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친일파 후손, 서울대 총장 임명 옳은가?

친일파 후손, 서울대 총장 임명 옳은가?
[오마이뉴스 2006-06-15 16:56]
[오마이뉴스 정지환 기자]
 
▲ 이장무 서울대 총장 후보. 이 교수 홈페이지 캡처.
"이장무 서울대 총장 후보가 일제시대에 식민사관을 수립하고 전파한 친일사학자 이병도의 손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최근 만났던 몇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받았던 질문 내용이다. 그들이 기자를 대면한 뒤 잊고 지냈던 것을 갑자기 생각해낸 것처럼 이런 질문을 던진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기자가 수년 전 <시민의신문> 지면을 통해 보도하며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던 기사, '비명(碑銘)을 찾아서-실증사학자 이병도와 특무대장 김창룡의 기묘한 인연'을 떠올렸던 것이다.

우선 이 기사가 나오게 된 전말부터 소개하면 이렇다.

이건무-이병도-이완용, 이들의 기묘한 인연

2003년 3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차관급으로 승격된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이병도의 손자 이건무씨를 임명했다.

바로 그 다음 날 이 신임 관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할아버지인 이병도의 친일행적 논란과 관련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는데, "할아버지의 실증사학 얘기는 역사를 올바르게 보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발언이 핵심 내용이었다.

물론 손자가 할아버지를 옹호할 권리는 있다. 그러나 변호에도 어느 정도의 논리와 상식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아무리 할아버지를 옹호하려 한다고 해도 이른바 '국립'중앙박물관장이라는 사람이 결과적으로 민족과 역사의 정체성까지 훼손하는 발언을 하는 것은 곤란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를 포함해 한국의 언론인 중에서 이 발언에 주목하거나 문제 제기를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정말이지 부끄럽게도 열흘 정도가 흐른 뒤 우연히 사석에서 몇몇 역사학자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솔직히 기자마저 그런 인사(人事)와 발언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관동군 헌병으로 항일 독립군을 '사냥'했던 죄업 때문에 해방이 되자 한때 지하로 숨기도 했지만 정부수립 직후 도리어 이승만 대통령이 총애하는 심복으로 변신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특무대장 김창룡, 그가 옛 부하들에게 암살된 뒤 이 대통령의 지시로 세워진 묘비에 객관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용비어천가를 방불케 하는 낯부끄러운 엉터리 비문을 지어바쳤던 역사학자 이병도.

3년 전 기자가 그들의 기묘한 인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역사기행'을 떠난 데는 이런 전사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맨땅에 헤딩하기 식의 역사기행 끝에 도달한 행선지에서 야생동물의 배설물과 흙덩이와 뒤엉킨 채 쓰러져 있는 김창룡의 조각난 묘비를 찾아냈다.

역사기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실증사학'이라는 그럴듯한 가면으로 위장한 이병도가 사실은 친일 매국노의 상징인 이완용과 같은 가문(우봉 이씨)이었으며, '가문의 수치'를 은폐하기 위해 원광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던 이완용의 관 뚜껑이라는 역사적 유물을 가져다가 일방적으로 태워버렸다는 엽기적(?) 사실과도 조우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병도가 이완용을 자신의 조상으로 명백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즉 '이완용 콤플렉스'에 심각하게 시달리고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그런 이병도를 두고 이병도의 손자인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할아버지의 실증사학 얘기는 역사를 올바르게 보자는 것"이라고 강변한 것이다.

그것은 '죽어서도 편치 못한' 친일파와 그 후손의 비극적 말로와 왜곡된 세계관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초상이기도 하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혹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역사의 진실은 밝혀졌지만 이미 이병도의 손자는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임명된 상황이었다.

이번엔 또 다른 손자가 서울대 총장 눈앞

 
▲ 서울대 정문 앞 전경. ⓒ2006 안현주
ⓒ2006 안현주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그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친형이 '국립'서울대학교 총장 후보로 선출되어 대통령의 낙점만 남겨두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저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몇몇 사람들이 바로 기자에게 제보를 한 사람들임은 물론이다.

