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영원한 학생이기에 배움을 ‘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삶의 동력인지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시절의 제가 바빴다기보다는 부지런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겐 백 년씩 배우기만 할 수 있는 시간은 없습니다. 우리의 촛불이 한 권의 책을 다 이해하기도 전에 꺼져버리지 않도록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배우면서 살면서, 살면서 배우면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서로 알게 된 것을 나눠 갖는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눠 갖는 것이 ‘힐링’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서로의 지혜를 나눠 갖는 순간 발생합니다.

변영주 감독이 출사표란 단어를 썼는데 출사표는 사실상 어떤 판단을 내렸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녀가 출사표란 단어를 써서 좋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모험, 꼭 필요한 자신만의 전투, 피하지 말아야 할 전투, 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대체 어떻게 읽고 들으면서 판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그때 우리는 자기에 대한 고백을 한다고 했는데 사실은 책 이야기를 했습니다. 책 이야기를 한다고 했는데 사실은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책 이야기를 할 때는 비밀을 털어놓는 것과 똑같이 되어버리고 마니까요.

이 도시에선 한 번 올라탄 화차에서 내리기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누군가의 탐욕 때문이든 시스템 때문이든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면 그걸 겪어내야 하는 것은 한 개인의 몸입니다.

불합리와 사회악이 최후에 남겨놓는 것은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법도 아니고, 아무런 보호막도 없는 한 개인의 완전히 까발려진 벌거벗은 몸일 뿐입니다.

이것은 나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실제로 내가 아닌 것이 되어 생각해보는 것이다. 내가 주어진 문제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 마음속에 더 많은 사람의 관점들을 현재화시킬수록, 그리고 내가 그들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할까를 더 잘 상상할수록, 나의 대표적 사유의 능력은 더욱 강화될 것이고 나의 최종적 결정, 즉 나의 의견은 더욱 타당하게 될 것이다.
? 『칸트 정치철학 강의』, 한나 아렌트.

단테는 일찍이 사랑을 고백할 때 ‘천상을 바라보던 내 눈을 그녀의 두 눈에 고정시켰다’고 했지요. 이렇게 우리의 이상과 사랑은 현실에서 한 구체적인 몸으로 만납니다. 이상은 먼 것 같아도 또 그렇게까지 먼 곳에 있는 것은 아닌 겁니다.

우린 사실 나 자신을 아는 문제조차도, 괜찮은 인간으로 사는 것조차도 남의 손을 빌려야만 합니다. 남의 힘을 빌려야만 합니다. 저는 그런 의존성이 부끄럽기는커녕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은 아주 커다랗습니다. 더 컸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힘이 세다거나 우월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나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훨씬 더 의지가 강했으면 좋겠습니다.) 고독 속에서 아주 커다란 타인과 아주 커다란 대화를 나눕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대화를 나눌 것입니다.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결국은 나 자신을 벗어나는 길입니다.

현대 물리학자들은 우리의 혼돈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 언어에 그렇게 아주 기초적인 결속성을 표현할 단어들이 많지 않습니다. 아마도 사랑이나 생명 정도겠지요. 과학자들은 결국 명사가 아니라 동사만이 그런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살아간다. 사랑한다. 느낀다.’ 결국 움직임, 행동이 중요하다는 말일까요?

만화가는 창공에 빛나는, 그러나 내 손이 닿을 수는 없는 머나먼 별 같았습니다. 그래도 그때부터 제 진로는 확고부동했습니다.

공중목욕탕에서 쫓겨난 적도 있습니다. 제가 때밀이 형에게 누구에게도 옮지 않는 병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믿어주질 않는데다가 제가 생각해도 괜히 내 몸이 사람들에게 미안한 겁니다.

중학교 때 「브이」라는 텔레비전 시리즈가 있었는데 거긴 파충류가 나옵니다. 제 별명도 브이였습니다. 제 친구들 눈에 제가 파충류와 별반 다를 게 없이 보였던 거죠. 그 피부병이 제게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납니다. 목까지 올라오는 티셔츠만 입었고 지금도 목을 움츠리며 걷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자신감이 있을 리가 없겠죠. 자신감뿐 아니라 존재감도 없었습니다. 키도 작아서 번호는 늘 8번 안쪽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도 웃으며 살아갈 동력이 필요했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그림에 있어서만큼은 굉장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버지한테는 학원 간다고 말하고 광주 시내를 한없이 걸어 다녔습니다. 학교에서 충장로가 먼데도 거기까지 계속 걸었고 양동시장에도 갔습니다. 그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 난 고아가 아니었을까? 난 조금 더 비참했어야 해. 이런 정도의 시련으론 부족해. 이렇게 살 바엔 더 비참한 게 나아.’ 속에선 뜨거운 것들이 쉭쉭 올라왔습니다.

