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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ire(s) du cinéma...의 엽서들

(장 뤽 고다르, Video, 1997-1998)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은 특별한 영화입니다. 영화에 관한 영화. 굳이 분류하자면 이미지의 충돌과 공격적인 텍스트 삽입으로 만들어진 비디오 아트에 더 가깝죠. 그의 후기작은 국내에 잘 소개되지 않아서 '미디어 아티스트' 고다르를 잘 떠올리지 못하시는 분도 계실 텐데요.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작품으로 국내에 DVD가 출시된 <아워 뮤직>을 권해 드립니다. VHS 특유의 공격적인 원색과 과격한 편집으로 빛나는 초반부는 넋놓고 보기 좋죠. 물론 이 계열에 익숙치 않은 분들께는, 좀, 미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영화의 역사(들)>은 고다르가 '찍은' 영화가 아니라 고다르가 재편집한 '영화들'이므로, 이 엽서(사이즈의 이미지들)의 주인공은 고다르가 아니라 여기로 불려온 '장면들'입니다. 본래의 맥락에서 분리되어 겹쳐지고 분열하고 텍스트의 배경으로 전락하는 장면들. 현대미술 전시회에서나 팔 것 같은 이 엽서들은 그 장면들의 흔적입니다. 캡쳐죠. 맥락에서 완전히 분리시킨 광어회 같은 겁니다. 그러니 그냥 맛보시면 됩니다. 이게 원래 무엇인지, 무슨 장면인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이 영화는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요.

아래 이미지들은 다음 주에 시작될 예술 분야 이벤트의 증정품, 장 뤽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 엽서 세트의 일부입니다.
한 세트는 총 15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올해 예술분야에서는 다양한 분야, 다양한 종류의 엽서를 제작할 계획에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마음에 드는 위치에 두고 볼 수 있는 것만큼 예술 분야다운(?) 증정품이 없다는 결론에서죠. 단 하나의 이미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을 끌어서 곁에 두게 된다면 그건 저의 큰 보람이자 기쁨이 되겠습니다. 좋아해주신다면 저도 행복해질 것 같아요(부끄럽). 다음 세트도 이미 준비중입니다.;


이 엽서 시리즈의 첫 테이프를 끊는 고다르 엽서 제작에 힘써주신 이모션픽처스, 그리고 그 자회사(?) 이모션북스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 감사는 좋은 책을 내 주신 데 대한 것도 포함됩니다. 이 모든 기획이 바로 저 책, <고다르 x 고다르>가 나옴으로써 시작되었으니까요.



그럼 다음 주에 이벤트와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행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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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1-02-17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데요!

외국소설/예술MD 2011-02-17 19:20   좋아요 0 | URL
레알!

스티그마 2011-02-19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엽서를 꼭 받아보고 싶습니다 행운의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기대됩니다 ^^

외국소설/예술MD 2011-02-21 17: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만족하실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_+

shyu99 2011-05-05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구입해도 엽서 받아볼수 있나요?
정말 멋지네요^^

외국소설/예술MD 2011-05-06 16:57   좋아요 0 | URL
아..지금은 다 소진되었습니다. 시즌 한정이라서요. ^^;

미우 2011-06-08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모에요.... 엽서이벤트는 지난 이벤트라고 첨부터 쓰여있던가 해야죠. 저는 책어제 주문하고 왜 엽서가 없나.. 한참 찾았어요. 아 속상해 정말

외국소설/예술MD 2011-06-08 23:34   좋아요 0 | URL
네 죄송합니다; 종료 표시하겠습니다. 추가로 사무실에 재고 있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011-06-16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엽서세트 꼭 필요한데요. 받고 싶어요. 꼭요 ㅜ.ㅜ

외국소설/예술MD 2011-06-21 11:09   좋아요 0 | URL
아 떨어졌어요..;;
 



달라요 달라!



<클래식 시대를 듣다>는 기존의 클래식 교양서들과 좀 다릅니다. 모차르트를 예로 들어 보죠. 보통 클래식 음악 입문서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작곡도 하고 연주회도 했다. 대신에 죽을 때까지 철없이 살았음. 불가피했던 사치와 가난. 방탕한 천재. 저 유명한 영화 '아마데우스'. 살리에리와의 라이벌전(사실이 아님). 소크라테스만큼 유명한 악처(논란이 있음). 온갖 억측을 남긴 '레퀴엠' 작곡에 얽힌 미스테리와 진실.


네, 물론 작곡가의 삶을 알게 되면 그들이 작곡한 음악에 대해 보다 많은 정보를 얻기도 하죠. 그런데 그 정보들의 대부분은 '사건과 실화' 류의 가십 정도에서 그칩니다. "아니 그래서 피아노 치면서 방구를 낀 거랑 그냥반 음악이 무슨 관계냐?" 인 것이죠. 앞서 말씀드린 레퀴엠 같은 경우는 모차르트의 삶을 쥐어짜낸 곡이다보니 그의 인생 전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만, 정작 모차르트의 전체적인 음악관에 대해서는 '순진무구한 아름다움' 혹은 '역시 천재니까' 같은 추상적인 공감 밖에 끌어낼 수가 없어요.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바야흐로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지고, 귀족 계급의 시대는 저물어 시민 사회가 도래! 이때 음악가들 역시 비로소 왕족/귀족들의 예속에서 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모차르트의 바로 윗 세대인 하이든만 해도 음악 '시종'으로서 작곡의 자유는 물론이요, 대부분의 시민적 권리를 누리지 못했거든요. 모차르트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드디어 작곡자는 '윗사람'이 요구하는 음악 대신에 자신만의 음악으로 대중들을 매혹시킬 수 있게 되었고, 또 그래야만 했습니다. 그 자신의 예술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예술가이자 사업가이자 흥행사가 되어야 했으니까요.

