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를 말하진 않았어도 전해지는 것들이
우리에게는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녹음 중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때만큼은 따라 부르는 것을 하지 않았다. 그저 듣기만 했다. "동그랗게 동그랗게"를 부를 때부터 엄마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울먹이면서 끝까지 불렀다. 저절로 엄마의 울먹임까지 녹음이 되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엄마의 흔적들이 불현듯 발견되는 것이 버거웠던 어느 날, 이 녹음 파일이 있다는 걸 기억해내어 찾아서 들었다. 비가 왔던 날이어서 와이퍼 소리에다 깜빡이 소리까지 배경음으로 흘러나왔다. "동그랗게"라는 노랫말이 나오기 직전에 나는 스톱 버튼을 눌렀다. 아주 나중에 다시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 모인 글들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꼈던 시간 속에서 썼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하여 한자리에 오래 웅크려 있었다. 자주 지쳤고 쉽게 엉망이 되었다. 그래도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을 열렬히 지키고 싶어 했다. 균형을 찾기 위해 자주 어금니를 깨물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은 이를 악물고 가장 열심히 산 시간이라는 것을, 여기 모인 글들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피로한 얼굴로 잠이 들지만 화창한 아침을 맞이하게 되는 일처럼. 오직 화창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소외감이 느껴지는 날도 있고, 오직 화창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함이 생기는 날도 있는 것처럼. 돌아보면, 잘 지나왔구나 싶어 조금 기쁘기도 하다.

이런 유의 덧없는 기쁨이 누군가의 뒷모습에 잘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이 책이 부디 누군가를 뒤에서 안아주는 인기척이 되면 좋겠다.

나는 엄마를 오래 싫어했다. 엄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를 착취하는 사람이었고, 오빠보다 뒤에 서 있기를 지나치게 종용해온 억압의 주체였다.

나는 자랑스러운 딸이어야 하되 오빠보다 더 자랑스러우면 안 되었다.

엄마는 평생 동안 미안함과 미안할 것까지는 없음을 왕복하며 나를 대했다. 그걸 나에게 굳이 다 말하고 굳이 다 이해받으려 했다.

엄마의 고백들을 나는 주로 농담으로 웃어넘겼고, 아주 드물게는 적나라하게 분노를 표출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아주 징그러운 것을 쳐다보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엄마를 싫어하지 않게 됐다. 화해를 한 것도 아니고, 용서를 한 것도 아닌 채로 저절로 그렇게 됐다. 알츠하이머를 앓기 시작하면서 엄마는 누군가의 엄마로 살았던 시간들을 거의 다 망각해버렸다.

오빠는 25년 전에 죽고 없는데 엄마의 기억 속에서만큼은 기특하고 온순하게 잘 살아 있었다.

두 딸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감정마저 외면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미안함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했고, 소중한 기억을 공유한 적이 너무 없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엄마는 엄마를 끝낸 사람처럼 존재하고 있는데, 나 혼자 엄마를 엄마로 기억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였다.

TV 리모컨이 말을 듣지 않는다거나 전기밥솥 작동법을 갑자기 잊어버렸다거나, 지갑이나 통장, 주민등록증 같은 것을 어디 두었는지 도무지 찾을 수 없다든가 하는,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혼자 있고 싶어 했다.

엄마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다 위아래로 훑어보곤 했다. 그 순간을 나는 가장 싫어했다. 그 눈빛 앞에 있기만 해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내가 숨기는 것들이 엄마에게 보일까봐, 바깥에서 내가 만난 사람과 보낸 시간과 해본 경험들이 엄마에게 읽힐까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엄마가 다 알아버릴까봐, 엄마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들킬까봐 싫었다.

엄마 덕분에 나는 엄마를 제외한 다른 이들과는 충분히 단절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기에 더없이 유리했던 이 핑계가 이제 사라져버렸다.

이제 나는 엄마를 위해서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도 된다.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된다. 초조함을 안고 엄마를 향해 달려가지 않아도 된다. 기나긴 돌봄노동이 끝났다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홀가분해져서 엄마에 대한 원망을 모두 잊게 된 것일까.

자신의 생년월일도 집 주소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마흔 살 이후의 자신의 삶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예전에 부르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게 거짓말처럼 아름다웠다.

무능했지만 무해했던 아빠와 자주 비교했다. 같은 무능이었어도 엄마의 무능은 유해했다고 확신했다.

