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비의 남자 펄프픽션 2
이경자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소유하지 않는 사랑

 

 

 

처음엔 이경자 작가라길래 누군가 했다. 소개글을 읽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절반의 실패'를 쓴 이라고 한다. 그녀가 일본영화 '감각의 제국'을 우리나라에 정식 개봉하기전에 구해다 보고 영원과도 같은 남녀간의 사랑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경지에 대하여 그 합일의 꿈같은 느낌을 글로 표현해보고 싶었다는게 창작동기라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수위가 상당하다. 일전에 '핑크 카네이션'을 보고 러브씬이 빈번해 대중교통 수단내에서 보기가 참 민망하더라고 고백 했더랬는데 이 소설에 비하면 약과다. 솔직히 민망할 정도로 농도가 진하다. 하지만 그저 그런면으로만 어필한다고 오해하면 오산이다. 나름대로 전해주는 주제가 꽤 마음에 들었더랬다.

 


주인공 귀비는 귀비라는 자신의 이름처럼 양귀비가 그랬듯이 남자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었다.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남자들이 종국에 머무르고 싶은 어머니와도 같은 내 고향과도 같은 그런 매력이 있었다. 학창시절 절친한 친구의 삼촌에게 강제로 처녀성을 잃어 버리고 고통의 세월을 살았을법도 한데 세상 모든 남자들을 사랑했던(?) 귀비는 그를 증오하지도 그리워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 후 그런 남성편력으로 점철된 귀비의 젊은 시절. 과연 세상에 저런 여자가 존재할까 싶기도 하지만 귀비는 그렇게 21세기형 자유부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귀비가 간호사로 일할때 그 병원의 의사였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게 되었다. 연애할때는 몰랐지만 결혼을 하고 보니 남편인 동철은 마조히스트였다. 그런 변태적인 남편의 성적취향도 그러려니 했지만 동철은 치명적인 의료사고를 연달아 두차례 내고서 우울증에 빠져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된다. 이제 남편의 경제력은 없어졌다. 고로 가정에서 가장으로서의 권위 또한 상실되었다. 그래도 귀비는 빠르게 현실에 적응해간다. 성적이 신통찮은 자녀들을 불러 앉히고 일찌감치 제 살아갈 길을 찾으라는 둥 친구와 함께 부동산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는 등등. 다만 한가지 걱정되는 것은 일찌감치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외동아들을 의사로 키워내신 시어머니 그 어르신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무너질까 그것이 걱정이었다는 귀비. 

 


그렇게 미워할래야 미워할수도 비난을 할수도 없었던 근자에 본 소설들의 등장인물 중 가장 독특하고 강렬했던 귀비라는 케릭터. 그녀를 둘러싼 그 모든 악조건과 갑갑한 일상들 다 대담하게 이겨낸 귀비였지만 단 한가지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남편의 남성성의 부재에서 오는 그리운 '남자의 품' 이었다. 그래서 귀비는 남편의 입원 후로도 수많은 남자들을 만나게 된다. 문학평론가 정호웅씨의 해설대로 마치 세상 모든 남자들에게 '보살의 사랑'을 베풀듯이 그렇게..

 


그 중 자신의 고객으로 만났던 중견기업 사장인 구도섭과의 이야기가 주된 수토리 라인을 형성하는데 구도섭이라는 인물은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인물로서 백억대의 재산을 일구고 나서 오히려 더 옷차림은 남루하게 해다니는 그야말로 '바른생활 사나이'였다. 자신의 재산이 많아지면서 상대적으로 빈번하게 꼬이는 수많은 여성들. 그는 그런 생활을 경계하기 위해 철저히 사치와 과시를 버리고 여자를 멀리하며 가정을 지켜온 남자였다.

