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출판사 독서 코칭
초등학생이 보는 그림책 20 <강아지똥 할아버지> 깊이 읽기

 

장주식 글 / 최석운 그림

 

강아지똥 할아버지는 어떤 분일까요?
경상북도 안동시 조탑마을, 이름도 가난한 빌뱅이 언덕에 조그만 오두막집 한 채가 주인을 잃은 채 덩그마니 놓여 있습니다. 두 해 전까지만 해도 그 집에 할아버지 한 분이 사셨지요. '강아지똥'이나 '몽실 언니'의 작가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람, 할아버지의 이름은 권정생입니다.

 
슬프고 따뜻하고 때론 익살맞은, 아름다운 동화로 수많은 어린이와 어른들의 가슴을 울려 주던 할아버지는 지난 2007년 5월 17일에 일흔하나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조금이라도 가까이 느껴 보려 오두막집에 찾아들고, 할아버지가 남긴 작품들을 읽고 또 읽습니다. 이름난 작가가 되었건만, 부도 명예도 마다하고 평생 자연의 품에서 작고 약하고 낮은 생명들과 함께 했던 삶, 불의에 물러서지 않고 바른 말을 할 줄 알았던 깊고 맑은 정신이 불러오는 깊은 감동 때문일 테지요. 사람들은 문학도 문학이지만 '삶이 문학을 뛰어넘은' 분이라며 할아버지를 존경합니다. 그림책 『강아지똥 할아버지』는 바로 그 할아버지, 권정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작은 오두막에서 20년이 넘도록 산 할아버지는 빼곡히 들어찬 책들 때문에 고작 한 평 남짓 남은 좁은 방에서 드문드문 오고가는 손님들을 맞고, 동네 노인들의 한스러운 이야기를 들어주고, 책을 빌리러 오는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가난한 집 여섯째로 태어나 전쟁을 겪고 제대로 먹지도 배우지도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보낸 할아버지는, 나이 스물에 얻은 결핵으로 젊은 시절 또한 고통과 가난 속에 걸식을 하며 떠돌았지요. 서른 즈음 이 마을 작은 교회에 종지기로 들어와 동화를 쓰며 지내던 할아버지에게 동네 청년들이 힘을 모아 지어 준 이 오두막은, 평생을 통해 할아버지가 가진 처음이자 마지막 집이었습니다.


생전에 할아버지는 '이 집에서 따뜻하고 조용하고 마음대로 외로울 수 있어 참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쁜 색시한테 장가는 못 갔어도 이 집에서 강아지하고도 생쥐하고도 개구리하고도 개똥하고도 연애는 수없이 했다'고 자랑하셨습니다. 이 그림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그처럼 작고 약한 것들과 연애했던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아주 적은 부분이지요.

 
그림책에 담지 못한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하고 멸시하는 쥐나 벌레들에게도 곁을 내어 주던 그 따뜻한 마음의 이야기들은 할아버지가 쓴 동화의 갈피마다 들어 있습니다. 그 동화의 주인공들은 길가에 버려진 개똥이나, 부모를 잃고 이집 저집 떠도는 천덕꾸러기 여자아이, 한없이 마음 약한 작은 토끼처럼  낮은 존재들이지만, 한결같이 약하고 힘없는 것들을 애써 보살피려 하고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도우려 하지요. 그것은 아마도 꼭 그렇게 살아온 할아버지의 삶이, 마음이 거기 담겨 있는 까닭일 겁니다.

 

다들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오르려 하는 세상인데  나만 혼자 덜 먹고 덜 쓰며 맑은 마음으로 살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더구나 그에 더해서 바른 말, 곧은 소리만 하며 살기는 더 힘들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살다 가신 어른들을 더욱 그리워하고, 사시던 자취나마 찾아가 기억을 더듬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지금도 작은 오두막에는 할아버지의 자취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그 좁고 가난한 집에서 살며 일구어 놓은 넓고도 풍성한 마음밭에서, 하찮은 개똥조차 귀히 여기는 마음, 작고 힘없는 생명을 받드는 마음, 옳지 않은 것을 꼿꼿이 꾸짖는 마음들을 캐어 가져가려는 발길들일 테지요. 강아지똥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뒤에도 우리에게 귀한 정신의 양식을 나눠 주고 계신 겁니다.

 


