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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사람
윤성희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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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성희소설가님의 소설을 좋아한다. 맨 처음에 읽었던 건 거기, 당신이었다. 십년도 더 전이다. 제일 앞에 실려 있는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부터 마음에 들었다. 봉자네 분식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소설이 잘 가, 또 보자였던 것도 좋았다. 다음 책이 나오면 또 찾아 읽게 되겠구나 싶었다. 그 후에 감기 구경꾼들 웃는 동안이 순서대로 나왔고, 베개를 베다 첫 문장까지 나왔다. 모두 나오자마자 샀다. 늘 또 보는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2상냥한 사람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서 생각했다. 상냥한 사람의 이야기일까 상냥하고 싶었던 사람의 이야기일까 결코 상냥해지지 못했던 사람의 이야기일까. 문득 '상냥한'이 무슨 뜻인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페이지를 열었다. '성질이 싹싹하고 부드럽다.'라는 뜻풀이를 확인하고는 음 역시 나랑은 거리가 먼 형용사 맞군, 하고서 표지를 펼쳤다.

 



3소설은 아역배우 출신인 형민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형민뿐만 아니라 형민의 어머니와 아버지, 아내와 딸, 직장 동료들, 형민이 출연했던 TV 토크쇼의 진행자, 형민이 출근할 때 들르는 회사 근처 포장마차에서 샌드위치를 파는 부부 아들의 친구, 형민이 사는 아파트 할머니들, 형민이 들른 휴게소에서 만난 남성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직조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극적인 사건들이 있고 자기 나름의 입장이 있다. 형민은 아내와 이혼하고 딸과 떨어져 지낸다. 형민의 딸 하영은 친구를 사귀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학교에서 벌어진 따돌림의 방관자로 지목됐다. 직장 동료들은 횡령을 했고 차도에 뛰어들었고 아르바이트생을 다치게 했고 잘못된 일을 못본 척했다. 포장마차에서 샌드위치를 팔던 부부는 사고를 당했다. 형민은 어머니를 잃었고 아내와 사별했고 TV 토크쇼의 진행자는 자살했으며 하영이 외면했던 친구는 자살 기도를 했다. 강차장의 아들도 강차장을 도둑으로 몰았던 문방구 주인도 죽었다. 하지만 이런 사연들과 함께 나와야 할 것 같은, 억울하고 분하고 속상하고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감정들은, 문장 사이에서 스윽, 하고 지나간다. 형민의 아내가 교통 사고로 입원해 있다가 결국 죽는 내용은 이런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형민은 버스를 타고 아내는 택시를 탔다. 그리고 그 택시는 사거리에서 신호위반을 하다 트럭을 박았다. 형민의 아내는 응급실에서 일주일을 버텼다. 아내의 귀에 대고 형민은 늘 똑같은 말을 했다. "어서 일어나자. 그러면 내일 풍경이 다르게 보일 거야." (177쪽)

 

어떻게 보면 굉장히 건조한데, 그 건조함 때문에 더 많은 소리와 장면과 냄새를 상상하게 되는 이런 서술. 그래서 건조하다기보다는 담담하다고 느껴지는 말투. 울고 불면서 해야 할 것 같은 이야기를 조그맣게 속삭이듯이 전달하는 목소리를 따라가고 있다 보면,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것조차 꺼려하는 서술자가 눈 앞에 그려진다. 내가 할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을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주는, 정말이지 이 책의 제목처럼 상냥한 서술자.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고맙다는 기분이 들었다. 소설 속의 수많은 슬픈 이야기들이 자극적으로 진열되어 있지 않고, 신파로 흘러가지 않아서. 어디선가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들려주는 서술자의 목소리에서 지긋지긋한 삶의 누추한 주름들을 '그래도 아름답게 보아주는' 소설가님의 시선이 느껴져서.



