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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를 데려갔다. 흐린 날의 바닷가에. 영화 속에 그를 잃어버리고, 버리고 왔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쳐다보라고, 그리고 잊으라고, 앞으로 조금 걸어가고, 그리고 다시 잊으라고. 그리고 바람 속 새와, 유리 속 바다, 담 속 유리. 문득 그는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몰랐다. 어떻게 더 걸어가야 할지를, 어떻게 더 바라봐야 할지를. 그래서 나는 자꾸만 더 앞으로 가라고, 그가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고, 그것은 가능하다고 애원했다. 그는 거기 도달했다. 그는 더욱 나아갔다. 그는 바다를, 길 잃은 개를, 바람 속 새를, 유리를, 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바로 그때 필름이 떨어졌다. 암전. 1981년 6월 14일 저녁 7시의 일이다. 나는 사랑했구나, 하고 깨달았다.






양혜규, <셋을 위한 목소리>에서 발췌한 영화 '대서양의 남자'의 나레이션.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이 영화의 각본, 연출, 그리고 저기 쓰여진 말들을 소리내는 목소리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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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간만에 뵙겠습니다. 지금 '이 분야 최고의 책'이라는 이벤트가 진행중인데요.
MD들도 참여를 했습니다. 자기 분야 내에서 열 권을 자유롭게 뽑았어요.
그래서 저는 예술/역사 분야에서 뽑았습니다.

왜 추천했는지 간략한 설명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써 봅니다.

사실, 사심 가득한 리스트라서 말이죠.




1.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by 미셸 슈나이더


  -저는 세상 모든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를 모아놓더라도 제가 갖고 있는 놈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책을 볼 때 엄지손가락이 닿는 부분에 까맣게 때가 타 있으니까요. 완독만 20회는 넘었을 거고, 가끔 꺼내 읽는 걸 합하면 백 번을 훨씬 넘길 겁니다. 여행을 갈 때 책을 딱 한 권만 들고 가야 한다면 무조건 이 책을 집어들던 때도 있었습니다. 어디를 펼쳐서 읽기 시작해도 좋았으니까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 들어 있거든요. 바흐와 굴드와 피아노와, 부끄럽지만 고독과 뭐 그런 것들 말이죠. 겨울, 북극, 장거리 전화의 먼 통화감도, 쥬스와 비스킷만 들어있는 냉장고, 침묵, 서로 다른 두 개의 라디오 방송과 진공청소기를 동시에 틀어놓고 피아노를 연습하는 이상한 남자. '중요한 것은 건반을 누를 때의 소리가 아니라 그 촉감이다.'

  이 책은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전기 같지만, 실상은 좀 복잡합니다. 저자인 미셸 슈나이더는 몇몇 없는 사실을 지어내거나 '변조'했다고 아예 떳떳하게 써 놨죠. 연대기적 구성도 아니라서 이 책으로 굴드의 삶을 꿰어보려는 시도는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이 책이 노리는 것은 굴드의 '삶-혼' 속으로 곧바로 치고들어가서 그가 추구한 게 뭐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즉, 글렌 굴드라는 렌즈를 통해 보는 거대하고 공허한 우주, 에 관한 미셸 슈나이더의 수상록인 셈이죠.

  '자발적인' 고독이 바흐의 음악과 이어져 우주를 투영하는 순간은 그 어떤 객관적인 전기물에서도 만날 수 없을 겁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불레즈 파스칼의 뒤를 이은 無의 전도사 겸 노다메짱을 뛰어넘는 초 괴짜 천재 피아니스트를 이 책에서 영접하실 수 있습니다. 네 간증입니다. 저는 굴드빠 맞습니다.

*번역 파문을 늘 가슴에 품고 있는 동문선입니다만, 이 책은 읽는 데 지장 없습니다.





2. 타인의 고통 by 수잔 손택



  -좌파가 늘 듣는 타박 중 하나는 "그래서 뭘 어쩌라고" 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똑같은 소리가 나와요. 그런데 비아냥이 아니라 진심 절망이고요. 특히 사진(중에서도 저널리즘) 공부한 친구들은 아마 '이기적 유전자'를 읽는 생물학도 같은 기분일 겁니다. 어디로 가긴 가야겠는데 온 천지가 시커먼.

  보도사진은 촬영한 사람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찍었든간에, 이미지가 배포되고 읽히는 순간에 '각자 나름대로의 의미'를 발생시켜 버립니다. 어떤 신문을 통해 그것을 보았는지, 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사진을 본 시간이 아침인지 저녁인지에 따라 모든 의미들이 달라지죠. 결국 사진은 전달되고 소비되는 과정에서 이미지 자체의 강렬함을 빼고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합니다. 충격적인 이미지의 사진에서 가장 충격적인 점은, 그 내용이 사실상 텅 빈 채로 우리에게 해석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진의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보도사진은 정말 인류의 진보에 기여할 수 있을까요. 사진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공유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내가 공유한 고통은 이미 타인의 고통이 아닌 것. 책의 제목은 콘래드의 <Heart of Darkness>처럼 폼나고, 또 그만큼 의미심장합니다.

  수잔 손택이 펼쳐놓은 이 출구 없는 미로는, 그러나 그녀의 말에 따르면 끝이 아니라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할 문제에 불과합니다. 세계에 관심있는 분들은 누구나가 마음 속에 두어야 할 절망적인 근원, 사고思考의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말이죠.





