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속에 미래가 있다]명사들이 말하는 글쓰기




《감각적인 문체와 미학으로 명성을 떨친 작가 김승옥은 오랜 절필을 끝내고 ‘서울의 달빛 0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글은 손이 쓰는 것이다.”

좋은 글을 쓰려면 ‘일단 글을 써야 한다’는 뜻이다. 펜을 쥐고 글을 써 나가다 보면 쓰는 행위 자체가 쓰는 이의 두뇌와 감성을 자극해 새로운 사고와 상상력의 세계를 열어 준다는 것이다.

일본 작가 사이토 다카시는 말하는 것을 걷기에, 글쓰기를 달리기에 비유한 적이 있다. 거리를 조금씩 늘려 가며 훈련하면 누구나 1km는 거뜬히 달릴 수 있듯 글쓰기도 마찬가지라는 것.

글쓰기에도 비기(秘技)가 있을까. 국내 논픽션 분야 베스트 셀러 저자들에게 물어봤다. 체험기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된 한비야 씨, 교양과학 분야 최고 판매 도서 기록을 세운 정재승 씨, 역사 분야의 대중 저술가인 이덕일 씨가 자신만의 글쓰기 방식을 들려줬다.》













○ 쉽고 편안한 말글-‘한비야 체’ 글쓰기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한비야 씨

1996년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이후 지난해 말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에 이르기까지 한비야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이 펴낸 책 7권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들은 한결같이 술술 읽히는 쉬운 말글로 쓰였다. 오죽하면 한 고교 국어교사가 신문 사설을 학생들에게 나눠 주고 ‘이 글을 한비야 체로 고치라’는 수업까지 했을까.

그러나 글이 쉽다고 해서 글을 쓰는 과정도 쉽게 이뤄지리라 생각하면 착각이다. 그의 책 세 권을 낸 푸른숲 출판사 김혜경 사장은 한 씨에 대해 “느낌표 하나까지 굉장히 엄격한 완벽주의자”라고 평했다.

한 씨는 글을 쓸 땐 늘 밤을 새운다. 밤새 원고지 100장을 넘게 쓴 뒤 아침에 마음에 들지 않아 5장만 남기고 모두 버린 적도 있다. “머리를 벽에 100번 찧어 좋은 글 한 줄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글쓰기를 대하는 그의 기본 태도다.

그는 매일 쓰는 일기와 메모로 글쓰기의 기본을 닦았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긴급구호 현장에서도 빼먹지 않은 일기를 토대로 썼다. 디지털카메라를 갖고 다니는 사람이 첫 번째 목련을 보면 저절로 카메라에 손이 가듯 그는 저절로 메모장에 손이 간다고 한다.

글을 멋지게 쓰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글을 잘 쓰려면 미사여구, 유식한 단어를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 책엔 초등학생이 모르는 단어가 한 개도 없다. 그렇게 쉬운 단어로도 얼마든지 책을 쓸 수 있다.”

다 쓴 글은 꼭 소리 내어 읽어 본다. “글은 노래이자 이야기이자 호흡이다. 나와 독자가 호흡이 맞으려면 소리 내서 읽을 때 껄끄러운 표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다.

그에게 ‘일필휘지’란 없다.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뒤 교정지가 나올 때마다 빨간 펜으로 하도 많이 고쳐 ‘딸기밭’이라고 부를 정도다. 원고가 인쇄소로 넘어가기 직전에도 밤중에 달려가 고치고 책이 나온 뒤 2쇄, 3쇄를 찍을 때도 계속 고친다.

한 씨는 해마다 ‘1년에 100권 읽기’를 하는데 긴급구호로 오랫동안 외국에 나가 있지 않으면 대부분 초과 달성하는 편이라고 한다. 그는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들이 ‘진부하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조언 하나를 들려줬다.

“진심을 갖고 써라. 제발 단 한번만이라도 나에게 가슴 뛰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것을 글로 써라.”

○ 전방위적 호기심과 독서-정재승 식 글쓰기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시스템학과 교수가 쓴 ‘정재승의 과학콘서트’는 2001년에 출간된 뒤 지금까지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교양과학 도서다. 이 책을 펴낸 동아시아출판사 한성봉 사장은 정 씨에 대해 “전방위적 호사가”라고 평했다. 다방면에 걸친 지식과 호기심이 그의 글이 지닌 가장 큰 강점이라는 평가다.

한 달에 40∼50권을 훑어보고 10권가량은 꼼꼼히 읽는 정 씨는 “좋은 글을 쓰려면 독서가 필수”라고 생각한다.

“독자가 쉽게 이해하도록 글을 쓰려면 적절한 예제, 딱 맞는 비유, 핵심을 꿰뚫는 인용 등 세 요소가 중요하다. 좋은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이 세 요소 없이 생각을 추상적으로 전개하거나 중언부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 요소는 다른 사람의 글을 충분히 읽지 않으면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때 문단 단위로 연습하기를 권한다. 문단은 생각의 단위이고 한 문단에 하나의 생각을 담아야 하는데 한 문단에서 여러 이야기를 하거나 한 이야기도 끝마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 문단을 잘 구성하기만 하면 연결고리를 통해 다른 문단과 이어가고 글쓰기를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글쓰기 전 밑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중요하다.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곧바로 글을 쓰다가 처음 의도와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시작은 어떻게 하고, 각 문단은 어떤 내용을 담을지 밑그림을 먼저 잡고 글을 쓰면 더 잘 써진다.”

한번 글을 쓰면 반드시 20번쯤 읽는다. “산문에도 운율이 있으므로 독자가 한번에 이해하도록 쓰려면 필자가 아주 작은 운율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글쓰기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의 공통점은 ‘남의 글을 충분히 읽지 않고 글 쓰는 연습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 시각과 문제의식의 단련-이덕일의 글쓰기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 연구소 소장.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97년 첫 책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펴낸 뒤 지금까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쓴 책은 30권가량 된다. 9년간 30권이니 1년에 3.3권을 쓴 셈이며 권당 원고지가 1000∼1300장이니 하루에 9∼12장씩이다. 단행본 말고 잡지나 신문에 기고한 원고를 포함하면 더 늘어난다.

어마어마한 생산량인데도 이 씨는 “쓰는 행위 자체가 큰일은 아니다. 글쓰기에서 글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제의식을 다듬어 주제를 구상하고 자료를 분석하며 생각을 숙성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책 3권을 펴낸 출판사 김영사의 백지선 팀장은 ‘도발적 문제의식’을 그의 글이 지닌 강점 중 하나로 꼽았다. 역사가가 보는 자료라는 게 새로울 것이 없는데도 다양한 자료의 비교분석을 통해 새로운 진실을 발견해 내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

글 쓸 주제를 고를 때 이 씨는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독자도 알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고른다”고 했다. 그는 글을 잘 쓰려면 개방적 세계관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변화를 수용해야 새로운 문제의식이 생기며 문제의식을 갖고 보면 같은 자료에서도 계속 새로운 게 보인다.”

치열한 문제의식을 글로 옮기려면 문장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 씨는 “문장력을 기르는 방법은 많이 보고 많이 써 보는 것 말고 왕도가 없다”고 했다.

“요즘 논술 준비 광고를 보면 논술 공부가 문장 공부인 것처럼 광고하는데 문장은 자기 생각을 펼치는 도구에 불과하다. 더 중요한 것은 글에 담긴 생각, 논리다.”

책을 그렇게 많이 썼지만 여전히 1000장짜리 책을 쓸 때 원고지 200∼300장을 버리는 일이 다반사라고 한다. 아무리 많이 해도 더 수월해지지 않는 일이 글쓰기인 까닭이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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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각적 글쓰기--진중권 | 기타 자료/뉴스 2004/09/12 05:06
 
http://blog.naver.com/medius/60005765172
 
촉각적 글쓰기  /  진중권

전통사회와 현대사회는 각자 다른 지각의 세계를 제공한다. 시골의 읍내를 거니는 것과, 대도시의 거리를 걷는 것은 각각 다른 유형의 지각을 요구한다. 대도시에서는 길을 걷는 것 자체가 온갖 위험으로 가득 찬 '모험'의 성격을 띤다.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을 피해야 하고, 더 빠른 속도로 뒤에서 따라붙는 사람들에게 길을 내줘야 하며, 빼곡하게 붐비는 곳에서는 남의 발을 밟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길을 건널 때에는 앞에서 몰려오는 인파들 외에 양옆에서 달려드는 자동차의 움직임에도 주의해야 한다. 신호 하나를 잘못 보는 것이 여기서는 치명적 결과로 이어질 수가 있다.

시각에서 촉각으로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충격방어'에 관해 이야기한다. "현대인들의 지각에 부여된 과제"의 해결에 필요한 "훈련"을 영화라는 기술복제의 매체가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훈련"이라 함은 그저 배워야 할 내용을 '정신'이라는 지면에 써넣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삶을 위해 습득되어야 할 어떤 행위의 코드를 '신체'에 기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수학을 배우는 것은 학습이나, 운전을 배우는 것은 훈련이다.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은 정신의 일이나, 운전을 배우는 것은 핸들과 브레이크, 가속페달의 감각을 몸으로 익히는 것을 의미한다.

자동차를 모는 사람은 한꺼번에 여러 개의 과제를 신속하게 해결해야 한다. 눈은 전방과 후방을 번갈아 주시하고, 손으로는 핸들을 조정하고, 발로는 브레이크와 가속페달을 밟는다. 때때로 다른 차가 울리는 경적에 신속하게 반응하도록 귀는 열어놓아야 한다. 이 모든 과제를 해결하면서도 그는 유유히 음악을 듣거나, 심지어 차에 장착된 LCD 화면을 힐끗거리며 스포츠 중계를 보기도 한다. 시속 수십 킬로미터의 속도로 질주하는 다른 차들을 헤집고 다니는 과제를, 그는 시각, 청각, 촉각을 동시에 사용하여 비교적 여유 있게 해결한다. 이것이 현대인의 모습이다.

하나의 사물에 눈을 '집중'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운전자의 눈앞에서 풍경은 순식간에 변하고, 그에 따라 운전자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순간에 신속하게 판단을 내리는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일을,  그는 몸 속에 기입된 코드에 힘입어 별 어려움 없이 순간적으로 해결해 나간다. 이렇게 온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산만한 지각을 벤야민은 "촉각적"이라 부른다. 현대인의 지각은 "시각"의 성격을 벗고 점점 더 "촉각"을 지향한다. 이렇게 몸을 바꾸는 데에 필요한 "훈련"을, 자동차만큼이나 빨리 돌아가는 영화가 제공한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차를 몰지 않을 때도 운전자와 같다. 그의 지각은 산만한다. 가령 우리의 학창시절에 부모들은 우리가 라디오를 들으며 시험공부를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 우리의 아이들이 컴퓨터의 창을 여러 개 열어놓고 숙제를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시각, 청각, 촉각을  공감각적으로 활용하여--가령 맹인 게이머를 생각해보라--화면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신속하게 처리해 내는 프로게이머는 아마도 멀지 않은 장래에 인간의 평균적인 모습이 될 것이다. 현대 사회가 우리 지각에 부여하는 과제는 더 이상 시각에 입각한 전통적인 지각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속도와 미디어

우리의 몸은 어느새 길들여져 이 속도를 의식조차 하지도 못하나, 언젠가 '모던'이라는 시대가 처음으로 도래했을 때 사람들은 그 속도 앞에서 모종의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원래 시각에 입각한 지각 모델은 움직이지 않는 풍경을 집중해서 바라보는 데에서 성립한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풍경을 쏜살같이 달려가는 기차 안에서 본다. 그 안에서 창문을 통해 본 풍경은 가만히 있지 않고 기차가 달리는 것과 똑같은 속도로 우리 눈앞을 스쳐간다. 이때 우리의 눈은 창 밖으로 보이는 대상에 집중할 수가 없다. 대상이 우리 시야에 머무는 것은 단 한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고전적 지각은 움직이지 않는 영상, 즉 전통적인 타블로를 감상하는 것을 모델로 한다. 하지만 17세기에 '라테르나 마기카'의 기술자들은 두 장의 슬라이드를 이용하여 한 인물의 영상을 관객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게 만들었다. 이때 관객들은 이 움직이는 마술환영을 보고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수 백년 후 뤼미에르 형제가 역에서 촬영한 영상으로 마치 기차가 관객들을 향해 육박하는 듯한 느낌을 연출했다. 이때에도 사람들은 놀라서 비명을 질러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활동사진의 창세기를 경험했던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움직이는 그림에 길들여져 있다.

