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 - 김현진의 B급 연애 탈출기
김현진 지음, 전지영 그림 / 레드박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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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랑받겠다고 결심한 여자들은 난데없이 엉뚱한 짓을 시작한다. 성형외과에서 상담을 하거나 피부 관리실이나 헬스장에 등록하거나 한두 사이즈 작은 청바지를 사거나...... 하지만, 이 병의 치유법은 날씬해지거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예쁜 여자, 두뇌와 얼굴은 김태희에 신체 비율은 김연아인 여자가 있어도 평생 사랑받는 데 익숙한 여자, 양지만 걸어온 여자한테는 못 이긴다.
사랑받고 산 여자들은 자기가 사랑받지 못하는 순간 그것을 대단히 빠르게 알아차릴 뿐만 아니라 신속히 그 상황을 타개한다. 그 순간을 대단히 기이하고 비정상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지만 우리 B급 연애 환자들은 참으로 그따위 상황을 잘 견딘다. 우리는 구박에 익숙해서,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한 건지 아닌지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사랑도 받아본 여자가 계속 받는다. 자꾸 못 받는 데 익숙해지다 보면 주는 사랑도, 떠먹여줘도 못 먹게 된다. 이게 이 병의 가장 무서운 점이다. 나중에는 영양이 공급되어도 피와 살로 못 가는, 마음의 에이즈에까지 이르게 된다. -25쪽

한국인의 외모평가란 사실 다음과 같다. 너도 김태희 아니지? 그럼 '짜져'!-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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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6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판타지에 현실을 녹여냈다. 그런데 현실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기막히게 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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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 가스펠 레볼루션 시리즈 4
예수 그리스도 지음, 테리 이글턴 엮음, 김율희 옮김 / 프레시안북 / 2009년 1월
절판


어느 시대 어느 곳이든 인간이 영위하는 삶이란 그 바탕에는 갈등의 구조가 깔려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의 치열한 탈주를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현실의 구조 때문에 이상은 언제나 현실의 다른 한 짝이 된다. 이것이 곧 변화와 개혁 나아가 혁명의 언어가 탄생하는 근본적 구조이며 그리고 혁명이 시대를 초월하여 호출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혁명은 이상과 마찬가지고 현실의 존재형식을 완성하고 있는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신영복)-5쪽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혁명의 해방적 언어에 탐닉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상은 추락함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일 뿐이다. 이상은 현실의 대각점에서 현실의 갈등구조를 드러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비록 추락이 이상의 필연적인 운명이라도 하더라도 추락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이상의 추락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대지에 추락해야 한다.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민들레는 슬프다.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추락하고 그리고 절절한 애정 속에 묻힐 때 민들레는 다시 봄을 맞게 되는 것이다. (신영복)-5쪽

사실 바리새인들은 경건한 행위로 다른 유대인들의 흠모와 존경을 받았다. 바리새파 중에서도 진보적 성향을 보였던 힐렐 학파는 예수가 자신들보다 강한 좌익 성향을 보였음에도 그의 가르침과 행동에 공감했던 것 같다. 부정한 음식은 없다는 예수의 대담한 선언으로 심각한 불화가 생겼겠지만, 어쨌거나 예수는 신학적으로 좌파 자유주의 바리새인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13쪽

유대인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자 딸이었다. 그 말에는 초인적인 무언가를 지녔다는 뜻은 들어 있지 않다.
예수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자신의 신성을 주장하지는 않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정도로 현명한 이였다. 예수는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실제로 예수는 군중의 마음을 얻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군중에게서 벗어나려 노력하면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다), 상징적인 이유 또는 측은한 마음에서 기적을 행했을 뿐이다. 예수는 자기를 입증할 만한 기적을 행하지 않겠다고 하며, 그런 기적을 보여달라는 요구를 받으면 화를 낸다. -14쪽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라는 말은 국내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평일 뿐 아니라 유대교의 배타주의를 거부하는 말이기도 하다. 복음서 안에는 이런 내용이 많다. -16쪽