 


허나 도섭에게 있어 귀비는 마치 지금은 아스라한 첫사랑의 그것과도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었다. 이때껏 자신의 돈을 보며 접근했던 수많은 여인네와는 차원이 다른 '여자' 자체로서 호감이 가는 사람. 문자메세지 몇 글자에 하루종일 가슴이 콩닥콩닥 거리는 구사장. 결국에 도섭은 그간 철옹성 같이 지켜온 자신의 신념을 귀비로 인해 저버리게 된다. 그리고는 고백한다. 왜 이런 좋은 인연을 그 오랜 세월동안 우린 모르고 살았을까라고. 그리고 정리를 할테니 같이 살자고 하는데.

 


그 때 사탕하나 더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 달래듯 귀비가 내던진 한 마디. 그게 이 소설의 주제였다. 꽤나 공감하며 강렬하게 다가왔던..

 


'난 사람을 가지려고 하지 않아. 사람을 가지려는 게 가장 나쁜 욕심 같아. 그건 말이야, 정말 불가능해. 가져지지 않아. 그냥 보는 거야. 있는 그대로. 생긴 대로. 그냥 지내는 거야. 미워하지 않고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P.132)

 


맞는 말이다. 사랑이 그 순수함을 넘어 소유로 변할때 우린 얼마나 못난 모습을 보이곤 했는가. 아름다운 꽃을 혼자만 편히 보고파 꺾어가지고 왔더니 시들어 버렸던 기억처럼..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gdgd923 2009-09-23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망상은행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19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 / 지식여행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호시 신이치.. 이젠 살짝 인간미를 내비치나?

 

 

 

모름지기 작가란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개성은 한 단어로 나의 머릿속에 그 잔영을 드리우고 있다. 김훈의 간결함, 은희경의 추억, 성석제의 말빨, 김영하의 파격, 박현욱의 당돌함, 정이현의 도회적 감성, 박형서의 난해함에 이르기까지.. 그런식으로 말이다. 현해탄 건너 일본 작가라도 다를리가 있겠는가. 국내팬들에게 각광받고 있는 오쿠다 히데오가 '유쾌 상쾌 통쾌'라면 이 책의 저자인 호시 신이치는 바로 '상상과 반전'이 아니었던가. 플라시보 시리즈의 쇼트 쇼트 스토리들은 필자에게 '참 기발하군'이란 생각은 수도없이 들게 만들었지만 그것이 슬프다거나 아니면 웃기다거나 하는 감정이 들게 만들었던 경험은 거의 없었던듯 하다.

 


그랬던 호시 신이치가 이젠 살짝 인간미를 내비치려나 보다란 생각이 들었던 플라시보 시리즈 19편 '망상 은행'이었다. 바로 표제작인 이 작품에서는 사람들의 망상을 보관해주는 먼 미래사회의 독특한 장소가 등장한다. 역시 호시 신이치 다운 기발한 발상이다. 고객의 여윳돈을 안전하게 보관해 주고 대출을 원하는 개인이나 기업에 그 돈을 빌려주고 이자수익을 창출하는 은행이 그러하듯 망상은행 또한 자신에겐 고민거리이자 타인의 손가락질을 받는 그러한 망상들이 어느 누군가에겐 애타게 필요한 그것이 될 수 있다라는 점에 착안한 사업이었다.

 


자신이 역사 속 유명한 장수였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의 망상을 추출하여 그 장수의 연기를 해야하는 극단에 팔아서 수익을 올리는 식으로.. 그 장치를 발명한 F박사는 평소 자신을 열렬히 사모하는 어떤 여인의 망상을 몰래 추출하여 자신이 연정을 품고있던 다른 여인에게 몰래 주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는데.. 결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본인은 한참을 침대에서 낄낄 거리며 뒹굴었더랬다. 현재까지 국내에 출간된 플라시보 시리즈를 3분의 1정도 본 시점에서 가장 우스웠던 쇼트 쇼트 스토리가 아니었나 싶다.

