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아 꽃아 문 열어라 - 이윤기 우리 신화 에세이
이윤기 지음 / 열림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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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잘 읽어야 하는거다. 이 책은 서양신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던 이윤기가 썼다고 해서 한국신화를 해석한 책으로 오인하면 안되는 거다. 나는 그렇게 오해하고 이 책을 샀지만.

이 책은 이윤기 우리 신화 “에세이”다. 그러니까 신화를 읽어내는 독법에 대한 에세이인 것이지, 하나 하나의 신화를 들어 이건 이런 뜻입니다. 저건 저런 뜻입니다. 라고 명쾌하게 정의를 내려주는 이야기는 아니다. 말하자면 더 넓은 눈으로 읽어야 하는, 개방적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가지 화두를 독자에게 주고 이런식으로 풀어 읽을 수도 있습니다. 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선문답 같은 이야기만 늘어놓은 것은 아니다. 우리 신화에 주로 등장하는 여러가지 테마들에 대해서 주로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해석을 해본다는 저자의 해설도 곁들여져 있지만, 이 책의 주된 테마는, 신화를 읽는 자세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에 따르면 신화는 두 종류로 나뉜다 한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신화가 있고, 권력자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신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 중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그 안의 비밀들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한다. 신화는 상징이고, 언어 역시 상징이다. 언어로 이루어진 신화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신화에 주로 등장하는 아비 찾기 에피소드, 서양의 신화가 그렇고 한국의 유리왕이 그렇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이 그렇다. 그리고 생후 1년만에 아버지를 잃은 저자가 그렇다. 아비 없이 자란다는 것은 삶의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밀려난다는 것을 말한다.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말한다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고, 아비를 찾아 나서는 영웅들은 큰 사람(영웅)이 되어 영웅신화를 만들어 낸다. 이윤기가 말하는 신화 읽기는 이렇듯 삶에 근접해있다. 책을 읽을 때는 이 사람은 무슨 신화얘기를 하는 건지, 계속해서 삼천포로 빠지는 건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윤기가 이 책에서 말하는 우리 신화 에세이는 신화를 신화로만 모셔두지 말고 삶의 방식으로 끌어들여 같이 호흡하고 두들겨보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삶의 지혜를 신화에서 찾아보자는 것이 이 책을 쓴 목적이리라. 책을 읽고 나서 삼국유사를 한 번 읽고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감회가 새로우리라. 나 역시 그렇게 하자고 마음을 먹었으나, 읽어야 할 책이 갑자기 생겨 삼국유사를 다시 미뤄두게 됨을 아쉽게 생각한다. 자간이 넓고 아름다운 일러스트가 들어가 가벼워 보이는 책 이윤기의 신화에세이는, 곱씹어 읽을수록 그 가치가 더하고 바라볼수록 가슴에 파문이 이는 동양화 같은 책이다.



2007.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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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 (외) 범우 비평판 한국 문학선 36
나혜석 지음 / 종합출판범우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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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 (외) 범우비평판 한국문학 / 나혜석편 / 이상경 책임편집, 해설 / 범우사 펴냄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신뢰하는 출판사들이 있을 것이다. 특히 시리즈물로 고전을 펴내는 회사들에 대해서 그런 생각들을 더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한길사를 어떤 사람은 중앙서적을, 어떤 사람은 예전 고려원을, 그리고 나의 윗세대는 삼중당 문고를 신봉할 것인데, 나에게 삼중당 문고와 같은 의미는 범우사였다. 나는 범우사의 출판물을 신뢰한다. 특히 범우사에서 펴낸 해설판 문학전집 같은 것은 매우 좋아하는 편이다. 이번에 처음 손에 넣은 범우사의 시리즈 물온 범우비평판 한국문학이다. 현재 제 42권까지 출간이 되었는데, 저자를 중심으로 대표 작품만이 아닌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까지도 수록한다는 것이 특이점이고, 출판사에서 밝히는 특징은 문학의 개념을 민족 정신사의 총체적 반영으로 확대, 기존의 문학전집에서 누락된 작가 복원 및 최초 발굴작품 수록, 문학전집의 편찬 관성을 탈피, 작가 중심의 새로운 편집, 학계의 전문적인 문학 연구자들이 직접 교열, 작가론과 작품론 및 작가, 작품연보 작성. 이라 한다. 이 책은 그 중 36번째 권 작가 나혜석의 글모음집이다. 나혜석이라 하면 한국최초의 여성서양화가, 정도로 알려져 있다. 불우한 인생을 살다 결국 어디선가 행려병자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나혜석.

