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프레드 비온 입문 - 심리치료 전문가와 교양 독자를 위한, 눈 정신분석 시리즈 2
조안 시밍턴 외 지음, 임말희 옮김 / NUN(눈출판그룹) / 2008년 8월
구판절판


"내게는 당신의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오. 내가 당신의 사랑을 가지면, 당신은 내가 그 이상의 것을 바란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소. 내 사랑이여, 나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오. 당신의 사랑으로 나는 행복할 것이고, 그 이상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것이오. 세상이 생각하는 성공과 겉치레는 따라주면 유쾌하겠지만, 이것들은 평범한 만족과 행복 뒤에 아주 나중에야 따라오는 산물이라고 생각하오." (비온 1985: 91)-24쪽

"우리가 행복한 삶과 가정을 꾸릴 수 있다고 너무도 강하게 느낀 나머지 나는 그것이 두려울 정도였소. 진실로 가치 있는 것을 세울 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을 가진 듯이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소.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흩어버려 결국엔 어리석음과 사소함의 더미만 남게 했소. 이 끔찍한 운명은 너무나 평범해서 더욱 비극적이라오. 여기저기서 작은 실수들을 하고 수백 번 이를 반복하고 속임수를 썼소. 하지만 난 더 나아지기를 희망하오. 여태껏 해왔던 것보다 더 잘 해나갈 수 있도록 당신이 나를 도와야만 할 거요." (Bion 1985: 97)-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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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생명 - 지구의 위기 앞에 다시 생각하는 신학과 경제
샐리 맥페이그 지음, 장양미.장윤재 옮김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8년 9월
품절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활동하며 존재한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와(피조물의 모든 작은 부분과) 가깝다. 하나님은 우리의 숨 중의 숨이요, 우리를 사랑하게 만드는 사랑이며, 우리의 행위를 지탱하는 힘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하나님을 알게 되면, 만물과 모든 생명, 사랑 그리고 힘의 근원이자 목적인 하나님을 알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삶 안에서 이러한 실재들의 매개가 된다.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게 되고(건강과 행복을 회복할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을 도울 수 있게 된다. 구원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살아간다는 의미다. 우리 각자는 지구의 일부만을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임무다. -41쪽

사물들은 나와 내 욕망과의 관련 속에서 혼돈에 빠져 있지도, 그렇다고 질서를 이루고 있지도 않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련 속에서 질서 지워져 있다. 현실은 이 세상의 기준(이나 나의 기준)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고 이들이 번성하기를 바라는 사랑에 의해서 비로소 '이해된다.'-41쪽

특권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십자가의' 삶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일 것인가의 여부라기보다 우리가 저지른 무거운 죄 - 다른 이들의 빈곤화와 지구의 붕괴에 침묵으로 동조한 죄 - 를 회개할 것인가다. 찰스 버치(Charles Birch)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소박하게 살 수 있도록 더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 모든 북미 그리스도인들이 '부유한' 것은 아지만 대부분은 탐욕스러운 소비자들이다. 그런데도 풍요로운 삶에 대한 대안적 비전을 제시하는 교회들은 거의 없다. 우리는 대안적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스스로 다른 삶을 사는 것은 물론 끝없는 소비 패러다임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책임이 있다. 대안적 삶이 선하고 풍요로울 수 있는가?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질서 지운 현실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 안에서는 지구를 위해 좋고 올바른 관계들이 우리의 기준이 된다. -44쪽

가장 기본적으로 성장이라는 목적이 의심스러운 이유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서구 중산층의 생활양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 자원을 조달하기 위해 지구가 4개나 더 필요하다!
나아가 성장이라는 가치는 다른 많은 가치를 배제한다. 이 점은 성장 지표인 국내총생산(GDP)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GDP란 한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금전거래의 총합이다. 이 수치는 한 나라의 경제가 '건강하다'고 간주되기 위해 계속 올라가야 한다. 사실 이 수치가 빨리 그리고 더 높이 상승하면 한 나라의 경제는 더욱 건강하다고 판정받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국가의 GDP가 성장했다는 소식에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모든 금전거래가 이 측정에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131쪽

예를 들어서, 1989년 알래스카에서 일어난 엑슨 발데즈 기름 유출 사고의 청소와 소송 비용도 GDP상승에 기여했다. 어떤 사람이 암을 치료하거나 강도를 당할 때도, 창문을 여는 대신 에어컨을 켤 때마다, 혹은 걷기보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마다 GDP는 상승한다. GDP에는 '유익한' 활동들뿐만 아니라 '유해한' 활동들도 포함된다. 오래된 숲의 나무들을 깨끗이 없애버려도, 그리고 범죄와 사회적 부패도 만약 그로 인해 누군가의 주머니에 돈이 들어간다면 성장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131쪽

