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전집 2
버지니어 울프 지음, 정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The HOURS 라는 영화를 정말 재밌게 봤었다. 그리고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그 영화를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Michael Cunningham 이라는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지만, 그 모티브가 바로 달러웨이 부인이었고, 그 영화에는 버지니아 울프와 달러웨이 부인을 읽고 있는 미국의 가정주부와 달라웨이부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클로리사라는 여자가 등장했다. 그 영화의 모티브가 된 소설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 또한, 거의 10년이 된 세월이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아직도 완독하지 못한 나의 죄책감을 조금 얇은 책으로 달래보려는 욕심이 함께 이 책을 고르게 했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서 아는 바는, 그저 그녀가 인물은 좀 아니었다는 것과 (아마 니콜 키드만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매우 혁신적인 소설가였다는 것과 자기만의 방을 주장한 여자였다는 것과, 뭐 .. 그 정도.

 

아무튼, 그 이름만으로도 사실 적잖이 부담스러운 소설가임에는 틀림없다.

버지니아 울프는 저널리스트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매우 지적인 환경에서 학교교육보다는 요즘 말하는 홈스쿨링으로 공부를 한 케이스이며, 집안분위기에 힘입어 사촌들과 함께 불룸스 베리 클럽이라는 사교클럽(지적인 모임이었겠지만)을 만들어 그 지성을 더욱 키워나갔다고 한다.

그녀가 문학계에 주목을 받은 이유는 새로운 소설형식을 도입했다는 것인데, 댈러웨이 부인의 전작인 제이콥의 방에서 처음 시도하였고, 그 형식의 완성을 본 것이 바로 이 작품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한다.

 

이 소설을 읽는 사람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되도록이면, 하루정도 온전히 시간을 비워놓고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치우는 것이 현명하다. 소설은, 댈러웨이 부인이 꽃을 사러 가는 아침시간부터 그녀가 벌이는 저녁의 파티가 끝나는 시점까지, 단 하루동안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그 하룻동안의 이야기 사이에 등장하는 적지 않은 인물들의 내면까지 꼼꼼히 묘사를 하고 있는데, 문제는 우리가 고등학교때 배운 시점이라는 체계에 극도의 혼란이 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학시간에 배운 소설의 구조는 늘, 전지적 작가 시점, 1인칭 시점, 3인칭 시점등으로 정확하게 나뉘어 있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 구조가 파괴되어버렸다. 소설은 작가가 이야기를 했다가 댈러웨이 부인이 자기 이야기를 했다가 3인칭이 되었다가 전지적 작가시점이 되었다가 리차드가 자기 이야기를 했다가, 피터가 자기 이야기를 했다가, 말하자면, 음.. 어떤 관찰자가 하나 있거나 혹은 영화를 찍는 카메라가 있다고 치면, 그 카메라의 시선에 따라서 화자와 서술자가 계속해서 교체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만일 단 한 줄이라도 맥을 놓고 글자만 읽었다가는 지금 누구 이야기를 읽고 있는지 길을 잃게 되며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손으로 글자를 되짚어가며 읽어야 한다. 만일 이게 대여한 책이 아니고 구입한 책이거나 혹은 스터디 교재로 사용을 한다면 연필을 들고 괄호와 따옴표를 쳐가며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극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간혹 그 극도의 집중력이 때로는 머리를 얼마나 상쾌하게 해주는지, 버지니아 울프의 능수능란한 변장술에 빠지다 보면 뇌속에서 무슨 물질이 팍팍 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찌릿찌릿한 마력에 빠지게 된다. 아름다운 문장이며, 구체적인 수사법들, 감각과 차원을 초월한 비유들의 향연이 마치 댈러웨이 부인이 준비하는 파티처럼 요란하게 펼쳐진다. 소설의 내용 역시 어느 한 순간 스쳐갔던 두 사람을 기둥 두개 기본 골조로 세워놓고 그 두 인물의 이야기가 날줄과 씨줄로 엮여서 결국 한 정점에서 우연찮게 그리고 매우 사소하게 교차된다. 그리고 그 교차는 마치 수평선 둘이 죽 이어지다가 한 점에서 만나고 그리고 다시 제 갈길을 가는 것처럼 그렇게 흩어져 버린다.

