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기형도의 시에서 빌려 왔다.
다행이다, 여름은 나에게만 무더운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무더웠을 테니까.
돈은 누구는 많고 누구는 없고,
미모도 누구는 예쁘고 누구는 예쁘지 않고
공부도 누구는 잘하고 누구는 못하는 것처럼 세상의 많은 것들이 이분법적으로 나뉘는데
자연 현상은 같은 공간에 있다면 똑같이 느끼는 것이니.
아니다. 그것도 사람에 따라서 무덥다고 춥다고 느끼는 정도가 다를 수 있겠다.
애를 셋을 낳아봤지만 늘 첫 경험은 오래 기억된다.
H양이 태어난 시기는 음력으로는 아직도 봄이고 양력으로는 초여름이었던 시기였는데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정말 무지해서 힘들었고
감정적으로도 안정이 안 됐었다.
더구나 첫 출산이라 친정엄마가 와서 내 바라지를 해줘야 한다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똘똘 뭉쳐서
한창 바쁘시던 엄마를 결국엔 미국까지 오시게 했었다.
그런데 아기는 예정일이 일주일이 지나도 태어날 조짐을 안 보이고 배만 점점 산더미처럼 불러왔다.
바늘 끝으로 조금만 건드려도 곧 터질듯하던 배,,,지금 생각하면 좀 끔찍하다.
엄마는 3주일 예정으로 오셨는데 아기는 엄마가 떠나시기 5일 전에 태어났다.
태어나던 날도 금방 나와주지 않고 거의 20시간이 걸려 태어났다.
푸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던 나는 결국 태어난 딸아이의 머리 모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더랬다.
아기의 머리에 혹이 생긴 것처럼.
하지만 의사의 말대로 그건 몇 년이 지나고서 없어졌더랬다.(하지만 완전히 없어지진 않고 내가 만저보면 어딘지 안다.ㅠㅠ)
아직까지 없어지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보는 내가 말이지.
이렇게 긴 사설을 푸는 이유는 사람에 따라 고통을 받는 것도 다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미국에서 출산할 때 정말 좋았다.
호텔 같은 독방에 여러 명의 간호사가 들락거리며 수시로 내 상태를 체크하고 의사샘도 여러 번 왔다갔다하고
더구나 내가 받는 고통의 수치를 컴퓨터로 나타내는 기계도 있어서
왔다갔다하시던 의사샘이 나에게 그랬다.
"이 정도 수치면 병원을 들었다 놨을 정도로 비명을 질러야 하는데 왜 가만히 있어요?"라고.
사실 안 아파서 소리를 안 지른 게 아니었다.
출산 전에 오셔서 나와 함께 했던 엄마는 자신의 출산(나를 낳으시던)을 얘기하시면서
출산을 하는데 이틀이 걸렸으며 죽음과 맞닥트렸는데도 소리도 지르지 않고 꾹 참았다는 식의 무용담을
늘어놓으셨던 게 각인이 되었던지 나도 찍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더구나 무통분만을 하던 미국인들에 비해 나는 그 무통분만도 거부했기 때문에 더 신기했나 보다.
암튼 고통을 참는 것은 유전되는 건지
딸아이는 4살 때 아빠와 장난을 치다가 눈을 테이블에 찢었었다.
쌍거플 라인이 찢어졌었는데 남편은 급한 김에 아이를 업고서 시부모님의 친구분이 하시는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분은 아이가 너무 어리고 위험한 부분이라 마취를 하기 어렵다시며 그냥 꿰맸단다.
그런데 H양이 찍소리도 안 하고 눈물도 안 흘리고 눈주위를 꿰매는 것을 꾹 참았단다.
의사샘도 저런 아이는 처음 봤다며 놀라워하시면서 아이에게 돈까지 쥐여주셨더랬다.ㅎㅎㅎ
지금 생각해도 참 독한 것이다. (고통을 못 느끼는 병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언젠가 신문에서 읽은 기사라 기억이 희미하지만
유전자를 이용해서 더 강한 체육인을 만드는 것에 대한 기사였었다.
분명 H양의 유전자에는 고통을 참아내는 특별한 인자가 있을 것이다.
올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고 느껴지는데(난 1994년에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그때의 한국 더위를 모른다)
모두 잘 견뎠다. 토닥토닥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나는 올여름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이열치열 했던 기억이 새롭다.
복날에 더운 음식을 먹으며 더위를 잠시 잊듯이
가만히 앉아서 흐르는 땀을 견디며 책을 읽다 보면 가끔 바람이 불어 땀을 시원하게 만들어 줬던 기억도 신기롭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당연히[안나 카레리나]이다.
더구나 2권의 그 두께라니!!
그 책을 읽을 때는 독서가 아니라 수양을 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책을 다 읽고 순오기님의 작은 도서관에 기증했다.
벌써 과거가 된 셈이다.