어쨌거나 무장도 거의 하지 않고 수는 좀 많지만 대규모는 아닌 사람들과 떠도는 카리스마파 신자가 성전을 파괴하거나 나라를 전복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유대와 로마 당국도 그 사실을 알았음에 틀림없다. 로마 수비대는 말할 것도 없고 성전 경비병만 해도 수천 명이었다. -17쪽

예수가 갈보리에서 생을 마감한 까닭은 일부 가난한 자들에게 엄청난 인기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들은 유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떼 지어 모였고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어찌됐든 예수가 로마 점령군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고 기대했다. 복음사가들이 이해하는 것만큼 대규모 군중이 예수를 지지한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며, 그는 1세기의 다른 성자들보다 적은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군중 규모에 관한 고대의 진술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이 극적인 뭔가를 하려 한다는 기대가 만연했다. 기독교 신학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실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부활이었다. -18쪽

예수의 십자가에 새겨진 비문에 따르면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한 탓에 처형당했다. 그 주장은 틀림없이 로마인들을 놀라게 했을 것이다. 예수가 왕의 자격이 있다는 증거를 복음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방식은 당연히 그런 의구심을 낳았을 것이며, 아마도 천국에 대한 예수의 발언을 으레 그렇듯 둔하게 해석한 제자들이 기름을 부었을 것이다. -19쪽

사실 이것이야말로 유다의 배반에서 핵심이다. 유다는 정확히 어떻게 배반했는가? 유다가 사두개인들에게 예수가 있는 장소를 가르쳐줬다는 사실은 별 의미가 없다. 사두개인들은 십중팔구 그것을 알고 이썼고 예수의 동태를 전해줄 첩자들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유다가 그들에게 스승의 선동성에 관한 증거를 제공했다는 설이 더 타당해 보이며, 사두개인들은 유다의 말에 양념을 더해 로마인들에게 제공했을 것이다. -19쪽

조직화된 종교라는 도구는 대안 성전, 다시 말해 예수 자신의 살해되고 변모된 몸으로 대체될 예정이었다. 예수는 분명 성전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이미 문제를 일으켰다. 실제로 그 일은 예수가 사망한 지 40여년이 지나 다름 아닌 로마군에 의해 일어났지만 말이다. -21쪽

이른바 '당혹의 범주'(신약에 나타난 예수의 언행에서 역사적 진위를 판별하기 위해 성서학자들이 사용하는 도구로, 존 마이어가 <주변적 유대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초대교회는 창조주를 당혹스럽게 하거나 창조주의 입지를 약화시킬 만한 자료를 굳이 만들지는 않았다. 즉 신약에서 예수와 관련된 기록 중 초대교회를 당혹스럽게 만들 만한 내용이 있다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옮긴이)에 근거하면, 성취되지 않은 예언은 성취된 예언보다 진짜일 가능성이 더 높다. -21쪽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로마의 대리인인 본디오 빌라도는 이 다루기 힘든 부랑자가 법과 질서에 위협이 된다면 주저 없이 십자가에 못 박았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그런 문제에서 고분고분 선례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빌라도는 사람들을 교수형에 처하는 것을 특별히 선호했던 것 같다. 복음서에 나타난 빌라도는 형이상학적인 의식구조를 지닌 우유부단한 자유주의자지만, 실제로 빌라도는 결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이는 역사적인 기록이 뒷받침한다. 그는 무자비한 총독으로 악명 높았고 뇌물수수, 잔혹성, 재판을 생략한 처형 등으로 고발되다가 결국 불명예스럽게 관직을 박탈당한 관리였다. 빌라도는 상당히 마구잡이로 십자가형을 내렸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예수가 로마당국을 명백히 위협하지 않았음에도 그토록 단호하게 까닭을 설명해줄 수 있다. 예수가 좀더 자유주의적인 체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면 당연히 무죄방면됐을 것이다. -22쪽