 

매우 일상적인 이야기, 우리는 매일 매일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19세기 영국의 고위층, 흡사 버지니아 울프 자신 주변의 이야기일 수도 있었을 법한 배경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폭풍같은 심리변화를 집요하게 풀어낸 이야기, 글을 읽다보면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기도 하지만, 가만히 스스로를 들여다보라. 우리 하루 사이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며 얼마나 많은 상상을 하는지. 우리도 가만히 길을 걸어가다가 생각만으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지 않는가.

 

버지니아 울프의 이름이 왜 그리도 유명했던가를 확실하게 깨닫게 해준, 기가 막히게 매력적인 소설. 이제 드디어 10년 묵은 그녀의 소설 『세월』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2006. 11. 17.

 

<첨부>The Hours Review

 



 

2002년 미국 / 감독: Stephen Daldry / 
출연: Nicole Kidman .... Virginia Woolf 
Julianne Moore .... Laura Brown 
Meryl Streep .... Clarissa Vaughan 
Stephen Dillane .... Leonard Woolf 
Miranda Richardson .... Vanessa Bell 
John C. Reilly .... Dan Brown 
Jack Rovello .... Richard Brown 
Ed Harris .... Richard 
Allison Janney .... Sally Lester
Claire Danes .... Julia Vaughan 

도데체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겠다고 사람들이 말하던 the HOURS,
그럴만도 하겠다는 생각은 이 영화의 주축이 버지니아 울프라는 점에 기인한다. 
서울에서 상해까지 끌고 온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the Years)"이라는 책은 이제 몇 년만 있으면 내 손에 들어온 지 10년이 되어갈텐데, 아직도 나는 첫 장도 시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화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닌 Michael Cunningham 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고, 이 영화의 주축은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인 MRS. Dalloway 라는 작품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1923년 영국의 한 시골마을에서 소설을 쓰고 있고, 줄리안 무어인 로라 브라운은 1951년의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주체할 수 없는 소외감과 우울증속에 이 소설을 읽고 있다. 하원의원 댈러웨이의 부인 클라리사가 꽃을 사러 가는 1923년 6월 런던의 어느 목요일 아침부터 그 날 밤 연회에서 총리를 전송하고 옛날의 애인과 친구들이 남아 있는 연회좌석으로 돌아올 때까지 12시간 동안 등장하는 중심인물들의내부의식을 집중적으로 묘사하였다는 소설 Mrs. Dalloway처럼 2001년 미국의 뉴욕에서는 메릴스트립분의 클라리사(소설속의 주인공과 동명이다.)는 스스로 Mrs. Dalloway가 되었다는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1923년의 버지니아 울프는 언니가 집에 오기로 되어있고, 로라 브라운은 남편의 생일 케잌을 만들어야 하고 클라리사는 에이즈에 걸린 옛 애인의 파티를 준비해야 한다. 
세 명의 여자는 다른 시대, 다른 공간에서 공통적으로 아침을 맞이하며 세수를 하고 꽃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들에겐 파티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하루가 기다리고 있다. 
 이 세명의 여자에게 이어지는 공통점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은 Mrs. Dalloway 라는 소설인데, 1923년의 버지니아 울프는 파티의 주인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정도로 소설창작에 집중해 있고, 1951년의 로라는 감당할 수 없는 소외감과 우울증으로 그 행복해 보이는 여성의 모든 조건을 가지고서도 자살을 시도한다. 2001년의 클라리사는 동성애인과 함께 살고 있고, 파티의 주인공이 될 옛 애인은 에이즈에 걸려 모든 창문을 막고 천장이 떨어져 나간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 건물에 살고 있다. 