이에 사람들(대중)의 마음을 들었다 놓는 풍부한 다성 화음과 아름다운 멜로디가 자연스럽게 발전했습니다. 마침 그건 모차르트의 주특기였죠. 모차르트는 변화한 시대의 대중들이 요구하는 '천재 예술가' 역할을 수행했고, 그에 합당한 창작의 자유와 영웅 대접을 받았습니다. 변화한 시대가 모차르트라는 천재와 만남으로써 비로소 고전주의 음악은 활짝 피었던 거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된, 시대와 천재의 조합에 대한 좋은 예.




결과적으로 모차르트의 정치적 아군이 된 풍운아,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



이렇듯 어떤 작곡자가 뽑아낸 선율들 속에는 그 시대의 기운이 분명히 숨쉬고 있습니다. <클래식 시대를 듣다>는 명곡 속에 숨어있는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배경을 찾아가는 과정이죠. 에피소드 위주로 접근한 기존 클래식 저작들의 틈에서 단연 군계일학인데요, 시대와 작곡가를 연결시키는 작업이 정말 중요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반갑다는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필요한 작업이었어요.

그런데 왜 이제서야 이런 책이 나왔느냐. 음악에 시대상을 연결시키는 작업은 '어려운 책'이 되기 쉬워서 그렇습니다. 대중 교양서를 목표로 만들 때 가장 힘든 문제죠. 시대의식을 담으면서도 어렵지 않은 클래식 교양서 만들기. <클래식 시대를 듣다>는 이 어려운 과제를 잘 헤쳐나갔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핀란드 민족 작곡가 시벨리우스 편의 시작은 짧은 발췌로 시작합니다.


가야 헐 디가 보통 먼 질이 아닌디 여그서 이러고 충그리고만 있어서야 되겄능가. 자꼬 이러면은 못쓰네, 못써. 자네 심정은 내 짐작을 허겄네만 집안 식구덜 생각도 혀야지. 자네 노친 양반께서 자네가 이러고 있는 꼴을 보면 얼매나 가슴이 미어지겄능가.


읽어보신 분도 계시죠? 바로 윤흥길의 <장마>입니다. 할머니가 집에 들어온 구렁이 곁에 가서 구렁이를 타이르는(!) 장면이죠. 억울하게 죽은 젊은이가 구렁이가 되어 돌아왔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안쓰러움에 구렁이에게 자꾸 말을 겁니다. 우리나라의 토속적 샤머니즘을 아무렇지 않은 듯 풀어낸 명장면이에요. 시벨리우스를 <장마>로 시작하다니 괜찮지 않나요? 민족의 내면적 특성을 예술 속에 담는 이야기니까요. 이렇게 소개된 민족성-예술은 이어서 빌라 로보스, 메르세데스 소사 같은 음악가들을 통해 음악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그 이후에 드디어, 시벨리우스가 등장하는 것이죠. 친절한 단계별 학습.

다른 작곡가들도 이런 친절한(?) 접근으로 이루어져요.

*차이코프스키는 허구헌날 말하는 동성애 얘기 대신에 도스토예프스키를 호출, 슬라브적인 특징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논의.
*근대 시민혁명, 프로이센, 바이마르 공화국, 제3제국으로 이어지는 독일 역사와 베토벤 음악의 궤적. 혹은 권력과 음악.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특이한 세계에 맞딱드린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스트라빈스키 등의 서로 다른 대응과 그 음악.
*비를 맞으며 우연히 엿들은 굿거리 한 판에서 시작하는 현대 음악 이야기. 황병기, 존 케이지, 필립 글래스, 리게티..





지휘자는 권력인가? 그렇다면 그 책무는 무엇인가?
한국에 많은 팬을 거느린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지휘 포즈를 본딴 기념 구조물




<클래식 시대를 듣다>가 완벽한 책이냐 하면 물론 그렇지 않을 겁니다. 아주 적지만, 사실관계에서도 굳이 따지자면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면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창작 동기가 '수면용 음악 제작'이었다는 이야기는 루머일 확률이 높습니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바흐에 올인하지 않았습니다. 힌데미트나 쇤베르크 같은 근현대 음악에 대한 고민이 (어쩌면 더) 많았죠.

그러나 이런 문제(라고 하기에도 뭣한)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합니다.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고, 거기에 답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클래식 교양서이기 때문이에요. 질문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수많은 명곡을 모차르트가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 모차르트는 누가 만들었는가?

모차르트 부모님(..). 부인과 가족. 신(god). 뮤즈. 이런 것들은 이제 좀 지양할 때가 되었습니다.

모차르트는 그를 품고 있던 시대가 만들었다.



이상, 이 책에 편집자 추천 마크를 단 이유였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들 모두에게 권해 드립니다.



부록.
책이 취향에 맞으실지 ox 테스트 첨부합니다.
o가 많을수록 이 책을 더 좋아하실 겁니다.