하지만 성장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돈을 지불하지 않는 가사노동이나, 어린이와 노인을 돌보는 일, 자원봉사와 같이 돈이 개입되지 않는 활동들이다. 만약 우리의 복지를 그리고 우리의 좋은 삶을 오직 GDP에 의해서만 측정한다면, (아이를 기르는 것과 같이) 가치 있는 많은 일들을 배제하는 것이며, 또한 (기름 유출과 같이) 우리 자신과 지구에 유해한 일들을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결정적으로 GDP는 자연자원의 고갈이나 공기 및 물의 오염 그리고 토양의 악화를 경제의 고유한 부분으로 계산에 넣지 않는다. -131쪽

우리가(일반 사람들이) 결정해야 하는 것은 어떤 사회와 지구를 원하는가다. 모두를 위한 좋은 삶을 원하는가, 아니면 단지 운이 좋은 소수만을 위한 좋은 삶을 원하는가? -177쪽

북미의 중산층 그리스도인들이 검약이라는 전복적인 미덕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다. 이는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만물이-우리 인간과 지구 안의 이웃 그리고 지구 자체의 - 번성을 도움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부름을 받았다면, 이를 거스르는 삶의 방식이 바로 죄다. 우리에게 고도의 소비적 생활양식은 죄받을 일이다. 실제로 그것은 악이다. 그런 생활방식은 부자를 더 부자로, 가난한 자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 조직적 구조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180쪽

죄와 악은 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 개념은 시대마다 번영의 기반을 침식하는 태도와 그와 동반하는 제도에 따라 변화한다. 우리에게 죄는 '나쁜' 행위를 하거나, 나아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기보다 모두가 번성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방식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실행되고 있는 시장 자본주의를 가장 명백하고 분명한 죄의 형태로 보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 21세기 북미 중산층 미국인들에게 죄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다. 즉, 특권을 누리는 수백만 개인의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으로부터 자라는 구조적 악과 조용히 공모하는 것이다.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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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이 든 양분
마이클 아이건 지음, 이재훈 옮김 / 한국심리치료연구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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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라는 느낌을 떨어버릴 수 없다.(5장) 정서적인 독소의 감소는 그들에게 이상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들은 얼마의 행복한 순간들을 견딜 수는 있지만, 행복한 삶은 견디지 못한다.
사랑에 의해 독화된 개인들은 끝 모르는 자기 의심으로 인해 고통 받는다. 그들은 나쁨이 어디에서 오는지 찾아내지 못한다. 사랑이 죽일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불가능하다. 이 문제는 이중구속의 문제보다 더 미묘한 것이다. 이중 구속의 경우, 자기는 증오를 감추고 있는 사랑의 표현에 의해 혼동을 겪는다. 그러나 사랑에 의해 독화된 개인들은 정말로 사랑을 받았던 자들이다.
-9쪽

사랑이 독을 갖고 있을 때,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는 무한한 양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아이에게 쏟아부을 수 있다. 이것은 꼭 아이에 대한 숨겨진 증오의 결과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아이가 부모의 깊은 감정을 느끼는 자연스런 대상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결과다. 부모의 억압된 에너지가 아이에게 흘러들어가, 좋음과 나쁨을 구별할 수 없는 혼합물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부모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아이를 덮는다. 따라서 사랑은 불안한 통제, 걱정,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야망, 자기-증오를 포함한 다양한 성향들과 혼합된다. 부모의 사랑은 순수하지 않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들과 혼합되어 있다. -9-10쪽

흔히 부모는 자녀를 그들 자신의 연장으로, 그들의 자기 만족을 위한 양분으로, 자기감을 위한 자극제로 간주한다. 부모-자녀의 경계들은 다양하며 유동적이다. 아이는 일상생활 속에 스며든 메시아적인 기대를 소화해야만 한다. 어느 정도 우리는 심리적인 양분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고, 심리적인 독을 피하는 법을 배운다. 종종 우리는 그 일에 대체로 성공하지만, 거기에는 희생자가 따르기 마련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양분 안에 있는 독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0 쪽

세상에는 우리가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사례들에서도 종종 무언가가 전달되고 무언가가 변한다. 믿음, 신실함, 현실주의, 지혜 그리고 솜씨의 어떤 조합이 이것이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 치료사는 잘 발달된, 냉소적이고 아이러니하며 비관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 그것은 생의 일부이자, 부분적으로 정교화된, 상처 입은 존재의 일부이다. 쓰디쓴 상처가 없다면, 치료사가 과연 얼마나 공감적일 수 있으며, 얼마나 깊은 영역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기쁨을 맛보지 않고는 가장 깊은 질병은 치료될 수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평범한 삶으로부터 숨겨진 곳에서 발생하는 기적들이 있다. 치료는 사람들이 그런 곳을 믿고 찾도록 도와준다. 그래서 때가 되면, 하늘의 자기, 지옥의 자기, 땅의 자기가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17쪽

