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싱의 고백 - 헨리 라이크로프트 수상록
조지 기싱 지음, 이상옥 옮김 / 효형출판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Hoc erat in votis.


글의 서문 앞에 적혀 있는 저 글은 라틴어인데 '이것은 바라는 것이었다.' 라는 뜻인가보다. 그렇게 번역되어 있는 것을 보니.


현재 푹 빠져서 읽고 있는 책. 하지만 아직도 다 읽으려면 많이 남은 책.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도 그저 이 세상에 살며 고되게 일했다.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도 죽어서 휴식을 찾게 되었을 뿐이다. 8

남에게 신세를 진다는 것은 그에게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가 자랑삼아 하는 말을 딱 한 번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빚을 진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10

그동안 나는 어디서나 안식을 찾아보았지만, 책을 들고 한쪽 구석에 앉아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 17

나는 이 낡은 펜대가 나를 원망하고 있으리라고 상상 할 수도 있다. 이 펜대는 그간 나의 문필생활을 위해 훌륭히 봉사해오지 않았던가? 이제 내가 행복해졌다고 해서 이 펜대가 먼지나 뒤집어 쓰고 있도록 못 본 척해서야 되겠는가? 날이면 날마다 내 집게손가락에 놓여 있던 바로 그 펜이 아닌가? 그게 그러니까 몇 년 동안이던가? 적어도 20년은 될 것이다. 토턴엄 로에 있는 어떤 가게에서 이 펜대를 사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 그날 나는 문진도 하나 샀는데, 값이 1실링이나 되는 사치품을 사면서 몸을 떨었다. 그때는 새로 칠한 바니스 때문에 번쩍이던 펜대가 지금은 아래위 모두 수수한 갈색일 뿐이다. 펜대를 잡던 집게손가락엔 지금 굳은살이 박혀 있다. 19

방이 어쩌면 이토록 조용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방에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거나, 양탄자위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황금 햇살의 형상을 바라보거나, 벽에 걸린 액자 속의 판화들을 하나씩 살피거나, 책꽃이에 줄지어 늘어선 내 사랑하는 책들을 흝어보았다. 집안에 움직이는 물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정원에서는 새들이 움직이는 소리며 날개를 퍼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원하기만 한다면, 나는 하루종일이라도 그리고 밤이 되어 더 깊은 정적이 찾아올 때까지도 이렇게 앉아 있을 수 있다. 22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면 쓰고 싶은 마음이 내킬 때가 아니면 쓰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23

가정에서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은 편안함이다. 세부적인 미장은 돈, 참을성 그리고 안목이 있을 경우 추가하면 된다. 24

이제는 새로 산 책을 책꽂이에 꽂으면서 "내게 너를 읽을 눈이 있는 한 여기 서 있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짜릿한 기쁨으로 나는 몸이 떨린다. 25

"대도시의 거주자들을 위해서, 특히 셋집, 하숙집, 아파트 혹은 인간의 빈곤이나 우매함이 ‘집‘이라고 고안해낸 그 집 같지도 않은 집에서 살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라는 구절을 덧붙이고 싶다. 25

나는 금욕주의자의 미덕을 곰곰히 생각해 보곤 했지만 그것은 늘 헛된 일이었다. 이 작은 지구 위에서 거주지 때문에 마음을 졸인다는 것이야말로 바보스럽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하늘의 눈 태양이 비치는 곳이면 어디든 현자에게는
휴식처가 되고 행복한 피난처가 될 수 있으리. -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1막 3장 275~6행

인간의 우매함에 대해 격분한다는 것은 인간이 좀 덜 우매해졌으면 하고 바라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짓이다. 30

사람들이 흔히 돈으로도 가장 귀한 것들은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상식적인 말은 곧 그들이 돈이 부족하여 고생한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줄 뿐이다. (중략) 그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흐믓한 즐거움을, 모든 사람들이 마음으로 희구하는 소박한 행복을 가난 때문에 상실해야 했던가! 해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돈 때문에 불가능했다. 내게 약간의 돈만 있었어도 할 수 있었을 일들을 돈이 없어서 하지 못하여 슬픔, 오해, 아니 잔인한 따돌림까지 겪어야 했다. 또 내가 마땅히 누려야 했을 흐믓한 기쁨과 만족을 궁핍 때문애 줄이거나 포기해야 했던 경우도 무수히 많다. 나는 단지 옹색한 형편 때문에 친구들을 잃어야 했다. 친구로 삼을 만한 사람들이 나에게는 낯선 이들로 남아야 했다. 쓰라린 외로움, 친구를 갈망하고 잇을 때 내게 강요된 외로움이 나의 삶을 저주하곤 했는데 그것은 오직 내가 가난하기 때문이었다. 돈으로 값을 치르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도덕적 선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이 말이 별로 과장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35-36