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들의 도주는 사실이다. 스승을 부인한 베드로처럼 그 사건은 초대교회로서는 엄청나게 난감한 문제였을 텐데, 어찌 부정할 수도 없어서 복음서에 넣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그 사건을 생략한다. 아마도 이른바 열두 제자(비록 그 숫자에 변동이 생긴 것 같지만)가 그토록 철두철미하게 망신스러운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리라. 예수의 제자들은 뛰어나게 명석한 사람들은 아닌 듯하며, 분통이 터질 정도로 끊임없이 예수를 오해한다. 특히 시몬 베드로는 경솔한 데다 덜컥 오해부터 하는 인물이다. 베드로가 정말로 수제자였거나 최초의 교황이었다 하더라도 지성이 뛰어나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겟세마네에서 스승이 몇 미터 떨어져서 영적인 고문을 견디는 와중에도 깨어 있지 못한 인물이다. 마가복음은 가장 비판적인 입장에서 부활절이 오기 전 제자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보여준다. -25쪽

예수는 금의환향한 유명인사였지만, 아마도 민중은 예수가 설파한 신앙보다는 압도적인 기적을 베풀리라는 기대로 환호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예수의 인기는 당연히 세례자 요한의 인기라는 그늘에 가렸을 것이며, 관중을 끌어들이는 실력은 세례자 요한이 한 수 위였을 것이다. 복음서는 당파적인 방식으로 세례자 요한을 축소하고 예수를 강조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예수는 십중팔구 요한의 날개 아래서 활동을 시작했으며, 아마 나중에는 두 사람 사이에 신학적인 불화가 생겼을 것이다. 요한은 계시록의 저자인 반면 예수는 그렇지 않다. 요한은 나쁜 소식을 전한 반면 예수는 좋은 소식을 전했다. -26쪽

예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자비, 정의, 굶주린 자를 먹이는 것, 이민자를 환대하는 것, 빈곤한 자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는 것, 가난한 자를 권력자의 압제에서 보호하는 것 등이라고 해석했을 것이다. 예수는 가장 감상적인 순간에 재림을 계시적으로 묘사하며 구원이 종교의식이나 행위규범이 아니라 빵 조각이나 물 한 잔을 나눔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천국은 결국 놀랄 만큼 유물론적인 문제다. 천국이 내세적이라는 말은 실체 없는 기대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장차 변모할 것임을 상징한다. -27쪽

예수는 동료들에게 사랑과 정의라는 복음에 충실하면 자신과 똑같은 결말을 맞게 될 것이라고 엄하게 경고하는데, 이는 정신을 마비시키는 현혹이 결코 아니다. 예수의 관점에서 사랑을 측정하는 방법은 죽임을 당하느냐 마느냐다. 그러므로 예수는 당시의 권력자들을 모욕하지 앟ㄴ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사명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암시한다. -27-28쪽

신약 신학에 유물론의 특성이 있다는 증거 중 하나는 예수가 병자들을 고치며 수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이다. 예수가 대부분 주의를 기울인 것은 인간의 몸이었다. 그리고 예수는 사람을 불구로 만드는 힘에 대항하는 자신의 활동이 도래할 천국의 증표라고 여긴 것 같다. 병은 당시 유대교의 일반적인 개념에 따르면 의심의 여지없이 악의 형상이다. 사실상 예수는 그것이 사탄의 행위라는 신화에 찬성하는 듯하다. -28쪽

고통은 좋지 않다. 물론 고통에서 어떤 가치를 끌어낼 수 있다면 좋다. 그러나 애초에 고통을 겪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복음서 어디에서도, 예수는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감수하라고 조언하지는 않는다. 맹인, 귀머거리, 병자나 정신이상자들은 사회의 주변인으로 여겨지며 애초에 편견에 물든 팔레스타인에서는 특히 그렇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어울림으로써 건강을 회복한다. 이런 까닭에 치유는 천국의 증표다. 예수는 죽기 전에, 분리의 원리라기보다 다른 사람들과의 연합의 원리나는 의미에서 자신의 몸을 신성하게 먹으라며 제자들에게 남긴다. -28-29쪽

누가는 마리아의 입에서 가톨릭 교회가 <마리아 송가>라고 알고 있는 노래를 흘러나오게 하지만, 일부 성경학자들의 견해처럼 그것은 개작한 열심당 혁명가거나 혁명가의 후렴구였을 것이다. -29쪽

