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모토 세이초의 미스터리 단편집 <잠복>입니다. 총 여섯 권으로 기획 중인 '마쓰모토 세이초 단편 미스터리 걸작선'의 첫 번째 책이죠. 출세작인 <점과 선(1958년)>이 나오기 직전, 1955-1957년 사이에 발표한 단편들 중에서 선별했습니다. 초기작이지만 이후 작품들과 작풍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잠언 같은 명 문구들의 빈도는 적지만 겉치레 없는 문장의 강렬함은 이미 갖추어져 있습니다. 부조리한 사회 구조가 인간을 궁지로 몰아넣는 주제의식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잠복>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원류를 찾아가기 위해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초기 단편집은 일종의 요식 행위, 즉 작가의 팬들을 위해 마련된 시시한 습작 성지 순례가 아닙니다. 세이초는 그 주제의식과 문장의 스타일 모두를 이미 이루어 놓고 시작했으니까요. 그가 단편 '잠복'을 쓸 때 '내가 읽고 싶은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했다지만, 그 결심은 이미 자신을 어떤 궤도에 올려 놓은 뒤에 비로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이 단편집에서 누구나 한때는 습작 시절이 있었다거나 하는 저급한 위안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역작'은 글을 쓰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쓰디쓴 교훈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 결심 이외에 또 무엇이 필요했는지를 <잠복>이 확인시켜 줍니다. 재능에의 찬탄이 아니라 감히 따라할 엄두가 나지 않는 노동량에의 감탄입니다.

 

살벌할 정도로 깎여나간 짧은 문장들은 천재적인 면모 대신에 비극적인 노동의 땀냄새를 풍깁니다. '소거하는 노동'으로 만들어진 과묵한 문장들이 그의 주제의식과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는지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세이초의 소설 속에서는 대적할 수 없는 '이 세계 자체'에 부딪혀 익사하는 사람들 투성이입니다. 몸부림치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몸부림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무용無用하지만 절박합니다. 세이초의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심하지만 절박합니다. 화려하거나 큰 소리를 낼 수가 없습니다. 질식하는 사람이 비명을 지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죽어간다'는 20세기 인간의 메시지는 이 높이와 이 크기로 이야기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주제와 방법이 맞물려 있습니다. 세이초는 알고 있었고 그렇게 행했습니다. 그러니 마쓰모토 세이초의 <잠복>에서 우리가 뭔가를 배워야 한다면, 그 메시지는 바로 "나는 도대체 무엇이 하고(쓰고,그리고,찍고,만들고,노래하고) 싶은 걸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이 좋은 '데뷔작'의 요건이 아닐까요?

 

 

 

 

 

 

 

 

마침 <잠복>은 알라딘 북펀드 참여자들의 목록이 처음으로 내지에 실린 첫 책이기도 합니다.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셈이죠. 알라딘 북펀드가 좋은 책을 잉태하는 데 실제로 일정 역할을 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잠복>이 북펀드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는 사실이 개인적으로는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북펀드가 좋은 데뷔작으로 데뷔한다, 고 하니 좀 우스운 조합 같습니다만 꽤나 상서로운 듯도 합니다(하하).

 

북펀드와 마쓰모토 세이초, 모두의 '시작'에 행운을 빕니다.

 

 

 

 

 

 

 

 

북펀드 참여 리스트를 기입한 도서가 처음 발간된 기념으로 참여하신 분들의 닉네임을 열거해 봅니다.

일종의 명예의 전당입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무명객, gauri_5c, BRINY, diletant, azzi42000, smchoi1211, 베쯔, tting, 로빈, 마그, albam, 뿡뿡, hrmhs, hkjuju, hoonii, oculus, 특급변소, jspecial, 서란, 미완성, summit, 바람향, galapagos5, 나노하, 이매지, 보리, 또라, takeda, 책사는사람, 세기말, 무채색, 쿠자누스, 꽈당, 루나, 고철, 셜록윤, eimo, ~*, 발없는새, 무조건무료배송, 마팔다, 지니, 히카루, 집오리, dencihinji, yel99, asd7007, 하루, 양언니# , 시간여행, 손님, sabrina, 재는재로, 몽쁘띠, 물음표, floweroftime, 러브캣, 옹달우물, 쁘띠아망, KOEMMA, jinnyjinny, hakobiya, hyunchansi, 물의 여행자, 손님, 푸른바람, Secondhand, 토실여왕, 매그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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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그늘 2012-06-22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래 만난 가장 아름다운 리뷰!

외국소설/예술MD 2012-06-22 13:07   좋아요 0 | URL
근래 만난 유일한 댓글! 하하

바이킹 2012-06-22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북펀드에 투자했는데 이렇게 이름 실린 것 보니까 저까지 설레네요 ;ㅁ;ㅋ

외국소설/예술MD 2012-06-25 15:55   좋아요 0 | URL
네, 책에 직접 이름이 실리는 건 특이한 경험이죠. 즐거운 기억으로 남게 될 겁니다. ^^

히버드 2012-06-25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른 북펀드에 투자했지만 윗분 말씀처럼 이름이 실린 것을 보니 괜히 마음이 행복해집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12-06-26 13:06   좋아요 0 | URL
네, 이 시스템이 좀더 안정적으로, 출판사에도 더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잘 진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잘 돼야 할텐데 말이죠. ㅎㅎ

꼬마별 2012-06-27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신기하네요
서평의 일부분이 책 뒤나 앞에 쓰여지는 건 봤어도 이런 것은 좋은 책을 만들어내는데 독자도 한 몫 했다는
좋은 취지가 된것 같아요
저도 해보고 싶네요

외국소설/예술MD 2012-07-11 01:48   좋아요 0 | URL
북펀드에 많은 참여 부탁 드립니다. 좋은 취지의 프로모션이에요. ㅎㅎ

재는재로 2012-06-29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기하네요 제이름이 실린다니 이런경험은 언제 또 해보겠어요 즐거운 추억이 될것 같네요

외국소설/예술MD 2012-07-11 01:49   좋아요 0 | URL
아 여기에 참여하셨나요? 독서생활의 좋은 기념품이 될 겁니다. ^^

skysoo17 2015-03-10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아름다워요^^*

비로그인 2015-03-10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
 

원고지 약 500매 분량이 추가되었다고 해서 화제인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입니다.

