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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전우익 지음 / 현암사 / 199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문화방송 느낌표에서 추천하는 책을 많이 사가지고 왔다. 전부다는 아니지만, 예전에 이미 읽은 봉순이 언니를 제외하고 모두 다 읽어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그 중에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라는 책은 내 기억으로는 몇 년전에 출간된 책이다. 
서점에서 그 주글주글한 한 촌로의 얼굴이 흑백사진으로 떡하니 박혀있는 그 모습과 책 제목을 보고 살까 말까 망설였다가 두께가 너무 얇아서 그만 뒀던 기억이 있다. 

주제도 안되면서 두꺼운 책이 제일인 줄 아는, 건방진 나의 자아가 그런 얇은 책에서는 얻는 게 별로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나도 이미 다 아는 것들일 것이라고 했던, 그 20대 중반.. 혹은 초반이었을게다. 

그 때, 누군가 그 책을 나에게 선물했다고 해도, 나는 시덥잖게 여겼을 것이고, 삶에 지치고 쩔어있던 그 시절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사람이 피폐해지는 것은 끝간데가 없어서 그 어떤 아름다운 글귀를 읽고 그 어떤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어도 콧방귀를 뀌기만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앞서 말한대로 책도 무척 얇고, 글씨도 무척 크고, 군데 군데 사진도 들어있다. 그러니 말하자면 분량은 정말 얼마되지 않아 한꺼번에 쓱~ 읽고 내려가도 될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게 이 책은 그렇지 못했다. 

아주 평범한 농사꾼은 아닌 범상치 않은 이력과 아이러니한 그의 이름 전우익, 그가 지인들중에도 특히 스님과 보살님께 보낸 편지들은 인생과 흙과 땅을 바라보는 모든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있고, 답답한 이 세상과 비뚤어진 인상군상들에 대한 질타를 서슴치 않고 있어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책을 읽는 내내 한 문장을 읽고 창밖을 바라보았고, 그의 얼굴을 보고 지하철에 쭈그려 앉은 또 다른 중국의 노인을 보았으며, 가슴이 먹먹해져오곤 했다. 

오래동안 가까이 두고, 내 인생이 우그러질때, 그래서 나약해 질 때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책.. 

혼자만 잘 살믄.. 정말 무슨 재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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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스펜서 존슨 지음, 이영진 옮김 / 진명출판사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전국 대형서점 65주간 베스트셀러 기록, YES24-알라딘-크리센스 등 주요 인터넷 서점에서 판매 종합 1위 지속…, 스펜서 존슨의 처세 수필 ‘누가 내치즈를 옮겼을까’(진명출판사 펴냄)가 시간이 갈수록 인기를 더하고 있다. 지난해 3월 초판 발간 이후 1년여만에 16쇄까지 56만부를 찍었고, 49만부의 판매고를 올렸다." 우와~ 정말 대단한 책이군~ 

내가 딱!! 싫어하는 책 종류가 바로 이런 책이다. 

표지에 CEO운운 하면서 많이 팔렸다고 자랑하는 책, 필독서 운운하는 책, 얇은 두께에 양장을 하고 미색 모조지를 사용하고 책의 본문 내용을 크다란 글자로 그림과 함께 강조하느라 페이지를 까먹는 책. 

나는 처세술 책을 싫어한다. 예전엔 카네기 인간관계론..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등등의 책을 사기도 했다. 반도 안 읽고 어디 처박아 두었다. 어디 처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 빌려줬는지도 모르고 누가 빌려가고 안돌려줘도 달라소리 안하는 책이 처세술책이다. 

앞서 독후감을 쓴 "미국문화의 몰락"을 읽고 나서 더 싫어졌다. 

더군다나 읽고 나면 당신의 인생이 바뀐다 운운하는 것은 정말 짜증난다. 무슨 약인가? 약이라고 해도 그런 약이 세상에 어디 있나? 비아그라라면 인생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심장마비로...-,.-)

어찌되었건 이 책은 사자새끼님이 보내주신 책이니 감사하게 읽어야한다. ^^;;
싫어하는 책이라고 해서 외면할 필요는 없다.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배울 점은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아무리 형편없는 작품이라는 것도, 그 어떤 열악한 상황에도 배울 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겸손한 마음으로 책을 폈다. 20분만에 다 읽었다. 