가장 극심한 고통과 더 없는 행복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주제는 유대교 신앙의 정통으로, 서구 비극과 유사하다. 진정한 힘은 무기력에서 흘러나오며 예수의 십자가형과 부활이 말하려는 교리가 바로 그것이다. 가난한 자들과 착취당하는 자들은 지배 권력의 실패를 드러내는데, 그들은 권력이 힘을 유지하기 위해 백성에게 고통을 가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재산을 빼앗긴 자들은 정의로운 사회의 결함을 드러내는 초상이다. 또한 그들 위에 군림한 사람들보다 잃을 것도 훨씬 적기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훨씬 열성적으로 노력한다. -30쪽

복음서에서는 예수에게도 '아나윔anawim-(히브리어로 핍박받는 자, 가난한 자, 남은 자-옮긴이)ㅡ의 역할을 부여하는 비유가 많다. 예수는 걸림돌이라는 '스칸달론skandalon', 즉 건축자들은 버렸지만, 새 질서를 세울 모퉁이돌일 터였다. 예전 잡동사니에서 새 체제가 일어난다. 버림받은 사람들이 식탁의 상석에 앉을 것이고, 궁핍한 사람들은 땅을 상속받을 것이다. 목숨을 버렸던 사람들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케노시스kenosis, 다시 말해 자기 포기는 풍요로운 삶의 조건이다. 현재의 권력기구에 대항해 죽어야만 평화와 연대 넘치는 새 삶을 일으킬 수 있다. 정의의 왕국과 이 세상 권력 사이에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31쪽

복음서가 묘사한 예수의 모습 중 일부는 명백히 급진적인 반향을 일으킨다. 예수는 집이 없고 재산이 없으며 떠돌이에다 사회적 변경지대에 있다. 친족을 무시하며 직업이나 마땅히 하는 일이 없으며 버림받은 자들과 부랑자들의 친구다. 물질적인 소유를 반대하고 자기 안전을 염려하지 않으며,기성체제에서 보면 눈엣가시요 부자와 권력자들의 골칫거리다. 상당히 현대화된 기독교가 처한 문제는 두 자녀와 자동차와 담보대출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생활방식을 실천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34쪽

널리 퍼진 신화 속에서 육욕의 적이었던 사도 바울은 독신이 아니라 두 육체의 성적인 결합이 다가올 천국의 예표라고 여긴다. 그러나 실제로 천국을 위해 일하려면 천국의 특성을 나타내는 일부 이익을 포기하거나 미뤄둬야 한다. 이는 사회주의를 위해 일할 때도 똑같이 적용된다. -34쪽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활동은 친족관계라는 전통적인 구조를 파괴하며 가족 구성원을 서로 떼어놓는다고 충고한다. 확실히 예수의 제자들은 부모를 '미워하지' 않으면 예수에게 충실할 수 없다. 예수의 사명은 타협적이지 않고 투쟁적이다. 예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왓고 확립된 친족관계를 갈라놓고 천국을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을 분리한다. 예수는 눈이 온화한 석고상이 아니라 무정하고 사나울 만큼 단호한 행동주의자다.
-36쪽

오늘날 예수의 열렬한 추종자들에게 핵무기나 기아보다 더 중요한 도덕적 이슈로 자리매김한 성에 관해 예수는 놀랄 만큼 관대하다. 사실 신약은 그 주제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신약을 기초로 세워졌지만, 성에 대해 강박관념이 있는 기독교회와는 다른 양상이다. 사도 요한의 복음서에 보면 예수는 결혼을 여러 번 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데, 이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이례적인 사건이다. 젊고 경건한 유대인 남자는 엄청난 추문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여자와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고, 악명 높은 성적 이력을 지닌 여자와는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여자는 사마리아인으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특히 멸시한 집단이다. -36-37쪽

