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여행 에세이의 홍수. 여행기가 이렇게 쏟아지는 이유인즉, '겨우 이 정도 이야기도 책으로 나오니까 당신도 잘 할 수 있을거야'라고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한 출판업계의 대국민 용기백배 캠페인. 일 리는 없겠죠. 어쨌거나 좋은 책은 그저 자기 때에 맞추어 나오게 마련입니다. 네. 근성 넘치는 한길사에서 이병훈 교수의 두 번째 러시아 기행문이 나왔습니다. 

 

<백야의 뻬쩨르부르그에서> 이병훈 지음 

 벤치 뒤로 볼품없는 들개 한 마리가 지나간다. 이름이 뭘까. 꽤 지친 모습이다. 먹을 걸 구하러 공원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검은 털이 듬성듬성 빠진데다 다리를 절뚝인다. 뒷모습은 영락없는 술주정뱅이다. 개는 구석을 기웃거리다 사내가 누운 벤치로 다가온다. 누워 있는 사내 몸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는다. 먹을 게 아니다. 개가 물러가고 벤치 주위에는 잠시 고요함이 깃든다. 

p.322  

기행문에는 글쓴이가 해당 장소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는 척도가 있습니다. 곳곳에 얽힌 역사와 사연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어 보이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뽑아내는가죠. 이 두 가지 특징은 그 자체로도 좋은 정보가 되며, 그 풍요로운 발걸음과 숨길 수 없는 애정을 통해 책을 읽는 맛도 함께 안겨줍니다. <백야의 뻬쩨르부르그에서>는 이 두 가지 요소를 잘 갖추고 있습니다. 유명 장소에서는 그에 얽힌 역사를 풀어놓거나 연관된 예술 작품을 소개하며, 틈틈이 거리와 공원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풍경들의 스케치도 빠지지 않습니다.

러시아 박물관을 소개하는 챕터를 볼까요. 기행문이 러시아 대표 화가들을 소개하는 장으로 바뀌고, 이는 또 그림들을 매개로 다른 예술 작품들을 하나둘 불러옵니다. 예를 들면, 1. 일리야 레삔에 다다라서는 까자끄 인의 호방함에 대해 얘기하다가 고골의 <대장 불리바>로 넘어갑니다. 2. 도부쥔스끼의 도시 풍경화 이야기는 곧 그가 삽화한 소설로 넘어가는데, 그 소설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죠. 이어 바로 <백야>의 한 장면이 인용됩니다. 주인공이 나스쩬까를 만나 들려주는 음울한 뻬쩨르부르그 이야기죠. 3. 제가 좋아하는 레비딴의 그림에는 '잘 어울리는 시'로 뿌쉬낀의 <비구름>을 수록했습니다. 저는 이런 방식이 딱딱한 인물 소개보다 훨씬 '여행가'의 흥취에 걸맞는다고 생각해요. 보고 떠오르고 느끼는 것. 연상의 연속. 여행자들을 위한 책은 이런 방식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의 인상이 다른 것들을 불러들이고, 그것들이 겹쳐 풍부한 양감을 안겨주는 경험 말입니다. 산책을 하더라도 라스꼴리니꼬프의 발자취를 떠올리며...(네, 알라딘의 로쟈 님이 아닙니다 ㅎㅎ)

가끔 뜬금없이 고골이나 뿌쉬낀의 1인칭 시점이 되어 글이 진행되기도 하는데, 이것도 나름 재밌습니다. 중년 학자다운 여행자의 치기어린 몽상이랄까 로망스랄까 ㅎㅎ. 사실 이 책은 미스테리 기행문이기도 합니다.;;; 소냐라는 정체불명의 여성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남자의 이야기거든요. 물론 정말로 저자가 여자의 환상을 보거나 뿌쉬낀이 빙의되지는 않았겠지만, 이 '업된 기분'만큼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행지에 가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아시겠죠. "마치 나도 뿌쉬낀이 된 것 같았다"라고 쓰는 것보다는 멍하니 공원에 앉아 자신이 뿌쉬낀이 된 양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쪽이 훨씬 여행자다워 보이니까요. 아무래도 이런 감상적인 부분들은 박학다식한 해설의 매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저 솔직하고 대책없는 멜랑콜리는 단순히 1차원적인 기분만 늘어놓은 평범한 여행기의 소회들보다 훨씬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아, 읽을 때 주의하실 점이 있어요. 이 책을 가이드북으로 써먹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기행문의 리뷰들을 보면 그런 얘기가 많지요. 실질적으로 여행에는 도움이 안된다거나 운운. 비록 최근 국가 대세가 실용이긴 하지만, 가이드북도 아닌 기행문에다가 왜들 그리 실용을 원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장 그르니에 책에는 그런 리뷰 없던데... 어쨌든 가이드북을 원하시는 분들은 패스.

문학, 그림, 음악(쌍뜨 뻬쩨르부르그 필하모닉이랑 차이코프스키가 한 챕터를 차지합니다) 등등 각종 예술을 사랑하시는 분들께 문화의 도시 뻬쩨르부르그의 매력을 알려드릴 책입니다. 별다른 가이드도 가이드북도 없이 여행하기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길잡이 역할까지 맡아줄지도 모르지요. 아마 제가 뻬쩨르부르그에 가게 된다면 이 책 한 권 들고 가지 싶습니다. 저도 오레쉐끄의 요새 구석에 앉아 이 책에 함께 소개된 가르쉰의 <붉은 꽃>을 읽고 싶어요.

그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고, 사물의 내력을 남김없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병원 뜰의 커다란 느릅나무는 지난날의 갖가지 전설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실제로 꽤 오래전에 지은 이 건물을 그는 뾰뜨르 대제의 건축물이라고 생각했고, 대제가 뽈따바 전쟁 당시에 이곳에서 살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이 사실을 뜰에서 발견한 허물어진 벽과 벽돌, 타일 조각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거기에 건물이나 정원의 역사가 낱낱이 씌어 있는 것이었다. (...) 그는 시체실 지하실에서 마당 한구석으로 나 있는 작은 창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무지갯빛이 나는 낡고 더러운 유리에 비치는 흩어진 빛의 반사를 통해 언젠가 살면서 혹은 초상화에서 본 적이 있는 낯익은 모습을 발견했다. 

p.478 (가르쉰의 <붉은 꽃> 중 일부) 

 

 또다른 주목할만한 신간들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우리에게도 멋진 (근현대) 미시사 책이 있다면! 이라고 외치시는 분들께 이 책을 뒤늦게 소개드려 죄송하다는 말씀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1세대 아파트들이 품고 있는 근대성의 내외를 탐색하는 시선이 교양서의 수준에서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이제 대부분이 사라졌거나 곧 사라질 예정인 1세대 아파트들에게서 발견하는 특성들은 곧 서울 근대화의 흔적으로 치환되는데요. 재미있는 점은 그 특징들이 아파트마다 제각각이라는 겁니다. 주로 일방적이고 획일화된 과정으로 기억되는 산업 근대화의 시기에 얼마나 다양한 색깔과 변용이 있었는지, 그 디테일을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미시사의 미덕이겠지요.  이 1세대 아파트 이야기는 어느새 단순한 건축사가 아니라 서울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역사의 흐름, 주민들의 계급과 살아가는 방식 등이 함께 어우러진 묘한 잔치판으로 변해 있습니다. 도시 근대화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 즉 '삭막한 획일화'를 뛰어넘어 사람들의 '삶'이 보여집니다. 강력히 추천드리는 바, 사진들도 멋지게 찍어 놓아서 보기에도 좋아요. 이 책이 제일 위에 소개되지 못한 건 순전히 타이밍을 놓친 제 탓입니다...

