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3월
평점 :
판매중지


내용은 깊은 울림을 주면서 스토리나 대화가 물 흐르듯이 흘러서 그런가 작가가 수년 동안 구상했지만 십일 만에 완성했다고 하는데 이해가 된다. 읽은 지 꽤 되었지만, 몇몇 문장은 주인공에 이입된 나에게 조앤이 느꼈던 것과 같은 아픔을 주었고 여전히 그 문장들 사이에서 헤매는 나를 가끔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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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뭐라 말할 수 없이 모호하지만 두려움과 매혹이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그가 제라늄과 카네이션을 구별하지 못하고, 참나무와 자작나무를, 마스티프와 그레이하운드를, 암사슴과 암양을, 밀과 보리를, 경작지와 휴경지를 구분하지 못하며, 작물의 윤작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오렌지는 땅속에서 순무는 나무 위에서 자란다고 생각하며, 시골 풍경보다 도시 풍경을 선호했다는 것이나 그 밖의 많은 사실들은 그런 부류의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던 올랜도를 놀라게 했다.

그들의 몸은 활동적이고 용맹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나태하고 소심하다는 것도 떠올렸다. 이런 생각들이 교차하면서 곤혹스럽고 적절한 균형을 잡을 수 없게 되자 그는 다시는 편안한 잠을 허용하지 않을 불안하고 성가신 유령을 집 안에 들여놓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시인을 보기만 하면 물어뜯으려 해서 거의 6주간 묶여 있던 마스티프를 풀어놓으면서, 올랜도는 그 투덜거리는 목소리에서 벗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다시 혼자라는 것이 얼마나 호사스러운 일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들과의 관계는 끝났으니까.

그리하여 서른 살가량의 나이에 이 젊은 귀족은 인생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했고, 그 경험들이 모두 무가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가 조금이라도 믿는 것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개와 자연, 사슴 사냥개와 장미 덤불이었다. 다양하기 그지없는 세상과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 차차 그 두 가지로 귀결되었다.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 어떤 남자나 여자에게도 말을 걸 필요가 없다면, 자신의 개들에게 말하는 능력이 생기지 않는다면, 어떤 시인이나 공주도 다시 만나지 않는다면, 자기에게 남은 세월을 꽤 만족해하며 지낼 거라고 생각했다.

너도밤나무가 황금색으로 물들어 가고, 돌돌 말린 어린 고사리 잎사귀가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한 노파가 30분이면 쓸어 버릴 수 있는 먼지 조금과 거미줄 몇 개를 제외하면 자연이 2백~3백 년간 대체로 변함없이 지속되어 온 것을.

하지만 시간은 동물과 식물이 놀랍도록 때맞춰 번성하고 서서히 사라지게 하면서도, 불행히도 인간의 마음에는 그처럼 단순하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더욱이 인간의 마음은 마찬가지로 기묘하게 시간에 작용한다. 한 시간이 언짢은 상태의 인간 마음에 머물 때는 시계 시간의 50배나 100배 길이로 늘어날 수 있다. 반면에 한 시간이 마음의 시계에서 정확히 1초를 나타낼 수도 있다. 시계의 시간과 마음의 시간이 희한하게도 일치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는 보다 많이 알려져야 하고 더욱 깊이 연구할 만하다.

지금 올랜도처럼 서른 살에 이른 인간에게는 생각하고 있을 때의 시간은 지나치게 길어지는 반면에 행동하고 있을 때의 시간은 지나치게 짧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홀로 언덕에 올라 참나무 밑에 주저앉으면 그 즉시 1초 1초가 둥글어지며 채워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 1초 1초는 더없이 기이하고 다양한 것으로 채워졌다. 그는 가장 현명한 사람들도 곤혹스럽게 여겼던 사랑이란 무엇인가, 우정이란 무엇인가, 진실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들에 직면하여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생각에 잠기면 매우 길고 복잡다단하게 보였던 자신의 과거가 그 즉시, 사라져 가는 1초에 밀려 들어가, 그것을 원래 크기의 열두 배로 부풀리고 수천 가지 색채로 물들이며 세상의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을 채워 넣었다.