3. 윤미네 집 by 전몽각


  -이십여 년 전에 딱 1천 부만 찍었다던 가족 사진집이 있었다. 그 책은 한국에서 사진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신기한 전설이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사진들은 시간의 빈틈을 찌르는 날카로운 성찰도, 기록과 해석 사이의 간격을 이용한 흥미로운 실험도 보여주지 않았다. 가슴이 데어버리는 뜨거운 휴머니즘도 아니었고, 소리높여 정의와 진실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거기에는 그냥 단란한 가족이 있었다. 딸 윤미가 태어나서부터 결혼할 때까지의 모습들이라고 했다. 겉보기에 그 책은 모든 집에 하나씩은 있을법한, 단지 중단되지만 않았을 뿐인 가족 앨범이었다.

 
  그러나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윤미가 얼마나 부드럽고 편안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윤미네 집>은 '사람에게 들이대는' 카메라라는 개념이 없는 집이다. 표지 사진에서도 윤미는 카메라가 아닌 '아빠'를 바라보고 있다. 아무것도 의식적이지 않고, 촬영자와 피사체의 호흡은 언제나 함께한다. 사진가나 피사체가 천재라서가 아니다. 그들은 그냥 한가족이기 때문이다. 이 숨쉬기야말로 윤미네 전설의 기원이다. 그것이 독자들을 사진과 같은 호흡으로 이끌고 그들 각자의 과거를 불러낸다. 이 마법은 윤미네의 사진들이 전혀 대단해보이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모두가 한번쯤 들어본 목소리였기에 마음의 문은 더 쉽게 열린다.
 
  '전설의 책'이라면 마땅히 어떤 천재성과 위대함을 기대할 만하다. 그러나 전설적일만한 꺼리가 없이 전설이 되기, 그것이야말로 전설 위의 전설이며 하나의 경지다. 오직 사랑, 도저한 사랑만으로 그 경지는 이루어졌다.


...라고 썼었습니다. 웰컴 페이지 책소개 문구였죠. 하나 더 말씀드려 보자면, 이 책 거꾸로 보신 적 있나요? 과거로 역행하는 순간들의 집합은 이상한 감흥을 안겨드릴 겁니다. 사진 좋아하는 불란서 철학가들이 말하던 그것 같기도 하고요. 팁 하나 드리자면, 자기 가족 앨범으로도 해볼 수 있습니다. 감동보다는 어떤 날카로운 물건을 만지는 느낌이지만요. 어쨌든 이 책은 정말 물건입니다. 국산 사진집이 이렇게 팔리다니요.





4. 야만의 시대 by 스벤 린드크비스트


  -어떤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는 몇몇 독일군 병사들이 '그래도 같은 인간인데...' 라고 생각하는 바람에 '적절한 행정 집행'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해서 등장한 아이디어는 수용소 내에 화장실을 없애는 것이었죠. 분뇨 처리가 엉망이 되고 유대인들이 갈수록 지저분해지면서 병사들도 유대인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더러운 야만인들은 더이상 같은 인간이 아니었던 거죠.

  놀라운 내용인가요? 이 책에 의하면, 아닙니다. 유럽은 수백 년 전부터 이미 그런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으니까요. <야만의 시대>는 유럽 국가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야만인'으로 치환하고 그들에게 인간 이하의 지위를 부여했는지를, 또한 그게 우발적인 현상이 아니라 치밀하게 연출한 제국주의의 정당화 수단이었음을 고발합니다. "모든 야수들을 절멸하라!"

  이 책은 역사와 기행문이 절반씩 섞여 있습니다. 조셉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중심>에 대한 현실의 응답이라고 할까요. 책 뒷면 추천사 중에는 마치 추리소설처럼 읽힌다는 문구가 있는데, 그정도로 흥미롭습니다. 재미와는 좀 달라요. 이 책 속에서 우리는 끝없이 부활하는 커츠 대령과 맞딱드리고 수많은 암흑의 중심'들'을 방문하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지고 있는 지독함의 스펙터클이죠. 지구, 그러니까 지옥의 놀이동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요즘도 성업중입니다.

  아, 지하철에 같이 탄 동남아 출신 노동자들에게서 카레 냄새가 난다고 쓴웃음을 지은 당신도 그 구성원이지 않나요?





5.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by 발터 벤야민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모두 매트릭스 속에 살고 있는 겁니다. 절반쯤은요. 옆에 있는 책 표지만 해도 아시다시피 진짜 표지가 아닙니다. 모니터에 비친 전자 신호가 책 표지를 흉내내고 있는 거죠. 모사, 재현, 시뮬레이션, 뭐 그렇습니다. 근데 그게 뭐가 문제냐면,

  사진이나 영화처럼 '원본 없음-복제 가능'을 전제로 한 시각예술들은 '감동의 중심에 오리지널이 있다'는 오래된 생각을 부셔버렸단 거죠. 고흐의 해바라기가 불타버린다면 전 세계에서 조기를 걸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모니터로 보는 사진들은 원본 필름이 사라지더라도 그 가치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필름은 복제 불가능한 원본이 주는 아우라와는 거리가 멀 뿐더러, 오히려 무한한 복제를 위한 '최초의 복사품'에 불과하니까요. 원본 없는 복제. 바야흐로 세상은 실재하지 않는 것들과 공생하게 된 겁니다. 시뮬라르크가 어쩌고 하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면,

  '존재하지 않아도' 현실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매트릭스는 이미 시작되었던 거죠. 언젠가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만으로도 현실을 구성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복제술과 예술과의 관계를 고찰하던 벤야민은 놀랍게도 실체와 복제와 현실 사이의 삼각관계를 발견했습니다. 현실과 반(半과 反 모두 사용가능)현실이 뭉뚱그려진 새로운 현실을 보았던 거죠. 놀라운 발견이며 아름다운 예언입니다. 네 맞아요. 그는 경배받아 마땅한 예언자이며 이 책은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걸작이라는 거죠.

