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서건 다른 장르에서건 낯선 것이 나타나면 그게 무엇인지 이해하려 하기 전에 ‘그건 시가 아니다’ 식으로 말하는 풍토는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을 말살하려 드는 한국의 정치 풍토와 비슷하다. 자기에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없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특히 문학에서 일본에 없는 현상이 한국에 나타나면 그것은 가짜라고 생각하는 풍조가 늙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에게도 있다.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읽었다. 전작 『걷기의 역사』엔 다소 실망했지만, 이 책은 재미있고 유익하다. 특히 동성 결혼 이야기. 문체가 활달한데, 이 활달함이 원저자의 것인지, 번역자 김명남의 것인지.

책꽂이 하나를 정리하다보니 볼마우스 시절에 쓰던 마우스 받침이 몇 장 있다. 여름 화로는 겨울에 쓰고, 겨울 부채는 여름에 쓰지만, 마우스 받침은 언제 쓰나.

요란한 결혼식일수록 신랑 신부는 수동적이 된다. 거대 호화 결혼식, 그것을 흉내내는 결혼식은 젊은이들의 진을 빼서 사회에 복속시키려는 기성세대의 음모라고 봐도 된다.

시가 우리를 돕는 방식은 우회적이다. 쓰던 논문이 풀리지 않는 사람이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식의 꿈을 꾸고 나면 막혔던 길이 풀리는 수가 있다. 가끔 "낯선 사람을 만났다, 아내였다" 같은 시가 그런 꿈을 대신해줄 수도 있다.

소세키가 ‘I love you’를 ‘달이 참 좋네요’로 옮겼다는데, 결코 좋은 번역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한쪽은 자기를 고백하는 말이지만 한쪽은 유혹하는 말. 한쪽엔 용기와 결단이, 한쪽엔 탐색과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써진 대로 번역할 일이다.

소세키의 번역은 그의 시대를 생각하고 문화적 차이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과도한 일본화일 뿐이다. 번역이 자기 문화에 젖어 있는 독자들의 입맛에 매달리게 되면 제 나라 소설을 읽을 일이지 외국 소설을 번역해서 읽을 필요가 없다. 소세키 미신.

소세키가 ‘달이 참 좋네요’ 따위의 번역을 한 적도 없고 수업중에 그런 말을 했다는 증거도 없다고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이런 괴담이 소세키의 명성을 업고 일종의 번역론으로 행세한다는 데 있고, 소세키가 그 빌미를 제공했다는 데 있다.

@septuor1 2015년 6월 4일 오전 8:49
이상한 미개함들 : 안전벨트 하라고 하면 안 하고, 정원 지키라고 하면 안 지키고, 외부 사람 접촉하지 말라는데도 골프 치러 가고……

@septuor1 2015년 6월 4일 오전 8:56
그러고는 박근혜 찍는다.

사람들이 시스템을 탓하면서 가장 나쁜 시스템을 선택하는 것은 그런 시스템에서만 자신이 구속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개한 정신에는 복불복이 유일한 시스템이다.

『어린 왕자』에 대한 의문. 지구에서 어린 왕자에게 지혜를 가르친 것은 여우인데, 어린 왕자가 더 매혹을 느낀 것은 뱀이었던 것 같다. 무엇 때문일까. 어린 왕자는 철새들의 이동을 이용해 지구에 왔는데, 왜 갈 때는 같은 방법으로 가지 않았을까.

자기 별로 가기 위해 어린 왕자가 선택한 방법은 과격하고 극단적이다. 어쩌면 방법보다 결단이 중요했을지도.

그러고 보면 『인어 공주』의 결말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돌아갈 별이 있고 없고의 차이뿐. 아무튼 동화는 다 위험하다.

저자 바스콘셀로스가 환상을 현실에 이음매 없이 접목시켜놓아서 읽는 사람도 다섯 살 아이의 환상을 그대로 사실로 믿게 된다. 환상으로 들어가는 문과 나가는 문이 없이 설계되었다는 것이 그 소설이 성공한 비결이었으리라.

『재크와 콩나무』는 이건 환상이라고 예고하지 않아도 그게 환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있다. 거기에는 세부가 없다. 그러나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는 세련된 현대 소설의 면모를 갖추고 세부를 묘사한다. 사람을 옭아매는 것은 세부다.