1. 저자가 활동한 오마이뉴스는 (좋은, 혹은 그래도 괜찮은 매체다/싫어한다)
2. 서문에서 저자는 후미진 지방 국도변 주유소에서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순간'을 아름답다고 찬미한다. 이해할 수 (있다/없다)
3. 음악은 그 작곡과 연주에 있어 동시대와 역사에 대한 책무를 갖고 (있다/없다)
4. 우연히 시골 마을 한켠에 차를 세우고 담배를 피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굿판 소리에 한 시간이나 서서 반쯤 스러진 그 소리를 들었다. 이 오프닝은 현대음악을 설명하기 위한 시작으로 (적당하다/사족이다)


부록 2.
최근 접해본 것들 중 강추 음반들 (책과 함께 구입하시면 추가 할인혜택이 없습니다. 품절돼도 재고는 언젠가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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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0-06-11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과 완전 상관없는 듯한 댓글 - 아까 트위터 하는데 알라딘 트윗에서 인문MD 트윗 소개해주길래 저는 예술MD님의 트윗은 없는 거냐고 멘션 달았어요. 헤.

외국소설/예술MD 2010-06-11 17:07   좋아요 0 | URL
아 제가 아직 그게 없어서요.. 할까요? ㅎ

웽스북스 2010-06-11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예술엠디님께 이 말 하고싶어서 없는 거 알면서도 괜히 물어본거다, 에 한표. ㅋㅋㅋㅋㅋㅋㅋ

외국소설/예술MD 2010-06-12 01:38   좋아요 0 | URL
어머 부끄러워라..

치니 2010-06-13 13:23   좋아요 0 | URL
빙고! 웬디양님. ㅋㅋㅋ
만들면 일빠로 팔로잉할테야욧.
 



말없는 詩




  사진집은 왜 잘 팔리지 않을까. 직접 읽어보면 알게 된다. 브레송의 인물 사진집 <내면의 침묵>을 간단히 훑는 데는 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글이 거의 없으니, 한 페이지에 한 컷 들어간 사진만 보는 데는 몇 초면 충분하다. 그런데 가격은 3만 원이 넘는다. 3만 원이면 왠만한 책은 뭐든간에 살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십수 분이면 읽을 수 있는 책에 그 돈을 쓸까.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옛 거장들>에 나오는 주인공은 늘 미술관의 특정 그림 앞에 앉아 있다. 그는 그 그림과 자신이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때 그림은 '멋진 물감칠' 이상의 내면적인 힘을, 하나의 음악을 드러낸다. 그 음악은 누구에게나 들리지는 않아서, 특정한 감상자와 특정한 그림 사이에만 있다. 그렇다면 특정한 그림과 수많은 감상자 사이에는 수많은 음악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나의 그림은 작품의 종결이 아니라 2라운드의 서곡일 뿐인 것은 아닐까. 칸딘스키의 그림은 누군가에게는 바흐, 다른 누군가에게는 베베른, 베르크, 모짜르트, 아니면 르네상스 이전의 찬송가가 될 것이다. 물론 트로트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림의 노래를 들어본 적 있는 감상자는 이후로 순례자가 된다. 세상의 수많은 그림들 중 하나는 어쩌면 그/그녀에게 생의 비밀을 귀띔해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의 그림 앞에 오래 머물러야 한다는 이야기는 바로 그 때문이다. 뭔가 느낌이 오는 그림 앞에서, 순례자는 노래를 기다려야 한다. 겉핥기 식의 전시회 감상이 부질없는 이유다. 그리고 또한 사진집을 십 분 안에 훌렁훌렁 읽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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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이 음악이라면 사진은 산문시다. 사진의 이야기는 소리나지 않고 서술된다(혹은 중얼거림이다). 사진은 묘사하는 대신에 '현실을 옮겨박았'기 때문이다. 사진 속의 일들은 (심지어 그게 연출일지라도) 모두 실제로 있었던 것들이어서, 감상자는 자신도 모르게 사진의 이미지 속으로 뛰어들어 피사체의 정체와 사진 속 사건의 앞뒤를 상상한다. 이때 감상자의 빛바랜 기억과 몇 개의 추억들이 사진의 이미지에 겹치면서, 사진의 이야기는 곧 감상자의 과거에 덧대어진다. 이 과정은 사적이고 내밀한 작업이다. 음악 혹은 공연이 아니라 기록이며 시 쓰기이다. 사진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는 침묵 속에서 생겨나고 계속된다.

  때문에 사진은 그림에 비해 책이라는 형식에 더 어울린다. 아니, 책이야말로 그 내밀함과 조용함을 통해 진정한 사진 전시회가 된다. 사진의 순례자는 그리하여 '이상하게 비싼 책'을 산다. 사진집들 사이를 순례한다. 순례자들은 매 페이지의 사진 하나하나가 어떤 시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본전이 아까울 리 없다. 순례는 본전 뽑자는 투자가 아니라 '마땅한 것'이다. 순례는 명상이며, 불교 말씀처럼 '모든 이미지를 거울삼아 나와 만나는 것'이다. 좋은 사진집은 도저히 빨리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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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트 피아프, p.129


  에디트 피아프. 작은 몸집에서 나오는 낭랑한 목소리 때문에 참새라고도 불리웠던 여자. 위대한 샹송 가수. 그녀는 카메라를 쳐다보지 않고 있다. 좁은 어깨는 마치 들려진 것 같다. 두 개의 그림자, 좌우에 드리워진 나무의 그림자가 그녀를 안에 가두고 있다. 체크무늬가 강박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또한 옳겠다. 마지막으로, 맨살을 드러낸 벽이 온 배경을 채운 채 구도상의 탈출로를 다 막아놓았다. 강박에 대해 말해야 할 때다. 그러나 에디트 피아프가 강박증에 빠진 사람이었는가? 아니다. 피아프는 평생을 걸고 사랑을 원했을 뿐이다. 그녀의 삶을 실패라고 말해야 한다면, 그녀가 사랑을 원했기 때문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강박일까? 사랑이?