 


반면 이번 열아홉 번 째 시리즈의 해설을 쓴 작가 츠즈키 미치오(그도 역시 쇼트 쇼트 스토리를 쓰는 이라고 한다.)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던 '고풍스러운 사랑'은 이루지 못한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 필자의 코 끝을 살짝 시큰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간 깜짝 깜짝 놀래키기만 했던 다른 플라시보 시리즈들에 비해 이런 웃겼다가 울렸다가 하는 매력은 이번 시리즈가 지닌 장점인듯 하다. 츠즈키 미치오가 추천한 또 하나의 작품 '열쇠'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내지는 행운은 노력하는 자의 몫이란 평범한 진리와 그 행운 조차도 자신이 인생을 살아오며 남긴 아름다운 궤적의 가치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교훈을 전해준 작품이었다.

 


끝으로 이 책에서 호시 신이치의 고유의 색깔이 고스란히 잘 나타나 있었던 작품으로는 개인적으로 '음모단 미다스'를 꼽고 싶다. 쇼트 쇼트 스토리 치고는 나름대로 스케일이 방대하다. 실제로 눈으로 보기에는 별로 큰 이익이 없어 보일 정도의 스케일이 간소한(?) 보석상 털이가 어떻게 한 국가의 전반적인 산업을 부흥시키는 나비효과를 만들게 되었는지 그 과정이 꽤 흥미롭다. 마치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 처럼 우리네도 그런 알지 못하는 어떠한 음모에 놀아나고 있지나 않을지 한편으론 섬뜩한 기분도 들었던 작품이었다.

 


광고가 지배하는 미래 사회를 풍자한 '주택문제'도 인상 깊었다. 아니 그건 그렇게 먼 훗날의 이야기 같지만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지금도 우린 광고의 홍수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지 않은가.. 지난밤 늦은 잠자리에 들며 틀어둔 케이블 TV에서는 3개사의 맥주 광고가 로테이션하며 같은 광고가 무려 한 다섯바퀴나 방송된걸 보았더랬다. 덕분에 난 상쾌한 맛을 표현하는 보아의 춤 동작을 마스터 해버렸고 '하XX켄 프리즈'란 영어 문장을 완벽하게 발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난 다시금 벗어둔 옷을 주워입고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오고야 말았다는 나만의 쇼트 쇼트 스토리로 마무리 짓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마산장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역시 끝까지 봐야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 최근들어 특히나 그 이름을 많이 접하게 되는 작가이다. 그만큼 그 유명세가 워낙에 뛰어난가 보다. 필자는 '비밀'이나 '편지' 같은 영화로만 그의 작품을 만나보았었다. 그런 기억들이 어느정도 보증수표의 역할을 해주었던듯 하다. 그래서 '용의자 X의 헌신'을 비롯한 그의 전작들을 몇권 사두긴 했었는데 시간상의 이유로 펼쳐보지 못하다가 최근에 출판된 이 책부터 우연한 기회에 만나보게 되었더랬다. 요즘 추리소설의 재미에 푹 빠져있던터라 '잘 나간다는' 그와의 책을 통한 첫만남은 필자를 충분히 설레게 만들었었다.

 


이 책은 제목이 암시하듯이 '마더구스 팬션'이란 어느 한적한 휴양지의 팬션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추리해가는 밀실추리소설(?)이다. 주인공 나오코는 여행지에서 죽음을 맞이한 친오빠의 자살 의혹을 밝혀내기 위해 일년을 기다렸다. 그 장소인 마더구스 팬션은 일년에 한시즌 매번 같은 손님들이 머무는 곳이기에.. 그녀의 절친한 친구인 마코토와 함께 그 산장을 방문하기에 이른다. 오빠가 보내 온 마지막 엽서에 적힌 글귀를 토대로 산장 각각의 방에 걸려있는 아리송한 시들을 조합하여 암호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공동주인인 마스터와 셰프, 노의사 부부, 종업원인 구루미와 다카세, 그리고 각각의 개성을 지닌 세 명의 남자손님인 가미조, 오오키, 에나미등을 통해 오빠의 죽음을 둘러 싼 산장의 비밀들을 하나하나 알아낸다.

 


그러던 중 유력한 용의자로 점찍었던 오오키가 추락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그건 단순한 사고가 아닌 타살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무라마사 경부와의 협조를 통하여 수사에 착수한다. 범인은 바로 우리들 중에 있다!