나는 『인어 공주』를 고1 때 처음 읽었다. 책이 귀하던 시절이라. 책 뒤에 ‘부모님 말을 듣지 않으면 인어 공주처럼 불행해진다’는 이야기라는 해설이 붙어 있었다. 당시는 분개했는데, 지금은 해설자의 글쓰기가 서툴렀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아몰랑’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아됐어!’가 아닌가.

임어당은 특히 임신부들에 관해 말하며, 수직으로 된 빨랫줄에 빨래를 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심술궂은 표현이지만, 인간이 자랑삼는 것에 대해 자연에 치러야 할 대가가 그렇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게 엘뤼아르의 표절인 걸 알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민주화의 대의가 중요했기 때문. 지금 생각하면 그게 잘한 일이었는지 묻게 된다. 「타는 목마름으로」를 온전하게 살린 것은 이성현의 작곡이다.

아내의 작업실이 있는 마을의 한 집에 커다란 팥배나무가 있었다. 봄이면 흰꽃이 만발하고 가을이면 새들이 몰려들어 팥배를 찍고 있었다. 주인이 팥배나무를 자르고 마당을 넓혔다. 옛날엔 자기 땅의 나무라도 그 정도 나무가 되면 세상의 나무라고 생각했는데.

문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도 옛날에 시를 쓰려고 했죠’ 등의 언설보다 더 경멸받는 말도 없다. 시인이나 소설가는 재능만 있다고 해서, 한번 해볼까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짧게든 길게든 악전고투의 기간이 있고. 문인이 되기 위해 포기한 것도 많다.

이명박이 청계천을 다시 열 때도 주변 상인들은 쫓겨나다시피 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희생에 무관심하며 거기서 얻을 이익 때문에 차라리 모른 척한다. 모든 사태가 명령에 의해 정리된다. 한국에서 갑을 관계가 극심한 이유도 거기 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늘 하는 말은 ‘나 하나 살기도 바쁜데’이다. 우리는 늘 지쳐 있고 생각할 여유가 없다. 생각은 늘 다음으로 미뤄진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누가 밖에서 끊어주지는 않는다. 결국 우리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

천재 한국 소녀 하버드대, 스탠퍼드대 동시 합격 운운이 허위였단다.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우리 사회는 대학 입시 때문에 미쳐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내 수업에 들어온 가짜 학생들의 경우를 보면, 먼저 자신이 그 학교에 합격했다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이를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서류를 위조하기도 하고 과대표 등에 출마하기도 한다. 망상과 허위 조작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

난초를 키운 적이 있다. 잘해준다고 한 일이 자주 난초를 죽이곤 했다. 잘해주는 것이 항상 잘해주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공부한 방식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선생, 자신들의 희망을 자녀들의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자주 아이들을 병들게 한다.

동서양엔 아버지를 찾아 방랑하는 서사들이 있다. 주인공은 끝내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지만 그 탐색의 과정에서 어떤 변화를 겪는다. 저 자신이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이 변화 체험이 없는 자들이 내내 독재자를 그리워하며 동시에 과도한 아버지 노릇을 한다.

구조 속에서의 개인의 책임을 이야기하는데, 구조도 중요하고 개인도 중요해요, 구조와 개인은 떨어질 수 없어요, 이렇게 말하면 엄청 똑똑해 보이지요.

금연 6개월. 내가 아직도 담배를 끊지 못했구나. 일의 매듭에서마다 느끼는 이 외로움, 이 허전함.

용역이라 특별 관리 대상에서 제외하고, 비정규직이라 마스크도 안 줬다는데, 미개한 메르스는 정규직과 비정규직도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구나.

도라지꽃에 개미를 넣고 입구를 오므리면 개미가 꽃을 물어뜯어 꽃잎이 빨간색으로 변한다. 우리는 어렸을 때 그걸 보고 개미가 어두워 불을 켰다고 말했다. 그게 개미산 때문임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다.

나는 사실 손을 자주 씻는다. 직업상 책에 손을 자주 대야 하는데, 처음에는 책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손을 씻었지만, 근년에 와서는 책이 더러워 손을 씻는다.

‘성폭행은 몹쓸 짓’이라는 말을 놓고 성폭행을 너무 가볍게 본 것이라고 말들 하는데, ‘몹쓸’은 그렇게 가벼운 말이 아니다. ‘몹쓸’은 ‘못된’ 정도가 아니라 ‘몹시 악독하다’는 뜻. 치가 떨리고 피가 거꾸로 솟는 그런 악행에 쓰이는 말이다.