그가 아침 식사 후에 서른 살의 젊은이로 나갔다가 저녁 식사 시간에 적어도 쉰다섯의 장년으로 돌아오곤 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생애(동물의 생애에 대해서는 주제넘게 언급하지 않겠다)의 길이를 측정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인생이 아주 길다고 말하자마자 장미 꽃잎이 땅에 떨어지는 시간보다도 짧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가 사랑에 관한 결론에 이르기 전에 참나무에 숱하게 꽃이 피고 시든 까닭을 설명해 줄 것이다). 「그런데 은유를 써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는 자문했다.

차라리 할 말을 간단히 하고 끝내는 편이 낫지 않겠어

「하늘은 푸르고 풀은 초록이야.」 그가 말했다. 그러면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하늘은 오히려 1천 명의 성모 마리아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베일처럼 보였다. 풀밭은 마법에 걸린 숲에서 털북숭이 사티로스의 포옹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아가씨들이 도주하듯이 흐릿해지고 침침해졌다.

명성은 사람을 방해하고 옥죄는 반면에, 무명은 안개처럼 사람을 감싼다.

무명의 인간에게는 자비로운 어둠이 풍족하게 쏟아진다. 그가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무명은 진저리 나는 질투와 악의를 마음에서 제거해 주고, 너그러움과 관대함이 핏줄에서 자유롭게 흐르도록 해주며, 감사의 말이나 찬사 없이 주고받을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했다.

무명으로, 감사나 칭송을 바라지 않고 낮에는 오로지 자기들의 일거리만을, 밤에는 운 좋게 마실 수 있는 맥주 한잔을 바라며.

여기서 셀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무명의 가족들이 무명의 세대를 이어 가며 살아왔다. 그 수많은 리처드나 존, 앤, 엘리자베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흔적을 뒤에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삽과 바늘을 들고 함께 일해 오며 사랑의 행위를 나누고 아이를 낳으며 이 집을 남겼다.

유성처럼 타올라 먼지도 남기지 않는 것보다는 무명의 존재로 떠나면서 아치나 온실, 복숭아가 무르익는 담장을 남기는 편이 더 나았다.

저 아래 잔디밭에 자리 잡은 대저택을 바라보고 얼굴을 빛내면서, 그는 저기 살았던 무명의 신사 숙녀들이 나중에 올 사람들을 위해, 빗물이 샐 지붕을 위해, 쓰러질 나무를 위해, 무언가를 잊지 않고 떼어 두었다고 말했다.

이미 우리는 하품을 시작하고 ─ 목록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그러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단한다면, 그 목록이 끝나서가 아니라 지루해서이다.

어디에든 무엇이든 더 채워 넣을 공간이 없었다.

그 곰들의 고약한 습성은 충실한 마음을 숨기고 있다고 그는 믿었다.

당시 그는 작가들과 어울리지 않으려고 조심했고, 이국 혈통의 여자들에게 늘 거리를 두었지만, 그래도 여자들과 시인들에게 지나친 아량을 베풀었고 그들은 그를 흠모했다.

그는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그 이후에도 한참이 지나도록 거기에 시를 써넣곤 했다. 하지만 써넣는 글만큼 줄을 그어 지운 것이 많았기에 한 해가 지날 무렵 그 글의 분량은 연초보다 적었고, 계속 써나가다 보면 그 시는 완전히 지워질 것 같았다.

또한 거리의 배수 시설이 좋아졌고 저택의 조명이 나아졌다는 사실도 문체에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황녀가 발목 잠금장치를 끼웠을 때의 무엇 때문인지, 혹은 몸을 굽힌 그녀의 자세 때문인지, 혹은 올랜도의 오랜 은둔 탓인지, 혹은 이성 간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공감 때문인지, 아니면 버건디 포도주 탓인지, 아니면 난롯불 탓인지 ─ 이런 이유들 가운데 어느 것이든 책임을 져야 한다.

분명 무언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제 다시 돌아가서 말하자면, 사랑은 두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희고, 다른 하나는 검다. 두 개의 몸이 있어 하나는 매끄럽고, 다른 하나는 털북숭이다. 그것은 두 개의 손, 두 개의 발, 두 개의 발톱이 있고, 실로 모든 부위가 두 개이고 정확히 상반된다. 하지만 그 두 가지는 아주 단단하게 결합된 까닭에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운명은 가혹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올랜도가 배를 타고 떠나기 직전에 그녀의 어깨 너머로 키스를 보내는 것뿐이었다.

