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당한 여성의 저항이 지배욕을 부추기는 상황이 오지 않으면 괴물은 깨어나지 않으리라는 가설에 패를 걸고 허를 찌름으로써 ‘게임’의 서브권을 넘겨받는 것이다.

미셸은 성폭행의 피해자로서 범인을 법과 물리력으로 처단하는 데에 무관심하다. 대신 성폭력 안으로 들어가 폭력적 성의 주도권을 탈취하는 쪽을 택한다.

앞서 추측해본 미셸의 심리적 기제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미셸의 불합리한 충동과 상호 모순된 속성을 단일한 퍼스낼리티로 흡수하고 변명 없이 납득시켜버리는 이자벨 위페르의 권위가 없었다면 <엘르>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배우에게는 관객이 동의하거나 연민하지 않더라도 그가 연기하는 인물의 현존을 믿고 용인하게 밀어붙이는 거의 폭력적인 힘이 있으며 배우 자신도 때때로 이 힘을 인지하고 무기로 쓰는 것처럼 보인다.

한 발만 헛디디면 관객이나 연기자를 착취할 가능성이 높은 <엘르> 같은 작품에 흔쾌히 뛰어들려면 감독을 향한 200퍼센트의 신뢰 혹은 배우 자신의 캐릭터 장악력에 대한 확신이 필요할 텐데 위페르의 경우 어쩐지 후자였을 것 같다.

<퍼니게임> <피아니스트> <하얀 리본>은 영화를 보다 보면 인간성의 일부를 이루는 어둠에 도달하지만, 버호벤은 아예 인간이 그렇고 그런 존재임을 전제해놓고 영화를 시작한다.

"그가 ‘집 안의 유일한 남자’로서
섣불리 품은 우월감과 기회주의가 불운을 초래한다."

<매혹당한 사람들>의 기숙학교는 험한 바깥과 단절된 채 욕망들이 어우러지는 어여쁘고 특권적인 장소, 즉 <마리 앙투아네트>의 베르사유,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도쿄 특급호텔 등과 같은 소피아 코폴라가 선호하는 공간이다.

존이 회복하는 동안, 일곱 여자는 그를 저어하면서도 그에게 매료된다. 욕망의 대상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력을 간파한 존도 점점 생존 이상을 꾀한다.

그가 악한은 아니나 ‘집 안의 유일한 남자’로서 섣불리 품은 우월감과 기회주의가 불운을 초래한다.

소피아 코폴라의 연출은 남녀 모두에게 너그럽다.

돈 시겔의 <매혹당한 사람들>과 180도 반대 앵글의 숏으로 영화를 맺는다. 저택 앞에 가족사진의 구도로 모여 선 여자들은 거대한 철문 뒤에 갇힌다.2017. 9.

"<조용한 열정>은 먼저 죽은 다른 예술가의 혼에서
자신의 거울 이미지를 발견한 한 예술가가 쓴
위령의 시이기도 하다."

에밀리 디킨슨은 가족과 친구들이 하나둘 회심한 다음에도 끝까지 교회의 품에 안기지 않았다고 전기작가들은 전한다.

종교에서의 해방은 테런스 데이비스가 이 19세기 시인과 교감한 첫 번째 지점일 것이다. 영국 리버풀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게이로서, 폭력적인 아버지와 성당의 규범에 저항하며 어렵게 정체성을 형성한 데이비스는 "내게 영혼이 있음은 확실한데 신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7년간 고민한 끝에 무신론을 택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환희의 집The House Of Mirth> <더 딥 블루 씨> 같은 데이비스의 여성 영화 주인공들은 이상을 버리지 못해 현실을 피폐하게 만들지만 역설적으로 그럼으로써 주인 된 삶을 살거나 적어도 자기만의 죽음을 맞는다. 에밀리 디킨슨도 예외가 아니다.

테런스 데이비스는 생전에 합당한 평가와 명성을 누리지 못하는 예술가의 고통을 누구보다 깊게 통찰할 수 있는 감독일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을 아무도 원하지 않으면 금욕적stoic이 되는 건 어렵지 않아요. 사후 평가란 것이 있긴 하죠. 신의 존재처럼 도움이 되지 않지만요."

<조용한 열정>이 재현하는 디킨슨 집안의 대화는 점잖지만 도발적이라, 마치 꽃과 레이스에 감싸인 비수 같다.