*수많은 사진/영화학도 여러분, 제목도 폼이 나고 다들 이거 읽어보라 하니까 괜히 샀다가 집에 이 책 꽂아놓고만 계십니까. 눈 딱 감고 다시 도전해 보세요. 그리고 눈을 뜬 다음 빨간약을 먹는 겁니다.





6. 신좌파의 상상력 by 조지 카치아피카스



  -영화 <몽상가들>에 등장하는 영화광 남매는 (결코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당시의 심약한 프랑스 영화에 대한 냉소입니다. 남매는 준 근친상간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연출'을 제외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죠. 그들은 자살극을 통해 삶에 연연하지 않는 인간처럼 보이고 싶어하지만, 실제로 삶을 건 폭력이 발생하는 데모는 두려워합니다. 그건 연출이 아니라 실재하는 에너지고 두려움이었으니까요. 실제로 누벨바그는 제도권에 흡수되면서 명성과 초심을 맞바꾸었죠. <몽상가들>의 시간적 배경인 68혁명은 이 영화를 읽기 위한 열쇠입니다. 혁명은 마치 백설공주에 나오는 마법 거울 같았죠. 이 거울에 누벨바그를 비추자, 두 발이 허공에 떠 있는 '아트'만이...

  이 책은 68혁명에 대한 최초의 입문서로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삼인에서 나온 <1968 -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이 머릿속을 정리하기에는 더 편합니다(절판이네요;). 그러나 68혁명은 개념화하고 과오를 따지기 이전에 그 뜨끈함과 혼란스러움을 먼저 느껴보는 것도 좋다고, 사실은 그게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우와 이게 뭐야... 라고 한 다음에 머리를 식히고 따져보는 거죠. 실제로 그 시절을 사는 중인 것처럼요.

  어째서 이 책이 그게 가능하냐면, 68혁명 당시의 배경과 진행 과정을 전달함과 동시에 현재 속에서 68 신좌파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어서에요. 종결된 역사가 아니라 진행형이라는 느낌. 그렇지만 '후예'나 '흔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변형태가 되어 있죠. 그들은 사라진 것같기도, 아닌 것같기도 합니다. 유령이 우리 곁을 떠돌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하긴 상상력과 사랑을 제외한 모든 것에 저항하려던 무모한 영혼들이라니, 정말 유령이 아니고서야...

  아, 이거 대학생들이 읽으면 간지+3의 효과가 있습니다.





7. 스페인 내전 by 앤터니 비버


  -선정 카피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벨탑'이라고 썼는데, 좀 허세돋는 문구지만 괜찮았다고 생각합니다. -_-; 사람이 쌓는 모든 탑은 아마 바벨탑이 아닐까 생각해서요. 어차피 무너질 거라면 멋지게 쌓고 희한하게 부서지는 게 유일한 목표는 아닐까.

  그래서 스페인 내전은 그 허무한 결말까지 너무나 인간적으로 보입니다. 온갖 서로 다른 정의들이 힘을 합쳐 목숨을 걸고 힘겹게 쌓았던 탑이 맥없이 무너지는 모습 말이죠. 어쩌면 그렇게 실패했기 때문에 인간적이라는 상상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만약 소련이 더 지원해줘서 (어쨌든)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면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을까. 아마 아니겠죠. 그럴 바엔 장렬하게 가라앉아서 희망 가진 자들의 마음 속에 전설로 남은 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저는 냉소적인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걸 쓰다 보니 기분이 좀 이상하네요. 역사 분야 괜히 맡았나.

   저는 이 책을 쓴 앤터니 비버 좋아합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룬 전작(국내 출시 기준)도 좋았죠. 역사를 다루면서 그 안에서 드라마를 뽑아내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그래서 웬만한 소설 못지 않게 잘 읽히죠(물론 독자가 전쟁사에 흥미가 있을 경우겠지만). 스페인 내전은 각 진영 내부에서도 온갖 파벌과 알력다툼이 심했고 역학관계도 복잡해서 잘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깔끔하게만 정리하면 재미가 없죠. 이 책은 스페인 내전의 겉과 속을 모두 품으려는 야심찬 시도이며, 지금까지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책들 중에서는 단연 가장 성공적인 사례입니다. 너무 자명한 추천이지 않나요. 음.. 제본이 약간 아쉽습니다만...(흠)





8. 말하기의 다른 방법 by 존 버거


  -모든 혁명과 진보는 역사의 물꼬를 트기 위한 작업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역사 그 자체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합니다. 진보건 보수건간에 모든 현대사는 인간을 자신의 시간축 안에 가두어두려 하거든요.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은 혜택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시간이 획일화되는 순간 신비는 사라지고 인간은 규격화되니까요.

  거기에 어떻게 저항할까요. 언어가 가장 익숙한 수단이겠죠. 그러나 언어는 한계가 있습니다. 언어 자신이 논리를 필요로 하니까요. 하나의 규격이 정해지는 순간에 하나의 신비가 빛을 잃습니다.

  말하기의 다른 방법이 필요할 때, 존 버거는 사진을 들었습니다.