현대인은 온갖 미디어가 쉴새없이 쏟아놓는 영상들이 홍수에 빠져 있다. 마차를 모는 감각으로 자동차의 운전을 할 수 없고, 타블로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영화를 감상할 수 없듯이, 넘쳐흐르는 영상정보의 흐름을 헤쳐나가는 데에는 전통적인 지각과는 다른 새로운 지각의 방식이 필요하다. 그것을 우리는 위에서 "촉각적" 지각이라 불렀다. 영화와 텔레비전에 이어 인터넷으로 연결된 통합 매체인 컴퓨터가 우리 삶의 세계 속으로 들어온 지금, 지각의 촉각성을 높이는 것은 거의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사물의 세계이자, 새로운 지각의 세계이며, 동시에 새로운 글쓰기의 환경이다.

텍스트와 이미지

언뜻 보기에 영화는 '선형적'으로 보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과 비교해 보면 영화의 공간적 특성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연극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뒤집는 것이 쉽지 않으나, 영화는 구성원리자체가 '몽타주'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시간의 자연적 흐름을 멈추거나, 뒤로 돌리거나 혹은 두 가지 다른 시간대를 교차하게 만들 수 있다. 미학적 의미에서 '몽타주'란 단지 커팅을 넘어 필름 시퀀스 a와 b를 충돌시켜 거기서 제3의 이미지를 불꽃처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제3의 이미지는 영화 속에서 공간성을 구현한다.

이런 영상 매체에 익숙한 세대는 글쓰기에 대해서도 다른 감각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 어느 시사주간지의 기사에 따르면 요즘 대학생들이 낸 레포트 중에는 '컷'과 '페이스트' 기법으로 씌어진(?) 것이 많다고 한다. 한 마디로 인터넷 서핑으로 얻은 패러그래프들을 잘라내어 갖다 부치는 식으로 텍스트를 작성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영상 이미지를 구성하는 원리를 텍스트의 작성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강사의 불평에 따르면 이렇게 작성된 텍스트에는 종종 일관된 논리의 전개가 결여되어 있다고 한다. 여기서 문자 텍스트는 더 이상 선형적이기를 그치고, 텍스트 파편들로 이루어진 공간적 모자이크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 예는 현대의 매체 환경 속에서 글쓰기가 처한 긍정적, 부정적 가능성을 모두 보여준다. 부정적 가능성이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선형적 사유능력이 점점 저하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긍정적 가능성이란 문자 텍스트가 공간적 이미지의 차원을 획득하여 글쓰기의 새로운 차원을 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적) 선택의 축을 (시간적) 결합의 축에 투사한다는 은유의 원리(로만 야콥슨)처럼 인터넷 글쓰기의 텍스트는 선형적인 문자의 흐름에 공간적 구조를 도입한다. '텍스트'라는 말이 본디 직물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종횡으로 짜여진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텍스트는 이제 비로소 제 어원에 값하는 모습을 띠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디자인으로서의 글쓰기

"인문학의 위기"가 그저 대학에 침투한 신자유주의의 횡포라는 의미를 넘어 어떤 내용적 실질을 갖는다면, 그것은 전통적인 사유와 글쓰기의 위기를 가리킬 것이다. 인문학의 선형적 글쓰기는 더 이상 현대의 미디어 상황과 호환성을 갖지 못한다. 한 마디로 선형적 사유에 입각한 글쓰기는 영상적 사유에 익숙한 현대의 지각모델과 충돌을 일으킨다. 사유의 '집중'을 요구하는 긴 호흡의 텍스트는 현대인의 지각의 산만함에 어울리지 않는다. 리모콘으로 끊임없이 화면을 바꿔가며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모자이크식 지각에는 기나긴 집중을 요구하는 텍스트는 낡은 '고문'의 도구일 뿐이다. 스크롤 바를 한번 긁어서 끝나지 않는 텍스트는 더 이상 읽혀지지 않는다.

읽혀지기 위해서 텍스트는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짧은 파편으로 해체되어 흩어진 후 다시 몽타주의 수법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미 발터 벤야민은 인용문의 몽타주로 이루어진 콜라주 내지 모자이크식 글쓰기를 도입한 바 있다. 이런 글쓰기는 텍스트의 내용을 통해서보다는 외려 형식을 통해 더 많은 얘기를 한다. 이렇게 씌어진 텍스트는 선형적인 논리의 연쇄를 이루기보다는 공간적인 이미지의 합성에 가까워진다. (지난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선거 영상은 전통적인 선형 텍스트를, 민주당의 홍보물은 의미 없는 영상 이미지를 지향했다.) 빌렘 플루서가 미래의 글쓰기는 디자인이 될 것이라고 한 것을 바로 이 때문이다.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그것의 형식에 있다.

오늘날 텍스트는 읽혀지기 위해 영상을 지향하고 있다. 아니, 영상을 지향하는 텍스트는 시간적으로 읽혀지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보여지는 것을 지향한다. 여기서 텍스트를 보는 것은 소리 없이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 전통적인 의미의 시지각이 아니다. 텍스트의 이미지를 수용하는 것은 외려 모든 감각을 동원한 공감각적인 체험, 마샬 맥루언이 말하는 의미에서 '촉각적'인 체험이다. 텍스트는 더 이상 데카르트적 정신에 기록되는 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텍스트는 정신으로 올라가 사유를 거치기 전에 벌써 신체에 기입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마사지다.

스크립트로서의 글쓰기

빌렘 플루서는 오늘날의 글쓰기가 영상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과거의 글쓰기는 주술이나 신화와 연결된 마술적 그리기가 위기에 처했을 때 등장했다. 마술로 맺어진 세계와 인간 사이의 관계가 낯설어지는 시기에 알파벳이 등장한다. 그렇게 도입된 수천 년의 문자문명의 끝에서 이번에는 알파벳 텍스트가 이번에는 자신의 위기를 맞고 있다. 오늘날 텍스트는 더 이상 세계를 보여주는 투명한 창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세계와 인간의 사이는 다시 낯설어졌다.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알파벳 텍스트를 대신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영화, 사진, 인터넷 영상 등 기계복제가 가능한 '기술적 형상'이다.

세계-그림-글쓰기-기술형상의 역사적 연쇄 속에서 글쓰기는 서서히 독자적 의미를 잃고 점점 더 기술형상의 창조에 종속되어 간다. 플루서에 따르면 기술형상은 세계의 재현이기를 원했던 전통적 그림과 달리 문자 텍스트를 이미지로 만든 것, 말하자면 영상으로 실현된 스크립트다. 그런 의미에서 텍스트를 영상으로 옮겨놓는 방송작가나, 광고 스크립터는--아직 발달되지 않은 그들의 자의식과는 달리--더 이상 글쓰기의 변방에 머무는 주변인이 아니라 미래의 글쓰기의 전범이 되어가고 있다. 과거에는 스크립트가 글쓰기를 모방했다면, 앞으로는 스크립트를 모방하는 것이 글쓰기의 아방가르드가 될 것이다.

읽혀지기 위해 글쓰기는 점점 더 '스크립트'를 닮아가고 있다. 알파벳 문화가 몰락하는 가운데, 글쓰기는 점점 더 스크립트를 지향해 간다. 굳이 영상으로 실현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글쓰기도 점점 더 그 안에 영상의 형상적 잠재성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래의 글쓰기는 이를 그저 변화된 매체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구차한 '생존의 전략'으로 바라보는 소극적 태도에서 벗어나,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실험의 장으로 전유하는 창조적이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문자문화에서 구술문화로

알파벳 문명은 구술문화를 문자문화로 바꾸어 놓았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낭독의 문화를 묵독의 문화로 바꿔놓음으로써 인간의 정신화, 내면화를 초래하였다. 문자는 목소리의 침묵, 청각을 고요한 시각으로 대체해 놓은 것이다. 구텐베르크 은하의 끝에서 다시 목소리는 부활하고 있다. 인터넷 공간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중간에 위치한다.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채팅은 뜨거운 구술문화에 속하나, 그 흔적이 문자의 형태로 남아 기록된다는 점에서는 차가운 문자문화를 닮았다. 새로운 글쓰기는 문어로서 구어를 구현하는 경향이 있다. 문어와 구어는 각각 다른 수사학을 갖는다.

소크라테스는 결코 글을 쓰지 않았다. 그는 맥락을 벗어난 곳에 인용되어 그 의미를 왜곡시키는 문자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의 제자 플라톤은 대화체로 글을 썼다. 그의 진리는 대화의 변증적 구조 속에서 실현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기억을 위해" 글을 썼다. 그의 글은 고독한 화자의 독백이다. 그의 글쓰기 형식은 오늘날 학술논문의 모델이 되었고, 그 글쓰기의 독백적 성격은 다른 모든 글쓰기의 일반적 형식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이 움직임에 역전이 일어나고 있다. 인터넷 매체는 구어를 부활시키고, 쌍방향적 성격은 글쓰기의 대화적 성격을 강화하고, 화상과 음성채팅은 소통을 위해 더 이상 문자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움직임 역시 부정적 가능성과 긍정적 가능성을 함께 내포한다. 부정적 가능성이란 문자를 배우고도 사용하지 않는 새로운 문맹층의 형성이다. 오늘날 인터넷 공간에서 문자가 파괴되고, 음성(특히 모음)이 유아적으로 단순화하는 과정이 실제로 확인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한 긍정적 가능성이 또한 존재한다. 하나의 발신자가 다수의 수신자를 향해 송신을 하는 일방적인 소통모델을 대신하여, 동시에 다른 메시지의 수신자의 역할을 하는 다수의 발신자가 서로 접속하여 이루는 새로운 망형 소통모델이 등장할 가능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미디어 환경일 뿐 아니라 동시에 새로운 글쓰기의 감각을 의미한다.

