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은 뭘 하며 지낼까? 흥미로운 『캐서린 다이사트 부인의 회상』을 마저 읽는 것도 괜찮을 테지. 아니면 편지를 써도 좋고. 알레프에 도착하면 편지를 부칠 수 있을 것이다. 편지지와 봉투도 몇 장 있다. 그녀는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숙소 안은 너무 어둡고 자극적인 냄새가 풍겼다. 산책이나 할까.
산책은 새롭고 상당히 흥미로웠다. 보통 구릉이나 황야, 해변, 길을 걸으면 언제나 시야에 물체가 들어온다. 언덕을 넘어 숲으로, 헤더 꽃밭으로, 오솔길을 내려와 농장으로, 국도변의 다음 마을로, 물결 이는 강가를 걸어 다음 굽이로. 하지만 여기서는 달리갈 곳이 없었다. 숙소에서 나오면 끝이었다. 오른쪽 왼쪽, 앞뒤 할 것 없이 황량한 모래 빛깔 지평선만 보였다.
조앤은 방긋 웃고 걸음을 옮겼다. 공기가 아주 상쾌했다! 공기에 순수함과 싱그러움이 묻어났다. 전혀 오염되지 않고, 인간과 문명에 더럽혀진 흔적도 없었다. 태양과 하늘과 모래밭이 전부였다. 공기에는 해독하는 뭔가가 있었다. 조앤은 크게 심호흡했다. 느긋하게 만끽했다. 아주 괜찮은 모험이었다! 단조로운 삶 속에서 크게 환영할 휴식이었다.
기차를 놓친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절대의 고요와 평화 속에서 이십사 시간을 보내는 건 그녀에게 행운이었다. 서둘러 돌아갈 이유도 없었다. 이스탄불에 가서 로드니에게 도착이 늦어진다고 전보를 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로드니가 상대방이 하는 말을 좀더 제대로 듣길 바랐다. 사람들은 변호사가 예리하고 또릿또릿하기를 기대하니까.
"하지만 당신도 사무소에 합류하게 될 거라 알고 있었잖아요." "그래 알아, 나도 안다고. 하지만 내가 이 일을 그렇게 싫어하게 될지 어떻게 알았겠어?"
그럼 달리 어떤 일을 하고 싶은데요?" 그러자 그는 굉장히 빠르고 적극적으로 대답했다. 말이 술술 쏟아져나왔다.
그는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로드니가 그렇게 열정적인 줄 미처 몰랐다. 그렇게 말 많고 적극적일 수도 있는지 조앤은 몰랐다.
남자는 어린애와 똑같다더니 딱 맞는 말이야.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인생은 휴가가 아녜요. 우리에게는 생각해야 할 미래가 있어요, 여보. 토니가 있다고요." 조앤이 달래듯이 말했다.
당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는 없어요. 자식들을 세상에 내놓으려면 이런 것들을 고려해야 해요. 어쨌든 당신에게는 그럴 책임이 있으니까요."
그녀는 이 문제에 대해 확고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둘 중 한 사람이라도 현명해야 했다. 로드니가 자신에게 최선인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녀라도 그래야 했다.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은 정말 어처구니없고 바보 같고 터무니없었다. 로드니는 소년 같았다. 조앤은 강하고 확신에 찬 엄마 같은 기분을 느꼈다.
여자가 안 챙기면 남자는 인생을 엉망으로 만든다니까.
가방에서 편지지와 만년필을 꺼냈다. 편지를 쓸 생각이었다. 지금의 감정을 편지로 전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사막의 공기는 상쾌해요. 믿기 어려울 만큼 싱그러워요. 이 고요함은 직접 느껴봐야 알 수 있을 거예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제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된 것 같답니다! 평소에 전 너무 바빠서 늘 이 일에서 저 일로 달음질치며 살지 않았겠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모르지만 누구에게나 때때로 생각하고 재충전할 시간은 필요한 것 같아요.