권정생 연보

1937년 8월 18일, 일본 도쿄 혼마치에서 5남 2녀 중 여섯째로 태어남.
1946년 유년기를 보낸 일본 땅을 떠나 한국으로 들어옴.
1950년 6․25 전쟁으로 식구들과 뿔뿔이 헤어짐.
1956년 평생 치유하지 못한 결핵을 얻게 됨.
1968년 안동 일직교회 문간방에 세들어 살며 종지기 일을 봄.
1974년~1979년  첫 단편동화집 『강아지똥』, 장편동화집 『꽃님과 아기양들』, 단편동화집 『사과나무밭 달님』, 단편동화집 『까치 울던 날』을 펴냄.
1983년 빌뱅이 언덕에 동네 청년들이 지어 준 작은 흙집으로 이사함.
1984년~1990년  단편동화집 『하느님의 눈물』, 장편소년소설 『몽실 언니』, 단편동화집 『벙어리 동찬이』, 단편동화집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장편소년소설 『초가집이 있던 마을』,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단편동화집 『바닷가 아이들』, 장편소년소설 『점득이네』를 펴냄.
1990년 『몽실 언니』가 MBC에서 36부작 드라마로 만들어짐.
1993년~2002년  그림책 『훨훨 날아간다』, 그림책 『눈이 되고 발이 되고』, 단편동화집 『무명저고리와 엄마』, 장편동화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 그림책 『강아지똥』, 그림책 『오소리네 집 꽃밭』, 소설 『한티재 하늘 1,2』, 단편동화집 『깜둥바가지 아줌마』, 단편동화집 『먹구렁이 기차』, 장편동화 『밥데기 죽데기』, 단편동화집 『아기 소나무와 권정생 동화나라』, 단편동화집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 동화집 『비나리 달이네 집』, 그림책 『황소 아저씨』, 그림책 『아기 너구리네 봄맞이』, 장편동화 『슬픈 나막신』을 펴냄.
2005년 5월 10일에 유언장을 미리 씀.
 '인세는 어린이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함.
2006년 그림책 『길 아저씨 손 아저씨』를 펴냄.
2007년 5월 17일 오후 2시 17분, 대구 가톨릭대학병원에서 돌아가심.

 


글 / 장주식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지금은 경기도 여주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고 있습니다. 『뛰엄질과 풀쩍이』, 『토끼 청설모 까치』, 『괴물과 나』 등의 동화책과, 학교 아이들과 함께 한 생활을 담은 글 모음책 『하호 아이들은 왜 학교가 좋을까?』를 썼습니다.

 

그림 / 최석운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회화를 공부했습니다. 개인전을 26번 열었고 국내외 다수의 기획전에 참가하며 주목받는 현대 작가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린 책으로 『비가 오면』, 『시집간 깜장돼지 순둥이』, 『그림 속 그림찾기 ㄱㄴㄷ』(공저) 등이 있습니다.

 

 

(자료 제공 : 사계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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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이 보는 그림책 19  <낙원섬에서 생긴 일> 깊이 읽기

 

찰스 키핑 글․그림 / 서애경 옮김

 

낙원섬에서 무슨 일이 생겼을까?
흙탕물이 이는 샛강 한가운데에 '낙원섬'이라는 작은 섬이 있었어요. 그곳에서 나고 자란 애덤은 낙원섬을 좋아했습니다. 그다지 낙원이라 할 만한 곳은 아니었지만요. 그러던 어느날 시의회에서는 이곳에 고속도로를 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낙원섬이 무질서한 난장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이제 오래된 가게들이 헐리고 섬은 콘크리트로 메워지기 시작합니다. 낙원섬은 과연 애덤의 낙원으로 남을 수 있을까요?

 

이 책은 존 버닝햄,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와 함께 영국 3대 일러스트레이터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찰스 키핑의 유작으로, 도시 재개발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변화의 문제를 고민하게 하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개발 문제는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새만금이 그러하고, 도시 재개발이 그러하고, 한반도 대운하 건설 문제가 그러하지요.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져 서로의 입장을 고수한 채 긴긴 싸움을 하기도 하고, 어느 한 편의 승리나 포기, 혹은 양편의 타협으로 끝나기도 하지요. 우리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숱한 개발들 가운데에 있습니다. 찰스 키핑은 그런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풍자의 다큐멘터리 속으로
이 그림책은 풍자로 가득차 있으며 다큐멘터리의 분위기를 내고 있습니다. 표지부터 '이 다리로 연결된 지역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줍니다. 표지를 넘기면 나오는 면지에는 '낙원섬 횡단 도로 건설 계획'에 대한 찬성과 반대 서명이 보이고 그와 함께 이 허구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지역이 실제의 장소인 양 지도에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 다음 장면은 애덤이 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에 걸터 앉아 있는 그림으로 애덤의 시선, 행인의 시선, 차의 방향과 지평선의 소실점 등이 오른쪽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오른쪽 페이지를 넘기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찰스 키핑의 다큐멘터리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이어 작가는 서점 창밖으로 보이는 점방 거리를 묘사하고, 채소 가게, 정육점, 생선 가게와 빵 가게를 보여 줍니다. 그러고 나서 혼자 사는, 아니 동물들만이 가족인 노인 친구들을 소개합니다. 이들은 모두 애덤의 이웃이자 친구라고 합니다.

