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ts - The Slow Summits


교회 갔다 와서 (오전 11시쯤) 저녁에 먹을 불고기 양념을 했다. 코스트코에서 양념이 다 되어 있는 불고기를 사 오면 편하긴 한데 고기가 너무 지저분하게 잘려 있어서 좀 성가시더라도 불고기 고기를 사 와서 양념을 하는 편이다. 어차피 코스트코 불고기를 사 와도 가족들의 입맛에 맞게 양념을 다시 해야 한다. 어쨌든 버섯을 씻어서 썰고 있는데 막내아들은 시어머니와 함께 예전 로빈 윌리암스 주연의 주만지를 보고 있었다. 거기 나온 딸아이 역할이 커스틴 던스트였구나!! 새삼스럽네.


새로 나온 주만지를 막내의 베프가 어제 보고 우리 집에 와서 얘기를 해줬는지 새로 나온 주만지를 내일 아빠랑 (나는 별로 안 땡겨서 안 가기로) 보기로 해서 예전 주만지를 다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미 봤던 거라 그런지 집중도 하지 않고 음식을 만드는 나를 귀찮게 했다가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설렁설렁 보고 있다. 시어머니도 막내 때문에 보고 계신 데 녀석이 집중을 안 하니 슬쩍 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불고기 양념을 하다 말고 허기가 느껴져 점심으로 두부를 구워서 먹기로 했다. 두부를 좋아하는 막내에게도 먹어보라고 줬다. 막내는 먹으면서 체커 게임을 하자고 해서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두부를 먹으면서, 체커 게임을 했다. (멀티태스크가 되는 모자;;;) 게임은 막내가 이겼다. (불가피한 결말) 그리고서 막내는 몇 년째 읽기는 읽는데 아직 마치지 못하고 있는 A Series of Unfortunate Events의 마지막 13권을 읽고있다.




오늘 막내는 그 역사적인 (그러니까 녀석이 그 책을 시작한 건 3년? 4년? 전인데 오늘 드디어 결국 마침내 마지막 책을 읽고 있으니까) 독서의 여정에 한 획을 그을 예정이다!! 두둥~~ 그러다 시어머니가 교회 다녀와서 만드신 햄과 가반조 콩(garbanzo beans)을 넣은 수프를 혼자 사는 친구분에게 주러 가신다며 나가시면서 막내에게 "주만지 가족은 다 무사한 거야?"라고 물어보시니까 막내 왈, "Yup, plot armor."라며 간단히 답변. 시어머니가 크게 웃으시면서 'plot armor'라는 말을 반복하시면서 나가신다.ㅎㅎㅎㅎㅎㅎㅎ

이제 겨우 중학교에 들어가서 한 학기를 마친 녀석이 어떻게 저 단어를 알았을까 궁금해서 학교에서 배웠냐고 하니까 그냥 알게 됐다고 한다. 신기하다. 아이와 떨어져서 내 공부만 할 때는 아이가 언제 크나 뭐 그런 걱정이 되는데 이렇게 같이 있다보면 훌쩍 커버린 게 느껴진다. 그리고 한편으로 조급해진다. 내년이면 틴에이져가 되는구나....싶어서.


큰딸아이도 그렇고 큰아들 아이도 그렇고 틴에이저가 되기 전에는 자신들은 절대 반항하는 틴에이저가 안 될 거라고 했었는데 사춘기 시절의 호르몬을 어찌할 수 없는지 자주 성질을 내고 토라지고 변덕스럽고 그랬어서 해든에게는 언젠가 장난으로 각서를 녹음으로 받았었다.ㅎㅎㅎㅎㅎㅎㅎㅎ 자신은 사춘기 소년이 되어도 지금처럼 부모님 말도 잘 듣고 뭐 그러겠다는 내용으로. 아직도 내 전화기에 저장이 되어 있는데 사용하게 될까? 아니 녀석은 기억이나 할까?ㅎㅎㅎㅎㅎ


양념을 끝내고 빨래 때문에 왔다 갔다 하는데 책을 다 읽었다며 기뻐한다. 3년의 독서가 결실을 보았다. 내일 아침 도서관에 가서 다음에 읽을 시리즈를 고르겠다며 포부가 대단하다. 내일도 같은 느낌이길....ㅎㅎㅎㅎ


plot armor라는 단어를 듣고 생각을 했다. 

우리 인생에도 그런 장치가 되어 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내가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살든 어떻든 결국에는 내 임무를 완성하고, 그것도 잘 완성하고 훌륭하게 귀환하게 된다는 구성. 그런 생각을 하니까 내가 예전에 즐겨 읽었던 조지프 캠벨의 책이 떠오른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어려움을 겪고, 방황과 모험을 하고 그러다 도와주는 사람을 만나고, 영웅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났던 자리로 되돌아오는 영웅....캠벨이 말하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바로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며, 현재를 사는 우리의 모습이다. 이 영웅은, 그러니까 우리 각자의 모습이다. 그 영웅은 지금도 끊임없이 태어나고 있고 또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그래서 모두 영웅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무의식적으로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아주 좋았던 책이다. 

