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플을 보다가 묵향님이랑 감은빛님이 지난 오늘의 글을 액자 형식으로 다시 소환하신 것이 궁금했는데 내 전화기(?)로는 안 되는 것 같다. 안타깝;;
내가 9년 전 지난 오늘에 올렸던 글 [치코와 리타]를 읽으며 거기에 올린 음악이 듣고 싶었는데 음원이 죽어서 다시 살려놨다.
https://blog.aladin.co.kr/thebookshelf/5389660
프야님과의 댓글에서도 얘기했기만 에보라의 노래가 더 가슴을 조이고 빠져들게 한다. 모르고 하는 말이니까 돌 던지지 마시길. 흑인들의 목소리나 음악에는 영혼을 흔드는 그런 무언가가 있다. 이번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Garth Brooks 가 Amazing Grace를 불렀었는데 물론 잘 불렀다고 생각하고 (더구나 아카펠라) 가슴이 먹먹한 (트럼프가 떠났다는 것 때문에 더 그랬을;;;) 감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노래를 다른 흑인 가수가 불렀다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었더랬다. 그랬는데 에보라의 베사메무쵸를 들으니 잠깐 스치듯 그때 했던 생각이 떠오른다. 어쩌면 더 뭉클하고 싶었는데 거기 미치지 못했던 감정의 찌꺼기가 이제야 위로를 받는 것 같다고나 할까?
음악을 좋아하는데, 그래서 서재에 음악 카테고리까지 있고 예전에는 정말 열심히 음악을 올리고 그랬는데, 그래도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뭐냐고 하면 여전히 Louis Armstrong의 What a wonderful world.
Louis Armstrong - What a wonderful world
그래서 내가 집에 있으면 해든이는 나에게 아부도 할 겸 늘 알렉사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라고 명령한다. 나는 이 노래를 다시 들으면서 생각한다. 사람들이 나에게 "라로씨는 늘 긍정적이야."라고 하는데 어쩌면 바로 이 음악이 내 가슴 한 곳에 늘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다시 대전에 살 때 생각을 해본다. 치코와 리타를 봤던 대전에 있던 극장은 얼마나 불편했었나. 그래도 예술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곳이 그나마 거기라서 뻔질나게 다녔더랬지. 여름보다 겨울에 영화보기 더 힘들었던 곳. 엉덩이 부분의 쿠션이 푹 꺼져 더 불편했던 의자에 앉아서 몸을 이리꼬고 저리 꼬면서도 눈과 귀는 화면을 응시했던. 내가 생각해도 그런 인내심이 어디서 나왔을까 싶다. 어떤 날은 아주 하루 종일 그 극장에 있으면서 4편의 영화를 본 적도 있다. 언제 한국에 가면 그곳에 다시 가보고 싶다. 코로나 때문에 잘나가던 영화관도 다 문을 닫았는데 그 좁고 불편한 곳이 여전히 남아 있을런지...
가시에 찔리는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누가 가시를 두려워하랴. 모든 탐미는 결국 고행인 것이기에, 그러므로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단 한 번의 운명적인 사랑에서 덧없이 비껴나 단 한 번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덧없이 잊히는 그 소멸이 아니랴. _「단 한 번의 노래, 단 한 번의 사랑(콜린 매컬로의 『가시나무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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