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쓰고 난 뒤 포시는 잔인하게 살해당해버립니다. 밀렵꾼들의 소행일 거란 추측만 남았습니다. 저는 책을 다 읽은 후에 서문을 한 번 읽어봤습니다. 그러고 나서 할리문 열대우림에서 멸종 위기의 긴팔원숭이를 연구한다는, 삼십 년쯤 후에 대작을 지을지도 모르는, 결국 긴팔원숭이와 운명을 함께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김산하 연구원에 대해 잠시 묵념을 했습니다. 그가 살해당하지 말아야 할 텐데. ‘안개 속의 긴팔원숭이와 연구원’ 같은 제목의 책은 나오지 말아야 할 텐데.

그전에 그의 이름을 몇 번 들었지만 한 번도 『안개 속의 고릴라』에 나오는 그 김산하랑 연결시키지 못했는데, 그런데 신기하게 보는 순간 단박에 "아!" 알아봤습니다. 나는 그의 멀쩡한 사지를 보니까 반가웠습니다. 만져볼 뻔했습니다. 다음이 그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려서 토요일 12시쯤 학교 끝나고 집에 느릿느릿 걸어올 때 그 느낌이 너무 좋았습니다. 따스한 햇살이 있고 문방구의 먼지 낀 창 너머로 장난감들의 알록달록한 빛깔들이 눈에 들어오고 생각이라곤 ‘오늘은 뭘 하고 놀까?’ ‘집에 가면 엄마가 뭘 맛있는 걸 해놓았을까?’ 그런 것뿐인, 그때의 여유와 에너지가 좋았습니다.

아, 내가 걷는 걸 좋아하는구나. 걷는 게 나에겐 치유구나. 좀 더 넓혀서 말하자면 나는 오감을 다 사용해야 하는구나. 사실 책을 읽을 때조차 가끔 하늘을 봐야 합니다.

젊은 세대라면 90~99퍼센트 정도는 스마트폰을 보고 있습니다. 어쩌다 책을 읽는 사람이 한둘 끼어있는데 그것도 대개 자기계발서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만이 멍하니 앉아있습니다. 그 무료한 모습이 얼마나 좋아 보이는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것은 일종의 포르노를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스마트폰의 동작은 서랍 열고 닫기 같은 겁니다. 방 안에 앉아있다가 괜히 일어나서 한 번 옷장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도 반복적으로요. 이런 인조적인 인터페이스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 저는 제 경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부터는 MP3로 음악을 듣는 것도 그만뒀습니다. 음악에게 미안합니다. 음악을 평가 절하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인조적 인터페이스들만 보는 것은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 혹은 자기 세계만 들여다보는 형국입니다.

다른 나라에 다녀오면 우리가 얼마나 자기 세계에 콱 박혀있는지 확연하게 느껴집니다.

자기 것에 사로잡혀있지 않거나 자기 것을 갖고 있지 않아야 딴 걸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책이 좋았고 도서관이 좋았습니다. 도서관에 있는 게 좋아서 고3 때 학자가 꿈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책이 아니라 책의 향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킁킁 동물처럼 향기를 맡으면서도 고매하게 다뤄야 하는 어떤 것, 그것이 제겐 책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것과 마니아가 되는 것은 다릅니다. 사랑한다면 전문가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에는 사랑하는 마음밖에 없습니다. 사랑 말고는 다른 말로 표현을 못합니다. 경쟁도 없습니다.

저에겐 항상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었습니다. 계획을 인조적으로 만들어간다, 이것이야말로 나답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이 될 것이다, 나는 ‘언젠가 ○○이 되기 위해서’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 미래완료형 때문에 희생을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까치를 연구할 때는 둥지까지 크레인을 타고 올라갑니다. 하루는 엄마 까치가 외출하고 난 둥지 안을 쓱 들여다보는데 둥지 분위기가 너무나 가정적이었습니다.

