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본 선생님의 작업 가운데 5장에서 10장의 사진들이 여전히 기억에 남습니다. 그 사진들이 날 미소 짓게 하고 뭔가를 상기시켰습니다. (중략) 이전에는 몰랐던 나 자신에 대한 뭔가를 보게 된 것 같아요. 

-빙고! 바로 그거에요. 자, 그럼 다음 주에 이 책(사진집 The sadness of men을 말함)을 본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당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을 소통이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 의미의 소통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언어를 초월한 소통이지요. 

-완전히 언어를 초월합니다. 

언어적인 수단을 사용하면서요. 

-바로 그것입니다.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 p.37-38

  

       

소리소문없는 스테디셀러 <필립 퍼키스의 사진 강의 노트>를 기억하시는지. 나이든 사진가 겸 교수가 추려놓은 사진의 정수는 삶에 대한 사색입니다. 이 생을,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담을 것. 판단하기 전에 움직일 것. 순전히 감탄하고, 그 감탄을 수집하는 데 몰두할 것. 원하는 대로 할 것. 망설이지 말 것. 그러나 서두르지도 말 것. 

신간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는 단독 저서로는 볼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진집 The sadness of men을 구입해서 거기 있는 영어를 술술 읽을 수 있다면 이 책을 구입하지 않아도 될지도 모릅니다. 그 책에 실려 있는 인터뷰와 평론가 서문이 책의 2/3니까요. 나머지는 국내 역자가 필립 퍼키스와 펼친 두 번째 인터뷰입니다. 게다가 분량은 90페이지가 안돼요. 얇습니다. 즉, 책의 객관적인 스펙으로 보자면 결코 '본전 생각 안나는' 책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진에 대해 기초적인 지식은 있는 분들이 읽으셔야 이해가 수월할 책입니다. 말하자면 진입 장벽이랄게 좀 있다고 봐야겠죠.

그런데도 왜 이 책을 추천할까.. 글쎄요. 얼마 전에 제가 구입한 사진집 The sadness of men이 단연코 올해 읽은 책 중에 최고일 게 분명하기 때문, 만은 아닌거 같아요. 이 얇은 책 안에는 여러 종류의 사진 예술 중에 '다큐멘터리 사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습니다. 기본기라고 할까요. 기본 마음가짐이라고 할까요. 여기에는 지성적-좌뇌적으로 판단하기 이전에 세계의 경이를 발견하고 그대로 채집하는 고독한 작업만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행복한 일일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쓸쓸하거나 슬픈 일은 아닐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네 그렇습니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행복하고도 쓸쓸한 일입니다. 그 어떤 영광의 순간은 그토록 충만함에도 불구하고 그 출처를 알 수 없지요. 영원히 말입니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은 수많은 목적론으로 가득한 사진 예술의 세계에서 매우 특이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중심이라고 할만한 개념이나 주제의식이 없어요. 그냥 '누가 이런 사진을 찍었구나'라고밖엔 말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실존주의적이라고 해도 되겠죠. 영원히 해답은 찾을 수 없겠지만 어째서인지 그래도 괜찮은 듯한 느낌. 네. 

저도 일년 넘게 카메라를 놨었어요. 이 책을 읽기 얼마 전부터 다시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더 열심히 찍고 있어요. 그저 많은 준비와 더 좋은 장비, 수많은 선결조건따위 필요없이 작은 카메라 한 대로 세상을 담고 있는 이 사진가에게서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점이 바로 이겁니다. 위대함은 타고난 행운이나 천재성이 없더라도 자기자신에게 솔직해질 때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을요. 그 모든 위대함들이 태양처럼 밝게 빛나진 않겠지만, 비록 그림자와 비슷한 색깔의 회색 빛이라고 하더라도 자신만의 빛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러니, 자신의 빛과 비슷한 파동을 찾아 사진 속에 담기. 그저 담기.

그것이 50여 년 동안 단 두 권의 사진집을 낸 이 조심스러운 대가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일지 모릅니다.

무언가가 나를 통해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신이 음악을 작곡하고 베토벤은 단지 그것을 악보에 옮겨 적었을 뿐이라는, 신동설 같은 주장이 아닙니다. 내가 베토벤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기 때문에 알 수는 없지만 그건 너무 낭만적인 생각입니다. 나의 단계는 사진을 아주 잘 찍었을 때, 내가 그것을 찍은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일을 수행하는 매체라고 느끼는 정도에요. 내 작업이 어떤 의미인지 나도 모르고 스스로 예술가라는 의식도 없어요. (중략) 내가 할 일은 실수로 그 일을 그르치지 않고 제대로 이뤄내도록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중략) 단지 "와! 저것 봐!" 하면서 셔터를 누를 뿐이거든요. 그럴 때, 난 그저 몸으로 일을 하고 있을 뿐이지요. 내 임무는 그 일을 제대로 완수하는 것입니다. 

-p.76 

모쪼록 '알 수 없는 느낌'에 좀 더 익숙해지시기를. 그리고 슬픔이 우울함과 다르다는 그의 이야기를 언젠가 확인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두 행운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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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9-10-04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기회가 되면 MD님이 찍은 사진 올려주세요. 보고싶네요. :)

외국소설/예술MD 2009-10-05 09:23   좋아요 0 | URL
아아 부끄럽네요..;; 네 언제 기회가 되면..^^;;
 

잔디밭에 누운 그녀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깊고 푸르러서, 일년 중에 구름이 가장 눈부신 날들이었다. 그녀는 곧 고개를 돌려 내 허벅지 위에 머리를 올렸다. 내 종아리를 쓰다듬었다. "오래된 청바지를 쓰다듬으면 조용한 소리가 나" 라고 말했다. 그리고 말했다. "백 퍼센트의 사랑 같은 것도 해 봤으면 좋겠어." 내 눈앞을 나비가 날아가고 나서 다시 말했다. "가져다줄래? 그런 거. 백 퍼센트." 나는 그녀의 감지 않은 머리카락들을, 어제의 샴푸 냄새와 달큰한 여자 냄새가 섞인, 아마 95퍼센트 이상일 그것들을 만지며 말했다. "아 그건, 마치 백 퍼센트의 서양 미술사 같은 거네." 그녀는 대답하는 대신 잠들었다. 나비가 어깨 위에 앉았다. 가을답지 않게 따뜻한 오후 두 시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하루키 트리뷰트: 트랜지스터 데이트 클럽>의 단편 '어느 가을, 100퍼센트의 서양 미술사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 중에서 

 

슬픈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세상에 백 퍼센트의 미술사는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제임스 엘킨스의 <과연 그것이 미술사일까?>는 '완벽한 미술사란 건 가능하긴 한걸까?' 라고 묻습니다. 제목부터가 저 유명한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에 대한 패러디죠. 

<서양 미술사>의 원제는 Story of Art입니다. 서양 미술의 역사가 아니라 모든 미술/예술의 역사라고 봐도 되겠죠. 그런데 제3세계와 소비에트 미술에 대한 언급이 극히 축소되어 있는 이 책을 자신있게 예술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서양 미술사>라고 번역한 국내 출판사의 센스와 겸양에 건배를.  