독일월드컵 열풍으로 그 의미가 퇴색되기는 했지만 6월은 보훈의 달이다. 얼마 전에는 노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이의 충성을 기념하는 날'인 현충일 행사가 성대하게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목숨을 바쳐 지킨 이 나라'의 현실은 어떤가? 일제가 한국사를 왜곡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중추원 산하에 급조한 조선사편수회에서 부역하며 식민사관 총서인 <조선사> 간행에 관여했고, 그 씻지 못할 죄업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단행본에서도 청산돼야 할 친일파로 규정된 사람의 자손들이 당당하게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임명된 데 이어 '국립'서울대학교 총장까지 석권할 판국이다.

아시다시피 민족사학의 거두 박은식이 중국에서 지은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국내에 유입되자 당황한 조선총독부가 조선사 왜곡을 위해 급조한 것이 '조선사편수회'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조문기)가 2005년 8월 29일(경술국치일)에 사전 공개한 3090명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상 1차 명단 자료에 따르면, 이병도는 이 식민지 관제 기관의 주구로 무려 13년(1925년∼1938년) 동안 일한 전력이 있다.

따라서 아무리 손자가 할아버지를 옹호할 수 있다고 해도, '조선사편수회'를 무슨 '조선어학회'라도 되는 것처럼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일대 모독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병도(실증사학파의 대부)가 지식인이자 역사가로서의 지조를 내팽개치고 외세의 간교한 권력과 타협하며 알량한 일신의 안위와 가족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역사가인 백남운(사회경제사학파의 대부)은 옥고를 치렀고, 신채호(민족사학파의 대부)는 망명을 택했기에 더욱 그렇다.

문제제기 없는 언론들... 왜?

참으로 암담한 것은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변함없이' 어떤 언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고 할 것이다. 도리어 "민감한 인사 문제 개입이나 현대판 연좌제 적용은 위험" 운운하면서 비판적 문제 제기의 책임을 방기하거나 나아가 그러한 시도를 방해하고 있다.

평소 '코드인사 절대불가'를 외치며 온갖 민감한 인사 문제에 개입해 왔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체성을 생명보다 귀중하게 강조하던 보수언론도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이병도 문제는 단순히 한 개별의 자연인 문제가 아니다. 이는 한 젊은 역사학자가 기자에게 전해준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단재 신채호를 보면 두계 이병도가 보인다. 단재는 박은식과 함께 한국 근대 역사학와 민족사학의 비조로 불린다. 그러나 그가 제대로 된 학술적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부끄럽고 놀랍게도 1970년대에 들어와서였다. 그것도 신용하(사회학), 김영호(경제학) 교수 등 역사학자가 아닌 다른 학문 분야의 사람들에 의해서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왜 그런지 아는가? 이병도가 해방 이후 서울대 사학과(한국사 분야)를 접수한 뒤 주류 역사학계는 이병도 후학들에 의해 장악됐다. 그렇게 '이병도 사관(史觀)'이 득세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신채호 같은 인물은 철저히 잊혀진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과 한국언론의 정면비판이 진정 국내정치용 제스처와 포퓰리즘에 입각한 눈 가리고 아웅식 접근방식이 아니었다면 우리 내부의 친일 문제부터 제대로 인식하고 대처할 일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가 시민의신문에 보도했던 기사를 정리해 올린 것입니다. 인터넷시민의신문(ngotimes.net)에는 이밖에도 몇편의 글이 더 실려 있습니다.


기자소개 : 정지환 기자는 현재 <시민의신문> 취재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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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문화대혁명의 교훈

알다시피 올해는 중국의 문화혁명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얼마전 '한겨레21'에서는 이에 대한 심층특집을 다룬 바 있다. 그걸 잘 정리해놓으려고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어졌었는데, 마침 오늘자 문화일보(06. 06. 13)에 문화혁명과 관련한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의 기고문이 실렸길래 옮겨온다. 읽고 정리하기에 부담이 없는 분량이기도 하고('로쟈의 생각'으로 정리하는 건 미래의 일이고 당장은 '인용'으로 때우도록 한다).