그동안에 나는 앨리스의 고통을 담아주고 있었다. 그때 앨리스는 그녀 자신 - 앨리스가 된 나 -에게 고통을 집어넣음으로써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는 어머니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좀 더 깊은 수준에서, 앨리스가 마침내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 알아주고 공감해주는 사람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앨리스의 고통에 무감각했고, 뿐만 아니라 앨리스의 고통을 양분으로 섭취하고 있었다. 초기단계의 작업에서 나는 붕괴하지 않고, 혹은 그녀로 인해 손상을 입지 않으면서 앨리스의 고통에 공감해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훨씬 더 많이 상호적으로 교류할 수 있었다. -25쪽

많은 사람들이 심리치료의 도움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는 처벌적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도움을 청하는 것에 대해 낙인찍히는 느낌을 갖는다. 과연 미국 대통령이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도움을 받는다고 시인할 수 있을까? 환자가 되는 것은 성적인 문란함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로 취급된다. 우리 모두는 그저 인간일 뿐이라고 시인하면서도 우리에겐 여전히 음울한 계명이 적용된다. 즉, "너희에게는 결코 어떤 결정도 있어서는 안 된다." -41쪽

우리에게는 잘못된 것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잘못된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우리에게 어리석음과 바보스러움을 허용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혹독하다고 느끼거나, 통곡하며 비탄에 젖거나, 비명을 지를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에 대한 관심에 벗어나는 시간을 갖는 것 이상이다. 우리가 속한 사회,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의 부분들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42쪽

십대들에게 이상주의는 너무도 실제적이다. 개인의 고통은 실제적이다. 이 세상에 이상주의와 개인의 고통을 위한 진실한 장소가 없다면, 이 세상은 십대를 위한 곳이 아니다. 십대들이 살고 싶어 하는 세상은 그런 세상이 아니다. 우울증은 힘의 반대 측면이다. 자살의 양심의 표시다.
고통받는 이상주의자의 자살은, 절망적인 상황에 의해 궁지에 몰린 사람의 자살 혹은 너무나 잔혹하게 훼손당해 삶이 공허하고 하찮게 보이는 사람의 자살과는 다르다. 이상주의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언제나 부족하게만 보이는 자신의 성취에 의해 고통 받는다. 물질주의자는 언제나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쓰지만, 그래도 그들이 소유하는 것에 만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44쪽

도리스의 부모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에게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도리스는 보살핌을 받는다고 느꼈다. 그러나 도리스의 부모는 그녀가 자신에 대해 불안해하도록 만들었다. ...
도리스에게는 자신만을 위한 시간,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혹은 그녀가 하고 싶은 어떤 것을 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도리스가 조용히 있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면 부모 중의 한 사람은 언제나 이런저런 활동상황에 대해 물어보았다. 도리스가 무언가를 잘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때면, 부모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고심했다. ...-50-51쪽

도리스의 부모가 인간으로서 도리스에게 관심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당한 평가가 아닐 것이다. 문제를 복잡하게 한 것은, 그들은 도리스를 사랑했지만 바로 그들의 그 사랑이 도리스의 불안을 부채질했다는 것이다. 도리스는 언제나 잘 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도리스가 어떻게 하는지 지나치게 걱정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도리스를 그녀의 친구와 비교했다. 누가 무엇을 더 잘했을까? X는 무엇을 했는데, 도리스는 그것을 했을까? 그들은 도리스가 놓칠지도 모르는 어떤 것에 대한 촉수를 갖고 있었고, 상상 속에서 혹은 실제로 도리스에게 결핍된 것에 불안을 쏟아부었다. 그들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신호를 찾아다니는 것 같았고, 도리스의 존재의 핵심과 가족의 핵심에 있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뿌리 깊은 무능과 불완전함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 결함을 찾아다니는 것 같았다. -51쪽

어머니는 그녀 자신의 삶에 실망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의, 살아있는 아이를 키울 상태가 전혀 아니었다. 능력과 자신감으로 위장했던 어머니의 겉모습은 주지화할 수 없거나, 사업상의 문제나 예술작품을 다루듯이 할 수 없는 과제 앞에서 무너졌다. 존재와 존재의 만남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던져졌던 것이다. 아기의 원시적 자기는 타자의 자기에게서 양분을 얻고자 한다. 성취에 대한 환상들은 자기와 자기가 만나는 삶을 대신할 수 없다. -57쪽