 

시의원들의 개발, 애덤과 친구들의 개발
반대편 육지에서는 시의원들이 지역 일을 논의하고 있대요. 이들은 애덤의 실제 삶과는 거리가 있고 이웃도 아니지만 애덤이 사는 섬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랍니다. 그들의 이름을 보면 말장난하기 좋아하는 찰스 키핑 식의 풍자를 엿볼 수 있지요. 메이저 블랑코 Major Blanco의 메이저 major는 '대다수' 혹은 '일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혼 클라우드 버크 Hon Claude Berk에서 버크 berk는 '멍청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어니 블런트 Ernie Blunt의 블런트blunt는 '무뚝뚝하다'는 뜻이에요. 시빌 실리 Sybil Sillie는 '맹한 시빌' 쯤이 되겠고, 프림로즈 부인 Lady Primrose은 '화려한 여사' 정도가 될 거에요. 그리고 시장 세실 블란드 경 Mayor Sir Cecil Bland이 김빠진 표정으로 앉아 있습니다. 블란드 bland는 '김빠진', '재미없는'의 뜻이에요. 그 외에도 언제나 기권하기 좋아하는 버니 블랙Bernie Black와 위니 화이트 Winnie White가 있어요. '검다'는 뜻의 블랙 black과 '희다'는 뜻의 화이트 white를 사용해 타협점을 찾기 힘든 흑백논리의 사람들, 극단적인 좌와 우의 사람들을 작가는 풍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의원들은 무질서하고 불편한 것을 참지 못하는 어른들로 스매쉬트 smashit('smash it!'은 '때려 부숴!'라는 뜻) 철거 회사를 통해 낙원섬의 낡은 것들을 부수고, 도로를 새로 닦습니다. 그렇게 낙원섬은 금새 콘크리트로 메워집니다.

 

그 사이, 습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애덤과 그의 친구들는 시의회에서 통과시킨 낙원섬의 개발 건에 관해 어떠한 결정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습지는 도로로 쓰기에는 쓸모없는 땅이라 그곳에다 그들만의 계획을 감행할 수 있었지요. 애덤의 친구인 바르다 할아버지와 벌리 할머니는 애덤에게 노인들끼리 생각해 낸 꾀를 알려 주고, 애덤은 친구들과 함께 철거지에서 버려진 목재와 벽돌을 모아 습지로 옮깁니다. 그리고는 그곳에 새로운 구조물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낡은 것을 부수고 버려서 '새 것'을 만들었다고 기뻐하는 시의원들과, 그 곁에서 버려진 것을 줍고 고쳐서 진짜 '새로운 것'을 만드는 애덤과 그의 친구들은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찰스 키핑은 이러한 대조를 통해 진정한 개발이란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엉망진창이 된 개막식, 소박한 습지의 파티
시의원들이 추진했던 도로 개통은 게리 밴디노즈의 초대로 무언가 그럴 듯하게 진행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밴디노즈가 테이프를 막 자른 순간, 시의원들은 거기 모인 군중이 도로 개통을 축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게리 밴디노즈를 보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실망한 시의원들은 잘라 놓은 테이프 앞에서 풀이 꺽인 채 서 있고, 그 옆으로는 게리 밴디노즈의 광팬들과 경쟁 연예인의 광팬들, 싸우고 있는 북쪽 사람들과 남쪽 사람들, 자신만의 구호를 적은 피켓을 든 사람들이 보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관심사만을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그것을 위해 싸우고 있지요.


반면, 애덤과 친구들의 개발은 어떠한가요. 벌리 할머니와 바르다 할아버지가 구워 주는 소시지와 감자를 먹으며 소박한 파티를 하고 있군요. 자기들이 엮었을 타이어 그네를 타고, 손으로 뚝딱뚝딱 지은 계단을 오릅니다. 동물들과 함께 뛰고, 버려진 자동차를 아지트처럼 점령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신들이 만든 공간에서, 소외된 사람 없이 모두가 함께 어울리고 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사람도 있고, 너무 독특해서 접근하기 어려워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 낙원섬에서 함께 웃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의 신비한 분위기는 애덤이 안고 있는 비둘기로 인해 고조되는데, 이 그림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이 그림책은 한 번 읽어서는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알기 힘듭니다. 심지어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과연 그럴까요? 위에서 언급한 장면의 그림들을 곰곰이 보면 찰스 키핑이 그림 속에 숨겨둔 이야기가 보일 겁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세요. '나'라면, 내가 '애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말이에요.


어려운 이야기? 열린 이야기!
찰스 키핑은 은근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습니다. 설교하지 않고 그저 질문을 던지고 결론을 열어 놓지요. 여러분이 이어서 만들어 낼 다음 이야기는 어떤 것인가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낙원섬은 어떤 곳인가요? 어떤 해프닝이 벌어지고 어떻게 해결되나요?

 

'나는 강 위에 있는 한 섬에 관한 그림책 작업을 하고 있다. 그 섬이 작은 지역 공동체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고속도로의 일부가 되어 버릴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제 지역 사람들은 집을 새로 짓고, 대형 슈퍼마켓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설교할 생각은 없다. 당신은 작은 구멍 가게를 좋아하는가, 아니면 위생적인 슈퍼마켓을 좋아하는가? 나는 그림으로, 뒤죽박죽으로 쌓인 과일과 야채를 파는 상인을 보여 줄 수 있고, 그런 다음에 그 상인이 깔끔하고 말쑥한 모습으로 냉장고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다. 내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상점 주인이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변해서 그저 냉장고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릴 수 있다. 아이들은 이것이 진짜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나는 이것을 그림으로 보여 줌으로써 이를 통해 아이들이 이야기를 만들어 낼 뿐 아니라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자신들이 스스로 결론을 이끌어 낼 여지를 주는 것이다.' - 찰스 키핑(『찰스 키핑, 한 일러스트레이터의 삶』, 더글라스 마틴, 114~115쪽)