어쩌면 우리는 전통적인 글쓰기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저자의 죽음을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미 벤야민은 대중매체의 등장으로 인해 필자와 독자의 차이가 더 이상 신분적인 것이 아니라 기능적인 것이 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오늘날의 독자는 '귀여니'처럼 필자가 되고 있고, 오늘날의 필자는 그 놈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알기 위해 귀여니의 독자가 되고 있다. 하나의 중심에서 다수의 독자를 향해 메시지를 널리 던지는(broadcasting) 것이 필자의 권력이었다면, 그 중심의 지위에서 내려 와 망형 소통의 구조 속에 하나의 망점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 독자의 저항이다. 그리고 이 평등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 역시 고유한 글쓰기의 감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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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名士가 말하는 좋은 글쓰기비결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려면 독서가 王道.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해야(多讀·多作·多商量)…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려면 독서가 王道이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해야…
 (多讀·多作·多商量)
 
 ●지식축적을 많이 하라(金埈成)
 ●진실·솔직한 말을 짧고 간단하게 하는 것이 말 잘하는 비결(洪思德, 姜南周, 전여옥)
 ●多讀, 多作 후 깊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李相培, 張良守, 정진석)
 ●좋은 글을 소리내어 읽는 연습을 하면 말을 잘할 수 있다(金上俊)
 ●金東吉·李御寧·金大中·金東鍵의 말과 글)

金順子   



 전문가 53명 조사
 
 말과 글은 곧 사회를 반영한다. 사회가 혼탁해질수록 말과 글은 거칠고 혼탁해지고 만다. 사회의 구성원이 쓰는 말과 글은 종종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부정확하고 거친 말들이 난무하는 사회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月刊朝鮮은 ‘글과 말을 잘 쓰고 잘하는 사람들이 추천하는 좋은 글쓰기, 바른 말하기’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이번 설문에 참여해 준 분들은 우리 사회에서 글과 말을 잘 쓰고 잘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각계 각층의 전문가 53인이다.
 이번 설문을 통해 바르게 말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 사회의 말과 글이 거칠고 혼탁해진 원인을 살펴보고, 바른 말과 글쓰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울러 어떻게 하면 바른 말과 글쓰기를 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설문에 응해준 분들로부터 우리 사회에서 글과 말을 잘쓰고 잘하는 분들을 추천받기도 하였다.
 설문 항목별 응답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한국 사회에서 말과 글이 품위 없고 부정확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말과 글은 사회와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해진 만큼 전문가들은 말과 글이 품위 없고 부정확하게 된 원인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
 우리 말과 글이 거칠게 된 데는 일제식민 치하와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살벌하고 각박한 세상을 살면서 심성이 피폐해진 데서 그 원인을 찾는 의견과 방송 매체가 제 구실을 못하는 데 원인이 있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밖에 컴퓨터 통신이나 인터넷을 통해 비속어·은어 남발, 정치인 등 지도층 인사들의 저속하고 폭력적인 언어 사용, 문화 정책과 교육 부재, 말하고 글쓰는 사람의 思考(사고) 훈련 부족, 국어에 대한 관심 부족 등 폭넓은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소설가이자 부총리 출신인 이수그룹 명예회장 金埈成(김준성)씨는 “8세기경 한자가 유입되면서 우리 고유의 말을 찾아내고 만들어 내는 데 등한시한 것이 우리 말과 글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중 방송과 언론 매체의 책임을 지적하는 의견은 다음과 같다.
 ‘품위 없고 부정확한 말에 대한 원인은 1차로는 방송에 있다. 사투리와 무식하고 거친 말이 예사롭게 방송되고 그것을 어린이들이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그런 현상이 심화될 것으로 본다.’(姜南周)
 ‘젊은이들을 주축으로 한 소위 N세대 문화가 사회 저변에 확대되면서 출처 불명의 은어나 略語(약어)들이 마구잡이식으로 남발되는데, 이들을 계도해야 할 언론이나 방송 매체 등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는 것도 품격을 떨어뜨리는 원인이다.’(黃樹寬)
 ‘청소년들에게 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보다 매스컴이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면서 우리 사회의 언어 질서는 깨졌다. 구체적으로 인쇄 매체의 경우 스포츠신문, 주간지의 선정적이며 폭력적인 묘사와 잘못된 언어 표현이 가장 큰 원인이다. 영상 매체에서는 텔레비전의 코미디 프로그램, 드라마의 극중 대사가 거칠고 무질서한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李相培)
 ‘텔레비전과 라디어에서 속된 언어를 남발하는 자질없는 연예인이 문제이다.’(李根三)
 ‘방송의 책임이 크다. 첫째는 엄격성이 없는 말과 글들이 많이 나온다. 엄밀하고 투명한 방송 언어의 선택이 필수적이다. 둘째는 TV에서 개그적 발상이 확대된 사회 풍조 탓이다. 개그적 발상이 글쓰기에 퍼져 재담도 아닌 모호한 글들이 많아졌다. 뛰어나지 못한, 재미를 표현한 글은 차라리 가벼워져 글을 망치기 쉽다. 정상적인 규범 아래 글이 쓰여지고 말로 소용되어야 할 것이다.’(柳宗鎬)
 이밖에도 많은 이들이, 말과 글이 거칠고 혼탁해진 원인은 오염된 방송 언어가 일상화된 데 있다고 지적했다(具常, 孔柄淏, 金承鉉, 辛奉承, 李季振, 金炳宗, 李珉和, 安秉煜, 金亨錫, 金光雄, 柳根粲, 任東權)
 
 미화·변명 위한 억지와 깡패논리
 
 한편으로는 일제식민 치하, 6·25 전쟁, 고도 성장기 등을 거쳐온 근대사에서 원인을 찾는 사람들도 있었다. 언어는 시대와 사회를 민감하게 반영하는데, 그런 역경을 헤쳐 나오면서 살벌하고 각박한 사회 환경이 언어를 거칠게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일제의 식민통치, 6·25 사변을 겪는 등 쫓기고 위협당하고 억눌리고 시달리면서 살아온 결과, 곧 살벌하고 각박한 세상을 사는 동안 심성이 피폐해졌기 때문이다.’(張良守)
 ‘빨리빨리란 일상어가 조급성과 강박성을 상징하듯, 오랜 권위주의를 거치는 동안 국민 상당수가 능률주의의 신봉자화되어 과정보다는 결과 위주에 익숙해져 버린 탓이다.’(李文求)
 ‘전쟁과 압축 성장을 해오는 과정에서 말과 글을 절제하여 바로 하기보다 구호와 虛張聲勢(허장성세)가 많았고, 말과 글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추궁이 없었다.’(崔禹錫)
 ‘문화적, 사회적으로 정상적인 질서의 不在가 원인이다. 글의 왜곡 현상은 이성적인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면 나아질 것이다.’(金彦鎬)
 ‘우리의 의식과 사고를 규정하는 한국 근대사의 불건강성 때문이다. 개인과 역사를 미화하고 변명하기 위해서는 非논리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억지 논리와 깡패 언어가 등장하는 것은 필연이었다.’(박종만)
 ‘우리는 근대화 과정에서 선비 문화를 계승하지 못하고 마당쇠 문화를 수용했다. 일제하와 미국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품위 있고 절도있는 말보다 편한 대로 속된 말을 쓰고 익혀 생활하였다. 따라서 말과 글이 저속하게 되었다.’(任東權)
 
 2. 말을 잘한다는 것,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쓴다는 것은 개인의 취향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다양한 응답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 뚜렷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결코 ‘능숙한 언변이나 기교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과 둘째는 무엇보다도 ‘진실성’과 ‘솔직함’을 담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쓴다는 것은 곧 자신의 생각을 잘 전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해 내는 것이라는 것이다(安秉煜, 柳根粲, 崔禹錫, 李季振, 孔柄淏, 李相禹).
 ‘계층과 교육 수준에 관계 없이 일반 사람에게 정확히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 상대방이 그 말을 믿게 하는 말로, 미사여구보다는 내용이 깊이 있고 신뢰를 줄 수 있는 말과 글이어야 한다.’(金光雄)
 ‘말은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잘 전달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이 잘된 말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군더더기 없이 핵심을 표현함으로써 상대방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정재환)
 또한 ‘말과 글을 사용하는 데 있어 목적이 분명한 것’(李珉和)이 말을 잘한다는 것, 글을 잘 쓴다는 것이라며, ‘불분명하면 그 말과 글은 산만해지기 십상’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주어진 상황을 파악하고 논리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것’(兪翰樹), ‘의사 전달이 분명하게 되고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말’(張良守), ‘듣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면서 자신의 생각을 전파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李光勳, 黃樹寬, 李相培)이라는 의견을 주기도 했다.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것
 
 安秉煜씨는 ‘무엇보다도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것’이 말을 잘하는 것이라고 했다.
 말은 길게 오래 한다고 잘하는 것이 아니다. 짧고 쉽게 말하고 쓰는 것이다(洪思德, 姜南周). 전여옥씨는 ‘말은 길게 할수록 효과가 반감된다. 짧고 간단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응답자들은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진실함’과 ‘솔직함’을 전제로 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巧言令色(교언영색)도 말을 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쓸데없는 소문을 수다스럽게 지껄이는 것도 말을 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에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말과 생각하게 하는 말이 있다. 재미에도 단순한 오락적인 재미가 있고, 오락 이상의 그 어떤 재미가 있다. 오락 이상의 그 어떤 재미를 느끼도록 하면서도 생각을 더 하게 하는 말이 잘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바탕은 “거짓말”이 아닌 “정말(진실)”이다.’(李興雨)
 具常씨도 ‘말의 감동이란 진실이 없으면 공허하다’면서 말의 진실성을 강조한다.
 말과 글은 또한 장황해서도 안 된다는 의견도 다수 있었다. 柳根粲씨는 ‘말이든 글이든 생각하는 바 그대로 표현해 내는 것이 가장 잘된 말과 글이다’고 정의하면서 ‘일관성 있는 논리의 전개로, 주제에서 벗어나 방만하게 가지를 뻗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3. 어떻게 하면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쓸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독서가 가장 중요하다는 응답이 대부분이었다. 일단 말과 글을 잘하고 잘 쓰기 위해서는 머리 속에 지식이 축적되어 있어야 하고, 지식을 축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독서라는 것. 金炳宗씨는 ‘독서를 많이 하면 말문은 저절로 터지는 법’이라며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하되 오랜 시간에 걸쳐 검증된 동서양의 고전을 읽을 것을 권한다(辛奉承, 崔禹錫)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머리 속에 그만한 지식이 축적되어야 한다. 책을 많이 읽고 남의 말을 많이 들어서 지식 축적을 많이해야 한다.’(金埈成)
 ‘무엇보다도 근본적으로 진실하고 정직한 삶을 훈련하는 것이 좋다. 삶의 중심과 근본이 잘못되었다면 그 삶을 반영하는 말과 글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이런 전제하에서는 구체적으로 동서양의 인류 고전을 숙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金相賢)
 하지만 무조건 독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깊은 사색이 뒤따라야 한다고 한다.
 李相培, 洪思德, 張良守, 정진석씨는 “많이 읽고(多讀), 많이 써보고(多作), 깊이 생각(多商量)하는 외에는 王道가 없다”고 말하면서 이중 깊이 생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방송인 李淑英씨도 ‘읽고 쓰고 생각하기’를 많이 하라고 권하면서 특히 어린 시절부터 책을 가까이 하고 일기 쓰기를 지도해 주는 것이 좋다고 한다. 金彦鎬씨도 일기나 편지 쓰기, 크고 작은 모임에 참여해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토론 등을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낭독 습관
 
 응답자들은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기 위해선 일정한 훈련을 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명문을 많이 읽는다. 자신의 글에 대해 올바른 문법과 단어를 사용했는지 辭典이나 그외 자료를 참조해서 검토해 보고 문장력을 기른다.’(安秉煜)
 ‘좋은 글을 골라서 분석해 보는 훈련이 도움이 된다. 문법적으로 맞는지, 정확한 단어를 골라 썼는지 분석해 보면 그 과정에서 좋은 글이 무엇인지 저절로 터득하게 된다.’(李相禹)
 ‘기본적이면서 모범적인 구문들을 유형별로 정확하게 익혀 생활에 활용한다면 세련되면서도 정확한 언어 활용에 도움이 된다.’(金光雄)
 ‘어떤 책을 읽든 감동적이거나 인상적인 대목은 따로 적어두고, 일기·업무노트·가계부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에게 맞는 메모 습관을 들이며, 좋은 詩 몇 편 혹은 아름다운 산문의 몇 구절 정도는 외원둔다.’(金相賢)
 ‘자기의 구미에 맞는 글만 읽는다면 편협한 틀을 벗어나기 힘들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설, 수필, 인문 사회과학 서적들을 두루 망라하고 시사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면 좋은 글, 편안하고 쉬운 말을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黃樹寬)
 개인적인 노력 외에도 국가적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도 상당히 많았다.
 ‘우선 학교교육이 중요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을 지양하고 학생들 서로 간에 토론하는 자율교육 방식이 바람직하다.’(金埈成)
 ‘학교교육에서 말과 글쓰기 훈련이 대폭 강화되어야 한다. 주입식 교육을 탈피하고 발표 수업과 토론 수업, 탐구수업을 크게 늘려야 하며, 교육자들의 말과 글쓰기 수준을 높일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李相培)
 ‘말을 잘한다는 조건에는 바른 마음가짐과 발음, 알맞은 소리의 크기·속도 등 한국어의 구사 조건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낭독 연습을 하는 게 좋은데, 낭독 연습을 하는 데는 리듬과 톤을 살릴 수 있는 시조가 적합하다.’(金上俊)
 ‘말은 노래와 같다. 그래서 말을 잘하는 사람을 모델로 삼아 흉내내어 보자. 말도 일종의 흉내내기이다. 그러면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李季振)
 ‘날마다 10분씩 소리를 내어 정확한 발음으로 책을 읽는다. 이런 과정에서 잘못된 발음과 부정확한 발음을 교정하고 띄어쓰기와 억양을, 소리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다.’(정재환)
 ‘좋은 글은 기록하고 무조건 외우는 수밖에 없다. 어른들도 흘러간 유행가는 잘 해도 좋은 詩(시)나 臺辭(대사), 문장을 사람들 앞에서 읊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李根三)
 좋은 聽者(청자)는 좋은 話者(화자)를 만든다는 언론인 宋貞淑씨는 말을 잘하기 위해서는 남의 말을 잘 듣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어릴 때부터 완전한 문장을 쓰며 말하게 하는 훈련이 필요하며, 토론에 자주 참여하는 기회를 만들어 훈련을 하라고 충고한다.
 연세대 명예교수 安秉煜씨는 ‘정확한 발음, 적당한 음성, 알맞음 속도감을 의식하여 말을 해볼 것’을 권한다. 공식저인 모임에서 남의 말을 경청해 보고, 토론이나 발표도 직접 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
 연세대 석좌교수이며 문학평론가 柳宗鎬씨는 자신의 말을 녹음기에 녹음을 해서 들어보라고 권유한다. 그러면 녹음 테이프를 듣는 동안 얼마나 많은 군더더기의 말을 사용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테이프를 들으면서 자신의 잘못된 점을 고쳐나가면 자신감과 용기가 몸에 배게 되고 숫기도 생길 것이라고 한다.
 