뿌리부터 속속들이 영국인인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친 전경에서 마음속 깊이 환희를 느끼고, 멀리 저 산길들과 고원을 거듭 바라보면서 예전에 염소들과 목동들만 다녔을 저곳을 혼자 걸어 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절기에 맞지 않는 화려한 꽃들에 열렬한 애정을 느끼고, 너저분한 잡종 개를 고향의 사냥개보다 더 사랑하고, 거리의 매캐하고 톡 쏘는 냄새를 열렬히 콧구멍에 들이마신 것은 스스로에게도 놀라웠다.

그가 망토 주머니에 아직도 많은 분량의 원고를 갖고 다녔음이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촛불 하나를 밝히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의 내면에서 〈1만 개의 촛불〉이 타올랐다.

목동들과 집시들, 당나귀 몰이꾼들은 지금도 〈우물에 에메랄드를 빠뜨린〉 영국 귀족에 대해 노래한다

올랜도는 친구를 전혀 사귀지 않았던 것 같다.

나머지는 하느님(그의 일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에 대한 감사와 부상에 대한 상세한 기록뿐이다.

〈기막히게 황홀했어〉라고 그녀는 한 장에서 열 번이나 감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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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의사들은 지금보다 더 현명하지 않았으므로 휴식과 운동, 단식과 영양 섭취, 교제와 고독을 처방했고,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한다고 권유하거나 점심 식사와 저녁 식사 사이에 말을 타고 40마일을 달려야 한다고 했고, 늘 그렇듯이 진정제와 자극제를 동시에 처방하면서 아침에 깨어날 때는 도롱뇽의 침으로 만든 우유 술을 마시고, 잠자리에 들 때는 공작새의 담즙을 한 모금 마시라고 자기들 마음 내키는 대로 다양하게 처방한 뒤 그를 내버려 두면서, 그가 일주일간 잠을 잔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잠은 더없이 괴로운 기억들, 인생을 영원히 망쳐 버릴 듯한 사건들을 검은 날개로 비벼서 그 쓰라림을 떨어내고 그것들을, 가장 추악하고 비열한 사건까지도, 윤기와 작열하는 빛으로 아름답게 꾸며 주는 최면이자 치유책이었을까? 인생의 격동이 우리를 산산조각 내지 않도록 죽음의 손가락이 이따금 그 격동 위에 얹혀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매일매일 죽음을 소량씩 섭취해야 하는 존재이고, 그러지 않으면 살아가는 일을 지속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의 가장 은밀한 곳까지 파고들어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한 것들을 바라지 않는데도 변화시키는 그것은 어떤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을까? 극심한 고통으로 지쳐 버린 올랜도가 일주일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죽음의 본질은 무엇이고,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30분 넘게 기다렸지만 아무 답도 나오지 않으니 이야기를 계속해 가자.

고독은 그의 선택이었다.

등불을 들고 뼈들이 제대로 정돈되었는지 살펴본 뒤에(올랜도는 낭만적인 성향이기는 했지만, 유별나게 꼼꼼해서 조상의 두개골은 고사하고 바닥에 떨어진 실뭉치도 보기 싫어했으므로)

마침내 어떤 무명 화가가 그린 네덜란드의 설경을 보고는 발작적으로 울음을 터뜨리며 걸음을 멈췄다. 이럴 때면 인생이 더 이상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것 같았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전기 작가가 자세히 진술해 봐야 유익할 리 없겠지만, 독자의 역할을 잘 수행하면서 여기저기 흩어진 몇 안 되는 암시에서 살아 숨 쉬는 한 인물의 전체적인 윤곽과 영역을 그려 내고, 아주 은밀한 속삭임에서 살아 있는 목소리를 듣고, 종종 아무 언급이 없을 때도 그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정확히 보고, 지침이 될 만한 말 한마디 없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확히 짐작할 수 있는 사람들 ─ 바로 이와 같은 독자를 위해서 우리는 글을 쓰는데 ─ 이런 독자의 눈에는 올랜도가 다양한 기질이 묘하게 혼합된 인물로 선명히 드러날 것이다

실크의 주름을 펴서 거기 함축된 의미를 드러내는 일은 소설가에게 맡기고 간단명료하게 말하자면, 그는 문학에 대한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귀족이었다.

저런 멋진 신사는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그들은 말했다. 책은 중풍에 걸린 사람이나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주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런데 더 나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독서의 질병이 잠식해 들어가면 몸이 너무나 쇠약해져서, 잉크병에 숨어 있고 깃털 펜에서 곪아 가는 치명적 병균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어 버린다. 가여운 인간이 글을 쓰는 데 빠져드는 것이다.