4. 몇몇 장면에서는 지난 소설집인 베개를 베다의 흔적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영이 같은 학교 친구의 따돌림을 방관하는 에피소드나 형민이 아내와 이혼한 후에도 만나서 낮술을 마시고 방송에 나간다고 새 양말을 신는 장면, 형민과 강차장이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강차장이 등교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내용 같은 거. 베개를 베다를 읽을 때 기억에 남았던 부분들이라 그런 것 같다. 베개를 베다에 실린 여러 소설들의 특정한 장면들이 상냥한 사람에서 다시 재생된 것 같은 느낌. 지루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겪은 것의 반복인 경우도 많으니까.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들로만 이루어진 하루 같은 건 없으니까.

 

서술자만 상냥한 게 아니라 등장하는 인물들도 대부분 상냥해서, 여운이 남는 에피소드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와 이거 진짜 내 얘기다 같은 건 별로 없었는데, 그건 에피소드들이 비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상냥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설이란 내가 나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주지만 내가 타인을 이해하는 데 훨씬 더 많은 도움을 주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후자로 인해 전자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하고 짐작하기도 하고) 전혀 아쉽거나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냥한 사람들의 섬세한 말들과 행동들로 인해 내가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아주 오래 전 했던 말을 계속 떠올리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해서 걷고 또 걸으면서도 잠들지 못하는 '친구'의 무릎에 오른손을 올려놓고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할머니와 악몽을 꾼 아이의 가슴을 토닥여주며 괜찮다고 말해주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니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5. 정작 나를 가장 심란하게 했던 인물은 강차장이었다. 이런 문장들을 읽을 때가 그랬다.

 

이십대 시절 강차장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등교하는 아이들을 보니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치기 어리게 느껴졌다. 선생님은 될 수 없겠지만 뒤늦게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262-263쪽)

 

유쾌한 사람, 나는 그 말이 좋았어. 그런데 다리가 부러져 산속에서 구급대원들을 기다리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이제 마냥 유쾌한 사람으로 살 수는 없겠구나. 다리를 잃은 아르바이트생은 매일 회사 앞에서 시위를 했고, 그 아이를 친 후배 녀석은 출산 중 한 아이를 잃었지. 그때도 나는 우리 딸들하고 영화도 보고, 제주도 여행도 갔다 오고, 맛집도 찾아다니고… (278-279쪽)

 

나도 그랬다. 이십대 시절,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가 나로 인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싫었다. 정확하게는 두렵고 무서웠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직업을 갖게 되고, 그 삶을 살게 되면서, 그 때의 내가 얼마나 치기 어렸는지 깨달았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고 싶지 않다는 말은 사실 나 자신이 누군가로 인해 영향을 받고 싶지 않다는 거였고, 더 정확히는 누군가 깊이 있는 관계를 맺으면서 상처를 주고받고 갈등을 겪어나가는 것 자체가 두렵고 무서웠기 때문이라는 걸. 


여전히 나는 관계에 서툴고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지금 잠깐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하려고 애쓴다. 지금이 아니면 이들을 만날 시간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만나는 이들이 나에게 주는 영향은 분명히 있고, 그중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지만 좋은 것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하고, 그렇다면 나는 이들이 준 좋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을 그들에게 주고 싶다. 형민을 만난 아이처럼, 아이가 만난 형민처럼.

 




6. 아픈 할머니를 먼저 꼭 안아주는 마음, 그걸 잘 해내는 사람.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에도 사과하는 마음, 그 마음을 전하기 위해 지렁이 젤리를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 처음 만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마음, 그랬다가 아이가 머리를 만졌다고 화를 내면 쪼끄만 게 어른한테 버릇없다고 혼을 내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 있는 사람. 이런 마음이라면 괜찮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이 팍팍한 세상에서 어깨를 겯고 살아가기에는 말이다.

