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쭉 대화를 나누며 이 이유에 회의감을 표할 때마다, 그들은 나를 마치 처음으로 섹스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1850년대의 이모처럼 바라보았다.

진실은 더 오싹해요. 페이스북이 우리 이야기를 엿들은 다음 정확히 겨냥해서 광고를 띄우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본떠 만든 모델이 너무 정확해서, 마술이라 생각할 만큼 정확하게 우리를 예측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의 사업 모델은 스크린타임이지, 우리의 일생이 아니에요."

문제는 스마트폰의 앱과 노트북에서 여는 웹사이트가 설계되는 방식이다.

우리의 집중력을 좀먹는 현재의 기술 작동 방식은 과거나 지금이나 선택의 결과다

어떤 기술이, 어떤 목적에서, 누구의 이익을 위해 설계되는가?

이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알고리즘은 때에 따라 다르지만 일관된 핵심 원칙이 하나 있다. 소셜미디어는 우리가 화면을 계속 들여다보게 만들 정보를 보여준다. 그게 다다. 우리가 화면을 더 많이 들여다볼수록 그들이 버는 돈도 늘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알고리즘은 언제나 우리가 핸드폰을 내려놓지 않도록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을 정보를 파악해서 그 내용을 점점 화면에 들이붓는다. 알고리즘은 집중을 방해하도록 설계된다.

안타깝게도 인간의 행동에는 기이한 특성이 하나 있다. 대체로 우리는 긍정적이고 잔잔한 것보다 부정적이고 충격적인 것을 훨씬 오래 바라본다

많은 사람이 많은 시간을 분노하는 데 쓰면 문화가 바뀌기 시작한다. 트리스탄이 말했듯이, 이러한 현상은 ‘증오를 습관화’한다

이 웹사이트들은 우리가 분노와 적대감으로 가득한 환경에 있다고 느끼게 만들고, 이로써 우리는 더욱 각성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집중력은 위험을 찾는 상태로 바뀌고, 책을 읽거나 자녀와 함께 노는 활동처럼 더 느린 형태의 집중이 갈수록 힘들어진다.

인류가 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방법은 과학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 정보를 거짓 정보와 구분하고, 힘을 합쳐 조치를 촉구하고, 정치인들을 압박해 행동에 나서게 하는 모든 단계에서 사회 전체가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 알고리즘들이 사회의 토양을 망가뜨리고 있어요… 우리에겐 사회구조가 필요해요. 그 구조를 망가뜨리면,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어린 시절은 아이와 부모 사이의 작은 연결의 순간들로 이루어진다. 그 순간들을 놓치면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

"맥도날드를 탓하고 싶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어요. 제가 먹고 있던 건 제 감정이었어요. 음식을 대응 기제로 삼고 있었던 거예요."

자신의 불안과 불행을 마주해 맞서 싸웠고, 서서히 몸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분명 음식에는 역할이 있었어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문제의 근본 원인은 아니었죠." 니르는 그때 자신이 중요한 교훈 하나를 배웠다고 말했다. "제게는 평생 나를 통제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고, 결국엔 제가 그걸 통제했어요."

적응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유일한 선택지예요.

"내적 트리거는 불편한 감정 상태입니다."

"핵심은 회피예요. ‘이 불편한 상태에서 어떻게 벗어나지?’가 핵심이죠." 그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내적 트리거를 탐구하고 고찰해 그것을 없앨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음을 들쑤시는 감정이나 지루함, 스트레스가 느껴질 때마다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했고, 포스트잇 한 뭉치를 집어 알고 싶은 내용을 그 위에 적었다. 그리고 오로지 글을 충분히 오래 쓴 다음에만 구글에서 그 내용을 검색했다.