올랜도는 사과를 달라는 소년보다 더 간절히 종이를 달라고 요청했다. 사탕을 달라는 소년보다 더 간절하게 잉크를 요청했다.

바닥에 큰 구멍들이 파여 있고 찌르레기의 똥 냄새가 지독한 곳에서 한 손에는 잉크병을, 다른 손에는 펜을 들고 무릎에는 두루마리를 펼쳐 놓았다. 그렇게 해서 스물다섯 살이 되기 전에 약 마흔일곱 편의 희곡과 사극, 로맨스, 시를 썼다. 산문으로 된 글도 있었고 운문으로 쓴 글도 있었으며,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로 쓴 글도 있었다. 모두 낭만적이고, 모두 다 길었다.

우리는 다음에 무엇이 올지, 이후에 무엇이 이어질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탁자에 앉거나 잉크병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과 같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동작도 서로 무관한 수천 개의 단편적인 조각들을 뒤흔들어 놓아, 때로는 밝은 조각이, 때로는 어두운 조각이 빨랫줄에 걸린 열네 명 가족의 속옷이 돌풍에 나부끼듯 매달려 까닥이고 펄럭이다가 떨어진다. 더없이 일상적인 우리의 행위는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의기양양하게 장담했던 한 가지 일이 아니라, 펄럭이며 퍼덕이는 날갯짓과 명멸하는 빛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변덕스러운 기억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으니 올랜도는 진지하게 펜을 종이에 댔어야 했으리라(우리가 마음을 먹기만 하면 제멋대로 놀아나는 기억을 그 온갖 오합지졸과 쓰레기와 함께 집 밖으로 몰아낼 수 있기 때문이

그는 계속 바라보았고, 계속 멈추어 있었다. 이런 정지 상태가 우리를 파멸시킨다.

그러나 살육과 전쟁, 음주와 성행위, 소비와 사냥, 승마와 식사, 이 모든 것에서 남은 건 무엇이란 말인가?

그 말들이 이 글을 쏘아보아 쩔쩔매게 되지 않도록, 우리는 그 말들이 죽었다기보다는 방부 처리되어 생생한 색깔을 유지한 채 온전하게 숨 쉬며 안치되어 있는 무덤에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겠다

브라운 경이 이룬 성취를 자기 조상들의 업적과 비교하면서, 조상들과 그들의 행위는 먼지와 재로 돌아갔지만 이 남자와 그의 말은 영원히 남았다고 소리쳤다.

지금과 같은 처지의 올랜도의 눈에는 책을 쓰고 출판한 사람에게는 영광스러운 후광이 감돌았고, 그것은 높은 혈통과 신분의 영광을 모두 능가했던 것이다.

그런 성스러운 사고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몸도 달라져야 할 거라고 그는 상상했다. 그런 사람들은 머리칼에서 후광이 비쳐야 하고, 숨결에서 향기가 나야 하고, 입술에서 장미가 자라야 한다.

그는 자신이 늘 학구적이라는 말을 들어 왔고 고독과 책을 사랑한다고 조롱받아 왔음을 뿌듯하게 생각했다.

시인에게는 하인이나 지주나 귀족이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시 자체에 대해서 올랜도가 알아들을 수 있었던 말은 시는 산문보다 팔기 어렵고 시행이 더 짧기는 하지만 쓰는 데 더 긴 시간이 걸린다는 것뿐이었다.

요즘의 젊은 작가들은 출판업자들에게 고용되어 돈벌이가 될 만한 쓰레기를 쏟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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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바다로 휩쓸려 가는 동안 누군가는 헛되이 도움을 청하는 소리를 질렀고, 과거의 행실을 고치겠다고 미친 듯이 약속하거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이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교회 제단에 재산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공포에 질려 어리둥절한 얼굴로 꼼짝 않고 앉아서 말없이 앞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 전기 작가는 한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해 얼버무리고 넘어가기보다는 솔직하게 고백하는 편이 나을 듯싶다.