 


오오키의 사망전에 시바우라 부부와 나카무라, 후루카와 등의 등장 인물들이 더 추가되는데 사망시점과 어긋나 일찌감치 용의 선상에서 제외되어 선택의 폭이 그만큼 줄어드는 바람에 좀 더 복잡한걸 원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약간 아쉬운 부분이었다.

 


어쨌든 오오키의 죽음을 계기로 친오빠인 고이치의 타살의혹과의 연관성을 추리해가는 과정에서 고이치에 앞서 또 한명의 사망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나오코. 3년연속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의문의 살인 사건들.. 그리고 그 첫번째 사망자가 엄청난 고가의 보물들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알게되는 나오코..

 


수사는 점차 활기를 띄고 사건해결의 결정적 실마리가 되는 각각의 방에 걸려있던 시들의 조합을 통한 암호해독도 거의 다 마무리 되어가는 단계로 접어든다. 끊임없는 추리를 하는 나오코와 마코토, 무라마사 경부 그리고 독자인 나까지..

 


필자가 특히 소설을 볼 때 얼마나 집중을 잘 하는가를 가늠하는 기준 중 하나가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얼마나 잘 기억하는가란 것인데 그런 면에서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무슨 일을 했던이인지 따위를 새삼 앞장을 넘겨 찾아봤던 일이 한번도 없었을 정도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그 과정을 이끌어가는 능력과 흡인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틈틈히 썼다던 실력으로 나오키상, 일본추리작가협회상 그리고 일전에 감탄을 하면서 보았던 에도가와 란포상 까지 휩쓸었다던 이력에 그제서야 공감이 갔다.

 


하지만 암호를 해독해 가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치밀함에 비해 결국 범인이 밝혀지는 순간의 장면은 기대에 약간 못미친면이 없진 않았다. 살짝 섭섭해 지려는 순간.. 마치 공포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듯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와 모든것이 끝이라고 생각할때 음습하게 뒤에서 다가오는 죽지 않은 악당의 그림자를 보는 느낌처럼.. 마지막에 밝혀지는 몇 가지의 진실들은 필자를 꽤 흡족하게 만들었다.

 


모름지기 공포 영화와 추리 소설은 긴장을 놓지 말고 끝까지 볼일이다. 책장에 꽂아만 두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전작들을 하나하나 펼쳐보며 이 무더운 여름을 이겨내야지 마음먹게 한 책으로 기억될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는 남자 2
이림 글.그림 / 가치창조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이젠 또 남은 57일이 궁금하다

 

 

 

어느덧 좋아하게 된 만화로 자리잡은 이림 작가의 죽는 남자 그 두번째 이야기이다. 단순히 그 순간 웃고 즐기는 만화에서 벗어나 삶에 관한 교훈을 잔잔하게 전해주는 내용이 특히나 마음에 드는 책이다. 군데군데 만화적인 유머스러움도 찾아 볼 수 있고 무엇보다 깔끔한 그림체가 보기에 편한 만화책이다.

 


이 책의 1편 서평을 쓰면서 남은 80일이 심히 궁금하다고 했었는데 이젠 남은 57일이 더욱 더 궁금해져 버렸다. 이 만화는 아주 끝을 보고야 말리라 다짐했다. 간략하게 1부의 스토리를 요약해 보자면 100일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서영이란 남자가 있다. 그는 아주 빨리 현실을 직시하고 '죽을 준비'를 하나하나 해나가기에 이른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여자친구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 세상을 떠나도 그런 여자친구를 지켜줄 상대로 그녀의 직장동료인 현필을 선택한다. 또한 서울역에서 만난 노숙자와도 삶의 용기를 주기 위한 모종의 계약을 하게 된다. 그 둘만으로도 바빠 죽겠는데 또 새엄마란 사람이 아버지의 회사를 노리고 있다는 정보도 입수하여 본가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까지가 1부의 스토리였다.