사람이 없어요. 제가 사람들로부터 떨어져나와 살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 모르고 지냈나봐요. 사방 수백 킬로미터 안에 모래와 태양 말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사람이 얼마나 느긋해지는지……
"우리 아이들은 집에 친구들을 별로 데려오지 않는 것 같던데." 로드니가 천천히 말했다. "아녜요, 여보. 난 자주 파티를 열고 젊은 사람들을 초대해요! 그런 일에 신경을 써왔다고요. 파티를 싫어하고 친구를 초대하지 않는 건 바버라예요." 로드니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타인의 판단을 그대로 믿었다가 나중에 그게 틀렸다는 걸 알게 되면 아주 난처하고 불쾌하지." 조앤이 말했다.
맙소사, 동양인들이라니! 이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아무 의미도 없단 말인가.
편지 세 통을 쓰자 잉크가 떨어졌다. 편지지도 거의 다 썼다. 슬그머니 짜증이 났다. 편지를 보낼 사람이 몇 명 더 있는데. 하긴 한참 쓰다보니 편지 내용이 거의 비슷해지고 있었다…… 태양, 모래, 쉬면서 생각할 시간을 가져서 얼마나 좋은지! 모두 사실이긴 했지만 똑같은 내용을 매번 약간씩 고쳐 쓰려니 싫증이 났다.
장난스럽게?가볍게?상황을 처리해버리는 것. 둘 사이가 심각할 리 없음을 잘 안다고 보여주는 것……
머나 랜돌프는 모든 남자가 매력적이라고 느낄 만한 여자였다. 그녀는 변덕스럽고, 호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남자들에게 아주 차갑고 거만하게 대했다. 그러고는 곁눈질 한번으로 그들을 자신에게 끌어들였다. 조앤은 정말 말도 못 하게 가증스러운 여자라고 (평소 그녀답지 않게 열을 내며) 생각했다. 내 결혼 생활을 깰 심산으로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았어.
그랬다, 조앤은 남편이 아닌 그 여자를 탓했다. 남자들이야 쉽게 우쭐대니까. 또 그 당시 로드니는 결혼한 지?몇 년이었더라??십 년? 십일 년? 결혼 생활 십 년차를 작가들은 흔히 ‘위험한 시기’라고 했다. 배우자가 탈선하는 경향이 있는 시기. 안정되어 편안하고 확고한 상태로 접어들 때까지 조심스럽게 통과해야 했다.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끝났다. 어쩌면 로드니에게는 조금 재미있는 해프닝이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불쌍한 로드니…… 뭐 그 정도 재미는 누릴 만했다. 그는 정말 열심히 일했으니까. 결혼 십 년차?그랬다, 확실히 위험한 시기였다
그녀는 머릿속에서 곧장 그 생각을 밀어냈다. 햇살 좋은 모래밭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떠올려도 좋을 유쾌하고 활기찬 일도 많았다.
여기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어. 비계가 산패해 풍기는 퀴퀴한 냄새 때문일 거야! 사람을 지독히 우울하게 만든다니까. 조앤은 생각했다.
조앤은 테이블 앞에 앉아서 아침식사를 기다렸다.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극복했다. 소란 떨어봤자 좋을 게 없었다. 지각 있는 인간은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 일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것이 좀 불만이기는 해도.
"집을 벗어나기 위해 결혼하는 여자도 있어."
연극이 서툴군. 조앤은 이렇게 생각하고 피식 웃었다. 남자들은 속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그녀는 윌리엄의 구태의연한 과묵함이 조금 우스웠다. 그는 그녀를 몹시 고지식하고 깐깐한 여자로?세상에 흔한 장모로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혼자만의 시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고 얼마나 자주 바랐던가. 지금이 바로 그럴 시간이었다. 그런데 어떤 생각들을 그렇게 간절히 정리하고 싶었을까?