출판사에도 번역 관련 문의가 여러 차례 왔다고 하네요. 어떻게 바뀌었길래 그렇게 많은 분량이 추가가 되었느냐는 거죠.

 

해서, 여러분들의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해드리기 위해 출판사에서 원고 일부를 미리 받아 공개합니다.

 

비교 대상이 될 기존 번역 부분은 출판사와의 논의 끝에 여기에는 게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재번역 여부를 가장 궁금해하실, 기존 번역본을 소장 중인 분들께서 우선 판단을 내려보심이 어떨까 합니다.

 

공개되는 부분은 총 세 파트이며, 혹시 모를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스토리 진행 상 매우 중요한 부분은 다루지 않았습니다.

 

다소나마 궁금증이 풀리셨길 바랍니다. ^^

 

 

 

 

 

 

 

1.
(문학동네판 64~66쪽)

“최근 여기에 세키네 쇼코라는 사람이 찾아온 적이 있습니까?”
청년이 눈동자를 굴리며 기억을 더듬는 표정을 지었다.
“세키네 씨요?”
“네. 이름 한자는 1장, 2장 할 때의 장章에다, 그 뭐냐, 삼수변을 거꾸로 한 것 같은 부수가 붙은 겁니다만.”
“아하, 후지와라 쇼시의 쇼彰 말이죠?”
어느새 통화가 끝났는지 여자 사무원이 말했다.
“후지와라 미치나가의 딸이자 이치조 천황의 왕비였던 쇼시.”
“더 모르겠는데요.” 청년이 혼마에게 미소를 지었다. 혼마가 허공에 글씨를 써보였다.
“맞아요, 그거예요.” 여자 사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쇼시라는 사람은 무라사키 시키부(*겐지 이야기의 작가-옮긴이 주)가 모셨던 왕비였던가요?”
혼마가 묻자 그녀는 미소를 머금었다.
“네, 맞아요.”
청년은 점점 더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더니 하던 일을 계속하려는지 커다란 서류첩을 펼쳤다.
혼마도 고전에는 매우 약했지만, 예전에 지즈코가 문화센터에서 ‘겐지 이야기 읽기’라는 강좌를 들은 적이 있어서 한동안 툭하면 그 얘기를 듣곤 했다.
“경쟁자인 데이시라는 왕비 곁에서는 세이 쇼나곤(*헤이안 시대의 여성 작가-옮긴이 주)이 시중을 들었죠? 당시 조정에 시대를 대표하는 두 재녀才女가 있었잖습니까.”
“그랬죠. 나중에 데이시의 생가인 나카노칸파쿠 가문이 허망하게 몰락해버려서 두 재녀의 처지는 완전히 달라졌지만.”
스스로도 별걸 다 기억한다 싶어 놀랐다. 지즈코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며 건성으로 대답하기만 했는데.
그 기억을 떠올리자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정신을 차리고 본론으로 돌아갔다.
“사진이 있습니다.”
주머니에서 세키네 쇼코의 이력서를 꺼내 사진만 보이도록 접어서 내밀었다. 다시 흥미가 생겼는지 청년이 일어서서 책상을 돌아 나왔다.
“……낯선 얼굴인데요. 최근에 왔던 사람들은 대체로 기억하는데.”
“저도 보여주세요.” 여자 사무원이 말했다. 청년이 혼마에게 이력서를 받아들더니 접은 상태 그대로 들고 가서 보여주었다.
“딱 봐선 모르겠네요. 우리 의뢰인이었던 분인가요?”
“오 년 전쯤에 미조구치 선생님에게 개인파산 수속을 의뢰했습니다.”
“오 년 전이면 제가 없었을 때군요.”
청년이 그렇게 말하며 이력서를 돌려주었다. 이번에야말로 자기가 더이상 쓸모없겠다는 표정으로 의자로 돌아갔다. 여자 사무원이 책상에 양 팔꿈치를 짚고 생각에 잠겼다.
“우리 사무실에 들어오는 의뢰의 90퍼센트 정도가 그런 일이라 내용으로는 판단할 수 없지만…… 이름은 기억이 나는 것도 같은데.”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장소이니 이렇다 할 반응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혼마는 이력서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쇼코, 쇼코라…… 흐음, 분명히 들어본 것 같은데……”
“보나마나 그때도 이치조 천황이 어쩌니저쩌니 했겠죠?”
청년이 놀리자 여자 사무원이 웃었다.
“그랬겠지. 드문 이름이잖아. 보통은 그냥 평범하게 아키코라고 읽지 않겠어?”
심각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덧니 있던 그 사람인가?”
이렇게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건 쇼코가 최근에 이곳을 찾아오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변호사에게 의지하지는 않았다는 건가.
그때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혼마 씨인가요? 이거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순간적으로 엉거주춤 일어서며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자, 정확히 눈높이가 일치하며 시선이 마주쳤다. 노인이 서 있었다.

 

 

2.
(문학동네판 82~85쪽)