 


그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현필에게 용기를 주는 본격적인 트레이닝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두 남자는 일주일간 데이트(?)를 하게 된다. 마치 못쓰게된 컴퓨터의 하드 디스켓을 새 컴퓨터로 옮기는 느낌이다. 서영은 이제 다희와 함께 걷던 길을, 함께 먹던 음식을, 함께 가던 장소를 현필과 같이 가게 된다. 그러면서 그 추억에 잠시 행복해 하기도 한다. 고아 출신인 현필은 자신이 잘못해서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평생을 의기소침하게 지내 온 인물이다. 그런 그였기에 남들에겐 일상적인 소소한 그것들이 매번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현필의 입에서 그 느낌을 제대로 표현하는 말이 나올때 까지 두 남자의 데이트는 계속되었고 결국엔 현필이 새롭게 경험한 모든 것들을 오랫동안 남몰래 짝사랑하던 다희와 함께 하고 싶다는 '모범답안'을 도출해내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덧 현필과 친구가 된 서영은 그가 자라난 고아원을 같이 방문하게 된다. 그곳에서 서영은 현필과 시각장애인 소녀를 통해 새삼 느끼게 된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자부하던 자신은 진심으로 웃어 본 적이 없고 그들이 가진 근사한 미소를 못 가졌다는 것을..

 


노숙자 어르신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서영은 서울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자신이 매주 지원해주는 돈으로는 저렇게 깔끔하게 해다닐 수 없을것 같은데 의외로 노숙자는 말쑥한 차림으로 서울역 근처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상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 삶의 지론이었던 노숙자는 서영에게서 받은 자극을 계기로 자신이 오래전부터 꿈꾸던 일을 도모하기에 이른다. 서울역 근처 사우나 사장의 남편과 일종의 계약을 하며 그곳에서 머물고 서울역 환경미화원들과 친해져 손쉽게 다시 서영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에게 몫돈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돈으로 하모니카를 산다. 이제 노숙자가 꿈을 펼칠 시간이 되었다.

 


점점 자신을 옥죄어 오는 고통의 간극이 짧아지게 되고 서영의 마음은 더욱 더 바빠지기만 한다. 아버지를 위해 김장을 담그며 친엄마와의 기억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하지만 새엄마란 사람은 전혀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 내가 죽고 나면 아버지는 평생 김치를 마트에서 사먹어야 하나. 생각만해도 가슴이 아파온다. 이젠 걷다가도 코피를 쏟아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내게 남은 시간은 이제 57일 뿐인데..

 


용기를 내어 다희에게 고백한 현필의 태도에 다희는 자신의 마음을 종잡지 못해 방황하게 되고, 노숙자는 자신의 첫 연주를 시작하게 되며 2부는 마무리 되어진다.

 


이렇듯 서영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중 절반 정도를 사용하여 벌써 두 사람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들에게 용기와 삶에 대한 의지,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꿈과 사랑, 그리고 희망을 던져 주었다. 이제 남은건 각자의 몫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잘못된 삶을 되돌아본 서영. 그리고 자신이 그간 못느꼈던 우리가 살고있는 일견 팍팍해 보이던 인생이란 진흙속에 감추어진 진주같은 아름다운 모습들을 하나하나 새삼 느껴가게 되는 서영. 하지만 너무 늦은 것일까? 이제 그에게는 57일 밖에 남지 않았다.

 


이미 많은것을 나누어 준 이 죽는 남자가 결국에 얻게 되는것은 무엇일지.. 서영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앞으로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며 책장을 덮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적어도 100일은 더 살 수 있을것 같은 나는 과연 그렇게 하루 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크 소리가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18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 / 지식여행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상식만 가득한 우리의 두뇌에 노크를 똑똑

 

 

 

그간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를 한 너댓권 본듯하다. 이제 슬슬 헷갈릴만도 한데 바로 이 책 18편 '노크 소리가'는 필자가 본 플라시보 시리즈 중 가장 독특한 책이었다. 그 이유는 후반부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이 책에 실린 모든 단편들이 '노크 소리가 났다'라는 문장에서 출발하는 특이한 구성 때문이었다.

