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만 해도 몇 번이나 자카르타 공항을 이용했는데도 발견하지 못한 일이다. 우연히 보니 수하물 수취(우리말로는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네요)라는 말이 일본어가 잘못되었다. 나야 뭐 일본어를 모르지만 그래도 앞의 한자어는 분명히 잘못되었다. 영어 Claim을 그대로 損害라고 옮겨두었으니까 (사진을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자카르타 공항을 지나 다녔을텐데... 아무도 관심이 없는 건지. 알아도 모른 척 하는 건지..  아무튼 이번 기회로 여러 공항의 Baggage Claim의 알림판을 눈여겨 보아야겠다.    

일본어 아시는 분이 이글을 읽으시면 좀 고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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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다니면서 KTX에서 일독을 하다. 한홍구의 책을 더 주문하다. 

 

 

 

 

아무튼 이래 저래 한동안은 플레티늄 회원을 유지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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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은 전에 없이 직장일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책도 부지런히 약간은 병적으로 사모았더니만 알라딘에서 2번째로 플레티늄 회원이 되었다. 아무튼 사다 보니 보기도 한다.  바람이 있다면 리뷰를 한 번 써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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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제가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이 엉망이더라도 그냥 재미로 보심이.

 

   봉건사회의 성씨姓氏의 전제성이 표현되는 한 가지는 바로 성명姓名에 대한 “피휘避讳”이다.  

   피휘避讳는 상고 시대의 “감히 호칭하지 않음으로써 존경을 나타내는” 습관에서 변화 발전하여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평범한 민간에서 전하는 습속이었는데 종종 존자나 장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에서 시작되었으며 저절로 직접적으로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을 피하게 된 것이다.  나중에는 통치자가 자기의 권세와 지위를 이용하여 강제로 신하들에게 모든 장소에서 자기와 조상들의 명자名字에 대해 존경을 표시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감히 어기는 자에게는 무겁게 징벌함으로써 통치자의 권위를 나타내었고 점차로 제도로 형성되고 황가皇家의 권위의 상징으로 받들게 되었으며 점점 지나침이 생기게 되었고 예측하지 못한 화祸를 입을 수도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에서 관찰해 보면, 늦어도 춘추시대에는 사회적으로 이미 “경외피명敬畏避名”의 제도 규정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제소호帝少昊(?)는 사공司空의 관직을 만들었는데, 천하의 수리 토목 공사를 전적으로 관리하였다.  그의 후예들은 대대로 계승하여 오랜 세월이 지나 “사공司空”이라는 성姓이 생겨났다.  하지만 춘추시대에 이르러, 송무공宋武公의 명名이 “사공司空”이어서 이 성姓을 “사성司城”으로 바꾸어 무공武公의 명자名字를 언급하는 것을 피했다.  진秦나라 말기에 항우项羽는 대군을 거느리고 진조秦朝를 멸망시키고 스스로를 “서초패왕西楚霸王”이라 칭하였는데 한동안 아주 광대한 통치 지역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명名은 적籍이었다.  따라서 그의 통치 지역 안에서는 “적籍”성姓의 민중들은 강제로 “석席”으로 성姓을 바꾸어 그의 위세를 범하는 것을 피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피휘避讳제도가 엄격하게 실시된 때는 한조汉朝가 시작되고 난 후이다.  서한 초기의 몇 대의 황제 중에는 명휘名讳를 피하려고 자연自然의 명칭을 바꾼 사례가 있었다. 한문제汉文帝의 명名은 항恒이어서 항산恒山을 상산常山으로 바꾸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로 성姓과 명名을 바꾸게 하였다고 기록될 지는 미처 몰랐다(?).  서한 중기 이후에는 피휘避讳제도가 점차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강력해졌다.  동한东汉 여요인馀姚人 엄광严光 (명名은 준遵이고 자字는 자릉子陵이다)은 汉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어린 시절의 친구로, 그의 본래의 성姓은 장庄이었는데 유수劉秀의 아들인 유장劉庄(명제明帝)의 휘讳를 피해 성姓을 엄严으로 바꾸었다.  현재에 이르러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엄자릉严子陵이라고 칭하지, 이 이름이 사방에 알려진 대 명사名士가 생전에는 장자릉庄子陵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당시 사회에서는 또한 한동안 이미 죽은 수백 년 전의 장자庄子도 “엄자严子”라고 고쳐 불렀다.  한조汉朝가 패망하고 나서 위진魏晋시대에 와서야 사회적으로 “엄严”성姓이 비로소 “장庄”성姓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의 가족들은 “엄严”성姓을 사용한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다시 “장庄”성姓으로 고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오늘날 우리들이 보게 되는 “엄严”과 “장庄”의 성姓이 만들어 진 것이다. 