배경이 봄이건 여름이건 겨울이건 이 세 여자의 모습은 음침한 공기와 눈이 부시기만 한 햇빛속에 공존하며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영화는 매우 적절하게 세 주인공에게 이야기를 분배하여 지루하지 않은 연출력으로 영화를 강하게 이끌어나간다. 아무 상관이 없어보이는 세명의 여자는 하나의 이야기로 통일되어 뭉뚱그려지고 삶에 직면하는 일과 여성이 느끼는 행복은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불러 일으킨다. 

 세 주인공과 리차드 역의 에드 해리스의 연기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며 이 배우들이 한 명이라도 빠졌다면 영화의 힘은 반의 반으로 삭감되었을 것이 뻔할 만큼 배우들의 연기는 소름끼치게 대단하다. 

특히 인공성형코를 붙이고 전혀 아름답지 않은 모습으로 출연한 니콜 키드만이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행복은 무엇인지, 삶은 무엇인지, 그리고 41년 주머니에 돌을 넣고 아름다운 유서를 써놓고 사랑을 말하며 자살한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이유는 무엇인지.. 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 파티를 열어야 하는 여자들은 늘 행복한 안주인인 것인지..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자들의 또 다른 이야기인 the hours는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절대 아니다. 그렇지만 한 번쯤 삶에 대해 고민해 보고 내가 직면해야 할 현실이 무엇인가로 일기장을 채워봤던 사람이라면 눈물을 흘리면서 빠져들 수 있는 멋진 작품이다. 

2003.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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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 - 금지된 소설들에 대한 회고
아자르 나피시 지음, 이소영.정정호 옮김 / 한숲출판사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일제 강점기 조선인 엘리트들은 어떤 사회적 의식을 지녔을까. 조선 총독부의 식민 지배 체제에 관한 사회·경제적 연구는 어느 정도 이뤄졌으나, 그 지배 체제의 상층부를 구성한 조선인 엘리트의 의식을 규명한 연구는 드물었다. 이들이 해방 후 식민 지배에 협력했던 과거를 축소하거나 은폐한 탓도 컸다. 총독부 체제에서 중요한 실무적 기능을 담당했던 이 하위 지배 그룹의 사회적 정체성을 살피는 연구 논문들이 발표됐다.
     
 
지난 3일 한국역사연구회(회장 홍순민 명지대 교수)의 학술대회에서 소장학자들이 발표한 논문들은 일제 강점기 고등문관, 금융조합 이사, 군수 등 엘리트 집단의 자기 의식을 조명했다.

고등문관시험 행정과를 통과해 총독부 고등관료가 된 사람들의 의식을 분석한 장신씨는 이들이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데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지만 일본인 관료에 비해 급여나 인사에서 차별받는다는 인식도 지녔다고 밝혔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1938년 총독부 본청 안의 고등관 230명 가운데 조선인 고등관은 12명에 지나지 않았다. 총독부 고등관은 ‘관계의 꽃’이었다. 따라서 고등관이 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고등시험 합격이 관계 등용문의 유일한 패스포트’이자 ‘고등시험에 합격하면 아무리 바보라도 내무부장까지는 보장’되는 분위기였으므로, 한 수험생은 고등시험 합격자 명단을 보는 순간 ‘내 앞날의 인생이 보장된 듯한 안도의 기분’을 느꼈다.”

고등시험 합격은 개인 뿐아니라 그가 소속된 모든 집단의 영예였고 집단의 위상을 높여주는 도구였다. 당시 대학의 우열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은 고등문관 합격자 수였다. 이 때문에 신생 경성제국대학은 학교 차원에서 응시를 적극 권유했다. “또 고등문관 합격은 문중의 자랑이었으며, 출신 지역 또는 고향의 자랑이었다. 각지에서는 고등문관 시험 통과를 축하하는 환영회를 열었다.”

 

장씨는 고등문관 합격자들의 자부심과 엘리트 의식이 단순히 가문이 좋거나 수재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당당히 합격한 데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고등문관 합격자들이 조선인임을 처음으로 자각하는 것은 첫 월급을 받을 때였다. 같은 학교를 나오고 성적도 좋은데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인 동료의 절반 수준의 월급을 받아 갈 때 조선인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선인 문관들은 이를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제도의 문제로 인식했으며, 엘리트 집단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이 더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논문은 분석했다. 논문은 조선인 합격자들의 일차적 욕구가 ‘출세’에 있었으며, 엘리트 코스를 거치는 동안 ‘조선인 관료’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소속되어 동질감을 형성했던 집단과 정체성을 공유했다고 설명했다.