 

그 마음을 상냥함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상냥한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아주 특출난 삶이 아니더라도, 어중간하고 어정쩡한 삶이라도, 때로는 불쾌함과 후회를 견뎌야 하는 삶이라도, 이런 상냥함이라면 상처로 좍좍 갈라진 삶의 틈새들에 바를 수 있는 연고 역할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거니까. 그리고 이런 상냥함을 잔뜩 만날 수 있는 이 책을 여러 번 읽고 싶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슬픔이 더이상 없는 것만 같을 때, 지금의 슬픔만으로도 내가 꽉 찬 것 같을 때, 상냥한 마음을 주고받는 상냥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쉬어가고 싶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슬픔의 그릇을 조금이나마 키우기 위해서는 타인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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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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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제 자라섬 포크페스티벌에 다녀왔다. 나의 메인ㅋ인 승열오라버니의 순서를 기다리며 앞 공연들을 보던 중 문득 이 책 생각이 났다. 동물원 아저씨들의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을 듣던 중이었다.



말하지 못하는 내 사랑은 어디쯤 있을까 소리 없이 내 맘 말해볼까

울어보지 못한 내 사랑은 어디쯤 있을까 때론 느껴 서러워지는데

비맞은 채로 서성이는 마음의 날 불러주오 나즈막히

말없이 그대를 보면 소리 없이 걸었던 날처럼 아직은 날


가진 것 없는 마음 하나로 난 한없이 서 있소 잠들지 않은 꿈 때문일까

지나치는 사람들 모두 바람 속에 서성이고 잠들지 않은 꿈 때문일까

비맞은 채로 서성이는 마음의 날 불러주오 나즈막히

내 노래는 허공에 퍼지고 내 노래는 끝나지만 내 맘은 언제나 하나뿐


내 머릿속에는 김광석씨 목소리로 기억되어 있는 저 노래를 유준열씨 목소리로 듣는데, 나도 모르게 '사랑'과 '노래'가 '마음'으로 들렸다. 문득 경애의 마음의 경애와 상수가 떠올랐다. 책상 위에 엎드려 유령 같이 있었을 때도 강하게 움직이던 경애의 마음이,쏟아지는 악플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면서 초라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상수의 마음이, 저 노래와 함께 느껴졌다.


말하지 못한 마음은, 풀어보지 못한 마음은, 그래서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듯 느껴지는 마음은, 그래서 허공에 퍼지고 끝나버린 것 같은 마음은, 어디도 가지 못하고 서성이면서 한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애가 산주에 대한 마음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풀어보지 못해 '언니'에게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듯이. 경애가 자신에게 편지를 보냈던 그녀임을 알고 난 후의 상수가 경애의 곁에서 서성일 수밖에 없었듯이.



2. 너무 한낮의 연애를 작년에서야 읽었다. 젊은작가(라는 말 참 늘 마음에 안 든다…) 정확히는 등단한지 얼마 안 된 작가의 신간을 남들(정확히는 '비평가들')이 하도 좋다고 좋다고 하면 금방 읽고 싶지가 않아진다. 좀더 기다렸다가 좋다는 사람들(정확히는 '독자들')도 있고 안좋다는 사람들도 있을 때 읽고 싶어진다. 참 이상한 반항심이다ㅋㅋㅋㅋ 그러다 보니 1년이 지났고 이쯤이면 괜찮겠다 싶을 때 읽었다. 


기대보다 훨씬 좋았고, 표제작 아닌 소설들이 훨씬 좋았다. (하지만 제목으로선 표제작이 제일 괜찮다고 생각한다) 다음 소설을 꼭 읽고 싶었는데 우연히 김금희소설가의 신간, 그것도 장편소설!!!!!!이 창비에서 곧 출간될 예정임을 알게 되었다. 출간 전 가제본을 읽을 수 있는 서평단을 모집하고 있다는 것도.