이 책은 그녀가 쓴 소설과 희곡, 평론과 수필들이 담겨있다. 책을 읽으며, 이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지 글을 쓰는 사람인지 굳이 명확하게 분류해야 하는가 싶을 정도로, 일단 문장력이 상당히 뛰어나다. 그리고 그 나름의 신조가 굳고 논리들도 명쾌하다. 과연 그 당시 신여성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사상은 2007년 현재 내가 하는 생각과 일치하기까지 했다.



그녀의 소설과 희곡은 자기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것들이 많은데, 자신이 개척해 온 신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강한 긍지와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녀는 가난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진명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화가로 등단을 한다. 그리고 일본에 유학을 가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근대적 여성의식을 가지고 당시의 지식인 반열에 올라 이런 저런 글들을 잡지에 기고한다. 그녀의 글들은 대부분 파란을 일으켰다. 그도 그럴 것이 2007년인 지금 읽어도, 아, 이건 참으로.. 지나치게 솔직하고도 진보적이다 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 당시엔 오죽했을까. 하는 것이다. 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때문에 교원생활도 했었고, 적극적으로 청혼하는 친일파 김우영과 결혼한다. 김우영은 총독부에서 일하는 관리였고 후에 변호사를 개업하였으나 실패하여 다시 총독부로 들어가는데, 이 과정에서 경제적이 어려움과 시댁과의 갈등이 빚어졌고 이전에 김우영과 함께 했던 유럽여행에서 만난 최린이라는 자와의 염문설로 김우영에게 이혼을 강요당한다. 이혼하지 않으면 간통죄로 고소하겠다는 이미 딴 살림을 차리고 있던 김우영의 요구에 나혜석은 무력하게 동의한다. 그리고 이혼의 빌미가 되었던 최린에게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한다. 얼마간의 합의금으로 고소를 취하했지만, 그녀는 자식들도 보지 못하고 오갈 곳이 없는 신세로 전락한다. 미술재료비를 감당할 길이 없어 이우 그림을 팔아 먹고 살기 보다 글을 팔아 먹고 살게 되고, 40이 갓 넘은 나이에 양로원에 입소하게 되나 스스로 수번을 뛰쳐나와 행려병자로 발견되어 사망한다. 그녀의 인생은 단순히 파란만장한 것이 아니라, 너무 거대했다. 그녀가 이혼을 당하고 빈털터리빈 되었을 때 그녀의 화려했던 인생은 오히려 그녀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이 책엔 그녀가 이혼후 적었던 <이혼고백장>과, 이혼후 적은 “신생활에 들면서”, “독신 여성의 정조론” 등도 실려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것은 처지가 처지이다 보니 <모母된 감상기> 이다. 모된 감상기는 남성중심의 문단에서 편견으로 자리잡았던 숭고한 모성애, 자식에 대한 끝없는 자애로움은 모두 가식이라는 것을 신랄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임신과 출산은 고통 그 자체이며 육아는 그 고통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아이들을 키우고 때로 그 사랑과 예쁜 짓에 시름을 덜기도 하지만, 근간이 되는 것은 고통이라는 것에 대해서 매우 솔직하게 적고 있다. 이 글을 발표되고 백결생이라는 자가 비판글을 쓴 것에 대하여 답으로 “백결생에게 답함” 을 적어 “씨(백결생을 말함)의 ‘임신이란 그리 편한 일이 아니다’라는 일구를 보면 씨가 능히 알지 못할 사실을 아는 체 하려는 것이 용서치 못할 점이다”라는 매우 강경한 어조로 반박하고 있다. 그야말로 나혜석의 글은 용기백배, 가공할만한 배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 글의 마지막에 적기를 “나는 꼭 믿는다. 내 <모 된 감상기>가 일부의 모중에 공명할 자가 있을 줄 믿는다. 만일 이것을 부인하는 모가 있다 하면 불원간 그의 마음의 눈이 떠지는 동시에 불가피할 필연적 동감이 있을 줄 믿는다. 그리고 나는 꼭 있기를 바란다. 조금 있는 것보다 많이 있기를 바란다. 이런 경험이 있어야만 우리는 꼭 단단히 살아갈 길이 나설 줄 안다. 부디 있기를 바란다.”라고 적었다. 책의 목차에 백결생에 답함은 모된 감상기의 뒤에 있어 나는 모된 감상기를 여러군데 줄을 치며 읽다가 맨 마지막 발표된 잡지의 이름과 날짜 밑에 “오, 나혜석, 당신은 내 입에 앉아있구려”라고 적었었다. 그래, 1923년에 적은 그녀의 글이 거의 80여년을 흘러 나에게 공명하였음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가부장적 제도의 희생양이었으며, 시대가 죽여버린 인물이다. 가부장적 남성중심사회에 돌을 던진 문장으로 보자면, 버지니아 울프와 같은 맥락을 이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리라 생각된다. 그녀는 이광수등 당대 지식인들과 돈독한 친분을 이루고 있었고, 세상의 주목을 받던 그 화려한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해야하는지 정확히 알 지 못했다.