자작시에 대한 에밀리의 능글맞은 비판에 아주머니가 재차 묻자 젊은 시인은 "모든 좋은 평은 모호하죠"라며 미소 짓는다.

이어 오빠 오스틴은 "미덕은 가장한 악덕일 뿐이죠"라며 눙친다

남매의 불손함이 거슬린 아주머니가 디킨슨 부인에게 의견을 묻자 "전 듣기만 하겠습니다. 편견을 의견이라 우기지 않기 위해"라는 철벽방어가 돌아온다.

아버지가 교회에 나가길 권유하며 딸의 영혼을 염려하자 에밀리는 "저도 잘 알아요. 제 영혼이 너무 소중해서 그 독립성을 지키려고 제가 이렇게 노력하잖아요"라고 방어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식탁의 접시가 덜 깨끗하다고 타박하자 바로 식기를 깨버리고 "이젠 안 더럽죠?"라고 일축하기도 한다(에밀리 디킨슨은 빵 굽기, 정원 가꾸기 등 가사노동에 많은 시간을 들였고 그것이 얼마나 보람 없는지에 대해 오빠의 아내 수잔과 공감하곤 했다).

요컨대 에밀리 디킨슨은 가족들 사이에서 완벽히 자유롭지 않았지만 다른 어떤 가족의 일부가 되더라도 자신의 언어로 대화하기 힘들 것이며, 당대 어떤 남편도 아내에게 새벽의 창작을 허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결혼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조용한 열정>은 전한다.

오빠는 독서하고 동생은 바느질을 하며 우울한 어머니는 촛불을 응시한다. 시간은 어김없이 연소되고 있다. 언젠가 방 안의 이들은 늙고 하나씩 사라져갈 것이다.

카메라가 방 안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에밀리에게 도달한 순간 그의 얼굴은, 남은 생에는 상실만 남아 있음을 각성한 자의 공포와 슬픔을 드러낸다.2017. 12.

"격자무늬 바닥에 선 인물들은 체스의 말을,
궁정은 체스판을 닮아간다."

화려한 부를 향한 경탄을 부르는 동시에 사물에 압도적으로 포위된 인간들의 왜소함을 부각한다.

앤은 열일곱 번 임신했지만 살아서 태어난 아이는 다섯뿐이었고, 그중 가장 긴 수명을 누린 왕자가 열한 살에 죽었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성인이 된 후 대부분 기간을 임신 중이거나 유산 후유증을 앓거나 자식을 애도하며 보낸 여성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더 페이버릿>이 묘사한 대로 통풍, 고혈압 등 지병으로 항상 고통받았다. 영화는 흐뭇하게 즐기다가 돌연 진노하는 앤 여왕을 종종 보여준다. 어쩌면 여왕은 불행에 중독돼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자신을 용납하지 못한 게 아닐까?

본래 왕위 계승 서열이 뒤였던 앤은 제왕 교육을 받은 바 없었고 준비된 군주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역사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상 최초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통합 군주였고 해외 영토도 획득한 앤은 선왕 윌리엄보다 더 업적이 많고 국민에게 지지받는 왕이었다.

<더 페이버릿>의 독특한 인상은 관객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을 주고 따라갈 캐릭터가 고정돼 있지 않다는 데에 기인한다.

사라는 여왕의 능력을 불신한다. 본인이 공언하듯, 사라는 사랑에 한계가 있고 애국심에 한계가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 여왕은 사라가 반대이길 원한다. 절친한 앤 여왕과 사라의 공통점은 약자에게 약하다는 것이다.

그는 도박 빚에 팔리고 겁탈당하고 수시로 밀쳐져 진흙탕에 구른다. "나는 누구 편도 아니고 내 편이다. 우연히 당신네 당의 이익과 내 이익이 일치할 수는 있다." 토리당 우두머리 할리의 회유를 내치는 애비게일의 대답이다.

결혼으로 귀족 지위를 마침내 회복한 애비게일은 "이제 아무도 나를 건드릴 수 없어"라고 말한다. 모 아니면 도. 귀족이 되기 전엔 언제 구렁텅이에 버려질지 모르는 처지인 것이다.

행복도 욕망도 진짜는 없고, 죽은 자식을 대신하는 토끼들처럼 가짜 대체물만이 끝없이 증식해 이 세계를 뒤덮을 것이다.201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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