 4. 우리나라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 사람, 말 잘하는 사람을 추천하고 그 이유는?
 
 각 개인이 글을 잘 쓰고 말을 잘한다는 데 대한 의견이 다양한 만큼, 추천해 주는 인물도 각양각생이었다. 글을 잘 쓰는 부분에서는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에서부터 崔南善(최남선), 함석헌, 홍명희, 李文烈(이문열), 언론인 金大中(김대중) 등 시대나 장르에 구분 없이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추천을 해주었다. 말을 잘하는 부분에서는 정치인이 많은 편이었다. 대중 연설을 해야 하고, 자신의 정견을 펼치는 데 있어 말을 잘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감안할 때 이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글을 잘 쓰는 부문에는 金東吉, 李御寧, 李文烈, 박완서, 홍명희, 함석헌, 金大中(언론인), 피천득, 황순원씨가, 말을 잘하는 부문에는 李御寧, 金東吉, 兪萬根, 金東鍵, 李應百, 李珉和씨 등이 여러 번 추천을 받았다.
 특히 金東吉씨와 李御寧씨의 경우에는 말과 글 부분에서 동시에 가장 많은 추천을 받기도 해 눈길을 끌었다.
 金東吉씨의 글은 말과 똑같은 주장과 판단을 그대로 서술하고, 말은 청중이 동화될 수 있는 분위기를 이끌어 가며 부담없이 듣게 한다는 데 추천 이유를 들었다. 해박하고 설득력 있는 그의 말과 글은 부녀자든 지식인이든 누구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고 한다.
 李御寧씨의 글은 뛰어난 修辭와 활달하고 감성적인 문장, 고전의 현대적 해석력과 설득력 등 다양한 이유로 추천을 받았다. ‘일찍부터 지식과 새로운 창의에 대한 話題를 던지며 지성의 모습을 다양하게 보이고, 언어의 다양함을 통해 문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틀을 제공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소설가 李文烈씨의 경우는 성실하고 진실한 글쓰기 자세와 자기의 전공 분야 외에도 깊은 조예를 가진 글이라는 평가와 함께, 정감 있는 글, 현학적인 내용도 비교적 쉽게 풀어 쓰는 힘, ‘三國志’에서 보듯 고전을 평이하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는 솜씨 등으로 추천되었는데, 일부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라는 극찬을 하기도 하였다.
 언론인 金大中씨는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집어내고, 논리정연하고 간결한 문체로 주제를 이끌어 간다는 평을 받았다.
 피천득씨를 추천한 사람들은 대부분 피씨의 아름다운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과 편안한 마음으로 읽고 공감을 느낄 수 있는 따뜻한 글 때문에 추천한다고 했다.
 이밖에 함석헌씨는 ‘言文일체의 대표격으로 한문도 거의 없이 아름다운 우리 말을 사용’, 박완서씨는 ‘감성이 풍부한 표현, 독자에 대한 섬세한 배려, 깊이 있는 경험 체계 활용’ 등의 이유로 추천을 받았다.
 말을 잘하는 사람으로 뽑힌 한국어문회 이사장 李應百씨와 兪萬根씨는 정확한 표준 발음과 차분한 어조, 정성 있게 꾸밈이 없는 자연스런 대화로 상대방을 배려해 말을 한다는 평을 받았다.
 아나운서 金東鍵씨는 듣는 사람을 배려한 편안하고 정감 어린 목소리, 정확한 발음 등으로 말 잘하는 사람으로 추천을 받았다.
 
 5. 잘 썼다고 생각하는 글, 좋은 말이라고 생각되는 예가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늘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 잘 쓴 글, 좋은 말이라고 한다. 객관적인 기준은 없지만 좋은 글이나 말은 모두 생각을 하게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춘원 李光洙(이광수)의 ‘우덕송’, ‘봉아의 추억’, 셰익스피어의 글과 영어 성경을 추천한 安秉煜씨는 쉽고 재미난 글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黃順元(황순원)의 ‘소나기’ (柳在乾, 崔禹錫)는 많은 사람들이 추천해 주었다. 李興雨씨는 위당 鄭寅普(정인보)의 삼일절, 제헌절, 개천절 노랫말을 추천해 주었는데, ‘알기 쉽고 뜻이 깊고, 개념이 정확하며 품격이 있고 널리 보편적인 공감을 느끼게 하는 글’이라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金埈成씨는 우리 말 어휘의 보고인 洪命憙(홍명희)의 ‘임꺽정’, 한문적 문장을 우리말로 처음 시도했던 춘원 李光洙, 지방에 남아 있는 순수한 우리말을 복원한 작가 金周榮(김주영)의 ‘화척’을 추천했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중복적으로 추천된 글을 보면, 趙芝薰(조지훈)의 詩(洪思德, 김종찬), 崔南善의 기미독립선언문(金上俊, 李啓謚), 백범 金九(김구)의 ‘나의 소원’ (李相培, 洪思德) 들이었다.
 극작가 李根三씨는 ‘헨리 라이크로프트의 사기(私記)’에 심취했었다고 한다.
 극작가 辛奉承씨는 우리 밑바닥에 깔려 있는 모국어를 너무나도 잘 담아내는 최고의 작품이라며 최명희의 ‘혼불’을 권했다.
 姜南周씨는 李炳注(이병주)의 글 ‘조국의 不在’가 역사와 조국을 생각하게 하고 분단의 책임을 느끼게 하는 매우 감동적인 글이었다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까치글방 대표 박종만씨는 李文烈의 단편과 정운영·신영복의 에세이, 삼성경제연구소장 崔禹錫씨는 성경, ‘三國志’, ‘史記’ 등 고전을 추천했다.
 메디슨 회장 李珉和씨는 ‘인생은 자신의 한계를 넓혀가는 과정이다’는 말을 어떤 일이 있든지 가슴에 새겨두고 인생의 지표로 삼는다고 말했다.
 정치인 黃樹寬씨는 ‘우리는 운명의 주인이며 우리 앞에 놓인 임무는 운명 안에 있으며 우리의 불퇴전의 의지가 있는 한 승리는 우리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는 윈스턴 처칠의 연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나(1)

스스로 백치라 생각하고 엄격한 문장 수련

이인화   



 ‘영원한 제국’의 소설가 이인화(35)씨는 “좋은 글이란 엄격한 문장 수련과 문학수업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엄격한 문학수업 시절을 거쳤다. 춘원 李光洙(이광수), 金允植(김윤식), 李御寧(이어령)의 글을 거의 다 통독했다.
 “그분들의 글이라면, 그분들이 평생 동안 쓴 것을 모두 다 찾아 읽었습니다. 그분들의 글에 모자라는 것을 찾아 보충한다는 생각으로 제 글을 써왔을 정도입니다. 한마디로 私淑(사숙)한 거죠. 첨삭 지도는 아버지께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무척 자상하신 편이었고, 글쓰기에 대해 많은 얘기들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계단문학동인회’라는 문학서클에서 활동했는데, 그 때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후배 글을 평해주고 다듬어 주던 선배들과 친구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그는 소설을 쓸 때, 쓰려고 하는 소재에 대한 공부부터 시작한다. 그 방면의 모든 책과 논문, 자료들을 읽고 꼼꼼히 노트하는 과정을 거쳐, 다 알았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공부한다. 소재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자신감이 들지 않는 한 그의 공부는 계속된다. 그렇게 하면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쓸 때보다 오히려 전체 시간은 단축된다고 한다. 그 소재에 있어서는 어떤 학자보다 더 많이 알고 쓰고 싶은 게 소설가로서 그의 욕심이다.
 “좋은 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흔히 두 가지 답변이 있습니다. ‘글은 그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인격이나 사상의 완성이 바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요건이라는 비교적 전통적인 입장이 그 하나지요. 다른 하나는 ‘글은 만들어 내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글 자체에 대한 장인적인 성실성을 강조하는 현대적인 입장입니다. 前者(전자)가 전통적인 文士(문사)의식이라면 後者(후자)를 현대적인 예술가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후자를 통해서 전자에 도달하는 것이 현대사회에서 가능한 최선의 글쓰기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글 자체에 장인적으로 성실하게 몰입하다 보면 생활 자체가 점점 더 단순해지고 소박해지고 헛된 욕심을 버리게 됩니다. 글 쓰는 것 외에 실제의 삶에서 재미를 찾지 못할 때, 한없이 허전하고 외로워서 글을 쓰고 고치는 것 외에는 마음 붙일 곳이 없다고 느낄 때 좋은 글이 나오고 그 사람의 삶도 일체의 장식을 털어 버린 겨울나무처럼 건실함과 확고함을 갖게 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는 ‘文氣(문기)’라는 것은 그 사람 자체의 氣와는 다른 별개의 것이며, 오로지 글만이 자신의 인생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는 절박감이 있을 때만 생기는 힘이라고 본다. 단순히 흠 없는 글을 넘어 영혼까지 감동시키는 명문장의 비밀은 바로 이 ‘절박감’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잘 쓰려면 우선 수공업적인 첨삭수업 없이는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자기 힘에 알맞은 작은 소재를 택해서, 충분히 공부하고, 너무 소심한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단어 하나, 구절 하나, 문장 하나를 따지고 고친다면 누구나 좋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高名(고명)한 교수의 강의를 듣거나 어떤 계기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자기 글이 갑자기 좋아지는 건 절대 아닙니다.”
 이인화씨는 자신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큰 소재로 大作(대작)을 쓰겠다는 욕심, 불충분한 공부, 철저하지 못했던 첨삭과 퇴고로 미흡한 글을 만들고 말았다는 후회라고 고백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글을 쓰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인간적인 미숙함과의 싸움이 아니겠느냐고.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나(2)