근대시기의 신여성에 대해서 그리고 그 당시의 사상이 우리의 생각보다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그리고 나혜석이라는 인물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던 시대적 아픔과 그녀를 복원하고 싶은 노력에 가까워지고 싶다면, 나혜석 문집을 강력히 추천한다. 옛글이라 두려움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전혀, 어렵지 않고 매우 흥미진진하다. 오히려 현대의 지지부진한 컬럼들보다 백배 나으리라 자신한다.



2007.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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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의 포구기행 - MBC 느낌표 선정도서, 해뜨는 마을 해지는 마을의 여행자
곽재구 글.사진 / 열림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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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출간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한 때 출판계의 로또라고 불렸다는 MBC 느낌표의 책을 읽읍시다의 선정도서이기도 했다.

이 책은 사평역에서를 썼던 시인 곽재구가 한국의 포구를 다니며 사진을 찍고 사람을 만났던 이야기들이다. 시인 곽재구는 여기서 시를 이야기 하기도 하지만 잔잔한 에세이로 사람을 감동시킨다. 책은 충분히 감동적이다. 이유는, 그가 이야기 하는 포구가 단지 바다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수욕장이나 백사장 같이 아름다운 풍광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삶의 모습이 있고 그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 어머니 아버님들의 이야기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곽재구의 포구기행은 내내 땀흘리며 가난하지만 넉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풍성하다. 그리고 쓸쓸하다.

바다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풍족한 양식을 제공한다. 외로운 사람들에게 벗이 되어주고 슬퍼서 술 푸는 사람들에게 안주가 되어준다. 흥겨운 사람들에게 노동의 현장이 되어주기도 하고 갖가지 사연을 지닌 배와 선주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예전에 읽었던 신경림의 민요기행과 같이 읽으면 좋을 법하다. 수없이 많은 해외여행서들이 있고 우리에게 이제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를 가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피서철이 되면 바다를 찾고 해수욕장에서 놀다가도 포구를 들러 회 한 접시 소주 한 병을 하지 않던가. 그만큼 곽재구의 포구 기행은 날 것이 살아있는 회 한 접시 같은 싱싱한 노동이 살아있다. 책은 읽기가 쉽지만 깊이가 있다. 곱씹어 읽으면 회 씹는 것처럼 자근자근하다. 그가 직접 찍은 사진들도 매우 넉넉하다. 동양의 미라고 일컬어 지는 여백들이 가득하다. 글 역시 그러하다. 찬찬히 숨을 고르고 읽어야 더 맛이 난다.

우리가 알고 있던 곳들과 모르고 있던 곳들의 가치를 전해주며 가끔 무심코 들이대는 카메라에 대고 쌍소리를 하는 아낙과 열심히 조개를 캐 자식들을 공부시키는 강인한 어미들의 이야기가 있다. 오래 시간이 지나도 이 책은 소중하다. 포구들은 조금씩 변해가겠지만, 그 안에 숨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할 것이므로.

