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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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에 대한 좋을 평을 알라딘에서 많이 읽었지만, 책을 읽을 형편이 되지 않았는데 LAYLA 님의 리뷰를 읽고 꼭 읽어야겠다고 결심했고 기회가 되어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 당시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을 이 책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고 나 자신에게 "너도 괜찮아!"라고 되뇌이며 마음 놓고 울 수 있었다.


나를 이 책으로 끌어들인 LAYLA 님의 리뷰 내용은 이렇다. 

서사보다 주인공들의 정서와 상처가 더 중요하게 다뤄지기 때문이다. 서사는 부수적인 것일 뿐이고,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건 우리 흔한 인간들의 상처와 말 못하는 마음들을 자신만의 나직한 단어들로 조용히 조용히 레이스처럼 뜨는 것이 아니었을지. 그리고 그 감정의 거미줄을 햇살에 비추어 반짝이는 아름다운 순간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지. 

나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 지난 4년 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다. 엄마가 돌아가신 것이 내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더 오래 사실 수 있는데 좀 더 빨리 돌아가신 것은 내 잘못이라는 자책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의사의 선고를 들은 그 순간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제는 하나둘씩 기억이 나 더 괴로운 나의 미친 짓들. 엄마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아닌 罵倒.


누구에게도 말할 수없는 나만의 감옥에서 나는 매일 앞만 보며 지쳐갔다. 과거와의 절교를 선언한 사람처럼 과거는 돌아보지 않고 불투명한 미래만 붙들고 힘겹게 매달려 있었다. 그런 내가 최은영 작가의 소설집을 읽으며 과거를 하나둘씩 꺼내보고 있었다. <쇼코의 미소>에 나오는 작품들에서 희미해진 가족의 모습을, 친구들의 모습을, 내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쇼코의 미소>에 나오는 단편들이 거의 회상이라는 형식으로 펼쳐지기 때문이 아닐까? 다 지나간 일을 담담히 이야기해주는 등장인물들에게 공감을 하고, 아니 공감을 넘어 그 사람들의 신발을 내가 신은 것처럼 하나가 된 나.


소유가 쇼코를 집에 처음 데려온 날,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갔을 때 우리를 바라보며 웃던 엄마와 할아버지의 얼굴이 아직도 떠오른다. 쇼코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저 멀리서 온 손님이라는 이유로 활짝 웃으며 반겨주던 그 모습이. 애정 표현에 서툴고 서로에게 웃어주는 일조차 어색해하던 가족이었기에 쇼코를 반갑게 맞이하던 할아버지와 엄마의 얼굴은 낮설고 우스꽝스럽게만 보였다. p.9(eBook page)

내 남편 될 사람을 처음 집에 데리고 갔을 때, 우리 가족의 모습이 바로 그랬다. 하지만 우리 가족뿐 아니라 외국인을 처음 자신의 집에서 맞이하게 되는 거의 모든 한국 부모들의 반응이 쇼코의 엄마와 할아버지처럼 그렇지 않았을까? 그 외국인이 하루를 묵던 한 달을 지내던.


이렇듯 내가 더욱 최은영 작가의 소설들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최은영 작가의 소설에는 외국인을 상대하는 한국인이 등장하거나 한국인의 외국에서의 생활이 배경을 이루기 때문인 것도 이유가 있다. 지금은 그런 시절이 다 지나갔지만, 나 역시 <씬짜오, 씬짜오>에서 처음 투이네 집을 방문했을 때 투이네 식구가 반갑게 맞아주던 일, 화자 엄마의 기뻐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처럼 나도 내 친구 미찌오와 마사애가 우리 부부의 첫 번째 결혼기념일이라고 남편이 좋아하는 일본 냉면을 해가지고 와서 파티를 했던 기억이 따뜻하게 남아있다. 지금은 흉내 내려고 해도 흉내 낼 수 없는 순수한 기쁨의 순간들.

독일에서의 일은 이제 뿌연 유리창으로 보는 바깥 풍경처럼 희미하다. 그런데도 처음 투이네 집을 방문했을 때를 떠올리면 그때 느꼈던 감정이 생생히 되살아난다. 투이네 식구 모두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던 일. 그 환대에 기뻐하던 엄마의 모습. 어떤 조건도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따뜻한 기분과 우리 두 식구가 같은 공간에 모여 음식을 나눠 먹던 공기를 기억한다. 어떻게 그렇게 여러 사람의 마음이 호의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고작 한 명의 타인과도 제대로 연결되지 못하는 어른이 된 나로서는 그때의 일들이 기이하게까지 느껴진다. p. 87

<씬짜오, 씬짜오>의 화자는 열세 살의 자신을 기억한다.