   은상殷商 시대에는 맹인 악관乐官을 사师라고 불러 나중에 사성师姓을 형성하여 많은 음악세가音乐世家가 되었다. 상대商代에는 사연师延이 있었고, 춘추春秋 시대의 晋에는 사광师旷이, 노魯에는 사을师乙이, 위卫에는 사연师涓이, 정郑에는 사리师悝, 사융师融, 사패师茷, 사혜师慧 등이 있었다.  서진西晋 시기에 이르러, 진무제晋武帝 사마염司马炎은 그의 백부인 사마사司马师를 존경하여 진경제晋景帝로 삼고, 천하에 명령을 내려 사师를 성姓으로 쓰지 못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전국 각지의 사성师姓은 강제로 수성帅姓으로 바꾸었으며, 진晋이 망한 후에야 비로소 일부의 가족들이 다시 사성师姓으로 바꾸어서 이때부터 사회에서는 “사师”와 “수帅” 양성이 생겨나게 되었다.  

   서한西汉 시기의 피휘避讳는 또한 “불피혐명不避嫌名”이었는데, 즉 동음同音은 피휘避讳하지 않았다.  동한东汉 이후에는 점차로 비슷한 자음字音조차도 피휘避讳하여 사용할 수 없었다.  나아가 피휘避讳가 사람들이 읽는 서적书籍에까지 연장되어 죽은 사람도 성姓과 명名을 바꾸어 피휘避讳의 요구에 맞추어야 했다.  한선제汉宣帝의 명名은 순询인데 순询과 순荀은 서로 비슷하다.  따라서 “순询”성姓은 “손孙”성姓으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재앙이 선현先贤에게도 미쳐 전국战国 시대의 저명한 사상가인 순자荀子는 한인汉人들의 붓 아래 “손경孙卿”으로 변해 버렸다.  동진东晋의 사람들은 진문제晋文帝 사마소司马昭의 휘讳를 피하여, 변방으로 보내 화친한 왕소군王昭君을 왕명군王明君으로 고쳐 불렀다.  북송北宋  대의 왕안석王安石의 시 중에는 이러한 관습을 답습하여 왕소군王昭君을 “명비明妃”라고 부르고 있다.  당대唐代 사람들은 고조高祖 이연李渊의 휘讳를 피하여 분별 없이 도연명陶渊明을 도천명陶泉明으로 바꾸어 버렸다.  당현종唐玄宗 융기隆基는 “기基”와 “희姬”가 독음读音이 같다는 이유로 전국의 “희姬”성姓을 “주周”성姓으로 바꾸라고 명령을 내려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문무주공文武周公의 성씨姓氏를 언급할 때 어쩔 수 없이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당헌종唐宪宗은 조부를 본받아 뒤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의 명名은 순纯이다.  진한秦汉 시대의 많은 유명한 “순우淳于”성姓은 “우于”성姓으로 바뀌었고 원래의 성姓은 이 때문에 소리도 없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무자비한 “피휘避讳” 제도는 봉건 사회의 통치자들의 전제 권위의 체현이었고, 봉건 통치자들은 이러한 방법을 이용하여 인민 대중들이 그들의 권위에 대하여 강제적으로 경외와 순종을 표시하게 함으로써 자기들의 높디높은 특수한 지위를 유지하고 보존하였다.  동시에, 이 제도는 봉건 사회의 예의 제도의 핵심이며, 그것은 역대 통치집단들에 의해 사용되어 봉건적인 계급관계와 존비 질서를 유지하고 보존하였고 사회적으로 널리 시행되었다.  기나 긴 봉건 사회에서 비단 황제만 피휘避讳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사대부 계층에서도 “피휘避讳”의 습속이 유행하였다.  당대唐代의 시인诗人 두보杜甫의 모친은 명名이 해당海棠었다. 두보杜甫는 일생동안 시诗를 쓰면서 해당海棠을 읊지는 않았다.  소식의 조부의 명名은 서序이다.  소식苏轼은 매번 다른 사람의 책에 서序를 쓸 때 의식적으로 “서序”자를 “인引”자로 바꾸었다.  이하李贺의 부친은 명名이 진숙晋肃인데 평생 진사进士 고시考试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여 벼슬할 기회를 잃어 버렸다.  오대五代 시기의 재상인 풍도冯道는 이도李导라고 불리는 유명한 사람이 보기를 구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도导”를 “도道”로 잘못 듣고는 바로 분개하며 그 사람을 쫓아버렸다.  이 때문에, 봉건사회에서는 친구를 방문하거나 사회적 교제 활동을 할 때는 교제 상대의 부친과 조부의 명휘名讳와 가족들이 피휘避讳하는 상황을 먼저 잘 살펴서 무의식중에 상대방의 기휘忌讳하는 바를 범하여 상대방을 불쾌하게 하거나 죄를 짓는 일을 면하여야 하였다.  『당오림唐浯林』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시인 두보는 사천四川에서 엄무严武의 막료로 초빙되었다.  엄무의 부친은 명名이 엄정지严挺之였는데 첫 번째 연회에서 술이 달아올라 귀까지 빨개져서 두보가 갑자기 입을 열어 “不谓严挺之乃有此儿”라고 말하였다.  엄무는 당장 얼굴색을 바꾸고는 “杜审言(두보의 조부) 孙子捋虎须耶”라고 말했다. 