<김시광의 공포 영화관>- 호러물 리뷰로 유명한 파워블로거 김시광 씨의 공포영화 이야기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영화들은 대개 이름이 있는 영화들이고, 각 꼭지가 짤막한데다 내용도 쉬운 편이어서 매니아분들은 불만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훌훌 넘어가는 공포영화 이야기라니 방앗간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들의 수효는 제법 많을 걸로 예상됩니다. 특히 입문하시는 분들께는 좋은 가이드북이 되겠네요. 영화를 골라 소개하는 본편 외에 호러물의 간략한 역사나 저자가 뽑은 명감독들, 걸작 100선 등의 보너스(?)들도 흥미로워요. 여러모로 '무서워하고 웃고 떠들고 즐긴다'의 모토에 걸맞는 즐거운 공포영화 탐방기입니다. 남녀노(소는 안됩니다. 19금 많음) 모두 즐기실 수 있어요. 간만에 어깨 힘 뺀 책 소개드리는 것 같네요.;; 

<한국미술의 원더풀 리얼리티>- 비평집...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런데 여타 국내 비평가들의 한국 미술 담론에 비하면 어딘가 사적이고 내밀한 느낌이 있습니다. 글쎄요 딱 집어서 얘기는 못하겠습니다만, 메타 비평(이는 곧 자기집단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니까요)에 대한 글이라거나, 최근 미술계의 경향에 대한 분석 같은 것들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론이라는 도구로 각 작품의 개별적 분석에 임하기보다 작가의 어떤 경향이나 흐름을 추적하지요. 이는 곧 '누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접근입니다. 하여 현대미술을 억지로 '고전미술처럼 관람 가능한 것'으로 해설하려 하기보다는 그 작업들을 하나의 관점과 태도의 결과물로 설정함으로써 작가와 독자/관객과의 대화를 시도하게끔 하는거죠. 최근 나온 그 어느 현대미술 책보다도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많이 거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가 아닌가 합니다. 제목의 센스는 아직도 의문이지만(-_-;;), 추천할 수 있는 '지금 여기'의 예술 시론입니다. 

<아티스트를 위한 멘토링>- 예술가 지망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책. 이 아닙니다. 책 도입부에 피카소가 라스코 고분 벽화를 보면서 "우린 아무것도 한 게 없어" 라고 읊조렸을 때, 거기에 함께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셨다면 책을 읽는 내내 거장들의 높은 세계를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플지도 몰라요. 굳이 결론을 찾자면 하나가 있습니다. 성공하느냐 마느냐 하는 방법론은 각자 천차만별이지만, 창작에의 욕구는 거의 숙명인양 거부할 수 없었다는 것. 보고 있으면 거의 신내림 수준입니다. 결국 뭔가 실질적인 도움을 받으려고 이 책을 펼치신 분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각각의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얘기를 하는 수많은 천재들이 막판에 떼창으로 한다는 얘기가 그러나 우리는 해야만 했지 라니요! 그러나 여기서 기운이 빠지면 안됩니다. 아직 꿈꾸고 있다면 신내림의 그날까지 준비해놓을 것들은 산더미처럼 많으니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책은 예술가 지망생들을 위로해주는 책이 아닙니다. 각성의 순간이 오건 오지 않건, 그날을 대비해서 자신을 구석구석 훑고 끝없이 정진하기를 요구하는 과제집입니다. 노력하는 사람이 늘 성공하지는 않지만, 성공한 사람이 노력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 빌 게이츠였던가...

 

광고말씀- 단독 이벤트! 알라딘에서 영화 책 아무거나 한 권 사실 때마다 인디스페이스(중앙시네마)에서 실시하는 중국 독립영화전 티켓을 한 장씩 드립니다. 친구랑 가시려면 두 권 사시면 돼요. 타르코프스키, 트뤼포, 히치콕, 짐 자무시, 코엔 형제 등의 감독들은 물론이요 수많은 영화사 책들과 시나리오와 기타등등에 대한 책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저 찬스라는 말씀밖에는... 

 

곧 여름입니다. 지쳐 쓰러지기 좋은 계절이지요. 누나 가슴에도 삼천원 쯤은 있는거지만, 겨우 그런 것에 흔들리지 말고 혼을 붙잡으세요. 아니면 예술에 대한 책 한 권 끼고 전시회에 가보는 겁니다. 퀄리티는 제각각이지만 열정만큼은 다들 보장할 만하니까요. 끼고 가실 책 구매는 알라딘에서 하시고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행복하세요.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니 2009-06-17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오늘도 추천입니다! 누나 가슴에 삼천원, 으흐흐.

외국소설/예술MD 2009-06-17 14:57   좋아요 0 | URL
고민이 많았어요. 해설을 따로 달아야 하나 하고..^^;;

흐느적 2009-06-17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단독 이벤트 멋진데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중국독립영화전이라니요. 아하하하;;

외국소설/예술MD 2009-06-17 14:5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보러 갈겁니다 ^^

futile_reading 2009-06-24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의 로쟈님인줄 알고 들어와봤다는... 잘 낚으시네요..ㅎㅎ

외국소설/예술MD 2009-06-24 17:22   좋아요 0 | URL
화려한 제목은 필수.. 일까요?(흠흠) 그런데 의도/음모에 넘어간 분은 아무래도 별로 없나봅니다 ^^;;

느린산책 2009-06-25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야의 뻬쩨르부르그에서','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 찜합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6-26 11:31   좋아요 0 | URL
그저 뿌듯합니다. +_+

일년열두달 2009-07-07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모스크바 갔다 왔는데 페테르 갈땐 이 책을 보고 가야겠군요! 누나 가슴에 삼천원...ㅋㅋㅋ

외국소설/예술MD 2009-07-08 13:11   좋아요 0 | URL
모스크바~ 부럽습니다!! 저도 꼭 가보고 싶어요. ^^
 

 

농담삼아 그의 기행문들을 하드보일드 여행기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서경식 선생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마음 편한 일이 아닙니다. 글이 어려워서는 아닙니다. 비록 번역문이긴 하나 문장은 깔끔한 편이고, 형이상학적인 용어도 잘 사용되지 않죠. 특히 <나의 서양미술 순례>나 <디아스포라 기행>처럼 기행문의 형식을 겸한 경우에는 그 자신의 감탄마저 조절하고 있습니다. 고저차가 느껴지지 않는 일관적인 글투. 야간 저공비행. 이 책은 단 한 순간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을 관통한 증거들을 살피는 그의 시선에서는 쉽게 흥분할 '수 없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아 온 사람 특유의 담담함만이 엿보입니다. 여기에서는 희망조차 어떤 가능성의 일부일 뿐입니다. 무너져내린 것들은 분명한 과거인 데 반해, 희망은 불완전한 담보에 불과하니까요. 보이는 것들만을 믿기에도 힘든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니, 있었다고 합니다. 


