정을 들먹이며 "가난한 시골집 딸이라 눈치가 없어" 하고 막말했던 일을 하소연해도 그는 도저히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하는 눈치였다.

난에는 호화로운 도자기보다 값싼 질그릇 화분이 제일 좋거든."

다이치는 생선을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맛있는 생선구이라면 눈이 뒤집힌다.

그렇게 호화로운 집인데도 다이치는 커버도 씌우지 않은 이불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누구 하나 제대로 어린아이를 돌보지 않는 집안의 쓸쓸함이 느껴졌다.

다이치와 재회한 뒤 술을 마시다 듣기로 그는 어렸을 때 집에서 생선구이를 먹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가사도우미가 주방 청소가 귀찮다는 이유로 생선을 구워주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생선구이라는 건 밖에서 먹는 음식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홋카이도에 살았는데 임연수어를 먹은 건 도쿄에 오고 나서라니까. 이래봬도 나 부잣집 아들이잖아. 근데 도우미 아주머니가 안 구워줘서 말이지."

술 취하면 꼭 나오는 입버릇이다. 좌중을 주목시키는 자신만의 개그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 말에는 웃을 수가 없다.

"젊을 때는 말이야, 한번 노인이 되면 계속 똑같은 줄 알았는데 노인에도 단계가 있더라고. 젊은 노인, 약간 젊은 노인, 아주 조금 노인, 완전한 노인, 중간 노인, 상당한 노인, 심각한 노인, 어찌할 방도가 없는 노인."

생선을 굽는 화로, 활기차게 일하는 청년들,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는 채소절임, 모든 것들이 식욕을 돋운다.

솔직히 쇼코는 살이 찌든지 빠지든지 어느 쪽에도 관심이 없었다. 혼자가 된 이후 용모에는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집에 체중계도 없다.

생선구이는 뭐든 맛있지만 숯불로 구운 이 집의 생선은 차원이 다르다.

다들 곤경에 처하면 이 둘에게 의지했다가 다시 떠나가는 그런 관계.

"슈마이 여섯 개짜리랑 맥주 주세요. 기린 이치방시보리로요."

다이치가 2인석짜리 창가 자리를 준비해줬다.
‘이쪽에 앉으면 후지산을 볼 수 있어서 그랬나? 하여튼 특이한 데서 세심하다니까.’

슈마이 특유의 돼지고기 냄새를 맥주가 깔끔하게 씻어내준다.

‘약간 개성 강한 음식이 술이랑 잘 맞는다니까.’

낮부터 음주 가능합니다, 라고 당당하게 간판을 내건 식당도 있다.
‘좋은 지하상가다! 훌륭한 동네야.’

별개로 모미지오로시*와 폰즈**

쇼코는 역시 회부터 먹을까 싶어 접시를 바라보았다. 둥근 접시에 오른 건 잿방어, 전갱이, 흰살생선, 단새우다.

새로 나온 차가운 술잔과 네모난 되. 이보다 마음 설레는 풍경이 또 있을까.

눈앞에 보이는 나이든 커플이 짠, 하고 더운술이 든 작은 술잔을 마주친다. 부부처럼 보이진 않았다. 부부라면 저 나이에 서로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지 않는다.

거절하고 말았지만 가슴속에 약간 따스함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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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역은 도쿄, 도쿄" 하는 방송을 들으니 왠지 내리고 싶어졌다.
‘요즘 도쿄역에 맛있는 도시락집이 많다고 하니까.’
조금 호화로운 도시락을 사서 집으로 가 맥주를 마시고 잘까 싶었다.

다이마루 백화점과 지하상가의 도시락집들을 보고 있자니 이것도 저것도 다 맛있어 보여 사방으로 눈길이 갔다.

‘일본은 맛있는 게 너무 많단 말이지.’

섬세하게 수작업한 일본제 공예품을 보면 환호성을 지른다고 말이다.

쇼코가 이혼한 뒤 제일 먼저 연락해와 한동안 자신의 집에서 살게 해준 사람이 사치에였다.

뭘 숨기겠는가, 쇼코는 오징어를 좋아했다.

"쇼코는 돈이 별로 안 들어서 좋다니까."

않았다.
‘우와, 오징어 때문에 벌써 몇 년이나 잊고 있던 일이 생각나버렸어.’
쇼코는 앞에 놓인 초밥을 바라보았다.
‘후각과 마찬가지로 미각도 기억을 예민하게 만드는 걸까?’

남편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는데, 그 이상으로 땅에 닿을 만큼 고개를 숙인 건 아버지였다.

쇼코가 한 달 전 이 집에 왔을 때 방에 틀어박혀 거의 말도 않던 모토코가 먼저 말을 걸어준 건 기뻤다. 그런데 아들이 옆에 있을 때는 멍한 눈으로 가만히 창밖만 바라보다가, 그가 문을 쿵 닫고 나가자마자 전원이 켜진 전동인형처럼 활기차게 움직이는 모습은 당황스러웠다.

타인의 영역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도 쇼코 스스로 정한 규칙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영어 공부를 하고 싶다며 홀로 시골에서 도쿄로 온 분이에요. 그런데 알츠하이머병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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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마켓이나 청과상은 물론이고 도토루 커피, 맥도날드, 링거헛*, 우에시마 커피, 고메다 커피, 덴야**, 조너선***, 후지 소바…… 일본의 웬만한 체인점은 다 들어와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한곳에 모인 것도 장관이다.

불필요한 지출을 하거나 돈을 헤프게 쓰진 않지만 맛있는 것에는 확실히 돈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일 것이다.

