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야 말로 내가 의지 할 곳이다. 나를 제쳐놓고 내가 의지할 곳은 없다. 착실한 나의 힘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법구경


가끔 컴퓨터에 찐분홍의 포스트잇에 기억하고 싶은 글을 붙여 놓는데 이번에 붙인 글은 법구경에 나온다는 위의 글이다.

이 글 전에는 

널리 배우며, 자세히 물으며, 신중하게 생각하며, 명확하게 판단하며, 충실하게 행할 것이다.

-중용


를 붙여 놓고 늘 머리와 마음에 새기려고 노력했다. 특히 내가 ICU에서 일하면서 깨지고 온 다음 날은 더욱. 내가 깨진 이유는 아직도 내가 널리 배우지 않고, 자세히 묻지도 않았으며, 일을 처리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어떤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할지 명확하게 판단하지 않고, 지금까지 배운 것을 충실하게 행하지 않았다는 자책을 하면서 계속 열심히 배우자는 의미로. 


이런 글들은 정말 도움이 된다. 이번에 붙여 놓고 자주 쳐다보는 법구경에 나온 말 역시 나를 다져준다. 이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기대고 싶어지는 일들이 많은가.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기댈 곳은 내 자신 뿐이라는 사실은 어쩌면 자명한데도 늘 의지할 곳을 찾는다. 하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 내가 많이 성숙해지고 자랐다는 것이 느껴진다. 더 이상 나에게 의지할 곳은 없다는 생각이 그 이후로 얼마나 자주 들었는가.  


법구경에 나온 '착실한 나의 힘'이라는 말이 너무 좋다. 누군가 한문이든 뭐든에서 한글로 번역했을 텐데 어쩌면 저렇게 마음에 드는 글자를 선택했을까? 着實이라는 한자여서 그대로 옮긴 건가? 어쨌든 착실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나는 요즘 착실해지려고 한다. 그 변화는 어디서 온 것일까? 그 변화의 씨앗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내 안에 installation 된 것일까?


내 안에는 또 어떤 것이 내재되어 있을까?


나이가 50이 넘어도 이런 생각을 계속 하고 있다니,,, 좀 웃기기도 하다. 덜 성숙해서 그런가? 


아무튼 착실한 나의 힘에 대해서 시몬 드 보부아르만큼 강력하게 말 한 글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그녀는 <모든 사람은 혼자다>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편에 서 있는 한 지식인은 결코 프롤레타리아가 되지 못한다. 어디까지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곁에 서 있는 지식인일 뿐이다. 반 고흐가 그리는 그림은 새롭고 자유로운 창조이다, 그러나 그것은 변함없이 한 장의 반 고흐 그림이다. 가령 그가 한 장의 고갱 그림을 그리려고 한다면, 그 그림은 반 고흐에 의한 고갱의 모방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캉디드의 조언이 쓸데없는 참견으로 끝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요컨대 내가 경작하게 될 것은 언제나 나의 뜰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 속에 갇혀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경작하는 순간부터 그 뜰은 나의 것이 되므로.


이 우주의 한 조각이 나에게 속하기 위해서는 다만 내가 실제로 그것을 경작하기만 하면 된다. 


p.28


당연한 말이지만 철학자가 해서 그런가 그럴듯하게 들린다는. ^^;;


그녀는 또 이런 말도 한다.


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p. 29


역시 너무 당연한 말이고, 많이 들어 본 듯한 말이며,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같지만, 보브와르가 했다고 하고 책에 이렇게 나오니 더 특별하게 느껴진달까? 하지만, 이 말은 그녀가 했기 때문에 그녀의 말이다. 내가 비슷하게 할 수 있고, 누군가 그런 말을 한 듯한 기시감이 들더라도 여기, 이 책에서 그녀의 언어를 번역한 글로 읽었으니 이 글은 그녀의 글이다.


가령 이런 글도,


모든 대상, 모든 순간은 그것이 직접적인 현존으로 환원되면 그 실체가 너무나 하찮은 것임이 드러난다. 인간도 그 자체만으로는 하찮은 존재이다. 왜냐하면 그 자체의 존재가 아니라, 항상 더 높은, 그 이상의 존재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랑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사랑 너머로 새로운 목적들, 즉 가정, 직업, 공통된 미래 등을 향하여 자신의 존재를 던지는 것이다.

P. 39


이 글을 다시 읽어보니 최근 내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가 설명이 되는 것 같다. 인간은 계속해서 미래를 향하여 자신의 존재를 던지니까.


캉디드의 뜰은 그러므로 원자로 환원될 수도, 우주와 혼동될 수도 없다. 인간은 자신을 선택함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선택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소멸하고 만다. 어떤 목적도 추월될 수 있다는 것이 인간 조건의 패러독스다. 그러니 우리의 기획은 목적을 목적으로서 규정한다. 하나의 목적을 추월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목적을 추월될 수 없는 것으로서 상정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이것 이외의 다른 실존의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시네아스의 말을 듣지 않은 피뤼스가 옳았다. 피뤼스는 정복하기 위하여 출발한다. 그러니까 그는 정복할 것이다. "그럼 그 다음은?" 다음 일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다.

P.78


"그럼 그 다음은?"이라는 질문의 답은 아직 알 수 없다. 이제 시작이니까. 하지만, 그 이전을 경험해 본 바론, 그녀의 말대로 "다음 일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다."인데 마음이 성급하니 지금, 바로, 당장 알고 싶은 마음 때문에 내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듯. 어쩌면 모두 다 비슷하겠지? 일단, 내가 의지할 곳은 '착실한 나의 힘'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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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5 16: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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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5 20: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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