<과연 그것이 미술사일까?>의 원제는 Stories of Art. 정통파 미술사에서부터 '고전주의와 반고전주의의 영원한 반복' 이라는 과격한 해석까지, 인도산 미술사와 대하소설급 소비에트주의 미술사같은 듣보잡(!)들까지, 게다가 대학 교양 수업에서 과제로 출제된 '나만의 미술사 지도 그리기'까지 총출동하는 진기명기 미술사론. 그 끝없는 다양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아,) 내게는 나만의 미술사가 있고, 그리하여 이 세계의 모든 미술사는 타인의 취향의 숫자에 비례한다... 아니라구요? 어떤 법칙, 패턴, 혹은 불변의 사실 (알타미라의 벽화가 미술의 시초 아닌가?)이 존재하지 않냐구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과연 그것이 미술사일까?>의 후반부는 그 패턴을 탐색하는 일에 할애하고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읽어 보시길. 

그러니깐, 미술사야말로 각종 조합과 재조합의 수많은 화학반응을 관찰해야 하는 끝없는 현재 진행형 작업이라는 얘깁니다. 절대로 결정판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어요. 때문에 신선하거나 인상깊은 도전은 E.H.곰브리치의 거대한 책이 있더라도 언제나 언급해 주어야죠. 서론이 이렇게나 길다니, 네, 또 한 권의 기억할만한 미술사가 나와서요. 그렇다는 이야깁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세 가지 지침을 정하고자 한다. 첫째, 도판을 보여줄 방법이 전혀 없을 때는 아예 말을 꺼내지 않는다. 언급조차 되지 않는 작품 때문에 당황하는 독자들도 많을 것이고..(중략).. 그림으로 보여줄 수 없는 중요한 형태나 현상을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과감히 다른 작품을 차용했다. 

둘째, 연대기적 순서를 따른다. 독자가 읽기에 편하도록 순서를 정하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늘 이 나라 저 나라를 넘나들면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능한 한 독자의 입장에서 편하게 읽힐 수 있도록 노력했다. (후략)

셋째 원칙은 이 책의 제목 '세상을 비추는 거울'에서 엿볼 수 있다. 필자는 미술사가 어떤 독립적인 미적 영역을 향해 열린 창이라기보다는 세계의 역사를 우리에게 되비춰주는 하나의 프레임이라고 생각한다..(중략).. 어떻게든지 사회적, 기술적, 정치적, 종교적 변화의 기록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비추는 거울, 미술>의 저자 서문 중에서 

그 그림이 뭔지도 모르겠는데 보여주지도 않고 설명만 빼곡이 들어차 있는 '전문' 미술사에 혀를 내두른 적이 있는 당신을 위한 책, 입니다. 독자에 대한 배려까지 자신감의 한 축으로 삼는 이 야심찬 통합 미술사는 확실히 감칠맛이 나요. 고급 독자층이 아니라 중급 정도의 책/예술 애호가들을 위한 책이란 게 뚜렷합니다. 문체는 교재 느낌보다는 강의하는 느낌을, 즉 '읽으면서 바로 흡수할 수 있을 정도의 적절한 난이도와 흥취'를 추구하고 있어요. 비슷한 책들에 비하면 전문용어의 사용 빈도가 극히 낮은데, 신기하게도 언급하는 내용은 충실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잘 쓰여졌다는 얘기고, 미술 수필 같은 느낌이 나서 읽기도 좀 더 재밌어요. 일례로...

'인상파(Impressionism, 인상주의)'는..(중략)..캔버스에 그리기 전에 더 나은 색조를 얻기 위해 이전 화가들이 활용했던 유채 스케치가 이젠 그 자체로 작품이 되었다. 화가들은 더 이상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 하지 않았다. 대신 망막에 비친 일시적인 자극의 패턴에 반응하고자 했다. 오브제가 없으니 선이 있을 리 없었다. 사실 드로잉 자체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모든 것은 색채로만 존재했고, 유동적인 물감으로만 형체를 갖추었다. 이 같은 새로운 접근법은 눈이 카메라와 유사한 점은 물론 다른 점도 있음을 알려주었다. 눈에 보이는 것, 즉 그림은 자연의 시적인 제안에 반응하는 감수성, 즉 마음의 문제였다. 더 나아가 생기 넘치고 환희에 떨리는 손을 가진 몸의 문제이기도 했다. 

모네는 그림을 '대기(大氣)'라고 말했다. 그의 손에서 자연은 안개와 연무, 파동을 통해 굴절된 햇빛이었다. 

-p.341에서 


끌로드 모네, <일출>

 

인상주의에 대한 두 문단 정도의 정의. 당대 사회와의 관계. 대표 화가들의 삶. 타이트하면서도 짜임새가 좋은 편이네요. 더욱이 서양 이외의 미술사에 대해서도 언급 빈도가 (상대적으로)높고, 각기 다른 문명의 미술들이 만나는 순간에 대한 묘사들도 인상적입니다. 특히 서양 미술과 접점이 있는 예술들이 대우를 받고 있네요. 비잔틴, 이집트, 에도-일본, 이슬람...

네 맞아요. 이 책도 한계가 있습니다. 김홍도도 신윤복도 안나와요. 제3세계까지 아우르겠다고 공언한 자신감에 비하면 여전히 '지역 분배'에 대한 공평함이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시대별로 진행하는 미술사의 불가피한 단점(전 세계적으로 순간이동을 해대는)은 저자 자신도 서문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인정하는 바, 안정된 통일감 역시 부족하다고 할 수 있겠죠. 

그래도 가치있는 책이 아닐지. 저 정도의 단점은 세상 모든 미술사 책에서 다 뽑아낼 수 있거든요. 일종의 문명사이면서 역사와의 적극적인 교류를 추진하는 야심찬 미술사 책, 그럼에도 읽기에 어려움이 덜하고 종종 시적인 흥취와도 만날 수 있는 책. 이 정도면 기분 좋게 추천할 수 있겠습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자들의 여정은, 수많은 세계-서양-미술사는, 그리고 엠디의 추천은 그 종착지-완결점에 도착할 수 없음으로 인해 영원히 계속될 것이에요. 모든 아름다움은 비극이래요. 콜. 

 

MD 마음대로 또다른 미술사 책들 4  

 

 

 

 

 

 

 

<서양미술사>...따로 소개하지 않아도 될 책인데요. 여기 올린 이유는.. 세일 중이거든요. 마일리지 쿠폰까지 주고 해서 되게 싸요. 일전에 25% 할인이라고 자랑했는데 더 할인하게 돼서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근데 지금보다 더 싸지진 않을거예요. 재고도 그렇게 많이 안남았어요. 

<이미지로 보는 서양미술사>는 입문용으로 추천요. 텍스트보다는 도판 위주의 구성인데다 분량도 부담이 없어서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설명이 좀 더 상세한 세계 미술 화보라고 할까요. 그림 구경하는 맛이 쏠쏠하고, 설명도 눈높이를 낮추어서 청소년들이 읽어도 괜찮습니다. 각종 예술 사조와 기초 용어를 익히기에도 좋은 시도가 될 수 있겠네요. 