저는 술만 마시면 걸핏하면 남들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비참할수록, 만족할 수 없을수록 속으로 수도 없이 다짐하는 겁니다.

막연하게 아주 막연하게. ‘진짜 나는 지지 않을 거야. 나는 순수 미술 공부도 오래했다. 나는 더 잘 그릴 거야.’ 왜 그렇게 끝없는 주문이 필요했던 걸까요?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그것마저 무너지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내게 있는 단 하나의 재능은 그전이나 그때나 그림 그리는 것 하나뿐이었던 겁니다.

학원들에서 나온 잡지 같은 것을 보면서 내가 분명히 잘 그린다는 걸 알게 되었죠. ‘나처럼 그리는 사람은 분명히 흔하지는 않다. 지금 열심히 하면 다 나에게 쌓인다.’ 나는 또 다짐을 했습니다.

저는 정말로 잘 자라고 싶었습니다. 잘 해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눈에 불을 켜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화실 퇴근을 9시로 친다면 그 뒤 시간을 한 시간 단위로 잘랐습니다. 배경 연습, 습작 연습, 터치 연습, 잘 때까지 책 읽기. 저는 그것을 정말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시작하고 한 일주일은 힘들었는데, 한 달 지나고 두 달 지나고 제가 그려놓은 것들이 쌓이니까 방에 들어오면 정말로 묵직했습니다. 내가 나를 칭찬해주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실은 저는 모든 걸 양보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빚을 지고 있어도 누구에게라도 밥 한 끼 사줄 수 있었습니다. 월급날에는 술도 한턱 크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림에 있어서는 그 무엇에도 양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차근차근 그러나 집요하게 데뷔 준비를 했습니다.

제 그림을 본 어떤 독자도 에너지를 받을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요. 에너지가 없었습니다. 너무 부끄러워 심장이 따끔따끔 아팠습니다. 내 얄팍한 수를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챌 거야! 나는 온 세상에 대고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어. 사라져버릴까?

혹시 누군가는 눈치챘을 수도 있었을까요? 주목받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해도 저도 주목 한 번 받아보고 싶었습니다. 가운데 자리에 앉는 게 당황스러워도 나도 그 자리에 한 번 앉아보고 싶었습니다.

존재감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존재감을 얻기 위해 언제까지고 시시덕거리며 비위나 맞춰주고 있을 수만은 없단 걸요. 나도 내 말을 해야 하는구나. 그래야 상대방이 편안해하는구나. 내가 자존감을 갖고 있어야 사람들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진짜 기뻐하고 의미 있는 시간으로 받아들이겠구나.

야후의 주인공은 원래 테러리스트로 설정되어 있었는데 저는 제 주인공한테 ‘네가 뭔데 테러를 해?’라고 물었지요. 그래서 실제 테러가 아니라 해프닝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바꿨습니다. 그때 속으로 ‘아이들이 태어나고 있잖아.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잖아.’라고 했을지도 모르지요. 저는 제가 보호하고 지킬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인 장모는 제가 떠돌이로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서울에 홀로 와서 어떻게 살았나?" 저를 촌놈, 대학도 나오지 못한 놈이라고 대우하지 않았습니다. 그 존중이 제 맘을 돌려놓았을까요.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저는 내가 깊이 의지해도 좋을 사람들을 만난 것입니다.

만화는 그런 제가 혼자서만 갖는 유일한 확신이었습니다. ‘어쩌면 나도 그렇게 수치스러워하며 살지 않아도 되는 인간일지 몰라.’라는 유일한 확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만화를 그리면서 저는 점점 더 깊은 내적인 기쁨이란 것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매번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매번 빈털터리로 시작합니다. 저에겐 저 자신을 학대하느라 여유 없이 살아온 시간이 더 많습니다. 아직도 만화 말고 다른 일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수준에 대한 공포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통이니 본격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깜짝 놀랍니다.