  강박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운명이 가지고 있었다. 사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결과 뿐이다. 왜 운명이 강박적으로 그녀의 삶을 훼방놓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찾을 수 없는 압박이 사진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그녀는 무표정하다. 그녀는 행복은커녕 불행에조차 관심이 없다. 운명을 이겨내느냐 하는 고민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쳐다볼 때가 아니면 사람들과 눈 마주치기조차 어려워하던 작은 새에게, 그런 거대한 고민은 허풍이거나 사치에 불과했을 것이다. 에디트 피아프는 사랑을 구했고 구하지 못했다. 그것으로 그녀의 삶은 완결되었다. 계속되는 불행은 그저 끝없이 스쳐가는 바람일 뿐이었다. 사진속의 그녀는 빛이 불어오는 방향을 따라 살짝 시선을 돌렸다. 카메라 렌즈와 채 눈맞추지 못한 그 시선은, 옆에서 불어오는 빛-바람을 흘려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사진 아래에다 연필로 '그녀는 카메라 오른쪽을 바라본다.' 라고 썼다. 내가 기꺼이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이었다.

  이 사진집의 제목은 <내면의 침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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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da 2010-06-01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찬찬히 읽어보다가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더니,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결국 지름신의 외침이 들리고 말았어요.ㅎ

외국소설/예술MD 2010-05-27 01:54   좋아요 0 | URL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브레송도 브레송이지만, 피아프를 좋아하시는 거군요. 그렇죠?

aida 2010-05-27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아프의 노래보다 브레송의 사진이 더 좋아요.ㅎ
사실 까치에서 나온 사진집이 제 수중에 있다가(그것도 따끈따끈할 때;) 사라진 아픈 기억이 있어서 그동안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거예요.ㅠ

외국소설/예술MD 2010-05-27 10:24   좋아요 0 | URL
그런 일이 있었군요.. 사라진 사진집은 성불했을 겁니다. 대신 내면의 침묵을 많이 사랑해 주세요.
반야바라밀..

aida 2010-05-28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전에 받았는데 아직 훑어보기만 했지만 이미 완소예요.
카슨 매컬러스도 있다니.(물론 그래서 완소인 건 아니지만)
게다가 엽서도 기대이상이었어요. 실물 받아본 게 훨 좋은데요! :)

외국소설/예술MD 2010-05-31 09:25   좋아요 0 | URL
엽서를 칭찬해주시니 저는 그저 눈물 좀 닦고.. 감사합니다 T_T

곰이살고있어요 2010-06-15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책입니다 크크

아 뭔가 MD님 블로그를 정기구독이라도 해야할듯해요!



외국소설/예술MD 2010-06-16 10:20   좋아요 0 | URL
친추..아 아니고 즐겨찾는서재 등록하심 돼요.
매그넘도 그렇고, 사진 좋아하시나봐요. 사진은 정말 좋은 것이죠. ㅎㅎ
 




아 예쁘다.




일전에 외서MD님께서 이런 걸 보여주셨습니다. 이미지 말고 실제 물건요. 정말 멋있었어요. 오리지널 펭귄북 표지로 만든 엽서 백 장이라뇨. 이거야말로 애서가를 위한 컬렉션.

그래서 저도 하나 샀습니다. <요거>죠.

그런데 약간 아쉽기도 했어요. 마침 우리나라에도 <펭귄 북디자인>이 번역돼 나왔잖아요. 그 책에 있는 다른 멋진 표지들도 더 수록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음. 더 비싸졌겠지.

또다른 아쉬운 점이라면, 주로 초기 '클래식' 표지 위주였다는 거죠. 영미권의 펭귄북 팬들을 위해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책들 위주로 선정된 것 같았습니다. 다른 포맷의 표지들도 많이 실어주면 좋았을텐데.

해서 그냥, 직접 만들어보기로 하고 국내판 <펭귄 북디자인>이 나온 북노마드 관계자 분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래서 하기로 했고(사실 놀랐습니다. 정말 되다니;;), 1-2주 후에 시작될 알라딘 예술분야 이벤트 증정품으로 제작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벤트 시작되었습니다. 바로가기 (5/18)




그러니까 약간 자랑, 입니다. 전세계를 통틀어 알라딘에서만 구할 수 있는 거니까요. 심지어 저 엽서 박스를 사신 분들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저기에 뭐가 있는지 다 알고 있어서 저 박스에 없는 표지들 위주로 골랐거든요. 저도 갖고 싶어서요.;

고르느라 무지 힘들었습니다. 정말 갖고 싶었던 표지 중에서도 빠진 것들이 많습니다만..
또 모르잖아요. 호응이 좋으면 시리즈가 이어질지도요. ㅎ 그러니 많은 성원 부탁드리며.