<art since 1900>은 진짜, 완전 빵빵하고 멋있는 책이죠. 연대기적 구성을 취하고 있지만, 20세기만 다루는 그 특성상 훨씬 밀도가 높다보니 어떤 성과가 다음 시기의 언젠가에 다시 반영되고 변주되어서 (위에서 말씀드린 연대기적 구성의 태생적인 결함을 감안할 때) 훨씬 유기적이고 탄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데올로기적 다양성, 각종 ism에 대한 정신분석학과 사회분석학적 동시 접근 등 제1급의 꺼리들이 가득가득 들어차 있어요. 서양 인문학이 개발한 거의 모든 분석 도구를 만나보실 수 있는 박람회라고나 할까요. <세상을 비추는 거울, 미술>의 20세기 전용 업그레이드 버전이며, 말 그대로 20세기라는 잡종 욕망의 만화경을 파고들어가는 다각도의 집중력이 눈부십니다. 강추! 근데 비싸요. 대신에 크고 아름다워요.

<이콘과 아방가르드>는 미술사 책이라고만 하긴 좀 그렇지만요. 미술을 통해 살펴보는 세계관 탐험이라는 측면에서는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주류 서양 미술사에서 냉대받는 비(非) 로마-카톨릭 계열 미술들을 통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주류 서양 문화와는 또다른 세계와 만날 수 있어요. 이콘의 세계는 이데아의 허접한 모사에 불과한 천박한 지구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시스템(인과적 사고체계와 언어)을 포기하고 신비 그 자체를 지상에 받아들이는 성소이며, 그로 인해 '신 이하의 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신성이 발붙이게 되는 아름다운 모순을 체현하는 세계입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art since 1990>이 인문학적 해부학이라면 이 책은(역시 상당한 인문학적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어떤 감동을 동반하는 장엄한 논픽션같은 느낌이 들어요. 왜 미술이 세상을 반영하는 거울인지 알려주는 또다른 뛰어난 성과. 역시 강추. 이 책도 좀 비싸지만... 대신 역시 크고 아름다워요. 

 

"E.H.곰브리치의 풀 네임을 말해봐." 그녀는 머리칼을 꼬아올리며 '이요우제프 하이든, 곰브리치'라고 말했다. "있잖아, 사실 그런 건 없는 거잖아. 백 퍼센트의 서양미술사 같은 건." 나는 대답 대신에 그녀의 귓볼에 키스했다. 괜찮아, 라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녀는 잔디를 뜯었다. 나는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의 첫 문장을 마음 속으로 읽었다.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더운 가을의 오후에,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100퍼센트의 서양 미술사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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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9 2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09 2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rine 2009-09-11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 책들이 너무 많네요. 너무 많아서 괴롭습니다. 시간도 없고 돈도 없는데 읽고 싶은 책은 넘쳐나고... 한 500년 쯤 살았으면 좋겠어요.

외국소설/예술MD 2009-09-11 13:59   좋아요 0 | URL
정말 너무 많죠. 정말 천국이 거대한 도서관이 아니라면...
아니라면.. 거대한 나이트클럽이라거나 말입니다..

일년열두달 2009-09-27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콘과 아방가르드, 저도 그 "크고 아름다움"을 소장하고 싶지만 언제나 가격 앞에서 무너지고 마네요..

외국소설/예술MD 2009-09-28 18:34   좋아요 0 | URL
아아, 작은 것 두 개와 큰 것 하나는 결국 같은 것이더라..
 

만화MD님의 글 중에 호러물 특집이 있었죠. 즐겁게 읽다가 의아한 점이 있었습니다. 영화 <매드니스>였는데요. 이 영화를 본 사람이 별로 없다, 주위에는 없었다.. 라고 말씀을 하시더란 말입니다. 설마, 저건 엠비씨 주말의 명화에서도 해 준 유명한 영화인데 정말 사람들이 많이 안봤나? 게다가 주위 사람들도 거의 다 봤던데..(물론 대부분 제가 보자고 해서 같이 봤지만) 

해서, 나도 호러물 특집을 해볼만 하지 않을까?

예술 담당이니 영화도 내 담당일거야(유권해석).  

그래서 이번 신간브리핑은 신간이 별로 없는, 뜬금없는 


 내맘대로 공포영화 3선

입니다. 

바야흐로..라고 쓸 수 없게 되었군요. 이제 흘러가고 있는 여름은 공포물의 계절. 그러나 여름의 기세가 꺾였다고 공포영화에 관심을 끄시면 아니됩니다. 스산한 환절기 새벽에 보는 공포영화가 진짜 제맛이거든요. 끝내줍니다. 겨우 더위를 피해보자고, 아니면 소개팅한 여성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같은 불순한 목적의 감상과는 격이 달라요. 아주 강력하게 추천해 드리는 MD선정 공포물과 함께 쌀쌀한 가을을 준비하시길.

 

우선 가이드북.

           

 

<영화 속 오컬트 X-파일>은 온라인에서 각종 심령/오컬트 현상에 대해 기고하고 활동해 온 '멀더(요원 아님)' 이한우 씨의 공포영화 이야기입니다.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각종 크리처나 귀신들의 유래와 전설 등을 쉽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구미호의 유래나 강시 영화의 계보도같은 재미있는 자료도 있고요. 무엇보다 수록된 영화들이 흥미로운데, 유명한 것들도 꽤 있지만 매니악한 영화들도 많아서 호러물의 팬이시라면 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설마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가 나올 줄은 몰랐고, 미쉘 소아비 감독의 영화가 <아쿠아리스> 대신 <델라모테 델라모레>가 들어가 있을 줄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빨간 색 문장을 읽고 '아 그래? ㅋㅋ' 하신 분은 냉큼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나름대로 리스트업도 되고 좋네요.

<김시광의 공포 영화관>은 전에 소개해 드린 바가 있습니다. 앞서 소개드린 책에 비하면 좀 더 보편적인 영화들이 수록되어 있고, 베스트 감독이나 베스트 걸작선 같은 유용한 가이드도 들어 있어요. 각 영화 이야기에는 <오멘>의 자녀살해 욕망이라든가 하는 재미있는 인문학적 분석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아 이런 뜻도 있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을 수 있죠.  호러에 입문해볼까 하는 분들께 더 추천해 드립니다. 요즘 졸작이 많아서(하긴 늘 졸작이 많았죠) 아무거나 밟았다간 지뢰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은 현재 2008년 개정판이구요. 표지 때문에 소개해 드리는 건 아니고, 이 책에 은근히 장르물이 꽤 소개되어 있거든요. 겸사겸사 영화 리스트북 하나 갖춰볼까 생각하시면 요것도 괜찮습니다. 은근히 매니악한 영화가 많아서 정말 죽기 전에 이런 것도 봐야 하나 싶은 것도 있습니다만...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무작위 삼선, 순서는 무순입니다. 제목에는 베스트라고 썼지만 사실 좋아하는 것들은 너무 많으니까요. 베스트는 아닐지도. 

선정 기준은 그저 제가 좋아하는데 왠지 유명하지 않거나 저평가된 듯한 영화들

시놉시스는 링크된 dvd를 찍으시면 보실 수 있어요.

 

1. 미스트 (2007,프랭크 다라본트) 

            

(왼쪽부터 영화 DVD, 원작이 수록된 단편집,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그리고 시학을 쉽게 해설한 스토리작법 스테디셀러) 

'응?' 이라고 생각하실 분들은 두 부류일 겁니다. 이 영화는 유명하다. 혹은, 왜 이따구 영화가 추천일까(;;)... 논란의 영화죠.