 

 

 

 

-올해로 40돌을 맞이한 문화대혁명, 그것은 중국인들에게 결코 되새기고 싶은 기억이 아니다. 40돌을 맞으면서도 그것이 중국인들의 입이나 언론에 별로 오르내리지 않는 원인도 여기에 있을 것 이다. 그렇지만 그 처절한 교훈은 모든 중국인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화대혁명의 발발 원인이 마오쩌둥(毛澤東)의 과오에 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렇지만 왜 대륙전체가 삽시간에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고 온나라가 집단적 열광으로 내란, 내전에 몰입됐는지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이 별로 없다. 어찌 보면 오늘의 50세이상 대부분이 바로 그 열광 속에 있었기에 그 답을 꺼리는 것 같이도 보인다. 거의 모두가 참여자였기에 그 교훈은 어느 한 개인이 아닌 모든 개개인에 돌려진다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기이한 일이다! 한편으로, 공산주의는 계속적인 '혁명'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 아닌가? 스탈린은 마오쩌둥보다 30년 앞서서 '대숙청'을 통해 이를 입증해 보였다. 사진은 1949년 모스크바에서의 마오와 스탈린.



-농민혁명과 대중혁명의 기치를 들고 간난신고 끝에 정권을 창출 한 마오는 바로 그 정권을 똑같은 방법, 즉 군중운동의 방식으로 유지하려 했다. 대중의 힘을 하늘처럼 믿었던 마오는 모든 권위에 대한 도전, 낡은 것을 짓부수는 반란정신, 심지어 실패하면 능지처참이 되더라도 과감히 황제를 말에서 끌어내리는 정신을 고취하면서 문화대혁명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어찌 보면 평생의 이상을 문화대혁명으로 마무리하려 한 것 같기도 했다.

 

 

 



-바로 그 정신을 받든 홍위병들이 반란의 기치를 내걸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놓으려 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을 타도한다는 격이었다. 마오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집권자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그들이 장악했던 당조직과 정부는 사실상 그 기능을 잃어버렸다. ‘모든 권력은 반란파에게’라는 슬로건이 내걸렸다. ‘정권탈취’라는 구호가 신문을 뒤덮었고 각 성과 지방마다 이른바 ‘혁명위원회’라는 이름의 ‘홍색정권’이 창출됐다. 홍위병운동은 반란파, 보수파, 중간파라는 파벌로 나뉘어 전국을 내전으로 내몰았다. 그때 쌓인 불신의 앙금이 오늘까지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 정도다.



-무엇이 이러한 통제불가능의 사태를 불러왔을까. 어찌 보면 대명, 대방, 대자보라는 형식의 중국식 ‘민주’도 크게 한몫한 것 같기도 하다(*오늘날의 인터넷은 그 유사-대자보가 아닐까?). 누구나 대명, 대방, 대자보를 이용하여 마오를 제외한 어떠한 권위에도 도전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선과 악이 갈리는 무대였다. 낙후한 생산력은 결국 이 초현실주의 이상을 소화 해내지 못하고 충돌과 파국을 초래한 것이다.

-중국이 문화대혁명에서 얻은 교훈은 실로 많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 개혁·개방 초기부터 줄곧 안정국면을 강조하고 대명, 대방, 대자보를 법적으로 금지한 것도 바로 그 교훈을 되새긴 일례라고 하겠다. 부정부패와 빈부격차, 실업인구의 증가, 산발적인 소란 같은 현실문제를 심각하게 안고 있는 오늘, 중국은 경제발전에 걸맞은 정치체제 개혁과 시민사회·민주사회 건설을 지향하면서도 문화대혁명의 교훈을 되새겨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어찌 보면 딜레마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새로운 문화대혁명’으로 부정부패와 빈부격차를 일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문화대혁명이 관려주의와 부패일소에 공을 세웠다는 논리도 펴고 있다. 그렇지만 중국에 다시 문화대혁명의 일막이라도 재현한다면 그것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불행이기도 할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초현실주의 생산관계와 낙후한 생산력 간에 빚어진 갈등이었다면 작금의 중국은 발전하는 생산력에 순응해 점진적인 체제개혁으로 문제점을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민주사회는 혼란이 아닌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험을 해야 할 것이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에서 철저히 부정되고 있는 역사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것은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하겠다. 역설적으로 문화대혁명이 없었다면 과거에 대한 부정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고, 오늘의 개혁·개방도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교훈이 중국인에게 난관을 헤쳐나갈 지혜를 안겨준 측면도 분명히 있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문화대혁명을 잘 모르면 오늘의 중국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진징이 베이징대 교수)

06. 06. 13.