책을 읽고 후기를 쓴 지가 워낙 오래 되었고 블로그에 포스팅하는 일도 자주 못하고 있는지라 과연 뽑힐까 반신반의하면서 응모했는데, 운이 좋게도 선정되어서 가제본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읽기 시작했다. 이 책, 경애의 마음을.



경애라는 우리말 옆에 굳이 병기된 敬愛를 보고 '아하 이건 사람의 이름 같지만 실제로는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그 경애인가보구나'하고 확신했다. 첫장을 넘기자마자 상수라는 등장인물이 주인공 느낌을 풍기며 등장하는 걸 보고 그럼 그렇지, 상수가 누군가에게 갖거나 상수에게 누군가가 갖는 사랑과 공경의 마음이로구나! 라고 한번 더 확신했다. 그래서 경애라는 사람이 나왔을 때는 나도 모르게 조금 실망했지만ㅋ 이 경애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려니 왜이렇게 공감이 되는지. 빠른 속도로 경애에게 빠져들었다. 경애의 마음을 더듬는 듯한 기분으로.


동시에 상수의 이름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누군가의 눈에는 속 편할 것 같은 상수의 삶에 대해서도. 변수가 없이, 예측 가능한 삶을 살아야만 했을 것 같은 상수에 대해서도. 그 때문에 더욱 자신의 삶에 변수를 만들고 싶어했을 상수의 마음에 대해서도. 그러고 보면 김금희소설가는 인물의 '이름'을 붙이는 데 많은 공을 들이나보다. 조중균씨나 필용이나 세실리아의 이름이 오래 기억에 남았던 것처럼 상수와 경애 역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으니까.



3. 마음이 없는 상태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경애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나도 한때 그랬다. 마음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어쩌면 마음 따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상처받지 않는 게 강한 거라 생각했고 강해지려면 상처받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단단해지겠다는 생각으로 딱딱해졌다. 감정을 주고받지 않으려 애써 숨겼고 숨겼던 감정이 비어져나올 때면 냉소로 급히 마음의 틈을 가렸다. 힘들었으니까. 더 힘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더 힘들어질 뿐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주고받는 순간이 없다면, 사람의 마음은 이 팍팍한 세상을 견딜 수 없다는 걸. 아무리 경애가 어둠을 만들고 싶어했어도 완벽한 어둠이란 만들어지지 않았듯이. 경애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기다리는 마음은 종종 기도하는 마음이 됐고, 그 마음은 너무 강하게 움직였듯이.



간절히 기도하듯이 정지해 있던 경애의 마음에 누군가의 마음이 닿았다면, 그때의 경애에게는 얼마나 큰 기쁨이 되었을까. 갑자기 울컥했다. 



4. 등장하는 사건들은 하나같이 묵직하다. 호프집 화재 사건, 부당해고, 노조 내 성폭력, 사측의 일방적인 전보, 해외 지사에서의 부패와 비리불이 났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술값을 못 받을까봐 문을 잠가버리고 혼자 도망가는 호프집 사장이나 성폭력 사건을 문제삼는 경애를 배신자 취급하는 노조원들, 경애와 헤어지고 결혼한 후에도 자기가 필요할 때면 남의 사정 따위 생각하지 않고 찾아와 징징대는 옛 애인,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매매에 몰두하는 한국 남자들 모두 너무나 익숙해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놈의 나라는 왜 이모양이지 도대체…하며 계속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00인위 사건도 생각나고 씨랜드도 생각나고 세월호도 생각나고 밀양도 생각나고 MBC도 생각나고 코피노 문제도 생각나고…자꾸 속이 쓰렸다. 


하지만 저 사건들은 어디까지나 배경이거나 소재일 뿐이다. 최근 30여년 간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심심찮게 접할 수 있었을 사건들을 툭툭 건드려 가면서 도달하는 곳은, 결국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을 주고받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 자기의 마음만 다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데는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 덕분에 누군가를 할퀴고 울리고 죽이고 무기력에 빠뜨리는 곳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사람이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나누려 노력하는 것임을, 이 소설은 은근하면서도 따뜻한 말투로 조곤조곤 들려준다. 그래서 나는 페이지를 술술 넘기다가도 자주 멈췄고, 누군가를 떠올렸고, 눈물을 글썽였다.