 <미스트>의 특장점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B급 몬스터 크리처물에 대한 열광적인 애정. 프랭크 다라본트가 단순히 스티븐 킹의 영화 멘토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양반도 골수 SF-호러물 매니아입니다. 감독 데뷔 전에 각본에 참여한 유명한 영화는 바로 B급 크리처물의 걸작 <우주생명체 블롭>이죠. 헐리우드의 불문율 중 하나인 '어린이를 희생시키지 않는다'를 거침없이 깨부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 각본을 쓴 양반이니...

<-우주생명체 블롭 DVD

그런 의미에서 감독판 DVD에 수록된 흑백 버전은 정말 멋있습니다. B급 영화의 센스를 두 배 이상 돋보이게 해 줘요. 특히 괴물들의 경우 예산 문제로 특수효과가 약간 지지부진한 감이 있었는데, 흑백 버전에서는 훨씬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인상적인 점은 카메라워크의 재발견이었어요. 외부의 괴물들만큼이나 폐쇄 공간에 갇힌 인간 집단의 무서움을 담아내는 카메라는 일정한 거리의 건조함을 유지하면서 갈등을 관찰하고만 있습니다. 좀 과장하면 마치 저예산 다큐멘터리같은 느낌이 듭니다. 본격 몬스터 영화에서 만나기 힘든 연출임에는 분명해요.

나머지 한 가지 장점은 바로 논란이 되고 있는 후반부입니다. 원작 단편(중편)의 열린 결말과는 다르게 스토리를 끝까지 밀어부치는데요. 원작자인 스티븐 킹은 만족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히 우리나라의 관객들이 난리가 났었죠(미국에서의 평은 좋은 편입니다). 강력한 스포일러라서 힌트를 드릴 수는 없지만, '영웅과 비극'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적 요소가 대단히 잘 맞아 떨어집니다. <미스트>는 주로 반 주류를 지향하던 B급 몬스터물이 고전 극작의 정수를 흡수한 보기 드문 사례이며, 이러한 고전 비극적 요소가 단순히 설정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영화스러운 의문'을 던진다는 측면에서 매우 흥미롭죠. 비록 몇몇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약간 개연성을 잃긴 했지만, 오히려 그런 특징 때문에 마치 그리스 비극을 관람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까지 합니다. 묘한 경험이죠.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 캐릭터간의 갈등, 영웅과 반영웅적 요소의 비교 등 흥미로운 꺼리가 많이 준비되어 있는 영화입니다. 공포물의 팬이 아니더라도 기존의 영화 팬이시면 볼만한 여지가 충분해요. 좀 징그러운 장면이 있긴 하지만, 대신 근래 영화 사상 가장 손꼽히는 여성 악역도 만나보실 겸 찔러 보세요.

p.s: 재미있는 글을 읽었었는데, 씨네21에 연재된 진중권의 글 중에 바로 <미스트>에 대한 얘기가 있더군요. 제가 위에 말씀드린 점과 거의 정반대의 결론입니다. B급 디지털-몬스터 장르물과 그리스풍 비극 스토리 전개의 어색한 조합에 대한 내용이었어요. 시간나시면 같이 읽어보세요. 아참, 스포일러가 약간 있습니다.

<미스트>, 안개가 몰고 온 공포와 광기 -진중권 (씨네 21)  

 

2. 큐어 (1997, 구로사와 기요시) 

                               

                                   <큐어>                                    <스펠바운드>            현재 절판된 조이스 캐럴 오츠의 <좀비> 

 -개인적으로 싸이코 스릴러 중에 최고로 꼽는 작품입니다. 최면 연쇄살인에 관한 내용으로 출발했는데 어느새 싸이키델릭한 컴플렉스 심리물이 되었다가 아예 초현실적으로 점프했다가 결국 기괴하게 마무리되는 걸작(뭔가 써놓고 보니 전혀 걸작스럽지 않아)입니다. 한 장르 안에 묶이지 않고 같은 영화 내에서 수없이 변신하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특성을 생각하면 뭐 그리 놀라운 점은 아닙니다만.

<큐어>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한 정점입니다. 연출 측면에서는 특히 사운드가 압권이죠. 어디서 본 얘깁니다만, 큐어는 세상에서 세탁기 소리가 가장 무섭게 느껴지는 영화입니다. 기괴한 음악이나 잡음 따위 쓰지 않고, 일상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증폭시키는 것만으로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센스가 일품이죠. 여기에 편집 리듬도 독특해서(마치 기타노 다케시를 방불케 합니다) 예기치 못한 순간의 점프 컷들이 특히 관객들의 호흡을 불규칙하게 끊어 놓습니다.

싸이코 스릴러라고 해서 범인과의 숨막히는 추격전 같은 걸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거의 모든 걸작 싸이코 스릴러가 그렇지만, 눈에 보이는 써스펜스는 중요하지 않아요. 일상 속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이뤄지는 건조한 살인 씬들에 이어 후반부의 초현실적인 음울함까지 매끄럽게 이어지는 불안함만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안함. 최면술사인 마미야의 최면 문구가 이 기묘한 울림의 영화를 그대로 말해줍니다. 관객들의 마음을 섬짓하게 하죠. 

너는 누구야. / (웃음) 제 이름은 XX. 학교 선생님이예요. / 아니, 너는 누구야. / (??)저는 선생님이고... 얼마 전에 결혼했어요. / 아니..바보야. 나는 묻고 있는거야. 너는 누구야. / ...나는... 

사다코는 비명을 지르게 하지만, 마미야는 침을 삼키게 합니다. 목구멍 깊숙히 넘어가는 침 덩어리의 촉감.

꼭! 사운드 올려놓고 감상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참, 엔딩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imdb.com에서 격렬한 토론이 벌어진 바 있으니 가서 체크해보시면 좋겠네요.  

+

비교해보실만한 작품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스펠바운드>입니다. 기존의 히치콕 영화와는 다르게 초현실적인 장면들이 자주 등장하고 정신분석학적인 내용으로 영화가 진행돼요. <현기증>을 떠올리는 분도 계시겠는데, 그보다 더 본격적(?)입니다. 재밌는 건 꿈 속의 장면들을 연출하기 위해서 히치콕이 화가 달리를 초청했다는 거죠. <안달루시아의 개>에서도 보여줬던 달리의 몽환적인 미감을 기대했을텐데, 예산 문제 때문에 완전히 구현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꿈 장면은 충분히 환상적이네요. 강박증과 정신질환에 관해서 아직도 볼만한 싸이코 스릴러물임에는 분명합니다. 패턴에 집착하는 미장센은 스탠리 큐브릭의 선조 같은 느낌도 있고요. 고전이지만 묘한 분위기를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어요. 다만...무섭지는 않습니다. -_-;; 

<헨리: 연쇄살인범의 초상>이나 <피핑 톰>같은 싸이코물도 좋지만, 알라딘에 아이템 등록이 안돼있네요. 디비디 안나왔나. 