그리고 지금, 혼마는 가즈야와 함께 그의 약혼녀가 살던 집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집의 공기는 혼마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냉랭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짧은 복도 왼쪽이 화장실과 욕실. 오른쪽이 조그만 부엌이었다. 벽 쪽에 냉장고와 그릇장과 전자레인지 받침대가 있고, 간신히 한 사람이 움직일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있었다.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스테인리스 싱크대는 얼룩 한 점 없이 반들반들하게 닦여 있고 만져보니 손가락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개수대 안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맥주 캔이 보였지만, 그것은 분명 가즈야가 지난번에 다녀갔을 때 던져놓은 것일 테다. 그 외에는 음식물 쓰레기 냄새도 나지 않고 전체적으로 매우 청결한 느낌이었다.
바깥바람 때문인지 환풍기 날개가 천천히 두 바퀴 돌고 멈췄다. 날개가 반짝거렸다. 혼마는 부엌에서 나왔다.
거실 역시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넓이는 다다미 여덟 장쯤 될까. 가로로 긴 직사각형 공간이고, 오른쪽 안쪽에 침대가 놓여 있다. 베개 위까지 커버를 끌어올려서 정돈해놓았다. 침대 헤드보드 부분은 작은 선반처럼 되어 있는데 거기에 둥근 갓을 씌운 스탠드와 문고본 두 권이 놓여 있었다. 『북미 나 홀로 여행』과 『최신 유럽 쇼핑 정보』. 두 권 다 기행물이지만 내용은 대조적인 듯했다. 표지가 휘어질 정도로 열심히 읽은 티가 나는 책은 『북미 나 홀로 여행』이었다.
침대 바로 옆에 원기둥 모양의 쓰레기통이 창 쪽으로 놓여 있었다. 이것도 안이 깨끗하게 비었다.
방에 본래 설치된 붙박이장 외에는 조금 큰 의류용 서랍장 하나와 조립식 책꽂이. 바퀴 달린 작은 서랍장 하나. 그리고 그 위에 무선 전화기가 올려져 있었다. 바닥에는 카펫이(감촉으로 보아 소재는 면 혼방이다) 깔려 있고, 둥근 원목 탁자와 그와 쌍을 이루는 의자 두 개도 보였다. 탁자 밑에는 옥수수 껍질로 짠 커다란 바구니가 있고, 그 안에 뜨다 만 스웨터와 뜨개바늘이 꽂힌 털실 뭉치 몇 개가 들어 있었다. 혼마가 그것을 손에 들자 가즈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주려고 뜬다고 했어요. 다음 달에 스키장에 갈 예정이었거든요.”
“스키를 갖고 있었나?”
가즈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란다 다용도실에 있습니다.”
창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가보니, 원래는 물건을 놔두면 안 되는 옆집과의 경계면에 통신판매 카탈로그 등에서 흔히 보이는 로커형 수납장이 놓여 있었다. 열어보니 새 스키와 스키 부츠가 든 커다란 케이스가 있었다. 양쪽 다 먼지막이 비닐 커버를 씌우고 셀로판테이프로 붙여놓았다.
“스키를 언제부터 탔지?”
어깨 너머로 묻자 가즈야가 곧바로 대답했다.
“재작년부터예요. 저랑 사귀고 나서 탔으니까. 저는 학생 때부터 탔지만.”
“그녀가 스키 도구를 갖춘 시기는?”
“그것도 재작년이죠. 처음에는 스키복만 샀고, 작년 여름과 겨울 보너스로 스키와 부츠도 마저 구입했어요. 같이 사러 가서 분명히 기억해요.”
그러고 나서 무척이나 중요한 얘기를 하는 표정으로 나지막이 덧붙였다.
“쇼코는 늘 현금으로 물건을 샀어요. 가게에서 할부를 권해도.”
혼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개인파산한 사람은 네가 알고 있는 ‘세키네 쇼코’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스키에는 ‘로시뇰’, 부츠에는 ‘살로몬’이라는 상표명이 보였다.
“이건 스키 용품 중에서 비싼 편인가?”
가즈야가 부츠 케이스를 살짝 만지며 말했다.
“그렇게 고급은 아니에요. 특히 조금 지난 모델들은 저렴한 편이고요. 새 모델도 한꺼번에 다 갖추긴 힘들지 몰라도 하나씩 사면 별로 부담되지 않죠. 초보자에게는 적당한 브랜드일 겁니다. 스키복은 ‘크레송’이었던가?”
그녀는 분에 넘치는 사치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부츠 케이스를 치워보니 뚜껑에 ‘가정용 공구세트’라고 적힌 상자가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고, 그 옆에 걸레로 꽁꽁 싸매둔 작은 병 하나가 있는 게 보였다. 손에 들기만 해도 코끝을 찌르는 자극적인 냄새가 났다.
“뭘까요?”
가즈야가 들여다보며 물었다.
“가솔린이야.” 혼마는 대답하고서 병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고작 오 분 정도 밖에 있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손끝이 곱았다. 베란다는 이웃한 맨션의 벽 쪽으로 나 있고, 사생활 보호 차원인지 칸막이 위에 가리개용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채광이 몹시 나쁠  것 같았다.
“빨래는 어떻게 했을까?”
베란다에는 조그만 건조대 하나 보이지 않았다.
“빨래방을 이용했어요.” 가즈야가 대답했다. “이 집에는 세탁기를 둘 공간이 없습니다. 빨래를 말릴 만한 곳도 없고, 게다가 1층이라 속옷을 널기 꺼려진다고 했어요.”
실내로 들어온 혼마는 의자를 꺼내 앉았다.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구도 커튼도 별다른 고급 제품이 아니다. 다만 서랍장만은 푸조나무로 만든 듯한, 값이 꽤 나가는 물건 같았다. 오래 쓸 물건이니 좋은 걸로 마련하고 싶어 큰맘 먹고 산 건지도 모른다.
“여기 월세가 얼마쯤 하는지 아나?”
몸통 부분이 완성된 스웨터를 펼쳐놓고 바라보던 가즈야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혼마가 다시 똑같은 질문을 했다.
“아, 네…… 육만 엔이 좀 넘는다고 했습니다.”
“싸군.”
좁고 햇볕도 잘 안 들고 경비실도 없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도쿄 도내인데다 아직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건물이다.
“땅주인이 상속세 대책으로 지은 건물인가 봅니다. 이익이 너무 나도 곤란하겠죠. 쇼코는 이런 집을 찾아내는 게 특기라면서 은근히 자랑한 적이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가즈야는 의아해하는 눈길을 던졌다.
“그런 건 왜 물어보시죠?”
혼마는 서랍장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조금 전에는 몰랐는데 살짝 비껴 서서 보니 정면 손잡이 옆에 덧칠한 흔적 같은 큰 얼룩이 보였다. 아마도 저것 때문에 가격이 깎였을 것이다.
이 집의 주인은 매우 합리적인 쇼핑을 할 줄 아는 여자였던 모양이다.

