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지력이 쇠하지만 예술가들은 여기서 잃은 바를 저기서 얻는다는 법칙 말이다. 그들은 느릿한 젊음을 따라가면서 무덤 앞에 이를 때까지 더욱 강해지고 쾌활해지고 과감해진다."14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유한 쇄신의 원천이 있다. 나이가 들면서 지혜가 깊어지는데도 자발성이나 삶을 즐기는 능력을 잃지 않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신체가 배신하지 않는 한은 자기를 쇄신하는 그 자질 덕분에 불멸을 누린다."16
생애 말년에 에밀 아자르로 다시 태어난 작가 로맹 가리가 떠오른다. 그는 한편으로는 비극적일 정도로 진지한 작가이고, 한편으로는 익살스럽고 웃기는 작가이다. 그는 작품세계를 완벽하게 구분하여 6년간 아홉 편의 작품을 발표하고, 이 사기극의 비밀을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 대중의 무관심 속에 가라앉기를 두려워한 작가가 되살아난 예로는 완벽하다.17
우리는 나이를 먹되 마음이 늙지 않게 지키고, 세상을 향한 욕구, 기쁨, 다음 세대에 대한 호기심을 유지해야 한다.
50세, 60세, 70세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20세, 30세, 40세 때와 똑같다. 삶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자에게 달고 저주를 퍼붓는 자에게 매섭게 군다.
어느 나이에나 삶은 열의와 피로의 싸움이다. 인생사는 그저 부조리하고도 멋진 선물일 뿐, 아무 의미도 없다.
어딘지 모를 곳에서 와서 누구인지 모를 자로서 살며 언제인지 모를 때 죽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가는데도 나 이토록 즐거우니 놀랍지 않은가. ?마르티누스 폰 비버라흐(16세기 독일의 성직자)
우리는 출생 이후의 경험을 통하여 그 집단에 속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나이가 들수록 생물학적 또래 집단과 한 덩어리 취급을 받는다. 동시대라는 덫에 그네들과 함께 갇혀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과 취향은 서로 다른 쪽을 향한다. 우연히 출생 시기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 자라야 한다고 산부인과에서부터 한 반으로 묶어놓은 것 같지 않은가.
부모는 모두 원하든 원치 않든 자식에게 닮음을 전달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내가 싫어했던 아버지, 우스꽝스럽거나 가증스러워 보였던 어머니를 결국 닮게 된다. 그들의 괴벽이 우리에게 옮아오고 그들의 고약한 말버릇, 자주 쓰는 표현이 우리 입에서 튀어나온다. 그들은 신체적으로도 우리에게 새겨진다. 우리 얼굴을 침범해서는 그들의 이목구비를 겹쳐놓는다. 우리가 원하고 말고는 상관없다. 아니, 우리가 그 유증을 거부할수록 더 뚜렷하게 남는다. 모든 아이는 부모를 상징적으로 지우면서 성장한다. 자식은 부모의 가르침을 왜곡하거나 아예 잊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나름대로 괴로워하면서 자신의 신경증 혹은 환상을 자식에게 전달할 것이고, 자식은 그것들을 부정할 것이다.
우리는 친해지고 싶은데 그들은 거리를 둔다. 그들은 우리를 우리 자리에 돌려놓는다.
세상은 처음 보듯 바라보고 처음 사는 듯 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보듯 보고 마지막으로 사는 듯 살아야 한다. 일단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새로워져야 한다. 그리고 생을 언제라도 빼앗길 수 있는 재화처럼 여기고 지금 당장 누려야 한다.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 섬광 같은 순간, 시간의 지속으로부터 훔쳐낸 순간이다
몽테뉴는 플라톤을 따라 "철학은 죽음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사라져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슬프다. 그런데 아침저녁으로 그 불길한 일을 강박적으로 떠올린다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어디 있을까. 평생 죽음을 연습하여 어느 날 갑자기 큰 낫을 든 죽음의 신이 찾아와도 놀라지 않거나 그리스도인들이 바니타스화vanitas(죽음의 필연성과 인생의 허무함을 상기시키는 상징을 활용하는 회화 장르?옮긴이)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해골을 마주하고 묵상해야 할 것이다.
다시 한번 기억하자, 쾌락의 조건 중 하나는 무한히 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한 순간은 돌아오고 확장되기를 원한다.
