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제 읽은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를 읽고 생긴 일과 변화에 대한 글이다.
1. 위지안은 척추에도 암이 전이되어 몸을 거의 움직일 수 없었나 보다.
그래서 남편이 그녀의 몸을 닦아주기도 했지만, 그녀의 표현에 따르자면
수치스럽게도 내 엉덩이를 스스로 닦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남편이 그것까지 해주어야만 했다. (중략) 날이 밝아올 무렵 다시 잠에서 깼다. 눈만 돌려 옆을 보니 보호자용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 맥도널드가(그녀의 남편,,머리가 M자로 벗겨지고 있다고 그녀가 지은 별명) 보이지 않았다.
눈을 조금 더 돌리자, 그의 머리가 보였다. 신경을 많이 써서였는지 가운데 머리에 탈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그는 무릎을 끓고 기도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벌써 깬 거야?"
내가 물었다.
"응, 조금 잤는데 금방 깼네."
남편이 대답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숨도 못 잔 것 같았다.
"뭐라고 기도했어?"
나의 물음에 맥도널드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말했다.
"하늘에 빌었어. 지안, 당신을 살려달라고. 당신이 살아서 내가 앞으로 50년 동안 매일매일 당신 엉덩이를 닦아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다면 그것은 상대가 아닌, 자기 스스로가 흔들리고 있기 떄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금 문득 든다.
p.98~99
이 부분을 어젯밤 남편에게 얘기해줬다. 남편에게 "너도 내가 그렇게 아프면 위지안의 맥도널드처럼 내 엉덩이를 닦아주고 그런 기도도 할 거냐"고. 남편은 웃으면서 잘 모르겠단다. 아픈 나를 상상하기 어렵다며, 하지만 자기는 내 엉덩이를 사랑하니까 닦아 줄 거라고, ㅎㅎ
내가 그랬다. "몇 달 정도 네가 내 엉덩이 닦는 걸 허락해 줄 수 있지만 50년 동안 내 엉덩이를
너에게 맡기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도리도리 그런 생각 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은 상대가 아닌 내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맞다.
2.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뭐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없지만, 만약 누군가 그런 질문을 한다면
아주 많은 고민을 할 것이지만 《템플 그랜딘》이라고 말할 것이다.
영화의 작품성이니 뭐니 그런 거 생각하고 고르라면 또 다른 영화를 고르겠지만
이 영화는 나에게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랄까? 이유랄까? 그런 명확한 태도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위지안의 책을 읽으면서 이 영화를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 있어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소제목은 「진짜 성공은 하모니라는 것」p.88
그녀가 아프기 전에 어느 멋진 부부의 집에 저녁 초대를 받아 가게 되었다.
그녀가 그 부부를 보면서 '나중엔 이 사람들처럼 나이 들고 싶다'를 생각을 했다는데 정말 멋진 부부인것 같다.
개인의 이기심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개발보다는 환경과의 조화를 더욱 소중히 여기는 부부.
지하실에서 와인을 가져와 "여러분 드디어 이 와인을 딸 수 있게 됐습니다! 가장 반가운 커플이 우리 집을 찾아왔을 때 이걸 따겠다고 아내와 약속했거든요."라는 멘트를 날려 손님 스스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사람들.
학문과 예술, 사회와 문명, 인생과 사랑 등 온갖 경계를 넘나들며 통찰이 있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의 만남을 회고하며 위지안은 이렇게 쓴다.
우리가 무언가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존재라면 그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를 들어 메슬로우의 욕구 5단계(생리적-안전-소속감과 애정-존경-자아실현) 중에서 초기의 두 단계 정도만 추구한다면 말이다. 오로지 자기 밖에 모르는 삶을 살았다면, 언젠가 삶의 끝에 이르렀을 때 '좀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지 못했음을 분명히 후회하게 될 것이다. (중략)
인생이란 아무것도 안 하면서 살기엔 너무 소중하고, 출세만을 위해 살기에는 너무 값지다. 혼자 깨어 있는 적막한 시간에 마음 깊은 곳에서 영혼의 갈채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뜻있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 좋은 인생일 것이다.(중략)
서른 문턱을 넘자마자 병상에 누워 하루치의 모래알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시간을 마주하다 보면, 많이 부족하게 살아온 지난날이 부끄러워지는 게 사실이다.