 

 

3.
(문학동네판 195~200쪽)

구리사카 가즈야가 이 이야기를 하러 집으로 찾아온 것이 월요일이다. 오늘은 금요일이니 이제 고작 나흘째다. 그런 단기간에 부상당한 무릎이 극적으로 회복될 리 없으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력의 문제다 싶었다.
재활치료는 일주일에 두 번으로 정해져 있다. 원칙상으로는 월요일과 금요일이니 오늘은 무단으로 빠지는 셈이지만, 다리 상태를 고려하면 그다지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미덥지 않은 프로그램에 따라 물리치료사에게 시달리는 것보다는 이렇게 돌아다니는 쪽이 훨씬 회복이 빠를지도 모른다고 열심히 자기정당화를 하는 스스로에게 쓴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또 전화해서 뭐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재활이라지만 병원에서 하는 건 아니다. 경찰병원에서 퇴원한 후 기능회복 트레이닝을 받는 게 어떻겠냐며 지인이 추천해준 스포츠클럽에 다니고 있는 것이다. 사립병원 몇 군데와 제휴를 맺어서 의사와 직접 연락을 취하며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해준다고 했다.
공립 사립을 막론하고, 도쿄 도내나 근교 의료기관은 하나같이 인력 부족과 자금 부족, 그리고 설비 부족으로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고민의 마지막 원인은 당연히 가파른 땅값 상승이다. 부지를 넓혀 건물을 증축하고 새로운 설비를 도입하려면 억 단위의 돈이 날아간다.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맨 먼저 포기해야 하는 재활시설 등은 외부 기관에 위탁하거나 제휴하는 추세인 모양이다.
혼마의 담당자는 올해 서른다섯 살이 된 오사카 출신의 여자 트레이너였다. 전국 규모 지점망을 가진 외식산업에 종사하던 남자와 삼 년 전 결혼했고, 남편의 전근 때문에 도쿄로 왔다. 인상도 좋고 소탈했지만 혼마가 굵은 땀방울을 뚝뚝 흘리며 낑낑거리고 있자면 카운터에 한쪽 손을 짚고 매정한 표정으로, “참말로 못 쓰겄네. 도쿄 남자는 이리 근성이 없다니까” 하는 밉살스러운 말을 툭툭 던지곤 했다.
뭐든 꿀꺽 삼켜서 곧바로 동화시켜버리는 도쿄라는 도시에 들어와도, 간사이 사람만은 신기하게 타고난 제 빛깔을 잃지 않는다. 간사이 사투리에도 강인한 생명력이 있다. 말끝이 이른바 ‘표준어’로 바뀌어도 억양만은 절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금세 간사이 출신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혼마는 그런 면에 일말의 동경을 품기도 했다. 자기는 도쿄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완전한 도쿄 사람이 아니고, 그렇다고 출신의 근거로 삼을 만큼 강렬한 ‘고향’의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도호쿠의 외딴 시골 마을에서 가난한 농가의 셋째아들로 태어난 혼마의 아버지는 스무 살 때 일자리와 먹을거리를 찾아 종전 직후의 도쿄로 나와서 경찰관이 되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도쿄로 나오고 싶어서 경찰관이 된 것이다. 당시 도쿄는 혹독한 식량 사정 때문에 지방에서 이주 오는 것을 제한했지만, 경찰관이 되겠다고 하면 무조건 옮겨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렇다 할 확고한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회 정의를 위해 열의를 다해 일한 것도 아니다. 먹고사는 일, 하루하루의 생활을 위해 경찰관이 되었다.
그럴 수도 있었겠다고 혼마는 생각했다. 그 당시 일본인은 그때까지 굳게 믿어왔던 대의를 잃고, 끈 떨어진 목각인형처럼 그저 망연히 주위를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추가로 나온 음식 접시를 받아드는 것 같은 가벼운 마음으로 선뜻 새로운 대의를 찾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일을 시작했을 당시의 심경을 그대로 연장시킨 듯 지극히 담담하게 경찰관 인생을 보냈다. 마치 그런 아버지에게 감화된 양 혼마 역시 경찰관이 된 것을 어머니는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이런 것도 핏줄 때문인가?” 살짝 불길한 것이라도 대하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자기가 고생하고 살아서 그런지, 며느리인 지즈코에게는 처음부터 이상하리만큼 동정적이었다.
“헤어지고 싶으면 망설일 것 없다. 사토루 키우면서 살아갈 정도의 위자료는 내가 대신 슌스케한테 받아서 줄 테니까”라고 당당하게 공언했고, 혼마는 그런 행동에 적잖이 분개했었다. 지즈코는 그럴 때마다 대개 그냥 웃어넘겼지만.
그런 부모님도, 지즈코도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세 사람은 모두 북쪽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고향이 같았고, 지즈코는 니가타의 폭설 지역 출신이었다. 그래서 혼마는 부모님 댁을 방문해서 잡담을 나누다가도 문득문득 자기 혼자 겉도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이중에서 ‘고향’의 기억이 없는…… 뿌리가 없는 사람은 나뿐이구나, 하고.
지즈코는 “당신은 도쿄 사람이잖아”라고 했지만 혼마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스스로를 도쿄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가정을 꾸린 지리상의 도쿄와, ‘도쿄 사람’ ‘도쿄 토박이’라는 말에 붙는 ‘도쿄’ 사이에는, 너무도 명백해서 정의할 필요조차 없는 차이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 차이는 예를 들면 ‘삼대가 잇달아 살지 않고서는 에도(*도쿄의 옛 이름-옮긴이 주) 토박이라 할 수 없다’는 식의 천박한 구분법에서 비롯한 것은 아닐 게 분명했다.
그 사람이 ‘도쿄와 피가 이어져 있다’고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 전적으로 그 한 가지에 달린 일이다. 그리고 그때의 ‘도쿄’는 ‘고향으로서의 도쿄’ ‘인간을 낳아 키울 수 있었던 도쿄’다.
그러나 현재의 도쿄는 더이상 인간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 있는 토지가 아니다. 땅의 기운이 사라지고, 비도 내리지 않고, 경작할 괭이도 없는 척박한 황무지다.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대도시로서의 기능뿐이다.
그것은 자동차와 매우 흡사하다. 제아무리 고급 사양에 성능이 뛰어나다 해도 사람이 그 안에서만 살아갈 수는 없다. 자동차는 타고 다니며 편리하게 사용하고, 이따금 정비를 맡기고 세차를 해주고, 수명이 다 되거나 질리면 새것으로 바꾸면 그만이다. 그것뿐이다.
도쿄도 그와 마찬가지다. 어쩌다보니 이 도쿄라는 차에 필적할 만한 성능을 지닌 다른 차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있더라도 개성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사용하게 된 것뿐이지, 본래는 언제든 갈아끼울 수 있는 부품 같은 것이다.
인간은 새것을 사서 대체할 수 있는 대상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새로 바꿀 수 있는 것을 고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도쿄에 있는 인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뿌리 없는 풀이며, 대부분은 부모, 혹은 그 부모의 부모가 가지고 있던 뿌리의 기억에 매달려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뿌리의 대부분은 이미 힘을 잃었고, 이들을 부르는 고향의 소리도 이미 쉬어버린 지 오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부초 같은 인간이 늘어만 간다. 혼마는 자기도 그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업무상 이 대도시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듣다가 상대의 말 속에서, 어미에서, 억양에서, 어휘 선택에서 그 사람의 ‘고향’을 또렷하게 추측하게 만드는 부분이 느껴질 때면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곤 했다. 무리지어 놀다 어느새 해가 지고, 친구들은 하나둘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자기를 불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정신을 차려보니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어린애 같은 심정이었다.
저녁 여덟시 삼십분. ‘라하이나’의 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맞아준 스무 살가량의 아가씨는 말투에서 어렴풋하게 하카타 억양이 느껴졌다. 그렇다, 규슈도 흡인력이 강한 토지다.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여기서 일할 때 세키네 쇼코는 고향 우쓰노미야 이야기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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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트리스 2012-02-07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지고 있던 시아출판사 판과 비교하며 봤는데, 이런 식으로 분량이 늘어난 거라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시아출판사 버전을 이미 읽은 사람이라면 굳이 개정판을 읽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건 진행과는 무관한 부분에서 분량이 늘어나 있어 속도감은 오히려 떨어지는 듯 합니다. 물론 또 사서 읽고 싶다면 말리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느낌일 뿐입니다. 미미여사의 작품이라면 국내 출간작 거의 모두를 읽었고, 일본소설도 좋아하는 편이지만 개정판에서 늘어난 부분들은 적어도 개인적인 흥미를 유발시키거나 '새로운 감동/재미'를 줄만한 것은 아닌듯 싶군요. 다만 늘어난 부분들이 '원서'에도 언급되어 있는 내용들인지는 궁금합니다.

