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내가 달고자 하는 댓글은 저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는데, 여기서 솔직히 말하자면, 단발머리 님은 내가 댓글을 달면 (고의는 절대 아니겠지만) 댓글을 바로 안 달아주신다. 그런 적이 여러 번 있어서 내 댓글이 뭔가 마음에 안 드시나? (소심해서 이런 일 아니라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편임) 그리고는 '좋아요'는 해도 존심 상하니까 되도록 댓글은 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 댓글은 뭐든 식으로 던지듯이 달아서 저 모양이 되었는데 단발머리 님은 내 예상을 하이킥으로 간단하게 날려버리시고 저렇게 멋진 댓글을 달아주셨다.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그렇게 멋진 그룹에 낄 주제가 안 된다는 것을 아니까. 그분들처럼 용감한 여성이 될 자신이 없고, 그럴 그릇도 아니라서.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나마저도 페미니스트들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분들이 없다면 내가 어찌 아무리 착한 남편 앞에서라도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이렇게 늦은 나이게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더구나 나처럼 태생적으로 목소리가 큰 사람에게 그런 일이 얼마나 곤혹이었겠느냐 말이지.
비록 내 댓글처럼 우리 집에서 내가 주도권(을 잡았다고 말하지만, 겉만 그렇고 속은 아님도 안다)을 잡은 척 말하면서 불평등하다거나 페미니즘에 절박한 느낌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 크게 둘(요즘은 더 세분화 되지만)로 나뉘는 젠더에서 여성의 위치는 여전히 싸워서라도 평등하게 해야 할 중요한 사안이다.
몇 천년을 여성은 이름 없이 살아왔고, 여성의 다른 표현(아줌마, 엄마, 할머니 등등)으로만 불렸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한 예로 출판 업계만 보더라도 여성의 이름으로 책을 내면 팔리지 않을 거라서 남자의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비평가들은 남성 저자의 책을 주로 평가하고 여성 저자의 글에는 일상적인 추측으로 비평을 하고 있는지. 여성 작가들이 받은 불공평한 대우 등등,,, 최근에 읽고 있는 어슐러 르 귄 여사의 글에서 그 한 예를 볼 수 있다.
제임스 조이스는 거의 나오자마자 정전의 반열에 올랐다. 버지니아 울프는 정전에서 배제되거나 마지못해 받아들여졌으며 그리고도 수십 년간 의구심을 샀다. 정교하고 효과적인 서술 기법과 장치를 갖춘 <등대로> 쪽이 기념비적인 막다른 길인 <율리시스>보다 후대 소설 쓰기에 미친 영향이 훨씬 크다는 주장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침묵, 유배, 교묘함"을 선택하고 은둔 생활을 한 제임스 조이스는 스스로의 글과 경력 외에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 나라에서 지적, 성적, 정치적으로 활발한 사람들이 이루는 비범한 집단으로('으로' 보다는 '에서"라고 번역해야 좋을 듯. 이 책의 번역이 어려웠겠지만, 난해한 번역이 좀 있어서 거슬린 적도 많음을 고백) 꽉 찬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어른이 된 후 내내 다른 작가들을 읽고, 서평을 쓰고, 출간했다. 제임스 조이스가 연약한 쪽이고, 버지니아 울프가 굳센 쪽이다. 조이스가 컬트의 대상이고 우연이며, 울프는 20세기 소설의 중심에서 지속적으로 풍부한 영향을 미쳤다.
-이북이라 페이지 표기 불가
제임스 조이스에 대한 극찬을 들었어도 그의 책은 여전히 읽을 생각이 없지만 (근데 르 귄 여사 넘 멋짐!! 제임스 조이스가 우연이래!! 대박!!!!),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너무 미안하다. 그녀의 글을 진심으로 읽어보려는 생각을 최근에야 하게 되었다. 멋도 모르고 단발머리 님의 글에 댓글을 단 것이나, 멋도 모르고 그녀의 책을 멀리(? ) 한 것이나. 하지만, 나의 장점은 내 잘못을 금방 인정하고 빨리 발길을 돌릴 줄 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점이 지금까지 나를 살아남게 한 내 능력 중에 하나이겠지만.
내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하얀 거짓말을 이제 찢어버리고, 행동하지 않더라도 알기 위해서라도, 인식의 문제를 바로보기 위해서라도 내 자신에게 더욱 정직해지고, 용감해지려고 노력하고, 늘 깨어있도록 정신 차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