뭔가를 외워서 달달 읊다 보면 깨달음이 번득 일어날 때가 있다. 자기의 창조와 재창조는 언제나 모방한 형식과 새로운 형식 사이의 투쟁에서 나온다. 그러다 결국 자동성에 굴복하면 하던 행동만 하고 변화는 거의 생기지 않는다.
‘토 나오게’ 자주 인용되는 "과거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을뿐더러 지나가지도 않았다"는 미국의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의 문장은 으레 일종의 비극으로, 즉 예전에 있었던 일의 무게가 계속해서 우리를 옭아맨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 문장을 좀더 가볍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동굴학자가 동굴을 둘러보면서 깊이 파묻혀 있는 옛 시대를 깨우듯 우리가 살아온 삶의 추억을 미래로 변화시키라는 부름처럼 말이다.
오래 살았다고 해서 과거의 열망들을 완전히 묻어버릴 수 있을까. "내 안에는 충족되지 못한 위대한 출발들이 있다"고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는 말했다.
과거는 한낱 벌레 끓는 시체가 아니다. 과거는 "보고서가 잔뜩 든 커다란 서랍장"이자 우리를 위협하는 "시든 장미로 꽉 찬 안방"이다. 하지만 신기한 물건이 가득 든 궤짝처럼 잠깐은 마법이 통한다.
우리는 자신을 모른 채 살아간다. 현재라는 안개 속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늘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이해된다. 또렷하지는 않아도 뒤늦게 떠오른 기억의 명암에 비추었을 때만 알 것 같은 의미가 있다.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늙음의 비극이란 한 인생의 총합이 되는 것, 숫자 하나 바뀌지 않는 최종 합산 결과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6 총합 자체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체는 움직이는 모자이크화처럼 늘 헤쳤다 모이기를 반복하며 재구성된다. 이미 경험한 내용은 지리멸렬할 수 있지만 청소년기부터 불쑥불쑥 떠오르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라는 물음은 일종의 쾌락건망증 덕분에 사라진다.
밥을 먹으러 갈 때는 늘 배가 고프고 뭔가가 먹고 싶은 존재일 뿐, 과거에 무엇을 먹었는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긴 세월 축적한 지식만큼 감탄스러우면서도 기대가 안 되는 것은 없다. 용어 하나 숫자 하나까지 세심하게 꿰고 있는 박학 탓에 전체적인 전망을 놓친다면 부질없는 짓이다.
몸은 늙되 마음은 늙지 말라. 세상과 쾌락에 대한 감각을 지키고 걱정 많은 속내와 혐오라는 이중의 함정을 피하라.
영국의 소설가 새뮤얼 버틀러는 "인생은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마지막 날까지도 연습 중일 테고, 서툴게 한 음 한 음 연주해낼 것이다. 몸이 불편한 자, 병든 자, 다친 자, 아픈 자, 어리석은 늙은이에게 위대한 미래가 있을진저. 유년은 노년의 주책맞은 노망이 아니라, 다시 한번 최초의 순간에 흠뻑 빠지고 싶은 자들의 보완책이 될 것이다. 때때로 젊은 사람이 겉늙은 것처럼 유년의 특징이 70대 노인의 얼굴에 새겨질 수도 있다. 어리석음은 나이를 따지지 않으므로.
말리의 만딩고 부족의 일파인 밤바라족에게는 늙은이들이 다시 일곱 살이 되는 의식이 있다고 한다.10 나이는 이제 하나의 표식일 뿐, 나이만으로 생활양식을 추론해낼 수 없다. 행복하게 나이를 먹는 비결은 자기에게 부여된 나이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점진적 쇠약은 점진적 해방과 함께 가기도 한다. 우리는 언제라도 현자이자 미치광이일 수 있고 이성과 장난기, 신중함과 무모함을 겸비할 수 있다. 노년이 청춘에게 부러워하는 것은 단지 활력, 아름다움, 위험을 무릅쓰는 패기, 인지적 유연성만이 아니다. 매일 아침 쌩쌩하게 새로 태어나는 삶의 자세다. 배우고 발견할 것도 많고 한 번은 해봐야 하는 일, 느껴봐야 할 감정이 많은 청춘이 부럽다. 이 본능적 욕구를, 설령 순진해 빠진 사람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지켜야 한다. 흐르는 세월의 크나큰 가르침은 이것이니, 늘 초심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우리를 피해갔거나 위협으로 다가왔던 것을 향해 마침내 마음을 여는 것처럼.