비로그인 2012-02-08 11:2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문학동네 마케팅팀입니다^^

당연히 원서에 있는 내용들을 모두 번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완역본'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원서에 없는 문장이나 내용을 창작하지도 않았고 첨가하지도 않았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원문에 가장 가깝게 충실히 옮겼습니다.

소설을 번역하면서, 번역가가 보기에 스토리 진행상 별 지장이 없다고 판단되는
상황 묘사나 인물 및 심리 묘사는 번역가가 알아서 모두 생략하고
번역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구판인 시아출판사 판본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작가인 '미야베 미유키가 쓴 소설 그대로'를 온전히 맛보기 원하시는 분이라면
'완역본'을 찾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미미 여사가 괜히 분량을 늘리려고 "사건 진행과는 무관한 부분"을 썼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판에서 누락된 부분을 모두 되살리면 작품의 밀도나 깊이가 확연히 다릅니다.
재미와 감동의 깊이가 다릅니다.
미미 여사의 깨알 같은 캐릭터 묘사법을 떠올리신다면 상상이 가실 듯합니다.


문학동네의 책소개를 발췌해서 남겨놓겠습니다^^

"기존 번역본에서 빠지거나 축약되었던 부분을 최대한 원문에 가깝게 되살려낸 결과 원고지 500매 정도의 분량이 추가된 완역본으로, 미야베 미유키 특유의 인간적이고 세심한 필치, 치밀한 구성력을 한층 생생하게 맛볼 수 있다."

감사합니다.

리아트리스 2012-02-07 22:38   좋아요 0 | URL
처음 원고지 500매 분량이 추가되었다는 홍보 문구를 봤을 때 깜짝 놀랐죠. '화차'는 제가 읽은 미미여사 작품 빅3에 들 정도로 애정이 가는 작품이었는데, 이전 작품에 없었던 500매 분량이 추가되어 '완역'이 나왔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죠. 그 대단한 '화차'가 500매가 빠진 것이었다니!!
저는 시아출판사 판에서 크게 누락된 어떤 '새로운 내용'이 이번 개정판에서 되살아나는줄 알았습니다. 때문에 출판사에 문의도 했구요. 공개된 부분만으로 속단하기엔 성급한 감도 있겠지만 출판사측 답변과 위의 개정판 일부를 본 느낌을 종합해보니 역시 '새로운 내용'의 추가는 없고, 다만 원문을 보다 더 정확히, 더 상세하게 풀어서 번역했을 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늘어난 500매 분량이 개인적인 기대치와 어긋난데에서 오는 실망감은 어쩔 수 없더군요.
아무튼 '화차'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니 개정판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길 바랍니다.

비로그인 2012-02-08 10:51   좋아요 0 | URL
독자분들의 문의가 많아 알라딘 MD님의 블로그에 일부 내용을 발췌해서 소개했습니다.

(스포일러 우려로 스토리 진행상 중요한 부분은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미미 여사의 소설 원문에 가장 충실하게 번역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 작가님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셨다고 하시니,
'인물', '사건' 등 원고지 500매 분량이 그것들과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제 곧 출간될 <화차>, 많이 아껴주세요(__)

감사합니다!

whywhowhy 2012-02-07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2는 부가적인 부분이니 그렇다치고, 3 같은 경우는 시아판에선 아예 숭덩 빠져 있군요.
윗분 말처럼 줄거리 진행에 꼭 필요한 부분은 아니지만(그래서 저를 비롯한 많은 독자들도 지금껏 시아판을 읽으면서 별로 이상한 점을 못 느꼈던 거겠죠) 원래는 없던 주인공 혼마의 개인적인 회상이나 과거 이야기가 나오니 캐릭터 이해에는 확실히 깊이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부분이 더 있는지도 궁금하고요.
또 하나, 시아판에는 '구리자카' 가즈야였는데 여기선 '구리사카'로 바로잡혀 있네요. 시아판 읽으면서 좀 거슬렸던 부분이라 고쳐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내용 진행과는 상관없는 부분이지만요 ㅎㅎ

루이 2012-02-08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어 번역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흥미롭게 살펴보았습니다. 구판 번역은 좋게 말하자면 군더더기(?)를 걷어내 속도감을 살린 것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별 이유 없이 군데군데 가위질을 해서 독자의 읽을 권리를 침해한 셈이 되겠네요. 역자 판단으로 가독성을 위해 원문의 문장을 함축적으로 바꿀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문단별로 통째로 들어내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의도가 어땠든 불성실한 번역이라는 인상을 주게 되니까요.
갠적으로 미미 여사의 소설은 이런 사소한 부분들이 모여 하나의 큰 그림을 그려내는 데 진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물론 전체 스토리 전개와 메시지성도 중요하지만) 문학동네 쪽 번역에 손을 들어주고 싶네요.

