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무나 엄정하게 아들을 대했기 때문에 특별한 유언장이 없다.
줄기차게
칭찬, 숭배, 예찬 일변도로 대했기 때문이다.
가까이서 생활하는 관찰자로서 그를 칭찬했다.
나로부터 개선된, 진화된 생물체로 태어난 미래의 인간으로 숭배했다.
인류의 유전자를 그대로 보유한 미래 세대의 구성원으로서 예찬했다.
나는 인류문명의 발달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고 좋아하는 사람이다.
인류의 미래를 가슴 벅차게 기대하는 사람이다.
아들이 기억하는 나의 모든 순간이 유언장이 될 것이다.
그의 장점을 혹시 그가 잊을까봐 늘 깨우쳐주려고 노력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그를 칭찬할 거리를 만들고 찾았다.
나는 아이를 낳고 나서는 이 세상에서 내가 낳은 아이를 제일 무서워 하면서 살았다.
혹시 그에게
내가 나쁜 영향을 줄까봐 평생을 긴장하며 살았다.
아들을 비웃거나 빈정거리는 말을 한 기억이 없다.
그런 정신 상태에 잠긴 기억도 없다.
나의 아들은 기억 속의 나를 종종 추억하면서 웃기만 하면 된다.
[점선뎐]
p. 380~381
오늘 나는 일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현관문을 여는 순간 아들 N군이 뭔가를 후다닥 한 뒤 소파로 날아가 사뿐하게 앉았다.
얼굴은 잔뜩 긴장되고 땀까지 흘리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집으로 들어가면서 점심은 먹었느냐고 물어봤다.
아들은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았다고 말했다.
남편에게 아들의 점심을 꼭 책임지라고 하고서 일을 하러 갔는데
아들은 점심도 먹지 않고 나에게 숨길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가
아들의 예상보다 내가 일찍 오니까 놀라서 기겁을 한 거다.
일단 남편에게 전화했다. 아들의 점심을 어떻게 했느냐고.
남편은 아침에 해든이를 데리고 나오면서 아들에게 학교에서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단다.
아들은 사양하고 자기가 알아서 먹는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단다.
아들은 아빠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점심도 먹지 않고 열심히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었던 거다.
말 그대로 식음을 전폐하고.
나는 아들이 점심도 먹지 않고서 게임을 한 것도 속상했지만
내가 들어온다고 혼날까 봐 귀신을 보고 놀란 사람처럼 혼비백산한 모습을 보게 된 게 더 속상했다.
내 성격대로 화를 내다가 화를 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차분한 목소리로 내 옆에 앉게 해서는 충고랍시고
"네가 숨기고 싶은 일을 하지 마라."고 말했다.
네가 숨기고 싶은 일은 정당한 일이 아닐 거니까. 엄마에게도 정정당당하지 못하면 안 된다고도 했다.
네가 하고 있는 일이 너의 행동에 의해서 정당하거나 그렇지 않은 일로 취급 될 수도 있다는 말도 했다.
이말도 하고 저말도 했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해도 마음이 아픈게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고는 저녁을 먹고 빨래를 했다.
마른빨래를 걷고 빨래가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갑자기 다른 책이 읽고 싶어서 책장으로 갔다가
김점선의 [점선뎐]이 눈에 들어와서 빼내 뒤적이다가(작년에 이미 이 책을 다 읽었기 때문에)
그녀의 "나의 유언장"을 다시 읽게 되었다.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내 아들의 행동을 낳게 한 건 바로 나였다.
나는 내일부터 완전히 변할 것이다.
나는 아들을 줄기차게 칭찬, 숭배, 예찬 일변도로 대할 것이며(칭찬을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했나 보다.)
그의 장점을 혹시 그가 잊을까 봐 늘 깨우쳐주려고 노력할 것이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그를 칭찬할 거리를 만들고 찾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내가 낳은 아이를 제일 무서워하면서 살 것이며
혹시 그에게 내가 나쁜 영향을 줄까 봐 평생을 긴장하며 살 것이며
아들을 비웃거나 빈정거리는 말을 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런 정신 상태에 잠기지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