    봉건 사회의 피휘避讳제도는 특히 마음대로 행동하는 황제의 “피휘避讳”가 있는데 성씨姓氏들의 정상적인 발전을 중단하거나 바꾸도록 강압하였으며 부분적인 성씨姓氏의 혼란을 조성하고 후대 사람들이 성씨姓氏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어려움을 더하였다.  동시에, 통치자들이 “피휘避讳”를 위해 무책임하게 옛 서적을 삭제하여 고치고, 마음대로 고인의 성명姓名을 바꾸었기 때문에, 당시의 문화생활에 막대한 혼란을 야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역사를 연구하고 고적을 읽는 일에 한 겹의 짙은 안개를 덮어 버렸다.  현재의 사람들에 대해 말하자면, 역사사의 “피휘避讳” 현상이 남아 있어 유일한 좋은 점은, 우리가 현재에 고서 중의 피휘하여 글자를 고친 경우를 분석하여 고서의 연대와 작가 등의 상황을 판단할 수 있고 고서의 판본을 확정지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는 바로 당초에 “피휘” 제도를 제정하였던 통치자들이 처음에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통치계급이 강제로 시행했던 “피휘”제도와 상반되면서도 서로 어울리는 것은 죄를 얻어 화를 당한 신하와 기타 통치계급의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 강제로 “화를 피하기 위해 성을 바꾼 것(避祸改姓)”이다. 

