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괘씸한 철학 번역 - 순수이성비판 길잡이
코디정 지음 / 이소노미아 / 2025년 5월
평점 :
│
본 서평은 이소노미아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
시작이 제일 무서워 미룬다는 가사의 노래가 있다.
작년에 유튜브에 잠깐 화제를 불러온, 코미디언 이제규의 동요, 「미룬이」의 가사다.
그렇다면 '독서'에서 시작이 제일 무서워 미루게 되는 책은 무엇이 있을까?
일단 나는 철학 책을 잔뜩 미루고 있다.
─
제목도, 철학자의 이름도 듣기만 해도 뇌가 딱딱해지는 탓에 철학을 쉽게 풀어쓴 책이 출간되는 것도 요즘 출판 트렌드 중 하나가 되었다. 러셀 로버츠는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이라는 책으로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썼고, 『하루 한 장 니체 아포리즘』같은 책에는 원문과 함께 독자의 이해를 돕는 편역자의 글이 실려있다.
쉽게 떠먹여주는 책은 많고,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기질의 독자는 분명히 있다. 내가 그렇다. 실은 몇 권 사두긴 했다. 하지만, 펼치고 읽다 보면 이해가 안 되는 탓에 좀 더 내공을 쌓은 뒤로 미루게 되고…. 완독 실패의 경험은 내 가방끈과 가름끈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내 탓만 하게 된다.
/
어째서 철학 책을 읽을 때마다 독자는 지혜를 구하기는커녕
자신의 문해력을 한탄해야 하는가?
─ P.39
─
에디터, 언어활동가, 변리사로 활동 중이기도 한 코디정 교수님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읽기 어려움'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고 새로운 번역을 제안한다. 『괘씸한 철학 번역』이 바로 그 책이다.
우리의 삶의 많은 부분이 일본에서 넘어왔다. 서양 철학도 그런 분야 중 하나다. 저자는 그런 부분을 지적하는 말로 책을 시작하며, 한국인이 보통의 생활에서 사용하지 않는, '질료'나 '실재'따위의 단어를 예로 들며, '여전히 한국어가 되지 못한 일본어'를 아직도 끌어안고 학문 분야에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외에도 저자는 고여버린 학회나 잘못 작동되는 학자의 권위, 불필요한 고집들을 말하며, 다음 세대에게는 이런 족쇄를 물려주지 않기 위해 새로운 철학 번역을 하자고 주장한다.
/
지식은 단어에 보관되고, 생각은 언어를 통해 행해진다.
그러므로 아무리 똑똑한 사람일지라도 단어의 의미를 넘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언어보다 더 좋은 표현 방법을 사용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단어에 속박되며 언어에 의해 생각이 제한되는 연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
낡은 단어들을 반성 없이 무비판으로 사용하는 관습은 존중할 만한 전통이 아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앞선 세대들이 겪었고, 지금 우리 세대가 여전히 겪고 있는,
이토록 심한 언어적 고통을 물려줘서는 안 된다.
│
철학의 비판 정신으로 악습과 싸우자.
─ PP.71-72
─
아카넷 출판사 기준으로 두꺼운 양장본으로 두 권짜리 책,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저자는 이 방대한 양의 책을 영어 단어를 출발 언어로 삼고, 우리말을 도착 언어로 삼아 용어를 분석하고 검증한다. 하지만 단순히 '△△보다 ○○가 낫다'고만하려는 게 아닌, 왜 처음에는 이런 번역이 되었는지까지 집요하게 추적한 흔적마저 텍스트에 녹아있다. 철학이란 단어를 만든 메이지 시대(1868-1912)의 번역가 니시 아마네가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런 한자어가 만들어졌는지, 서양 철학의 역사를 따라가며 왜 이 단어가 더 나은 번역이 되는지에 대한 설득과 주장은 독자의 이해를 넘어, 수용과 비판까지 할 수 있게 돕는다. 『순수이성비판』을 바탕으로 쓰인 책이지만, 철학과 언어학 면에서도 배울 점이 넘쳐나는 책이다.
─
가방끈이 짧아도, 가름끈이 짧아도, 함께 읽으며 도전할 수 있게 만드는 참 멋진 기획이 아닐 수가 없다. 저자의 『괘씸한 철학 번역』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읽기에 대해 '믿을 구석'이 되어주기도 하면서도 번역서에 대해, 또는 고여버린 기성의 무언가에 대해서 어떻게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할지도 느끼게 해준다. 나는 저자의 강력한 주장을 받아들인, 『순수이성비판』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 책이 있으니, 『순수이성비판』을 이제는 미루지 않고 도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