  한 장의 사진은 아무런 체계도 없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역사와 담론이 덤벼들 때, 그 자신의 비밀을 보여주지 않고 해석되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다가 열쇠를 가진 극히 소수의 사람에게만 문을 열어 주죠. 정지한 장면의 과거와 미래, 다른 사람들은 결코 알아보지 못할 작은 흔적들을요. (좋건 나빴건간에)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에 시간은 이상하게 흐릅니다. 현실은 기억과, 기억은 추억과 뒤섞이죠. <카메라 루시다>에서 롤랑 바르트는 이러한 특징을 푼크툼이라고 지칭하면서 '강렬하지만 결코 설명할 수도 전달할 수도 없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존 버거가 보기에 그것은 모든 이가 내면에 품고 있는 신비, 그 어떤 힘과 권력도 결코 침범할 수 없는 내밀하고 사적인 공간이었죠. 사진은 삶의 놀라움을 비밀리에 끌어안은 보물상자이며, 세계의 폭력적 시간에 저항하는 맞춤형 부적인 셈입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면서 우리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고, 거기에 아름다움을 더한 이야기들.

  아, 이건 이 책이 하는 이야기의 일부일 뿐입니다. 휴우.






9. 닥터 노먼 베쑨 by 테드 알렌


  -네. 법정스님 추천도서죠. 이런 하수상한 시절에 좌익 서적을 추천하시다니 스님도 참.

  부와 명성쯤은 기본 옵션이었던 천재적인 의사가 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삶과 인간의 중요성을 깨달은 그는 세계의 격전지들에 찾아가 의료활동을 하죠. 그 자신의 최후의 순간까지요. 왠지 영화 스토리 같네요. 영화라. 장 피에르 멜빌의 <그림자 군단>이나 마틴 스콜세지의 <성난 황소>가 떠올라요. 현실도 등장인물들도 잿빛입니다. 뜨거운 잿빛이죠. 감동적인 에피소드들이 곳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책을 생각하면 어두운 야전 병원의 한켠에서 홀로 생각에 잠긴 한 노의사가 먼저 떠오릅니다. 강한 의지가 억누르고 있는 무한한 피로.

  노먼 베쑨은 인화단결 류의 위인은 아닙니다. 유명한 의사나 간호사들이 백의의 천사라거나 봉사심이 투철하다거나 해서 이타적이고 온화하다는 캐릭터가 입혀져 있는데요. 나이팅게일만 해도 엄청 엄격한 사람이었고, 특히 이 양반께서는 무서우리만치 엄정하셨더랬죠. 그 기준이 자신이든 타인이든간에 결코 변하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모든 위대한 인물들의 공통점이겠지만요. 까칠하다 싶을 정도로 시크한 의사 남자. 하지만 인민들에겐 따뜻했었죠. 비록 겉으로는 잘 웃어보이지 않는 츤데레고독한 사람이었지만...

  엔간한 드라마쯤은 찜쪄먹을 하드보일드 메디컬 역사 전쟁물입니다. 주인공의 뽄새부터가 다르죠. 지금까지 비교적 무거운 책들을 많이 소개했는데, 이 책만큼은 멋진 스토리에 몸을 그냥 맡기시면 됩니다. 실화라서 감동은 더블입니다. 강추.





10.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by 반 고흐 (박홍규 편저, 번역)


  -제목이 너무 평범해서 안타까운데.. 현재까지 번역된 반 고흐 서간집 중에서 으뜸입니다. 박홍규 교수의 설명도 시기별로 꼼꼼하게 달려 있고, 각 편지들도 발췌가 아닌 완역이 되어 있거든요. 더불어 평소에는 보기 힘든 스케치 등도 구경할 수 있고요.

신간브리핑에서 자세히? 소개드린 적이 있습니다.

여기를 누르시면 보실 수 있어요.













...전혀 간략하지 않잖아...-_-;;


빠뜨린 책이 두 권 생각났습니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봉인된 시간>요.
이걸 어떡하나.. 그치만 지금 더 쓸 생각은 없습니다.;

쓰고 보니 이게 도움이 될만한 글인지도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만(울고싶네요)...

부디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셨으면 합니다. 다음부터는 좀 적당한 길이로 뵙겠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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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죠 2010-04-14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악 사버릴거야 전부 다 사버리겠어요! 저 적립금 많은 녀자에요. - (벽 뒤에서 빼꼼 내다보며) 저 MD님 팬입니다... 늘 지켜보고 있습셉습... 사...사...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무서워 하지 마세요...

외국소설/예술MD 2010-04-14 22:36   좋아요 0 | URL
구매왕 순위에 드시겠네요 축하드립니다(웃음).

무서워하긴요. 그저 영광이고 빛이십니다. 반짝반짝. 다만 추천이 제대로 먹힐지 걱정이 될뿐..

카방글 2010-04-14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MD님 원조 팬클럽 회원입니다.(....) 통장에 돈이 들어올 날만 세고 있어요 ㅠㅠ

외국소설/예술MD 2010-04-14 22:37   좋아요 0 | URL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냐능... 그맘 잘 압니다. 토닥.

다락방 2010-04-14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까지는 알라딘예술역사MD님의 팬이 아니었습니다만,
이 포스팅을 보고나니 오오, 팬이 되어도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알라딘예술역사MD님의 글렌 굴드 책을 빌려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뭔가 다를 것 같아서요.

아, 멋진 리스트에요. 제가 읽은것도 한권도 없고 제가 흥미있어 하던 분야도 아니었지만 관심을 가질만한 멋진 글이에요.


잘 읽고 잘 잡시다.