그 둥지를 보는데 뇌세포 어딘가에 수십 년간 깊숙이 파묻혀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어려서 스리랑카 해변을 부모님과 함께 차를 타고 달렸는데 그때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고 제임스 라스트 악단의 오케스트라 연주로 ‘사이먼 앤 가펑클’의 음악이 흘러나오던 바로 그때가 떠오른 것입니다. 까치 둥지의 가정적인 분위기를 보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비비원숭이 무리가 있는데 한 마리는 따로 놉니다. 한 마리는 무리를 따라가지 않기로 합니다. 그럼 우리 생물학자들은 따로 노는 한 마리는 보지 않기로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따로 노는 한 놈에게 마음이 더 가는 겁니다. ‘쟤는 왜 그럴까?’ 그래서 기존의 데이터 중심의 정량적이고 합리적인 과학에 투신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영장류의 특징은 호기심과 지루해함의 반복입니다. 처음엔 강력하게 호기심을 느꼈어도 그것이 해소되면 이내 지루해합니다.

자기의 평범한 하루, 그 하루의 행적이 과학자들의 심각하고 진지한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긴팔원숭이는 모르겠지요.

들어가고 나오고 또 채워지고 비워지고 정체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이디어의 원천인 셈이고, 이 흐름이 표현의 의지를 키우고 생명력이 됩니다.

자바 긴팔원숭이는 시적인 동물입니다. 나무 위 생활에 매우 잘 적응했습니다. 긴팔원숭이가 나무 위에서 점프-스윙-착지하는 동작을 보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힘을 잘 분배해서 나무 위에서 물 흐르듯 흘러갑니다. 그만한 무용이 없는 듯합니다. 넘실대는 열대우림의 나뭇잎 위에서 함께 넘실대는 아름다운 그놈에 대한 연구가 없어서, 학자들끼리 서로 그놈을 연구해야만 한다고 지적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게 딱 맞는 일이었습니다.

긴팔원숭이는 서너 마리가 그룹을 이루어 사는데 암수 성체가 있는 핵가족입니다. 긴팔원숭이는 큰 나무가 있는 곳에 삽니다. 그런데 저지대가 점점 개발이 되면서 서식지를 잃고 고지대로 올라갑니다. 고지대로 올라갈수록 더 넒은 영역을 필요로 합니다. 자기 서식지를 갖지 못한 채 유랑하는 긴팔원숭이는 그렇게 오래 살아남지 못합니다.

긴팔원숭이는 성인이 되면 독립합니다. 하루는 그렇게 독립을 앞둔 긴팔원숭이가 저희 연구원을 바로 앞에 와서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고 갔습니다. 마치 작별 인사라도 하듯이요. 그러더니 정말 그다음 날부터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인생은 미래완료형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알 게 뭐야?" 하고 맥주 한 병 마시고 쉬고 나면 그만이었습니다.

나무 꼭대기엔 긴팔원숭이가 있고 그 위엔 독수리가 날고 있는 그 풍부함. 그 많은 사건들의 집합체인 자연을 보면서 과학을 통해 역사에도 기여하고 싶어졌습니다. 저는 하나의 생물이 갖는 의미는 서식지에 대한 한 가지 표현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랑이만 해도 인도네시아 호랑이가 다르고 시베리아 호랑이가 다릅니다. 하나의 생명은 그 서식지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의 생명은 그 서식지가 낳은 걸작입니다.

긴팔원숭이 수도 점점 줄어 이제 4천 마리가량 남았습니다. 동물 한 종이 멸종한다는 것은 모나리자나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매일매일 태워 없애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완벽한 표현인, 하나의 걸작인 위대한 생명체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제겐 제 자신을 키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저에게 과제를 부여하는 겁니다. 어떤 과제냐면 하나의 동물을 관찰하듯 자기를 관찰한다는 겁니다. 우리들이 여러 가지 문제에 시달리고 있지만 다른 생명체가 그러하듯 우리 인간에게도 자기한테 맞는 해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해법을 찾는 제일 좋은 방법은 자기의 원래 관심사에 집중해보는 것입니다.

자기의 원래 관심사란 것마저 불투명하게 되어버렸다면 어린 시절의 자기로 되돌아가 보는 겁니다.

저는 자신을 키우려는 자는 동물의 장점과 인간의 장점을 다 취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동물의 장점은 자신을 삶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한다는 겁니다. 동물은 자기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구아나가 바닥에 누워 햇볕을 쬐는 것을 보십시오. 저는 이것을 보고 동물 세계에도 럭셔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동물들도 자기 나름대로 인생을 향유합니다. 동물들에게도 자기 삶을 즐기는 시간이 있습니다.