"우리는 습관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습관은 끊을 수 있어요. 언제나요. 우리는 습관을 바꿀 수 있어요. 그 방법은 내적 트리거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싶은 충동과 그 행동 사이에 일종의 틈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잔혹한 낙관주의는 비만이나 우울, 중독처럼 우리 문화에 근본 원인이 있는 거대한 문제와 관련해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언어로 단순한 개인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 주장은 낙관적으로 들리는데, 문제를 금방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 주장은 잔혹한데, 이렇게 제시하는 해결책이 너무 제한적이고 근본 문제를 전혀 보지 못하기에 결국 대다수에게 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로널드는 현실에서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의 과학자들이 대규모 연구를 통해 미국에서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주요 원인을 파악해오고 있음을 지적한다.16 그 원인은 ‘건강보험의 부족, 끊임없는 정리해고의 위협, 의사 결정에서 자유재량과 자율성의 부족, 긴 근무시간, 낮은 조직 공정성, 비현실적인 요구’다. 당뇨병을 앓고 있는데 건강보험이 없어서 인슐린을 구매하지 못한다면, 또는 동료들이 한 명씩 정리해고를 당하고 있고 다음번은 내 차례일 것이라는 끔찍한 기분이 든다면, 스트레스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부과되는 것이다.

잔혹한 낙관주의는 처음에는 친절하고 낙관적으로 보이지만 종종 추악한 여파를 미친다.

잔혹한 낙관주의는 이 작고 얄팍한 해결책이 실패할 때 개인이 시스템을 탓할 수 없게 만들고, 결국 개인은 자기 자신을 탓하게 된다. 개인은 자신이 일을 다 망쳤다고, 자신이 못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게 된다. 로널드는 이러한 관점이 과로 같은 "스트레스의 사회 원인에서 주의를 돌리게" 하고, 순식간에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잔혹한 낙관주의는 이렇게 속삭인다. 문제는 시스템에 있는 게 아냐. 문제는 네 안에 있어.

잔혹한 낙관주의는 보통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특수한 사례를 가져다가 그것이 평범한 일인 양 행세한다.

잔혹한 낙관주의는 우리의 집중력을 망가뜨리는 시스템을 바꿀 수 없으므로 우리 개개인의 행동을 바꾸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왜 우리가 이 시스템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를 "낚고" "미치게" 만들도록 설계된 프로그램이 가득한 환경을 왜 받아들여야 하는가?

지나치게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해 사람들을 실패로 이끄는 잔혹한 낙관주의의 대안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비관주의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낙관주의다.

진정성 있는 낙관주의는 우리의 목표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모두와 협력해 그 장애물을 하나씩 해체할 계획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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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기온이 경신될 때마다 뉴스는 94년의 자료화면을 보여줬습니다. 사람들은 에어컨이 돌아가는 실내에 앉아 저마다의 94년 여름을 공유했습니다. 낡은 선풍기 한대에 의존해야 했던 답답한 교실 공기를, 뙤약볕 아래를 걸어가며 느꼈던 어지럼증을, 이러다 죽겠구나 싶을 만큼 달려야 했던 뜨거운 연병장을 용케 기억했습니다.

버스는 한번도 제시간에 오는 법이 없었고 그늘 한조각 없는 정류장에 서서 책받침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으면 티셔츠는 금세 땀으로 흠뻑 젖어버렸습니다. 잔뜩 찌푸린 이마를 타고 진득한 땀이 흘러내렸습니다. 무더위의 ‘무’가 ‘물’을 뜻한다는 것도 그 계절에 처음 배웠습니다. 피부에 습기가 가실 시간이 없었습니다. 엄마는 학원에 가기 전에 식탁에 내놓은 소금을 조금 집어 먹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때 기사 아저씨가 혼잣말이라기엔 지나치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허허, 김일성이도 사람이었구먼? 세상에, 김일성이가 죽었어! 아저씨는 어쩐지 조금 신이 난 것 같았고, 조금 놀란 것도 같았습니다. 순전히 기쁘거나 후련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중학생이었지만 그 정도의 감정은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해 여름도 94년 못지않게 더웠지만, 아슬아슬하게 94년의 기록을 깨지는 못해서 사람들은 약이 오르는 듯 기를 쓰고 94년을 소환했습니다.

그해 여름 저는 아파서는 안 되었습니다. 아픈 사람을 돌보는 게 제가 맡은 일이었으니까요. 직장인처럼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병실을 지켰습니다.

