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프니 드 모리에의 『레베카』를 읽기 시작할 때 하룻밤을 거의 샌 적이 있었다. 새벽 5시가 넘어 잠이 들었다는. 














그 다음날 남편이 놀라워했다. 예전에 알라딘을 열심히 했을 때는 종종 있었던 일이지만, 이제는 시험을 코앞에 둔 날이 아니면 그렇게 밤을 새워서 책을 읽는 날이 없었기 때문에. (더구나 나이가 들어 그런가 체력도 딸리고..) 도대체 어떤 책인데 그러냐고 묻기에 자세히 애기를 해주면서 영화도 있는데 같이 보자고 꼬셨다. 남편은 좋아하는 것이 분명한 사람이라 레베카』라고 하니까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영화로도 만들었다고 하니까 그제서야 조금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우리는 함께 보기로 약속했는데 드디어 어젯밤 해든이 재우고 (막내라 그런가? 아직도 옆에서 같이 기도해주고 해야 잠이 드는;;) 작년 크리스마스에 내가 큰맘먹고 선물한 남편의 랩탑으로 침대에 거의 누운 자세로 봤다.

포스터 출처: 위키피디아


나는 원래 흑백영화를 별로 안 좋아하는 반면, 남편은 흑백영화 광팬이다. 그리고 나는 내용을 다 알고 봤지만, 남편은 내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봤다. 다 보고 난 후 남편이 영리하게 글을 썼다고 얘기를 하면서 관심을 보이길래 다음엔 같은 작가의 다른 소설을 영화로 만든 『나의 사촌 레이첼』을 보자고 하니까 이번에는 선뜻 그러겠다고 한다. 역시 전혀 내키지 않는 제목에도 불구하고.ㅎㅎㅎ


혼자 보려고 생각했는데 남편이랑 같이 볼 수 있게 되어 좋다. 혼자 보는 거 좋아하지만, 남편이랑 보면 더 재밌다. 우리 둘의 취향이 다른 경우가 많아서 그런지 함께 공감하면서 보는 경우는 더 재밌다.


다른 얘기지만, 책의 표지와 제목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일반적으로 50%정도 영향을 미친다고 하니 정말 크다. 『나의 사촌 레이첼』의 감독인 로저 미첼의 서문이 한국어판 맨 앞에 나와있는데 읽어보고 이 영화가 만들어진 것도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 표지는 시대적 배경이 애매모호한 여인의 뒷모습이 담겨 있었다. 전형적인 역사 로맨스 소설 표지였다....여성독자를 겨냥한 1950년대 멜로드라마이겠거니 짐작했던 작품은 막상 읽어보니 복잡하고 어둡고 신비롭고 대단히 에로틱하면서도 음울한 불안감을 자아냈고....그 모든 요소들이 자갈 해변에 밀려드는 파도 소리처럼 은은하게 강조되어 있었다.

p. 5-6

로저 미첼이 엄마의 『나의 사촌 레이첼』을 집어 들던 날 밤 (유추하건데 잠이 안 와서 심심풀이로 읽으면서 잠이 들게 될 책을 원했던 듯) 자기 전에 읽을 가볍고 쉬운 책이라 생각하고 집어 들었다가 "대박"이러면서 책에 빠져 밤을 샜을 그의 모습이 상상된다.ㅎㅎ


그래도 한국어판의 레베카와 『나의 사촌 레이첼』은 그나마 표지가 괜찮다. 영어 오디오북은 보통의 나였으면 표지만 보고 다시 내려놓았을 책들이다. 나 같은 여자도 그런데 남자들이 이 책을 집어 들기는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대프니 드 모리에의 책이라면 표지의 영향이 전혀 내게 미치지 않지만, 지금도 표지를 보면 씁쓸하다.


어쨌든 다시 레베카』이야기로 돌아가서.

옛날 영화라서 처음 영화가 시작할 때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사실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하지만 남편은 유심히 살펴보는 사람이다. 올라가는 크레딧을 보면서 혼잣말처럼 "Screenplay가 두 명이네. 그것도 남자하고 여자가 같이." 내가 "그게 뭐 어때서?"그랬더니, "그 당시는 드문 일 아닌가?"라며 또 혼잣말을 하는 식으로 말한다.


나는 딱히 영화를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히치콕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맨덜리하고 그 하얀 드레스와 챙 넓은 모자를 보고 싶었다.

사진 출처: christinawehner


내가 상상했던 것과 너무 많이 달랐다. 히치콕이 보여준 맨덜리는 내가 책에서 읽고 느꼈던 것보다 너무 멋없고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 성처럼 그냥 거창하고 기괴하기만 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대프니 드 모리에가 영감을 받아 그렸다는(누가 그렸는지는 모르겠다. 누구라고 정확히 안 나와있어서. 드 모리에가 그렸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서 그리게 했는지) 맨덜리의 그림이 내 상상에 훨씬 가까왔다. (대프니 드 모리에 여사의 소설 속 장소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은데 다음에 시간이 있으면)

사진 출처: Chichester Partnership


바로 이 그림이다. 사랑스럽고, 어딘가 따뜻한 느낌이 들면서 다정하고, 멋지긴 하지만 우악스럽지 않아서 맨덜리를 다녀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아 회자되고 다시 방문하고 싶을 만한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히치콕이 선택한 장소는 썰렁하고 무섭고 괴상한 느낌이 드는 분위기를 완성하기에 적당한 장소인 것 같긴 하다. 어쨌든 책을 통해 내가 느낀 분위기와는 좀 달랐다. 그리고 화자 "나"가 산책하던 길 역시 영화는 너무 무서워서 발을 조금만 헛디디면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나라면 그쪽으로 산책 안 간다. (누가 산책하라고 했냐?ㅎㅎ)


가장 손에 땀을 (?) 쥐었던 장면 중 하나였던 하얀 드레스 사건. 사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덴버스 부인의 계략을 눈치챘지만, 그래도 그녀가 제안하는 그 지점이 너무 적절하고 묘사된 드레스가 마음에 들어서 계략이 아니길 바랐던 바로 그 드레스를 히치콕의 영화에서는 어떤 드레스로 보여줄지 사뭇 기대를 했었다.