 

식민지 농민 수탈 기구였던 금융조합의 이사를 분석한 문영주(성균관대 연구교수)씨는 이들이 전문 실무 능력을 지닌 고학력자로서 식민권력의 하위 파트너였고, 근대적 교육과 지식을 통해 규율권력을 내면화하고서 농민을 계몽하는 근대인이었다고 밝혔다. 조선인 이사들이 자신들을 일본인과 비교해 뒤질 것 없는 근대 엘리트로 인식하였으며, 식민지배 협조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식민지배에 둔감한 금융조합 이사들의 의식 태도는 조선인 군수들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이송순(고려대 강사)씨는 조선인 군수들이 “식민지 피지배민족인 조선인이라는 자각은 있었으나, 성공한 조선인으로서 일반 조선 민중들과의 차이를 더 크게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고등문관을 비롯해 일제 강점기 조선인 엘리트들은 끝없는 상승욕구를 기본 동력으로 삼아 출세 지향의 삶을 살았고, 하층 민중에 대한 구별짓기를 꾀하는 근대적 엘리트의 정체성을 지녔으며 탈민족적 사고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논문들은 공통으로 지적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윗 글은 이 책을 읽고 있던 11월 13일에 한겨레 신문에 실린 내용이다.

대부분의 소설가, 그리고 문학가들은 지식인에 속한다. 모든 작가가 지식인이라고 하긴 어려운 시대라서 이제는 교집합 정도가 되지 않는가 싶다. 이 책의 저자, 아자르 나시피도 이란의 지식인이다. 영문학을 전공했고 영문학 교수를 역임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스위스와 영국등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한다. 그녀는 이란을 떠났으나, 이란은 그녀를 떠나지 않아서, 이렇게 이란을 떠나온 후에 금지된 서적에 대해서 이 책을 썼다.

 

나는 폐쇄된 사회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를 묻고 싶다.

우리중의 일부는 폐쇄된 사회를 경험했을 것이며, 우리중의 대다수는 폐쇄된 사회가 있었다는 이야기만 전해들었을 것이다. 할 말은 그토록 많은데 그런 말을 하도록 허용되지 않는 상황, 그 상황에 지친 이 지식인은 이란을 떠난다. 그리고 이 책은 이란을 떠나기 전에 그녀가 마지막으로 학교를 떠나 몇 명의 아가씨들과 함께 읽었던 책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롤리타의 나보코프, 위대한 개츠비, 헨리 제임스, 그리고 제인 오스틴에 대하여. 

 

   
  이란은 이 책에 따르면 1921년 쿠데타로 팔라비 왕조가 수립되었고 1935년에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바꾸었다. 1941년에 마지막 왕(샤)무하마드 팔라비 국왕이 즉위하였다. 그 후 1950년부터 민족주의 세력과 이슬람주의가 결합하여 서구적 근대화를 추진하던 국왕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79년 일 월 결국 팔라비 국왕이 국외로 추방되었고 같은 해 십일 우러에 '반미의 화신'이던 호메이니 옹은 수도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여 오십이명을 인질로 잡고 440일간의 억류한 커다란 사건을 일으켰다. 다음 해에 이라크와의 지루한 팔년간의 전쟁이 일어났다. 호메이니는 그 후 10년간 신정(神政)통치를 하여 이란을 근본주의 이슬람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이란 혁명기간 중에 육만명 이상이 희생되었으며 팔라비 국왕의 추종자 수백명이 공개 처형되었다. 많은 반대세력들이 가차없이 구금, 체포, 투옥, 처벌되었다. 대학은 폐쇄되고 여성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게 했으며, 반혁명적이며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서양문화 - 특히 음주, 음악,문학 등-를 금지시켰다.