게다가 엉성한 번역.. 영어로 책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의 엉성한 번역은 MBA를 거치신 저명한 경역학 박사이자 로스엔젤레스 소재 대한증권 부사장을 맡고 계시다는 이영진씨가 하셨다. 책 번역에 경영학 박사하고 MBA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번역은 번역가가 하는 거지 증권사 부사장이 번역을 왜 해~!흥분中... -,.-)

특히 소름끼치는 이부분..

 "나는 하루 24시간 동안 온종일 문제에 매달려야 했어. 정말 재미없는 일이었지.. (중략)... ... 마음속에 치즈를 그려보기로 했어. 나뿐만 아니라 동료들도 마음속에 또렷하고 생생하게 그림을 그리고 시작한 뒤부터 우리 사업도 다시 회복세로 돌아섰어."

"와, 대단한데?"

와, 대단한데? 에 소름이 팍 끼쳐서 책 덮고 창문보고 있었다. -.-;;



사람들은 이 책을 권장한다. 꼭 읽어보라는 웹페이지가 수십개가 발견되었다. 왜?
왜 읽으라는 거지? 누가 그걸 모르나?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는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나? 모르십니까? 모르시나요?
현실에 안주하는 게 좋지만 세상이 변화하니까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한다.. 그러니까 당신은 마음속에 치즈를 그려라.. 염병.. 

미국에서 출판되는 서적중에 국내에 번역되는 대다수의 책들이 처세술에 대한 책들이다. 앞서 독후감을 적은 미국문화의 몰락에도 수없이 등장하는 화제가 이 처세술에 대한 책이다. 

뭐뭐해라. 뭐뭐해라. 이렇게 하면 당신의 인생은 바뀐다. 바뀌긴 뭐가 바뀌나 이사람아~!

사람의 인생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아니다. 만리장성이 하루아침에 쌓아진 게 아닌 것처럼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를 바꾼다는 거다..(네멋대로 해라..에 나온대사임.. ^^;;;;)끊임없이 고찰하고 숙지하고 반성하고 생각하고 또 다시 고민하고 반성하고 후회하고 힘들게 벽돌 하나 하나 찍어서 시멘트 개고 바르고 굳기를 기다리고 바닷모래 섞였으면 일 다 망쳤으니 다시 시멘트개고 바르고 또 비오고 날 개고 궂고 한 날들을 수없이 기다려 하나 하나 집짓고 담쌓듯이 하는 게 인생을 바꾸는 거다. 

그런데, 이 책 한 권 읽으면 니 인생이 바뀐다는 건 순 개구라다. 

게다가 사람의 사유능력을 무시하는 작태다. 사람은 스스로 고민하고 성찰해서 얻는 결과를 더 오래 간직한다. 머리가 있다는 것은 그 이유다. 너 스스로 니 인생 놓고 고민하지 말고 한 번만 읽어봐~! 내가 니인생 바꿔줄께~! 한다는 것은 독자를 무시하는 거다.

처세술 읽고 인생바뀐사람 있으면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그게 한 순간, 한 일주일, 오래가면 한달은 간다. 그런데 그렇게 가고 나면 성공을 향해 가라고 하던 처세술책의 말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만다. 

성공이 뭔지, 인생이 뭔지 아직 개념도 안 잡혔는데 뭐 어쩌라는 말인가.

사람의 생각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도 아니다. 성공은 도데체 뭐고 인생은 도데체가 뭔지, 내 자신은 뭔지 알아야 그러면 나는 이걸 하면 되겠구나, 그러면 나는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하고 하나하나 시행착오 거치면서 느끼고 정리하는 거다. 

그렇게 수많은 처세술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왜 아직까지 사람들은 처세술 책을 읽으러 다니는 것인가.. 인생 바뀌었으면 한번에 끝장내야 될 거 아니냐 말이다. 

이 책은, 몰락하고 있는 미국문화의 한 단편이다. 성공이 뭔지 아직도 헷갈리는 우리들에게 사탕물려놓고 바람나 도망가는 유모다. 

미국에서 말하는 성공, CEO에 이르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 변화에 성공해서 이 적자생존의 논리에서 살아남는 것, 결국은 기업이론에 입각해 수많은 노동자를 외면하는 것. 그게 성공인가? 나이키처럼? 

처세술 책들은 앞의 카피 좀 바꿨으면 좋겠다. 

"당신도 이런 책을 쓸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일기장 좀만 뒤적거려보면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에 버금가는 책을 쓸 수 있다. 