 


필자는 고교시절 연애편지를 참 열심히 썼더랬다. 원체 편지 쓰는걸 좋아하긴 했지만서도 여자친구 집이 워낙에 엄해서 전화를 한다는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삐삐 조차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던 시절, 파발이나 봉화 조차도 여의치 못했기에 오로지 편지로만 내 마음을 전하였었다. 그러던 중 편지지 뒷장의 여백에 여자친구의 이름으로 삼행시를 한편씩 적곤 했었는데 한 두장일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한번씩 한 스무장씩 쓰는날에는 처음 대여섯개 정도만 약간의 감흥을 줄 정도였고 나머지는 소스가 딸려 전반적으로 퀄리티가 떨어져 더이상의 별다른 감동도 주지 못한채 아니한만 못한 이벤트로 마무리 되었던 쓰린 기억이 있다.

 


그런면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딸랑 이 한 문장을 시작으로 이십여편의 다양하고 기발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호시 신이치는 과연 작가가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란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어 필자에게 특히나 인상깊었던 책이되었다.

 


그렇다면 호시 신이치는 왜 그런식으로 이 이야기들을 풀어 나갔을까? 그 이유는 저자 후기에 잘 나타나 있다. 호시 신이치가 등단을 하고 약간의 세월이 흘렀을때 그에 앞서 쇼트 쇼트 스토리의 달인이라 불리우던 프레드릭 브라운의 단편집을 번역한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 구조적으로 호시 신이치의 주의를 가장 강렬하게 끈 작품이 바로 '노크'라는 단편이었고 그 후 처음으로 주간지에 작품을 연재하면서 자신으로서는 주간 단위의 단편이 처음인지라 뭔가 독특한 구성을 생각해 내다가 바로 프레드릭 브라운의 '노크'의 구조가 떠올랐다는 변이다.

 


노크를 통해서 들어올 수 있는 '방'이란 밀폐된 구조가 가져다 주는 장점은 장소와 공간의 이동이 가져다 주는 이야기의 장황함을 사전에 차단시키는 역할을 하고 이러한 요소는 짧고 간결한 분량이 생명인 쇼트 쇼트 스토리에 가장 적합한 구조로 작용하였다. 또한 그만큼 독자들의 주의도 집중시키는 장점까지 있다는 면을 생각했었다고 하니 그 치밀함에 놀라울 따름이다. 워낙에 방대한 분량의 다양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창작해 내는 그인지라 그간 호시 신이치는 그저 번뜩번뜩 생각날때 마다 무조건 써내려가는 식이 아닐까 생각했었기에 말이다.

 


그러다 보니 그러한 공간의 제약은 일전에 보았던 호시 신이치의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특질 즉 SF적인 요소보다는 '방문'이란 개체를 사이에 두고 '노크 소리'로 표현되는 강약이나 고저등의 음향적 요소가 가져다 주는 어떠한 미지의 그것이 불러 일으키는 미스테리적인 요소가 훨씬 더 강한 특질을 띄게 된 점도 이 책이 다른 플라시보 시리즈와 차별화되는 점이었다고 생각된다.

 


비록 첫 시작은 그간 많이 등장한 기억상실에 관한 출발로 어느 정도 호시 신이치식의 반전에 익숙해진 필자는 그와의 두뇌게임에서 어느 정도 따라 갈 수 있겠노라 자부하며 호기롭게 시작되었지만 파도가 거세지듯 점층법으로 무궁무궁하게 강도가 더해지는 것들. 뜻하지 않은 횡재를 하고 의외의 곳에서 목숨이 달아나며 간과한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는 등등 허를 찌르는 이야기들.. 결론적으로 이번 시리즈 또한 기대에 부합할 정도로 평균이상의 재미를 가져다 주었다.

 

 

뭐랄까 상식으로만 가득한 우리의 두뇌에 노크를 똑똑 하는듯한 느낌이다. 그의 기발함 그 끝이 어디일까 보면 볼수록 궁금해지는 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