현대 과학과 발견에 대한 흥미로운 책을 가져오는 건데. 양자론 같은 것들을 설명하는 책으로. 그런데 왜 지금 양자론 같은 것이 떠올랐지? 그녀는 자문했고 문득 생각났다. 커버를 바꾸는 문제를 생각하다 셔스턴 부인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마을의 은행 지점장인 셔스턴 씨의 부인과 응접실 소파 커버로 친츠*가 좋다 크레톤**이 좋다 하며 옥신각신했을 때 셔스턴 부인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 사라사 무명의 일종. 화려하고 작은 무늬가 있다. ** 사라사 무명의 일종. 무늬가 크고 친츠보다 두껍다. "나는 종종 내가 양자론을 이해할 만큼 똑똑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에너지가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니 환상적인 이론이지 않아요?"
조앤은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과학 이론과 친츠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그러자 셔스턴 부인은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내가 이렇다니까요. 하지만 상관도 없는 것이 불쑥 머릿속에 떠오를 때가 있잖아요?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두근거려요."
조앤은 안절부절못하며 서성거렸다. 왜 서글픈 인생이란 말이 마음에 떠오르게 내버려뒀을까? 그 말은 블란치 해거드를 연상시켰고 (비록 완전히 다른 종류의 서글픈 인생이지만!) 블란치를 생각하자 다시 바버라와 그 아이의 병을 둘러싼 상황이 떠올랐다. 고통스럽지 않고,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 생각거리는 없을까?
눈에 익은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앤은 자기도 모르게 전율했다. 그의 뒷모습이 갑자기 젊어진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어깨를 펴고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이 조앤에게는 조금 충격적이었다…… 마치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청년이 플랫폼을 활기차게 걸어가는 것 같았다.
햇볕이 쏟아지는 사막에서 조앤은 갑자기 견디지 못하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싫다, 이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방금까지 지친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플랫폼을 기운차게 걸어가던 로드니. 버거웠던 짐을 내려놓은 듯 경쾌하게 걸어가던……
로드니는 왜 기차가 역을 떠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을까? 그는 왜 그래야 했을까? 물론 로드니는 런던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 때문에 걸음을 서둘러야 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태운 기차가 역을 빠져나가는 광경을 차마 지켜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일 리 없었다. 그녀가 단순하게 내린 판단이 사실일 리 없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로드니가 그녀가 떠나는 것을 반겼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사실일 리 없었다!
책도, 편지지도, 소일할 바느질감도 없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기차를 며칠이고 기다리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 일이 없을 때는 뭘 해요?" "일하는 시간까지 기다립니다."
사실 두 사람이 움직이지도 대화하지도 않는 것이 정말 이상했다. 다정하지 않았다. 각자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아니면 말을 붙이거나 대화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을까.
지금까지 그녀는 공상에나 빠지는 여자가 결코 아니었다. 분명 태양 때문이었다.
자비의 본질은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빗방울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진실한 두 마음의 결합에 방해를 허락지 않으리. 변화가 생길 때 변하고 없애자고 없애지는 것은 사랑이 아니리 아, 그렇다! 사랑은 폭풍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영원히 변치 않는 지표, 높이는 잴 수 있어도 그 진가는 알 수 없는 모든 정처 없는 배들의 별, 사랑은 세월의 노리개가 아니리 비록 죽음의 낫이 장밋빛 입술과 뺨을 베어낼지라도, 사랑은 짧은 시일에 변치 않고 심판의 날까지 견디어내리 이것이 틀린 생각이고 그렇게 증명된다면 나는 글을 쓰지도, 어떤 인간을 사랑하지도 않았으리.*
"이제 그만해라, 토니. 당연히 나는 네 아빠를 잘 알아. 너보다 훨씬 많이 안다." "글쎄요, 아닌 것 같은데요. 가끔 난 엄마가 그 누구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식들은 일이 벌어지면 꼭 누구의 탓으로 돌려야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토니와 바버라는 나중에 사과했지만 에이버릴은 사과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지 않는 눈치였다. 조앤은 그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넘겼다. 에이버릴이 인정머리 없이 태어난 것은 그 아이 잘못이 아니니까.
그녀는 묘한 외로움을 느꼈다. 조앤은 이 외로움이 자신의 슬픔과 집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틀림없이 엄마를 깊이 사랑했다.
불쾌한 일은 다 내가 떠맡아야 한다는 게 너무 힘들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