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결혼해서 내가 셔츠를 다려준 적은 거의 없는 듯. 의상학과를 나왔기 때문에 남들보다 훨씬(?) 다림질을 잘 할 수 있는데도 신혼 초에 몇 번 다려줬는데 남편은 처음부터 여자니까 이런 일울 해줘야 하고 남자니까 그런 일을 할 수 없고 그런 생각 자체가 없더라. 그러니 바리지 않는 건 당연하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자기 옷은 자기가 알아서 다려입는다. 더구나 치장하는데 남자보다 훨씬 시간이 걸리는 아내를 위해 어느날부터 옷도 다려주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내옷도 자기가 당연히 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듯 24년동안 옷을 다려주면서 군소리가 없다.
남편과 처음 데이트를 했을 때 남편은 나를 식당에 데려가지 않고 그당시 큰형님네 아파트(큰형님 가족이 여행중이었던듯)에 초대해서 우리 부부의 시그니쳐 메뉴가 된 아보카도와 다른 것들을 만들어 줬었다. 남편이 그렇다고 음식을 많이 해본 사람이냐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옛날 한국 엄마 같은 우리 시어머니 덕분에(?) 수저도 식탁에 놓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차려주는 밥만 먹던 그런 전형적인 아들. 대학에 가서도 음식까지 나오는 기숙사에 살아서 물에 손 한번 담글 필요도 없었던 사람.
그런데 삶은 남편에게 가혹했는지 나같은 아내를 만나서 옷도 다려입고, 아이들 식사도 챙겨줘야 하고 이제는 여행가는 아내의 짐까지 싸준다. 어제 리셉션에 갔다 왔더니 너무 늦었다. 더구나 나는 그눔의 오십견 때문에 잠을 잘 못잔다. 그래서 시아버님이 처방받은 마일드 하다는 수면제를 달라고 해서 먹고 잤다. 오늘 아침 9시에 떠나야 하는데 짐은 하나도 안 싸고서 잤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우렁신랑 남편이 내 속옷이며 운동화까지 챙겨서 깔끔하게 짐을 싸놨다. 나는 다른 핸드백에 책 5권을 넣어가지고 왔을 뿐이다.
배를 타고 섬에 오면서 책을 읽는데 나는 밑줄긋기파라서 샤프로 밑줄을 그어야 하는데 엽서 쓸 생각으로 만년필만 챙겨왔다. 뚜껑이 잘 닫히는 트위스비 미니로!! ㅎㅎㅎㅎ 그리고 껌을 씹으려고 보니 12일 동안 씹으려면 좀 부족한거다.(네, 저는 껌을 수시로 씹;;) 그래서 남편에게 샤프와 껌을 올때 챙겨오라고 했더니, 짐을 쌀때 내 잠옷을 챙기지 않았다며 리스트를 만들겠단다. 짐가방을 안 열어봐서 잠옷이 없는지도 몰랐다. 흑
남편의 그 문자를 보니까 어제 읽은 강창래 작가의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가 떠오른다. 아무것도 못하던 남편이 아내를 주려고 인터넷이랑 지인 셰프에게 물어가며 음식을 하는 얘기를 쓰는데 나보다 음식을 잘 만들뿐 아니라 정성도 그만한 정성이 없다. 오죽하면 지문이 다 지워질 정도였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엄마 생각이 많이 나서 막 울고 그럴 줄 알았는데 엄마 생각이 많이 났지만 그보다 남편 생각이 더 많이 났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잘 훈련(?)이 되어 이제는 나 없이도 아무 불편함이 없을 듯? 이 아니라 내가 없으면 더 편하게 살 것 같은 남편. ㅎㅎㅎㅎ 내 여행짐도 쌀 필요가 없고 속옷도 빨아주지 않아도 되고 다림질도 해줄 필요 없고. 남편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란 느낌.
이참에 호주가면 혼자 살아야 하는 아들도 훈련을 시켜야겠어서 일단 유튜브 보고 다림질 하는 거 배우라고 했다. 그런 다음에 실전은 남편이 전수하는 것으로. 밥통에 밥하는 거랑 빨래하고 접는 거 가르치고...혼자서도 잘 살수 있도록 가르칠 게 많구나. 그래도 아빠의 모범을 봤으니 서당개 삼년에 풍월은 못 읊조려도 설거지는 하겠지.
남편이랑 애들 올때 또 가져와야 하는 것이 있는지는 내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