주관과 편견의 칼날이 완강하고도 섬세하게 번득이는 글

金薰   



 날카롭고도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는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알려진 金薰(김훈·53·前 시사저널 편집장)씨는 얼마 전 완전히 文人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길은 이미 그의 ‘자전거 여행’(생각의 나무)에서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시사저널 편집장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이제 저널리즘에서 놓여나게 되어 편안하다고 했다. 객관성에 천착해야 한다는 점이 늘 그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저널리즘의 글쓰기는 사실을 따라가면서 정보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정보들 중에서 전달할 가치가 있는 정보를 추려내서 논리적으로 배열한 문장이 좋은 문장입니다. 현실은 수억만 개의 측면을 갖습니다. 관찰자가 어느 측면에 서느냐에 따라서 세계의 모습은 전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전달할 가치가 있는 정보를 추려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고통스런 문제는 그렇게 조직된 문장이 이 세계의 모습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언어의 구조물에 불과하리라는 허망함입니다. 두려운 일이지요.”
 그는 저널리즘의 글쓰기가 기본적으로 간단명료하고 깔끔한 문장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이 갖는 한계점에 회의를 드러냈다. 항상 간단한 문장만을 쓰게 되니까 그것을 읽는 국민 역시 점점 단순해지고 복잡한 사고를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소설가 李文求(이문구), 박상륭씨는 독자가 적습니다. 지금 교육받은 사람들이 그들의 글을 읽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저널리즘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널리즘이 저널리스틱한 문장을 포기하는 것도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정성에 대한 강박관념, ‘편견 혹은 편파성’이라는 말 자체에 대한 편견을 지적했다. 살인사건 보도의 경우, 길이 몇 센티미터 칼로 늑골을 몇 번 찔러 현장에서 즉사시켰다는 식의 기사를 자주 쓰는데, 그것이 과연 그 사건의 핵심적인 진실인가. 金씨는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한다. 어느 위치, 몇 번째 갈비뼈, 몇 센티미터라는 건 개별 사실이지만, 여기에 사건의 핵심이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상의 본질을 찾아 헤매야 한다는 것, 바로 거기에 저널리즘의 어려움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저널리즘의 글쓰기가 ‘客觀性(객관성)에 대한 허영’을 버릴 때 오히려 사건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한 가지 입장을 선택해야 하고, 그 한 가지 입장이 최대한 객관성을 갖고 있어야 하는 건데, 이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범죄기사를 쓸 때 한쪽을 加害者(가해자) 한쪽을 被害者(피해자), 한쪽은 善(선) 한쪽은 惡(악), 혹은 진실과 오류라 할 때, 이 양쪽 극단 사이에서 공정한 입장을 취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가해자의 입장 따로 피해자의 입장을 따로 쓰는 것이 공정보도는 아닙니다. 이건 아무런 보도도 아닙니다. 아무 말도 안 한 거와 같습니다.
 공정보도라 할 때 善과 惡 사이의 밸런스를 맞추는 건 아무 보도도 아닙니다. 차라리 어느 한쪽에 서서 무자비하게 편파보도를 하는 게 공정 보도라고 봅니다. 마지막에 가서 ‘국민이 판단할 일이다, 독자가 판단할 일이다’로 끝나는 글들이 굉장히 많은데, 이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 일반 국민은 그걸 판단 못합니다. 그러면 저널리즘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건강하고 절박한 편견
 
 그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글 속에 무수한 안전장치와 대피처, 후퇴로, 보급로를 설치하고 있는 글은 좋은 글이 아니라고 본다. 좋은 글이란 자기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고, 많은 난관을 필사적으로 뚫고 나가는 것이라고 본다. ‘보편타당성’보다는 ‘건강하고 절박한 편견’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수많은 전제와 가정, 말 돌리기, 여러 가지 장치, 자기 글이 남의 글에 공격받을 것을 대비한 글쓰기…. 글쓰는 사람의 100%가 그런 글을 씁니다. 그러나 글쓰는 사람이 자기의 안전을 도모하는 한 좋은 글을 쓸 수 없다고 봅니다. 매일 일간지에 실리는 칼럼만 해도 몇십 편이 되는데, 그게 대개 비슷한 언어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건강하고 절박한 편견이되 과학성과 논리성을 갖추어야 좋은 글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마저 과학성과 논리성을 갖춘 편견일 뿐이며, 그와 반대되는 내용을 전개하는 사람의 말도 과학성과 논리성을 갖출 때 또 하나의 진실이 될 수 있다는 데서 비극이 싹튼다고 본다. 이것은 언어의 兩面性(양면성)에 기인하는 것이며, 그 때문에 인간의 시비는 끝이 없다고 본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어떻게든 자신의 진지함과 절박함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표현에 있어서도 피나는 고민과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비가 내린다’라고 써야 하는지, ‘비는 내린다’라고 써야 하는지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쓰고 싶은 것이 다 써지는 것은 아닙니다. 글로 쓰여질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알아야 하고, 그 한계선상에서 그것을 넘어서려는 모색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가을에 단풍잎이 물든 것을 표현하려고 해봅시다. 그 속에 세상의 온갖 빛깔이 다 담겨 있는데 그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단풍이 물들어 떨어진다고 표현할 수밖에. 이처럼 ‘말하여질수 없는 것’들을 마침내 말하려다 실패하는 세월을 쌓아나가야 합니다.”
 그는 주관과 편견의 칼날이 완강하고도 섬세하게 번득이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러나, 그래서를 쓰지 마라”

權寧珉(53·서울대 인문대학장·국어국문학과 교수)씨는 인터넷 사용이 학생들의 글쓰기에 초래한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김순자   



 權寧珉(권영민·53·서울대 인문대학장·국어국문학과 교수)씨는 인터넷 사용이 학생들의 글쓰기에 초래한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요즘 학생들은 리포트를 쓰라고 하면 먼저 그 주제에 관해 인터넷에서 검색부터 해본다. 그런 다음 관련된 내용들을 모아 짜깁기를 한다. 자신이 직접 하는 거라곤 내용과 내용 사이에 연결어를 만들어 넣는 정도라고 한다. 단락과 단락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논리적인 사고력이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건 자기 생각을 쓰는 건데, 이렇게 짜깁기된 글을 읽어서는 학생들의 사고나 판단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너무 쉽게 정보를 끌어모으니까 오히려 깊은 사고를 요하는 작업을 방해받는 것 같습니다. 남의 글을 참고한다는 건 자기 생각의 타당성을 입증 받기 위한 보조 수단인데, 따온 정보가 오히려 중심이 되어 버리는 거죠.”
 
 요즘 대학의 교수들은 인터넷식 짜깁기를 막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하는 등 고민에 빠져 있다. 權교수는 그런 방식으로 쓸 수 없는 과제를 준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발견할 수 없는 작품이나 작가에 관한 과제를 학생 개인별로 할당해 준다. 어떤 교수들은 일체 손으로 써온 리포트만 받기도 한다.
 문장이 길어지는 경향도 있다고 한다. 논리를 세워 문장을 자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장이 길어지면 대체로 핵심 주제를 드러내기 힘들고 연결이나 호응이 맞지 않는 非文(비문)이 되기 쉽다. 접속어와 지시어를 지나치게 많이 쓰는 것도 눈에 띄는 문제점이다. 거의 매 문장마다 ‘그리고, 그러나, 그래서, ~해서, ~했는데’등의 말을 많이 쓴다.
 “이것은 口語體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의 연결은 내적 연결성에 의해 연결이 되는 건데, 접속어를 이용해서 억지로 갖다붙이려 합니다. 내용상 연결되지 않는 말을 접속어에 의해 억지로 연결시키면 더욱 뜻이 통하지 않게 됩니다.”
 權교수는 이러한 현상들을 막기 위해 인터넷 어문규정도 새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을 줄일 때는 어떤 식으로 줄이자는 식의 약속이나 규칙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의사소통 자체가 어려워질 때가 올 것이라며 우려했다.
 “좋은 글이란 첫째 자연스러워야 하고, 호흡이 끊기지 않고 맥락이 부드럽게 이어져야 합니다. 무리한 변화로 균형이 깨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둘째는 규범에 맞는 글이어야 합니다. 제가 남의 글을 읽을 때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한국어 능력 평가 시험
 
 權교수는 2000년 4월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들과 함께 (주)이텍스트코리아를 설립했다. 이후 인터넷 사이트 텍스트코리아(www.textkorea.com)와 한국어문정보연구소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우리 언어문자 생활의 규범을 바로 익히고 실천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기반을 확대하는 것, 우리의 대표적인 문헌들을 모두 디지털化해서 인터넷 환경에 맞는 새로운 개념의 텍스트를 개발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예를 들어 홍길동전이 있으면 최초의 原文을 이미지 그대로 뜬 것과 현대문서로 바꾼 것, 주석본 등 하나의 텍스트를 여러 개의 형식으로 만들어 사용자의 목적과 수준에 맞게 제공하는 것이다. 인터넷에다 일종의 한국학 디지털 도서관을 건설하는 것이다.
 텍스트코리아는 여기서 더 나아가 언어문자 생활의 규범을 확산시키는 문화운동도 할 생각이다. 그 일환으로 현재 한국어 능력평가 시험을 개발하고 있다. 이 시험은 올해 하반기 전국의 초등학교 6학년생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후, 효과가 판명되면 앞으로 각종 취업시험에까지 확대 적용하게 된다.
 “영어공용화론이 나올 정도로 지금은 한국 문화의 위기입니다. 이런 현상을 바로잡기 위해 한국인의 한국어 능력을 제대로 평가해 볼 기준을 마련해야 합니다. 일생 동안 한국어를 해왔다지만. 과연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측정할 기준이 없었습니다. 미국 같은 경우 SAT라는 영어능력평가 시험이 있고, 프랑스와 일본 등도 이와 비슷한 국어 능력 평가 시험이 있습니다. 한국은 중고등학교 때 국어시험은 보지만 한국어 능력을 측정해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러한 식의 정책 제안도 해본 적이 없었지요. 언어교육과 언어현실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필요한 때가 온 것 같습니다.”
 
 文章상담소의 일
 
 텍스트코리아의 국어문장상담소 코너에서는 모든 문장에 관한 진단 교정, 교열뿐만 아니라 컨설팅 및 교육까지 포함하여 글과 관련된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문장상담소를 통해 일종의 자격-문장상담사, 문장교열사 등도 만들고, 훈련 프로그램도 만들 계획이다. 전국의 각 대학을 연결시켜 대학마다 학술문장센터 만들고, 그곳에서 학생들의 모든 글을 한 번씩 검토하게 한다. 일종의 문장병원이다.
 문장상담소에 글을 교열해 달라고 신청하면 수정 前과 수정 後를 대조하여 보여주고, 원본의 문제점을 진단해 줄 뿐만 아니라, 교정 포인트까지도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자신의 글이 어디서 왜 틀렸는지를 알게 됨으로써 일종의 교육효과까지 얻는 셈이다. 이 프로그램은 유료로 진행되며 미리 문장 수정 샘플을 본 후 마음에 들면 계약을 한다.
 “처음 시도해 봤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습니다. 특히 생활용품이나 공산품을 제조하는 회사에서 연락이 많이 옵니다. 그런 곳에서는 사용 설명서를 만들 때 어려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보고서 서식의 기준을 만들어 달라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용도에 맞는 글의 틀과 용어 사용법을 지도해 줍니다. 개인 저작물에 대한 의뢰도 많구요.
 외국은 편집자가 많고, 전문 에디터의 검토를 거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글쓴이들이 자기 글에 손을 못 대게 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작가라 하더라도) 교열과정을 거치는 것이 안전 합니다. 출판사 편집자들도 각각이므로 이들을 위한 규범도 만들어 주고, 자격증을 갖춘 전문편집인을 양성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죠.”
 그는 글쓰기 연습 방법으로 일과계획을 정리하거나 일기를 쓸 것을 권한다. 메모가 아닌 문장으로 만들어 쓰는 연습을 통해 평소에 글쓰는 것을 생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메일을 보낼 때도 격식 있게 완벽한 문장을 만들어 보내는 연습을 하면 글쓰기에 많은 향상이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사전을 곁에 두고 名文을 베껴라

논술교사의 논술秘法 /분명한 주제(내용)를 가지고, 알맞은 체제(형식)로 쉽고 정확하게 전달(표현)하면 성공

李萬基   



 *월간조선에서 펴낸 책 '한국의 名文'에 실렸던 글이다.
 