<다빈치코드>는 상투적인 방식으로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성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적인 관계 여부가 아니라, 예수의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증언한 사람이 바로 마리아와 다른 여자친구들이라는 점이다. 무덤이 텅 빈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당시에는 여성을 믿을 만한 증인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꾸며낸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복음사가들은... 부활한 예수가 사회적 약자 집단에 처음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인정해야 했다. 이렇게 신약성서는 통상 받아들여졌던 문화적 지위를 훌쩍 뛰어넘는 의미를 여성에게 부여한다. -37쪽

예수와 동료들은 안식일을 지킨 듯한데, 안식일은 중노동을 싫어했던 예수의 특성과 잘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안식일의 요지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뒤 그랬듯이 일을 쉬고 여가를 즐기는 것이었다. 생산을 맹목적으로 숭배하지 않는다는 뜻이었고, 교회에 가는 것이 핵심은 아니었다. 교회는 없었다. 예수의 느긋한 생활방식은 특히 일, 훈련, 규칙을 우상으로 여긴 사람들을 향한 은근한 책망이다. -38쪽

예수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 하지 않았다. 마가복음은 예수가 성전과 전통적인 유대교와 불화하려고 한 듯이 묘사하는데, 이 대목에서 마가의 정치적 의도가 드러난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명이 유대인에게 국한됨을 분명히 밝힌다. 또한 자신의 삶, 죽음, 부활을 모세 율법의 성취 혹은 완성으로 여기는 것 같다. -38쪽

예수가 율법에 맞서 사랑을, 외적인 의식에 맞서 내적인 감정을 옹호했다는 생각은 그리스도인들의 반유대성에서 비롯된 결과다. 근거를 들자면, 예수는 사람들의 느낌이 아니라 행위에 관심을 보인다. 또 유대교 율법은 그 자체로 사랑의 법이다. 예를 들어 원수를 자비롭게 대하라는 내용이 율법에 들어 있다. 원수에게 친절을 베풀라는 내용은 기독교의 창조물이 아니다. 이와 비슷하게, 유대인 교사 중 누구도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예수의 훈계에 반기를 들 수 없었다. -38쪽

당시 예수는 도덕적으로 약점이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만 한 것이 아니다. 상당히 악한 인물들과도 친하게 지냈고 그들에게 자신과 함께 음식을 먹고 즐겁게 어울리기 위해 악행을 그치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예수는 죄를 그만 짓고 제사를 드려 죄를 씻고 율법에 순종하라고 하지 않으며, 그런 요구를 하지 않음으로써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는 듯하다. 심지어 훨씬 원성이 자자할 만한 일을 하는데, 도덕적으로 부정한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특별히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이는 그들을 개조하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악행을 그만둔다면 틀림없이 더 좋았겠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현재의 모습 그대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41쪽

신성한 은혜를 얻는 데 반드시 품행이 단정할 필요는 없다. 사실 초대 받지 않은 손님들로 결혼식장을 채우는 왕의 비유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위법자들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제에서는 통상 의롭게 여겨지는 사람들(즉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들)보다 우선권을 갖게 되라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율법은 유지되어야 했으나 그것이 예수의 사명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구원을 얻으려면 율법에 복종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했다. -41쪽

예수가 자신 있게 부활을 예상하며 목숨을 버렸다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순조로운 목적론은 쓸모가 없다. 예수의 죽음은 정말 출구가 없는 행위여야만 목표가 될 수 있었다. 예수는 아버지가 왜 이런 무익한 행위를 요구하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아버지를 충실히 따르며 혼란 속에서 죽은 것 같다. -42쪽

이와 같이 기독교는 세속의 인본주의보다 훨씬 더 비관적일 뿐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낙관적이기도 하다. 우선 기독교는 인간조건의 변함없는 고집스러움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현실적인 태도를 보인다. 인간조건이란 인간이 지난 욕망의 사악함, 맹목적 신앙과 환영의 만연, 고통에 뒤따르는 추문, 압제와 불의의 지속, 공공 덕의 결핍, 권력의 오만함, 선의 허약함, 그리고 육체적 욕망과 이기심의 가공할 만한 힘이다. 다름 아닌 이런 조건을 기독교는 '원죄'라고 부르는데, 이는 원죄가 문화적이고 언어적인 동물에게는 구조적으로 나타나는 결함이자 소박한 역사주의에는 미안한 말이지만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이런저런 형태로 전해내려오는 결함이라는 뜻이다. -42-43쪽