   화를 피해 강제로 성姓과 명名을 바꾸는 일은 상고시대부터 자두 봐서 신기하지도 않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요皋陶의 후예인 이정理征은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여서 주纣에게 죄를 얻어 죽을 지경에 놓이자, 그 아내는 아들인 이정利贞을 데리고 이후伊后의 허墟로 도망하였다.  도중에 살구나무 아래에서 쉬게 되었는데 살구를 따서 허기를 채워 살 수 있었다.  이리하여 성姓을 이李로 바꾸었다.  다른 한 명의 전설 속의 유명한 인물인 공공共工은 부락전部落战에서 패하여 망한 후에 자손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어지럽게 성姓을 바꾸어 해를 피했다.  진한秦汉 시대에 이르자 이미 홍洪, 공龚 등으로 성姓이 나누어져 버렸다.  상조商朝 말년에 주왕纣王이 아홉 제후를 죽이자, 그 후손들이 화를 피하여 여러 곳에서 살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성姓을 구仇로 바꾸어서 대대로 전해 내려왔다. 전국战国 시대 후기에 연국燕国 사람인 전광田光이 연태자燕太子 단책丹策을 도와 형가荆轲가 진왕秦王을 살해하는 사건을 계획하였다.  사건이 실패로 드러난 후 그의 후손들은 진秦 정권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성姓을 광光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사례는 역사에서 끊임없이 책에 나타나고 있으며 다만 선진시대에는 사람들의 성씨姓氏가 다변하고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어 새로운 성姓을 만들고 옛 성姓을 바꾸었다.  때와 장소에 따라 변하는 경우가 아주 많아 성씨姓氏의 변경은 그다지 커다란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선진 이후 가족의 성씨姓氏가 안정되어 가고, 다시는 수대가 지나도록 바꾸지 않게 되어 성姓을 바꾸는 것은 사당을 버리고 근본을 잃는 큰 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봉건 사회는 잔학한 전제 통치가 실행되고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9족이 연좌되어 한 대에서 해를 입으면 몇 대동안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잔학한 현상으로 인하여 정치적인 재난에 부닥친 가족의 후예들이 할 수 없이 명名과 성姓을 바꾸어서 겨우 목숨을 보전하게 하였다.  어떤 경우는 한 사람이 바꾸고, 어떤 경우는 일가족이 바꾸고, 어떤 경우에는 같은 성姓응 가진 전체 동족이 성姓을 바꾸었다.  서한 초기에 한신韩信은 여후呂后에게 살해당하였는데, 전설에 따르면 소하萧何는 비밀리에 괴철蒯彻에게 분부하여 한신의 아들을 남오南奥로 보내어 성姓을 위韦(한韩자의 반을 취하였다)로 바꾸게 하였다.  지금 광서广西 위성韦姓의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을 한신의 후예로 칭한다. 또한 서한의 역사학자인 사마천司马迁의 후예는 『사기史记』가 초래한 화 때문에 박해를 받아 전족이 의견을 모아 2글자인 사마司马를 쪼개어 획을 첨가하여 글자를 바꾸기로 하였다.  일부는 성姓을 “동同”으로 바꾸었고, 일부는 성姓을 “풍冯”로 바꾸었다.  이야기에 따르면,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한성韩城의 사마천의 원적지에는 “동同”, “풍冯” 양성兩姓이 무리를 지어 사는 촌락이 있다.  한원제汉元帝 때에 음악가인 경방京房이 죄를 지어 잡혀서 감옥에서 죽었다.  그의 후손들은 도망가서 박해를 피하기 위해 숨어서 성姓을 경经으로 바꾸었다.  선제宣帝 때에 평통후平通侯 양운杨惲은 죄를 지어 허리가 잘리었는데 그의 자손들은 산림에 숨어살며 부친의 명名인 운惲를 성姓으로 삼았다.  동한 말기 영제靈帝 때에 안정태수安定太守 기광杞匡은 일처리 때문에 동탁董卓에게 죄를 지어 박해를 받을 위험에 놓이자 관직을 버리고 도망가서 성명姓名을 포광抱匡으로 바꾸었는데 이후 대대로 답습하여 포성抱姓이 생겨났다.

   이와 같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성姓을 바꾸는 현상은 오랜 봉건 사회에서 끊임없이 생겨나서 지금까지 단절되지 않고 천년을 이어왔다. 명청明清 양대에 이르게 되어도, 봉건사회의 전제적인 박해가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더욱 참혹하였다.  사회에서는 법망의 비밀로써, 문인이나 유자孺子가 화를 당하여 해를 받아 어쩔 수 없이 명名과 성姓을 바꾼 사람의 수가 많아 이전 여러 조대朝代를 초과하였다. 명초明初의 유명한 문학가인 방효유方孝孺는 “정난의변靖难之变1)” 후에