 

글.그림 / 찰스 키핑

1924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하여 신문배급업자인 아버지가 가져다주는 가판 포스터 뒷면에 그림을 즐겨 그리곤 했습니다. 평범했던 그의 삶은 그러나 여덟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죽고 이어 할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남으로써 깊은 상처를 안게 되었습니다. 열네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인쇄공으로 일하던 키핑은 2차대전 중이던 열여덟 살 때 군에 입대하였는데, 군 생활 중에 머리 부상을 입어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이 경험은 완치된 뒤에도 그의 내면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1946년 전역을 한 뒤 런던에 있는 리젠트 스트릿 폴리테크닉이라는 미술학교에 들어가 낮에는 가스 검침원 일을 하고 밤에는 그림 공부를 했습니다. 석판화와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한 키핑은, 졸업 후 신문 만화 일을 시작으로 일러스트레이터의 길에 들어섰으며 이후 200여 권의 책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1966년 그림책 『검은 돌리』의 출간을 시작으로 평생 22권의 그림책을 쓰고 그렸는데, 자신의 어린 시절이나 급속한 현대화 과정 속 대도시의 변화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그린 작품들입니다.


빼어난 조형성과 색감, 깊은 주제의식으로 '어린 독자에겐 너무 어렵고 깊은 심리적 접근을 하는 것이 유일한 흠'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키핑은 『찰리와 샬롯데와 황금 카나리아』(1967)과 『노상강도』(1981)로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을 두 차례 받았으며, 1988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작품 『낙원섬에서 생긴 일』은 그의 유작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89년 영국에서 처음 출간되었습니다.

 

 

(자료 제공 : 사계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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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이 보는 그림책 18  <두 사람> 깊이 읽기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글․그림 / 이지원 옮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남편과 아내일 수도 있고, 엄마와 딸, 아빠와 아들일 수도 있으며, 형제일 수도, 자매일 수도, 사랑하는 남녀일 수도, 아주 친한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너무 가깝기 때문에, 종종 서로가 어떤 사이인지 전혀 생각지 않고 지내곤 합니다. 마치 물이나 공기가 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걸 잊고 지내듯 말입니다. 둘 사이에 어떤 사정이라도 생겨 서로 멀리 또는 오래 떨어져 있게 되면, 그제야 두 사람은 서로의 사이에 대해 생각하고 깨닫게 되지요.


『두 사람』은 이처럼 평소에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두 사람 사이에 깃들인 의미와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림책입니다. 작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시처럼 반짝이는 비유가 담긴 그림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긴 글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가령, 첫 장면에서 작가는 각각 반쪽만 있는 여자의 옷과 남자의 옷이 두 개의 단추로 여며져 한 벌을 이루는 그림을 보여 주면서,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은 함께여서 더 쉽고 함께여서 더 어렵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는 각자 완전치 않으며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함께함으로써 완전한 하나를 이룬다는 뜻을 전하는 동시에, 그것이 조화를 이루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하는 것이지요. 작가는 두 반쪽 옷에 그나마 어울리는 색깔을 입히고 단추 또한 두 색깔 모두에 어울리는 색깔의 것을 선택함으로써 조화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만, 서로 다른 반쪽 옷들이 모여 조화로운 한 벌 옷을 이룬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다음 장면에서 작가는 모양과 색깔이 다른 열쇠들과 자물쇠들을 보여 주면서, '두 사람은 열쇠와 자물쇠 같아서 서로 꼭 들어맞는 한 쌍만이 서로의 마음에 열쇠와 자물쇠 구실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합니다. 그림 오른쪽 자물쇠의 구멍으로 표현된 사람들의 모양은 얼핏 똑같아 보입니다만, 그 안에 있는 회전통-즉 마음의 모양은 손 모양으로 표현된 왼쪽 열쇠들의 톱니 모양처럼 다 다르겠지요. 거기에 딱 맞는 열쇠를 만날 때 자물쇠의 마음은 활짝 열립니다.

 

몇 장면 뒤를 보면 모래시계 넷이 그려져 있습니다. '두 사람은 모래시계의 두 그릇처럼 서로 붙어 있으면서 서로 번갈아가며 모래를 주고받는다'는 것입니다. 저쪽의 기운이 떨어지면 이쪽이 기운을 나눠 주고, 또 이쪽이 힘겨우면 저쪽이 힘을 주는 그런 두 사람들의 비유지요. 그런데 모래시계에 채워진 '모래'의 모양이 저마다, 또 아래위마다 다릅니다. 어떤 것은, 윗그릇은 새가 나는 하늘로 채워져 있는데 그것이 아랫그릇으로 내려오면서 물고기가 헤엄치는 바다가 됩니다. 또 어떤 것은, 윗그릇 속 엉클어진 숫자들이 아랫그릇으로 내려와 정돈되지요. 사막의 모래가 밤하늘의 별들로 변하기도 하고, 씨앗이 내려와 싹트고 자라기도 합니다. 두 사람들은, 쌍마다 다 다를 뿐만 아니라 한 쌍 안에서도 각자가 다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은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한 집 안에서 서로 마주잡으려는 듯 내민 두 개의 손은 손가락이 모두 각기 다른 기능과 모양의 도구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서로 다르며, 감각과 취향 또한 서로 다른 두 사람일 테지요. 그 아래 동그란 얼굴이 두 사람을 바라봅니다. 두 사람이 만들어 낸 세 번째 사람일 수도, 이 책을 다 보고 난 독자일 수도 있습니다.