다른 한편 기독교는 이 무시무시한 조건에서 구원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할 뿐 아니라 놀랍게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 구원이 이미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 중 가장 기계론적인 사람들조차도 오늘날 사회주의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도래했다는 말은 물론이고 그것이 필연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천국의 도래는 확실한 것인데,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사실을 통해 천국이 도래하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의 완전한 도래는 예수의 육체만큼이나 충격적인 '혁명'이라는 미덕에 의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 변모된 몸을 기반으로 할 때만 새로운 폴리스가 세워질 수 있다. 전통적으로 부활이라고 알려진 것이 바로 이것이다. -43쪽

예수가 다른 유대인 선지자들과 구별되는 점은 천국을 예고한 것이 아니라(세례자 요한은 온통 그 이야기뿐이었다.), 그 체제와 얼마나 조화를 이루느냐는 예수 자신을 믿는 것에 달렸다고 확고히 주장한 것이다. 결국 예수가 제안하는 것은 교리가 아니고 강령program은 더더욱 아니며 바로 관계다. 이런 점에서 복음사가들이 애초에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우주의 창조자가 아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린 존재로 생각했듯이, 구원은 수행적인 것이다. -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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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프레드 비온 입문 - 심리치료 전문가와 교양 독자를 위한, 눈 정신분석 시리즈 2
조안 시밍턴 외 지음, 임말희 옮김 / NUN(눈출판그룹) / 2008년 8월
구판절판


"내게는 당신의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오. 내가 당신의 사랑을 가지면, 당신은 내가 그 이상의 것을 바란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소. 내 사랑이여, 나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오. 당신의 사랑으로 나는 행복할 것이고, 그 이상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것이오. 세상이 생각하는 성공과 겉치레는 따라주면 유쾌하겠지만, 이것들은 평범한 만족과 행복 뒤에 아주 나중에야 따라오는 산물이라고 생각하오." (비온 1985: 91)-24쪽

"우리가 행복한 삶과 가정을 꾸릴 수 있다고 너무도 강하게 느낀 나머지 나는 그것이 두려울 정도였소. 진실로 가치 있는 것을 세울 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을 가진 듯이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소.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흩어버려 결국엔 어리석음과 사소함의 더미만 남게 했소. 이 끔찍한 운명은 너무나 평범해서 더욱 비극적이라오. 여기저기서 작은 실수들을 하고 수백 번 이를 반복하고 속임수를 썼소. 하지만 난 더 나아지기를 희망하오. 여태껏 해왔던 것보다 더 잘 해나갈 수 있도록 당신이 나를 도와야만 할 거요." (Bion 1985: 97)-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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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생명 - 지구의 위기 앞에 다시 생각하는 신학과 경제
샐리 맥페이그 지음, 장양미.장윤재 옮김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8년 9월
품절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활동하며 존재한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와(피조물의 모든 작은 부분과) 가깝다. 하나님은 우리의 숨 중의 숨이요, 우리를 사랑하게 만드는 사랑이며, 우리의 행위를 지탱하는 힘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하나님을 알게 되면, 만물과 모든 생명, 사랑 그리고 힘의 근원이자 목적인 하나님을 알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삶 안에서 이러한 실재들의 매개가 된다.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게 되고(건강과 행복을 회복할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을 도울 수 있게 된다. 구원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살아간다는 의미다. 우리 각자는 지구의 일부만을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임무다. -41쪽

사물들은 나와 내 욕망과의 관련 속에서 혼돈에 빠져 있지도, 그렇다고 질서를 이루고 있지도 않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련 속에서 질서 지워져 있다. 현실은 이 세상의 기준(이나 나의 기준)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고 이들이 번성하기를 바라는 사랑에 의해서 비로소 '이해된다.'-41쪽