나는 예쁘지도 않았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하나없는 열세 살짜리 여자애였다. 중략. 존재감이 없는 아이들이 보통 그렇듯 어른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컸다. p. 99

내 13살의 모습을 작가가 보고 글을 쓴 것 같은. 그 부분 뿐이 아니다. 나는 최은영 작가의 글을 읽으며 가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봤다. 나를 지켜보는 눈이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생각을 읽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녀가 내 엄마여서가 아니라 오래 외로웠던 사람이었기에. 이제 나는 사람의 의지와 노력이 생의 행복과 꼭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엄마가 우리 곁에서 행복하지 못했던 건 생에 대한 무책임도, 자기 자신에 대한 방임도 아니었다는 것을. p.118

<쇼코의 미소>에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인간들의 상처와 말 못 하는 마음들이 담담하게 서술된다. 누구의 잘못인지 따지지 않고, 누구를 미워하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이며 이어지기 때문에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오면서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타인의 고통 앞에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고통에는 미움이 존재하지 않기도 하지만, 그녀의 인물들은 상처받지 않은 인물이 없고, 한 번의 상처로 끝나지 않은,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있기 때문에.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두를 잃고 나서도 더 잃을 것이 남아 있던 이모의 모습을.

엄마는 이모를 사랑했다.  p.125

그렇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도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소설처럼 모두가 세월호에 연루되거나, 베트남 전쟁에서 가족을 잃거나, 5.18 민주화 운동에 죽임을 당한 가족이 있거나,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이거나, 죽을병에 걸린 가족과 사는 것은 아니더라도.

엄마가 이모를 부담스러워했다는 사실은 이모를 아프게 했지만 그만큼이나 엄마 역시 오래도록 아프게 했다. 지금도 엄마는 엄마가 어떻게 순애 이모를 저버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자신이 상상할수조차 없는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가 왜 그리도 어려웠는지 엄마는 생각한다. 크게 싸우고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주 조금씩 멀어져서 더이상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후자다. 이십대 초반에 엄마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인연들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할 수 있는 얼굴들이 아직도 엄마의 인생에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스므 살 때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때는 뭘 모르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면서. p.145-146

작가의 말에 최은영 작가는 이렇게 쓴다.

십대와 이심대의 나는 나에게 너무 모진 인간이었다. 내가 나라는 이유만으로 미워하고 부당하게 대했던 것에 대해 그때의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애에게 맛있는 음식도 해주고 어깨도 주물러주고 모든 것이 괜찮아지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따뜻하고 밝은 곳에 데려가서 그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그렇게 겁이 많은데도 용기를 내줘서, 여기까지 함께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중략.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쪽에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 길에서 나 또한 두려움 없이, 온전한 나 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p.371-372

그녀는 작가의 말에서조차 내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것 같다. 아니 그녀가 맛있는 음식도 해주고 어깨도 주물러주고 모든 것이 괜찮아지리라고 말해주는 대상이 나라는 아이인 것 같았다. 내가 간호사가 되기로 한 계기는 여러 가지지만 그중 하나는 내 자신이 되고 싶었고,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동반자가 되고 싶어서이다. 아래의 비디오는 클리브랜드 클리닉에서 만든 비디오이다. 이 비디오를 보면서 소리를 내지 않지만 조용히 개인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어떤 의견이나 주장도 없는 것이 최은영 작가의 소설과 닮았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자신만의 고통이 있고, 스토리가 있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이 소설을 다 읽었다고 달라진 것은 없지만, 이 세상에는 나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 부끄러움, 분노, 좌절, 미움, 죄책감 등 다양한 감정들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그래서 눈을 들고 주변을 둘러보면 상처 입고, 어리숙하고, 어찌할 줄 모르는 당신이 다정히 웃고 있는 것 같다.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쪽에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최은영 작가. 흘릴 필요 없는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두를 잃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작가의 글로 더 앞당겨 오면 좋겠다. 왜냐하면, 소설이란 결국 우리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니까. 이런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나 또한, 당신 또한 점점 두려움 없이, 온전한 나나 당신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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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8-01-31 05:56   좋아요 0 | URL
저 원래 책 휘리릭 읽어버리는 스타일인데 이 책은 그렇게 못하겠더라구요. 단편 한개씩 천천히 아껴가면서 읽었어요. 제가 뭐라고 말해야할지 몰랐던 느낌을 라로님이 잘 표현해주셔서 기분이 뭉클해요.

라로 2018-01-31 10:02   좋아요 0 | URL
저도요. 사실 저는 소설을 잘 안 읽는 편인데도 이 소설은 소설같지 않고 실화 같더군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도 기분이 뭉클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