2007.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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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길 - 티베트, 차마고도를 따라가다
이용한 지음 / 넥서스BOOKS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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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친한 친구의 블로그를 갔다가, 이 사람의 사진을 스크랩해 온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길을 따라 이 책의 저자의 블로그를 옮겨다 놓은 사람의 블로그를 따라갔다. 친구가 퍼 온 것은 그녀가 갔던 몽골에 대한 것이었고 나는 그 근처까지만 다녀온 티벳의 포스트를 보다가 윈도우 창을 닫았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그 여름에, 티벳의 아래에 위치한 리틀티벳으로 불리기도 하는 사천성과 감숙성의 일부분을 다녀왔다. 티벳민족이 자치구를 꾸리고 있는 그 높은 곳에서 나는 티벳까지 갈 깜냥은 되지 못하는 나 자신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고산의 희박한 공기와 추운 날씨에 괴로워하면서도 행복했다. 그 하늘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색이었다. 그리고 그 길들도, 거기서 만났던 사람들도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감사하고 감사했다. 돌아와서도 오랫동안 그 길들을 잊지 못했다. 수없이 많이 나는 그 길들을 다시 이야기하고 쓰고 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그 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가장 값진 추억이다. 나는 그런 여름이 또 올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래서 리틀 티벳에서 티벳으로 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러나 나에게 그런 여름은 다시 오지 않았고 나는 이 자리에 있다. 이제 쉽사리 그 때처럼 보따리를 꾸리고 어디론가 떠나는 삶을 영유하기엔 나는 너무나 멀리 와 버렸다. 그 해에는 그 여름을 꿈꾸며 봄과 초여름을 살았다. 그리고 다녀오고 나서 여태까지 나는 그 때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쓴 저자는 이제서야 한국에 알려진 티벳과 차마고도를 따라간다. 그 길을 지나며 저자는 조근조근하게 모든 것을 기억하고 가슴에 담는다. 그리고 사진을 찍는다. 그의 여행은, 앞 서 소개한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처럼 유쾌하지는 않다. 중국을 동서로 나누어 서쪽으로 여행을 하다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심각해진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가난과,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척박한 땅에서 사람들은 아주 잘 살고 있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상대적으로 부자가 된다. 그러나 스스로의 마음은 얼마나 가난한가를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그 길들은 수행자가 되는 길이 되기도 한다. 그 길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운 것들을 다시 만나는 이 책을 읽는 시간은 나에게 순식간에 지나갔다. 읽어야 하는 책을 읽을 때는 힘겹지만, 이 책은 아쉬울 만큼 빨리 읽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한 때 기행문만 보면 질투에 휩싸여 책을 넘기지 못했으나, 이제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나는 책으로 만족을 느끼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저자에게 감사했다. 좋은 여행에 도반을 만난 것처럼. 저자의 음성은, 화려하지 않고 진지하며, 온전히 이해하진 않아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겸손함이 엿보인다. 실천문학 신인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는 이 여행자는 능수능란한 프로처럼 사진을 찍지도 않았고 글을 쓰지도 않았다. 그저 그 곳에 다녀온 한 평범한 사람인 듯 겸손한 글들을 잘 풀어냈다. 책은 화려하지 않은 종이에 두툼한 두께로 티벳을 가는 황톳길을 닮았다. 중간중간 인쇄가 매끈하게 빠지지 않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나는 이 책이 많이 팔려서 저자가 돈을 좀 모으게 되고 그래서 또 여행을 떠나고 또 글을 쓰고 사진을 찍게 되길, 조그맣게 빌어보았다.



2007. 8. 29.



+여행을 가고 싶어서 미치겠는 사람에게는 추천하지 않는다. 정말로 미쳐버리면 나는 책임지지 못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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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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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곤고해지면 자연이 그리워진다고 했다.