여기 그 친구들입니다. 총 8매, 전세계 단독 한정 사은품, 오리지널 펭귄 북커버 엽서 8종입니다.

































-존 러스킨, <On Art and Life> 국내 미출간
-앤서니 버지스, <시계태엽오렌지>



































-버트런드 러셀, <Has Man a Future?> 국내 미출간
-펭귄 현대시선 제 25권, 국내 미출간


































-존 업다이크, <달려라 토끼>
-로버트 프로스트 시선집




































-셰익스피어 희극선
-존 버거, <어떻게 볼 것인가> (국내 절판)


->엽서 증정 이벤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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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펭귄 오리지널 북커버 엽서 증정 이벤트
    from 커피와 책과 고양이 2010-05-20 10:04 
    펭귄 오리지널 북커버 엽서 증정 이벤트를 한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결국 구매이벤트였구나. 요기 http://www.aladdin.co.kr/events/wevent_book_m.aspx?pn=100514_cover  2만원 이상으로 가격이 대충 낮은 것이 맘에 든다. 일단 품절 풀린 엽서세트를 구매하고 , 보관함에 있던 카미유 클로델과 나가오카 겐메이를 담아 본다. 이벤트 대상 도서 중 산 책들이 많지만, 예술분
  2. 서점 이벤트라면 이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from 곰이살고있어요님의 서재 2010-06-15 21:39 
    실은 갖고 싶던 '매그넘 매그넘' 사진집이 무려 반값으로 할인되었길래, 얼른 주문하면서, 우연히 얻어걸린 이벤트다. '매그넘 매그넘'이 포함된 예술 문화 서적을 일정액 이상 구입하면 펭귄북의 아름다운 표지로 이루어진 엽서들을 증정하는 것. 그냥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아무 기대 안 했던 엽서들이 너무 예뻐서, 나는 펭귄북스에서 나온 표지 디자인 엽서 100장짜리가 재입고되길 기다렸다가, 당장 질러버렸다. 지금은
 
 
굿바이 2010-05-07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짝짝짝짝!!!!!
약간 자랑,에 뜨거운 박수 보냅니다. 이벤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10-05-07 17:3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성원에 보답하겠습니다.
이런 대기업스러운 멘트 한번쯤 해보고 싶었어요. 그럴 찬스를 주셔서 다시 또 감사합니다.

치니 2010-05-07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겸손한 엠디씨, ^-^ 약간이 아니라 많이 자랑하셔야겠는데요 ~ (그리구 알라딘에서는 아이디어와 기획력을 높이 사 특별보너스도 주셔야;;)

외국소설/예술MD 2010-05-07 17:38   좋아요 0 | URL
마음에 드셨나봐요. 사실 자랑이라고 큰소리 쳤지만 걱정도 약간 했었거든요. 뿌듯하네요. ^^;

하이드 2010-05-07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이 두 권이 있군요. on art and life 엠보싱 퀄러티로 나오나요? ㅎㅎ
펭귄 커버 박스는 아마존닷컴 프리오더라 찜해놓았었는데, 어느새 풀렸나요? 달려기 없어 똥글뱅이를 못 쳐놓았어요.

외국소설/예술MD 2010-05-07 19:13   좋아요 0 | URL
네 당연히 엠보싱처리, 못했습니다.
저 박스 알라딘에서 십수개 판걸로 기억하는데, 물어보니 영국 본사 품절이라 당분간 어렵다네요.

하이드 2010-05-07 20:37   좋아요 0 | URL
역시 UK 였군요. 닷컴이 10월인가 그랬던걸로 아는데, 닷컴이 가격도 더 저렴하게 나오긴 하더라구요.

Sylvia 2010-05-07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 기대할께요. 정말 멋진데요

외국소설/예술MD 2010-05-08 00:33   좋아요 0 | URL
저 정말요. 부끄럽끄럽..

jun 2010-05-10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데요!!!

외국소설/예술MD 2010-05-10 18:14   좋아요 0 | URL
굽신굽신 꾸벅꾸벅 흐뭇

네꼬 2010-05-17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난 또 저 책 사면 준다는 줄 알고 (하여간 성질은 급해 가지고...) 난 벌써 벌써 이 책 샀는데 이제 와서 이러기냐고 드러누울 뻔했어요. 멋진데요!

외국소설/예술MD 2010-05-17 13:07   좋아요 0 | URL
곧 시작입니다. 준비하고 계세요 ㅎㅎ

블로크 2010-05-20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D님의 정성이 책을 사게 만드는군요. 다른 분야 책들도 사야해서 이번 엽서 받을 대상은 못 되지만,망설이던 펭귄북은 주문하고야 말았어요. (아, 알라딘 MD님 블로그에 글 남기는 것도 처음이라 쑥쓰럽군요. 하지만 원호MD님 멋지신데요!)

외국소설/예술MD 2010-05-20 11:11   좋아요 0 | URL
엽서 수량 제한 때문에 가격대에 제한을 두게 된 점은 좀, 저도 많이 아쉬워요. 이벤트 할 때는 이런저런 고민을 하게 되는데, 이번에도 결국 아쉬운 점이 남게 되었네요.

그나저나 이거 어떻게 보답을 해야겠는데, 어떻게 보답할까...

네 생각좀.