네꼬 2010-04-15 10:0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하하, 다락님. "잘 읽고 잘 잡시다"가 너무 재밌어서 로그인도 하기 전에 댓글. ㅎㅎ

외국소설/예술MD 2010-04-15 11:03   좋아요 0 | URL
안녕히 주무셨는지요.

제 굴드책은 아마 세균 함량이 높지 않을까요. 면역력이 낮은 분께는 빌려드리지 않습니다.;
즐겁게 읽으셨다니 다행이네요. 시름 좀 놨습니다. 쓰면서 걱정이 많았거든요. ㅎ

앞으로 또 뵙겠습니다. 꾸벅

루체오페르 2010-04-15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드는 책 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10-04-15 11:04   좋아요 0 | URL
어떤 책이냐고 물으면 실례겠죠? 소개글이 마음에 들어서였다고 혼자 믿고 있겠습니다. ㅎㅎ

치니 2010-04-15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까지도 팬이었습니다만, 오랜만에 올라온 포스팅 읽으니 역시 팬이 되길 잘했다 싶어요. 으흐.
근데 어차피 길어진 거, 2탄도 써주시죠?

외국소설/예술MD 2010-04-15 11:07   좋아요 0 | URL
늘 들러주시는 거 마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플래티넘 회원이세요.

근데 2탄요? 목구멍으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시크MD님팬 2010-04-15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팬이 늘어서 저도 같은 팬으로서 기분이 넘 좋네요 ㅎㅎ

외국소설/예술MD 2010-04-15 11:07   좋아요 0 | URL
이건뭐 부끄럽다는 말밖에는 ㅎ

네꼬 2010-04-15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읽으면서 세상에 열 권 중에 한 권도 없나 보네, 내 책꽂이엔... 그러다가 한 권 발견했어요. (비밀.) 사심 가득한 페이퍼를 읽노라니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내맘대로 좋은 책"부활시키라고 데모라도 하고 싶은 심정의 1人.

외국소설/예술MD 2010-04-15 11:11   좋아요 0 | URL
첫 리플 주신 대인께 인사 올립니다.
제 담당분야가 은근히 마이너인가봐요. 긁적. 없는 책은 이제 확충하시면 되겠...^^ 흠.

내맘대로 좋은 책은 건의해 보겠습니다. 과연-

... 2010-04-15 12:21   좋아요 0 | URL
네꼬님, 저도 "내 맘대로 좋은 책"코너가 정말 좋았어요. 부활시키라고 데모라도 하고 싶은 심정의 두번째 人.

MD님, 예술/역사 분야가 마이너라니, 믿을 수 없어요!
전 원래 팬이었던거 아시죠? (다락방님과 차별화시켜주세요 ^^) 플래티넘 회원은 물론이고 [스페인내전]도 소장하고 있는 걸요. 추천하고 갑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10-04-16 11:01   좋아요 0 | URL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서재 플래티넘 회원은 구매와 상관없이 제 마음속에 있어요. (아아 손발..)

poptrash 2010-08-25 0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생각해도 벤야민에 관한 부분은 좀... 너무 나간 해석이 아닐까 싶어요. 좋은 말이고, 이끌어낼 수도 있을 논리이지만, 그러려면 중간에 몇 단계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좀 많은 단계가...

외국소설/예술MD 2010-08-26 10:56   좋아요 0 | URL
네 책소개로만 보면 부적격일 수도 있죠. 사실은 저 책 전체가 아니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대해서만이기도 하고요. 엄연히 거시적인 얘기는 아니었고 예술-사회에 대한 글이니까 제 감상과 같은 결론을 내려면 더 많은 부연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벤야민의 이 글은 뭐랄까, 어떤 예감이랄까 영성이랄까, 그런 게 늘 느껴집니다. 사진을 공부해서일 수도 있겠고, 사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기술복제-'를 읽다 보면 신약을 읽을 때 같은 기분이 듭니다. 벤야민 빠돌이도 아닌 제게는 그게 좀 미스테리인데요. 종교적이라는 건 결국 세계론과 연결된 거 아닐까 싶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사적인 추천에는 제 느낌을 말하고 싶었지요. 일반론, 벤야민 일반론은 도처에서 구할 수 있으니까요.

사실 맘대로 쓰더라도 다들 신경쓰지 않을 거라 봤는데, 눈여겨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ㅎ

도란 2010-12-25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팬이 너무 많군... 난 팬하지 말아야 겠다~ ㅎㅎ 2011년 제 목표는 위 책 중 2권 이상 읽는 것!!
마이너 분야여! 힘을 내랏! 이벤트 하나 합시다. 예술+취미 연합 이벤트 ㅎㅎ

외국소설/예술MD 2010-12-27 14:20   좋아요 0 | URL
팬이라.. 화무십일홍이랍니다.