작은 것일지라도 그걸 잃지 않기 위해서는 지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늘상 주먹을 꽉 쥐며 생각해왔다.

면회를 가면 엄마는 유리 벽 너머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엄마는 울기 시작했다. 내가 최선을 다해 웃고 농담하면 그제야 울음을 지우고 웃었다. 엄마는 엄마를 끝내고 나의 자식이 되어 유리 벽 너머에 앉아 있었다.

과일을 먹을 때 과도를 드는 일을 좋아한다. 특히 멜론이나 망고를 한입에 먹기 좋게 자르는 일을 좋아한다. 과즙이 흠뻑 묻는 두 손도 좋고, 과도가 부드럽게 들어가는 느낌 또한 좋다. 접시에 담아놓고서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며 하나씩 하나씩 먹어치우는 시간이 좋다. 과일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달콤한 과즙이 퍼지는 입안의 공간을 느끼는 게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젓가락을 쓸 때에는 손에게 쾌락을 주는 느낌이라면, 숟가락을 쓸 때에는 크게 벌린 입에게 쾌락을 주는 느낌이 든다.

놀이가 비중이 높은 날은 어째서 많이 걷고 많이 서 있어도 피곤이 다디단지. 김밥 같은 걸 만들고 난 날은 설거짓거리가 수북하게 쌓여도 어찌하여 즐겁기만 한지. 접시에 수북하게 담아 입을 크게 벌리고 입에 넣는 순간.

아빠에겐 아빠만의 은숟가락이 있었고 아빠만의 밥그릇과 국그릇이 있었다. 엄마와 우리들은 스테인리스 재질의 숟가락, 대나무로 만든 숟가락 등을 마구잡이로 사용했다. 주인이 따로 있지 않고 짝도 맞지 않는 식기들을 나머지 식구들은 공유했다.

어느 여름날에 엄마가 나를 불러 아빠의 숟가락을 보여주었다. 엄마가 혼수로 장만해 와서,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빠의 손에 들려 밥을 담당했던 유일한 숟가락. 아버지의 유품을 미리 챙기듯, 나는 그걸 받아 내가 좋아하는 목재 오르골 옆에 두고 자주 쳐다보았다. 아빠에게 정식으로 물려받은 물건이 한평생 아빠의 입속을 드나들던 구멍 난 숟가락이란 것이 좋았다.

가족들 중 그 누구도 아빠에게 새 숟가락을 선물할 생각을 안 했다는 것이다. 새 숟가락과 더불어 새 인생을 시작하기엔 늦었다는 사실을 묵묵히 받아들인 채로, 그제야 여느 식구처럼 아무 숟가락으로 식사를 하며 아빠는 여생을 보냈다.

너무 많이 늙어버린 엄마와 함께 늙어가고 있는 큰딸은 서로를 너무 가엾게만 여겼지만, 내가 만든 음식을 엄마가 먹던, 그렇게 관계가 뒤바뀌는 시간이 우리에게 왔던 것이 새삼스러워서 나는 입을 채 다물지 못한 채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막으려는 마음으로는 하려는 마음이 행사하는 힘을 결코 막을 수 없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힘센 오빠를 밀치고 나는 거울을 보았다. 누더기 머리 꼴을 한 아이가 거울 속에 있었다. 이 사태가 나에겐 큰 기회라는 것을 나는 동물적으로 알아차렸다. 더 억울하게, 더 서럽게, 꺼이꺼이 목 놓아 울면서 쪽마루에 걸터앉아 엄마를 기다렸다.

할머니를 꿈에서 보면 나에게 좋은 일이 있다. 실제로 무슨 대단한 좋은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고, 내가 그렇게 여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윤단비 감독의 영화 <남매의 여름밤>에서, 마당의 식물들에게 물을 주는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 하고 동주가 부르면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었다. 두 사람이 잠깐 마주 보고 웃는 장면을 보는데 옆집에 사는 가족을 담 너머 훔쳐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장면을 영화 속에 넣어야 했던 감독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라는 것이 나에게 올 때, 나 자신을 조금쯤 더 아끼게 된다.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받았다는 기억은 선연하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내가 든든해하는 것은 할머니라는 존재가 아니라 나의 기억일 수도 있겠다 싶다. 할머니의 이름이라도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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