 서로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 이라크와의 전쟁이 유엔의 중재로 1988년에 끝났다. 다음해 유월에 최고지도자 호메이니옹이 86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하메네이가 그 지위를 승계하였으며 같은 해 라프산자니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1995년에는 미국의 경제제재조치와 무기수출금지 조항이 선포되어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1997년 개혁파인 모하마드 하타미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하타미 대통령은 문명간의 대화를 주장하며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하고 있다. 이란은 극단적 이슬람 원리주의에서 서서히 벗어나 최근에는 여성들에게 머리카락이 조금 보이는 개방형 차도르를 허락하였고, 청바지와 짧은 치마가 허용되고, 가슴이 패인 웨딩드레스와 인터넷 까페가 등장하기도 하여 경직된 문화에서 유연성과 다양성이 조금씩이나마 나타나고 있다. 

책의 669-670쪽 참조

 
   

 

내가 중국에서 공부를 하던 그 때에 가장 답답했던 것은 지금은 개방된 사회이지만 폐쇄되었던 사회의 잔재가 너무도 많이 남아있었던 흔적들을 도처에서 느낄 때였다. 특히 문학계통에 있어서는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외국문학의 유입이 중지되었고, 외국과의 사상의 교류가 쉽게 열리지 못하는 닫혀있는 사회였기 때문에, 외국에서 들어오는 번역물이나 사상들의 전래가 매우 미흡했다. 한 때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담론과 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주의, 에드워드 사이드나 데리다 등의 이야기를 십여년 늦게 받아들이고 그를 대학강단에서 다시 반복하는 미학강의를 들으면서 한숨이 나왔고, 외국문학 전공자가 아닌 이상 일반 중국문학 전공 교수들은 외국문학을 접할 수 없던 시기를 거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일부 대외한어(외국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강사중에는 독일이나 프랑스의 대학은 서열이 없다는 것(일/이류를 따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이없는 경우도 있었다. 할 말을 많은데 그런 말을 하도록 허용되지 않은 사회에서 계속해서 살다보면 결국 할 말조차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무엇을 잃었는지도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그들을 보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 이유로 중국의 쓸만한 학자들은 모두 망명을 하거나 국외로 출국해버렸다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물론 다시 돌아오는 자들도 있었고, 남아있는 학자들이 모두 허접한 자들은 아니었지만, 일부 집단의 정치세력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국가 전체가 이용당하는 경우, 가장 먼저 죽는 것은 학문일 지도 모른다. 지식인들은 자살하거나 망명하거나 아니면 범인으로 돌아간다.

 영문학을 전공했고, 그래서 영문학을 사랑했던 저자는 이 글을 통해 이란이라는 나라, 폐쇄된 사회에서 지식인으로서 금지된 책을 읽어나가는 행위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가 스스로 얼마나 자기 합리화를 하기 위해 안달이 난 것은 아닌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 괴물들과 맞서 싸우는 사람은 누구든지간에 그 과정에서 자신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긴장감, 그리고 그녀가 사회의 일부이기 때문에 지켜야 했던 책임감들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이 모든 시체들을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책은 역자 후기에서 회고록이라고 밝혔지만, 나는 소설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소설이라고 써 있는 부분은 없다. 회고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저자는 그녀와 함께 책을 읽었던 아가씨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대한 위장했고 가명을 사용했으며 여러가지 장치를 사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존재인 마법사라는 인물도 창조되었다. (창조라고 본다)

 영문학에 대해서 조예가 깊거나, 적어도 소개된 작품들인 롤리타, 위대한 개츠비, 헨리 제임스의 소설과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을 깊이있게 읽고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한 줄 한 줄 쉽게 넘기지 못할 터, 그러나 작가는 당신들 이 책을 읽고 오세요. 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나도 롤리타는 영화로 제인오스틴의 소설도 영화로 접한 게 다이며, 개츠비는 너무 오래전에 읽었고 헨리 제임스는 노팅힐에서 휴 그랜트가 줄리아 로버츠에게 그 사람 작품을 좋아한다고 했던 대사를 기억하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670여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을 손에 넣고 읽겠다는 사람이라면 나보다는 나은 영문학 상식들을 가지고 있을 터, 뭐 그다지 걱정되는 바는 아니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가 고민하는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같이 고민하고 있다. 최고의 소설은 항상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문제삼으라고 강요하며, 소설은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육감적인 경험이라고, 소설은 경험을 흡입하는 것이라고. 