손목까지 뻐근한 느낌이 들어 2권을 읽을 때는 들고 읽기가 어려워
거의 누워서 몸을 활처럼 구부려 책을 내 허벅지에 올려놓고 읽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저 책을 읽어냈다는 그 뿌듯함은 어쩌면 그런 노력 때문에 더 오래 남는 것 같다.
열 몇 시간의 아픔을 참으면서도 무통분만을 선택하지 않고서 머리에 혹까지 만들어 낳은 아이.
지금은 키가 나보다 더 커지고 발도 나보다 더 크고 얼굴도 나보다 예쁘고 몸매도 나보다 훨 멋진 아이로 성장한
딸아이를 쳐다보는 그 뿌듯함과 별반 다르지 않은 감정을 느낀다는 게 좀 이상하지만.
(참고로 라주미힌님이 질투를 하실지는 모르지만, 딸아이는 이미 170cm가 넘고 미니스커트를 안 입어서 그렇지 것도 잘 어울릴 것 같다.훗)
계속 읽고 있는 알렝 드 보통의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에서 보통이 '안나 카레리나'를 아주 살짝 언급했을 때
느꼈던 그 성취감 역시 혼자만의 은밀한 뿌듯함이지만 분명 내 몸에서 도파민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전문가가 발표한 바로는, 자신이 힘들게 뭔가에 대한 성취감을 느낄때에 신경전달물질의 일종인 도파민(dopamine)이 생산되는데, 이 물질은 사람들의 집중력과 동기에 영향을 주며, 쾌락과 중독과 전율에 관여한다고 한다.- 에세르
그러니까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것은 쾌락, 중독, 전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책을 더 붙잡고 있게 되나 보다.
중독되어 더 많은 도파민을 생산하고 싶은 욕구가 독서에서 생기는 것이다.
더운 날씨에도 쾌락은 필요하다. 땀을 찔찔 흘리고 끈적끈적 기분이 나빠져도 말이지.
보통의 책을 다 읽고 나면 집에 있는 수 천 권(정확히 1384권-영어책 빼고)의 책을 마주하고도 멍할 것 같다.
그다음 무슨 책을 꺼내야 할까?
하지만 다행히 알라딘 서재에는 차 안의 네비게이션처럼 내가 다음에 읽어야 할 책을 안내해주는 분들이 계시다.
꽃양배추님, 다락방님, 달사르님, 댈러웨이님 등등 많은 분들이 다 하루키의 이번 에세이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가
좋다셨는데 오늘 읽은 어떤 분의 리뷰(이 분은 왠지 나 혼자만 알고 싶어~~~흑)를 읽고
바로 결정을 내렸다.
여름을 가장 좋아한다는 하루키, 그의 에세이를 아직도 여름처럼 느껴지는 날에 읽을 결심을 하게 되어 기쁘다.
남에게는 별 의미 없겠지만, 오히려 '얘 뭐야?'라는 느낌이 들게까지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뭔가 아주 소중한 것을 발견한 것처럼 기쁘다.
그리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아직 많고 자기가 읽은 책에 대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책을 읽는 사람에 관한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얼마 전(바로 내가 주차장에서 뒤로 넘어진 날) 우리 가족은 다 함께 <토탈 리콜>을 봤다.
전작의 주인공이었던 아놀드 슈왈제네거와 비슷하게 생긴 배우라고 느껴지는 콜린 파렐이
이번 영화의 주인공이었는데 그 영화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 영화에서 주인공인 더글라스 퀘이드(진짜는 칼 하우저)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처음에 나오는데
미래는 영국과 호주에서만 사람들이 사는데 그때 호주는 영국의 속국처럼 된다.
아무튼, 식민지에 있는 사람들이 fall이라는 것을 타고 영국으로 매일 일을 하러 가는데
그때 더글라스 퀘이드는 책을 읽는다!!!!!!!!!!!!!!!!!!!!!!!!!!!!!!!!!!!!
종이로 된 책,,,앞 페이지부터 너덜너덜해진 책이지만 그는 책을 읽으며 출근을 한다!!!!!
미래에 대한 허구적인 설정이지만 얼마나 반갑던지!!
종이책은 그 먼 미래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새삼 뭉클했던 느낌.
(반대로 그의 부인으로 나오는 로리가 나중에 싸우면서 그의 책에 대한 욕을 할 때도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걸 느끼면서 나도 그녀를 때려주고 싶었다!!)
그것 말고도 이 영화는 기발한 아이디어도 많았고 액션도 좋았다. 추천할 만한 영화다. 재밌으니까.
기억과 책과 영화를 종횡무진 왔다갔다했다.풋
아직 더워서 그러는 거라고 말하기엔 부끄러운 핑계며 거짓말이고,
간단하게 두 줄로 말하자면 내가 쓰고자 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알더라도 그것을 풀어낼 만한 글 재주가 나에겐 없다는 슬픈 고백에 관한 이야기이며 기형도를 끼워 넣고 싶었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