<꽃들과 함께 있는 폭탄 구멍> by 오토 딕스 

소위 '전쟁 제단화'로 유명한 오토 딕스가 가장 중요한 비중으로 다루어져 있습니다. 양차대전 사이에 자신의 시대와 싸워야 했던 독일권 화가들이 등장합니다. 우물쭈물하면서 사랑하는 고국을 버리지 못한 사람도 있고(에밀 놀데), 보란듯이 망명한 사람도 있고(조지 그로스), 1차대전 때 수 년을 복무한 뒤 다시 쉰이 넘어 2차대전에 징집된 사람도 있으며(오토 딕스), 이어지는 망명과 도주 끝에 결국 아우슈비츠에서 생을 마감한 유대인도 있습니다(펠릭스 누스바움). 이들이 등장하는 1부는 일관된 분위기가 유지됩니다. 독일-유럽이라는 어두운 그림자죠. 

흥미롭게도 이들 화가의 뿌리로 서술되는 두 화가는 카라바조와 반 고흐. 거부할 수 없는 내면의 열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점에서, 앞서 소개한 비극적인 시대의 화가들의 선배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컨셉트는 (비록 흥미로운 점이 있더라도) 어두움을 방문하는 저자의 단정한 태도만큼 인상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는 경악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지켜본 것들을 옮겨 씁니다. 경악스러운 것들조차 스러진 뒤에 그 땅을 밟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는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피곤해 보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피로야말로 역사에, 그 순간에, 어떤 진실에 가까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도자료와 언론 서평에는 주로 이 책을 어떻게/왜 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근대사의 특수성, 더불어 한국 (주류) 미술의 몰정치성과 같은 써먹기 좋은 주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진가는 그 분위기에 있지 않을까요. 역사가 주는 피로를 저버리지 않은 사람의 무덤덤함. 저는 근래 이렇게 인상적인 '참조' 안내 문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첫번째 사진(331쪽 맨 위)은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우크라이나에 있던 어느 장소이다. 구덩이를 파서 유대인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고 있는 영상이다. 물론 보도사진은 아니다. 이런 장면을 보도하는 일을 나치는 허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영상은 나치 측의 누군가가 다른 목적으로 찍은 것이다. 기록을 남기기 위해 찍은 것이거나, 아니면 일종의 도착된 취미 때문에 찍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 사진(331쪽 두번째)은 라트비아의 리예파야라는 장소에 집단으로 끌려온 유대인 여성들이다. 그녀들로부터 벗겨낸 옷들이 뒤로 산적해 있다. 그리고 총을 든 군인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이제부터 죽임을 당할 사람들이다. 죽임을 당할 운명을 예감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사람들을 이렇게 나란히 세워놓고 기념촬영을 했다. 누가 무슨 의도로 사진을 찍은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는 절망적일 만큼의 상상력을 요구하는 사진이라 생각된다. 

한가운데에 있는 여성의 얼굴로 알 수 있듯이, 앞의 사진에 찍힌 여성들이다. 마지막 속옷 한 장마저 벗고 완전히 알몸이 되었다.(331쪽 세번째 사진 참조) 

이 여성들이 죽임을 당할 구덩이 쪽으로 떠밀려 가고 있는 장면이다.(331쪽 네번째 사진 참조) 

구덩이 가장자리에 서서 당장에라도 사살될 듯한 사진이다.(331쪽 맨 아래 사진 참조) 구덩이 안에는 총에 맞은 시체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라트비아의 리예파야라는 지명만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현재 리예파야에 이런 사건을 기억하는 이가 있을 리 없다. 구덩이는 흙으로 덮여 아직도 그대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p.330-332

 

 <돌격대 독가스 공격> by 오토 딕스

 

 다른 신간들은 금주 내로 다시 소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함께 추천드리는 책들입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낙소스 2009-06-13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에서 서평봤는데 그 보다 이쪽 글이 훨씬 맘에 듭니다.
꼭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요.

외국소설/예술MD 2009-06-15 13: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신문의 글쓰기보다는 자유롭다보니 그런 것 같아요. 앞으로도 매체 서평하고는 조금씩 다른 분위기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

김현미 2009-06-17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좀 가져가도 될까요? 출처는 밝히겠습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6-17 14:55   좋아요 0 | URL
네 문제없어요. 대신 추천 하나 찍어주세요 하하

책사랑(지현) 2009-06-18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하나 찍고 가져갑니다. 얼른 주문도 마쳤답니다. 감사합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6-19 18:10   좋아요 0 | URL
제가 감사드릴 일이죠. 감사합니다. ^^
 

 

 

...그중 한 사람이 말해. "나는 점점 아버지처럼 되고 있어. (중략)"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말해. "나는 점점 아버지와 [다르게] 되고 있어. 나는 개가 되고 있어. 미래는 아마도 나를 추하게 만들 것이고, '가난한 생활'이 내 운명이야. 그러나 나는 인간이든 개든, 화가가 될 거야. 요컨대 감정을 가진 존재가 될 거야." 

...나는 너에게 말해. 나는 앞서 말한 개의 길을 택했다고. 나는 계속 개일 것이고, 가난할 것이며, 화가일 거야. 

p.296-297  

 

반 고흐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다르는 길. 

  

반 고흐의 서간집이 나온다는 얘길 들었을 때는 좀 의아했었습니다. 이미 한 차례 열풍이 쓸고 지나간 자리니까요. 특히 예술 분야에서 한 번 유행을 탔던 주제는 좀처럼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법이어서, 출판사에서 뭘 믿고 이런 작업을 했나 싶어 (관계자 여러분 죄송합니다 -_-;;) 제본 안된 본문을 훑었습니다. 

아, 이 정도였나? 반 고흐의 글이 이렇게 가열찬 느낌이었던가. 기존의 고흐 서간집들과는 달리 구어체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아니면 발췌가 아니라 전문이 수록된 편지들이기 때문에? 아니면 직접 편지를 선별해 엮고 번역하고 해설까지 꼼꼼하게 첨부한 박홍규 교수의 열정 때문에?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책의 구성이 반 고흐의 삶을 청년기부터 시간순으로 그려가고 있고(반 고흐 서간집 전집을 계획하고 있다는 박홍규 교수의 해설은 상당한 열의가 엿보이며 내용도 충실합니다), 거기에 반 고흐 자신의 목소리가 직접 그 사실들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마치 해설과 재연으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듯이요. 필름이 아니라 글로 남은. 

실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반 고흐의 편지라고 하면 유명한 '돈 구걸' 이야기는 여기에서는 그저 생활의 일부로밖에 보이지 않아요. 추신 같은 거죠. 대신에 편지의 본문은 

정경들-저 순진한 영탄법들,

 사랑하는 테오, 안트베르펜의 인상을 좀 더 전하고 싶어... 이곳에선 무엇이나 그릴 수 있어... 방수 천으로 덮인 상품들이 산처럼 쌓인 한구석에 흰말이 한 필 있더구나. 배경은 창고의 낡고 검은 연기로 그을린 벽이야. 정말 단순하지만, 흑과 백의 효과가 너무 분명해. 