 책이라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모르고 있는가를 자꾸 깨닫게 해준다. 나는 또 내가 중동이라는 사회에 대해서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이 세상에 일단 견고한 현실로 변형되어 사라지고 마는 꿈의 상실을 그리고 있는, 꿈을 순수하게 만드는 갈망, 그 갈망의 비구체성인 꿈이 살아있는 땅들에 대해서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다시금 또 깨달았다.

 

2006. 11. 14.

 

+굵은 글씨는 책 속에 있는 표현을 변형하여 반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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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여행가방 - 박완서 기행산문집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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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줌마 아직도 이런거 쓰나?"
남편의 코멘트.
"아줌마라니.. 할머니지."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버린 31년생 작가 박완서 할머니.
나는 항상 박완서 작가를 이야기 할 때 박완서 할머니라고 이야기하길 즐긴다.
할머니의 글은 언제나 조근조근하고 소박하며 인간미가 넘친다. 정말 할머니가 얘기 해주는 것을 듣는 것처럼.
약간 옹색한 듯 하면서도, 약간 속물같기도 하면서도, 속으로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것 같은 늙은 할머니, 그렇지만 그 심성이 고와 매번 생각한 꿍꿍이를 실천하지 못하는 그런 노인네.
지난 번에 이 책을 봤을 때 외면했던 책이었다. 

 나는 남들의 기행문을 잘 읽지 않는다.
세상에 많은 기행문을 엮어낸 산문집들을 특히 읽지 않으려 한다.
인터넷으로는 잘 읽는다. 아는 녀석들이 다녀온 곳, 특히 내가 갔던 곳을 비슷하게 다녀온 경우.
그것도 아는 놈들 것만 읽는다. 
 

왜냐하면,
남들의 기행문은 소름끼치는 질투심에 나를 활활 불태우기 때문이다.
정말 나는 타버리고 말 것처럼 반응한다.

 

그런 내가 이제 그 마음을 어느정도 접고 평정을 찾기 위해 고른 책이라 할 수 있겠다.

더군다나 할머니의 기행산문집이라면, 대단한 어려움이나 뭐 잰체 하는, 티벳 한 번 갔다와서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의 신앙을 모두 이해한 것처럼 말하는 객기의 문체는 없을 것이고, (나 역시도 그랬겠지만) 부르르 떨리는 청춘들을 어쩌지 못해 고행을 마다하지 않는 그래서 그런 고행으로 어느정도 그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해 안달이 난, 객기, 광기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 책은 1997년 학고재에서 나온 티베트-네팔 기행문 『모독』을 실천문학사에서 다시 내고 싶다고 하여 재편집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약간 어수선한 분위기도 있다.

책은 4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가장 비중이 있는 것이 맨 마지막에 실린 티벳 기행 "모독"과 카트만두 기행 "신들의 도시"이고 그 앞에 있는 한국땅 남도/하회마을/섬진강/오대산 기행과 잃어버린 여행가방이 실린 두번째 장에는 바티칸/중국,백두산/상해기행이 있고 세번째는 쉽게 방문하기 어려운 장소를 유니세프 친선대사의 자격으로 다녀오신 에티오피아 방문기와 인도네시아 방문기가 실려있는데, 각 글의 논조와 방문목적등이 모두 달라 여기저기서 글을 퍼와 짜찝기 한 냄새가 아주 강렬하다. 

 순전히 개인적으로, 나는 이렇게 꼬치끼우듯이 통일성이 없는 책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편집이 엉망진창인 옴니버스 앨범을 듣는 듯한 느낌이기도 해서 말이지. 