VANITAS 2012-02-11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역서는 완역을 기본으로 해야 맞는거죠..출판사로서는 당연히 마케팅에 활용하는게 맞는거고요. 하지만 완역본이라도 번역의 질이 떨어진다면 칼질당한 번역이랑 다를 바 없겠죠.

tsjif 2012-02-14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아출판사 정말 괘씸하네;;아니 그럼 평역이라고 명시하던가 책 앞 부분에 명시를 하던가. 판권 계약할때 축약한다는 말이 들어가긴 했을지..이거 국내에 발매되는 해외소설들중 이런 책들이 많을까봐 겁나네요.

초콜리토 2012-02-2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화가납니다. 전 그게 그냥 다 완역본인줄 알았어요. 책을 또 사서 읽어봐야하나요? -_-;;; 읽는 것은 좋지만, 왠지모르게 거짓덩어리의 책을 갖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순식간에 들었어요.(물론 이건 좀 과장된 표현이겠지요)
 

 

 

4페이지 미스터리 연재 4화 

능숙한 거짓말


  
경찰서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십 분 정도만, 이라는 말을 듣고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 들어온 사복형사는 멋대로 베란다로 통하는 창문을 활짝 열고는 길 맞은편에 있는 아파트를 가리켰다.  


“피해자인 오무라 키리 씨는, 이 맞은편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 6층에서 유일하게 불이 들어와 있는 방입니다.” 형사는 일단 입을 다물고 내가 이해했는지 확인하듯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베란다 보이시죠? 그저께인 8월 3일에 피해자는 저곳에서 밀려 떨어졌습니다. 거의 즉사였다고 합니다. 검시 결과 사망 추정시각은 오후 아홉시 전후. 딱 이맘쯤입니다.”  


“거기에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맞은편 아파트 주민은 한 사람도 모르는데요.”
 

“그렇게 짜증내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너무 더워서 거의 잠을 못 잤습니다. 에어컨을 틀면 바로 감기가 들어서 틀 수도 없고.”
 

몸을 비틀자 허리 부근에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형사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수면부족입니까? 피곤하신데 죄송합니다만, 사건 해결을 위해 부디 협력해주시길 바랍니다.” 뭐, 금방 끝날 겁니다, 라고 형사는 달래듯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뭘 알고 싶으시죠?”
 

“이 집에서는 피해자의 집 베란다가 훤히 보입니다. 혹시 당신이 사흘 전 아홉시 무렵 이곳에 있었다면 사건에 관련된 뭔가를 보지 않았을까 해서요.”
 

“그 시간이라면 집에 돌아왔을 무렵일 겁니다. 여덟시 사십분 경일까요. 요즘은 일이 줄어 거의 잔업이 없으니까요.” 솔직하게 대답했다. 거짓말한들 보강수사에서 밝혀질 것이다. “돌아오자마자 창문도 커튼도 열었지만,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샤워를 했는지도 모르겠군요.”
 

“샤워할 동안에도 창문은 열어두셨겠죠?”
 

“열대야였으니…… 아, 비명 같은 걸 듣지 못했느냐는 질문인가요?” 기억을 더듬는다.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들리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제 기억엔 아무도 비명 같은 건 지르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비명을 들은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 빈틈을 찔렸다든가 공포에 질려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거겠죠.”
 

“밀어 떨어뜨리기 전에 범인이 기절시켰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럴 수도 있죠.” 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첩에 메모했다. “그 밖에는?”
 

“그렇게 물어보셔도, 지금 제 말은 그냥 상상일 뿐입니다. 그런 광경을 본 것이 아닙니다.” 그 점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만약 범인이 붙잡혀서 내가 목격자였다는 게 알려지면 큰일이다. “정말로 아무것도 못 보고 듣지도 못했습니다.”
 

형사는 난처한 얼굴로 한동안 수첩을 뒤적이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혹시 범인 쪽에서 당신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불을 켜셨습니까? 당신이 이 방에 있는 동안에는 범인도 범행을 시작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왜냐하면…… 보세요, 훤히 보이니까요.”
 

“훤히 보이나요?” 몰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기둥에 난 구멍은 그날 저녁 내가 갈고리를 걸었던 흔적이지만, 눈에 띄지 않아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번에는 안쪽의 부엌을 쓱 바라보며, “하지만 샤워한 뒤에 설거지를 했으니까, 밖에서 부엌은 보이지 않을 텐데요”라고 말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렸습니까?”
 

“샤워에 십 분, 설거지에 십오 분일까요.”
 

“이십오 분입니까. 시간을 봐서는 충분하군요.”
 

이십오 분? 일 분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날 밤, 정결하게 몸을 씻고 난 뒤 여기서 목을 맬 때까지 몇 분이 걸렸을까. 몇 번이나 망설인 것 같기도 하고, 담담히 준비를 진행했던 것 같기도 하다.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내가 디딤대를 찬 순간에 로프를 걸었던 갈고리가 빠져서 바닥에 꼬리뼈를 정통으로 내리찧으며 떨어졌다는 것이다. 목에 로프를 감은 채 괴로워하며 바닥을 굴러다니다가, 문득 바깥에서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 베란다에 그 여자가 서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다음 순간,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면서 내게서 등을 돌렸다. 어깨가 들썩였다. 웃고 있는 것이다. 나를 비웃고 있는 것이다.
 

저 여자는 지금 본 것을 모두에게 퍼뜨리겠지. 그렇게 되면 나는 끝장이다. 이제 와서 자살해도, 꼴사나운 소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겠지.
 

저 여자를 죽여서 입을 봉할 수밖에 없다. 정말로 그렇게 결심하려던 그때, 구원의 신이 나타났다.
 

여자의 집 안에서 건장한 남자가 베란다로 나와서 웃고 있는 여자의 급소에 주먹을 날려 기절시키나 했는데, 그대로 안아 올려서 난간 밖으로 떨어뜨렸던 것이다.
 