 
 三多
 
 옛말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이를 논술에 적용하여 보면 아무리 사고력이 뛰어나고, 배경 지식이 풍부하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표현을 못하면 독자를 설득해야 하는 논술의 기본적인 소임을 다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표현력이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 주위에 똑같은 유머를 전달해도 배꼽 빠지도록 재미있게 전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썰렁하게 전달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바로 말하는 표현력의 차이이다.
 잘 쓴 논술문이란 필자의 생각과 느낌, 주장이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표현력이 좋은 글을 말한다. 좋은 글이 되기 위해서는 충실성, 독창성, 성실성, 일관성을 갖추어야 하고, 명료성, 정확성 등을 가져야 한다. 표현이 잘된 글이 좋은 글이라면 사고력, 창의력을 향상시키는 것과 동시에 표현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표현력의 주요 요소는 적절한 개념이나 용어의 구사, 매끄러우면서도 간결하고 정확한 문장, 체계적인 구성, 적절한 분량 등이 있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논술은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글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주제(내용)를 가지고, 알맞은 체제(형식)로 쉽고 정확하게 전달(표현)하면 성공이다.
 ‘옛말 그른 것 없다’라는 말이 있다. 조상들의 체험의 결과이니 또 하나의 옛말을 생각해 보자. 좋은 글쓰기 공부로 많은 사람들은 옛사람인 歐陽修(구양수)의 옛말 ‘三多(삼다)’를 굳게 믿고 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多讀(다독), 多作(다작), 多商量(다상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먼저 多讀이다. 이는 다른 모든 작업이나 기술과 마찬가지로, 글을 쓰는 데도 남의 글을 많이 읽음으로써 배우는 바가 많다는 것이다. 주어진 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조리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바탕이 된다.
 다음으로 多作은 논술 능력이란 스스로 많이 서 보는 등의 자신의 꾸준한 연습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多商量은 사물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력과 예민한 감수성을 평소에 꾸준히 기르라는 뜻이다. 이 세 가지는 곧 논술에 필요한 배경지식, 사고력, 표현력을 기르는 첩경이다.
 표현력을 기르기 위해서 우선은 어휘력에 주목해야 한다. 한 편의 글은 언어로 표현되는 언어 단위이다. 가장 작은 언어 단위인 낱말로부터 문장, 문단을 거쳐 서론, 본론, 결론이라는 단위로, 하나의 완성된 언어 단위로서의 글이 된다. 그러니 낱말의 사용에 가장 큰 초점을 맞추어 어휘력을 향상시키는 길이 표현력을 높이는 최우선 과제이다. 어휘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은 부단히 국어사전을 찾는 길이 가장 효과적이다. 더불어 속담사전이나 관용어사전, 상징사전, 유의어사전, 갈래사전, 역순사전, 용례사전, 뉘앙스사전, 반의어사전, 형용사사전, 등 특수사전을 이용한다면 더욱 좋다. 이런 사전들에는 어느 것이나 훌륭한 용례가 실려 있어 이를 암기하는 것만으로도 글쓰기 공부가 된다.
 
 일단 무엇이든 써라!
 
 이런 사전들에 힘을 입어 적재적소에 的確(적확)한 어휘를 사용한다면 그야말로 표현이 잘 된 글이 될 것이다. 토박이말을 쓸 자리에 한자어나 외국어를 쓴다거나, 비속어를 사용하게 되면 글의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논술 답안의 평가에서 어휘의 적절성을 따지는 것이다.
 둘째로 표현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자주 써보아야 한다. 즉 多作이 필요하다. 초보자는 주제나 분량, 글의 의도 등을 주어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헤매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작문에 막연한 부담감이랄지 공포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는 데에 많은 글을 써보는 것처럼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우선 한 문장을 정확하게 써보는 연습을 해야 하고, 그런 다음에는 한 문단을 중심 문장과 뒷받침 문장으로는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러한 후에 글 전체를 서론, 본론 결론으로 체계적으로 구성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좋다.
 무작정 글을 쓰라면 더욱 막연하다. 그래서 몇 가지를 소개하면 일기를 쓰자는 것이다. 출발은 메모로부터 하고 점차 글의 분량을 늘려 가는 것이다. 별 다른 부담 없이 하루의 일을 두서없이 적어 나가다 보면 상상하지 못할 효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무엇보다 좋은 표현력을 기르는 글쓰기 연습은 名文을 모방하여 쓰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도 흔한 말이지만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는가. 名文을 자주 대하고, 옮겨 적다가 보면 자연히 어휘력도, 문장력도, 구성력도 늘게 된다. 더군다나 교과서에 실린 名文을 그대로 옮겨 적으면 맞춤법도 자연스레 익히게 된다. 이른바 一石二鳥(일석이조)다.


 



이순신의 名文은 漢字에서 나왔다

한문을 외국어라고 배척하는 사람들은 名文의 예를 들기가 그리 간단치 않을 것이다

徐基源   



 名文이라 할 만한 문장을 쓰지 못한 처지여서 名文에 관한 얘기를 한다는 것이 어쩐지 쑥스럽긴 하지만, 평소의 생각을 두서없이 적을까 한다.
 나는 상당히 오래 前부터 漢文章(한문장)과 한글 문장의 차이 같은 것을 막연히 느끼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文筆(문필)에 종사하면서 글을 많이 읽지 못한 엷은 知見(지견)으로 그런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은 만용에 속할 것이다.
 名文도 워낙 종류가 많기에 무작정 뭉뚱그려 말할 수는 없다.
 가령 漢文이라면 詞(사), 策(책), 論(논) 등으로 대충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왕조 시대의 科擧(과거) 시험에선 대개 詞와 策 두 가지를 출제했으나 때에 따라 어느 한쪽만 요구하는 수도 있었다.
 중종 때 趙光祖(조광조) 같은 이는 “근래의 과거시험이 詞에 치우쳐 선비들이 身邊雜事(신변잡사)나 吟風弄月(음풍농월)을 일삼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의 가치기준으로 말하면 그런 문장은 名文의 범주에 넣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도 名文 혹은 명문장이라 하면 策과 論 혹은 그에 가까운 문장을 일컫는 경향이 농후하다. 요새 문학의 개념으론 서정시와 서사시의 차이를 뜻하면서 後者(후자)의 경우로 테두리를 좁힌 것이라고 할까.
 가령 陶淵明(도연명)의 ‘歸去來辭(귀거래사, 넓게는 詞에 속할 수도 있지만)’, 諸葛亮(제갈량)의 ‘出師表(출사표)’ 등을 들 수 있다.
 
 조선도 한문에 의존한 나라였으므로 숱한 名文이 나왔음은 당연한 일이다.
 밑천이 짧은 데다 이런 경우 다소 편협한 나로서 굳이 들자면, 李舜臣(이순신)의 장계, 閔泳煥(민영환)의 유서 등이 나의 가슴숙 한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슴을 울리고 인생과 운명을 생각케 한다.
 임진란에 李舜臣은 모함을 받아 서울에 붙들려와 국문(고문)을 당한 끝에 白衣從軍(백의종군)으로 남해안에 내려간다. 그 사이 李舜臣의 직책을 대신한 元均(원균)이 일본 수군에게 대패하여 겨우 패잔선 12척만 남았다.
 다시 三道(삼도) 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에게 “조선의 수군은 이제 없는 것과 같다. 패잔병들을 추스려서 육군으로 편입하여 전투를 계속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이에 대해 이순신은 장계에서 “지금 신에겐 아직도 12척의 戰船(전선)이 있습니다. 죽음을 다하여 나가 싸우면 사세를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수군을 없애, 왜군이 전라도로 침입하고 수도 서울을 공격하는 것을 신은 두려워합니다. 비록 아군의 戰船은 몇 안 되지만 변변치 못한 신이 죽지 않는 한 왜군은 우리나라를 감히 없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今臣戰船尙有十二(금신전선상유12)’
 나의 가슴을 친 구절이다. 괜한 大言壯語(대언장어)가 아니다. 鳴粱(명량)해전에서의 기적적인 대승이 한 자도 틀림없이 증명하고 있다.
 
 심금을 울리는 글을 접하지 못하는 이유
 
 閔泳煥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배를 갈라 자결했다. 죽기 前 ‘한국인민동포에게 경고하노라’라는 유서를 남겼다.
 ‘…명심하라. 살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사는 법이다. …영환이 한번 죽어 황은에 보답하고 우리 2000만 동포에게 깊이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기어이 九天地下(구천지하)에서 동포 여러분을 도울 것이다.
 安重根 의사와 함께 그나마 亡國(망국)의 치욕을 조금이라도 달래준 문장이었다.
 近代(근대)에 들어와서는 역시 3·1 독립선언서일 것이다. 길기 때문에 인용은 피한다. 첫마디부터 격조높은 大宣言(대선언)이다.
 쓰다 보니 한문 얘기만 한 것 같다. 한글 문장, 이를테면 되도록 한자어를 피하고 우리말에 충실한 글(기실 순우리말만으론 불가능하지만)과 대조하며 우열을 가리자는 것이 아니다. 名文의 개념을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물론 한글전영의 글 가운데 특히 詩나 소설에 名文이 수두룩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의 감수성이 낡았는지 몰라도 심금을 울리고 삶에 충격을 주는 글을 그다지 많이 접하지 못했다. 한문을 외국어라고 배척하는 사람들은 名文의 예를 들기가 그리 간단치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한문과 우리말의 언어적 속성과 성격이 다른 데서 나왔을 것이지만 이것까지 건드리는 것은 나의 주제넘는 일이다


 



쉬운 글은 혹세무민이 될 수도

좋은 글은 私와 邪를 뺀 맑은 마음에서 나온다.

朴鍾萬   



 名文의 세 가지 조건
 
 名文 중의 名文이라는 성서의 ‘전도서’에서는 “하늘 아래 새 것이 있을 리 없다.”고 한 마디로 단언했지만, 나는 자신이 글을 쓰는 첫째 목적은 물론이고 남의 글을 읽는 첫째 목적도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라고 감히 말하겠다. ‘새로운 것’하면 으레 지식과 정보를 생각하겠으되, 남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기록과 상상의 문학도 포함된다.
 
 자신이 가보지 못한 旅路의 삶과 가지지 못한 사상과 미치지 못한 상상과 지식이 생생하게 어우러진 내용의 글을 읽는 것은 곧 자신이 새로워지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것을 구할 수 있는 글이라고 하더라도, 정확하고 진실하지 않으면, 차라리 읽지 않는 것만 못하다. 부정확한 지식과 거짓 경험과 졸렬한 상상력은 언젠가는 그 글을 읽는 사람을 낭패하게 만들고 배신감을 느끼도록 만들게 마련이다. 그리고 흔히 사람과 글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용이 정직하고 솔직한 글은 우선 훌륭한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윤리가 아니라 글의 내용의 진실성인 것이다. 하늘 아래 완벽한 인격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솔직한 사람은 겸허하고 당당한 글을 쓴다. 孔子(공자)가 詩經(시경)의 詩 300편의 내용에 대해서 말씀한 “생각(하는 마음)이 사악함이 없다(思無邪)”를 詩를 쓰는 마음의 자세에 대한 것이라고 확대 해석한다면, 나의 지나친 견강부회인가? 지금 名文으로 대접받고 있는 글들 중에서 위선적 감정 과잉의 우국충정과 殉愛譜(순애보)의 글들은 없는가?
 
 새롭고 확고한 지식과 진실한 심정을 그렸다고 하더라도, 어휘가 부정확하고 문장이 번잡하고 단락이 불명확하다면, 글쓴이의 의도와 목적이 바르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특히 정확한 어휘를 쓰는 것(正名)은 그것이 가리키는 실체의 正體性(정체성)과 관련된다. 좋은 음식 재료도 熟手(숙수)의 솜
 씨와 깨끗하고 반듯한 그릇이 있을 때에야 제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의 기본 요건을 갖춘 글이 가지런하게 마름질되었을 때, 곧 스스로 질서와 체계를 만들며 경제적으로 정리되었을 때, 나는 일단 名文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장황하고 까닭 없이 길고 두서가 없는 글은 非경제적인 글이다.
 