P.S. 참고로 지난 봄 '한겨레'에 연재됐었던 이상수 베이징 특파원의 '천안문의 마르크스' 중에서 '(4)사상의 좌우 난독증'(06. 04. 26)을 옮겨온다. 최근 중국의 사상/이념 지형에 대해서 안내해주는 기사이다.

-최근 중국에서 이른바 ‘좌파’들의 목소리가 유난히 자주 터져 나오고 있다. 홍콩 <명보>는 지난해 중반 이후 중국 내에서 ‘개혁의 성씨가 자씨(자본주의)인지, 사씨(사회주의)인지’를 묻는 논쟁이 자주 터지고 있다며, “이런 사상논쟁은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래 최고조”라고 보도했다.

-좌파와 자유파로부터 비판받는 당국=지난해 8월 궁센톈 베이징대학 교수(법학)는 우방궈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장과 상임위원들 앞으로 공개편지를 보내, 당시 상임위가 심의중이던 물권법 초안이 ‘사회주의 공유제를 주체로 한다’고 규정한 헌법에 어긋난다며 이 법 추진 중단을 요청했다. 물권법의 성씨가 ‘자씨’ 아니냐는 얘기다. 지난 3월 전인대 4차 전체회의에서 통과될 예정이던 물권법은 궁 교수 등 ‘좌파’들의 저항으로 유보됐다.

-물권법이 ‘좌파’의 저격을 받자 개혁 성향의 이론가 황푸핑은 월간 <재경>에 발표한 글을 통해 “개혁개방 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를 ‘시장화’의 책임으로 돌려선 안 되고, 이는 개혁의 심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며, “새로운 좌경화를 경계한다”고 ‘좌파’에 반격을 가했다.

-중국 당국을 공격하는 건 ‘좌파’만이 아니다. 자유주의자들은 되레 당국의 개혁이 너무 더디다고 비판한다. 당국에 의해 한때 정간 당했던 <중국청년보> 주말 부록 <빙점>의 리다퉁 전 편집장이나 해직당한 자오궈뱌오 전 베이징대 교수, 그리고 허웨이팡 베이징대 교수(법학) 등은 인터넷과 해외 매체 기고 등을 통해 전면적인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보장과 다당제 개혁 등을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좌파’는 개혁개방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고 있고, ‘자유파’는 경제는 물론 정치까지 포함한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는 형국이다.

-극좌와 극우의 상호침투=프랑스 대혁명 이래 ‘좌파’는 적극적인 개혁의 주창자들에게, ‘우파’는 보수적인 이들에게 따라붙는 별명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은 누가 진정한 ‘좌파’이고 누가 ‘우파’인지 알 수 없는, 심각한 난독증을 앓고 있다.

 

 

 

 

-친후이 칭화대 인문사회과학학원 교수(역사학)는 오늘날 중국에서 좌·우 개념이 혼란스러워진 원인으로, 문혁 때의 극좌적 오류와 더불어 90년대부터 진행된 ‘국유자산 사유화’ 과정을 꼽는다. “과거에 이른바 ‘공유제’를 실시하고 있을 때도 국유기업의 자산 처분권은 명목상으로만 전 직원의 소유일 뿐, 사실은 당서기와 공장장의 손에 집중돼 있었다. 국유기업이 이른바 ‘시장화’ 개혁을 거치면서 공장 ‘영도 간부’들은 공장을 분양해 한몫씩 챙겨 나갔지만 노동자들은 퇴직금과 의료보험은 물론 그동안 삶의 터전이던 일터까지 상실했다.”

-친 교수는 이 과정에서 공유제 아래 극좌파이던 ‘영도 간부’들이 순식간에 ‘극우파’로 변했다고 지적한다(*이건 한국의 경우에도 예의가 아니다). “자유파와 극우파는 거리가 매우 멀다. 그러나 극우파와 극좌파는 매우 가깝다. ‘전인민적 소유’란 명목으로 ‘영도 간부’가 독점 소유하는 것이나, 극단적인 시장화로 노동인민을 내몰고 이들이 이권을 다시 독차지하는 것은 사실상 같기 때문이다.”