단 일 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유일한 목격자가 죽은 것을 깨달을 때까지, 일 분보다 조금 더 걸렸다.
 

자신이 치욕에서 구원받았다고 깨달았을 때의 강렬한 해방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몇 년이나 괴로워해왔던, 죽음을 바라던 우울한 기분조차 날아 가버렸을 정도였다.
 

살인자는 문자 그대로 나의 은인이었다.
 

그래서 형사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건장한 남자라는 것밖에 몰랐지만.
 

“거짓말이 서툴군.” 형사가 고개를 저었다. “얼굴에 다 드러나잖아.”
 

낯익은 주먹이 내 배에 작렬했을 때, 나는 능숙한 거짓말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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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e12 2011-10-04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일간 다섯편의 단편 공개라고 하셨는데 아직 4개밖에 올라오지 않았네요ㅠㅠ 마지막 한 편은 언제 올라오나요?

외국소설/예술MD 2011-10-05 15:30   좋아요 0 | URL
아 네 요게 연재가 좀 늦어져서, 다음주에 공모전 1차 심사평과 함께 올릴 예정입니다. ^^

달사르 2011-10-13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처음 등장인물을 유심히 봐야겠군요. 4페이지 미스테리여서 흘낏 봐서는 끝에 가서야 정황이 이해되니까요. 처음부터 조목조목, 찬찬히 읽어야 후반부에 겨우! 범인을 알겠네요.

아..이번에도 역시나 다 읽고나서야 범인을 알았네요. 하하. 재미있군요.
 

 

4페이지 미스터리 연재 3화- 

복면의 의뢰인 

 

  설마 무죄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에게 손을 댄 것은 사실이다. 물론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흥분하는 그녀를 달랠 생각이었는데도 결과적으로는 그 행동으로 그녀는 목숨을 잃었다.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사건에 대해서 나름대로 변명할 말은 있었지만, 결국 "제가 했습니다"라고 인정하는 말만 하고 이후로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해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국선변호인은 나보다 나이가 어려서 여러 모로 못미더웠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는 사형 판결이 내려져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뒤로 의외의 국면이 전개되었다. 사정상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녀에 관한 '비밀'이나 '증거'가 차차 발견되었고, 그것을 근거로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진상'이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그러더니 "먼저 손을 댄 것은 그녀이고 나는 자기 몸을 지킨 것뿐이다"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내가 일절 변호하지 않았던 것도 그녀를 감싸는 것으로 해석되어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유죄를 주장하려던 내게 변호사가 말했다. 

  "당신을 무죄로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보수 없이 협력해 준 줄 아십니까? 그 사람들의 노력을 헛수고로 돌릴 셈입니까?" 

  어째서인지 나보다 더 내 목숨을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까지 생각해준다면, 하고 생각하니 조금 더 살아보자는 의욕이 솟아났다. 

  하지만 누가? 변호사에게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았다. 유일한 혈육인 형도 몇 안되는 친구들도 모른다고 했다. 

  "'그 사람들'에게 절대로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변호사는 말했다. "무죄 판결을 받은 뒤에 직접 당신에게 인사하러 갈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판결 후 한동안은 매스컴의 취재가 이어져서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하는 듯한 '그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얼마 후 일단락되었다. 슬슬 뭔가 연락이 와도 괜찮을 시기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사건과 판결을 연극으로 상연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계속 구치소에 있다 보니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전혀 모릅니다." 

  나야말로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어떤 방법으로 그런 '진상'을 날조하고, 그 '증거'를 모았는가. 그리고 그런 일을 한 동기는 무엇이었나. 

  "당신에게만 협력을 의뢰한 것은 아닙니다. 다방면으로 취재하고 있습니다." 극단의 대표라고 말한 남자는 듣는 사람을 안심하게 하는 깊이있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다만 작품에 리얼리티와 긴박감을 주기 위해서는 사건의 당사자인 당신이 피부로 느낀 인상이 꼭 필요합니다." 

  가능하면 각본 단계부터 협력해주기를 바란다. 의논차 한 번 만남의 자리를...... 그런 말에 흥미를 느낀 나는 극단 사무소를 방문했다. 번화가의 구석에 있는 상가 빌딩의 3층이었다. 

  나를 맞이한 사람은 전화를 받은 대표까지 포함해 일곱 명이었다. 성별도 옷차림도 제각각이지만 어째서인지 전부 레슬러처럼 복면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연습을 하고 있어서요." 법정 장면은 너무 단조로워질 수 있으므로 검찰 측과 변호 측의 공방을 프로레슬링에 빗대어 표현할 생각이라고 대표는 설명했다. 

  "재미있어 보이는군요." 

  복면으로 '정체를 가린다'는 것에 연상되어서 나는 문득 이렇게 말했다.

  "아십니까? 실은 이 사건의 숨겨진 주역도 어떤 의미에서는 복면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더라도 누구 한 사람도 놀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변호사와 취재를 끝낸 것일까? 아니, 그게 아니면. 

  "...혹시 당신들이 그 봉사자들, '그 사람들'입니까?" 

  "그렇습니다." 대표는 간단히 인정했다. 

  나는 눈앞의 일곱 명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들이 내 생명의 은인인가. 

  "감사합니다." 나는 말했다. "저 같은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해주시다니." 

  "감사는 필요 없습니다." 대표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했을 뿐입니다." 

  자신들을 위해? 무슨 소리일까. 

  문득 엉뚱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혹시 '그 사람들'은 극단이 아니라 수상한 종교집단이 아닐까? 내 몸을 산 제물로 바치라고 '신탁' 같은 것을 받았다든가... 

  지나친 생각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머리에서 떨쳐냈다. 

  "한순간이지만 무서운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농담처럼 말했다. "석방시킨 뒤에 장기라도 빼내려던 게 아닐까 하고요." 

  "설마요. 그런 것은 전혀..." 

  "네 장기 따윈 줘도 안 받아." 대표의 말을 이제까지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한 남자가 가로막았다.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무죄가 되도록 공작한 건 검찰이 사형을 구형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복면을 벗었다. 죽은 그녀의 아버지였다. 

  "어중간한 징역형 따윈 시간 낭비야. 나올 때까지 우리가 못 기다려." 

  나머지 여섯 명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을 느낀 나는 의자에서 일어서려고 했지만, 그들 쪽이 빨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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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10-13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역시나 이번에도 전편과 연결이..