 아무튼, 그래도 산문집이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자. 한 번 펴낸 책을 덜렁 모독만 낼 수는 없어서 이 글 저 글 어울리는 글들을 모아낸 것이니까, 박완서 할머니의 여행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생각한대로, 박완서 할머니의 기행문은 적당히 통속적이고 매우 솔직하다.

그리고 잰체가 없다. 당신들이 그들의 가난을 알아? 이런 것이 아니고, 아, 거지떼들, 지겨워. 지갑을 연 것이 잘못이었어. 라는 읖조림과 저 쓰레기들을 모두 어쩔 것인가 하는 생활인으로서의 자세가 엿보인다. 어떤 명예나 명목을 중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솔직히 담담히 풀어낸 작가의 필체가 구수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끝으로 미뤄두었던 다른 기행문을 또 꺼내 읽으러 책장을 뒤지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그렇게 의지만 있으면 떠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대리만족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른 지도 모른다.

 

2006.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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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Mr. Know 세계문학 45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고골리 단편선을 고르면서 같이 골랐던 안톤체홉의 단편선.

도스트예프스키는 "우리는 모두 고골리의 외투에서 나왔다"라는 평가를 했었고, 안톤 체홉은 현대문학사의 단편소설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꼽힌다.

예전에 읽었던 『귀여운 여인』의 느낌이 참 신선했던 것 같아서 안톤 체홉의 단편을 더 읽어보고자 이 책을 골랐는데, 책이 판형이 작고 약 260여페이지에 이르기 때문에 가벼운 단편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산. 위아래 여백이 많지 않는 페이지 구성에 작은 글씨로 깨알같이 적혀있는 것이 예전에 읽던 문고판 서적을 다시 접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보기보다 매우 꽉 찬 내용이라는 것. 아주 빡빡하다. 최근에 보기 힘든 구성이라고 할까.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다시 읽고 싶은 『귀여운 여인』은 없고 매우 짧은 단편인 『굽은 거울』, 『어느 관리의 죽음』, 『마스크』, 『실패』, 『애수』, 『농담』, 『하찮은 것』, 『쉿!』 , 『어느 여인의 이야기』, 『자고 싶다』, 『대학생』,  그리고 조금은 긴 단편 『6호 병동』과 『검은 수사』, 『문학교사』, 『농부들』, 『새로운 별장』,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 실려있다.

 

안톤 체홉은 <그가 없었다면 단편 소설을 쓰는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체호프가 없었다면 단편 소설은 고리타분한 형식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네이딘 고디머의 말처럼 단편소설은 바로 이런 것. 단편 소설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 라고 알려준다.

우리가 얼마나 즐거운 단편소설들을 많이 읽어봤는가 모르겠지만, 확신하건데 안톤 체홉의 단편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그의 단편을 처음 만난다면 확실히 매료될 것이다. 안톤 체홉의 단편 소설은 스토리가 확실하고 감정이입도 정확하며,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힘이 있되 지지부진한 묘사따위는 과감하게 삭제하며 많은 작가들이 범하기 쉬운 실수인 주인공을 너무나 잘 이해하는 - 자전적 이야기의 굴레를 넘어서지 못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포기하지 못하고 주인공의 변명만으로 가득찬 - 몰입은 피하면서 안에 짜여진 정확한 플롯에 의해 등장인물들과 사건들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

말하자면, 어떻게 보면 안톤 체홉의 소설은 지나치게 차가울 정도로 객관적이지만, 비판할 수 없는 정말 "귀여운 인간상"이 그득하다고 할까. 나쁜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듯한 구조이지만, 그들의 터부를 넘어선 행위를 이해하게 되는, 그러니까 소설속의 주인공이 범죄를 저질렀어도 이해하게 되는 공범의 위치에 독자를 데려다놓는다.