밤의숲 2010-05-20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벤트 뜨자마자 냅다 질렀는데. 엽서 8장 받으려고 25000원짜리 책을 질렀구나 하는 생각이 뒤통수를 때리면서 순간 머엉- 그래도 좋아요. '해즈 맨 어 퓨처?' 저 엽서 사무실 책상 위에 붙여 놓았답니다. 책은 모마하이라이츠 샀고요. 뿌듯뿌듯- 항상 추천해 주시는 책들 관심깊게 보고 있어요.

외국소설/예술MD 2010-05-23 00:38   좋아요 0 | URL
모마 하이라이트 괜춘하죠. 책값이 아까운 책은 아니라고 믿어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좋은 책을 갖게 될 떡밥이었구나라고 생각하시면 좋지 않을까요(허).

잘 보아주셔서 감사해요. 늘 부끄럽고. 더욱 용맹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곰이살고있어요 2010-05-25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엽서 이벤트고 뭐고 암것도 모르고 그저 50% 세일이라 책을 질렀더니 뭐가 따라온대서 뭔가하고 봤더니 이거군요.(아 길다!!)
갑자기 기대되는데요!! 빨리 와라 책아!!!!!!

그리고 저 100개짜리 엽서세트도 지르고 싶어졌.... 근데 품절이네요 OTL
하악 ㅡㅜ

외국소설/예술MD 2010-05-25 09:48   좋아요 0 | URL
아, 소개가 마음에 드셨나봐요. 실제로도 마음에 드시길 바래요. 저도 책상에 하나 붙여놨는데 나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진짜 이벤트라고 생각하는데요. 댓글 달아주시니 저도 좋네요. 보람을 느끼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

카르멘 2010-05-27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바로 책 구입했습니다.
근데 펭귄 북디자인 원서도 이벤트 도서에 끼워 주셨으면 좋았을텐데요.
제가 워낙 펭귄 표지를 좋아하는 터라. 원서 구입에, 이벤트 도서에.
이래저래 5만원을 질러 버렸습니다. -.-

100장도 마구 사고 싶지만 가까스로 참고 있어요.
이거 액자에 몇 개씩 넣어 놓고 걸어 놓으면 진짜 좋을 것 같아요.

외국소설/예술MD 2010-05-27 10:28   좋아요 0 | URL
아아 네. 원서도 집어넣는 게 좋겠네요. 좋은 아이디어 감사합니다. ^^
이벤트 도서는 분야를 탈탈 털어서 좋은 놈들로 고르려 했는데요. 맘에 드시는 책이 있었길 바랍니다.

액자건 스카치테이프건, 어디 붙여놓고 종종 쳐다보면서, 책쟁이들께서 흐뭇해하심 좋겠어요.
인성함양에도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ㅎ

곰이살고있어요 2010-06-14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모르고 있다가 엽서세트를 받고
벽에다 버트란드 러셀, 존 업다이크, 존 버거의 책 표지를 낼름 붙여놓고 바라본 지 벌써 며칠인지...지금은,

100장 엽서세트를 주시하고 있는 1人입니다.

이런 좋은 이벤트 감사합니다. 자주 해주세요!!! (왜 소리치는 걸까요?!;;)

아무튼 100장의 엽서, 사고 싶어요 ㅠ_ㅠ 언제쯤 구입 가능할까요?

외국소설/예술MD 2010-06-14 10:48   좋아요 0 | URL
네 영국판 엽서세트는, 잘하면 이달 말에 들어올 수도 있다는데요. 확실하진 않다고 하네요. 만약 불발되면 미국에서 재발매되는 10월에나 구입하실 수 있다고..(으흠;;)

엽서가 맘에 드셨나봐요. 저는 행복합니다 T_T. 2차라도 할까 싶지만서도(먼산).
우리 버거님이 최고시라능!

곰이살고있어요 2010-06-15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댓글 답니다. 이건 무슨 오덕스러운 짓인지 모르겠...

하지만 징징거리던 영국판 엽서세트의 일시품절상태가 풀렸다고 문자가 와서 냉콤 주문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고...고맙습니다......! 흑흑 ㅡㅜ


그리고 이런 좋은 이벤트는 자주 해주십사 다시 한 번 외칩니다!! 크크

외국소설/예술MD 2010-06-16 10:18   좋아요 0 | URL
네 마침 외서MD님께서 제게도 알려주시더군요(왜?).

이모티콘이 귀여우세요. 뭔가 저랑 레벨이 다르시네요.

이런 좋은 이벤트..는 고민 중예요. 성사 여부는 미정이지만요. ㅎ

봉봉 2010-08-19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금봤어여
 

요즘은 지나치게 일찍 자고 지나치게 일찍 일어납니다. 일어나서 긴 밤을 맞으면 시간은 유독 천천히 흘러갑니다. 한동안 음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긴 밤을 보내게 되면서 다시 음악을 듣습니다. 가장 최근에 구한 음반은 릴리안 푹스(Lilian Fuchs)가 연주한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의 비올라 버전입니다. 20세기, 클래식 음악의 황금기에 있었던 최초의 비올라 녹음이라죠. 활질의 밀도가 대단히 높고 루바토가 자율적이라 요즘 스타일은 아닌 듯합니다. 그렇지만 그런게 오히려 더 좋을 때가 있지요. 곡 자체에 더 가까이 접근하기보다는 연주자와 함께 호흡하면서 연주자가 경탄하는 순간에, 어떤 흐름의 절정에, 느려진 템포에 같이 숨을 쉬는 그 기분. 릴리안 푹스의 연주는 열정적이고 밀도가 높지만, 동시에 여유가 있고 '흐름'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여타 연주들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즐거움-감동이 있네요.