변명의 말이 일단 만들어지면, 어떤 잘못도 잘못으로 자각되지 않는 수가 있다. 변명은 다른 사람의 눈을 가리려고만 늘어놓는 게 아니라 자기를 설득하는 데도 이용된다. 그래서 성숙한다는 것은 변명의 세계에서 사실의 세계로 나오는 것이기도 하겠다.

메르스 사태나 표절 사태나 모두 문제를 유야무야하게 만들려다 일을 키우고 말았다. 어떤 정보가 극단적 방법으로 제시되지 않으면 소통이 되지 않는 이 현상에도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할 것 같다.

표절 방지책을 묻는 기자들의 전화를 몇 통 받았다. 그런 대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작가가 알아서 표절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다. 그런데 소설은 독창성이 없을수록 잘 팔린다. 낯익기 때문. 독자에게 영합한다는 말은 낯익은 것을 만든다는 뜻.

소설이 제한된 수의 소주제들을 순열 조합 한다고 말했더니 설마! 하는 사람이 많다. 사람들은 늘 새롭게 쓰려고 했으나, 삶이 겉만 새로워졌듯이 글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이쪽 업계에서는 상호 텍스트성이라고 한다. 같은 들판에서 꺾는 들꽃이 다를 수 있겠는가.

저자의 죽음이라는 말도, 문학의 몰락이란 말도 문학이 이 들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알랭은 모든 배는 다른 배를 모방해 만든다고 했다. 가장 복잡한 호화 유람선이나 항공모함에서 작은 보트까지를 접어 만든 종이배로 모방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짐승의 다리를 모방하다가 마침내 바퀴를 만들었다고 아폴리네르는 말했다. 배를 모방해 배를 만들어온 역사가 없으면 비행기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이 일련의 트윗은 표절이 용서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말이다.)

장 주네 『사형을 언도받은 자/외줄타기 곡예사』. 인간 말종, 곧 임계선 타자의 경험과 언어로 쓴 거룩한 시. 그 이상하고 아름다운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벽면 수행과 같다. 조재룡 번역 잘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자기 동네의 생각을 세계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하라는 말이지, 세계 모든 사람이 자기 동네 사람처럼 생각하게 하라는 말이 아니다.

신문을 보다 말고 아내가 말한다. "나보다 더 무식한 아줌마도 있구나." 당신이 어때서.

철학자들이 김수영에 관해 쓴 글을 읽으면 내가 보기엔 거의 사기 수준이다. 이런 토대 위에서는 영어나 불어로 백날 번역해보아야 소용이 없다. 김인환이 고려 한시 번역하고 설명한 것 같은 그런 착실한 해설서가 김수영에게도 있어야 한다.

우리가 꼴통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나는 이걸 정확한 병명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초등학생들에게 족보 베껴오라는 인간들, 공부 열심히 해서 동성애 물리치자는 인간들, 이건 약간 성격이 이상한 인간들이 아니라 환자들이다.

김누리 교수가 헤세와 카프카를 비교하며, 미문주의 비판문을 한겨레에 기고했다. 내가 보기엔 헤세의 문장은 아름답고 카프카의 문장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어설픈 심미감들이 더 문제인 듯. 장르가 다르긴 하지만, 김수영이 김춘수보다 덜 아름다운가.

트위터를 하면서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비문해자들은 싸가지도 없다는 것이다.

강연회 때마다 느끼는 것 : 진지하고 열성적이고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 어디에나 많구나. 그런데 나라는 왜 요 모양으로 굴러갈까.

만 권 책을 읽었다 한들, 그 앎이 낡은 책 한 권의 옳음을 증명하고 그걸 떠받드는 데만 오로지 사용된다면 낡은 책 한 권을 읽은 것과 뭐가 다를까. 더구나 낡은 책 한 권을 떠받들며 만 권의 책을 읽었다고 착각하는 자는 다른 사람을 얼마나 괴롭힐까.

한기호씨가 표절 사태와 관련 경향에 ‘문체가 아니라 이야기여야’라는 칼럼을 기고. 근데 그게 분리될 수 있는 건가. 옛얘기를 하는 할머니에게도 입담이라는 게 있고, 그 입담이 문체다. 문제는 한국의 모든 음식이 달달해지고 있듯 달달한 문체만 팔린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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