그들 부부의 말처럼 중간 정도가 딱 좋을 것 같다. 개인의 가치와 공동의 사회적 가치가 합쳐진 삶이야말로 진정 '멋진 인생'이며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낼 수 있을 만큼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내가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개인적 목적)가 이 지구라는 행성에 어떤 도움을 주기 위해 왔는지(사회적 목적)가 온전하게 결합되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각성이 아닐까 싶다.
"자기 삶의 궤적이 다른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바람직한 변화를 줄 수 있다면, 이 세상을 손톱만큼이라도 더 좋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리라."
p.90~92
故 장영희 선생님은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자주 인용하시고 자신의 홈페이지 대문에도 적어 놓으셨는데
위지안의 글을 읽으면서 평소에 장영희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던 에밀리 디킨슨의 시도 생각난다.
내가 만약 누군가의 마음의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내가 만약 한 생명의 고통을 덜어 주고
기진맥진해서 떨어지는 울새 한 마리를
다시 둥지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템플 그랜딘 영화에는 바로 이런 것을 얘기해주는 한 대사가 있다. 템플 그랜딘은 4살 때부터 자폐증을 지니게 되었는데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험난한 시련을 이겨내고 자신의 꿈을 펼쳤다. 비학대적인 가축시설의 설계자이며 콜로라도 주립대학의 준교수이며 동물학자이다. 영화에서 그녀가 비학대적인 가축시설을 설계한 뒤 그녀의 친구를 그곳에 데려가서 구경시켜주는 부분이 나온다. 그런데 그 친구는 앞이 안 보이는 장애우이다. 템플은 이 광경을 다른 일반사람에게 보여주면 너무 끔찍해하고 충격을 받을까 봐 너에게 보여준다면서 그 친구만이 보통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서…. 자신의 생각이 없어지기를 바라지 않았고 가축에 대한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느꼈으며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며 자신은 아직도 인생에 대해서 많은 것을 모르지만 자신의 인생이 의미가 있기를 바랐다고 말한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아주 좋았지만, 마지막 부분은 정말 압권이었다.
그감동의 쓰나미라니!!! 몇 번을 돌려봐도 감동적이다.
이 영화는 내 아이폰에도 저장되어 있어서 가끔 마지막 부분을 돌려보기도 한다.
어젯밤 남편에게 내 엉덩이 닦아 줄 거냐는 싱거운 질문을 하다가
"나는 뭐냐??? 내 인생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위지안은 30대에 세계 100위 안에 드는 대학의 교수고,
템플 그랜딘도 강한 의지로 장애를 극복하고 이 세상에 도움을 주고 있는데,,ㅜㅜ"
남편이 조용히 내 눈을 들여다 보면서 그런다.
"너는 우리 사랑하는 세 아이들의 엄마잖아. 너는 이 세상에 세 아이들을 데려오는 아주 큰 일을 한 거야." 란다.
그 대답을 들었을 때 어느 정도 마음이 훈훈하긴 했지만 뭔가 부족했다.
분명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아주 개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그 이유를 계속 생각하고 있다면 언젠가 나에게 보이지 않을까?
템플 그랜딘역을 맡은 클래어 데인즈는 정말 연기를 잘 했다.
그녀는 항상 연기를 잘 한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가 여러가지이지만 특별히 그녀가 내 막내 시누이와 닮았기 때문에 더 좋아한다.
이 사진은 클레어 데인즈와 템플 그랜딘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아마도 영화 촬영을 하다 찍은 사진 같으다. 클레어 데인즈가 입고 있는 옷이 낮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