그 여름에는 몇개월 전 삽입한 스텐트가 막히는 바람에 온몸의 염증 수치가 위험한 수준으로 치솟아 막힌 관을 뚫고 새 스텐트를 삽입하는 시술과 염증 치료를 겸하고 있었습니다. 옆구리에 뚫은 구멍으로 안쪽에 고인 물을 빼내고 엑스레이 촬영으로 시술이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하고 매일 채혈로 염증 수치를 살폈습니다

세진의 연인이 되고 처음 인사를 하러 갔을 때 시아버지는 "봄꽃보다 반가운 사람이 왔구나"라고 말했습니다. 드라마에서 들었어도 낯간지러웠을 말을 직접 들은 게 하도 인상적이라 지금껏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은 참 사랑이 많은 분 같아." 언젠가 이런 말을 했을 때 세진은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긍정했습니다. "너도 아버님 닮아서 사랑이 많은가봐." 어느새 저도 이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해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니까 무작정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결혼 첫해 초여름은 활짝 열어놓은 창을 통해 커튼을 부풀리며 들어오는 바람과 고소한 참기름 냄새, 그리고 자꾸만 표 밖으로 도망쳐서 시아버지를 쩔쩔매게 했던 화살표 모양의 커서로 기억됩니다.

그때로부터 10년도 되지 않아 그중 한 사람이 암 환자가 되어 병상에 누울 것이며 나머지 두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지쳐갈 것을 티끌만큼도 예상하지 못했던 오만한 나날이기도 했습니다.

걱정되는 마음은 병상의 환자를 향하는 게 옳았지만, 솔직히 연민과 사랑은 정확히 비례하지 않던가요.

실제로 세진이나 저나 환자의 곁을 지키면서 딱히 몸을 써야 하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할 일은 하루에 몇번 찾아오는 간호사와 담당 의사를 만나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 엑스레이나 CT 촬영을 위해 다른 층으로 이동할 때 동행하는 것, 식사 때 식판을 가져와 침대에 놓아주고 다 먹으면 다시 복도에 내다 놓는 것 등이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일이란 정말로 옆에 있어주는 것, 곁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환자의 말을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추임새를 넣는 정도였어요.

모든 것이 수굿해지는 오후, 환자가 잠시 낮잠에 빠지면 그제야 저는 기억의 결계에서 풀려나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때로는 창밖의 맹렬한 무더위로부터 차단된 유리벽 안에서 안온하게 잠든 환자와 저만이 세상이 모르는 깊은 바닷속을 잠영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곳은 통증도 죽음의 공포도 닿지 않는 깊고 깊은 바다 밑바닥이었습니다. 아직 원망도 미움도 당도하지 않은 곳에서 우리끼리 순진하고 평온했습니다. 적어도 그 풍경에 금이 가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렇게 자식들의 애간장을 다 녹이다가 드디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노인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우선 다리에 힘을 잃었습니다. 혼자서는 침대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본인도 놀라 침대 옆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그 망연자실한 눈빛을 마주하고 세진이 울었습니다.

세진의 눈물을 본 저도 울었습니다. 쩍 금이 간 풍경은 이제 산산이 깨져버렸고 우리는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을 치울 새도 없이 걸음마다 발을 베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나날이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만 해도 무서웠습니다.

환자가 악화할수록 세진의 감정이 크게 휘청였고, 그걸 지켜보며 제 감정도 혹독한 담금질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각자 한껏 무리하고 있었습니다

층마다 어디론가 급히 달려가는 의료진을 봤습니다. 계단을 두칸씩 뛰어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의료진을 보고 있으면 괜히 저까지 덩달아 심장이 뛰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눈앞에서 생사가 엇갈리는 병원이라는 자각이 새삼스레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저와 세진과 시아버지에게 새로운 국면이 찾아왔지만 우리는 그 국면이 어느 방향으로 전개될지 한치 앞도 예측하지 못하고 허청거렸습니다.

"사람한테 충이 뭐예요, 충이? 농담이라도 사람을 벌레라고 부르는 사람이 무슨 의사가 되겠다고 그래요? 사람이 웃겨요? 목숨이 우스워요?"

시럽충 운운했던 그 젊은이는 재수 없게 별 이상한 진지충을 만났다고 아마 그날 내내 떠들고 다녔을 겁니다.