정말 우아한 영국 풍 선술집 창을 통해 가장 더러운 진창이 보이고, 배 위로는 모피나 물소 뿔 같은 매력적인 상품이 기이해 보이는 항만 노동자나 이국적인 뱃사람 손으로 내려지고 있어. 매우 아름답고 정말 섬세한 영국 소녀가 창 앞에 서서 그것을 바라보거나,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고, 실내와 인물은 모두 명암이 분명하고, 빛으로는 -진창과 물소 뿔 위에 은색 하늘이 있어서- 일련의 대단히 격렬한 대조를 이루고 있지. (중략)

...지칠 때쯤이면- 하위치Harwich나 르아브르에서 온 기선들이 정박하고 있는 선창 끝까지 가게 돼. 시가지를 등지고 있는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어. 있는 것이라고는 평탄하고 반쯤 물이 찬 무한한 목초지뿐이야. 너무나 우울한 곳으로 습하고, 굽이치는 마른 갈대와 진창이 전부야. 작고 검은 보트 한 척이 떠 있는 강, 회색 물, 안개 낀 잿빛 하늘, 사막 같은 적막. 

p.363-365  *('...'은 단락 내 중략을 뜻합니다)

 

그림(누구의 것이던간에), 

귀하에게 드리는 습작은 여름 태풍이 부는 날, 밀밭 구석에 있는 나무들을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환류하는 대기의 파란색 속에 있는 일종의 검은 형세입니다. 그리고 양귀비의 주홍색이 그 검은 형세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뒤에 보실 테지만, 이는 녹색,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검은색 바둑판 무늬의 아름다운 스코틀랜드 직물의 색조 조합과 다소 가깝습니다.

p.743 

어제 저녁, 나는 숲에서 썩어 말라버린 너도밤나무 잎으로 덮인, 약간 경사진 지면 위에서 그림을 그렸어... 문제는, 정말 어려운 문제는, 지면 색깔의 어두움, 그 지면의 거대한 힘과 견고함을 표현하는 거야.  

(중략) 그것을 그리기는 너무 힘들더군. 지면은 매우 어두운데도, 그걸 그리는 데 튜브 한 개 반을 썼어. 그 밖에 빨강, 노랑, 갈색, 황토색, 검정, 시에나 황갈색을 쓴 결과는 적갈색이었어. 그러나 흑갈색에서부터 짙은 와인색이나, 도리어 희미한 황금색을 띠는 빨간색으로 가는 도중이었지. 그래도 아직 이끼와 빛을 받아 밝게 반짝이는 싱싱한 풀밭의 경계를 그리는 일이 남아 있었는데 정말 그리기 힘들었어.

(중략) 이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에게 말했어. 즉 작품에 가을 석양의 느낌, 신비로운 느낌, 진지한 느낌이 나타날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그러나 그 효과는 시간적으로 영속하는 것이 아니므로 서둘러 그려야 했지. 인물은 모두 몇 번의 견고한 붓질로 단숨에 그렸어. 어린 나무들이 대지 위에 어찌나 튼튼히 뿌리내리고 있는지 정말 감동했어. 그 둥치를 붓으로 그리기 시작하면서, 지면을 이미 두껍게 칠해두었기 때문에 간단한 붓질로 나무들이 대지에 뿌리를 내리게 만들었어. 뿌리와 줄기는 튜브에서 물감을 짜내면서 바로 모양을 만들고, 약간의 붓질로 다듬었을 뿐이야. 

(중략) 어떤 의미에서 나는 유화 그리기를 배우지 않았던 것이 좋았다고 생각해. 

p.256-258

그리고 -특히 폴 고갱과의- 우정, 수많은 예술 작품들에 대한 감상 또는 비평("그림에서 성취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보다 이전에 베를리오즈나 바그너가 음악에서 이미 달성한... 슬픔으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는 예술을 만드는 것이네!"), 사회와 세계에 대한 정치적 입장, 먹고 살기 위한 구차함...  마치 그가 보고 듣고 느낀 삶의 정수를 옮겨놓은 듯한 느낌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그 모두를 집어삼키는, 그 자신조차 어쩔 수 없는 강렬한 의지가 있지요.

자.. 그렇다면 마지막 인용을 어디서 가져올까요. 그 강렬한 의지를 보여주는, 거의 그의 유서처럼 취급받는 907번 편지(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져 있습니다)의 유명한 문구, "내 그림, 나는 그것에 생명을 걸었고 내 이성은 그것으로 반은 무너져버렸구나." 로 할까요. 

오늘만큼은 다른 걸로 해 보겠습니다. 죽기 4년 전, 아직 청년이라 할 수 있던 '순진한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반 고흐가 잠시 살폈던 세계입니다. 

오늘 일요일은 거의 봄날이야. 오늘 아침 혼자서 공원과 대로를 비롯하여 도시 전체를 오래 산보했어. 만일 시골이었다면 종달새가 처음으로 노래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날씨야. 

요컨대 부활의 기운이 느껴지는 무엇이 있었어. 그러나 상거래라든가 사람들 모습은 침체해 있고, 나는 최근 여러 곳에서 터진 쟁의행위로 염세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야. 

앞 세대에게 그것은 무익한 게 아니라 반대로 승리라는 점이 분명해질 거야. 지금은 모든 사람이 노동을 하여 빵을 얻어야 하는 괴로운 시절이야. 매년 더 악화되겠지. 부르주아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200년 전 제3계급이 다른 두 계급에 저항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당해. 지금 최선의 길은 침묵을 지키는 거야. 왜냐하면 운명의 여신은 부르주아 편을 들지 않을 테고, 우리는 곧 그것을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므로 봄이기는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슬프게 방황하고 있는지! 

p.387-388 

봄이기는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슬프게 방황하고 있는지. 바뀌지 않는 것은 작품만이 아니라 언제부턴가의 이 세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턴가가 아니면 처음부터였을지도 모르지만요. 

700여 페이지의 두툼한 분량, 깔끔한 양장 사철 제본,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해설과 각주가 달린 '서간문을 통한 전기'. 여러모로 추천해 드립니다. 초판본에는 책에 수록된 반 고흐의 스케치를 담은 작은 스케치 연습장이 함께 제공됩니다.

  

 

-MD가 뽑은 또다른 네 가지의 반 고흐

 

 

 

 

 

 

 

 

<반 고흐 효과>는 치밀하게 짜여진 '사회학' 책입니다. 무명 화가였던 반 고흐가 사후에 어떻게 '불운한 천재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고 그 후광을 키워가게 되었는지에 대해 대중 메커니즘-사회 시스템을 통해 접근하고 있죠. 대중들이 알아보지 못한 천재에 대한 죄책감을 대속적 발상을 통해 추앙하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그 대속 과정은 어떤 진실을 재발견하는 것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고, 불운한 천재에 대한 급격한 발상 전환을 통하여 집단적인 카타르시스-그리스류 비극 관람에 가까운-를 얻는 데 1차적인 목표가 있죠. 말하자면 반 고흐 효과는 반 고흐라는 실체를 어떻게 재발견하느냐 하는 기능적인 effect가 아니라 심리학적인 증후군에 가까운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반 고흐를 아이콘으로 추앙하도록 만든 각종 권력들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도 함께 포착되어 있습니다. 다소 난이도가 있으며, 문장도 좀 난해한 편이지만 충분히 감내할 가치가 있습니다.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는 소설 형식을 빌어 온 전기인데요. 아마 반 고흐 관련 책들 중에 가장 유명한 책일지도 모르겠네요. 1934년에 출간되어 고전 대열에 속하는 책으로, 팩션 소설들의 할아버지쯤 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불운한 천재 예술가'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비극과 열정의 뒤범벅을 보여줍니다. 소위 고전적인 반 고흐론이라고나 할까요. 일반에 잘 알려진 바로 그 반 고흐인데, 학술적으로 그의 '실체'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더라도 그 전체적인 삶의 궤적이 감동적인 것만큼은 변함이 없나봅니다. 최승자 시인의 번역은 감성적인 글(리차드 브라우티건의 <워터멜론 슈가에서>라든가)에서 빛을 발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 책에서도 그 격앙된 낭만을 잘 옮겼습니다. 