5. 누군가는 이 소설을 연애 소설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은총과 경애의, 경애와 산주의, 경애와 상수의 연애 소설이라고. 


나는 잘 모르겠다. 이성애를 기반으로 한 커플의 이야기로 굳이 읽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경애와 상수의 연애 이야기 같은 건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다. 그냥 경애와 상수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라는 상수의 말처럼, 마음을 폐기하지 말고 파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그들에게 은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쩌면 그들이 함께 기억하는 친구의 이름이 은총인 건, 은총의 기억으로 이어진 그들이 서로에게 은총 같은 존재가 되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6. 함께 살아낸 같은 시대의 기억을 유려한 글로 그려주는 소설가가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이것은 내가 받은 은총이고, 김금희소설가께 감사하다. 많이 읽히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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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라디오
이토 세이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영림카디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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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난달부터 구독하고 있는 팟캐스트가 있다. 416의 목소리라는 방송이다. 정혜윤 PD가 제작하고 김탁환 소설가·함성호 시인·오현주 작가가 진행하며, 매 회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 나오신다.




'내 이야기를 들어 줄 한 사람이 있다면'이라는 방송의 부제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이야기를 들어 줄 한 사람이 있다면, 딱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이야기는 끊기지 않을 거라는 절박함이 문자에 스며 있는 듯했다. 1회가 올라왔던 날, 경빈이 어머님 목소리를 듣다가, 문득 상상 라디오가 떠올랐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저녁인지도 모르면서 떠들어 대던 상상 라디오의 DJ 아크가.



맨 처음 상상 라디오의 표지를 넘기고 DJ 아크의 독백인지 방백인지 모를 '말'들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솔직히 이 얘기가 도대체 어떻게 흘러가려는 걸까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두서없는 수다에 당황해 '어 내가 생각했던 책이 아니야…'라며 표지를 덮어버렸었다. 그러다 다시 저 책을 펼쳐들었던 올해 1월 초, 본격적인 이야기를 읽기 전 차례를 확인하고는 깨달았다. 아, 죽은 자란, DJ 아크를 가리키는 말이었구나…


그렇다. 이 책은 죽은 자의 목소리-귀를 기울이면-넋을 위로하며-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구원의 노래라는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공교롭게도 각 챕터/장의 제목이 스포일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디밴드 매니저를 하던 아쿠타가와는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 마을로 돌아온 다음 날 후쿠시마 대지진의 희생자가 된다. 빨간 재킷을 입고 있던 그는 물살에 휩쓸려 가고, 삼나무로 덮인 산쪽으로 빠르게 밀려가, 높은 삼나무 위에 거꾸로 매달린 채 목숨을 잃는다. 그렇게 '나무 위에 있는 사람'이 되어, 살아남은 이들에게 목격된다. 


저는 높은 나무 위에 있습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산에 자란 삼나무의 대열 속. 하늘을 찌르는 듯한 가느다란 수목의 거의 꼭대기에 걸려서 목을 뒤로 젖힌 채 누워 마을을 거꾸로 보고 있습니다. 마치 길가메시 신화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처럼 높은 곳에 혼자 남아 버렸습니다. (25쪽)


재해가 일어난 지 반년 뒤, 고지대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 미야기 현 해안의 어느 마을 사람들이 구호물자를 들고 간 내게 젖은 목재와 걸레처럼 뒤틀린 금속 덩어리, 색색의 천과 생활용품이 높다랗게 쌓여 있고, 표면에는 파리나 까마귀가 엄청나게 발생한 장소 너머로 구불거리며 흘러가는 작은 강의 상류를 가리키며 불쑥 한 말. 산을 두개 넘어간 곳에 있는 삼나무에 한동안 사람이 걸려 있는 걸 본 기억이 도저히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57쪽)