+

숨겨진 책도 한 권. 같이 소개드릴 책은 미국 문학계의 팔방미녀 슈퍼 히로인, 조이스 캐롤 오츠의 <좀비>인데요. 절판된지는 꽤 되었지만 헌책방에서 구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실제 연쇄 살인범이었던 제프리 다머의 사건을 바탕으로 쓴 1인칭 소설이죠. 연쇄살인범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특이한 시점이 인상적인데, 비슷한 소재의 소설들보다 훨씬 건조하고 스트레이트합니다. 변명도 없고 드라마도 없습니다. 진정한 싸이코 소설을 꼽으라면 단연 손가락에 꼽힐 괴작이죠. 브람 스토커 상을 수상한 조이스 캐롤 오츠의 책이니 퀄리티도 보장할만 합니다.

 

3. 소름 (2001, 윤종찬)  

             

가장 어둡고 끈질기고 '정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한국 공포영화. 호러물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께 가장 추천해 드리고픈 영화이지만, 불운한 경우 심지어 졸아버릴 수도 있는 영화죠. 그러나 이 영화는 엔딩을 곱씹다보면 반전 아닌 반전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름아닌 이런 질문. 

"아니, 귀신 영화라는데 귀신은 어디서 나와?"

말씀드리자면, 귀신은 당연히 영화 안에 있습니다. 잘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극장을 나오고 3분쯤 뒤에 입을 쩍..(사실 그만큼 엄청난 트릭같은 건 아닙니다. 제가 머리가 안좋을 뿐..).

예술영화 출신이었던 윤종찬 감독의 연출은 느리고 어둡습니다. 특별히 자극적인 장면 같은 것도 없어요. 그런데 중반 이후가 되면 등장인물들이 소용돌이에 휩쓸리듯이 스토리에 얽혀들어가고, 빠져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처럼 모든 일들이 계속 꼬여 갑니다. 뭔가 이 모든 것들의 배후에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는 보이지 않아요. 느껴지지만 아무도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불길한 어떤 것. 다 쓰러져가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다들 어딘가 이상해 보이고, 귀신이 있다는 소문은 점점 커져갑니다. 기묘한 압박감. 이게 <소름>의 특징이고, 한국 공포영화 사상 전무후무한 컨셉트이기도 해요. 게다가 잘 만들어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장화, 홍련>보다 강렬한 엔딩에 이르기까지 아주 군더더기 없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

<악마의 씨>는 피 한방울 보여주지 않고 심리적인 압박을 줄기차게 가하는 괴로운 영화입니다. 사실 이 계열에서 제일 유명한, 소위 심리 압박 호러물의 마스터피스죠(더불어 오컬트 호러물에서도 지존급 대우를 받고 있군요. 2관왕). 너무 유명한가요?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인지 유명세에 비해서는 보신 분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저도 맨 처음 볼 때는 좀 의아했는데, 보고 또 볼수록 범상치않은 영화인 것 같습니다. 대낮 장면이 이렇게 많은 공포물도 드물지 않을까... 연출도 연출이지만 미아 패로우의 다크써클만으로도 포쓰가 넘치는 진짜 걸작.  

+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 역시 불길한 기운만 감지될 뿐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유령의 집 이야기입니다. 영화 <디 아워스>에 영감을 주기도 했죠. 이 책 역시 앞서 소개드린 두 영화처럼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건데' 라고 반문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사실 영국인을 비롯한 영미권 사람들이 아니면 이 책의 진가를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저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어요. 그렇지만 히스테리컬하게 변해가는 가정교사와 종잡을 수 없는 불안에 떠는 아이(들)와의 상호작용은 인상적이었습니다. 헨리 제임스 특유의 편집증적인 심리묘사가 볼만합니다. 이 책도 <악마의 씨>처럼 두번째 읽을 때 더 와닿더군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작품은 다시 접할 때 어떤 장치들을 발견하면서 더 깊이 빠져드나봅니다. 연극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현대 오페라로 만들어졌고 음반도 구할 수 있습니다.  

+

음악도 빠질 수 없죠. 몇 곡 잘못 들으면 호러 전문 작곡가로 오인될 법한 현대 작곡가 리게티의 현악 사중주 음반입니다. 보통 현악 사중주에서 주도권을 잡는 바이올린이 이 곡에서는 실체가 모호한 안개처럼 앞에 나섰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하고, 첼로는 주위에 아랑곳없이 강박적으로 노래하는 남자 같아요(베르크의 오페라 '보체크'의 주인공이 떠오르네요). 뭔가 중구난방인 것 같다가도 저 아래 어디에서 어두운 통일성이 느껴지는, 사람의 언어로 쓰여지지 않은 음모론 같은, 안개 짙은 낯설은 거리에서 이상한 노래만 계속 들려오는 듯한 기분. 멜로디도 기괴하고 음산하지만, 대체 어떤 점이 그렇게 무서운가를 말하라면 딱히 정확한 단어를 찾을 수 없는... 현대음악이 어렵게만 느껴지시는 분은 호러 느낌으로 한 번 시도해 보세요. ㅎ 

  

급종결. 이상입니다.

p.s: 사실은 10선 하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말도 안되는 길이라는 걸 예감하고는 포기...  

p.s2: 그래서 5선 하려고 했는데 이하 동문...  

p.s3: 이제 예술/역사 책 외에 다른 책 얘기도 할 수 있게 되었네요.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p.s4: 위에 수많은 품절 DVD들. 인터넷 어딘가에는 물건이 꼭 있답니다. 웃돈 주는 거 말구요.

어쩄든 끝내기 전에 오늘도 서비스 서비스! 

분량상 리스트에서 빠진 영화 <REC>의 속편 트레일러입니다. 너무 재밌겠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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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공포영화 TOP10
    from mujige.com 2009-09-02 03:41 
    요즘 현대인들은 영화를 너무 많이 봐 도데체 몇편의 영화를 평생에 걸쳐 보는지 모를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몇년전까지는 국내 개봉되는 영화 대부분을 봤고 예전에는 수천장의 비디오 테이프들을 소장해 대형화면으로 개인극장을 꾸미기도 했다.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 대부분의 영화들이 보고 나서는 바로 잊어 버리게 된다.나중에 분명 본 영화인데 내용도 생각안나고 제목도 생각안나는 영화들이 태반인데 반면, 그중 몇몇 영화들은 아주 어릴때 봤음에도 또렷히 기억나는..
 
 
gkgk 2009-08-28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메일로 가져갑니다. (--)(__)(--)(__)//

외국소설/예술MD 2009-08-31 09:57   좋아요 0 | URL
그저 영광입니다.

경브라더스 2009-08-28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영화 속 오컬트> 읽었어요. 공포영화를 그닥 좋아하지 않지만 영화를 좋아해서 읽게 되었어요. 첫장부터 잘 나가더라고요. 공포에 대한 정보도 많지만 창작의 영감을 주는 내용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저자는 알면 두렵지 않은 것이 공포라고 하더만 이 책을 읽고 공포영화를 보니 더 세밀하게 느낄 수 있어서 좋네요, 잘 읽고 갑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8-31 09:59   좋아요 0 | URL
네, 방금 생각이 났는데요. 왜 많은 대중영화들 중에 유독 공포영화만 가이드북이 이렇게 나올까 말입니다. 언젠가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 싶습니다.

ddddd 2009-08-29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단하시군요 좋은정보 받아갑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8-31 09:59   좋아요 0 | URL
리플에는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

지나가다 2009-08-29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공포영화 관련인지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잠시 보고 갑니다.
안 그래도 얼마전 여름 끝물 맞이 명작(?)감상으로 '큐어'를 오랜만에 다시 보고 감탄했는데
그 영화를 알아봐주는 분을 이렇게 만나니 괜히 반갑네요.ㅋㅋ
소름 하고 악마의씨 도 인상 깊게 봤던 기억이 나구요. (기억이 새록새록)
미스트는 아직 못봤는데 꼭 챙겨서 봐야될 것 같은...ㅋ.
영화 외에 소설이나 음악쪽은 잘 몰랐는데, 와 대단하신것 같아요.ㅎ 잘 보고 갑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8-31 10:00   좋아요 0 | URL
네 좀 더 연관성있는 콤보를 꾸려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쉽질 않더군요. 좀 더 제대로 했으면 좋았겠다 싶기도 합니다.