<반 고흐 명작 400선>은 말 그대로 반 고흐의 그림을 수백 개나 수록하고 있습니다. 소위 유명 그림들은 물론, 스케치와 습작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들이 함께 실려 있어요. 반 고흐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그의 전기를 읽을 때 함께 두고 읽기에 더없이 좋은 '비주얼 가이드북' 입니다. 물론 그의 후기 작품들이 어마어마한 위업을 달성한 건 맞지만, 초중기 (특히 네덜란드를 떠나갈 무렵) 작품들의 색채 구성을 통해 인상파-야수파의 태동을 예감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입니다. 특히 마로니에북스는 Taschen 시리즈를 낼 때도 그렇고, 그림의 인쇄에 있어서 믿을만한 출판사죠.

<영혼의 순례자, 반 고흐>는 접근 불가능한 천재가 아닌 '고뇌하는 인간' 고흐를 분석합니다. 특히 다른 책들이 그다지 신경쓰지 않은 부분, 바로 그의 소년기와 청년기를 장악했던 종교적 관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 종교적 열정이 고흐의 세계관 속에 사물에 대한 감수성과 영원에 대한 추구, 평등과 박애에 대한 관심을 박아넣었다는 거죠. 실제로 성직자의 길을 포기한 뒤에도 그의 편지에는 성경 이야기나 성서의 문구 인용이 자주 등장하는데요. 이 책은 그러한 종교적 열정이 반 고흐로 하여금 자신의 수난을 감내하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고, 그림의 화풍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소위 '반 고흐 효과'에 경도된 책들이 고흐의 후기 작품들을 정신분열증의 창조적 폭발이라고 설명하는 경우를 비판하면서(반 고흐의 정신분열증 설은 그가 비극적인 영웅으로 추앙된 뒤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가 단순히 측두엽 이상에 의한 간질 발작을 겪었을 뿐, 그의 그림은 언제나 그의 삶이 일관되게 추구해 온 가치를 이루어내는 과정이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책에서는 삶의 비극을 천재성으로 뛰어넘은 영웅 대신에 영원히 자신의 굴을 파고 있었던 '영원한 근성의 수도승'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난이도는 <반 고흐 효과>보다 쉬운 편입니다.

 

글이 길어져서 다른 신간들은 또 다음 시간에 찾아들고 뵙겠습니다. 행복하신 분들은 계속 행복하시고, 행복하지 않은 분들은 행복해지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망각을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만약 있다고 한다면) 진실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니까요. <영혼의 순례자, 반 고흐>나 <반 고흐 효과> 같은 책들이 빛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p.s.

써놓고 보니 반 고흐에 관련된 책 중에 가장 좋아하는 책을 빠뜨렸네요. 

불꽃같은 그림에는 불꽃같은 글이 가장 어울리지요. 앙토냉 아르토의 고흐에 대한 단상은 번역문인데도 불구하고 자기확신에 가득찬 언어의 압도적인 위력을 선사합니다. 그야말로 여름 햇볕처럼 작열하는 언어의 향연에 흠뻑 젖게 되죠.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입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05-29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29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체오페르 2009-06-01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는 것만으로도 보고 싶은 마음이 막 피어오르네요.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6-02 20:30   좋아요 0 | URL
그저 제가 감사드릴 일이죠... 좋은 책만 고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_+

roar 2009-06-10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 저도 사서 보았답니다. 감사드려요!

외국소설/예술MD 2009-06-10 13:46   좋아요 0 | URL
마음에 드셨나봐요. 영광입니다. ^^
 

마치 단편소설집 같은,

1970년 2월의 어느 아침이었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나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화가 테오도로스 스테이모스였는데 마크 로스코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마크 로스코 편의 시작입니다. 꼭 카버나 챈들러 같지 않나요? 이 회고록은 그 다양한 캐릭터들에 힘입어 마치 단편 소설집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천재 예술가들의 에피소드를 엿본다는 가십스러운 관심보다는 '인간들'의 삶을 비추는 에세이집. 세심한 관찰력과 효과적인 문장을 조화시키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큐레이터들의 여왕답게 캐서린 쿠는 자신이 접했던 예술가들의 삶을 담담하게 옮겨 놓았습니다. 현란한 문장 대신에 심도 있는 관찰을 그대로 옮겨내는 걸 장기로 삼는거죠. 네, 말하자면 이건 에세이, 예술-에세이라고 보는 쪽이 좋습니다. 이론과 사조에 대한 논박은 서문 이후로는 만나기 힘드실 거예요.
 

지난 번에 코언 형제의 인터뷰집에서 말씀드린 바 있었죠. 서문만 봐도 괜찮은 책일거라는 느낌이 오는 것 말입니다. 이번에 소개드릴 <전설의 큐레이터, 예술가를 말하다>도 그런 경우입니다. 이 책은 서문의 질량부터 남다른데요. 두 단계로 나뉘어진 서문이 무려 백 페이지에 가깝습니다.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의 지휘관, 그야말로 전설적인 큐레이터의 이 회고록 서문은 큐레이터라는 직업 이야기, 그리고 그 직업을 가진 자신의 인생 이야기, 그리고 근대에서 현대로 옮겨가는 시기의 미술계를 요약한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회한이나 감상 같은 건 거의 없습니다. 그녀 자신의 인생조차 '서문'에 기술했을 뿐인, 목적의식이 명확한 책의 시작은 본문을 읽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훌륭합니다. 그야말로 쓸모있는 서문이죠. '개념있는' 책은 자신의 개념을 직접 서술하지 않아도 그 태도에서 느낄 수 있는 법입니다.

이어 등장하는 본문, 16인의 예술 종사자들의 면모는 가지각색입니다. (아, 말씀드리자면 다들 예술가인 건 아녜요. 비평가도 있고, '반 고흐의 조카'도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인물을 다룬 단편들은 서로 다른 분위기를 풍기죠.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아메리카라는 파도를 타넘기를 즐기는 천재의 여유를 보이며, 저 유명한 에드워드 호퍼는 역시 충만한 자신감을 뽐내지만 그 모양새가 종교적 후광처럼 범접할 수 없는 형태를 띕니다. 너무 조용하고 착실해서 엔지니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반 고흐의 조카'는 삼촌에 대한 열정과 민족에 대한 사랑만큼은 더없이 뜨거운 남자입니다. 예술가적 열성과 기묘한 정적이 공존하는 괴공간(?) 프로빈스타운의 터줏대감 한스 호프만도 있고, '그다지 예술가답지 않게' 충실히 또 착실히 작품들을 만들어간 생활 예술인 프란츠 클라인도 있습니다. 그 모두는 다른 인간이며 다른 캐릭터이고 다른 이야기지요. (캐서린 쿠는 이미 서문에서 천재 예술가들의 어떤 전형을 뽑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작업 같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유명 예술가들의 삶을 곁에서 바라보고 기술함으로써 불필요한 아우라를 제거한 책은 보기 힘들 뿐더러, 이렇게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한 경우는 더욱 보기 힘듭니다. 담담한 문장이 안겨주는 차분함도 매력적입니다. 책 뒷면에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인터뷰어&에세이스트인 스터즈 터클의 추천사가 있습니다. 논픽션/인터뷰집에 대해 스터즈 터클이 눈여겨 본 책은 거진 믿으셔도 됩니다. 