 모르는 단어를 찾는 즐거움
 
 ‘어문일치’의 뜻을 오해하고 글은 쉬운 단어와 쉬운 문장으로 물 흐르듯이 써야 한다는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말과 글이 일치할 수 있을까? 글은 눈으로 들어오는 ‘그림’이고 말은 귀로 들어오는 ‘소리’이다. 쉬운 어휘라고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물론이고 읽는 사람마다 지식과 사고와 경험의 수준이 저마다 서로 다르게 마련이다.
 ‘물 흐르는 듯한’ 쉬운 문장이라고 하되, 드넓은 천리 長江(장강)도 다양하고 무수한 細流(세류)들이 한데에 합수한 것이고 산을 만나면 휘어져야 하고 큰 비가 지나간 뒤에는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더구나 수심이 깊을수록 물밑에는 사공이 예상하지 못한 암초가 있을 수 있다. 관개수로식 문장이야말로 글을 쓸 때 경계해야 할 또 하나의 함정이다.
 쉬운 글을 써야 한다는 주장은 진정한 민중주의가 아니라 도리어 愚衆(우중)을 생산하는 惑世誣民(혹세무민)의 주장이 되기 쉽다. 자신이 모르는 단어들과 지식들이 간혹 나타나서 사전을 찾는 글 읽기야말로 가난한 행복의 작은 어려움이고 지식의 창고를 채워 주는 작은 노고이다. 그렇게 무지한 사람도 이제 없으며, 그렇게 책 읽기가 경제적, 시간적 부담이 되는 시대도 아니다. 사전의 부피는 문화의 변천과 문명의 발전에 비례한다.
 또하나 덧붙이고 싶은 나의 주장은 준말의 무분별한 사용이 글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꼭 필요한 주어의 생략이나 탈락이, 그리고 시제의 불일치가 불필요하게 시선을 행간에서 우왕좌왕하게 만들어 글읽기의 집중도를 떨어뜨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하늘 아래 완벽한 것이 있을 리 없다.”는 경고 만큼 새삼 경청해야 할 완벽한 경고도 없을 것 같다. 글의 경우, 완벽의 추구가 감동의 실현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詩로서는 발상이 별로 비범하지 못하고 구문이 상당히 길고 또한 번거롭지만,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님의 침묵’이 겸허하게 인도하는, 알 수 없는 초절의 길을 순간적이나마 나를 ‘차마 떨치고’ 갈 수 있을 것이다.





東西古今(동서고금)의 名文을 정독하라

논술교사의 논술 秘法(2) /古典을 우리의 문제 의식에 맞추어 읽다 보면 오늘의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열리게 된다.

이석록   



 최근의 논술 경향
 
 “책 읽지 말고 제발 공부 좀 해라. 너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렇게 책만 읽으니 어떻게 대학에 가겠니?”
 우리 독서에 대한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모의 잔소리이다. 그러나 논술을 쓰는 데 독서가 가장 필요한 능력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이야기는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논술에서 제시되는 문제들을 보면 제시문을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논점을 잡아내는 능력이 핵심이라는 점을 쉽게 느낄 수가 있다.
 논술의 본래 목적 중의 하나는 학생들의 독서습관을 생활화하고 깊이 있는 사색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과 창의력을 기르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논술에서는 기발한 착상이나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기보다는 평소에 폭넓은 독서와 깊이 있는 사색을 통하여 인간의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知的(지적) 통찰력을 갖추어야 한다. 여기서 논술문은 단기간의 학습으로는 효과를 거두기가 어렵고 평소에 폭넓은 독서와 깊이 있는 사색을 통해서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특히 최근의 논술의 경향을 보면 고전 텍스트를 제시문으로 활용해 현대 사회의 문제를 성찰하도록 하는 문제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독서력을 길러 두는 것이 논술 능력 향상에 지름길이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면 논술 능력도 향상시키고 올바른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한 효율적인 독서의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독서를 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은 東西古今(동서고금)의 名文을 중심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인내를 가지고 깊이 있게 생각하면서 정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古典(고전)은 인류사에 빛나는 높은 정신 세계를 담고 있는 작품을 의미한다. 문학, 철학, 역사, 사회, 과학, 예술 등의 각 영역에서 당시대 정신의 진수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두고두고 음미할 수 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작품들이다. 따라서 古典을 우리의 문제 의식에 맞추어 읽다 보면 오늘의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열리게 된다. 여기서 대표적인 古典의 작품이 무엇인지 하는 선택이 쉽지는 않다. 처음에는 대개 학교의 교과 과정에서 다루거나 언급하고 있는 작품을 중심으로 읽으면 무난하다. 이러한 책들을 마치 광부가 坑道(갱도)를 파들어 가듯이 잡념을 버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읽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독서와 관련하여 논술에서 요구되는 중요한 능력은 글에 대한 해석 능력이다. 제시된 내용을 단순하게 줄거리 중심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수박 겉핥기 식의 독서이기 때문에 논술에서 요구되는 사고력 향상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한 권의 책을 읽을 때에는 철저하게 전략적으로 독서를 해야 한다. 어떤 문제 의식이 담겨 있고, 필자는 어떤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지 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 다음 書評(서평) 형태의 독후감을 써보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 독후감이 단순한 감상문 형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책 속에 담긴 사상이나 교훈을 일목 요연하게 논리적으로 정리하다보면 책의 내용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지고 논술의 과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탁월한 보약이 될 것이다.
 또한 책을 읽고 난 후에는 그 내용을 나름대로 음미해 보고, 자신의 생각은 어떤지 정리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단순히 줄거리만 알거나 어떤 내용이 전개되었다는 정도를 아는 데에 그치면 충분한 독서의 효과를 얻을 수 없다. 논술에서는 독해력은 내용을 충분히 이해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추리·상상하거나 비판할 것을 요구하므로 읽은 책에 대해 다양하게 해석하는 능력을 길러 두어야 한다.
 그리고 단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그것을 깊고 철저하게 읽는 태도가 중요하다. 이렇게 읽다 보면 독서를 통해 기를 수 있는 독해력과 사고력, 창의성 계발이라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先人(선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책 속에 인생의 지혜가 담겨 있고, 삶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 담긴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 보다 진지한 독서를 할 때 논술 능력도 자연스럽게 향상될 것이다.


 



프랑스의 문장 교육

푸줏간집 주인도 편지 쓸 때 同意語 사전을 뒤적거린다

권지예   



 초등학교 1학년이 외는 詩(월간조선 발간 [한국의 名文]에서)
 
 문장을 쓴다는 것이 레이몽 크노의 詩처럼 ‘한 개나 두 개의 낱말을 집어 계란 삶듯 삶는’ 그런 단순한 기술만은 아니다.
 한국서 영문학을 전공했던 내가 한국 근대소설을 텍스트로 삼아 佛語(불어)로 박사논문을 써서 학위를 받기까지, 어쨋든 나는 늘 佛語 쓰기에 많은 고초를 겪어 왔다. 기껏 애를 먹고 쓴 논문의 문장들을 同語(동어)반복이 많다며 교수는 김매듯이 무자비하게 솎아내는 적이 많았다. 한국 학생들의 문장은 대체로 논리적이지 못하며 반복이 심하고 思考(사고)가 독창적이지 못하다는 지적도 자주 했다. 그렇다면 저들 문장의 ‘논리적’이고 ‘독창적’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중학교 과정부터는 물론 대입학력고사에 主과목으로 철학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나라, 四肢選多(사지선다)형 시험문제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 세계문학을 주도하는 찬란한 文學史(문학사)를 가진 나라. 하지만 그런 나라에서 숨만 쉰다고 모두 철학자나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알고 보면 그들의 문장 수업은 자연스럽게, 그러나 철저하게 早期(조기)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거리에 나가 여섯 살이나 일곱 살쯤 먹은 프랑스 아이를 아무나 붙들고 詩 한 수를 읊으라 그래 보라.
 아직 佛語 문장을 쓸 줄도 모르는 초등학교 1, 2학년생의 입에서 文學史에 빛나는 시인의 詩를 듣기는 어렵지 않다.
 
 프랑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해 佛語를 쓸 줄도 모르는 딸애도 詩를 외워가야만 했다. 그것이 유일한 숙제였다. ‘포에지(시)’ 노트엔 선생님이 詩를 복사한 걸 노트 왼편에 붙이고, 오른쪽 흰 여백엔 아이가 詩의 이미지를 포착해 정성껏 그림을 그려넣었다. 겨우 만 여섯 살이 넘은 딸애는 노트를 나에게 맡기고 작은 입으로 詩를 暗誦(암송)했다. 눈을 감기도 했고 선생님이 감정을 넣어 읽던 걸 흉내를 내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한 詩 암송은 5년간의 초등학교 과정 내내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동안 기라성 같은 시인들의 詩들이 딸의 입에서 무수히 흘러나왔고, 또 가슴을 적시고 갔다. 위고, 베를렌느, 모리스 카렘, 랭보, 모파상, 발레리, 아폴리네르, 프레베르, 레이몽 크노, 데스노스….
 
 비유나 표현 자체도 독창적이고 아름답지만 脚韻(각운)을 맞추는 절제된 형식을 통해 더욱 더 풍부한 언어감각을 훈련시키기에는 詩 암송이야말로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오는 가을 저녁, 베를렌느의 ‘가을’이나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같은 詩를 어린 딸의 입을 통해 듣노라면 감개가 무량해지곤 하였다.
 
 母國語에 대한 애정
 
 詩 암송 외에도 ‘작문’이라는 정확하고 논리적인 표현력을 훈련시키는 과목도 인상적이었다. 문법 공부와는 별도로 중간에 이야기를 덧붙이거나 문장의 인과관계를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詩를 통해 배운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언어표현과 철학적 사고로 무장된 논리보다 나를 더 감동시키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母國語(모국어)에 대한 그들의 애정이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던 定着(정착) 초기에 급한 편지 쓸 일이 있으면 나는 동네 푸줏간 주인인 제르맹씨에게 부탁하곤 했다(프랑스에선 모든 업무를 서신을 통해 하는 경우가 많다.) 한두 번 써주더니 아예 사전까지 가게에다 갖다놓았다. 나는 그가 고기를 썰던 크고 뭉툭한 손으로 볼펜을 들고 꾹꾹 눌러 불어 문장을 쓰는 걸 보면 공연이 가슴이 뭉클해지곤 했다. 그는 집을 짓듯 한 문장 한 문장을 써내려가고는 혹시 쓸데없는 말, 되풀이되는 말, 적합하지 않은 단어가 없나, 또 문장들끼리 아름답게 조화가 되는지 새 문장을 쓸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읽어내려가곤 했다. 그는 일반 사전 외에도 同義語(동의어)사전도 가지고 있었다. 그건 그가 무식해서가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의 작문은 수준급이었다.
 
 이런 작문의 태도는 그 후 내가 만난 프랑스 사람들 대부분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었다. 詩人이 아니어도 작가가 아니어도, 푸줏간 주인도 청소부도 편지 하나를 쓰기 위해 동의어사전을 뒤적거리며 고심을 한다.
 고기 중에 가장 맛있는 살점을 떼내듯이, 쓸고 또 닦아내어 말갛게 속이 보일 때까지 그들이 문장을 고르는 걸 보면 프랑스 문학과 예술의 위대함을 낳은 것은 결코 위대한 예술가들의 재능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제르맹씨의 모습 속엔 詩를 외던 소년이 항상 살아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문장교육을 생각할 때마다 詩畵(시화)가 그려진 詩 노트를 살짝 접고 꿈꾸듯 詩를 암송하던 딸애의 모습이 떠오른다.