미스트는 이쪽 팬이시면 필견입니다. ㅎㅎ

멀더 2009-09-01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영화 속 오컬트 x파일 저자입니다.
변변치 않은 책을 이렇게 소개해 주심에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감사드리겠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여러번 나왔지만 그보다 더 가슴 깊이 감사함이 전해지는 듯 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하겠나이다 _(_ _)_

외국소설/예술MD 2009-09-01 16:41   좋아요 0 | URL
와.. 저자분께서 들러주시니 영광입니다. ^^
보통 신간브리핑이면 책 얘기를 좀 더 길게 썼을텐데, 이번에는 영화 중심이 되다보니 길게 소개하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다음 책도 내 주시기 바래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melory 2009-09-30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매우 좋아하는 공포 영화인 <미스트> <소름> <로즈마리 악마의 씨>가 들어 있어 반가웠습니다. ^^

외국소설/예술MD 2009-09-30 16:51   좋아요 0 | URL
네, 잘 만든 영화이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하면 좀 심심한 결론인가요? ㅎㅎ
 

비록 제가 어린이 (좌익)잡지 고래가 그랬어를, 그리고 편해문의 놀이 책들을 좋아하긴 합니다만, 고래가 그랬어에서 나온 놀이 전문가 편해문의 동남아 촬영 사진집이라는 책 소개를 처음 들었을 때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_-;; 그 컨셉트만으로도 이 책은 근래 가장 잊혀지지 않는 조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놀라움은 경악에 가까운 것이어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기대는 안했습니다.;; 아마추어가 찍은 '동남아의 어려운 삶 속에서도 꽃피는 아이들의 순수함' 블라블라... 

사실 저는 에드워드 슈타이켄의 <인간 가족전>같은 시리즈를 싫어합니다. 무작정 인간의 긍정적인 본성을 내보이면서 세상을 (본의건 아니건) 미백하려는 시도는 영 불편해서요. 우는 애 앉혀놓고 강제로 스케일링을 하는 기분이랄까. 휴머니즘 사진의 근간까지 부정할 깜냥은 되지 못하지만, '가능한 모든 이미지는 이용당한다'는 수잔 손탁의 고찰에 가장 순진하게/바보같이 들어맞는 그 모습들은 사진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더군요. 예 뭐, 어중간한 놈들이 꼭 그런 핑계를 대긴 합니다만.  

(위) 수잔 손탁 <타인의 고통>

 

그래서 <소꿉 Children's Playing House>은 어떻다? 

좋았습니다. 참 좋았어요. 일단 사진들이 준수합니다. 정적인 모습을 찍을 때는 의도적으로 프레임을 꽉 채우거나 정리하려는 (다분히 아마추어적인 욕망) 시도가 엿보여서 종종 아쉽긴 했지만, 뛰노는 아이들의 스냅 사진들을 중심으로 전반적으로 구성이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아이들은 거의 모두가 카메라를 두려워하지 않는 완벽한 모델들입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빈곤함이 엿보이는 이미지들을 '잘 감상했다'고 말하면 다소 (손탁적으로) 폭력적인 감상일까요. 그래도 '보기에 좋았다'고 고백은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감상적인 휴머니즘이 엿보이는 이 사진들에서 왜 불편함이 엿보이지 않았을까...

아마, 사진 속의 아이들이 늘 행복해 보이지는 않기 때문인 듯해요. 사진들 속에서는 권태가,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한숨이, 딱히 다른 걸 할 것도 없는 현실에 대한 자조가 가끔씩 고개를 듭니다. 물론 이것들은 그래도 뛰어놀지요. 아이들에게 있어 놀이는 유희 이전의 근본적인 행위, 마치 업보 같습니다. <날개>의 작가 이상의 글 중에 '권태'라는 제목의 수필이 있었지요. 거기 보면 시골 애들이 하다 하다 할 게 없어 똥을 눈 다음에 그 똥이 웃기다고 하하거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아이들에게 있어 놀이는 그 즐거움 여하를 떠나 어떤 필수요소, 통과 의례, 시지프스의 바위 같아요. 이런 고찰은 유년 시절에의 회한 섞인 미화와는 반대 방향에 있습니다. 오히려 냉정한 느낌까지 풍기죠. 늘 즐거우리란 보장은 없으나 해야 하는 것. 놀이는 아이들의 사명인 것이죠...

 

그리하여, 의도치 않았더라도

“이 작업은 상업적 장난감과 미디어, 게임과 학원과 시험에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빼앗긴 채 점점 생명력을 잃어가는 우리 아이들을 비춰볼 거울을 만드는 일이었다.”라고 말하는 작가는 “아이들은 동무들과 웃고 뛰놀며 보내느라 하루해가 짧아야 마땅하다. 그런 아이들의 삶과 웃음과 놀이를 사진으로 담아내고 그들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여정의 출발이다.”라고 책을 펴낸 의도를 이야기한다.         -책소개 중에서

이 나라의 아이들이 잃어버린 '뛰노는 동심'을 담겠다는 그의 바램은 책에 담긴 그의 의도와는 약간 다른 성과까지 얻어낸 듯합니다. 편해문이 발견한 것은 놀이의 동물적인 특성입니다. 웃고 떠들며 인간애를 느끼는 것 이상의 것. 즉, 그런 밝은 부분만이 아니라 '그림자의 냄새'도 미리 맡아보는 시간. 모든 동물들이 새끼 때 놀이를 통해 살아가는 법을 배우듯, 사람의 아이들도 놀이를 통해 삶의 그늘까지 예비하나봅니다.

고래가그랬어에서 나온 놀이 전문가의 사진집. 그 괴조합에서 나온 기대 이상의 성과. 어쩌면 09년 예술 분야에서 나온 책들 중에 가장 놀라운(가장 위대하다는 뜻은 아니지만요) 성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워낙 사진집이 안 팔리는 세상인데다 저자가 사진가도 아니다보니 잘 팔리긴 힘들겠다고 고백하게 돼서 슬프지만, 놓치지는 마시라고 권해 드립니다. 구입하지 않더라도(사장님 죄송합니다) 어딘가에서 만난다면 꼭 펼쳐 보시길.  

p.s: 문득 피씨방 알바시절, 피씨방의 오후를 점령하던 초등학생들이 떠오릅니다. 흥분하고 떠들고 때로는 권태로워하면서도 행동은 멈추지 않는 그 모습만은 아이들의 그것이더군요. 그 아이들은 단순한 놀이 결핍 세대가 아닌 웹 세대의 '뉴타입 칠드런'이 될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조세희(선생님)의 <침묵의 뿌리>가 사실은 모든 어린이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사북을 돌아다닐 때 만났던 아이들은 서울내기들보다 해맑았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의 삶과 겨루고 있었지요. <소꿉>과 <침묵의 뿌리>는 달라 보이지만 둘 다 선연한 투쟁의 기록입니다. 모든 아이들은 놀이를 하면서부터 세계와 맞서기 시작하니까요. 부디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게 맞서기를, 아무도 회의하지 않기를, 서로 비웃거나 조소하는 쉬운 유혹에 빠지지 말기를 바랍니다.