연왕燕王 주체朱棣를 위하여 황제를 칭하는 조서를 기초하기를 거절하여 저자 거리에서 사지를 찢겨 죽었고 십족이 죽임을 당하여 죽은 자가 8700여 명에 이르렀다.  다행히도 형부상서 위택魏泽은 “录方孝孺家时, 藏其幼子, 以故方氏有遗胤”에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어린 아들과 기타 요행히도 생존한 사람들은 감히 방方을 성姓으로 삼을 수 없어 혹은 시를 성姓으로 삼고( 파자하면 “방인야方人也”이다) 혹은 성姓을 “육六”(글자 모양이 방方과 비슷하다)으로 바꾸어서 명조明朝가 멸망할 때까지 이어와 그 중에 몇몇은 다시 방성方姓으로 바꾸었다.  청조清朝의 강희제康熙帝와 옹정제拥正帝 연간에 문자옥文字狱이 크게 일어나 멸족을 피하여 자손들이 성姓을 바꾼 경우도 어찌 한 두 집에 그치겠는가?

   장구한 중국의 봉건 사회에서, 매번 조대朝代가 바뀔 때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성姓을 바꾸어야 했다.  어떤 사람은 원래 왕실의 성원이었고 어떤 사람은 예전 조대朝代의 명문 세가였다.  진조秦朝 이후 한조汉朝가 들어선 이후 400여 년의 양한兩汉 역사에서 보기 드문 강성한 성姓이 출현하였는데 대부분의 왕실 자손은 진한 교체기 성씨姓氏의 혼란기를 틈타서 성씨姓氏를 바꾸었다.  당대 후기에 전란이 그치지 않자 이씨李氏 일가는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하여 성姓을 바꾸어 화를 피했다.  지금의 환남皖南2)의 적계绩溪와 이현黟县에는 적지 않은 호성胡姓이 이씨李氏의 조상의 위패를 공양하고 있으며, 당소종唐昭宗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다.  명조 초기에 주원장은 일찍이 성지를 내려 송나라 말기에  성姓을 바꾼 조씨赵氏의 후예들에게 원래의 성姓을 회복시켜 주었다.  뜻밖에도 수 백년 후에 청조의 강희황제는 주원장의 자손들에게 원래의 성姓을 회복시켜 주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화가인 석도石涛나 팔대산인八大山人은 모두 명나라 말기에 명名과 성姓을 바꾼 주성朱姓의 종실이다.  1911년 청조가 와해된 이후 중원 각지에 머물러 있던 만주족이 사람들은 대량으로 한족의 성姓으로 바꾸어 버려, 우리가 지금 이미 한 사람의 성명姓名으로는 그가 한족의 사람인지 만주족의 사람인지 분별하기가 아주 어렵게 되었다. 

   중화민족은 부계 혈통을 매우 중시하고, 가족의 전통을 강조하는 민족이다.  성씨姓氏를 바꾼다는 건 중국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조상을 배반한 것과 같으며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봉건 통치 집단의 함부로 쓰는 세도 아래에서 가족이 멸문을 당하는 운명을 피하기 위해서 매 시기마다 적지 않은 가족들이 성姓을 바꾸어 어려움을 벗어났다.  여러 세대가 지나고 나서 시대가 바뀌어 어쩔 수 없이 성씨姓氏를 바꾼 가족들이 종종 다시 원래의 성씨姓氏로 돌아가기가 이미 너무 어려워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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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오랜만에 찾아 왔더니만 어떻게 이미지를 붙이는 지 몰라 한참을 헤매었다. 작년 말일부터 찾아 온 갑작스런 감기 몸살로 엄청 껴입고도 벌벌 떨고 있다.  "28자로 이룬 문자혁명"은 편안하게 읽히는 책이다.  연말에 만난 친구가 이 책을 보더니만 고등학교 때 서클 선배란다. 무슨 서클이었냐고 물어 보니 "국어운동회(?)"란다. 지은이가 이 분야에 오래전부터 관심이 많았나 보다.  리뷰를 쓸 지는 모르겠다. 이제는 콧물도 나온다.  장모님이 닭도리탕을 만들고 계신데 저걸 먹고 나면 좀 나으려나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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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9-01-05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있는데 리뷰 올려주시길 기대합니다^^

타지마할 2009-01-06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진주님 아주 오랜만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