(...여담인데요. 스터즈 터클의 책 좀 더 나와주면 안될까요... T_T) 

  

 

드디어 등장한 진정한 오디오 입문서! 

 

-이 책도 소개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드디어 국내의 오디오 덕후 팬들을 위한 멋진 입문서가 나왔거든요. ^^ 우선 각종 장비의 상품별 소개가 깔끔하게 이루어져 있어 실질적인 오디오 시스템 구성에 도움이 됩니다. 오디오의 작동 원리에 대해서도 기초적인 부분을 그림까지 곁들여 소개한 뒤에 부담없이 넘겨 주고요. 마치 이야기처럼 써져 있는데다가 일러스트도 공들인 흔적이 보여서 읽기가 상당히 편합니다. 무엇보다 50만원으로 스피커 사러 가기 같은 실전 트레이닝이 많은 점이 도움이 될 걸로 보입니다. 

기본적인 이론과 오디오 시스템에 대한 설명, 실제로 각 분야의 제품을 구입할 때의 '이상과 현실', 기기간의 매치업과 공간의 중요성 등 각 파트의 차례도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부담없이 술술 잘 읽힌다는 점을 감안하면, 책 내용은 가능한 만큼의 정보량을 꽉꽉 눌러 담아 놓은 알짜 느낌이 딱 옵니다. 게다가 부록으로 들어있는 CD도 오디오의 채널 테스트, 밸런스 테스트 등 각종 기초 테스트를 포함하는 알짜배기입니다. 편집자 추천은 이런 책에는 그냥 걸어주죠.

제품 소개가 꽤 있는 책이니 시간이 지나면 개정판도 내 주겠지요? (물론 어느 이상은 팔려야겠지만요;;) 

이 책을 피하셔야 할 분들은 딱 두 부류가 있겠습니다. 

1. 오디오 상급 경력자. (다 아는 얘기일 겁니다) 혹은 상급이라고 자신만만해하는 중급자. 

2. '충동은 만악의 근원'이라는 책 초반의 문구에 반감을 가진 자. 

 그 외에는 즐기셔도 무방합니다. 저처럼 손가락 빨면서 저 기기들을 상상하는 것도 물론 재밌겠지만(T_T) 원하신다면 저 세계로 풍덩... 

 

 

P.S. <굿모닝 오디오>의 뒷날개에는 이 책부터 시작되는 '내 인생 두 번째 취미' 시리즈 소개글이 있습니다. 읽어보시고 자기자신의 삶을 한번쯤 되돌아볼 기회를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 쫓겨 뒤돌아 보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당신에게 '왜 사냐'는 질문에 '웃지요!' 하던 시대는 끝났다. (중략) 첫 번째 취미를 잊은 사람들에게 두 번째 취미는 평생을 함께할 소중한 동반자로 남을 것이다. 

자, 이제 지르시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리하여' 행복하시길. ^^ 다음에 뵙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엘 'the 암울한 농담' 코언, 에단 '이 죽일 놈의 자신감' 코언 형제의 다정한 한때.



이 인터뷰집이 신뢰할만 하다는 사실은 서문에서 바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화표를 사들고 조엘과 이선만의 독특한 영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또는 적어도 전반부의 영화들, 그러니까 분수령이 되는 <파고(1996)까지는 그렇다. 최근 그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들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이 서문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전까지의 영화들을 대상으로 쓰여졌음을 감안하면, 저만 고개를 끄덕인 건 아니겠죠.; 물론 이 특이한 형제 감독(워쇼스키들은 이제 남매가 된거 맞나요? 아시는 분?)의 작품들은 각자 개성이 강해서 워낙 선호도가 갈리긴 하지만요. 그래도 '깊이를 강요'해 보면, 저는 파고와 바톤 핑크와 밀러스 크로싱과 애리조나 유괴사건과 허드서커 대리인(!)과 블러드 심플(!!)이 1996~2006 사이에 만들어진 그들의 영화보다 더 좋습니다. 

요점은 참 정직한 서문, 자신의 취향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신뢰할만한 편집자가 책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죠 네. 

사실 이런 인터뷰집을 읽는다는 건, 자신의 예술가적 자의식을 봄볕 쬐는 개만큼만 깨워놓은 채 살아가는 대다수의 어중간한 '예술 양민'들에게는 기꺼운 고통 같은 겁니다. 이들은 천재니까요. 다른 종류의 인간이니까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Q. ...아주 흥미로운 방식으로 폭력을 묘사하시는데요. <블러드 심플>에선 남자의 손을 칼날이 관통하고, <파고>에선 악명 높은 목재 분쇄기 장면이 나옵니다. 의도적으로 관객들의 속을 뒤집어놓으시려는 건가요? (답변에 <파고> 스포일러 있음)

A. 좋은 질문이에요. 그럴 리가요. 일부러...그런 건 아니에요. <파고>의 끝 부분에서 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이제 관객들은 피터 스토메어가 스티브 부세미를 분쇄기에 밀어넣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건 뭐랄까, 확실히 딱 적절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하지만 그게 왜 적절하냐고 물으신다면 전 할 말이 없어요. 모르겠어요. 괜찮고, 적절해 보여요. 그렇지 않나요? 다른 어떤 것도 그 장면만큼 좋진 않을 것 같아요. 그렇게 그로테스크해야만 하죠. 하지만 왜냐고 묻는다면 전 정말 대답을 할 수 없어요.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하는 거예요. 뭔가 그로테스크한 걸 아주 무심하고 실제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건 정말 끌어당기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 것들이 영화나 소설에서 제대로 작동을 하죠. 

보시다시피 저들은 그냥 알고 있는 겁니다. 행운이란 적절한 때에 적절한 장소에 있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 적절함을, 운명을 아군으로 끌어당겨 버리는 지점을 본능적으로 찾아내는 것이 천재가 아니면 뭐겠어요. 때문에 예술가의 인터뷰집이나 회고록을 읽는 사람들은 해당 인물의 열렬한 팬이거나, 아니면 피학 성향을 갖고 있는 예술가 지망생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자신의 목을 죄고 흔드는 거죠. 너도 할 수 있잖아, 그걸 알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렸으니 더 강력해져서 기어나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형제는 인터뷰를 통해 뭘 배우기에는 가장 어려운 부류로 보입니다. 같은 시리즈로 나온 짐 자무시, 팀 버튼, 우디 앨런도 이 정도로 '쿨한 천재'들은 아니었어요(게다가 이 형제는 실제로도 매우 냉소적으로 인터뷰를 해서 인터뷰어들을 당황시키기로 유명하죠). 만약 코언 형제의 인터뷰에서 코언 형제의 영화같은 희극성을 다소나마 기대한다면, 그걸 즐기기에는 좋습니다. 사실 굳이 뭘 배워야만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흠, 추천 타입을 하나 더할께요. 아메리칸 스타일의 유머를 즐기는 논픽션 애호가 분들도 보시면 재밌을 겁니다. 국내에 몇 분 계실지는 모르겠지만요.

Q. (에단에게) 프린스턴에서 철학을 전공하셨는데요. 당신의 영화 철학은 무엇인가요? 

에단: 휴...... 그런 거 없어요. 말문이 딱 막히네요. 내가 아는 한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 이 질문은 빈칸으로 남겨두죠. 