-실사구시로 개혁개방의 길 찾기=중국 당국이 좌파와 자유주의파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고 있는 건 오늘날 중국의 복합적인 과제를 말해준다. 자유주의파의 공격에선 개혁개방의 확대와 지속적 추진이 부각된다. 좌파의 공격에선 개혁개방을 신자유주의적 시장논리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한 젊은 사회과학자는 “오늘날 중국에서 단순히 좌파 또는 우파의 시각만 고집할 수 없으므로 자신을 ‘실사구시파’로 불러달라는 이들도 늘고 있다”고 소개한다.

-친후이 교수는 중국이 올바른 개혁개방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개혁개방의 ‘사회적 공정성’ 문제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전국의 국유자산 가운데 절반쯤이 ‘시장화’된 상태다. 이 시장화 과정에서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공평한 분배의 문제는 토론조차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이런 불건전한 시장화가 중국 경제에 안정적이고 공평한 시장 환경과 질서를 형성할 것이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지난 3월 전인대에서 후진타오 주석이 확고하게 말했듯 “개혁개방의 추진”은 흔들릴 수 없는 중국 당국의 정책 방향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미 심각하게 불거진 불공정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앞으로 중국 개혁개방의 미래상을 좌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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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 오타는 일단은 빼기로 한다.

1) 204쪽 - '13세기 이탈리아가 풍지박살난 것도 ---> '풍비박산'이 맞다.  아쉽다. 펀집자들의 소양이 부족한 지 아니면 세심함이 부족한 지

풍비-박산   [―싼][風飛雹散] <명사> 사방으로 날아 흩어짐. <준말> 풍산(風散). 풍비박산-하다 <자동사><여불규칙활용>  - 야후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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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 일본 정신의 기원 / 가라타니 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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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월드컵 개막에 대한 문화연대 논평 전문

 

월드컵 개막에 대한 문화연대 논평 전문
자본과 미디어의 축제를 거부하자!
4년전 우리에게 자부심을 주고 신명나는 축제를 선사했던 월드컵이 지금 ‘사회적 짜증’을 유발하고 있다. 언론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했고 자본은 온갖 낯 뜨거운 상술을 선보이며 우리를 현혹하려 들고 있다. 이들이 합세해 이 사회를 월드컵으로 덮어버리는 상황에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

4년전 시민축제의 진앙지였던 서울시청 앞 광장을 보라. 그 때의 자발적 참여는 간 곳 없고 자본의 기획 하에 가수가 동원되고 시민은 응원객으로 전락했다. 검은 양복의 용역 인력이 시민의 앉을 곳을 일일이 지정하고 화장실 출입마저 통제하는 서울광장의 모습은 소통과 통합의 해방구가 아닌 지시와 통제의 공간, 자본의 점령구로 바뀌었다. 4년 전 열린 공간, 축제의 공간이었다던 이곳은 닫힌 공간, 쇼프로의 공간이 되었고 ‘입장객’이 되어버린 시민은 펜스 안에서 ‘각’ 잡고 앉아 정해진 식순에 따라 박수치고 환호하며 월드컵을 ‘방청’하게 된 것이다.

자본은 가증스럽게도 ‘대한민국’과 ‘국민’을 들먹이며 태극기를 치켜들고는 우리에게 ‘애국’을, 그리고 응원을 강요한다. 이것을 시민의 응원이라 하겠는가! 우리들의 애국이라 하겠는가! 아니다. 바로 자본의 응원이고 자본의 애국이다. 특히 4년마다 찾아오는 ‘주기적’ 애국은 경계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이윤창출을 위한 ‘소비자’가 되길 원하면서도 ‘국민’과 ‘민족’을 외쳐대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염치없어 보인다.