사진 출처: 디스맨틀


바로 이 드레스다. 이 드레스 역시 내 기대와 너무 다르게 치렁치렁하고,,모자의 챙은 더 좁고...암튼 이 드레스를 보고 맥심만 괜히 화를 내는 것 같은, 서스펜스 전혀 없는 느낌의 장면.ㅎㅎㅎㅎㅎㅎㅎㅎ (언젠가 맥심에 대한 글도 쓰고 싶다. "맥심은 피해자인가? 아니면 피의자인가?"하는 것에 대한 - 하지만, 언제가 될지 모름) 물론 모두의 눈동자가 표정없이 '나'에게 쏠리긴 하지만, 책에서와 같은 그런 처참한 느낌이 안 드는 장면. 그 장면이 이렇게 허무하게 지나가 버렸다. 책에서처럼 '나'의 기대감과 좌절이 잘 느껴지지 않았는데 혹시 미래에 이 영화를 다시 만들게 된다면 이 부분을 책처럼 긴장감 있게 표현해 주면 좋겠다.


남편은 잘 만든 영화라며 흡족해 했는데 나는 영화를 보면서 가끔, "뭐야? 이렇게 밖에 표현을 못해?" 라거나, "뭐니 저 표정은?"라는 둥 비판을 하면서 보니까 남편이 그런다, "히치콕도 뭐 처음부터 마스터였겠냐?"라고. ㅎㅎㅎㅎㅎㅎㅎㅎㅎ 하긴 지금 우리는 히치콕을 거장 히치콕이니 뭐 이렇게 알고 있지만, 히치콕이 헐리우드에서 영화를 처음 만들기 시작한 것이 1939년이라고 하니 이 영화를 만들던 시기의 히치콕도 거의 초짜였던 것이다. 초짜 히치콕이라니..ㅎㅎ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오프닝 크레딧의 이 부분 'presents its picturization of DAPHNE DU MAURIER'S celebrated novel"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해주는 것을 듣고 영화에 대한 비판이 사라졌다. 

출처: 스크린샷


보통으로 히치콕이 원작을 영화로 만들 경우, adapta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했는데 히치콕도 이 소설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서 “picturization”이라고 표현한 것 같다고.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거장이라고 부르는 알프레드 히치콕도 이 소설을 읽고 나처럼 폭 빠져서 어느 정도 각색을 했지만, 원작을 다른 작품보다 더 원작에 가깝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라고 맘대로 해석. 그러니까 그도 대프니 드 모리에 여신에게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었던 것이었겠지? ....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나의 사촌 레이첼』을 다 듣고 선택한 책은 여전히 대프니 드 모리에의 책이다. 제목은 『Frenchman's creek』. Audible의 리뷰를 읽고 Frenchman's creek』과 『The King's General』중에서 결국 Frenchman's creek』으로 결정했다. 지금 챕터 3을 듣고 있는데 그냥 느낌이지만,,,나,,,,,『레베카』보다, 『나의 사촌 레이첼』보다 Frenchman's creek』을 더 좋아할 것 같다....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해적이야기가 나온다고 하는데도.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해적이라니, 맙소사!











리뷰만 보고 결정한 책인데 이 글을 쓰면서 구글링을 하니 이 책도 영화로 만들어졌다! 대박!! 더구나 컬러닷!



포스터 출처: 위키피디아


켁! 그런데 두 개다!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포스터 출처: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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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20-07-26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베카, 나의 사촌 레이첼 빨리 읽고 영화도 봐야겠네요. 다들 극찬을 하니 넘 궁금해요.

라로 2020-07-26 08:55   좋아요 0 | URL
프님이 제가 듣보잡인 책들까지 늘 먼저 읽으셨는데 이렇게 프님에게 궁금증을 자아낼 일도 있다니! 근데 프님도 좋아하실 거에요. 서스펜스에 미스테리한 면도 있고,,저도 소설에 빠져서 다른 책까지 찾아보기는 처음이에요. 예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랑 줌파 라히리 책들을 그럴 뻔 했는데 그러지 않았거든요.

수연 2020-07-26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페이퍼 읽을 때만 해도 그래 참아야지 참았다가 나중에 읽어야지 이랬는데 라로님 페이퍼 와서 무너지네요 -_- 집에는 없는 책이니 일단 얼른 도서관으로 달려가보겠습니다. :)

라로 2020-07-26 12:20   좋아요 0 | URL
수연 님도 안 읽으셨다고요? 와~ 저 오늘 두번째로 놀라요!^^; 어여 도서관으로 달려가세욥! 님은 또 어떻게 읽으실지 넘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