※이 책은 한국에서 사자새끼님이 보내주신 책입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책의 내용은 맘에 안 들었지만 그래도 느낀 것은 많답니다. ^^ ※

200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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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조영래 지음 / 돌베개 / 198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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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와했던가?
지금 이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想)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生)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아음의 고향이로다.
........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 전태일의 1970년 8월 9일 일기에서.



이 책은 1971년 전태일열사의 죽음이후에 1970년대중에 쓰여졌으나 1983년이 되서야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이름을 걸고 첫 출판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전태일 평전이라는 이름으로 재 출간되었다. 

책을 지은 조영래씨 역시 유명을 달리한지 오래다. 서울대 법대 졸업이후 각종 운동에 참여하여 고초를 겪다가 책이 개정판으로 제대로 된 이름을 달고 출간되기 직전인 1990년 12월에 폐암으로 별세하였다. 

이 책은, 저자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상태로 10여년을 떠돌았고 저자는 서문이나 머릿글도 달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 하고 말았다. 책 속에는 전태일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씨의 글과, 돌베개 편집부의 글, 그리고 장기표씨의 글이 실려있을 뿐이다. 

책의 주인공도 그리고 책을 쓴 사람도 모두 사라진 채 개정판이 나온 책.. 그리고 개정판이 나온지 10년이 넘어서 멀리서 얼굴도 모르는 분이 보내주어 읽게 된 책이다. 

전태일 평전이 내 눈에 띄였던 것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박광수감독의 영화가 개봉하고 나서였다. 그 때쯤, 그 때가 1995년쯤, 그 때쯤이면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올려도 아무렇지도 않은 시절이었겠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이 책을 선뜻 읽지 못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두려웠다. 전태일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는 것과, 그로 인해 분노하고 눈물흘리고 슬퍼하고 다짐할 모든 것들을 감지했다. 그래서 두려웠다. 

결국 전태일평전은 우연한 기회로 나에게 왔다. 그리고 힘겹게 책을 읽었다. 

가끔, 사람들이 그런 말은 한다. 작가의 정성이라는 것.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 책장에서 피와 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다는 말.

이 책이 그러했다. 전태일이라는 평전의 주인공만으로도 버겨운데, 그만큼의 생을 살다간 故조영래씨의 글 역시 책장에서 피가 뚝뚝 흐를 것만 같이 버겨웠다. 책장을 덮고 침대위에 엎드려 있다가 괜시레 딴 짓을 하고 인터넷으로 스포츠신문을 보고.. 그러다가 슬그머니 책을 들었다가는 가슴이 먹먹해와 천장을 쳐다보다가, 한숨이 나와 담배를 물었다가, 어두워진 밤하늘을 바라봤다가.. 그렇게 오래오래 힘겹게 책을 읽었다. 

그리고, 이 독후감을 쓰는 것도 상당히 부담스럽다. 

소화불량에 걸린 것마냥 속이 더부룩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뭔가가 미어지는 느낌이 내도록 이어지고 있다. 책을 읽고 나서 적잖이 영향을 받는 사람이 난데, 아마 이 책의 후유증은 상당기간 길어질 것만 같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한다. 전태일 평전을 읽고 나서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지 알게되었다고..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자. 20대의 청년이, 신경통와 폐결핵, 밝은 햇빛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안질환, 소화기능장애를 겪으면서 허리를 펴지 못하는 닭장같은 작업장에서 하루종일 일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말을 하지 않기로 하자. 

한 아이가, 공부를 하고 싶어서 동생을 끌고 서울로 올라와 박스를 깔고 길에서 한뎃잠을 자다가 배가 고파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 새댁이 깎아놓은 사과를 하나 먹으려다 실신해쓰러졌다고, 평생 배불러 본 적이 없는 한 청년이 죽음 직전에 던진 말이 "배가 고파"라는 말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말을 하지 않기로 하자. 

그래서 그 청년은 죽음을 택했다. 누구 하나 죽어나가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일이었다는 판단, 각종 민원과 청원서를 쓰고 설문조사까지 하는 열정으로 청계천 일대에 대한 열의를 가지고 있던, 세금제대로 내고 직원들 월급 잘 주면서 성공하는 기업체를 만들어보자고 노트 빽빽히 계획까지 세웠던 한 청년이 죽어나가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일이었다는 판단까지 하게 된 그 경과. 

그래서, 그래서 방치된 치료로 죽음으로까지밖에 이어질 수 없었던 그의 분신.