자본과 함께 우리는 본분을 저버리고 돈벌이에 매진하는 언론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4년 전 3개 방송사 4개 채널은 시청률과 광고에 눈이 어두워 한국팀의 경기를 동시에 중계하는 만행을 저지른 바 있다. 올해 이들은 삼일절은 ‘축구절’로, 현충일은 ‘축구일’로 만들어 버리면서 사회의 온갖 주요 현안들에 대한 보도를 외면하고 있다. 열드컵 광기의 주역은 바로 이들이다.

이들 방송사는 지난번 WBC대회, 하인즈 워드, 미셸 위 관련 보도에 앞장서서 ‘오버’하는 솔선수범을 보이며 스포츠방송사의 길을 걷고 있다. 한국팀이 WBC 4강에 진출한 날 이들 방송사의 저녁뉴스가 보여준 행태는 차라리 절망적이다. 이번 독일월드컵을 앞두고도 스포츠부 기자들을 모두 독일로 보내고 타 부서 기자들을 동원해 국내 월드컵 보도를 담당케 하며 월드컵에 ‘올인’하고 있다. 이들은 사회 각 분야의 다양한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그들의 책무를 사실상 포기한 것이다. 아울러 이는 다른 스포츠를 무시하는, 그래서 스포츠의 양극화를 초래하는 매우 무책임한 처사이다. 신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신문 역시 한미FTA협상의 시작 등 주요 사회현안보다는 축구에 압도적으로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최근 이들이 이러한 비판에 대응하는 방식은 참으로 저열하다. 언론이 사회의 주요 현안들을 오히려 덮어버리고 있다는 비난이 불거지자 이들은 재빨리 면피용 ‘장치’를 마련한다. 신문은 1면부터 축구기사를 싣고는 저 끝 사설 어디쯤에서 ‘너무 지나치다’며 훈계조의 한 마디를 배치한다. 방송사는 매일 저녁뉴스를 월드컵으로 도배해 버리고 끝날 때쯤 ‘너무 심하다’는 코너 하나를 끼워 넣는다. 마치 “우린 비판도 했다. 봤지?”하는 식이다. 아침부터 ‘죄’를 짓고는 자기 전 ‘죄 사함’를 구하는 간교함을 보이고 있다. 참으로 치졸한 자기합리화이면서도 간편한 면죄부다.

미디어란 전달을 위한 수단이다. 언론은 사회 구석구석의 소식을 전해야 한다. 월드컵 수익사업에만 몰두하면서 이 넓은 세상을 외면하고 있는 언론은 창피한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응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과거 지금과 같은 거대한 스펙터클의 응원이 없었어도 정열적이면서도 간절하게 우리 선수들의 승리를 기원했다. 전파상 진열대의 작은 텔레비전을 보며 환호하며 손뼉을 쳐댔고 호프집과 다방에서 펄쩍펄쩍 뛰며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집에서 혼자 TV를 보면서도 우리는 함성을 질러댔고 그 함성소리로 온 동네가 하나가 되었다. 그때의 ‘응원빨’은 지금의 그것보다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는 지금 별의별 이유 때문에 응원할 곳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찾아 헤매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응원에 왜 이리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삿대질이 난무하는지 말이다.

응원은 함께 하는 것이다. 같이 즐기는 것이다. 그것은 이기고 지는 것을 초월한다. 승리하면 기분이 조금 더 좋을 뿐이다. 그리고 애국도 맹목적이고 배타적인 애국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얼마 전 가나와의 평가전에서 논란이 되었던 꽹과리 응원도 그런 맥락에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대한민국은 세계를 상대로 상대방을 무찌르러 나간 것이 아니다. 축제에 동참하고 우리의 기량을 뽐내러 나간 것이다. 나만 잘되고 나만 부각되고자 하는 욕심이 지나치면 실수하기 마련이다.

지금의 월드컵은 더 이상 열린 시민축제도, 우리가 하나 되는 공간도 아니다. 호객꾼들만 넘쳐나는 ‘대목시장’으로 변해 버렸다. 순박한 사람들의 열정을 이용해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기업과 언론은 깊이 반성하고 자숙해야 한다. 그들에게 그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길 간절히 기원한다. 그들에게 그 정도의 용기가 있길 바란다. ‘대~한민국’이 ‘대한민국’보다 결코 더 중요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에는 ‘대~한민국’보다 중요한 일들이 많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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