그동안 여자는 이 모든 풍경의 그림자처럼 뒤로 한발짝 물러서서 침대 쪽으로는 일부러 시선을 주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파악하는 노련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로소 믿음직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아버지도 커피를 좋아했습니다. 언젠가 우리 집에 들렀을 때 집 앞 단골 카페에 모시고 가서 따뜻한 카페라테에 시럽을 많이 넣어 드렸더니 달달하고 고소하고 부드러운 게 입맛에 딱 맞는다고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후 시아버지는 카페라테가 먹고 싶을 때면 ‘그 달달하고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찾았습니다. 영어를 잘 모르는 시아버지의 어휘 영역에 어쩌다가 카페라테가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로 각인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이스아메리카노가 가장 많이 들어본 커피의 종류여서 그랬을 수도 있고 발음이 더 쉬워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요. 시아버지의 오해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했으니까요. 저만 오역하지 않으면 되었습니다.

"순우 아재 딸 여읠 때 제일모직 원단으로 맞춘 감색 양복 있지 않니? 만지면 보들보들하지만 걸어놓으면 차르르 떨어지는 그 감색 양복 말이다. 내가 분명히 여기 입고 와서 저 옷장에 걸어놓지 않았니?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없어."

타인이 불쑥 내비친 날것의 감정을 마주쳤을 때만큼 당혹스러운 순간이 또 있을까요

"병원 본관에 있으면 장례식장이 전혀 보이지 않아. 본관은 죽음을 피하려고 오는 곳이잖아. 그러니 죽음을 떠올리는 장례식장을 보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장례식장에서는 이쪽 본관이 잘 보여. 가장 낮은 자리니까 고개만 들면 높은 곳이 전부 보이는 거지. 죽음의 쪽에서 삶의 쪽을 바라보는 건 얼마든지 허락된다는 듯이 말이야. 어머니 장례식 때 한밤중에 이곳 본관의 빛을 쳐다보며 참 외롭다고 생각했어."

숙이? 숙이는 죽었는데? 숙이는 우리 세진이 대학 들어가는 것도 못 보고 죽었다. 불쌍한 여자. 우리 세진이가 얼마나 좋은 대학에 붙었는지, 남들 다 부러워하는 대학원에도 가고 그 높은 박사님까지 된 것을 복 없는 숙이는 못 보고 갔다. 우리 세진이 졸업식 날 박사모도 못 써봤다. 나는 그 박사모를 세번이나 썼다. 대학교 졸업할 때, 대학원 졸업할 때, 진짜 박사님이 되었을 때. 세번 다 세진이가 전부 아버지 덕분이라며 네모난 그 모자를 내 머리에 씌우고 사진을 찍었다. 액자 세개를 나란히 거실 벽에 걸었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사람들은 다 부러워한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내가 그 좋은 대학의 박사님 아들을 두었다고 다들 부러워한다. 우리 세진이가 공부만 잘하는 줄 아냐? 그 아이가 말을 얼마나 곱게 하고 마음도 얼마나 곱게 쓰는지 동네 사람들도 다 안다. 우리 세진이는 빛이 나는 아이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보고 있으면 얼굴에서 윤기가 반들반들 난다. 눈부시게 빛을 뿜는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나온다. 세진이는 태양 같은 아이다. 아니, 태양이다. 배운 거 없이 맨손으로 상경해 산전수전 겪으며 겨우 집 한칸 장만하고 폭삭 늙어버린 이 안병일이에게 우리 세진이는 빛이고 태양이다. 안세진 박사님은 안병일이의 태양이다

죄도 없이 맨날 용서받는 내 심정은 누가 이해해주니?

나는 너랑 아버지를 저울질하지 않아. 둘 다 내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인데 왜 꼭 편을 갈라야 해? 너야말로 늘 편을 가르려고 들지. 가장 소중한 사람이 어떻게 둘이 될 수 있니? 너는 언제나 뒤로 밀리는 내 마음을 절대로 이해 못해. 싸움은 계절성 기후처럼 반복되었습니다.