 

가만보면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인간 사회에서 터부시되는 일들을 위태롭게 넘나든다. 그러나 그들은 악한이 아니다. 한 인간의 역사를 잘 이해해야만 이야기해줄 수 있는 것들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의 소설의 이야기들은 격하지 않다. 그저 뭐 그런 얘기가 있었더라구. 그런 소문이 있었다구.. 그래서 뭐 어쨌다가 아니고 그렇다는데. 하는 듯한 말투

 

 "이 곳에 얄따도 오레안다도 없었던 때에도 울렸고, 지금도 울리고 있고, 우리가 없어진 후에도 똑같이 무심하고 공허하게 울릴 것이다. 어쩌면 바로 이 변화 없음에, 우리 개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에, 우리의 영원한 구원에 관한, 지상의 끊임없는 삶의 움직임에 관한, 완성을 향한 부단한 움직임에 관한 비밀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가 존재의 고결한 목적과 자신의 인간적 가치도 잊은 채 생각하고 행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 " -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中

 

윗 문장이 그의 소설의 느낌을 가장 잘 나타내준다고 할까.

러시아 문학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현대 문학사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은 그 발음하기 어려운 주인공들의 이름 때문에 자꾸 멀리 했었다는 것이다.

책읽는 고양이http://paper.cyworld.nate.com/bluecatlibrary/ 를 펴내고 계신 윤예영 님의 소개로 EBS 오디오북을 요즘 자주 듣고 있는데, 줌파 라히리 라는 작가의 《이름뒤에 숨은 사랑》에 고골리를 너무나 존경한 나머지 아들의 이름을 고골리로 지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오디오북에서 들었다. 그만큼 러시아의 두 소설가의 역할은 막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골리의 외투를 읽고 그다지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 것은 나의 문제이겠지만, 안톤 체홉의 명확한 단편 소설은 고골리의 외투를 잘 이해하지 못한 나에게도 시원한 탄산수 같은 독서의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사다놓은 바흐친의 "말의 미학"을 빨리 읽어야 할텐데 하는 부담도 함께 말이다.

 

2006.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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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골리 단편선
니콜라이 고골리 지음, 오정석 옮김 / 산호와진주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고골리가 뭐 지었지?"

"나도 몰라서 빌려왔어."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은 누가 쓴거야?"

"도스트예프스키"

 

고골리 단편선 빌려온 것을 보고 남편과 나눈 대화이다.

러시아 문학에 대해서, 푸시킨이 그렇게 대단하다더라. 외에, 톨스토이가 대단한 작가다. 라는 것 외에,

우리가 아는 게 어느정도나 될까.

일찌기 서양에 번역소개되어 잘 알려진 러시아 문학중에 내가 아는 것들은 너무나 적다.

그 유명함에 비해서. 그리고 사다놓은 지 몇 년이 지난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는 정말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한 때 정말 재밌게 읽었던 안톤 체홉의 단편선을 고르면서 고골리의 단편선을 같이 고르게 되었는데, 이 책은 고골리의 대표 단편선 3작품, "네프스키 거리", "외투", "코"가 실려있다.

고골리는 전원생활을 버리고 네프스키 거리가 있는 페테르 부르크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상당히 다른 성향의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실린 세 편의 글은 모두 비슷한 시기에 씌여진 비슷한 문체의 글로서, 차르 정권하에서 답답하고 암울했던, 그 당시의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한 소설이라 하겠다.

등장인물들은 정말 답답하고 소심하고 어이없기 그지 없으며, 모든 것의 기준은 관리들의 급수에 따라 정해져 있고 몽환적이면서 비유가 가득하고 조소와 풍자가 풍기는, 그렇다고 속시원한 해학은 오히려 찾아볼 수 없는 허무함.

마치 쇼스타코비치의 스케르초를 듣는 듯한 느낌들이 가득하다.

그러면서도 어렵지 않게 읽히긴 하되 읽고 나서 갸우뚱하는 생각이 많이 드는 것은, 아직 나에게 낯선 기법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검찰관"이 있다 하는데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킨 희곡이라 하니 한 번 찾아서 읽어봐야하겠고 산호와 진주 에서 펴냄 이번판에는 귀여운 칼라 삽화들도 수록되어 있어서 중학교 고학년부터 읽어도 무방할만한 친근한 판본이다.

 

2006.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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