나도 그런 영웅이 되고 싶어서 오늘도 내일도 노력하는 것이라는 생각, 느낌, 뭐 그렇다.ㅎㅎㅎ

영웅은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더라도 결국엔 실패하지 않고 임무를 완수한다. 왜냐하면 plot armor가 받쳐주니까. 절대 실패할 수 없는 거다.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더 훌륭한 영웅이 되는 거다. 그렇지? 그래야지? 그래서 그렇게 믿기로 한다. 






법정 스님의 책 [스스로 행복하라]에 이런 글이 나온다. 

출가란 모든 집착과 얽힘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은 수행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진정한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 누구에게나 이 출가 정신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면 삶을 변화시켜야 하고, 낡은 타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혼하고 집을 나오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릇된 생활 습관과 잘못된 업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업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p. 23

영웅에겐 후회 같은 것도 없다. 아니 없어야지. 노래 가사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후회,,,스러운 느낌이 들면서 한숨이 나온다면 그건 변화할 때라는 신호라고 생각하기로 하자. 스님의 말씀처럼 새로운 업을 지을 때라는 신호. 새로운 영웅으로 탄생하라는 의미일까? 아니 자신이 영웅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으라는 말이 아닐까? 내가 영웅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지 생각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글이 길어지는데 완전 글에 감정이입하고 있는;;;;

어쨌든 지난 가을학기에는 psychiatry 수업을 들었었다. 간호학은 어쨌든 학문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실습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 학생이라 정신병원에서 수업할 수 없었다. 너무 위험할 수 있으니까. 수업을 듣기 전에 위험에 대처하는 수업도 듣지만 그것을 활용하게 될 경우는 정작 정신과 간호사가 되어야 가능한 듯. 어쨌든 정신병원에는 못 가니까 대처 방안으로 교수님은 우리를 substance abuse rehab center에서 실습을 하게 해주셨다. 마약이든 술이든 중독이 있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온전한(?)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substance abuse도 정신병의 범주에 있다. 


psych수업은 학교 유니폼을 입고 가지 않고 일반 옷을 입고 간다. 옷은 business attire(한국어로는 비지니스 정장이라고 번역이 되었지만 여기서는 좀 더 유연한 복장인 듯)로 입고 오라고 되어 있어서 나는 나름 신경을 쓴다는 생각으로 스카프까지 두르고 갔다. 내 모습을 본 교수님이, "처음에 너가 스카프를 하고 와서 깜짝 놀랐어. 그런데 여기는 정신병원이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 병원에 스카프를 하고 가는 짓은 정신 나간 짓이니까."라며 웃으면서 얘기하셨는데 생각해보니 끔찍했다. 중독이 정신병으로 분류가 되어도 어쨌든 마약이나 술에 중독된 사람들은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과는 좀 다른 편이다. 일반적인 경우는 없지만, 대부분의 중독자들은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남을 해치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치료를 받는 중독자들과 간호 학생으로서 대화할 시간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는 다르게 어렸을 때부터 상처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특별히 놀라웠던 것은 내가 만난 거의 50%의 중독자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은 자신의 부모가 중독자여서 자신도 자연스럽게 중독이 되었다는 얘기. 아니면 어려서 받은 차별이나 처벌, 폭력 등으로 인해서 자존감이 떨어진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잊기 위해서 중독이 된 경우. 어떤 40대의 남자는 자기가 안 해본 마약이 없는데 (PCP를 사용할 때 얘기는 정말 압권!) 자기가 마약을 하게 된 이유는 가족이 늘 자신을 업신여기고 차별을 해서 자기를 받아주는 무리와 함께 하다 보니 어느새 중독되어 있었다며 자신 안에 있는 어린아이가 아직도 상처받아 울고 있다며 울면서 얘기하던 것이 지금 생각난다. 


어쨌든 나는 약물치료 리햅에 다니면서 중독을 치료하려고 그곳에 온 사람들이 얼마나 큰 용기와 결단을 내리고 왔는지 알게 되었고 그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겸허한 마음이 들었다. 중독자들을 잘못 생각한 나의 편견도 부끄러웠고. 

그들은 영웅이었다. 어둡고 궂은 길을 헤매다 어느 날 갑자기 땅속에서 솟아오르듯 막강한 힘으로 리햅 센터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그들에게 과거는 후회 투성이겠지만, 과거에 얽매이고자 아니 할 때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이다. 영웅은 과거를 훌훌 털어내고 현재를 직시하면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앞으로 가는 자들이다. 