이제 "지난"이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 것 같은, 8월 더운 여름 어느 날 밤, TV 책을 만나다에서 소개했던 책이다. 그 날 TV 책을 말하다는 야외로 무대를 옮겨 시원한 초록색 속에서 프로를 진행했었다. 그리고 이 책은 유머가 깃들여진, 재미있는 여행서이며, 결국 목적한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다 종주하지도 못한 두 사내의 이야기라고 했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거리로 말하면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두배가 넘는 거리이다. 미국의 조지아주에서 시작해 버지니아와 펜실베이니아, 뉴욕, 매사추세스를 지나 메인 주에 이르기까지, 군데 군데 쉼터와 산장이 준비되어 있지만 간혹 저 귀엽게 생겼으나 무시무시한 불곰이 출현하기도 하고 살인사건이 나기도 하는, 겁나는 길이다.


그 곳은 등산이나 하이킹등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꿈의 등반길이지만, 그 엄청난 거리 때문에 쉽게 발길을 시작할 수가 없고 Thru Hiker 라고 불리는 전제 코스를 한 번에 등반하는 하이커들과 구간을 나누어 종주를 하는 사람들로 나뉜다.


 


이 책의 주인공인 빌 브라이슨은 어느 날 이 엄청난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종주하기로 맘을 먹는다. 그러나 동반자를 찾을 수 없었고 뚱보이자 알콜중독치료를 받은 경력이 있는 오래된 친구가 (사실 종주의 동반자라로서는 장점이 단 하나도 없는)그의 종주에 동반을 하기로 한다. 그리고 어이없는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책은 빌 브라이슨이 종주를 결심하고 종주준비를 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종주를 위해 샀던 등산용품들의 가격부터, 그걸 팔던 종업원이 한 말과 종주 전 날 나는 미쳤어라고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던 세세한 이야기부터 풀어낸다. 책은 내내 이런 식이다. 도덕이나, 그래선 안돼. 하는 윤리따위는 없다. 그저 그가 느낀대로 그가 본 대로 그가 들은 대로 마음껏 지껄이고 그래서 인간적으로 느껴지며 책의 행간에 적힌 유머들 때문에 킥킥거리며 웃을 수 있다. 단점이라면 그의 종주가 전혀 진지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위협적인 일과 무서웠던 순간들도 모두 기록하고 있지만, 책은 내내 유쾌한 어조를 잃지 않는다.


 


대부분의 여행서들이 (내가 읽은 것들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가지고 있는 품위는 없다. 진지하고 아, 나는 이 여행을 왜 하는가, 자아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나 자신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전투적인 삶에 대한 존중보다는 이 여행서는 그저 가기로 했으니까 가고는 있는데 언제라도 누가 소리 한 번 지르며 그만해! 라고 말하면 당장 그만둘 수도 있는 의지박약한 평범남들의 주책스러운 여행기이다. 예를 들면 배낭이 무거워서 싸온 식량을 죄다 버린다거나, 양동이만한 코카콜라를 마시며 정말 흡족해 한다거나,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거나 하는 "수행자"인 체 하는 여행객의 가식은 전혀없다. 그렇다고 철없는 이야기들만 가득한 것은 아니며, 작가의 박학한 상식들이 책의 곳곳에 묻어있어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얽힌 이런 저런 이야기들도 엿들을 수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국토의 규모와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는 거리인지, 기후는 어떤지 기본적인 상식이 있었다면 좋겠지만, 뭐 꼭 그런 요소가 책의 필수상식이 되는 것은 아니고 이 바보같은 두 남자가 미친 짓을 시작하고 또 그 짓거리를 어떻게 종결짓는지를 지켜보는 것은 아, 나도 분명히 이럴꺼야 하는 공감과 함께 책에 파묻히는 매력이 된다. 아, 이 사람들은 정말 대단해 라고 생각하는 여행서가 아니라, 지들이 그렇지 뭐 킬킬킬 하게 되는 여행서라고나 할까.


 


스포일러겠지만, 이 책의 저자와 그 동반자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종주하지 못한다. 중간에 차도 타고 택시도 타고 햄버거도 먹고 그야말로 엉망진창의 하이킹이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어쩄거나 나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걸었다고.


 


어딘가를 가고 싶은데 엄두가 나지 않는 분에게 특효약이 될 수 있는 책이다. 그리고 매우 즐겁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서 좋은 책이다. (맨 마지막에 내가 이렇게 쓰는 부분은 꼭, 약장수처럼 느껴진다.)


 


2007.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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