그가 그렇게 갔지만, 그리고 이 책을 쓴 조영래씨도 생전에 자기 이름 걸고 나오는 책을 보지 못한 채로 그렇게 갔는데도, 세상은 여전히 별 다를바없이 돌아가고 있다. 

노동자의 처우가 개선되었다고 근로기준법이 준수되고 있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근로기준법이 준수되고 있는 직장은 노조가 강력한 직장, 신문에 날만한 직장, 의료보험이 지원되는 직장뿐인 것을..

아직도 명절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미싱을 돌리고 있는 미싱사들이 있고, 지하실에 위치한 공장에서 화장실 갈 때 외에는 빛을 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고, 유동이 잦은 여성들이 모인 직장에는 고추장에 밥비벼먹으며 곱게 화장을 하고 옷을 파는 아가씨들이 있고, 고정급 25만원을 받고 구둣발로 쟁반를 나르는 12시간 노동자가 있다. 

가족같은 분위기라는 미명하에 항의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업주가 있고, 무시하고 경멸하며 "니 주제를 알아야지"라고 실실 웃는 사업자가 있다. 능력위주의 사원을 선호한다는 규칙아래 인센티브제를 도입해 사람들 달달 볶아대는 사장이 있다. 

아직도, 우리는 아직도 전태일이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중국에 와서 살면서, 한국에서 미쳐 느끼지 못했던 부분들을 미세하게 느낄 수 있는 기회들이 많다. 그 중에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왜 저들은 자기들도 인권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할까였다. 

"그러므로 고통받는 한 인간의 의식을 살펴보자.

그가 태어났을 때 이미 억눌리는 고통에 찬 현실은 존재하고 있었다. 이 현실 속에서 자라나면서 그는 그 현실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하여 자신에게 강요된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사실은 바로 인간이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을 똑똑히 보지 못하게 된다. 이 거대한 힘에 비하여 볼 때 자기 자신은 너무나도 약하고 초라하고 무력한 존재로 느껴진다. 조만간에 그는 어떻게해서라도 현실의 사회구조와 질서 앞에 무조건 머리를 수그리고 거기게 '순응'해야만 생존이 보장된다고 느끼게 되며, 따라서 현실 앞에서 위축되고 기가 죽어서 비굴해진다. 현실에 대한 모든 비판은 그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모모한 짓으로 되며, 따라서 자신에 대해서는 불성실하게 되고 나중에는 부도덕으로까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그는 비판정신의 쌀을 자신의 의식 속에 싹트기도 전에 잘라버리고, 사회가 강요하는 모든 명력, 모드느 가치관, 모든 선전을 무조건 받아들여 '순한 양'이 된다. 자기 머리로 생각할 줄 모르는 주체성을 빼앗긴 정신적 노예로서 길들여지는 것이다. 

등 어루만지고 간 빼어먹는다는 말이 있다. 강한 자들은 이 길들여진 양들에게 '착실', '겸손', '온건', '성실','적응성 있다'하는 등의 온갖 아름다운 찬사를 퍼부으며 환영하고 칭찬하면서 최대한으로 그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털을 뽑는다. 고통받는 인간은 한동안은 얼떨떨하여 그가 고통을 당하는지 털을 뽑히는지 모른다. 설사 어렴풋이 그것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는 다만 생존하기 위하여 현실의 부당한 행태와 그로부터 오는 자신의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만다. 때때로 무언가 '부당하다'또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으나, 역시 자신은 '무력'하며 그것은 시정될 길이 없으므로 그는 곧 머리를 흔들어 그런 건방진 생각을 털어버린다. 인내는 그의 영원한 금과옥조로 된다. 

그러나 억압과 혹사,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이 그가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서 그의 인간으로서의 존립을 위협하게 될 때 잠자던 그의 비판의식은 돌연 고개를 쳐들어 절실하게, 부지런히 활동을 개시한다. 고통이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그가 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극한점에 다다랐을 때 그는 비로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를,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고 무엇이 추잡한 것인가를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재생하는 것이다. 인간다운 자존심이 되살아나고 억눌렸던 분노가 폭발한다. 저항이 시작된다. 그것이 철저해질 때 그는 이미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현실의 질곡이 결코 인간이 뚫을 수 없는 금성철벽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

책 134쪽에서

후반부의 현실을 뛰어넘는 단계에 대한 것은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왜 그런가.. 하던 문제에 대해서 답을 막연하게 나마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답을 얻었다는 것은 그렇다면 앞으로는 고민하던 문제들에 대해서 어떻게 봐야할 것인지, 또는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고 대처해야 할 것인가도 같이 얻은 것이다. 