 

책장을 넘기면서 이처럼 작가의 사려 깊은 비유가 담긴 장면들을 하나씩 만날 때마다, 독자들은 자기 자신과 어떤 다른 이로 이루어진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자기 둘레의 어떤 '두 사람'들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되겠지요. 그것이 바로 '두 사람'처럼 앞표지와 뒤표지로 단단히 엮인 이 이야기 『두 사람』이 전하고자 하는 속생각일 것입니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작가의 말

'혼자 산다면, 집 전체가 다 자기 것일 거예요. 자기 시간은 다 자신을 위해 쓰고, 기쁨도 슬픔도 모두 자기만의 것이겠지요.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산다면, 똑같은 기쁨이 두 배로 커지기도 하고, 똑같은 슬픔이 반으로 줄어들기도 해요. 마음은 반으로 나누어도 작아지지 않아요. 둘이 함께 일한다면, 시간은 반으로 줄고 효과는 두 배가 되어요. 함께 떠나는 여행은 두 배나 즐거울 수 있지만, 두 배나 힘들 수도 있어요. 아무리 해 봐도 두 사람의 셈은 이상하기만 해요. 규칙도 없고, 결과는 항상 바뀌지요. 어쩔 때는 더해야 하고, 어쩔 때는 빼야 하고, 가끔은 나눗셈의 결과가 곱하기처럼 나오기도 하고, 연습 문제의 정답을 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요. 하지만 가는 길에, 잡지 않은 오른손과 왼손으로 무엇이라도 할 수 있지요. 둘은 함께 있지만, 따로따로이기도 해요. 두 개의 똑같은 선이 만드는 마치 수학의 가장 멋진 부호 '='처럼요. 두 개의 똑같은 선은 '+' 이렇게 겹쳐 볼 수도 있어요. 이 책은 그렇게, 함께하는 두 사람들에 대해 그림과 글로 풀어낸 이야기예요.'


 

(자료 제공 : 사계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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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이 보는 그림책 17  <흰지팡이 여행> 깊이 읽기

 

에이다 바셋 리치필드 글 / 김용연 그림 / 이승숙 옮김

 

발레리, 시력을 잃어가는 아이
이 책의 주인공 발레리는 시력을 잃어가는 아이입니다. 두꺼운 안경을 쓰면 그나마 좀 보였는데, 어느 날부터인가는 눈앞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기만 합니다. 학교 수업을 받기도 어렵고, 자꾸 넘어지고 부딪칩니다. 그래서 발레리는 절망합니다.

 

수자 선생님과 기다란 지팡이
그때에 수자 선생님이 발레리를 도와줍니다. 선생님은 청각, 후각, 촉각, 안면 감각 등 시각 이외의 감각을 사용하여 다니는 방법들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선생님이 발레리에게 기다란 지팡이를 내밉니다. 발레리는 그 지팡이가 참 싫습니다. 수자 선생님은 발레리에게 왜 지팡이를 사용해야 하는지 차근차근 알려줍니다. 앞에 있는 키 낮은 물건들이 보이지 않아서 자꾸 부딪치게 되니까 지팡이로 아래에 뭐가 있는지 알아내면 부딪치지 않을 거라고요. 긴 지팡이는 긴 팔과 같다고요.

 

발레리의 새로운 팔-기다란 지팡이
발레리는 지팡이를 쥐는 법과 지팡이를 사용해서 돌아다니는 방법을 배워 나갑니다. 지팡이가 부딪쳐 내는 소리를 듣고 앞에 무엇이 있는지, 그때마다 지팡이에 닿는 느낌이 어떤지 익힙니다. 그러다 보니 그것들을 피해 걸어가는 방법도 알게 되고요, 나중에는 교실 밖에서도 지팡이를 사용하게 됩니다.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도 좀 했지만 다들 잘 이해해 줍니다.

 

발레리, 여느 아이처럼 뭐든지 할 수 있는 아이
누군가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낼 때 발레리는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때로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듣지도 못하는 줄 아는지 '눈이 보이지 않는다니 참 안됐네.'라고 발레리 앞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사람은 아마도 모를 겁니다. 발레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를, 그리고 발레리가 여느 아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눈 말고도 세상을 보는 방법이 정말 많다는 것을요. 눈으로 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눈으로만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발레리가 하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보세요. 세상에는 보는 방법이 정말 많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 게 될 거예요.

 

흰지팡이의 의미
지팡이는 발레리가 절망을 딛고 여느 아이처럼 살아가는 데에 큰 힘이 된 도구입니다. 발레리처럼 눈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 가장 먼저 겪는 어려움이 마음대로 다닐 수 없게 되는 것, 즉 보행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대로 움직이지 못하니 일상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 사회활동 등 모든 일에서 아주 심한 제약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앞이 보이지 않을 경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의 도움 없이 혼자서 걸어 다니는 능력을 키우는 거랍니다. 그 도구가 바로 지팡이에요. 긴 지팡이는 시각 장애우의 긴 팔이 되어 독립 보행이 가능하게 해 주는 겁니다. 그렇게 혼자 걸을 수 있을 때에 시각 장애인은 세상과 어울릴 수 있어요.