클래식 음악을 듣는 가장 큰 묘미는 연주의 다양성이 아닐까 합니다. 백 명의 연주자가 같은 곡을 연주하면 백 가지의 다른 결과물이 나오죠. 괴짜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에 관한 반 픽션 평전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에 보면 결국 가장 순수한 연주는 '연주하지 않음, 악보 그 자체만으로 존재함'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악보 속의 음들이야말로 도그마가 되고 절대적인 심상을 갖습니다. 존재하지 않음으로서 완벽해지기.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그 완벽함에 어쩔 수 없이 덧칠을, 자기 스타일의 때를 묻히는 것에 다름없습니다. 지상의 인간들이 그 악보를 어떻게 소화하느냐는 '누가, 언제, 어디서'에 따라 매번 달라지겠지만, 단 한가지 사실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완벽한 연주를 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영원히, 셀 수 없는 도전이 이루어지고, 역사 위에 남은 크고작은 묘비들 위에서 또다시 연주는 계속되리라는 것. 

그게 클래식 음악을 듣는 '행위'를 생각할 때의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제게는요. 

 

그리고 세 권의 책이 있습니다. 

           

 

<교수대 위의 까치>는 진중권 특유의 그림 선정이 우선 눈에 들어옵니다. 미학 오딧세이 등의 다른 저서를 읽으신 분들은 익숙하실 단골 손님(?) 마그리트나 에셔도 빠짐없이 출석했네요. 서문에서 밝혔다시피 이 책은 진중권 자신이 좋아한 그림들의 이야기죠. 그가 좋아하는 그림은 이 세계를 평화롭게 옮긴 '한 폭의 그림같은' 작품들이 아닙니다. 

어느 지점에서 더이상 해석이 불가능하거나(조르조네의 <폭풍우>), 다층적인 해석 속에서 부조리함만이 슬그머니, 그러나 분명하게 고개를 들거나(브뤼헐의 <교수대 위의 까치>), 진보에 대한 인류의 믿음에 씁쓸한 미소를 짓거나(보슈의 <우석의 제거>)... 그림 속에서 주체가 뒤틀리거나, 사라지거나, 아니면 현실같지 않은 것들이 현실 속에 무덤덤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요하네스 굼프, <자화상>. 거울은 실제의 모사이고 그림은 거울의 모사인데, 가장 살아있는 듯한 것은 그림이다.

미학자를 사로잡는 그림들. 세계의 빈 틈을 보여주는 그림들. 언어보다 훨씬 먼저, 어떤 직관으로 포착한 세계와 인간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벽. 진중권이 고른 그림들은 현실 세계라는 매트릭스를 굳건히 신용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불편한 예언들입니다. 네, 선명한 메시지 -선언이라거나- 가 아니라 예언입니다. 예언자 자신도 자신이 뱉은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죠. 이 책 속에 등장하는 그림들은 분명함과는 거리가 있는 어떤 징후들입니다. 불분명하고 분열하고 흐려지는 세계의 징후죠.   

"죽음을 아는 자들에게는, 영원히 사라지고 있는 것들만큼 매혹적인 것이 없다. 그것은 영원히 사라지고 있음으로써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 징후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것입니다. 언어로는 대상을 지시해야 하는데, 증거라고는 흔적이나 예감 뿐이니까요. 징후를 징후로 표현하기. 말하는(증언하는) 대신에 그리기-자기 스타일의 때를 묻히기. 완전함을 볼 수도, 설사 본다 하더라도 완전하게 표현할 수도 없는 '인간'이 파악한 징후(세계)와 그 징후의 모사(작품)를 함께 파악하기. 알레고리와 아이러니와 수많은 아이콘들... 

해석의 가능성은 열려 있고, 진중권은 그 중 하나를 들어 보였습니다. 나머지는 그의 바램대로 독자들의 몫입니다. 수수께끼같고 보편적인 해석이 불가능한 그림들은 거꾸로 감상자들에게 수많은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정답이 의미를 잃은 곳에서는 오로지 적극적인 태도만이 환영받습니다.

교양 수준의 미학을 일정 이상 섭렵하신 분이시면 낯설기보다는 익숙한 얘기가 많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미학 오딧세이만 하더라도 그런 얘기죠. 그렇다면 지금 이 책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특히, 진중권의 책들 중에서는) 다루는 내용에 비해 쉽게 읽힌다는 겁니다. 큰 장점입니다. 매트릭스 밖의 세계를 구경할 수 있는 유사 빨간 약을 무차별 살포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소위 교양 미술서 중에서 인식론적인 문제를 여기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책은,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벌써 달리기 시작한 이 책의 리뷰들에 '좀 더 써 주세요, 속편을 내 주세요'가 있다는 건 책을 파는 입장에서도 기쁜 일입니다. 추천할 수 있는 책입니다. 

-------------

<지식의 미술관> 역시 감상자들에게 '다소 자의적이어도 좋으니 능동적인' 해석을 요구합니다. 지식은 감상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보조에 그쳐야 한다는 것이죠. 능동적으로 그림과 소통하지 못한다면 쌓아놓은 지식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낫죠. 그렇다면 그 균형을 어떻게 맞출까. 필요 불가결한 지식만을 담아 전달하면 어떨까? 정말 그게 가능할까? 