전태일의 문제는, 비단 노동문제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다. 

책뒤에 장기표씨가 쓴 글에는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진보적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전태일열사와 또 이 책이 나오는 데까지 수고를 한 출판사와, 책장 한 장 넘기기가 힘들만큼 정열적인 집필을 한 조영래씨, 그리고 이 책의 독자들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누군가 특정인물을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그 자체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그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자는 것.. 그런 인간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논리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청계천의 그 때 당시의 업주들도 모두 사람인데, 사람이 사람과 부대끼고 살아가는 동안 사람은 잔악해질 수 있다. 그래서 같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자기도 역시 사람이라는 것을 망각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렇게 고생했다" 하면서, "그러니 너만은 그렇게 고생하지 말아라"고 하는 사람과 "그러니 너도 그렇게 고생해라"하는 사람. 우리는 어느 쪽에 서 있는가?

후자라면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우리가 아니라면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그도 역시 사람인데...

그저 반성할 뿐이었다. 그도 사람인데, 저이도 사람이고, 이이도 사람인데, 왜 나는 그를, 저이를, 이이를,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고 나와 다르다고 생각해왔는가에 대한 반성. 

그리고, 외면하고 타협하고 슬렁슬렁 살아온 세월.

전태일의 평전을 다 읽고, 인생이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일이 너무나 많은데, 인생이 짧다는 생각. 그러면서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다잡았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지금, 저 앞에 보이는 공사장의 인부들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된다고.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달라던 전태일의 말은, 바로 그 말이었을거라고.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 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指環, 力을 뜻함 - 엮은이)의 무개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으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에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 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 전태일이 죽음전 일생에 단 한 번 다녔던 청옥공민학교동창들에게 보내는 편지 - 


http://www.junt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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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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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이후에 다시 만나는 박노자교수의 책이다. 
이번책은 한국을 비판 분석하는데에 그치지 않고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강의하고 있는 저자가 노르웨이라는 북유럽사회와의 만남을 바탕으로 이런 저런 세계화와 지식인의 갈길을 제시하고 있다. 

지식인의 갈길을 제시한다는 것은 그가 "지식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적어도 우리가 미래를 걱정하고,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런 "생각"만이라도 하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냐고 은근히 다그치고 있다. 

책은 1부는 또다른 세계, 북유럽, 2부 과연 그들은 건강한가 3부 반폭력.평화를 위하여라는 3부로 이어져있는데, 정작 저자는 3부의 결론부분을 이끌어 내기 위해 노르웨이의 이야기로 부터 책의 서두를 펼치기 시작한다. 

1부는 러시아에서 나고 자라 공산주의와 폭력,전쟁을 무심하게 지나쳐야 했던 저자의 성장과정과 이후 한국에서마저 봉건주의에 익숙해진 저자가 또 다른 세계 북유럽인 노르웨이에서 겪었던 혼란을 통해 그들에게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을 제시한다. 이 부분은 이 사람 너무 노르웨이 예찬만 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의 자유로움과 인권존중과 평등한 사회, 진보와 보수의 공존등을 예찬하고 있다. 

그러나 박노자교수가 그렇게 노르웨이에 뻑이 갔다고 칭찬만 줄줄이 써나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곧이어 이어지는 2부 "과연 그들은 건강한가"에서 증명되었다. 그 어느 나라, 어떤 조직도 모순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 보편적인 진실이라면 노르웨이라는 나라도, 북유럽이라는 선진복지국가역시 그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조국의 과거를 "약탈을 일삼던 바이킹"이라고 자아비판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일반적인 생각을 가진 노르웨이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사냥애호가들이 늘어가고 있으며 일말의 인종차별도 공존하고 있다는 점을 꼬집었다. 그에 지나지 않고 백인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백인아닌 유색인종에 대한 노동력 착취 전 세계의 담합등을 고발했다. 