Q. 이 영화(빅 레보스키)의 제작 의도엔 니힐리즘nihimism이 무엇인지 미국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도 포함되나요? 

조엘: (매우 냉소적으로) 미국에겐 모든 게 수업lesson 이죠.


그렇습니다. 그런거죠. 이 죽일 놈의 자신감 + 블랙 유머. (그런데.. 자꾸 코엔 형제라고 쓰게 되는 건 저만 그런건 아니죠? ;;) 그러고보니 지난번 소개드린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에 이어 어딘가 울적한 이야기네요. 평범한 인생이라는거 말입니다. 이번에는 그냥 지나칠 수는 없네요. 뭔가에 도전하고픈 분들을 위해 세 종류의 테크트리를 준비했습니다. 이들 중 하나를 밟아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아직도 망설이고 있습니다)  

 

도전하는 자를 위한 무림 비급 3종 세트

         



<일상 예술화 전략>- 인문MD님께서 '이거 참 괜찮은 책인데 절판이라 어쩌죠'라고 사실은 자랑, 을 했던 책이 갑자기 재간되었습니다(ㅋㅋㅋ). 착실한 스케쥴과 계획을 신뢰하시는 분들,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북돋아보고픈 분들께 추천해 드립니다. 무려 1년짜리 스케쥴을 소개하는 책이거든요... 잠깐만요. 벌써 넘어가시면 안돼요. 원고지에 엽편 분량의 자서전을 쓰는 것부터 시작해서, 달걀을 껍질째 넣어 오믈렛을 만든 뒤 실패를 '구경'하기 등등의 접근방식이 돋보입니다. 심리적 장애물을 구체적인 상황에 투사시켜 돌파하는 방식이죠. 자기 내부의 벽은 추상적이라 정면으로 마주치기가 어려우므로, 그것을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대입시켜 마주치게끔 하는 방식은 마치 심리 테라피 같습니다. 저자의 심리 치료사 약력에 눈이 갈 수밖에 없네요. 확실히 현실성 있는 접근이고, 구체적인 접근법을 제시하는 것도 좋아 보입니다. 창의력을 고취시키는 여러 책들이 너무 시크릿스럽다고 생각되는 분들은 주목하셔도 좋아요. 

읽고 나면(실행은 아직 해보지 못했습니다;) 어디 연단에 나가서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엠디입니다. 저는 글을 쓴 지 삼일째 되었습니다." 라고 시작되는 고해를 한 뒤 응원의 박수를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심리 테라피 관련 책이라서 그럴 거예요. 죄송합니다. 사실은 제가 매튜 스커더 팬이라서요.

<아티스트 웨이>- 좀 더 심플한 행동지침, 그리고 좀 더 직관적인 해결책을 선호하는 분은 이 책을 선택하셔도 좋겠습니다. 물론 이 책 역시 스케쥴이 있고 다양한 과제가 주어지지만, 하나의 중심과제가 딱 정해져 있습니다. 모닝 페이지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3페이지 분량을 되는대로 써 갈기는 것이 이 책의 핵심입니다. 나머지는 모닝 페이지를 보다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한 옵션들이죠. 논리적인 자아가 잠에서 깨서 정신차리기 전에 어서 마음에 있는 얘기를 쏟아봐요! 책 내내 평범한 사람들이 억압시켜 놓은 창의력의 하수구를 뚫어내야만 한다는 저자의 강렬한 외침이 울려 퍼집니다.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사고 능력을 유연하게 해방시키면 나머지는 뒤따라 올 것이라는 이야기죠. 우주가 당신을 도울 거라는 어딘가 친숙한 얘기도 있지만, 그 도움은 자기자신을 믿고 창의력을 한껏 개방시켜가는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에 한합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는거죠 네.


<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 네 그렇죠... 다카하시 겐이치로... 직접 쓴 작가 약력에서 유년기를 '따분했다' 단 한 줄로 요약한 그 남자입니다. 거의 선의 경지를 느끼게 하는 글쓰기 책이죠(네 오바입니다). 예술적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 방법적 문제가 아니라 근성과 혼과 피와 땀의 문제라고 생각되는 분은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저자가 선별한 각종 명문들이 다른 글쓰기 책에 비해 어딘가 안드로메다의 향취를 느끼게 해서 더욱 좋습니다. 특히 일본 AV계를 다룬 논픽션은 정말 멋졌어요(번역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이 책이 가르쳐주는 방법이란 많이 보고, 되는 대로 느끼고, 겁을 먹든 말든 일단 쓴다. 입니다. 어쩐지 코언 형제 냄새가 나네요. 어, 결론이 이렇게 나면 안되는데. -_-;; 다시, 어쨌든, 재밌는 책입니다. 이 책의 열정은 선택받은 용자들의 것이겠지만, 재미만큼은 모두의 것입니다. 고고씽.




광고말씀. 영원히 짠물 할인이 지속될 것 같았던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가 무려 25% 할인에 들어갔습니다. 단 1회분 물량만 이렇게 받았으니 관심있는 분은 구입하셔도 좋겠네요. 네? 다음 개정판을 기다린다고요? 자고로 학술서와 전자제품은 신제품 기다리면 영원히 못 산다는 게 진리입니다. 


 
 

그리고 다시 평화로운 새 책 이야기 

              

단연 '화제의' 책이랄까요. <트와일라잇 - 화보와 비하인드 스토리> 입니다. 제목이 모든 걸 담고 있네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 메이킹 북입니다. 팬덤에게 주어진 소장 목록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죠. 관건은 정말로 '화보'에 가깝냐인데, 여타 메이킹 북에 비해 사진의 비율이 확실히 높은 편입니다. 배우들의 후일담이나 스탭들이 고생하는 장면들도 담겨 있어서 영화의 서플먼트로 보기에는 재미납니다. 고딕 분위기의 원서 텍스트 느낌을 따라가려다 좀 난삽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별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지금 에드워드가 갈구하는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는데 폰트 따지고 있나요? 고백하세요.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애시당초 이 책에 관심이 없었던 겁니다. ㅎㅎ 

<일러스트 연습장 - 동물 그리기>. 그림에는 절망적일 정도로 소질이 없는 제가 어떻게든 따라그릴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_-;; 전작인 <연필 하나로~ 연습장> 시리즈가 쉬운 난이도로 인기가 좋았는데 이번에도 같은 노선이네요. 책 따라 선 좀 긋고 점 좀 찍으면 어느새 '동물'이 그려져 있어서 좀 놀랍습니다. -_-;;; 선 하나하나를 가이드하는 데 집중하다 보니 응용력 측면에서는 약간 부족할 수 있겠지만, 특히 초심자 분들이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교재로는 안성맞춤이네요. 근데 흰수염고래 너무 예뻐요. +_+ 

자매품으로는 <인물 그리기>도 같이 나왔습니다. 세계인들의 인종적 특성과 각종 전통 복장을 쉽게 따라그릴 수 있어요. 동물편보다는 난이도가 높지만, 그래도 '여전히' 쉽게 그려지는 편입니다. 그리고 있노라면 감성이 다듬어지는 소리가 들려와요...사각사각. 연필은 소중합니다. 