시각 장애인이 쓰는 기다란 지팡이는 흰색입니다. 대개의 나라에서 흰지팡이는 시각 장애인들만이 사용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그렇답니다. 아래 글은 '흰지팡이 헌장'의 일부입니다. 1980년 세계맹인연합회가 10월 15일을 '흰지팡이날'로 공식 제정하며 이 헌장을 선포했어요. 이 글을 읽어보면 발레리가 흰지팡이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게 된 것이 발레리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일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흰지팡이 헌장
흰지팡이는 시각 장애인이 길을 찾고 활동하는데 가장 적합한 도구이며 시각 장애인의 자립과 성취를 나타내는 전 세계적으로 공인된 상징입니다.


흰지팡이는 장애물의 위치와 지형의 변화를 알려주는 도구로 어떠한 예상치 않은 상황에서도 시각 장애인이 신속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 주는 도구입니다. 누구든 흰지팡이를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흰지팡이를 사용하는 시각 장애인을 만날 때에 운전자는 주의해야 하며 보행자는 길을 비켜주거나 도움을 청해 오면 친절하게 안내해 주어야 합니다.

 

(중략)

그리하여 모든 인류는 흰지팡이가 상징하는 의미를 정확히 인식해야 하며 시각 장애인의 신체를 보호하고 심리적 안정을 위하여 제반조치를 적극적으로 강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이 책에 그림을 그린 김용연이예요.

이 책의 작업을 하면서 운 좋게 한빛맹학교에 견학을 갔었어요. 복도에서 한 무리의 친구들이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것을 보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들이 모두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 장애를 갖고 있대요. 여러분도 거침없이 발을 내딛으며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다면 저처럼 깜짝 놀랐을 거예요. 눈이 안 보이면 무조건 더듬더듬 조심조심 길을 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말이죠. 잠시 후 그 곳 선생님께 여쭤보니 시각 장애인들은 처음 가는 길에서야 조심조심 다니지만, 친숙한 복도나 교실의 모습은 이미 머리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눈으로 보듯이 다닐 수 있는 거라더군요.


또 시각 장애인들은 얼굴에 맞닿는 바람의 방향이나 귀에 들이치는 소리로도 그 곳이 탁 트인 사거리인지 골목길인지 알 수 있대요. 또 목소리만 들어도 상대방의 기분이나 건강상태도 알 수 있대요. 눈이 아닌 다른 곳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거죠. 이렇게 보면, 시각 장애인들은 모두가 초능력자에요.


이 책을 읽을 여러분이 발레리를 알고 이해하게 되고, 더불어 우리 곁의 시각 장애 친구들도 이해할 수 있게 되길 바라요.


 

(자료 제공 : 사계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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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출판사 독서 코칭
초등학생이 보는 그림책 16 <도착> 깊이 읽기
- 2007년 볼로냐 라가치 특별상 수상작


그림 숀텐

 

그림으로 쓰는 서사시
이 그림책은 가난과 박해, 그리고 다른 어떤 이유에서건 고국을 떠나 낯설고 물선 나라에 정착해야만 했던, 그리고 해야 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그림으로 쓴 서사시입니다. 세계적으로 약 1억9천1백만 명의 이주민들이 고국을 떠나 생활하고 있습니다. 여기, 지구에 사는 사람 35명 중 1명이 다른 나라에서 거주하고 있는 셈입니다. 전쟁이나 재난, 정치적 박해나 가난 등 생존을 위협하는 일들이 사람들에게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향하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세기 말엽의 혼란과 일제 식민지 시대, 한국전쟁과 개발독재 등 고단한 역사를 지나오는 동안 많은 이들이 한반도를 자의로, 타의로 떠나 이국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시아, 남아메리카, 동유럽, 아프리카 등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정치적 박해를 피해 우리나라로 이주해오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책이 예전에 이 땅을 떠나야만 했던 수많은 이주자들, 그리고 지금 여기 이 땅으로 들어오는 또 수많은 이주자들을 우리들(떠나지 않은 자, 먼저 거주하는 자)이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글 없는 그림책 사용법

'글이 없음은 독자를 더 확고하게, 한 이주자 캐릭터의 처지에 서게 해 준다. 책 안에는 이미지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는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의미와 익히 아는 것들-이것들은 감춰져 있거나 드물게 있다-을 스스로 찾아야만 한다. 글은 우리의 주의를 끄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글이 없을 때 이미지는 더 여유 있는 개념적 공간을 가질 수도 있으며, 독자의 관심을 더 오래 머물게 할 수 있다. 글이 있다면 독자는 손쉽게 읽을 수 있는 설명글에 의해 상상력을 지배당할 수도 있다.'-숀 탠, '『도착 The Arrival』이 만들어지기까지' 중에서