 

 

-새로 나온 다른 책들   

 

<처음 만나는 그림>은 예쁜 책입니다. 그림 읽어주는 블로그 '레스카페'에서 온 글과 그림들인데요. 단연코 이 책의 강점은 수많은 그림들!! 근/현대 화가들의 작품으로 짜여진 이 책에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화가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이게 누구의 그림이든간에 참 예쁘구나' 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책의 제목이 참 잘 어울립니다. 낯설은 이름들이지만 그들이 남겨놓은 그림들은 퍽 아름다우니까요. 텍스트도 어떤 지식을 전달하기보다는 그림 한 점 한 점을 앞에 두고 잔잔히 감상을 읊조립니다. 마음 편히 읽기 좋아요.

그림이 많이 등장하는 만큼 인쇄도 중요한데요, 아트북스의 컬러 인쇄는 퀄리티가 좋은 편입니다. 망점이 눈에 띄지도 않고, 반광 재질의 내지도 좋아요. 검정색을 제외하면 해상도도 좋습니다(근데 검정색은 고급 해외 예술 화보가 아니면 어느 인쇄물에서도 해결이 안되죠..). 

근래 나온 편안한 그림 에세이중에서는 가장 감칠맛나지 않나 싶네요. 사이즈도 소박하니, 휴가 지참용으로 쓰기에도 좋겠습니다. 아, 초판 한정으로 표지의 소녀가 담긴 노트가 같이 제공된다능.. 예뻐요. ㅎ

 

kuinjilunasb7.jpg 

책에 수록된 화가들 중 비교적 유명한 아르힙 쿠인지의 <드네프르 강의 달 밝은 밤> 입니다. 이걸로 피서 대신.. 

  

-우리는 이미 200년 전에 그려진 풍경화로부터 산업화가 인간과 자연의 격리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예고를 받았다. (p.253)

 <미술의 불복종>은 주로 권력 유착의 역사로 인식되는 예술사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불평등에 맞서며, 관습을 타파하고 현실에 저항하는 예술의 역사죠. 그렇다면 소위 '저항/민중예술'의 역사인가? 그것도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이 책이 다루는 것은 보다 포괄적인 의미의 저항이고 전위죠. 첫 꼭지가 '예술로써의 분수'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사실주의와 현실 재현 같은 인식론적인 문제, 계몽주의 시대에 접어들어 힘의 균형이 무너진 인간과 자연의 관계, 부터 폭압에 항거하는 (나치도 있고, 페미니즘도 나옵니다) 여러 종류의 저항 미술까지 다채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기존의 상식과는 약간 다른 미술의 여러 측면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그 내용이 어렵지 않고 특별히 어려운 용어도 거의 쓰이지 않았습니다. 미술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그 인식의 폭을 넓히기 위한 첫 도약대로 삼기에 적절한 책입니다.

 

(안돼 너무 길어졌어..) 

  

 

"젊었을 때 락키드가 아니었던 사람은 바보고, 늙어서까지 그걸 듣는 사람은 더 바보다." 응? 

뭐 어때요. 즐거우면 좋지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역사도 좀 더 즐겁게 접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더위를 먹었는지 불면의 나날들입니다. 다음주는 호러 특집요.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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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치 2009-08-05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소개해주신 책들 다 흥미롭네요! 편해문씨 사진집은... 그러게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장바구니에 일단 담았습니다. ^^

외국소설/예술MD 2009-08-05 18:1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이 책을 전면에 딱 걸고 소개를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어요. 객관적인 퀄리티로 봤을 때는 다른 사진 책들도 많은데 말이죠. 걸작 아니고 문제작이라는 단어를 쓰긴 했지만, 이거 결국 제 리뷰가 가장 문제적인 게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ㅎ

그런데 애들 놀이는 다 비슷하더라구요. 어릴적 이런저런 놀이 하면서 자라온 분들께는, 이 책은 푼크툼의 성지입니다(ㅎㅎ).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가 아닌가 싶어요. 매우 드문, 소중한 주제니까요.

onesunnyda 2010-05-13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네프르의 강의 달밝은 밤...근사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게 무슨 복인지...감사합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10-05-13 13:15   좋아요 0 | URL
네 처음만나는그림은 맘 편히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책이죠. 느긋하게 펼쳐 읽으세요. ^^
 

네오 팝아트적인(?!) 사진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어머, 다리 위에 누가 붙여놓은 판박이 스티커네요! 

  

 소개드리죠.

카메라를 가진 자에게만 열리는 숨겨진 작은 미술관, 

<브라이언 피터슨- 접사사진의 모든 것> 입니다. 

   

-여러분이 DSLR에 관심이 있건 없건, 소위 작품 사진이나 살롱 사진에 관심이 있건 없건 상관 없습니다. 아름다운 이미지를 직접 담아보고 싶지만, 그를 위해 따로 수많은 노력을 투자할 자신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오로지 카메라 한 대를 품고 다닐 수고로움과 이 세계를 지켜보는 반짝반짝한 눈만 있다면 무궁무진한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찾아낼 수 있어요.

접사 사진은 사진이 발견을 기록하는 매체라는 사실을 가장 강렬하게 웅변하는 분야입니다. 오로지 바라보고 찾아보는 것뿐입니다. 일상 속에서 이미 수없이 봐 왔던 것들 속에서 패턴을 찾아내고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것이죠. 단 한 번의 셔터 찬스를 놓치고 가슴아파할 일도 거의 없고, 무거운 장비를 지고 산이야 들이야 돌아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천천히, 느긋하게 둘러보는 주위가 어느새 보다 신비롭고 흥미로운 곳으로 변해 있으니까요.

혹시 이런 기쁨이 여러분이 카메라를 살 때 원하던 것은 아니었나요? 

이 책은 일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그것을 기록하는 기쁨에의 증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좋은 사진 교재의 제1조건, 즉 멋진 사진을 보여준다는 명제를 충실히 이행한 거죠. 사실 이 책의 본문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다소의 카메라 하드웨어에 대한 지식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지식이 좀 부족하더라도 상관없어요. 정 부족하면 인터넷이 여러분을 도와드릴 겁니다. 중요한 건 책을 보고 난 뒤에 나도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느냐 아니냐죠. 판에 박힌 듯 지루한 접사 사진들을 보고 "뻔해빠진 아마추어 분야지" 라고 생각하셨던 분들도 이 책을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창의적이고 아름다워요. 