이벤트나 하나 합시다. 연합으로. ㅎ

appletreeje 2011-11-15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미네 집을 검색하다가, 굴드의 책을 발견하고 구매했습니다. 글렌 굴드를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전부터 이 책을 읽고 싶었는데 드뎌 오늘 저녁에 책이 오네요~ 감사합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11-11-16 12:51   좋아요 0 | URL
제가 무척 아끼는 책입니다. 부디 좋은 독서가 되시길. ^^

genie 2014-04-28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스트 12권 중에 제가 아주 좋아하는 책이 세 권, (그보단 약간 덜 ㅋ) 좋아하는 책이 두 권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책 제목만 보고 후르륵 내려가다가 다시 올라가서 찬찬히 읽고 두 권은 보관함으로 보냈어요. 꽤 오래된 글이니 못 보실 것 같기도 하지만 반가운 마음에 댓글 남깁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14-05-02 13:3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오래된 글이 아직까지도 읽히고 또 도움이 됐다는 거 무척 기뻐요. 고르신 책들도 언젠가 읽게 되셨을 때 마음에 드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ㅎㅎ

RZ 2016-01-18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잘 읽고 갑니다. 간지 2 아이템부터 구비해볼까 생각중입니다.(퍽)
 

책 이야기를 끄적이는데 자꾸 지나온 시간들이 밟혔다. 아무래도 올해는 올해의 책이 올해의 나(의 흔적)인가보다. 읽은 책들보다는 놓친 책들과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미련미련미련 때문인가봐(주현미).

미련 가득했던 아홉수도 이제 다 갔다. 늘 아홉수 탓을 하고 있었다. 좋은 남탓이다.

미리 감사합니다. 주어는 없습니다.

이하 순서는 랜덤.

 

<나를 더 사랑하는 법> by 미란다 줄라이, 헤럴 플레처 

별 이변이 없지 않은 이상, 이 책이 올해의 마지막 선택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의 두 저자 중 한 명이 저 아름다운 영화 <유 앤 미 앤 에브리원>의 감독 겸 주연인 미란다 줄라이라고 소개한다. (물론 상대방이 그 영화를 알아야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소개는 충분한 것 같다. 사실, 그러거나 말거나 잘 팔리지 않는다. 

웹사이트에 과제가 던져지면 그걸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과제물을 업로드한다. 이 책은 그 결과물 모음집이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악수시키고 그걸 찍기, '내가 죽은 뒤에 어떻게 처리되고 싶은가' 말하기, 5학년 때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 다시 읽기, 잊을 수 없는 날 입었던 옷들을 늘어놓고 사진 찍기. '나는 유죄입니다. 나는 외롭습니다. 나는 평화를 위해 그림을 그립니다'라는 피켓을 세워놓고 도로에 그림을 그린 (전직) 이라크전 참전 병사는 '공공장소에서 시위하기' 과제를 한 것이다. 과제들은 아무런 논리적 연속성이 없다. 게다가 과제 번호순이 아닌 중구난방의 편집은 이 제멋대로인 내용들을 더욱 부채질한다. 장난과 슬픔과 실험과 기쁨이 한데 섞여 뒹군다. 아, 이런 개판이 인생인가봐.

상황이 그렇다보니 희망은 온갖 원하지도 않은 짐들과 권태와 돌아보기 싫은 과거들의 틈바구니에 껴 있다. 이런 생의 희망 찾기는 보물찾기와 같다고, 이 책은 단 한 번도 소리내어 말하지 않았다. 대신 책 속은 직접 보물을 찾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땀과 숨과 키스로 가득찬 아름다운 책.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by 로베르토 볼라뇨 

 여름이 지나갈 무렵, 몸도 마음도 한계에 다다랐다. 책을 읽지 못했다. 난독증 비슷한 증상이었다. 외국어를 읽듯이 단어를 하나하나 훑은 다음 문장을 강제로 조립했다. 머릿속에서 문단 이상의 내용은 증발했다. 그때 나는 내가 끝장난 줄 알았다. 

어쩌다 다시 잡았는지 기억나지 않는 이 책이 마법을 부렸다. 나는 이 책을 그림처럼 읽었다. 거대하고 불가해한 구멍(말도 안되게 장황한 대체역사소설 이야기)이 있었고, 방치된 채 썩어가는 뜨거운 것들이 있었고, 그림자같은 인물들만 등장하는 도시 뒷골목의 느와르 풍경이 있었다. 무엇보다 폭력, 많은 폭력이 있었다. 증오와 권태의 스케치들. 대상을 알 수 없는 풍자화들. 찌그러진 풍경화들. 각각의 단편은 하나의 그림이면서 또한 거대한 초현실주의 태피스트리의 쪼개진 부분들이었다. 내가 읽은 것은 이야기-서사가 아니라 규정지을 수 없는 연출로 가득찬 수수께끼의 현상들, 이미지들의 덩어리였다. 뜨거운 라틴 현대 미술.

아무런 스토리도 이어지지 않고, 가끔 겹쳐 등장하는 인물들 외에는 접점조차 없는 이 단편집은 그 연결점이 없기 때문에 힘을 발휘한다. 메타포는 많지만 모조리 목표를 잃고 산산이 분열한다. 때문에 볼라뇨는 마르케스류의 성과를 돌파했다. 초현실주의가 뭔가를 상징하기를 거부하는 순간, 그는 그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서사를 거부하는 문자는 자존한다.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이 독특한 접근법을 요구하는 소설 덕에 나는 다시 글을 문제없이 읽게 되었다. 책은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 

 *다르지만 어딘가 비슷한 것.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 by 사샤 스타니시치 

 낭기열라는 거의 전적으로 신뢰하는 출판사다. MD가 되기 전, 우연히 서점에서 샀던 (인터넷 서점 애호가였다면 나는 결코 그 책을 발견하지 못했을 거다) 안토니오 스쿠라티의 <생존자>는 깜짝 놀랄만한 홈런이었다. 이어 접한 책들도 모조리 안타를 터뜨렸다. 청소년 분야를 맡게 되고 잠시 그분들과 메일을 주고받았다. 브랜드전 한정 티셔츠를 준다고 했었는데 결국 받지 못했다. 