언젠가는 손주를 보고 기뻐하고, 빅토르 위고처럼 ‘할아버지로 사는 기술’, ‘어린이에게 복종하는 기술’을 익히게 되리라.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따뜻한 조언을 베푸는 수호자로서 혈통 속에 위치하며, 후손들의 얼굴에서 점점이 나타나는 닮음을 읽어낼 수 있으리라. 이때는 어린아이들이 주는 이로움을 모두 즐기면서도 거기에 예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들을 보면서 삶의 미숙한 첫걸음을 다시 배우고, 50년 전과 교과서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비교해보면서 즐거워하고,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좋은 성적을 받아오고 우리는 못했던 것을 해내며 집안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끄는 모습을 기특해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손주 세대는 자식 세대와 달리 우리를 허구한 날 판단하거나 짜증을 내거나 비난을 퍼붓지 않는다. 손주들은 잠깐 떼쓰는 것조차 귀엽고, 손주 입에서는 아무리 어리석은 말이 나와도 황홀하기 그지없다. 손주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해지더라도 갈등은 없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역할은 가변적이다. 경제적인 이유에서라도 이 역할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무조건 할아버지 할머니로만 살라는 법은 없다. 노년은 베이비시터 역할을 하거나 그리운 추억을 하나하나 곱씹으라고 있는 게 아니다. 나이가 들어도 함께 투쟁하고,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나이 든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라 흥미진진하고 보완적인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피츠제럴드의 단편은 아름답고, 불행처럼 반박의 여지가 없다.
50세가 넘은 여성들에게 뭐가 남지? 비탄에 젖은 19세기의 과부들, 과거의 올드미스들과는 사정이 전혀 다르지만 안쓰럽기로는 뒤지지 않는 고독이 남는다. 이 고독은 1960년대 성 풍속 혁명 이후에 등장한 것이다. 성 해방은 쾌락의 평등을 약속했지만 실상은 불평등이 지속되고 있다. 차고 넘치는 관능이 모두에게 약속되었으나 아직도 제2의 성 대다수에게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파행 아니면 처절한 사막밖에 없다.
연애라는 영역에서 재산이나 지위는 누구나 사랑할 만한 사람으로 만드는 이유가 된다.
사랑은 ‘시장’이라는 단어와도 잘 어울린다. 이 장사를 하다 보면 저마다 외모, 사회적 지위, 재력에 따라 점수가 매겨진다. 잘나가는 사람은 구혼자를 떼로 몰고 다니지만 안 풀리는 사람은 거절만 쌓여간다. 그들은 실연의 단골손님, 태어날 때부터 병풍 신세다.
남성 혹은 여성의 매혹은 단순히 개인의 취향이라고 하기에는 꽤나 가혹한 법칙을 따른다. 자유연애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결코 대놓고 말하지 않는 이런저런 암묵적 금지가 있다.
위대한 17세기의 대모로 유명한 팔츠 공작부인은 여성에게 몇 살쯤 욕망이 사라지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난 80세밖에 안 됐는데." 그냥 농담이라 하기에는 생각해볼 만한 진실이 숨어 있다.
시몬 베유,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를 생각해보자. 위대한 사람들에 대한 찬탄은 역경에 맞서는 그들의 역량과 단단히 결부되어 있다. 그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독창성과 놀라움으로 가득한 생을 살았기 때문에 본보기로 남았다.
창작의 영역에는 놀라운 본보기가 더 많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영화감독은 90대에도 왕성하게 작업하며 클리셰를 박살 내고 있다. 에드가 모랭은 98세에 새 책을 냈고, 포르투갈의 영화감독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는 100세를 넘겨서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천재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80세를 넘었고, 조각가이자 설치미술가 루이즈 부르주아는 죽을 때까지 일했다. 또 다른 피아니스트 마르시알 솔랄은 90세에도 연주회 무대에 섰다. 그들은 단지 존재만으로 허다한 말을 무색하게 하며 우리에게 노년도 썩 괜찮겠다는 생각을 불어넣는다. 노년이라는 먼 대륙의 밀사인 그들은 그곳에서 생은 맥없이 늘어지기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전히 생은 가능하고 예측 불허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들은 겁에 질린 반항자 무리에게 길을 열어주는 인생의 선발대다.
나이 든 사람 곁에서는 안심이 되고, 비교가 두렵지 않으며, 위안을 얻고, 정신적으로 넉넉해지고, 상대의 전문적 식견에 흠뻑 빠지거나 명석하고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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