그 의무란 지워질 수 없는 진실의 족적을 따라 좌고우면하지 않고 터벅터벅 걷는 것이고, 길가의 꽃에 유혹되지 않고 그늘을 탐하지 않으며 우리가 무덤에 털썩 떨어져서 머리 위의 비석에 〈끝〉이라고 쓸 때까지 끊임없이 체계적으로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소박한 의무는 오로지 알려진 대로 사실을 기술하고, 독자가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두뇌 어딘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이 분명하다고 여겨졌다. 그의 행동은 더할 나위 없이 합리적이고 전보다 더 진중하고 차분해 보였지만, 지난 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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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인간의 여러 자질 중에는 서로 유사한 것들이 있어서, 한 가지 자질이 다른 자질을 이끌어 내는 모양이다

시인들과 시에 대해 올랜도는 한없이 열광적이고 터무니없고 엉뚱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몸은 온갖 비단과 화려한 보석에 둘려 있었고, 좌골 신경통으로 고통에 시달릴지라도 아주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으며, 수천 가지 공포에 엮여 있어도 절대 움찔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마음은 서로 상반되는 것들 ─ 깜깜한 어둠과 눈부시게 빛나는 촛불, 초라한 시인과 위대한 여왕, 고요한 들판과 소란스러운 하인들 ─ 로 뒤죽박죽이어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여왕은 나이에 비해 빨리 늙어 가고 있었고 쇠약해지며 몸이 굽고 있었다. 귀에서는 항상 대포 소리가 들렸다. 눈앞에선 늘 독약 방울이 반짝였고 예리한 단도가 보였다. 여왕은 식탁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해협에서 함포 소리가 들려왔다. 여왕은 두려웠다 ─ 저 소리는 저주일까, 저건 험담일까? 이런 시커먼 배경 때문에 그와 대조되는 순진무구함과 단순함은 그녀에게 더욱 소중했다

강한 힘과 우아함, 낭만, 어리석음, 시, 청춘 ─ 여왕은 그를 책의 한 페이지처럼 읽었다.

그 늙은 여인은 그를 사랑했던 것이다

그는 여왕의 노년에 아들이 될 터였고, 허약한 몸의 수족이 될 것이었으며, 쇠락하는 자신의 몸을 기댈 참나무가 될 것이었다.

당시는 엘리자베스 시대였고, 그들의 도덕은 우리 시대의 도덕이 아니었다. 그들의 시인도, 그들의 날씨도, 그들의 채소도 우리 시대와는 달랐다. 모든 것이 달랐다.

모든 것이 격렬했다. 태양은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연인은 사랑하고 떠났다. 시인들이 시에서 노래한 것을 젊은이들은 실천에 옮겼다. 아가씨들은 장미꽃 같아서 그들의 한창때는 꽃이 지듯 금세 지나갔다. 그런 까닭에 해가 지기 전에 꽃을 따야 한다. 낮은 덧없이 지나가고, 그 짧은 시간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올랜도는 다양한 취향을 갖고 있었으니까. 정원에서 자라는 꽃만 좋아하지 않았고, 야생화나 잡초에도 언제나 매혹을 느꼈다.

수십 번 듣다 보니 그 반복되는 이야기가 조금씩 지루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코를 베어 내는 방법도 한 가지뿐이고 순결을 잃는 방법도 한 가지밖에 없기 때문인데 ─ 그의 눈엔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 반면에 예술과 과학은 그의 호기심을 깊이 자극하는 다양성이 있었다.

그는 젊었고, 부유했고, 잘생겼다. 어느 누구도 그보다 더 큰 환호와 환영을 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동물을 열렬히 좋아하던 올랜도는 그제야 그녀의 이빨이 구부러진 것, 앞니 두 개가 안쪽으로 굽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여자들에겐 사악하고 잔인한 성격을 드러내는 분명한 징후라고 그는 말하면서, 바로 그날 밤 약혼을 파기해 버렸다.

그 3초 사이에 그는 그녀를 멜론이라고, 파인애플이라고, 올리브라고, 에메랄드라고, 눈 속의 여우라고 불렀다.

어떤 소년도 저렇게 바다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듯한 눈을 갖고 있지 않았다.

두 팔을 번쩍 들어 너도밤나무와 참나무를 흔들어 대고 싶었다.

그는 그 낯선 여자가 마로샤 스타니로브스카 다그마르 나타샤 일리아나 로마노비치 공주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자 공주는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했고, 올랜도는 수퇘지들의 머리와 박제된 공작새들 너머로 그녀와 눈길이 마주치자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웃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 띤 입술은 경이로움에 얼어붙었다. 지금까지 나는 대체 누구를 사랑했고, 무엇을 사랑했던가. 그는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자문했다.