발전하여 3부 "반폭력 평화에 대하여"는 한 국가나 대륙만의 문제가 아닌 전세계적으로 묵인되고 있는 폭력과 전쟁에 대한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음모들을 거론한다. 
러시아와 유럽에서 이어지는 스카우트에서 부터, 자연을 파괴하는 사냥과 동물원의 건립, 학원폭력, 미국의 911사태로 말미암아지는 복수들, 이슬람사회에 대한 세계의 태도와 또한 그들의 태도, 군대를 해체하자는 극단적으로 느껴지는 주장에서 오태양군(양심적 군복무거부로 현재 사회봉사활동중에 있는 청년)과 주고받은 서신을 실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한국군대에 대한 편견을 다시 고찰하게 한다. 그리고 좌파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단상이라는 補論에서 반전운동으로 인한 민족 생존의 보장, 사회적 정의구현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늘 그렇듯이 인문사회과학분야의 칼럼집을 읽으면 그동안 내가 얼마나 편협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았는가를 생각하게 되는데, 태생이 한국이 아닌 한국인 박노자교수의 시선은 당연히 신선한 주장을 할 수밖에 없다. 그는 러시아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고 노르웨이인도 아닌 세계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한국학을 연구하는 학자이지만 한국이라는 한 국가를 초월해 얼마나 전세계, 전지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를 느끼게 했다. 

그가 주장하는 반폭력에 대한 주장들, 특히 군대징집에 대한 사고는 나는 단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생각들이었다는 것인데, 나는 군대를 가지 않는 남자는 남자가 아니라는 (나는 군대도 안 갔으면서)남성차별주의적이고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반성하게 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모든 사람이 가는 것을 왜 너만 회피하느냐 하는 논리였다. 그렇다고 누구 아들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신체조건으로 군대를 회피하자는 것이 아니라 양심과 종교의 이유로 살생을 하지 않겠다는 이념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체복무를 왜 거부당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박노자교수가 예전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제시했듯이, 대한민국남자라면 대다수 특별한 사유(-양심이 아니라 외적인 이유로)가 없다면 모두 군대를 가야하는데, 그럼 이 사람들이 군대를 갔다와서 얼마나 변하게 되는가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꽃다운 청춘에 군대에 끌려가 가장 창조적이고 의욕넘치는 시절을 규율과 폭력적인 권위아래서 모두 떨쳐버리고 사회에 순응하는 얌전한 동물이 되어, 옳은 소리 못하고 개기지 못하는 나약한 자가 되어 세상에 끌려나온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과 전쟁주의에 노출이 되어 정확한 사고를 할 능력을 잃어버리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폭력과 권위를 배워 세상으로 던져진다. 그렇게 남자들이 망가져지는 것이 군대라는 조직이다. (그렇다고 그래 우리 그렇게 힘들지, 너희 여자들은 가지 않는 군대를 우리는 간다..라는 영웅심이 조금이라도 용솟음친다면 반성하시길!...)

특정한 사유로 군대를 가지 않았던 사람은 (또는 가지 못했던)컴플렉스에 시달려 술자리에서도 그럴싸한 무용담을 펼칠 수 없게 되고, 군대를 갔다와야 진짜 남자가 된다는 오판에 평생의 좌우명을 걸고, 스스로 해병대로 기어가는 남자들은 그 얼마나 불쌍한가. 인간이 아닌 군대의 부속으로 2년 넘는 세월을 썩어지내다가 결국 그 폭력과 권위주의를 잔뜩 가슴에 품고 평생 그 恨을 풀어대며 상사가 되면 부하직원에게, 세상에서 약자에게, 가정에선 자녀와 아내에게 말도 안되는 허울뿐인 권위를 내세우며 살게 되지 않는가. 

우리가 몰랐던 진실은 그런 것이었다. 이슬람이라고 다 같은 이슬람인가, 유럽이라고 발전한 문명을 가지고 있는가. 

진실을 파헤치는 박교수의 모든 주장은, 물론 그만의 생각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 눈을 뜨게 해주고 나 역시 폭력과 권위주의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지, 그로 인해 그 기득권을 쥐는 방법을 벌써 교육받고 주지당한 나 역시 그에 대해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에 대해 반성하게 했다. 

책을 읽고 나서. 대부분 책 뒤에 짧은 감상문을 적는데, 이번에도 여타 인문사회과학칼럼집과 비슷한 감상을 적었다. 

"행동하고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이란 얼마나 고단한 것인가.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향해 투쟁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는 데는, 자기 통제와 집념과 용기, 그리고 신념이 필요하다. 
타협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그것이야말로 성인군자이며 그것이야 말로 가치있는 희생이 아닌가.
유교사회에서 늘 그리워했더 君子의 道가 과연 내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일까.. 

아직 모든 것이 너무나 부족한 .. 아무것도 아닌 自我만 발견했다. "

200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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