이번 화는 끝까지 읽고서야 겨우 이해했네요. 볼드체를 보면서도 이해를 못하고, 그저 딸을 죽인 사람까지 구제해주는 마음이 넓디 넓은 아버지구나..했더니..하하..아니었군요!
 

 

4페이지 미스터리 연재 2화

냄새 나나요?

 

출장에서 돌아와 아파트의 홀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비상계단에서 몸집이 작은 남자가 나왔다. 관리인인 소 씨다. 더러운 형광등을 들고 있었다.

“이가미 씨, 지금 오십니까?” 소 씨는 붙임성 있는 미소를 보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형광등을 교체하셨나 봐요? 고생 많으십니다.”

“마침 예비 형광등이 다 떨어져서 골목의 편의점까지 갔다 왔지 뭡니까.” 소 씨는 땀을 닦았다. “오늘은 아직 여덟시니까 그나마 나은 편이죠. 요전에는 새벽 두시에 전화가 걸려왔으니까요. 복도가 어두워서 위험하니까 당장 새것으로 바꿔달라더군요.”

그렇게 말하면서 지나가려던 소 씨가 문득 내 옆에 멈춰 서서 코를 벌름거렸다.

“어라, 좋은 냄새가 나는데요. 기분 좋은 일이 있었나 봅니다.”

가슴이 덜컹했다. 실은 스케줄을 잘 맞춰서 여자를 만나고 온 참이었다. 게다가 상대인 타카코는 이 관리인의 부인이다. 일단 손은 써두었지만…….

“역시 냄새가 나나요?”

“걱정 마세요. 정말로 ‘좋은 냄새’니까요. 전혀 퀴퀴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향기롭죠. 불고기 소스와 기름과 연기 냄새…… 이 소스라면 가게는 ‘노스리’겠군요.”

소 씨는 근처의 불고깃집 이름을 댔다.

그렇다면 작전대로이군,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바로 맞히셨군요. 돌아오던 길에 잠깐 들렀습니다.” 나는 입고 있던 양복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그건 그렇고, 정말 대단한 후각을 지니셨군요. 어떻게 냄새로 가게 이름까지 알 수 있죠?”

“좋아하거든요, 한국요리를……. 하지만 제 집사람이 고기를 싫어해서 요즘엔 거의 들르지 못했어요.”

“제 집사람도 김치 같은 음식을 전혀 입에 못 댑니다. 그래서 결국 혼자서…….”

소 씨의 부인인 타카코와 만난 뒤, 혼자서 불고깃집에 간 것은 향수나 체취 같은 흔적을 없애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만난 상대가 고기를 싫어하는 타카코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한 심리적인 위장을 하는 의미도 있었다.

게다가 아내가 김치에 거부반응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현재 임신 4개월째라서 입맛이 평소와 달라져 있는 탓이다.

그래서 오늘의 나는 출장을 빌미로 평소에 집에서 먹을 수 없는 한국요리를 맛보았다……라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소 씨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들었을 때는 역시나 당황했지만, 아무래도 이 남자는 후각만 예리할 뿐 다른 감각은 완전히 먹통 같아 보인다.

마음의 여유가 생긴 나는 그제야 소 씨의 오른쪽 팔꿈치에 갓 생긴 듯한 지렁이 같은 흉터 몇 줄을 보았다. 자기도 신경이 쓰였는지 소 씨는 손끝으로 상처를 쓰다듬었다.

“긁힌 건가요, 그 상처?”

그렇게 물어보자, 소 씨가 한순간 날카롭게 나를 쏘아보았지만, 곧바로 너털웃음을 지었다.

“네, 그 고양이가 좀…….” 소 씨가 말한 것은 이 아파트를 근거지로 삼고 있는 얼룩고양이를 말한다. “사람을 잘 따르면서도 발톱이 날카로워서 참 난감하지요. 잠깐 방심했는데, 아까 할퀴어서…….”

아무래도 길고양이 같지만, 꽤 깔끔하고 애교가 있어서 다들 이 아파트의 마스코트처럼 여기고 있었다.

“귀엽게 생긴 녀석이라 자기도 모르게 다가가고 싶어지죠.” 대강 말을 맞춰주고 있는데 간신히 엘리베이터가 내려왔다.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옆을 지나갈 때, 다시 소 씨가 코를 벌름거렸다.

“오, 오, 오…… 고구마 소주도 드셨군요. 이 향기는……‘십억 년의 축제’인가요.”

분명 나는 아연실색하며 그 자리에 못 박혔을 것이다. 소 씨는 부끄러운 듯이 손사래 쳤다.

“아뇨, 우리 집사람이 좋아하는 술이어서 알고 있던 것뿐입니다. 딱히 이가미 씨에게 술 냄새가 난다는 말은 아닙니다.”

“……정말이지, 텔레비전에 출연하셔도 되겠네요, 그 코.” 나는 정신을 차리고 4층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나는 목덜미의 땀을 닦았다. 설마 타카코와 함께 마신 술까지 알아맞힐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위험했다, 위험했어. 더 조심해야 한다.



집의 문을 열자마자 강렬한 카레 향기가 코를 찔렀다.

“어서 와요.” 앞치마 차림의 동글동글한 아내가 맞아주었다. “오랜만에 카레를 만들었어요.”

포옹하고는 키스를 기다린다. 출장 기간 동안 상당히 외로웠나 보다.

“불고기를 먹어서 냄새가 날 거야.”

“이젠 괜찮아요. 안정기에 들어가서 그런가?”

아내의 손가락이 내 등과 팔을 더듬을 때, 장미 형태를 한 반지가 내 오른쪽 팔꿈치를 긁었다. 아프니까 빼라고 몇 번을 말해도 행운의 반지인데 무슨 소리냐며 아내는 통 말을 듣지 않는다.

“저기, 그 얘기 알아요?” 아내가 말했다. “아파트의 주인처럼 굴던 얼룩고양이 있잖아요? 그 고양이, 그저께 죽었어요.”

“……그저께?”

“네. 관리인 아저씨의 부인이 정원에 묻는 모습을 봤어요.”

아내의 두 팔에 다시 힘이 실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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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10-13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1화와 2화가 소재만 연결되어 전혀 다른 내용으로 넘어가는군요. 와..이런 식의 연결이라니요. 대박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