제겐 기쁜 만남이 많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 미술학원에 유학시켜준 머나먼 고모부, 허영만 선생님보다 더 위대한 자극을 줬던 죽음의 배틀 친구, 그리고 심지어 노숙할 때 "이봐요. 여기서 자면 죽어요!"라고 저를 흔들어 깨우고 포장마차에 데려가 먹을 것을 사줬던 이름 모를 사람. 그리고 나의 아내. 장인 장모.

저를 학대하기만 했던 시절이지 타인을 위한 배려나 존중에 대해선 생각도 못했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만화로 생각해보면 어떤 컷이든 그 그림을 필요로 하는 이야기와 가치와 함께 갑니다. 저는 만화로 이젠 뭔가에 기여하고 싶어집니다. 그것은 제가 잘 아는 마이너의 세계와 관련된 일일 겁니다.

저는 거울을 앞에 두고 ‘난 왜 이런 몸으로 태어났을까?’ 평생 궁금했고 지금도 궁금합니다. 이제 그 뉘앙스는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몸으로 태어나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뭔가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기의 길을 찾아낸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그걸로 뭘 하지?’라는 질문이 없는 겁니다.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밖에 설명 못합니다. 게다가 누구랑 비교해서 자신의 길을 결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건 마치 거미에게 "어떻게 거미줄을 잘 짜게 되었어?" 라고 묻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차라리 나도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게 확실히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저는 정말 재능이라곤 달리기 하나뿐이지만 그마저 국가 대표급은 아니었기에, 예술가가 되는 게 아니라 삶을 예술로 만드는 문제에 관심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제 아무리 유일하고 필연적으로 보이는 일일지라도 끝없이 불확실성과 싸워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습니다.

우린 보통 확신이 있어야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움직임은 확신이 아니라 질문에서 나옵니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지? 나는 왜 이런 삶을 살고 있지? 이 몸으로 이 세상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지? 이것이 자유의 질문입니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윤태호 작가는 다른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나를 좋아해도 되는 것일까? 우리에겐 마음도 있고 심장도 있습니다. 그 질문을 던질 때 그것들이 다 움직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모습으로 태어난 것, 그 이유를 찾는 데 우리는 늘 결정적으로 실패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문제는 지금 우리 자신의 삶에 우리가 아주 약간의 원인 제공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사실상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삶을 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보다 힘센 타인이 나를 마음대로 하는 한도 안에서만 우리는 유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는 매일매일 묶여서 반복적인 일을 하는 시지프스이면서 동시에 반항하는 인간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우리가 어떤 필연성을 우리 삶에 부여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우리가 어떤 행동인가를 할 때뿐일 겁니다.

우리는 대체로 원인과 결과를 착각합니다. 내가 원래 그래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 행동을 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는데 행동 때문에 신념이 만들어진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만약 우리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참아내기만 한다면 우린 우리 삶의 (진정한) 원인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관하는 대신 어떤 행동을 할 때만은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거대한 세계는…… 우리가 자신을 알기 위하여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하는 거울이다. 요컨대 나는 세계가 나의 교과서가 되기를 바란다.
?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박홍규.

내가 당신 마음에 들고 당신에게 중요해진 건 내가 당신에겐 일종의 거울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내 내면에는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에게 답을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요. 본래 모든 사람들은 서로서로 상대를 위한 거울이어서 서로 답을 주고받고 서로 조응하는 거지요. 그러나 당신 같은 기인들은 괴팍하고 쉽게 마술에 걸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읽어낼 수도 없고 세상 어느 것 하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요. 그런 기인이 느닷없이 그를 정말로 응시하는 얼굴을, 그에게 어떤 대답을 줄 것 같고 어떤 친밀함을 풍기는 그런 얼굴을 발견했을 때 기쁨을 느끼는 건 당연합니다.
? 『황야의 이리』, 헤르만 헤세.

‘게니우스는 어떤 사람이 태어난 순간 그의 수호자가 되는 신(수호천사)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아감벤의 말에 따르면 게니우스는 우리의 기원인데,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게니우스랑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즉 인간은 자아이자 자아가 아닌 것과 늘 함께합니다.

우리는 가끔 이 게니우스를 느낍니다. 바로 감동할 때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왜 감동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때 ‘게니우스를 불안이나 기쁨, 안심이나 동요로 경험’합니다. 감동하는 순간에 우리는 자신의 특성을 내려놓고, 상황과 처지도 내려놓고 감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되어봤다가 다시 한 인간으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모두가 되었다가 다시 누군가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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