<시나리오 시퀀스로 풀어라>는 약간 난이도가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영화의 시나리오를 시퀀스 형식에서 분석하고 있거든요. 때문에 이 책에 수록된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 그리고 시퀀스라는 개념을 처음 보시는 분들은 금방 감 잡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사실 시퀀스는 시나리오 이후의 작업으로 볼 수 있는데요, 역으로 시퀀스로 토대를 잡은 뒤에 시나리오를 만들어간다는 내용은 확실히 좀 특이합니다. 단순히 기승전결의 구도만으로는 영화의 호흡에 맞출 수 없으니 시나리오 작업부터 각 시퀀스별 강약조절을 해 나가면 훨씬 좋다는 거죠.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등의 흘러간 걸작들을 통해 잘 쓰여진 시나리오가 (의도했건 아니건간에) 시퀀스별 완급조절을 잘 해냈다는 걸 확인해보실 수 있습니다.    

<이주헌의 아트 카페>. '고급 킬링 타임' 책. 아무리 에세이라도 분석이 깊어지면 무게가 생기니 부담이 생기고, 감상이 깊어져도 무게에 따른 부담이 생기죠. 때문에 이 책은 '카페'에서 읽기 좋은 무게로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돈 주고 사는 책이면 든든한 깊이가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일단 미리보기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부드럽게 쓰여진 예술 에세이(혹은 그냥 에세이라도)를 찾는 분이시면 이 책 괜찮습니다. 이주헌 씨의 나긋나긋한 친절함은 여전히 인상깊으니까요. 진중권이 용장이면 이주헌은 덕장입니다. 음..;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네요.; 동서양과 고대 현대를 죄다 아우르는 종합 미술담이니 어떤 응집된 주제는 없습니다. 이 점 참고하시구요. 

 

마지막으로, <다크 나이트>에서 히스 레저 때문에 난생 처음 촬영 중에 대사를 까먹고 패닉 상태에 빠졌다고 고백했던 '간지할아버지' 마이클 케인의 연기 지도서입니다. 스타니슬랍스키 풍의 교재 느낌 가득한 책이 아니라 '고교 중퇴자'가 보여줄 수 있는 리얼 실전 가이드북이죠. 소위 먹물 느낌이 없이 교훈이 명확하고 사고가 깔끔합니다. 이럴 때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 마음가짐은 이렇게. 추상적인 지시가 거의 없고 그 자리에 상황별 예시가 들어가 있습니다. 노동자가 쓰는 책이란 이런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 감동의 물결에 빠졌더랬어요. 멋진 분입니다 정말. 

그런데 가장 인상깊었던 문구는 다름아닌 (아마 편집자가 썼을) 존 포드의 인물 소개.  '<플레이보이> 인터뷰에서 가장 존경하는 영화감독을 묻는 질문에 오손 웰스가 "옛날의 거장들(...) 존 포드, 존 포드, 그리고 존 포드."라고 말한 바 있다.' 아아... 존 포드는 진리입니다.

 표지 사진 참 멋지죠 근데.

 

 

p.s: 노동자 하니까 생각났는데, 사실은 노동자들만의 문제는 (당연히) 아니었지만, 68혁명을 다룬 중요한 저서 중 하나인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신좌파의 상상력>이 재간되었습니다. 표지는 보다 깔끔해졌네요. 대학 시절 선배가 던져 준 이 책을 읽으면서(공짜 책이라 더 좋았던, 책이라면 와구와구 집어삼키던 시절) 많은 생각을 했더랬죠. 제게는 대학시절의 비밀을 간직한 '로즈버드'인데요. 내용으로도 어디 꿀릴 게 없으니 여기 이렇게 재간을 반기는 바입니다. 환영합니다. (이렇게 인문MD님께 진 빚을 갚고..)

 

봄입니다. 저는 춘곤증으로 고전중입니다. 노곤한 몸보다 더 큰 문제는 공중을 거니는 마음이겠죠. 때로 미몽에 빠지더라도 자신을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자기자신을 끝간데 없이 밀어붙이는 자기자신을 잠시 잠재워도 괜찮지 않을까요. 봄이니까요.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방글 2009-04-14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 명이 성전환해서 워쇼스키 남매가 되었다는게 김트루입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4-15 14:09   좋아요 0 | URL
아 그게 아직은 안했다는 얘기도 있고, 그냥 남자로 살기로 했다는 얘기도 들려오고 해서 말이죠..

Jaybing 2009-04-16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고와 바톤 핑크와 밀러스 크로싱과 애리조나 유괴사건과 허드서커 대리인과 블러드 심플이 제게도 코언 형제의 베스트입니다. 이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넣어줘야겠지만요. 이들의 인터뷰는 읽어본적이 없어서 평소엔 어떤지 몰랐는데 쿨한 애들이었군요. 아카데미 시상식때 '땡큐'라던 에단을 보고 짐작은 했습니다만ㅎㅎ

외국소설/예술MD 2009-04-16 16:35   좋아요 0 | URL
하하 동지가 있어서 반갑습니다. ^^; 코언 형제의 까칠한 인터뷰는 일전에 모 영화평론가께서 말씀하신 걸 들은 적이 있어요. 인터뷰를 한 번 했었는데 지금까지 한 인터뷰 중에서 가장 힘들고 괴로웠다는;;

경제경영MD 2009-04-16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계속 파고 또 파세요 엠디님아~

외국소설/예술MD 2009-04-16 16:35   좋아요 0 | URL
네 어서 신간브리핑을 쓰세요..

비로그인 2009-04-19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을 어제서야 손에 받아들고 ^^
그 음악을 들으며 일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감독들인가' 생각하던 찰나 MD님의 글을 읽고 4권의 책을 질렀습니다. 센스쟁이 MD님, 앞으로 소개될 책도 기대됩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4-20 16:24   좋아요 0 | URL
사실 형제의 초중기 작품만 좋다고 쓰고 제일 마음에 걸린 영화가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였죠 ㅎㅎ. 하여튼 그 허허실실 센스는 정말 뛰어나서 '대단히 까칠하다'고 하더라도 미워할 수가 없나봐요.

그나저나 저도 센스쟁이라는 말 잘 쓰는데요.. 이거 대단히 반갑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파란 2009-04-24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장바구니는 한달에 두번만 만나자라고 다짐다짐 하고 어느새 장바구니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이거야 하는 설레임으로 다가옵니다 감사합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4-24 12:03   좋아요 0 | URL
리플 하나하나에 그저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이런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아마 리플 달아주시는 분들도 모르실 거예요. T_T 부디 마음에 드는 책 만나시길 바랍니다 ^^

일년열두달 2009-05-14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리스르 웨이 참 좋은 책이죠!!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그나저나 MD님 리뷰들을 방금 끝까지 다 봤는데 예술에 대한 소양도 깊으시고 글도 재밌게 쓰셔서 안그래도 쌓인 보관함에 책이 또 한가득 들어가 버렸네요 ㅋㅋㅋㅠㅠ ㅋ 앗 글을 쓰고나니 윗 댓글 님과 비슷한 발언이군요..ㅋㅋ;

외국소설/예술MD 2009-05-15 14:07   좋아요 0 | URL
아티스트 웨이가 참, 책소개만 보면 되게 뜬구름 잡는 듯한 느낌이 있는데 막상 읽어보면 설득력 있죠. 일상 예술화 전략도 비슷한 측면에서 좋았습니다. 구체적이고 짜임새있어서요.

써놓은 것들을 좋아해주신다는 것만으로 그저 더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 아, 많이 질러주세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