원망이 삐죽 고개를 내밀 때마다 저는 주문을 외웠습니다. 지금 당장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무서울까? 그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많은 것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장례식장이란 원래 말이 되지 않는 말들이 향 연기처럼 제멋대로 피어올라 허공을 떠다니는 곳임을 이때 배웠습니다. 그중 어떤 말들은 옷과 머리칼에 깊이 배어 쉽게 빠지지 않는 향냄새처럼 뇌리에 진득하게 들러붙어버린다는 것도요.

저들은 왜 나의 애도를 방해하는가. 왜 내 마음을 슬픔 대신 분노로 채우는가. 무슨 의도인가. 저 멀리 어둠 속에 우람한 본관 건물이 보였습니다. 어머니 장례식 때 이 자리에서 본관 건물을 보고 외로웠다는 세진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질질 울면서 엉뚱한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사이 세진은 저에게 용서받을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비로소 눈물이 나왔습니다. 눈물은 아직 따뜻했습니다. 아버님, 잘 가요. 다정했던 기억만 간직할게요.

장례식을 마치고 몇달 후 봄에 세진과 헤어졌습니다. 별 잡음 없던 조용한 이별이었습니다.

내가 돌아와서 치운다고 말해도 어머니는 기어이 밥상을 들고 부엌에 들어가 그릇을 담가놓아요.

연필 끝을 빨아가며 산수 숙제를 하고 있으면 어머니가 사과를 곱게 깎아 와서 "이거 먹고 해라" 다정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러고도 이를 악문 턱의 힘이 빠지지 않아 옥상을 몇바퀴 걸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노트북 화면을 가만히 노려보다 충동적으로 북해도행 비행기표를 예약했습니다. 왠지 눈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습니다.

청주를 석잔째 마셨을 때는 취기가 꽤 올라 주인 여자에게 뷰티풀! 뷰티풀! 하고 주정을 부렸던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존나 행복하냐! 하고 소리를 질렀던 기억도 나는데, 그곳이 초밥집이 아니라 호텔로 돌아가는 빈 거리였기를 바랍니다.

문구점에 가서 달밤이라는 이름의 잉크도 한병 샀습니다

일단 영옥씨,라고 썼습니다. 그러고 또 한참을 머뭇거렸습니다. 문장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한 문장을 쓰고 밖으로 나와 우체통에 엽서를 집어넣었습니다.

프롤로그가 예고하는 작품의 주제는 타인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왜 그리고 어떻게 실패하는가와 같은 고전적 범주에 속해 있다

소설 『자두』가 겨냥하고 있는 소문자 가부장제란 바로 그런 ‘버전업’의 산물인 것이다.

"죄도 짓지 않았는데 용서를 받는 더러운 기분"(91면)이란 화자의 ‘열외상태’가 처음엔 스스로 원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비자발적인 것으로 수렴되고 마는 현실의 구조를 요약적으로 드러낸다. 결혼제도 안에서 여성의 자기실현이 가부장의 ‘선의’ 여부에 달린 것인 한, 여성은 영원히 타자다.

예의 타협은 가부장적 남성들 사이에서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여성 자신의 자기기만을 통한 의식/무의식적 공모를 일정하게 강제하고 또 필요로 하거니와 그러지 않고서는 그러한 타협의 아슬아슬한 균형이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아버지의 오해"를 바로잡는 대신 자신이 그것을 "제대로 해석하고" "오역하지 않으면" 된다고 믿는 순간 타인과 자신에 대한 기만이 이미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 소설은 그에 대해 자각적이면서도 순진한 반성과 비판에 안주하기보다 그것을 이해하고 관용할 만한 무엇으로 만드는 편에 다가간다.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오역에 대한 공포"(13면) 또한 삶의 총체적 진실을 납작하게 억누르는 온갖 ‘섬망’들에 대한 전면적 거부이자 그러한 작가윤리의 간접적 표명인 것이다.