쇼코는 어른이다. 어른에게는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일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면 좋겠다.

별다른 뜻 없이 그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한 화제였을 뿐인데 동정하는 듯한 말을 들으니 쇼코는 자신이 사는 장소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한심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요는 배려가 지나친 나머지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면이 있었다.

그녀가 죄송해하면 할수록 어떤 상대는 더 비참함을 느끼고 도리어 원망하는 경우도 있다는 걸 모르는 것일 테다. 요는 정말이지 오해받기 쉬운 사람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처럼 쇼코도 아보카도를 매우 좋아한다.

‘오, 호가든, 코로나, 싱하, 블루문…… 요나요나에일 캔도 있네!’

점원이 ‘대낮부터 1파인트라고요?’ 같은 표정을 짓지 않고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줘 기분이 좋았다.

곧장 주방에서 치익 하고 패티를 굽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감자를 튀기는 소리도.
‘이 소리만으로 한 잔 마시겠어.’

‘머리가 띵할 정도로 차가운 생맥주도 좋지만 가끔 이렇게 거품이 적은 맥주도 마시고 싶단 말이지.’

한참을 숨도 안 쉬고 버거, 맥주, 버거, 맥주, 가끔 감자튀김, 맥주를 반복했다.
‘버거는 이래야지. 아무 생각 없이 우걱우걱 먹고 마시고.’

결코 여유로운 형편도 아니고 저축도 해야 한다. 그래서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 말고는 집밥으로 절약한다. 낮술이 쇼코의 유일한 사치다.
부탁이에요. 저를 조금만 더 여기에 있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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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22-01-12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맥주를 부르는 책이군요!
 
[eBook]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미니 선집 3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태동 옮김 / 시공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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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장과 바나나와 함께 그는 혼자였다.

셉티머스를 처음 봤을 때도 바로 그런 기분, 무엇이든 털어놓고 싶은 기분이었다.

환상과 현실을 혼동해 아무것도 명확하게 보지 못하면서도 남을 지배하고 벌을 가하는 자들이었다.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을 루크레치아가 이긴 것이다.

그는 맨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다. 죽고 싶지 않았다. 삶은 좋은 것이었다. 태양도 따사로웠다. 단지 인간이 성가실 뿐이었다. 대체 그들이 원하는 건 뭘까

앰뷸런스가 가볍고 높은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가자, 피터 월시는 저것이야말로 문명의 위대한 승리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야 울 수도 있었다. 이런 묘한 감수성 때문에, 그는 인도의 영국인 사회에서 파멸했다. 적당한 때에 울거나 웃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완전하고 침범할 수 없는 은밀함 때문에, 인생은 깜짝 놀랄 만한 구부러진 길과 후미진 곳으로 가득 찬 비밀의 정원인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바로 그런 순간들이 우리를 놀래키고 숨 막히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외양, 즉 밖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보이지 않는 부분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덧없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부분만이 널리 퍼져나가 계속 살아남아서, 죽음 뒤에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달라붙거나 어떤 장소들에 출몰하게 될 것이라고. 아마도, 아마도.

연기가 무릎을 굽히고 인사하듯 낮게 깔리는 바람에 그녀의 작은 분홍빛 얼굴이 연기 속에 잠긴 적도 있었다.

왜 그녀는 그를 내버려두지 못하는가? 결국, 댈러웨이와 결혼해 오랜 세월 더없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면서.

둘 다 중년이었고, 평범했다. 그래서 그녀는 불굴의 힘으로 그 모든 상념들을 밀쳐냈다. 그녀에게는 강인함과 인내력이, 장애물들을 극복해내는 활력이, 그는 가져보지도 못한 힘이 있으니까. 그렇다.

여자들은 남성적이지 않은 그의 모습을 좋아했다.

그의 배후에는 뭔가 범상치 않은 것이 있었다. 그가 독서를 좋아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러 가면 그는 언제나 테이블 위에서 책을 집어 들었으니까(지금도 부츠 끈을 바닥에 질질 끌면서 책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위험을 감수하는 건 여자 쪽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아주 쉬운 사람처럼 보였고 쾌활하며 교양도 있고 매력도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무엇보다 여자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과의 교제는 아름다웠고, 그들의 사랑은 성실하고 대담하고 위대했다.

혼자였기에 웨이터에게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가 메뉴를 바라보는 방식, 집게손가락으로 특정한 와인을 가리키는 몸짓, 허둥대지 않고 정중하게 식사를 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어쩌면 저토록 겸손하고도 확고하게, 자신의 권리 안에서 능숙한 태도로 말할 수 있을까?

영혼도 가끔씩은 잡담을 하며 자신을 솔질하여 활기를 되찾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가 젊었을 땐 피라미드처럼 꿈쩍도 안 할 것처럼 보였던 사회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확실히 감지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사회구조가 사람들을 압박했었다. 클라리사의 고모 헬레나가 저녁 식사 후에 램프 아래 앉아 리트레 사전 속에 꽃들을 넣고 꾹 누르는 것처럼. 특히 여자들이 그런 압박을 당했었다.

다른 세대에 속한 사람이긴 했지만, 흠 없고 완전한 그녀가 아직도 이 길고도 위험한 인생이라는 항해를 밝혀주는 등대처럼 지평선 위에 서 있는 듯했다

어떤 일을 수없이 반복하면 새로운 맛은 없어지지만, 축적된 경험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

너무도 조용하게 서로에게 열중해 있는 그들의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해서, 사람들은 그 신성한 예식을 중단시키는 건 불경한 행동이라는 듯 그들 앞을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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