올랜도에게 사랑이란 톱밥과 타고 남은 재를 연상시킬 뿐이었다. 그가 사랑에서 얻은 즐거움은 더없이 김빠진 맛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하품도 하지 않고 그것을 끝까지 견뎌 냈는지 의아했다. 그가 공주를 보았을 때 그의 걸쭉한 피가 녹았고, 그의 핏줄에서 얼음이 포도주로 변했던 것이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와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황량한 겨울 풍경에 봄기운이 스며들었다. 그의 남성성이 깨어났다. 그는 칼을 손으로 움켜잡았고, 폴란드인이나 무어인보다 더 위험한 적을 향해 돌격했다. 그는 깊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갈라진 바위틈에서 자라는 위험한 꽃을 보았고, 손을 뻗었다 ─ 실은 그가 자신의 가장 열정적인 소네트를 줄줄이 읊고 있을 때, 공주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소금 좀 건네주시겠어요?」
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마담.」 그는 프랑스어의 억양을 완벽하게 구사하며 대답했다. 다행히도 그는 프랑스어를 모국어처럼 말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하녀에게서 그 언어를 배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 언어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지 모른다. 그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았더라면, 그 눈빛을 좇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천성적으로 점액질의 기질이라서 성급히 화를 내지 않았고, 대다수 사람들과 달리, 한낱 외국 여자가 자신을 밀어내고 올랜도의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으리라고는 쉽게 믿지 않았다

덕분에 올랜도와 사샤는(그는 그녀를 약칭으로 불렀는데, 그것은 그가 어렸을 때 키웠던 하얀 러시아산 여우의 이름이었다. 눈처럼 털이 부드러운 그 여우는 강철 같은 이빨로 그를 무지막지하게 물었다가 그의 아버지에게 사살되고 말았다) 강을 독차지했다.

올랜도는 그녀를 시내로 데려가 경비병들과 반역자들의 머리를 보여 주었고, 왕립 거래소에서 그녀의 마음에 드는 물건을 전부 사주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수상하게 여기거나 빤히 쳐다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하루 종일 은밀히 함께 있고 싶은 욕구가 두 사람에게서 점점 커져 갔다.

그녀가 하는 말은 대단히 솔직하고 도발적으로 보였지만, 거기에는 무언가 숨겨져 있었다. 그녀의 행동은 아무리 대담하게 보였어도 어딘가 감추어진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에메랄드 속에 녹색 불꽃이 숨겨져 있는 듯했고, 혹은 태양이 언덕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겉으로만 또렷하게 보일 뿐, 속에선 종잡을 수 없는 불꽃이 일었다. 불꽃이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그는 언어를 아무리 샅샅이 뒤져 보아도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풍경과 다른 언어가 필요했다. 사샤를 묘사하기에는 영어가 너무나 거침없고 너무나 노골적이며 너무나 입에 발린 언어였다.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자신이 보게 될까 봐 가장 겁냈던 것이 환각으로 떠오른 게 아닌지 누가 알겠는가?

자기들의 은밀한 만남을 끝내고 싶지 않은 데다 자기들을 감시할 예리한 눈들과 맞닥뜨리기 싫어 두 사람은 거기서 머뭇거리며 도제들과 양복장이들, 어부의 아내들, 말 장수들, 사기꾼들, 굶주린 학자들, 머리 가리개를 두른 하녀들, 오렌지를 파는 아가씨들, 말구종들, 술 취하지 않은 시민들, 음란한 술집 급사들, 그리고 사람들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소리를 지르고 사람들 사이를 밀치고 다니는 꼬마 부랑아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꾸물거렸다. 런던 뒷거리의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거기 모여서 농담을 나누며 떠밀고, 여기서는 주사위를 던지고, 저기서는 운세를 점치고, 거칠게 밀치고, 간지럼을 태우고, 꼬집기도 했다. 여기는 시끌벅적하고 저기는 시무룩하며, 일부는 입이 찢어지도록 벌리고, 다른 이들은 지붕에 앉은 갈까마귀처럼 불손했다.

파멸과 죽음이 모든 것을 덮어 버린다고 그는 생각했다. 구더기들이 우리를 먹어 치운다.