특권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십자가의' 삶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일 것인가의 여부라기보다 우리가 저지른 무거운 죄 - 다른 이들의 빈곤화와 지구의 붕괴에 침묵으로 동조한 죄 - 를 회개할 것인가다. 찰스 버치(Charles Birch)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소박하게 살 수 있도록 더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 모든 북미 그리스도인들이 '부유한' 것은 아지만 대부분은 탐욕스러운 소비자들이다. 그런데도 풍요로운 삶에 대한 대안적 비전을 제시하는 교회들은 거의 없다. 우리는 대안적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스스로 다른 삶을 사는 것은 물론 끝없는 소비 패러다임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책임이 있다. 대안적 삶이 선하고 풍요로울 수 있는가?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질서 지운 현실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 안에서는 지구를 위해 좋고 올바른 관계들이 우리의 기준이 된다. -44쪽

가장 기본적으로 성장이라는 목적이 의심스러운 이유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서구 중산층의 생활양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 자원을 조달하기 위해 지구가 4개나 더 필요하다!
나아가 성장이라는 가치는 다른 많은 가치를 배제한다. 이 점은 성장 지표인 국내총생산(GDP)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GDP란 한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금전거래의 총합이다. 이 수치는 한 나라의 경제가 '건강하다'고 간주되기 위해 계속 올라가야 한다. 사실 이 수치가 빨리 그리고 더 높이 상승하면 한 나라의 경제는 더욱 건강하다고 판정받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국가의 GDP가 성장했다는 소식에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모든 금전거래가 이 측정에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131쪽

예를 들어서, 1989년 알래스카에서 일어난 엑슨 발데즈 기름 유출 사고의 청소와 소송 비용도 GDP상승에 기여했다. 어떤 사람이 암을 치료하거나 강도를 당할 때도, 창문을 여는 대신 에어컨을 켤 때마다, 혹은 걷기보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마다 GDP는 상승한다. GDP에는 '유익한' 활동들뿐만 아니라 '유해한' 활동들도 포함된다. 오래된 숲의 나무들을 깨끗이 없애버려도, 그리고 범죄와 사회적 부패도 만약 그로 인해 누군가의 주머니에 돈이 들어간다면 성장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131쪽

하지만 성장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돈을 지불하지 않는 가사노동이나, 어린이와 노인을 돌보는 일, 자원봉사와 같이 돈이 개입되지 않는 활동들이다. 만약 우리의 복지를 그리고 우리의 좋은 삶을 오직 GDP에 의해서만 측정한다면, (아이를 기르는 것과 같이) 가치 있는 많은 일들을 배제하는 것이며, 또한 (기름 유출과 같이) 우리 자신과 지구에 유해한 일들을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결정적으로 GDP는 자연자원의 고갈이나 공기 및 물의 오염 그리고 토양의 악화를 경제의 고유한 부분으로 계산에 넣지 않는다. -131쪽

우리가(일반 사람들이) 결정해야 하는 것은 어떤 사회와 지구를 원하는가다. 모두를 위한 좋은 삶을 원하는가, 아니면 단지 운이 좋은 소수만을 위한 좋은 삶을 원하는가? -177쪽

북미의 중산층 그리스도인들이 검약이라는 전복적인 미덕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다. 이는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만물이-우리 인간과 지구 안의 이웃 그리고 지구 자체의 - 번성을 도움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부름을 받았다면, 이를 거스르는 삶의 방식이 바로 죄다. 우리에게 고도의 소비적 생활양식은 죄받을 일이다. 실제로 그것은 악이다. 그런 생활방식은 부자를 더 부자로, 가난한 자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 조직적 구조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180쪽

죄와 악은 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 개념은 시대마다 번영의 기반을 침식하는 태도와 그와 동반하는 제도에 따라 변화한다. 우리에게 죄는 '나쁜' 행위를 하거나, 나아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기보다 모두가 번성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방식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실행되고 있는 시장 자본주의를 가장 명백하고 분명한 죄의 형태로 보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 21세기 북미 중산층 미국인들에게 죄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다. 즉, 특권을 누리는 수백만 개인의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으로부터 자라는 구조적 악과 조용히 공모하는 것이다.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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