익스텐션 튜브와 링 플래시, 고급 매크로 렌즈, 반사판과 대형 카메라가 (물론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괜찮습니다. 주말에 따로 시간을 내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저 매일의 일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좀 더 찾아낼 수 있다면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질거라고 믿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왜냐하면요. 풍경이나 다큐멘터리 등 각각의 사진 분야는 각기 다른 특성을 요구하는데, 그 중에서 접사 사진은 다른 어떤 사진들보다도 여타 '기술적 능력'보다는 관찰력과 감수성의 비율이 훨씬 높거든요. 접사 사진의 '결정적 순간'은 그저 자신의 마음이 뭔가를 발견하고 감탄하는 그 순간 뿐이니, 느리고 여유롭게 둘러보면서 그 기록을 남기는 것. 왠지 좋지 않나요 +_+

음...그래도 카메라가 없으면 바디 하나랑 렌즈 하나를 구입할 정도의 투자는 하셔야겠죠? -_-;;;

마침 올림푸스에서 예쁜 바디가 나왔... 

  

사실은 제가 갖고 싶어서... 

 

-그리고-

 

<여성과 미술>, 만나기 힘든 주제, 큼직한 도판, 멋진 작품들 - 이 책은 사실 나온지 좀 됐습니다. 이번에 특가 판매(30%)를 진행하다가 보게 된 책인데요.  미술 속에 등장한 여성들을 열 가지 코드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여신이나 여성 영웅 같은 고전적 주제부터 육체와 현실 정치에 대한 고찰까지 두루 잘 정리해 놨습니다. 여성성과 예술에 관한 책은 생각보다 보기 드문데요, 그 중에서도 이 책이 눈에 띈 이유는 특히 교양서로 읽기에 적절한 난이도를 갖고 있어서에요. 텍스트 깔끔하구요. 어떤 이론적 경향이나 정치적 성향을 깊이까지 추적하기보다는 테마와 각 작품들간의 상관관계를 해설하는 정도에서 마무리짓고 있습니다. 여성성-예술에 관해서는 최소 준 학술서급에 속하는 책들이 대부분인데, 이 정도의 여성-예술에 대한 교양서가 있다는 건 참 반가운 일이죠. 

또한 교양서 수준의 책 중에서는 현대미술의 비율이 꽤 높은 편이며, 수록된 근/현대 작품들도 그저 난해한 것들보다는 독특한 임팩트를 갖고 있는 작품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견문을 넓히기에도 용이하고 작품 보는 재미도 좋아요(사실 요게 포인트일지도!). 책 크기도 큼직해서 그림 보는 맛이 괜찮구요. 여러모로 똑똑한 책이죠. 

쇠라의 [화장하는 젊은 여인] 그림 옆에 신디 셔먼이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는 사진을 배치하다니. 앙큼하지 말입니다.

  

 

<떠돌이 감독의 돌로 영화 만들기>, 이상한 도큐멘트- 사실 이 책은 '책을 읽는 맛'은 덜합니다. 뛰어난 문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뛰어난 사진이나 그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 평범함이 책의 주제와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 있어요.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 동네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뚝딱 만드는 '동네 영화' 이야기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흥행/예술이라는 영화의 두 가지 공식 이외의 또다른 가능성이죠. 동네 영화에는 그 제작 집단 내의 소통과 유희로서의 가능성이 우선시됩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 안의 기쁨을 발견하고, 함께 참여한 사람들과 소통하기 시작하는 것.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는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만드는 영화라는 것. 이름을 다 써넣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찍힌 제작 과정 사진들과 그 사람들에 얽힌 이런저런 사연들... 때로 그 사연들 자체가 한 편의 영화같기도 합니다. 약간 어수룩한 느낌의 책, 그러나 그 냄새는 우리 삶에 바싹 접근한 영화가 풍기는 것이었네요.

  

 

 

<한국의 간이역>, 느리고 내밀한 여행자들을 위하여-교양 건축서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임석재 교수의 새 책입니다. 근데 제목만 보고 감상적인 기행문이라고 생각하시면 안돼요. 간이역 건물 하나에 할애한 수십 페이지를 읽다 보면 이게 '건축' 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박공 하나, 작은 기둥 하나까지 어느 하나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지요. 작은 간이역 건물 안에서 읽어내는 것들이 무궁무진합니다. 건축 유행의 변화, 환경의 영향, 설계자의 개성, 한국 건축 특유의 성향, 편의를 생각한 따뜻한 마음씨, 화단에 뿌려진 소박한 욕심... 사람들이 거의 신경쓰지 않는 저 작은 건물들 안에서 수많은 의미와 자취들을 발견해내는 저자의 꼼꼼함이 참 인상깊습니다. 

사실 일반 교양서로 읽기에는 너무 건축스러운(?) 얘기가 많아서 심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용한 여행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이 책에 특히 공감하실 수 있을 거예요. 작고 오래된 공간에서 소소한 디테일들을 발견하는 재미, 조용히 거닐며 세상을 좀 더 자세히 훑어보는 여행, 작은 기차역을 중심에 두고 두어 시간을 돌아다니는 걸 이해하시는 분이라면 <한국의 간이역>의 꼼꼼함에 반하실 겁니다. 수십 페이지 분량으로 풀어놓은 작은 간이역들의 구석구석을 볼 수 있으니까요. 확실히 보기 드문 경험임에 분명합니다.

  

 

<미디어 아트- 예술의 최전선>, 최전선은 여러모로 치열하다- 근래 소개드린 책 중에 단연 최고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책. 현대 예술의 첨병인 미디어 아트 분야의 선두주자들과의 인터뷰집입니다. 고전 미학과 현대 미학, 심리학(특히 인지심리학)과 철학, 사이버스페이스와 메카닉에 대한 탐닉 및 그 생물학적 변용 등, 겉보기에도 짬뽕스러운 미디어 아트는 그 외양 못지않게 내부의 동력원도 정말 가지각색+하이브리드의 집합체죠. 

기술 지배의 시대에 바로 그 기술을 이용해 전위와 중심권력의 해체를 주장하는 것은, 사실 정치적 분야에서 먼저 우리에게 알려졌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미디어를 이용한 민중의 역습-네그리의 다중론이 그 중심에 있죠. 그러나 미디어 아트는 담론이 아닌 직접 행동입니다. 새로운 기술의 힘을 사회 중심권력에 압수당하지 않고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으로 탐구하는 행동은 미학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작업이죠. 비록 순수한 탐구와 상상 -사이버스페이스와 호접지몽이라거나- 이라고 하더라도, 신기술에 대한 탈자본적 상상은 그 자체가 이미 불온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 특징이 바로 미디어 아트가 다른 기존의 예술들에 비해 갖는 차이, 즉 예술이라는 행위 자체가 기존 세계와 맞서는 '최전선'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죠. 

벤야민이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테크놀러지는 미학의 상상력에 변환을 가져오며, 그 기술적 패러다임이 변할 때마다 나타나는 새로운 미로 속에는 정말 다채로운 시도들이 펼쳐집니다. <미디어 아트- 예술의 최전선>은 그 격변하는 세계를 훔쳐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비록 절대 쉽지 않은 책이지만, 관심있는 분들은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래요.

(이 책을 읽을 수 있는지 아닌지 대강 체크하는 법. 벤야민의 [기계(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을 읽기가 너무 어렵다면 이 책도 나중에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차회예고. 렛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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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4 0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익. 예술의 최전선 이라는 말 좋군요. 어렵다시니 ...

외국소설/예술MD 2009-07-05 00:21   좋아요 0 | URL
미리보기로 먼저 살펴보세요. 초반만 읽어보셔도 감이 잡히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