어떤 책을 보든 글자를 먼저 찾아 읽는 사람에게는 처음 이 그림책을 볼 때 모든 것이 불확실해 보입니다. 총 841컷의 그림들로만 전하는 이야기가 잘 읽히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저자가 만들어낸 처음 보는 낯선 사물들의 세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훑어보기만 해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자의 말처럼 여유를 갖고 그림에 머물러야 합니다. 글이 없으니 읽을 게 없는 게 아니라 글이 없으니 그림을 읽고 또 읽어야 하는 책이 되었고, 읽을 때마다 그림에 숨겨졌던 의미들이 찾아집니다. 글의 행간을 읽듯 그림의 행간을 읽는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1장 아내와 딸을 남겨 두고 고국을 떠나다

이 1장의 그림이 있는 첫 번째 면 작은 그림 아홉 개와 마지막 장인 6장의 그림이 있는 첫 번째 면 작은 그림 아홉 개를 비교해 보세요. 앞의 것에 나오는 그림은 분명히 우리가 익히 아는 것들의 모습입니다. 종이 새, 시계, 중절모와 수건, 냄비와 수저, 아이가 그린 새와 식구와 해, 금 간 찻주전자, 이가 나간 찻잔, 여행가방, 가족  사진. 뒤의 것을 볼까요? 동물이지만 우리가 아는 동물 모양이 아닌 것, 시계이지만 우리가 아는 시계 모양이 아닌 것, 중절모(이것은 전자와 똑같군요.), 우리가 모르는 음식을 담은 그릇과 포크처럼 쓸 것 같은 포크 같은 것, 아이가 그린 하늘을 나는 배 같은 것, 찻주전자처럼 쓸 것 같은 찻주전자 같은 것, 차를 담은 찻잔 같은 것과 모르는 문자로 쓰인 신문, 가족사진(이건 정말 전자와 똑같습니다), 그리고 동전을 건네주는 어른의 손과 그것을 받는 아이의 손. 저자 숀 탠은 이처럼 낯선 것들의 탄생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 현실의 이미지들을 완전히 상상된 세계로 연결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생전 처음 가보는 나라를 여행하는 느낌을 가장 잘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해서 나를 포함한 어떤 연령의, 어떤 배경의 독자라도 똑같이 익숙하지 않을 만한 허구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이곳은 물론 내 취향대로 상상한 이상한 나라였다. 새는 '새 같고' 나무는 '나무 같은' 것에 불과한, 사람들은 이상하게 옷을 입고, 주택 구조는 혼란스러우며 길거리의 일상이 굉장히 이상한 그런 곳 말이다. 나는 많은 이주자들이 이렇게 느꼈을 것이라 상상했다.'

 

2장 여정, 새로운 나라에서의 첫날

새로운 세계의 항구에는 악수를 하는 동상이 서 있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듯한 동상의 두 인물이 악수를 나누는 모습은 '당신을 환영합니다.'라는 메시지를 건네는 듯합니다. 하지만 다른 세계로 들어가려면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복잡하고 까다롭고, 게다가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하고 두렵기까지 한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이주자들은 제각각 흩어집니다. 남자는 기차를 타듯 애드벌룬에 매달린 우체통 닮은 것을 타고 이파리 같은 나무들이 있는 도시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온통 낯설고 괴상한 일상 속에 첫발을 디딥니다. 익숙한 것이라곤 자기 자신과 가족사진뿐인 세계로.


3장 새로운 만남과 호의

왜 남자 곁에 있는지 모를 괴상한 생물은 마치 고양이처럼 남자의 주변을 맴돕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남자에게 호의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지도를 펴고 낯선 이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길을 찾고 탈 것을 타고 또 식료품을 삽니다. 그러면서 남자는 새로운 세계에 익숙해져 갑니다. 그러는 동안 남자는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저마다 사연을 가진 이 새로운 세계의 사람들의 사연을 저자는 서너 페이지의 그림으로 간결하게, 상징적으로, 하지만 섬세한 묘사력으로 잘 보여줍니다.

 

4장 직장을 구하고 시간이 흘러간다

남자는 이제 괴상한 생물을 고양이 쓰다듬듯 어루만지고 먹이를 줍니다. 둘은 서로 의존하고 돌보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일자리 구하기는 어렵습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한 공장에 취직한 남자는 생산라인에 서서 불량품을 골라내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한 노인을 사귀고 그의 친구들과 어울립니다.

 

5장 식구들을 불러오다

3장에서 남자가 선물 받아 창턱에 놓아둔 조그만 항아리에 물고기를 닮은 새 같은 것이 둥지를 틉니다. 남자는 식구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시간이 흐릅니다. 항아리 둥지에도 식구가 생기고, 이파리 같이 생긴 식물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떨구고. 어느덧 눈이 쌓입니다. 남자는 두고 온 식구들의 소식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어느 날, 남자가 타고 왔던 우체통 같은 것이 도착하고 거기에서 아내와 딸이 내립니다.

 

6장 정착

따뜻한 김이 오를 것 같은, 즐거운 콧노래가 흘러나올 듯한 일상이 보입니다. 딸아이가 식료품을 사러 나갑니다. 괴상한 생물을 데리고 다녀오는 길에 지도를 펴든 젊은 여인을 보고 아이는 기꺼이 다가가 도움의 손길을 펼칩니다.