도리스의 어머니는 돌봄의 외적인 사항들을 강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녀는 아기를 보살폈고, 편안하게 해주었으며, 최고의 육아환경, 그리고 나중에는 최상의 교육적 및 인간적인 환경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희생해서 아기에게 주었기 때문에 은밀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는 되고 싶었지만 어머니 역할은 싫고 억울했다. 그녀는 성공하고 싶은 자신의 갈망을 희생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고, 그녀의 발목을 잡은 아이를 증오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정말로 원했던 갓난아기에 대한 자신의 분노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죄책감과 결합된 분노는 그녀의 정서적인 억제와 단순히 존재하지 못하는 그녀의 무능력을 더 악화시켰다. 그녀는 도리스를 대단한 아이로 만들지 않고서는 도리스에게 아낌없이 줄 수 없었다. -58쪽

도리스는 사랑과 독소가 뒤섞여있어서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정서적 양분을 흡수하며 살았다. 사랑은 심리적인 독소를 먹을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고, 독소는 사랑을 독으로 변형시킨다. 사랑은 자기 증오를 위한 둥지를 제공한다. 도리스가 받은 사랑은 도리스의 눈을 멀게 했고, 그녀의 자기 안에 독이 퍼져가는 과정을 보지 못하게 했다. -59쪽

나의 붕괴는 오점이에요.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오점을 보고 있고, 그것이 얼마나 넓게 퍼져있는지 보고 있어요. 그건 내 눈길이 닿는 곳마다 있어요. 그것은 털어내거나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에요. 지금 나는 좋아지고 있어요. 어머니는 벌써 내가 붕괴했던 적이 아예 없었던 양 취급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아니면 그저 사고로, 탈선으로, 실수로 취급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하지만 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나의 붕괴는 우리 가족의 핵심적인 구성요소에요. 그것이 진실이에요. 그것은 우리 가족 내의 망가진 무언가를 드러내고 있어요. 그것은 파묻어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할 것이에요. 나의 붕괴는 할 말이 있었던 거예요. 그것은 우리 가족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말해주고 있어요. -64쪽

도리스가 일을 잘 하려면 충분한 지지와 사랑(양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이 사실을 수용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도리스는 지지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자신을 공격했다. 그녀는 자신이 약하고, 징징거리는 아이이며, 너무 떠받들어지고 응석받이로 자라서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가혹하게 대했다. 직장에서 지지와 양분을 제공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사치와 방종으로 보였다. 지지와 양분에 대한 요구가 있다는 그 사실은 그녀에게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65쪽

나는 단순히 일하는 기계가 아니에요. 마침내 나의 전 존재가 저항하면서,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소리를 쳤던 거예요.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속이면서 살 필요가 없다고 말이에요. 내가 나의 삶을 생생하게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그렇게 하겠어요? 나는 인간존재였다는 것을 수치스러워했어요. 나는 내가 충분히 비인간적이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다녔던 거예요. 나의 붕괴는 나의 상사처럼 일하는 기계가 되지 않도록 나를 구원해준 사건이었어요. -68쪽

"지금은 모든 것이 의문 투성이에요. 나는 이제 겨우 더듬거리며 찾고 있어요."
... 도리스의 집에서는 더듬거리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더듬거리는 것은 권장할만한 덕목이 아니었다. 그것은 긍정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해 도리스가 치룬 대가는 무엇이었던가! 도리스는 살아가면서 꿈틀거리고 더듬거릴 공간이 필요해서 심리치료를 받으러 온 것이었다. 불확실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위한 공간을 찾기 위해 왔다. -68쪽

심리치료는 도리스에게 시간과 공간을 주었고, 그녀의 가족이 그리고 아마 사회도 직면할 수 없었던 자기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연결시킬 수 있도록 지지를 제공했다. 가정과 사회에 "무언가 나쁜 것"이 있다는 느낌은 매우 실제적으로 인식되었다. 잘못된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방치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심리치료는 사람들이 축적된 심리적인 독소를 뽑아내고 보다 적은 독소가 담긴 양분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찾도록 도움을 준다. 삶에서 독소가 없는 양분(사랑)이란 없다. 그러나 삶에서 사람들은 자살만이 유일한 길인 양 느껴질 정도로까지 독소가 증가하는 지점에 도달하기도 한다.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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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과 은총
시몬느 베이유 지음, 윤진 옮김 / 이제이북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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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만나본 적은 없었으나 여태까지 기다렸던 진실한 삶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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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의 풍경 - 김민웅의 인문학 에세이
김민웅 지음 / 한길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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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마음을 채우는 귀중한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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