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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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아서 다 옮길 수가 없어.

한 번에 10개씩.

쇼코와 나는 하굣길에 비디오를 빌려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대부분 청소년관람불가 영화였지만 쇼코와 함께 비디오가게에 가면 어떤 의심도 받지 않고 비디오를 빌릴 수 있었다. 에단 호크가 화가로 나오는 <위대한 유산>, 야한 베드신이 있는 <셰익스피어 인 러브>, 일본 공포영화 <링>, 쥴리아 로버츠의 <노팅 힐> 같은 영화들이었다.

쇼코에게는 가까운 친구가 없었다고 한다. 겉보기에 어울리는 사람들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쇼코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내밀한 우정을 쌓는지 알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다.
사실 쇼코는 아무 사람도 아니었다. 당장 쇼코를 잃어버린다고 해도 내 일상이 달라질 수는 없엇다. 쇼코는 내 고용인도 아니었고, 나와 일상을 공유하는 대학 동기도 아니었고, 가까운 동네 친구도 아니었다. 일상이라는 기계를 돌리는 단순한 톱니바퀴들 속에 쇼코는 끼지 못했다. 진심으로,
쇼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쇼코에게 내가 어떤 의미이기를 바랐다. 쇼코가 내게 편지를 하지 않을 무렵부터 느꼈던 이상한 공허감. 쇼코에게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정신적인 허영심.

나는 마루의 끝에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왜 내가 쇼코를 만나기 위해 굳이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쇼코는 아는 사람도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고, 친구라고 하기에는 낯선 사람이었다. 쇼코는 처음부터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만나서 의미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만큼 얕은 사람도 아니었다.

어디로 떠나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그렇게 박혀버린 삶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맨얼굴을 들여다 보는 일은 유쾌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할아버지는 매사에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상대가 사정이 있어서 잘못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정같은 건 봐줄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다. 이해나 관용이라는 것은 없었고 뒤끝도 있어서 자꾸만 지난 얘기를 끄집어내며 화를 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겁하게도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그런 이상한 오만으로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그때는 나의 삶이 속물적이고 답답한 쇼코의 삶과는 전혀 다른, 자유롭고 하루하루가 생생한 삶이 되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나는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 친구라고 부르던 사람들을 거의 다 잃어갔다. 기다려준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림자를 먹고 자란 내 자의식은 그 친구들마저도 단죄했다. 연봉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친구는 볼 것도 없이 속물이었고, 직장생활에서 서서히 영혼을 잃어간다고 고백하는 친구를 잏ㅐ해주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고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의 끔찍함에 놀랐으나 그조차 오래가지는 못했다.

나도 바닥에 앉자 할아버지는 여자는 차가운 바닥에 엉덩이를 대면 안 된다면서 의자에 앉으라고 소리를 쳤다.
"할아버지, 여기서는 조용히 말해야 돼. 방음이 잘 안돼."
"염병할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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