 

저자인 숀 탠은 이 책에서 좁게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이룬 나라인 호주의 이민사를, 넓게는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자가 갖는 두려움과 고독, 그리고 극복의 과정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는 새로운 세계에 모인 자들이 서로를 돕고 위하는 마음씨와 따뜻한 정서가 흐르고 있어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저자의 인생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림 / 숀 탠

1974년 오스트레일리아 퍼스 주의 프리멘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중국계 말레이시아 인이고 어머니는 오스트레일리아 인입니다. 문학과 미술을 좋아했으며, 많은 시간을 공룡이나 로봇, 우주선 따위를 그리며 보냈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여 열여섯 살이던 1990년, 공상과학 소설에 처음으로 삽화를 그렸습니다. 대학에서 미술과 영문학을 공부했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그림책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회사인 블루 스카이 스튜디오와 픽사 등에서 원화를 그리는 일도 합니다.

 

1992년에 국제 미래의 출판미술가 상을 받았고, 2001년에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세계 판타지 어워드에서 '최고의 아티스트'로 뽑혔습니다. 쓰고 그린 작품 『잃어버린 것』으로 볼로냐 라가치 명예상을(이 작품은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빨간 나무』로 CBCA(호주어린이책위원회) 명예상를), 『도착 The Arrival』으로 볼로냐 라가치 특별상을 받았습니다. 그림을 그린 작품 『토끼들』(존 마르스덴 글)로  CBCA 올해의 그림책상을, 『Memorial』(개리 크루 글) CBCA(호주어린이책위원회) 명예상을, 『The Viewer』(개리 크루 글) 크릭턴 일러스트레이션 상을 받았습니다.

 

아래 글은 작가가 쓴 Comments on The Arrival(『도착 The Arrival』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전반부를 번역한 것입니다.


출처 : http://www.shauntan.net/books/the-arrival.html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또 글 작가로서 내가 해 온 작업들(『토끼들』, 『잃어버린 것』, 『빨간 나무』)을 돌아보면서, 나는 내가 '소속감'이라는 개념에 대해 관심이 많음을 깨닫는다. 특히 그것을 찾거나 잃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이것이 나의 삶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의식적인 관심보다는 잠재의식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뒷받침이 될 만한 하나의 경험으로는 거대한 사막과 더 거대한 바다 사이에 끼인, 세계에서 가장 단절된 도시 중의 하나인 호주의 퍼스에서 자란 것을 들 수 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우리 부모님은 뚜렷한 문화 정체성이나 역사라고는 거의 없는, 그저 공기 좋은 북쪽의 변두리에 자리를 잡으셨던 것이다. '원주민 추방'(나중에 『토끼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주목하게 된)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되면서, 나는 불도저로 밀어버린 백지 상태의 바닷가 모래 언덕에 급조한, 벽으로 둘러싸인 집들이 있는 이 세계를 도대체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에 몹시 혼란스러웠다.


중국인 혼혈이 흔하지 않았던 시대에, 그런 곳에서 혼혈아로 살아가면서 나는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니?'라는 질문을 수없이 받아야 했다. 그 질문에 '여기 사람'이라고 대답하면 '너의 부모님은 어디 사람이니?'라는 질문이 이어질 뿐이었다. 그래도 이런 질문은 어릴 때 겪어야 했던 저질의 인종차별보다는 훨씬 긍정적인 시선이었다. 그리고 이런 차별은 종종 공공연하게 또는 은밀하게 나의 중국인 아버지를 향해 있었다. 자라면서 나는 막연한 격리감과 뚜렷하지 않은 정체성 또는 뿌리에서 떨어진 듯한 느낌들을 가졌고, 그 위에서 'Australian'으로 사는 것은 무엇이고, 또 'un-Australian'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 대하여 습관적인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그것이 무얼 의미하든지 간에).


개인적인 이슈를 넘어서라도, 소속감에 대한 문제는 아마 모든 사람이 종종 혹은 정기적으로 갖게 되는, 기본적인 존재에 관한 질문일 것이다. 이런 문제는 평안한 현실에 시련이 오거나 우리의 기대가 좌절되는 등 일상생활에서 무엇인가 잘못되었을 경우에 표면으로 떠오른다. 대개 이런 순간들에서 좋은 이야기가 시작되며, 그것은 소설의 아주 좋은 에너지원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새로운 학교, 직장, 관계 혹은 국가 등 새로운 소속감의 창조를 필요로 하는 현실을 맞게 된다.

 

이 문제는 내가 이주 경험을 주제로 하는 책인 『도착 The Arrival』을 진행하는 오랜 기간 동안 내 마음에 꽉 차 있었다. 이미 '이상한 지역의 이상한 사람' 이라는 경험을 가진 나에게, 누군가 집을 떠나 알려지지 않은 나라, 지극히 평범한 일상마저 이상한,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새로운 곳으로 가는 이야기는 분명히 다루어야 할 문제였다. 이는 이야기의 형태로 구체화되기 전, 여러 해 동안 내가 생각해오던 시나리오였다. (후략)

 

 

(자료 제공 : 사계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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