문학MD의 격찬이 있었으니 나는 좋았다는 얘기만 해도 될 것 같다. 따뜻하고 소란스럽고 '애수'가 있고 웃기고 감동적인 전쟁 이야기는 정말 만나기 힘들다. 사프란 포어보다 더 정신없는데, 그게 '전장'의 분위기 같아서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보스니아는 뉴욕이 아니니까. 거기는 물리적으로도 붕괴되고 있는 세계니까. 혼란은 혼란스럽지 않고 그냥 슬펐다.

유사 난독증에서 탈출할 무렵 읽었다. 책 속에 담긴 많고 많은 '이야기'들이 힘이 되었다. 낭기열라님들아, 티셔츠는 주시지 않아도 되니까 좋은 책 많이 내 주세요. 

 MD가 특정 출판사 편애해도 될까? 내 분야에는 이 분들 책이 없으니까 지금은 괜찮다.   

   

 

 <스페인 내전> by 앤터니 비버 

 가장 위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에 그 패배는 가장 비참하다. 어쩌면 20세기 (서구)사람들은 이 전쟁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시도했었는지도 모르는데, 하나같이 실패한 것들 투성이다. 희망이라고 쓰고 좌절이라고 읽는다. 비극적 면모를 드라마틱하게 연출할 줄 아는 앤터니 비버의 능력 때문에 이 사살당한 거인은 더 아름답고 슬퍼 보인다.

그럼 지금 우리는 어떡하면 좋을까. 동아리 후배들에게 세미나라도 할까 생각하며 읽다가 세미나는 포기했다. 어떡하면 좋을까라는 고민 자체가 '여기에서 시작한다'라는 의미라는 걸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걸 설명하기에 앞서서 왜 패배할 줄 뻔히 알면서 싸워야 하는가를 설명할 자신도 없었다. 사실은 왜 역사를 배워야 하는지조차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다시 준비해볼까.

얘들아. 이게 진짜 무한도전이야. 언제 꼭 보렴. 심지어 재밌어.

*잡담. 앙드레 말로의 <희망>에는 <카탈로니아 찬가>보다 훨씬 간지 넘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물론 두 작품 다 심각하고 재미있다. 

*앤터니 비버의 팬이 되기 위해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사인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를 먼저 읽어도 좋다.  

   

 

<타워> by 배명훈 

나는 장르문학 빠돌이다. 그러나 모 평론가처럼 '재미없는 김연수가 왜 잘 팔리냐'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김연수는 충분히 좋았다. 인문MD 말마따나 좋은 팝 앨범 같다. 근데 한국문학 작품들은 대개 늘 그렇듯 그냥 그랬다. 안좋았다는 건 아니다. 대단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타워>가 있다. 박민규의 다음 단편집이 나오기 전까지는 어쩌면 이게 유일할지도 모른다.

<타워>는 시니컬한 이야기들이 따뜻한 이야기들보다 훨씬 좋았고, 그 편차가 분명하게 느껴진다는 단점은 분명 있었다. 문장 역시 그의 발상만큼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빨리 우리나라 작가가 '동원 박사 세 사람' 같은 작품을 써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전에 '예비군 로봇'을 읽고 느꼈던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었다. 봉오리가 열린 꽃을 보고서야 화들짝 놀라면서 

아아 꽃이 핀 걸 보니 봄이었구나. 그런데 봄은 어디 있느뇨. (한국 장르문학에게 띄운 연서 중에서)

타율(총 수록작 대비 성공적인 수록작 비율)에 있어서도 김연수에 못지 않았으므로, 올해 가장 놀라운 책이었던 <타워>는 당연히 올해의 책에 들어간다. 포텐셜이 폭발하는 순간의 반짝임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p.s: 편차가 큰 단편집이 왜 비교적 고른 수준의 단편집을 제쳤는가? 모든 안타는 안타고 아웃은 그냥 아웃이다. 

 

 

-신간브리핑에서 이미 다루었던 올해의 책들

  

 

 

 

 

  

 

 

-디자인 멜랑콜리아: 공적 체제와 사적 욕망- 그 복층 매트릭스를 치고 들어가는 불온서적. 왠지 재미있기까지 하다. 님 캡짱.

-뱅크시, 월 앤 피스: MD가 아무리 열심히 소개해도 한계가 있더라는 슬픔. 결국 알라딘 블로거들이 한참 뒤에 다시 발견함. 

-인터페이스 연대기: 디자인 멜랑콜리아와 같이 발매됐던 친구. 인식-행동의 조합체라니, 뭐야 너무 아름답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진심의 글쓰기는 이렇듯 다른 모든 조건을 초월해서 감동적이다. 반 고흐 서간집 중 최고. 

  

 

>> 기타 등등 >>

 

-평소 말투로 돌아와서.

말도 안되는 대사, 대책없는 초 열혈 로봇물 <천원돌파 그렌라간>을 다시 봤어요. 함께 소리지르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1분 전의 우리보다 진화한다. 

아멘.

내년은 더욱 진화한 한 해 되시기를. 주어는 없습니다.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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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fall 2009-12-31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땀과 숨과 키스로 가득찬'

외국소설/예술MD 2009-12-31 11:53   좋아요 0 | URL
19금 아니라능. 입니다(타마마).