<지식의 미술관>은 욕심이 많은 책입니다.

앞선 <교수대 위의 까치>가 '해석의 다양성'을 직접 느끼도록 했다면, <지식의 미술관>은 미술 작품의 내외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었는지를 친절하게 안내합니다. 미술품을 읽는 몇 가지의 코드/독법, 서양 미술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소재들과 그 기원, 미술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의 문제, 예술가의 자의식과 작품의 관계... 이러한 작품 내외적 요소는 모두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필요한 요소들이죠. <교수대 위의 까치>가 드넓은 강가에서 대어 한 마리를 낚은 다음 말없이 낚싯대를 독자들에게 넘겼다고 한다면, <지식의 미술관>은 낚시 포인트 분석에서 미끼와 낚을 고기들에 대한 고찰까지를 다룬 '친절한' 종합 낚시 가이드를 추구하고 있는 셈이죠.  


조르주 루스의 벽화-사진. 빨간 줄은 사진에 그은 게 아닌 실제 페인팅입니다. 왜상에 대한 좋은 예로 실려 있습니다.

'가이드북'이라고 하면 그저 쉬운 책이 아니라, 다루고 있는 분야의 모든 부분부분에 대해 다루어 보겠다는 야망 쯤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는 성공적이기만 하다면 미술사와 특정 미술 사조에 편향된 상식 쌓기보다 훨씬 유연하고 주체적인 감상에 도움이 되는 지식 전달입니다. 교양 미술의 통섭이라고 할까요. 책의 구성이 토픽을 이어 붙인 형식의 가벼운 구조임을 감안하면 의외로 좋은 성과입니다.

더욱이 이런 다양한 요소들이 깔끔하게 각각의 파트로 정리되어 보기에도 좋고, 각종 에피소드들을 많이 담고 있어 초심자가 읽기에도 재미나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지식의 미술관>은 확실히 욕심이 많은 책이고, 저자 특유의 친절함과 부드러움을 무기로 어느정도 성공적으로 목표에 다다른 듯합니다(완전히 목표에 다다랐다면 전설이 되었겠죠). 위대한 걸작들의 이면에서 작은 빛을 발하는, 똑똑하고 부드러운 책입니다. 차기작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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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진>이라... 좋은 사랑 같은 거겠죠. 답을 내기 힘들거나, 아니면 너무 뻔한 답이 나올 위험이 있습니다. 성급하게 결론만 보자면 후자에 가깝습니다. 좋은 사진은 어떤 순간 자신을 끌어들인 장면을 그대로 찍는 것일 뿐이니까요. 쉬운 얘긴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더하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어렵다는 데 공감하신다면 말이죠. 

사진은 그 구조상 어쩌면 가장 순수한 시각 예술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프레임 안에 담으니까요. 작가가 보이는 것들을 가장 쉽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유혹이 많습니다. 카메라-메카닉에 대한 탐닉부터(카메라의 메커니즘 자체를 사랑하는 분들은 여기서는 사진 애호가와는 분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더욱 보기 좋은 것'에 대한 욕심까지, 사진을 만드는 작업 전반에 걸쳐 숱한 욕심에 휩싸이게 되죠. 더욱 보기 좋은 걸 추구한다면 좋은 게 아닌가? 물론 때로 그렇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진의 형식을 빌은 저급한 일러스트레이션이 탄생하는 경우가 많죠. 아마추어이든 프로이든간에 말입니다. 사진은 그 태생적인 순수함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공허해지거나 '하급 미술'로 전락하기 일쑤입니다. 

<좋은 사진>은 우리나라에서 기존에 많이 출간된 사진 잘 찍는 법과는 다른 이야기를 펼칩니다. 구도나 색감 등에 대한 기초적인 강의를 펼치면서도 '여기에 너무 집착하지 말 것'이라는 단서가 꼭 따라붙습니다. 앞서 <지식의 미술관>에서 했던 얘기와 비슷하지요.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알아야 하지만, 사진을 찍는 순간에까지 그 지식들이 머리를 채우고 있다면, 우리가 카메라에 담게 되는 것은 이 세계가 아니라 어설픈 지식의 잔해 뿐이니까요. 

아마추어들/일반 독자들이 가장 접하기 쉬운 시각 예술이 사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타인의 작품을 감상하기를 넘어 직접 자신이 이미지를 만드는 경우 '지식들을 버리기'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은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입견을 하나씩 버리는 것은 의외로 매우 힘겹고 지난한 과정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좋은 사진'을 위한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태도이니까요. 사랑다운 사랑이 좋은 사랑이라면, 사진다운 사진이 좋은 사진이겠죠. 사진의 기계적이고도 순수한 메커니즘에 어울리는 사고방식은 '그저 세계를 바라보기'입니다. 아마 완벽한 사진은 완벽한 음악처럼 '프레임에 담기지 않은 그 순간 자체'이겠지요. 그게 불가능하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최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서 나다운 때를 묻힌 사진'을 찍는 것이겠습니다.  

지식도 알려주고 동시에 그 모든 걸 나중에는 잊으라고 말하는 책. 쓰라린 첫사랑같은 이야기. <좋은 사진>은 사진 애호가 여러분께 많은 생각을 안겨드릴 겁니다. 

 


2009.8 / 서울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이제 역사책 얘기 써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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