나뭇잎만 보고도 무슨 나무인지 척척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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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진정한 자기 수련이란 인간의 본질적인 핵심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모하는 우리의 정체성에 계속해서 새로운 면모를 더해 가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아란 우리의 소유물(또는 성취)이 아니라, 타인을 포함하여 주변 환경과 관계를 맺으며 서서히 형성해 나가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두 번째로, 마음의 평정을 갖고자 하는 우리의 소망은 대체로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어쩌면 다소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나는 안정을 추구하기보다는 다소 전전긍긍하더라도 우리가 가진 모든 열과 성을 다 바치려는 삶 역시 어떤 장점이 있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세 번째로, 나는 인간의 욕망에는 놀랄 만한 특수성이 있으며 바로 이 특수성이 우리가 가진 기질을 현실에서 발휘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뒷받침해 준다고 생각한다.

자크 라캉은 이 특수성을 욕망의 "진실"이라고 불렀는데, 나는 우리가 이 특수성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의 기질과도 더 멀어진다고 생각한다.

수사적으로 대단히 난해한 텍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개념이 실제로는 전혀 어려운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난해함으로 가린다는 점에 나는 점점 짜증이 난다는 것을 인정한다. 내가 읽고 있는 300쪽에 달하는 고통스러운 내용의 책이 25쪽 분량의 간단명료한 글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 느낄 때, 나는 내 안에서 분노가 치미는 것을 경험한다

내 운명을 내가 능동적으로 바꿔 나갈 수 없다고 말하는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한 내가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나는 이미 경험을 통해 배웠다.

1부에서는 우리 기질이 지닌 특수성에는 우리 욕망의 특수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자아를 형성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우리의 욕망이 완전히 비합리적이거나 사회적으로 불편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욕망의 독특한 모습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기질을 존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를 만족시킬 법한 것을 찾아서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충동인 욕망은 우리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자신을 설명하는 하나의 고정된 정의에 안주하지 않게 해 준다.

욕망은 우리 삶의 의미를 유연하게 하며 삶이 열린 결말을 유지하도록 한다.

욕망이 지닌 특수성이 활성화되면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욕망할 거라고 기대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대신 자신의 욕망이 내리는 수수께끼 같은 지시에 순종해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기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의 과거를 이루는 개인적인 트라우마를 어느 정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좋은 삶의 열쇠는 고통을 피하는 능력이 아니라, 고통을 소화하고 변화시켜 우리가 우리 자신과 더 가치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또한 이 능력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을 포함해 다른 사람들과도 더 가치 있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해 준다.

낯선 관점에서 우리의 일상을 자세하게 관찰하는 법을 배운다면, 변화는 사소한 것으로도 촉발될 수 있다.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방향을 일종의 소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살면서 어느 정도의 격변을 이겨 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살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삶을 살고 싶다면, 삶에서 불안, 특히 인간이란 존재가 지닌 불확실성과 양면적인 감정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꼭 필요하다.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발전시키고자 교단에 서지 않았더라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발전이 때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해 준 학생들에게도 정말 큰 감사를 표한다. 일상적인 의미에 길들여지는 것에 저항하는 어려운 글을 그저 존중하는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 준 학생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어떤 것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진짜 당신이거나,
혹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표현하는 것이고,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버나드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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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까지 제가 존재했던 공간에 저만 쏙 빠져 있었습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제가 없는 제 자리를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손바닥만 한 화면으로 다시 보는 풍경은 낯설었습니다. 그리고 한번 빠져나온 공간과 시간은 어떤 기도를 동원해도 고스란히 복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없이 웅변했습니다.

프랑스의 번역가 발레리 라르보는 번역을 두 말에 담긴 정신의 무게를 다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작업이 유난히 어려웠던 건 저자가 쓴 단어와 문장이 어렵고 현학적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주장을 펼치기 위해 왜 그 단어와 문장을 선택했을지 헤아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한국어를 고르기 전에 그의 생각을 이해하는 게 우선이었습니다만, 작업 내내 저는 이해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애초에 타인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는 게 가능한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까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프라이데이, 사랑하는 나의 프라이데이는 홍역에 걸려 죽었다. 17년 전 3월이 온다.

다음 해면 이십년이 되네요
당신은 죽은 채 세월을 낭비하고 있어요
우리가 얘기하곤 했었던, 지금은 그러기엔 너무 늦은,
도약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난 지금 살고 있어요
그런 도약은 아니라도,
짧고 강렬한 움직임을 유지하면서 말예요

각각의 움직임은 다음 것을 약속해주거든요

리치는 군중의 돌을 맞는 와중에도 의연하고 꿋꿋합니다. 이마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나는 지금 살고 있어요’라고 말하지요. 살아남기 위해 짧고 강렬한 움직임을 계속합니다.