 

 

 

출처 블로그 > 욕망이라는 꿈의 고원

원문 http://blog.naver.com/3sang4/40023172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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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블로그 > 가시나무
원본 http://blog.naver.com/bush0058/120012639889


서평 쓰는법

 

서평을 한번이라도 써 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서평 쓰기에는 많은 유익이 있다. 서평을 쓰다 보면 그저 한번 읽고 지나칠 때에 비해 책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깊어진다. 또한 책을 깊이 이해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책을 소개할 때 좀더 명확하고 자신있게 소개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주제, 혹은 동일한 저자의 책에 대한 서평을 몇 번 쓰다 보면 그 주제 혹은 그 저자에 대한 일가견이 생겨, 한번 자신의 글을 써 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도 한다. 재창조 및 글 쓰기 훈련에 서평만큼 좋은 것도 별로 없다는 생각이다.

이렇듯 많은 유익이 있지만, 서평 쓰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매년 2월에 열리는 문서학교에서 참가자들이 써온 서평을 일일이 평가해 주면서 놀라는 것이 하나 있다. 그 서평들 중에 최소한의 수준에라도 도달한 것은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학생들의 서평을 검토하면서, 그리고 여러 매체에 실린 이런 저런 서평을 접하면서 서평을 잘 쓰기 위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 본다.

서평은 서평자 자신의 글이다.

서평은 저자의 글이 아니라 서평자 자신의 글이다. 책 내용만을 잘 간추리고 마는 경우가 적잖은데, 그것은 요약이지 서평이 아니다. 요약은 엄밀히 말해서 서평자 자신의 글이 아니다.
서평에는 서평자 자신의 판단이 들어가야 한다. 서평이 분명히 남의 책을 다루긴 하지만, 서평자 자신의 판단과 주장이 들어갈 때에만 비로소 자신의 글이 된다. 서평은 책의 주제, 논점, 내용, 구성, 방법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서평자 자신의 판단을 내리는 행위다. 서평은 저자의 글이 아니라, 저자의 책에 대한 서평자 자신의 글이다.
따라서
서평에는 저자의 글과 자신의 글이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서평을 읽노라면, 어떤 것이 저자의 것이고 어떤 것이 서평자 자신의 것인지 그 소유권이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이래서는 독자들이 도무지 책에 대한 바른 정보를 얻을 수 없다. 저자의 말인 경우 큰 따옴표로 정확한 인용 표시를 해준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용 부호 대신 저자의 말을 자신의 말로 풀어 쓸(paraphrase) 경우에는, 독자들은 자칫 저자의 글을 서평자의 글로 오해할 수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인데 하는 식으로 저자의 글임을 분명히 밝혀 줄 필요가 있다.
서평이 서평자 자신의 글이라면 그 속에 서평자 자신의 판단과 주장이 들어있다는 말인데, 서평자는 자신의 생각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 흔히 다짜고짜 저자의 생각은 틀리다라는 판단을 내리고 마는 경우가 있는데, 서평자로서는 그러한 자신의 판단이 왜 타당한지 밝힐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주장은 일방적인 선언이나 억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비판이나 찬양에 앞서 책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흔히 책에 대한 흠집을 찾고 비판을 늘어놓아야 좋은 서평이라는 오해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좀더 비판적이어야 좀더 지적으로 보일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책은 없으니 책에 너무 빠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책에 대해 배울 점과 교훈만을 찾거나 찬양 일변도로 나가는 경우도 많다. 그래도 나보다 잘난 사람이 쓴 것이니 비판은 무슨 비판이냐고 미리부터 꼬리를 내린다. 이러한 비판 일변도와 찬양 일변도는 둘 다 성실한 태도가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읽은 책의 핵심을 분명히 파악하는 것이 선결 과제다. 서평은 저자의 글이 아니라 나의 글이라는 말이 자칫 저자와 상관없이 내 말만 하는 것으로 오용될 수도 있다. 진지한 대화가 가능 하려면 나의 편견을 제거하고 상대방의 말을 잘 들을 필요가 있듯이, 성실한 서평을 위해서는 먼저 저자의 주장에 대해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모티머 애들러는 독자가 미숙하거나 무례하다면 대화는 결코 재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저자는 자기의 처지를 변호할 수가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정확한 이해가 없이 비판을 한다는 것은 저자에 대한 무례이고, 무조건적인 찬양은 저자에 대한 아첨이다.

적절한 독서법을 익히라.

정확한 독서를 위해서는
모티머 애들러의 고전적인 책 「생각을 넓혀 주는 독서법」이 큰 도움이 된다. 그 중에서도 그가 제시한 분석 독서의 3단계가 가장 큰 도움이 되므로 나름대로 간단히 요약, 재구성해 본다.

1단계: 관찰 단계
1) 장르와 주제에 따라 책을 분류한다.
2) 책 전체가 무엇에 대해 다루는지 간결하게 서술한다.
3) 책 전체의 흐름을 구조적으로 파악하면서 간단히 정리해 본다.
4) 저자가 해결하려는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한다.
2단계: 해석 단계
5) 핵심 용어에 대한 개념을 파악한다.
6) 저자의 명제를 파악한다.
7) 저자의 논증을 파악한다.
8) 저자가 해결한 문제와 미해결한 문제가 무엇인지 판별한다. 또한 저자 자신이 미해결 여부를 인식하고 있는지 확인한다.
3단계: 비평
9) 관찰과 해석을 끝내기 전에는 비판에 착수하지 않는다.
10) 비판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제시한다.
11) 저자가 부족한 지식에 근거하고 있는지 파악한다.
12) 저자의 지식에 오류가 있는지 파악한다.
13) 저자의 논리에 결함이 있는지 파악한다.
14) 저자의 분석이나 설명이 불완전한지 파악한다.

이상과 같은 방식으로 책을 읽고 정리해 보면 분명히 독서 수준의 향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애들러의 이러한 독서법은 사실 서평에 거의 그대로 적용해도 무방하다. 아래에서 내가 제시하는 서평의 실제적인 구조 역시 애들러의 독서법이 상당 부분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서평의 실제적인 구조

서평을 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겠지만, 내가 주로 사용하는 구조는 다음과 같다. 아래 방식은 서평이 서평자 자신의 글이라는 점과 책에 대한 성실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1. 서론: 책의 주제와 문제, 그리고 핵심 주장을 언급한 후, 그에 대한 서평자 자신의 판단과 어떻게 글을 전개할 것인지를 밝힌다. 이렇게 하면 서론만 읽고도 책과 서평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된다.
2. 본론: 책의 주요한 개념들과 명제들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 그것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밝히고 나서, 서평자 자신의 판단과 판단 근거를 제시한다. 또한 책에서 채택한 방법의 일관성 및 적절성에 대한 판단과 그 근거를 제시한다.
3. 결론: 서론과 본론을 종합하여 서평자 자신의 결론을 맺는다. 책의 긍정적인 기여 및 공헌, 비판, 발전 방향 및 과제 등을 밝히면 된다.

보너스:
글쓰기의 기본기 두 가지

이러한 서평의 구조를 이해하고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글을 쓰다 보면 생각대로 잘 써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중요한 점 두 가지만 제시해 본다.

첫째, 주제가 있으면 반드시 그 내용이 있어야 한다. 어떤 글들은 주제만 계속해서 반복하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은 이 주제(S)에 대한 것인데, 주제1(S1)과 주제2(S2)와 주제3(S3)에 대해 다룬다는 식으로 주제만 나열하는 경우다. 껍질만 있고 정작 그 알맹이는 없는 셈이다. 한 문장에 주어가 있으면 반드시 술어가 있어야 하듯이, 글에서도 주제가 있으면 반드시 그 주제에 대한 필자의 주장이 있어야 한다. 내가 곧잘 하는 짓궂은 질문이 하나 있다. 모임에서 한참 책 소개를 하는 사람이 지루하게 주제만 나열할 경우 나는 그래서 그 주제에 대해 저자가 뭐라고 하는데?라고 묻는다. 이 간단한 질문 하나가 책에 대한 이해를 높임은 물론 나 자신의 글을 더욱 분명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한 단락에는 하나의 주제문이 있어야 한다. 글을 쓰다 보면 도대체 어디서 단락을 끊어야 할지 난감해지는 경우가 있다. 단락은 적당히 길이를 봐서 끊을 것이 아니라, 하나의 핵심 주장을 다룬 후 끊으면 된다. 잘 쓴 글일 경우 핵심 문장만 뽑아서 잘 읽어도 글의 내용이 확 들어온다. 훈련을 위해 잘 쓰인 책 한 권을 선택해서 단락별로 주제문을 찾아 밑줄을 그어보면 의외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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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 2012-06-11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고마운 안내 지침서입니다. 업드려서 물을 마셨다면, 이젠 물바가지를 사용하여 쉽게 마실수 있을 거 같습니다. 감사해요^^tonewkorea@naver.com

주유진 2016-01-26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작성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승빈 2016-05-29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과제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이강진 2016-06-11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앞으로 서평을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효준 2016-09-18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글 읽었습니다. ^^

거제바위 2017-11-18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요즘 책 읽는 재미에 빠져 서평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쓰기 달인’이 귀뜸하는 글짓기 노하우
기사입력 : 2006.08.24

 


“서평 잘 읽었습니다. 글을 쉽게 쓰시네요”(metamin2), “오호 좋은 서평입니다. 깔끔하군요. 담백하고 문장력도 좋으시네요”(유랑인),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서평, 잘 읽었습니다. 저는 절대 쓸 수 없는 서평이군요”(빨풍)
네이버 커뮤니티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http://cafe.naver.com/bookishman). 잘 쓴 서평에는 부러움을 표함과 동시에 글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회원들의 덧글이 달려있다.
글쓰기는 일반인뿐 아니라 작가에게도 어려운 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양심>으로 192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토마스 만은 “글쓰기? 별 것 아니야. 타이프라이터 앞에 앉아 핏줄 하나만 따면 돼”라고 창작의 고통을 표현했다.
대학입시에서 날로 커지는 논술의 비중, 1인 미디어의 발달 등으로 ‘잘쓴 글’에 대한 욕망이 그 어느 때 보다도 간절한 요즘. 작가 안정효가 글쓰기 비법 전수에 나섰다.
안정효는 150여 권의 번역서와 <하얀 전쟁> <은마는 오지 않는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등 창작소설을 낸 글쟁이.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모멘토. 2006)는 그가 글쓰기 인생을 살면서 얻은 깨달음과 창작 기술 등을 정리한 ‘자전적 교본’이다. 스무 살 때부터 습작을 하면서 읽어 온 서양의 글쓰기 지침서들과 뛰어난 작가들의 문체와 기법, 자신의 체험, 영화 등을 밑거름으로 삼았다.
207개의 장으로 구성된 책에는 그야말로 ‘주옥같은’ 글쓰기 요령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안정효는 어떤 글을 서술할 때 “말로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고 말한다. ‘그 여자는 미인이다’ 대신 ‘콧날이 시원스럽게 길다’로, ‘더러운 남자’는 ‘소변을 보면 꼭 바지에 흘린 자국이 남는 남자’ 식으로 표현하라는 것.
이처럼 독자의 상상력을 펼쳐주는 글쓰기 요령은 또 있다.
존 오하라의 장편소설 <웃음소리>는 ‘He laughed'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안정효는 두 단어로 이루어진 짧고 간단한 문장에서 “어떤 남자가 환하게 웃어대는 모습이 눈에 선하고, 웃는 소리까지 귓전에 들려오는 듯싶다”며 이를 ‘눈에 보이는 웃음소리’라고 지칭한다.
그는 “문장을 이루는 두 단어가 기초적인 어휘인데다가, 문장이 짧아서 폭발력을 만든다”며 “이는 독자로 하여금 제시된 문장을 이해하고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데 필요한 부담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안정효는 이와 같은 글쓰기 원칙과 요령들을 제시한 후에 독자에게 일기.독후감.자서전.소설 쓰기 등의 과제를 낸다. 이론으로 배운 요령을 체험을 통해 습득시키기 위한 것. 이처럼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는 이론과 실전이 버무려진 ‘글쓰기 지침서’이다.
[북데일리 서희선 기자



출처 : http://www.bookdaily.co.kr/SITE/data/html_dir/2006/08/24/200608240010.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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