치니 2009-12-31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미란다 줄라이, 당장 찜입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12-31 13:38   좋아요 0 | URL
현명한 선택을 축하드리는 바입니다. ^^

웽스북스 2009-12-31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저 책 나오자마자 찍어놨었는데. 역시. ㅎㅎㅎ

외국소설/예술MD 2009-12-31 16:14   좋아요 0 | URL
역시. 센스. 쟁이. 세요.
저도 괜히 만년필. 갖고 싶네요.; 쓰지도 않을테지만;

하루(春) 2010-01-05 0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미란다 줄라이의 책은 아마존에서 사야 겠군요. 제가 한국에 없거든요. 그런데, 원제가 "Learning to love you more"군요. 책 정보에 원제가 틀렸어요. ^^

외국소설/예술MD 2010-01-05 14:26   좋아요 0 | URL
어 정말 그러네요.; 고치겠습니다.;;

여름매미 2010-01-06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잘 읽고 있어요. Happy new year-

외국소설/예술MD 2010-01-07 17:34   좋아요 0 | URL
늘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모두 제게 힘이 돼요. 리플을 많이 다셔도 괜찮다는 의미입니다. 반은 농담이구요.

저 꼭 해피뉴이어 하고 싶어요. 열심히 행복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같이 잘 살아 보아요.

파주소녀 2010-01-11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좋은 책 많네요. 덕분에 좋은 정보 얻어갑니다. 아무리 MD가 열심히 소개해도 잘 안나간다... 라는 말은 왠지 좀 슬프네요.. 그만큼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는 말이니까요... 음.. 저도 박민규 작가의 단편집 기다리고 있어요. 참고로 <죽은 왕녀를 위한....>도 좋았답니다 ^^

외국소설/예술MD 2010-01-11 16:13   좋아요 0 | URL
사람들이 책을 안읽는다뇨. 그냥 MD가 부족한 거죠. 고객이 왕이니까요. ㅎ
나의 좋은 책이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추천이란게 뭘까 늘 고민하게 돼요.

저는 박민규 작품들은 단편들이 더 좋습니다. 장편들은 마치 오래달리기처럼 시간이 갈수록 체력이 저하되는게 보인달까, 그런 느낌이 들어요. 상대적으로 그렇다는거고요. '절'(말많을 절)은 08년산 최고의 단편이었습니다. 하악...
 

-5월입니다. 숫자보다는 꼭 한글로 '오월'이라고 쓰고 싶은 이 즈음에는, 봄의 절정이라기보다는 어째서인지 뜨겁고 묵직한 느낌이 들지요. 망월동 묘지에 처음 갔던 때, 친구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몰래 훔쳤던 기억이 납니다.

평화롭지 못한 요즈음이 오히려 깨어나는 사람들을 위한 축복이라고 위로라도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넋놓고 있으면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라곤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 일장'춘'몽을 깨우는 것이라면야... 그렇게 보면 봄의 절정이 맞기는 맞나봅니다.

마침 책도 절판이요, 사람도 이제 조금씩 잊혀져 가시는 백기완 선생님의 시집을 폅니다. 오죽 투박한 게 아니어서 세련된 시를 읽는 맛이야 거의 없지요. 구수하기는 하거니와, 밀가루를 섞어 뻑뻑한 막걸리를 사발째 들이키는 기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세상 힘겨이 살던 사람들이 마시던 것임에야...

한 페이지 펼쳐 봅니다. 제목은 [이 강산 낙화유수] 라고 합니다.

1952년 겨울 동숭동 미군 부대가 들어선

서울 대학 자리엔 왠일로

날마다 철조망을 울부짖는 어린 여학생의 찢긴 자락은 너무나 처절했다

은인들에게 정조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냐고

때려도 또 와 울부짖고

미쳤다고 푸닥거릴 해도 또 와

그렇게도 구슬피 몸부림치던 어느 날

그의 검은 머리까지 빡빡 깎이자

동숭동 일대는 숨을 쉬기가 다 스산했건만

눈이 허옇게 내리는 창경궁 빈 터에선

천상 그 주먹이 폭격기 같은 미군 병사와

여드름도 없이 핼쑥한 한국 소년과 격투가 벌어졌다

조국도 얼씬 못하는 그 여학생의 앙갚음을 한다고

그 소년이 먼저 청한 격투였으나

그것은 천상 폭격기와 초가집의 싸움이라고나 할까

보나마나 죽음으로 끝이 나는가 싶을 무렵

비실비실 일어나더니만

왔다, 날으는 범처럼 우직끈 받고 앙짱 받으니

폭격기인들 소용있으랴

역시 썩은 주먹이란 헷것임을 증명했을 때 미군들이 박치기는 반칙이라고

야구 방망이를 치켜드는 순간, 한국 사람 구경꾼들이 그제서야 벌떼처럼 빈 깡통을 던지는 아우성에 미군들은 그 쓰러진 폭격기를 떠메고 가고

 

사람들은 묻는 것이었다 여보게 자네가 도대체 누군가? 나요?

나즉이 말하는 것이었다, 이 강산 낙화유수요

그럼 자네가 갸의 오빠란 말인가

아니오 이 강산 낙화유수라니깐요 그러면서

어두워가는 눈발 속을 사라지는

그 핼쑥한 소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자위는

따끈한 동태국이라도 한 그릇 먹이고 싶은

그런 겨울이었다

 

저 이야기가 실화이고, 저 소년은 누군가 하니, 소년 백기완이었더라는 얘기(자랑? ㅎㅎ)입니다. 이제 시대는 가고 세월이 흘렀습니다만... 글쎄요. 아직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아 보입니다. 요즘 소식을 접하기 힘든 백 선생님의 건강과 더불어, 요즘 각처에서 펄펄 흩날리는 이 강산 낙화유수들에게 작은 지지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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