동물들은 자기 세계를 향유함에 있어 당당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당당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장점은 작가적 시점을 가질 수 있단 겁니다. 즉 삶에서 좀 물러서서, 좀 떨어져서 마치 하늘에서 자신을 보듯 삶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저를 살펴보면 저의 서식지는 자연과 도시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인데 그 안에 여유로움이 있으면 됩니다.

이론만큼이나 실천이 중요했습니다. 제인 구달에게 배운 것이 있습니다. 그녀는 학계를 박차고 나와 환경운동을 합니다. 그녀는 제 눈에 이 세상을 조금은 다른 곳으로 만들고 있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일단 저는 절대로 음식을 남기지 않습니다. 일회용품을 쓰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는 아무리 층수가 높아도 적어도 내려올 때는 타지 않습니다.

저에겐 삶의 디테일이 중요합니다. 왜 디테일이냐고요? 그건 간단합니다. 우리는 결국 디테일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머어마하게 중요한 정책 결정권자도 아니고, 우리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삶의 디테일뿐입니다.

사람들이 동물들이 근처에 오면 경기를 일으키는 원인이 뭘까요? 제인 구달은 마이크를 잡고 바로 이런 것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은 인공적인 미학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모든 서식지는 오로지 거기서만 살 수 있는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그곳에서처럼 살 수는 없는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서식지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장소만이 마이크로 하비타트가 아닙니다. 아예 인간 한 명 한 명이 다른 인간의 마이크로 하비타트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쉴 만한 곳, 살아갈 곳이 되는 거죠. 자신의 친구나 애인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이 하나의 마이크로 하비타트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밀고 나가려면,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소중한 존재로서 인정받았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한 사람은 자신을 인정했었다는 것이 사람에게 주는 것은 자신감 그 이상입니다. 자기를 뛰어넘게 합니다. 세계가 바뀌는 겁니다.

‘내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눌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 이것이 한 인간에게 갖는 의미는 엄청납니다.

한국에서 사랑은 몸값 계산처럼 돼버렸습니다. ‘몸값 떨어지기 전에 빨리 결혼해야지.’ 같은 것 말입니다. 그것은 사랑을 오염시키는 겁니다.

사랑은 요철 맞추기 같은 겁니다. 얼마나 꽉 들어맞느냐의 문제입니다.

‘사소하지만 영원한 의미를 지닌 방식으로 서로 신경 써주는 사람들’이 이 도시의 서식지, 마이크로 하비타트입니다.

‘오늘은 내가 낼게.’ 하고 나갑니다. 그럼 밥을 얻어먹은 사람은 뒷사람 것을 내줍니다. ‘나는 아까 다른 분이 내줬으니 내가 네 걸 낼게.’ 이러면서요. 저는 그렇게 앞사람이 뒷사람 밥값을 내주는 것이 연달아 일곱 차례까지 이어지는 것을 봤습니다.

인생 별거 아닙니다. 밥상에서 자기 자리를 조금 좁혀서 같이 앉는 겁니다. ‘너도 같이 먹자.’ 그러는 겁니다. ‘한번 드셔보실래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나’가 정말 ‘나’로 읽혔습니다. 나를 거쳐 가는 자가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면, 나를 거쳐 가는 자가 모든 희망을 버리게 된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지옥인 것입니다. 내가 타인의 지옥인 것입니다.

서식지를 찾는다는 것은 내가 뿌리째 옮겨간다는 말입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이것을 ‘이주의 열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디론가 더 나은 곳으로 옮겨가고 싶어 한다는 거죠. 그는 옮겨가는 것을 기준으로 욕망과 사랑을 구분했습니다. 욕망은 상대방이 내게로 오길 바라죠. 그러나 사랑은 다릅니다.

반대로 사랑에 있어 모든 것은 움직임 자체이다. 사랑을 하면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내게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그 대상에게 가서 그 안에 존재하려 한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타인을 향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 대상이 나를 중심으로 내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대상이 만든 궤도를 탄다.
? 『사랑에 관한 연구』, 오르테가 이 가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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