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고 있는 동시대의 사람들거울을 보고 "거짓말, 이게 나야?" 하고 흠칫하는 순간을 제외하고, 혼자 있을 때 나는 도대체 몇 살일까.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면 세계는 어릴 때와 다름없이 나와 함께 있다. 예순 살이든 네 살이든 내가하늘을 보고있을 뿐이다. 별안간 거미집이 얼굴에 달라붙었을 때 놀라는마음은 일곱 살 때나 마흔 살 때나 지금이나 다 같아서 그냥내가 놀라는 것이다.
혼잡한 도회의 교차로에서 안절부절못하면서 빌어먹을, 이라고 외치는 것은 서른 살이나 쉰 살이나 마찬가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십대 때는 인간은 마흔이 넘으면 어른이란 것이되어 세상을 모두 이해해서 어떠한 어려움에도 잘 대처할 수있을 줄 알았다.
이제와 생각하면, 십대 때의 나는 자신의 일 이외의 것에 - P14

한테 말고는, 이해나 상상력을 진정으로 발동시키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정말 마흔이 되고 쉰이 되자, 나는 내 젊음의 단순성과 어리석음, 천박함을 몹시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그 나이가 되어서야 다른 아줌마들의 기쁨과 괴로움과 슬픔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인생은 마흔부터일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는 것은 기쁨이기조차 하다, 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마흔이든 쉰이든, 사람은 결코 갈광질팡하지 않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뭐야 아홉 살 때랑 똑같잖아.
도대체 몇 살이 되면 어른이 되는 걸까. 혼란스럽기는 아홉살 때보다 더하고 바닥은 더 깊어질 뿐이었다. 인간은 조금도똑똑해지지 않는다. 그렇게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똑똑한 녀석은 태어났을 때부터 똑똑하다. 바보는 태생이 바보고,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바보가 아니게되는 것은 아니다. 바보는 똑똑한 놈이 경험하지 않는 바보의 인생을 계속해서 되풀이한다. 마흔이든 쉰이든 아홉 살 때와 다르지 않은 후회와기쁨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바보의 인생을사는 쪽이 더 재미있을지도 모른다고. - P15

완연한 노인이 됐을때, 인간은 나이 같은 거 초월하여 "네 살쯤 됐나"라고 말씀하시는 거다. 나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내 안의 네 살은 죽지 않았다. 흰 눈이 내리면, 나는 내가 네 살이든 아홉 살이든 - P16

멍하고 있는 네 살의 여든여덟 살은 의지할 곳 없는 고아나 마찬가지다. 나이를 모르기에, 자식을 못 알아보기에, 계절을 모르기에, 모르기 때문에 계속 실존 그 자체에 대한 불안에 떤다. - P16

나무들은 앙상한 할머니들이 벗은 몸으로 목욕 순서를 기다리는 것처럼 나란히 서 있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나무는 실로 훌륭하다. - P17

아라이 씨네 집 현관 옆에는 칠판이 나와 있고, 아라이 씨는 거기에다가 미야자와 겐지가 했던 것처럼 ‘하우스 안에 - P20

있습니다‘라든가 집 앞 밭에 있습니다‘라고 백묵으로 써 놓곤 했다. 아라이 씨는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하는 시를 내 앞에서 끝까지 단숨에 외워 들려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한 자도 틀리지 않는다. "하루 4홉의 현미를, 이란 건 옛날 얘기지. 요즘엔 3홉으로 바뀌었어. 누가4홉이면 과식이라고 했더라? 하긴 옛날엔 농사꾼 밥상에 지금 같이 반찬이 많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난 4홉으로 놔두는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그의 지식에감탄하곤 한다. 언젠가는 요사노 아키코의 <그대여 죽지 말아다오〉를 끝까지 암송하는데, 그 엄청나게 긴 시를 외워내는걸 보고 정말로 놀랐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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