생각건대 이제 해와 달의
거대한 일식이 일어나고
공포에 질린 지구가 입을 벌리리니 ─14

그녀는 영국 궁정을 참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남의 사생활을 캐기 좋아하는 노파들과 남의 발을 밟고 다니는 거만한 젊은이들 천지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들에게서는 고약한 냄새가 났고, 그들의 개들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뛰어다녔다. 그녀는 우리에 갇힌 느낌이었다.

맹렬하게 뛰는 그의 벅찬 가슴에 어둠은 더욱 자애롭게 느껴졌다. 그는 모든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온갖 소리에 어림짐작을 해보았다. 술 취한 사람의 고함이나, 밀짚에 누워 신음하는 소리, 다른 고통을 겪는 불쌍한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의 모험에 나쁜 징조를 암시하는 양 그의 폐부를 날카롭게 찔렀다. 하지만 사샤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도 없었다. 용감하게도 그녀는 이 모험을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그녀는 남자처럼 부츠를 신고 망토와 바지 차림으로 혼자 올 것이다. 그녀의 발걸음은 워낙 가벼워 이 고요한 정적 속에서도 거의 들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예전 연인들에 대해 그녀에게 이야기했고, 그녀와 비교하면 그들은 나무토막이나 삼베, 타고 남은 재 부스러기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의 격정에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는 또 한 번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고, 사랑을 나누기 위해 다시 그를 포옹하곤 했다. 그때 그들은 자신들의 뜨거운 열기에도 얼음이 녹지 않은 것에 놀라워했고, 그처럼 자연스럽게 얼음을 녹일 수단이 없어서 차가운 강철 칼로 얼음을 쪼아야 하는 불쌍한 노파를 동정했다. 그러고는 망토에 휘감긴 채 온갖 세상사에 대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광경들과 여행에 대해, 무어인과 이교도에 대해, 어떤 남자의 수염과 어떤 여자의 피부에 대해, 사샤가 직접 식탁에서 먹이를 주는 쥐에 대해, 저택 현관에서 항상 흔들리는 벽걸이에 대해, 어떤 얼굴과 어떤 깃털에 대해.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건 간에 너무 시시하지도 않았고 너무 거창하지도 않았다.

참된 교회야말로 이 바다에서 세파에 흔들리는 모든 이들에게 유일한 항구이자 피난처이고 정박지라고 그는 말했다.

건넸다(하지만 불행히도 늘 프랑스어로 말했는데, 그 언어를 번역하면 맛이 사라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올랜도는 예의 우울한 기분에 빠져들곤 했다. 얼음 위를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노파 때문에 그런 기분이 들었을 수도 있고, 아무 이유 없이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면 그는 엎어져서 얼굴을 빙판에 대고 얼어붙은 물속을 바라보며 죽음을 생각했다. 행복과 우울함을 갈라놓는 것은 칼날보다도 두껍지 않다는 철학자12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저 무어인의 광란은 그 자신의 광란 같았고, 무어인이 침대에 누운 여자의 목을 졸랐을 때 그는 자기 손으로 사샤를 죽인 것 같았다.

그는 이마와 뺨을 열두 번이나 세차게 얻어맞았다. 메마른 한파가 아주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1분이 지나서야 그것이 빗방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빗방울이 얼굴을 내리친 것이다.

그녀의 기만과 그의 굴욕을 알리는 종소리가 온 세상에 울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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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2-12 0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방학맞은 저는 지금 자러 갈건데(사실은 어제 너무 많이 자서 잠이 안옴요. ㅠ.ㅠ), 라로님은 반대로 지금 낮이겠네요. 그래서 올라온 글을 제일 먼저 보는 행운이.... ㅎㅎ
아 정말 이러다가 작년 초부터 시작한 저보다 라로님이 버지니아 울프 책 더 많이 보실거 같다는.... ^^

라로 2022-02-12 17:14   좋아요 0 | URL
저는 낮이었지만 밤에 일하니까 아마 잤을 거에요.^^;; 일 끝나고 자기 전에 올린 글,,ㅎㅎㅎ
저는 바람돌이님 덕분에 울프 읽기 시작했는데 설마 그럴리가요??^^;; 하지만 의외로 울프 책들이 재밌어서 님꼐 고마워 하면서 재밌게 읽고 있어요. 저도 방학 같은 거 있어서 책만 읽었으면 좋겠어요, 언제나 부러운 바람돌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