인간은 자신의 불행 속에 홀딱 빠지는 성미 고약한 짐승이다. Homo animal querulum cupid suis incumbens miseriis. 37

나는 불만에 가득 찬 자기 연민의 깊디깊은 수렁에 빠진 채 하늘의 빛까지 완강히 외명하면서 비굴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

나는 우연히 알게 된 사람들과 사귀기를 꺼렸기 때문에 그 암담한 시절을 겪으면서도 단 한 명의 친구만을 사귀었을 뿐이다. 43

나는 빵 살 돈 때문에 낯선 사람들에게 구걸해야 할 만큼 궁지에 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겪은 모든 것 중에서도 이 구걸이 가장 쓰라린 체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나는 친구나 동료에게 빚을 지는 것을 구걸보다 더 못할 짓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나에게는 늘 나와 세계라는 두 존재만 있었고, 이들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는 늘 적대적이었다. 44

나이가 쉰셋 된 사람이라면 사라져버린 젊은 시절만을 생각하고 있지는 말아야 한다. 51

그러나 대체로 나는 가난말고는 별로 불평할 일이 없이 살았다. 56

젊었기에 견뎌낼 수 있었던 그 모든 고난을 돌이켜 생각하면 참으로 놀랍다. 30년 전의 나를 돌이켜보면 지금의 나는 얼마나 보잘것없이 허약하기만 한 못난이인가!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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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7-08-02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의 눈 태양이 비치는 곳이면 어디든 현자에게는
휴식처가 되고 행복한 피난처가 될 수 있으리. -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1막 3장 275~6행
* * *
《리처드 2세》를 최근에 읽은 덕분에 저 구절을 대하니 ‘풀버전‘이 너무나 궁금해서 다시금 찾아봤답니다. 후일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헨리 4세‘로 등극하게 되는 ‘헨리 볼링브로크‘가 리처드 2세로부터 ‘부당한 추방 명령‘을 받고 조국을 떠날 때, 그의 아버지(존 오브 곤트)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격려의 말‘인데,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로 ‘따스한 父情‘이 느껴지는 대사여서 저도 정말 인상깊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라로님 덕분에 그 구절을 옮겨 적으며 다시금 음미해 봅니다.

태양이 내려 쪼이는 장소는 모두가 다
현자(賢者)에겐 항구요 아늑한 정박지니라.
곤경에 처해서는 이렇게 생각해라 ㅡ
곤경처럼 도움이 되는 것 또 없다고.
전하께서 너를 추방했다 생각지 말고, 네가 전하를
멀리한다고 생각해라. 괴로움을 심약하게 받아들이면,
괴로움은 한층 더 무겁게 짓누르는 법.
가거라. 영예를 쟁취하라고 내 너를 보내는 것 ㅡ
전하께서 너를 추방하심이 아니다. 아니면,
생명을 삼키는 역병이 대기 중에 맴돌아,
네가 신선한 풍토를 찾아 도피한다 생각하거라.
네가 무엇을 값진 것으로 여기든, 네가 가는 곳에
그것이 있는 것이지, 그것을 뒤에 남긴다 생각 마라.
지저귀는 새들을 악사들로 여기고,
네가 밟는 초원을 골풀 깔린 접견실로,
꽃들은 아리따운 여인들로, 그리고 네 발걸음은
흥겨운 무도의 율동이나 춤으로 여기거라.
이빨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슬픔도 그걸 조소하고
가볍게 여기는 자를 물 힘이 약해지나니.




라로 2017-08-03 12:00   좋아요 1 | URL
멋지십니다!! 저 작은 구절만 보고도 이렇게 풀버전을 옮겨주시다니요!!
알라딘에 이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되는 분은 오렌 님이 유일할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