더는 두 시인의 일화를 검색할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왜 가시처럼 콕 박혀 좀처럼 빠지지 않았는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리치와 비숍이 서로를 이해하고 이해받았던 그 몇시간이 미치도록 부러울 수밖에 없었던, 개인적인 몰이해의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 마음을 이해받고 싶었지만 끝내 실패했던 어느 여름의 이야기입니다. 처절하게 오해받았던 어느 겨울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 시간을 진술하는 일은 리치가 말한 ‘짧고 강렬한 움직임’에 해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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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디톡스가 "해결책이 아니"라고 말했다. "일주일에 이틀씩 바깥에서 방독면을 쓰는 노력이 환경오염의 해결책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예요. 개인 차원에서는 단기간 특정 효과를 볼지 몰라요. 하지만 지속 불가능하고,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죠." 그는 광범위한 사회에서 거대한 침략 세력이 우리의 주의력을 크게 바꿔놓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는 환경의 변화만이 진정한 차이를 만들 수 있는" 상황에서 개인의 절제가 주요 해결책이라 말하는 것은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집중력과 관련된 문제에서 우리 각자가 자기 행동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환경 변화가 무슨 소용 있겠는가?

"마술은 사실 집중력의 한계에 관한 겁니다

마술사의 일은(본질적으로는) 우리 주의의 초점을 조종하는 것이다. 사실 그 동전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의 관심이 다른 데 쏠렸을 때 마술사가 동전을 옮겼기 때문에 우리의 초점이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때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다. 마술을 배우는 일은 곧 다른 사람의 주의를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조종하는 방법을 배우는 일이다.

마술에 얼마나 잘 넘어가느냐가 지능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다. 훗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보다는 더 미묘한 요소와 관련이 있습니다. 약점과 한계, 맹점, 또는 우리가 갇힌 편견 같은 것들이요.

현실에서 우리는 잘 속는 고깃덩어리이며, 마술사가 파악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속아 넘어간다.

"마술사가 어떻게 마술을 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의 강점을 알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마술사는 그저 우리의 약점만 알면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 약점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요?" 내가 내 약점을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트리스탄은 지그시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정말로 자기 약점을 잘 안다면 마술은 불가능할 겁니다."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규칙이 있다면, 그게 바로 권력이에요.

트리스탄은 엔지니어들이 사람들의 삶을 방해하는 요소를 더 많이 제안하고(더 많은 진동과 더 많은 알림, 더 많은 술수) 그에 대해 축하받는 모습을 매일 지켜보았을 것이다.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디자인 때문이다. 우리의 산만함은 그들의 연료다.

그는 "인간은 잠시 멈추고 생각을 할 때 다른 결정을 내립니다"라고 말했다.

"기술의 목적이 뭘까? 우리는 왜 기술을 만들까? 우리가 기술을 만드는 이유는 기술이 우리 안의 가장 인간적인 면을 끌어내 확장하기 때문이야. 그게 붓의 목적이야. 첼로도 그렇고, 언어도 그래. 이 기술들은 전부 우리 안의 어떤 면을 넓혀줘. 기술은 우리를 초인으로 만들어주는 게 아냐. 우리를 더욱더 인간적으로 만들어주는 거지."

보였다. "이 시간이 그냥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인생 전체가 휙 하고 사라져요. 이 시간을 기후위기 해결에 썼을 수도 있고, 가족과 함께하거나 사회적 유대감을 강화하는 데 썼을 수도 있어요. 그게 뭐든 더 좋은 삶을 사는 데 쓸 수 있었죠. 이건 그냥…" 그는 말끝을 흐렸다. 나는 내 어린 대자인 애덤과 그의 10대 친구들이 스크롤을 내리고 내리고 또 내리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소셜미디어 사용이 늘면서 사람들이 공감 능력을 잃고 화와 적대감을 더 많이 표출한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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