나 역시 나의 흑역사를 생각하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지만, 내가 영웅이라는 생각을, 믿음을 갖기로 한다. 영웅에겐 plot armor라는 기능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인식하는 순간 작동한다고 믿으니까.


우리는 어둡고 궂은 길을 가야 마침내 평화의 강, 혹은 우리 영혼의 목적지로 통하는 탄탄대로를 발견하게 되는 모양이지요.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9-12-30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병원에 스카프를 하고 가는 것을 미친 짓이지, 라는 대사에 무릎 탁 치고 아 합니다..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라로 님..

라로 2020-01-02 03:59   좋아요 0 | URL
저도 앞뒤 생각없이 유니폼 안 입고 실습 가는 거라 막 신나가지고 사랑하는 스카프 두르고 갔더니 교수님이 그말 하셔서 사실 등골이 쏴아~ 했더랬어요.ㅎㅎㅎㅎ 앞으로 스카프 하고 다니는 것은 좀 자제가 될 듯;;;ㅠㅠ
새해 인사 감사합니다. 받아도 받아도 좋은 것이 새해 인사같아요.^^;;
곰발님께 인사 남겼지만 그래서 또 할래요.ㅎㅎㅎㅎ 새해 복 많이 많으세요~~오!!!!!

moonnight 2019-12-30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lot armor란 표현을 첨 알았네요@_@;ㅎㅎ; 해든에게 배웁니다 호호^^ 영웅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리햅에서 만나신 분들에 대해서도요. 실수할 수 있지만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배우고 이겨내는 분들이 존경스러워요. (저는 맨날 하는 실수를 또 매번 하는 편=_=;) 늘 미래를 바라보고 노력을 거듭하시는 라로님은 저의 영웅이십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라로 2020-01-02 04:04   좋아요 0 | URL
저도요. 애들이라 들으면 기억을 잘 하는가 봐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저도 요즘 해든이에게 배우는 게 꽤 많아요. 예전엔 말을 안해서 정말 답답한 아이였는데 이제는 왜 그리 말을 많이 하는지,,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암튼, 이제 리햅에 가는 일은 끝이났지만 지금도 가끔 그 사람들 생각이 나요. 그런데 거기 오시는 분들은 정말 중독 인구의 세발의 피도 안 되는 분들이랍니다. 미국은 중독으로 찌들어 가게 될까요? 가끔 그런 생각도 들어요.ㅎㅎㅎㅎㅎㅎㅎ 우리는 서로의 영웅이 아닐까요? 서로를 바라보면서 의욕을 얻고 희망을 품고 격려를 받는,,,달밤님은 그래서 제 큰 영웅이십니다. 한국은 새해가 이미 밝았을텐데 늦었지만 달밤님, 새해 복 많이 많이 받으세요~~~~~~!!!!^^

psyche 2019-12-31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plot armor 라는 말 처음 알았어요. 똘똘한 해든이!!
라로님 영웅 맞아요. 꿈을 가지고 열심히 라로님의 모습이 저에게 얼마나 큰 자극이 되는지요. 우리 모두 지금은 어둡고 답답하지만 plot armor 가 든든히 받치고 있다고 믿자고요!

라로 2020-01-02 04:07   좋아요 0 | URL
해든이가 어디서 주워듣기를 잘 하는 것 같아요. 프님도 제가 그런 분인 걸요!! 말 안해도 아시죠??? 더구나 우리는 나이도 비슷하니까 더 그런 느낌이 들어요. 서로의 거울이 되어 보아요. 우리 인생에 plot armor 가 든든히 받치고 있다고 믿으면서 올해도 잘 살아보자구요!!!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고 올해도 화이팅!!!!

blanca 2019-12-31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각서 ㅋㅋㅋ 아우, 그것 미리 얘기좀 해주시지 그러셨어요. 어제 분홍공부에게 엄마가 열네 살이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네가 벌써 열네 살이 된다니. 그랬더니 피식피식 웃더라고요.--;; 사춘기님이 오신 게 분명. ‘내가 영웅이라는 생각‘ 정말 나 자신에게도 해주고 싶은 얘기 감사합니다.

라로 2020-01-02 04:10   좋아요 0 | URL
각서,,,그거 근데 별로 소용이 없긴 해요.ㅠㅠㅠㅠ 큰아이 N군에게 사용했더니 먹히지도 않더라구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분홍공주가 14살이면 우리 해든이도 한국 나이로 14살이군요!!!!! 만으로는 아직도 12살인데,,,,시간이 정말 넘 빨리 지나갑니다. 우리의 작은 영웅들이 사춘기로 접어든다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아요.ㅎㅎㅎㅎㅎㅎㅎ 블랑카님이랑 분홍공주 유치원 얘기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블랑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는 기회가 되면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