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클레지오 작가의 자전적 소설
✔️만연체 글이 아니어서 쉽게 술술 읽히는 매력
✔️세계대전을 그렸으나 지금 현재의 전쟁 중인 나라들의 모습도 함께 그려지는 이야기
✔️ 특히 팔레스타인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더 좋음
✔️전쟁이라는 키워드가 가지는 무거움과 아픔을 지나치게 무겁지 않게 전달하는 책
✔️ 한국을 좋아한다는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짐.
(54) "물론 세상은 변했다.
풍속도 복장도 달라졌고, 고유의 언어도 다소 잊혔다.
하지만 어느 날 저녁, 누군가 그곳 황야에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불 때,
개 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집과 멀린 떨어진 곳에서 그 악기를 연주한다면,
사라졌다고 믿었던 모든 것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
아마도 르 클레지오는 <브르타뉴의 노래> 글을 쓰면서 백파이프 연주를 계속해서 듣지
않았을까
책을 읽는 내내 아련한 느낌의 고향 가곡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르 클레지오의 이야기 [브르타뉴의 노래]에는 어떤 갈등 요소도 특별한 등장인물이 없다.
주인공은 오직 '브르타뉴' 지역 뿐이다.
저자인 르 클레지오가 어린시절 만났던 '브르타뉴'에 대한 추억들
그리고 지금의 시점에서 만난 '브르타뉴'의 변화된 모습들.
이에 대한 짧은 단상들이 이야기를 이루고 있다.
(57) "어른이 되어 다시 브르타뉴에 갔을 때,
나는 도리포로스를 찾아 보았지만 도리포로스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 그러고 보니 결국 창을 가진 자는 인간이었다! (...)
이 작은 존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삶의 주기가 사라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분명 감자의 수확량은 늘었다.
하지만 브르타뉴의 땅에는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었다."
(80) 해안가 마을에서는 야생초를 경작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 사회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곳은 토끼와 노루와 여우를 위한 세상이지 인류를 위한 세상이 아니었다. 아니면 지금은 사라져버린 다른 종의 인류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야기 속에는 인간들의 무지함 혹은 편의성을 위해 희생된 다양한 생물종들의 소멸의 모습이 그려진다.
다양성의 부재, 다양성의 소멸이라는 어찌보면 무거운 주제가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내리고 있다.
과거에는 '다양성'을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인간'만이 살아남기 위해 나머지들을 무참하게 멸종시켜버린 것일까?
(59) "브르타뉴, 특히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퐁라베 지방, (....) 그곳은 전쟁과 파괴의 고장이다."
(73)"브르타뉴에 있을 때면 나는 전쟁이 끝나고 5년이 지난 후 그곳이 어땠었나에 대한 기억을 되찾고자 토르슈곶을 방문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요즘 아이들도 토르슈에 오지만, 그 아이들은 다른 것을 본다."
또한, 작품에는 '세계대전'이라는 어둡고 무거운 시기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무거운 서사가 계속되기 보다는 '브르타뉴'의 입장에서,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황을 적당한 무게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묘사들이 그려내는 삶의 모습은 긴 시간의 흐름 속에 찰나처럼 지나가는 우리네 인생에 대한 모습들이다.
(77)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던 시기였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랬기에 우리는 유년기 시절에 우리가 경험했던 것들이 영원히 지속되리라 믿었을 수도 있다."
(83) 내가 아는 세상 이전에 다른 세상이 있었음을, 나는 그저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에 불과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저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로서 내가 바라보는 '브르타뉴'는 존재 자체는 변하지 않은 채 잠시 외향이 변해가고 있는 모습이다.
별것 아닐 수 있는 문장이지만 문장 속에서 어딘가 모를 쓸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것이 단지 '브르타뉴' 여서가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장소들에도 이러한 "쓸쓸함"이 머물 수 있다.
다만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일 것이다.
(89) 브레즈 아타오('브르타뉴여 영원히') (...) 마치 브르타뉴 사람이면 프랑스인은 될 수 없다는 듯이, 마치 그 두 개는 서로 완전히 반대어라는 듯이 말이다. 혹은 그 모든 것은 그저 지난 시대 이야기일뿐이며, 지금은 막연하고 아무 쓸모도 없는 향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98) 사실 브르타뉴에는 타인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오랜 전통이 있다. 아마도 이주와 족외혼이 그들의 유전자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은 프랑스 지방 중 드물게 팔레스타인의 입장을 지지한 지역이다.
이 책 [브르타뉴의 노래]를 읽기 전까지는 프랑스의 '브르타뉴' 지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이 지역이 특별히 팔레스타인을 지지한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것은 유럽은 각 지역마다의 특색이 어딘가 살아있구나 하는 느낌이다.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생생함을 그려내면 오히려 '지역색'을 드러낸다고 하여 부정적 평가를 받기 쉬울 텐데 말이다.
사실 특별한 지역색을 가지고 있는 편은 아니기 때문인지, 이러한 '지역색'이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하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국가'라는 이름 하에 정말 중요한 각 지역마다의 특색을 상실해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유독 이 생각이 강하게 든 것은 아마도 최근 '서울 편입'과 관련된 들썩들썩한 경기도 일부 도시들의 이야기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106) 나는 바로 그런 이들에게 이 소소한 이야기를 바치고 싶다. 이것은 고백이나 추억 앨범이 아니다. 그저 단조로우면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브르타뉴의 노래다. 지금도 폭풍우 속에서 '노래하는 바위'가 부르는 노래, 그 오래된 지난날 밤 축제의 열기 속에서 우리 조상들이 브르타뉴의 전통악기 비니우와 봉바르드의 날카로운 음악을 배경으로 발을 구르며 반복하여 전하던, 바람이 실어간 노래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각자의 특색에 따라 '각자의 노래'를 찾아가고 계승해나가는 것은 아닐까?
굳이 '서울'로 대동단결하는 모습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생각도 든다.
책속의 두번째 수록 작품인 [아이와 전쟁].
작가 자신이 겪은 전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지금 이 시점에 더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매일 빼놓지 않고 들리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소식 때문이다.
책 속의 내용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폭격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고 죽어가고 있는 아이들
(116) 나는 캐나다 폭탄으로 터져버린 고막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타격을 받았거늘, 하물며 그토록 무겁고 강력한 폭탄에 대해, 콘크리트도 뚫을 수 있고 지하 3층에 있는 적까지도 타격하도록 만들어진 폭탄에 대해 요즘 아이들은 어떤 기억을 가질까?
아이들은 어떻게 전쟁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가?
부상당하지 않더라도, 한 번이 아니라 열 번, 스무 번의 폭발음을 들어 익숙해질지라도, 사람들이
"전쟁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라도 말이다. 어떻게 그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르 클레지오의 말처럼 전쟁으로 인한 부상이나 죽음보다도 전쟁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 아이들..
운좋게도 나는 전쟁을 잠시 중단한 나라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직접적으로 겪지 않았다.
전쟁을 준비하는 일을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전쟁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와 ..
태어나보니 전쟁 중이었던 아이..
둘 중 누가 더 전쟁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전쟁에 대해 무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작금의 사태때문에 더욱 마음이 무거워지고, 가슴 한편이 아파지는 이야기 [아이와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