어떤 '재해'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갖게 되는 첫 번째 마음은, 아무래도 미안함 아닐까. 왠지 모를 죄책감. 내가 죽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는데, 나 대신 저 사람이 죽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느낌. 내가 저 사람보다 뭔가를 더 잘했고 뭔가가 더 잘나서 살아남은 것이 절대 아니기 때문에 저 사람의 죽음과 나의 살아남음이 아무 상관 없는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느낌. 심지어 저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내 속에 있던 무언가도 같이 죽어버린 것 같다는 아주 막연한 느낌. 그런 느낌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미안함. 나는 살아남았으니,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 


그렇기에 누군가는 재해의 현장에 가서 봉사를 하고 아픔을 나눈다. 아픔이란 게 나눈다고 줄어들 리 없음을 잘 알면서도, 아픔의 공간에 함께함으로써 자신의 살아남음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런 이들의 귓가에, 아쿠타가와가 전하는 소리들이 전해진다. DJ 아크가 살아남은 이들에게 전하는 소리가.



삼나무에 매달린 아쿠타가와는 수다쟁이 DJ 아크가 되어 방송을 한다. 자신이 이 세상에 남기고 싶어했던 말을 풀어놓는다. 자신이 언제부터, 여기서, 왜, 누구를 향해, 이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건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하고 노래를 튼다.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메일이 도착하면 읽어 주고, 어떻게 연결됐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과 연결되면 통화를 한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던 1장에서의 아크는, 3장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서로를 위로한다. 함께 웃기도 하고 흐느끼기도 하면서 자신들의 상황을 '중계'하는 그들의 모습은 슬프면서도 아름다웠다. 특히 어둠 속에서 혼자 헤매던 이들이 아크의 목소리 덕분에 만나는 장면, 서로의 손을 붙잡은 채로 어둠 속에서 함께 버티고 있던 3장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눈물이 날 뻔했다.


저는 기둥의 맨 밑을 잡고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깊은 어둠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습니다. 아크 씨, 당신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나는 쪽으로. 그러자 하늘하늘 흔들리는 차가운 손이 잡혔습니다. 저는 거침없이 그것을 잡았습니다. 누군가의 왼손이었습니다. 무섭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는 우리 방송의 청취자이기 때문이다.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어둠의 구석입니다. 손전등이 그 파란 화살표를 부옇게 비출 뿐입니다.

지금도 좁은 층계참에 웅크리고 앉아, 그 사람이 더 이상 가라앉지 않도록 손을 꼭 잡고 있습니다. (중략) 이렇게 있으니 오히려 내가 잡고 있는 가라앉아 가는 손이 나를 구원해주는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121쪽)



아크는 이제 그만 떠나자는 아버지와 형을 먼저 보내고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신이 왜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인지 깨닫는다. 아들을 보고 싶어서, 아내를 보고 싶어서.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자신을 잃어버린 두 사람이 어떤 기분으로 지낼지 생각하면 석쇠 위에서 몸이 지글지글 타고 있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초조함과 무력함과 미안함이 몰려와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아직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면 부디 두 사람 마음이 바람 없는 날의 호수처럼 잔잔해지기를, 저는 이곳에서 기도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가까이에 있어주기를 바란다면 저는 언제까지고 가까이에 있고 싶고, 정토로 보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은 미사토와 소스케의 말에 달렸습니다. (195-196쪽)



아내와 아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마지막으로 노력하겠다는 아크를, 수많은 영혼들이 응원한다. 집중해서 아내와 아들의 목소리를 듣는 아크와 같이, 아크의 목소리를 듣는 영혼들에게도 남편을 칭찬하는 미사토 씨와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는 소스케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크처럼, 살아남은 누군가를 보고 싶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저 세상으로 떠나지 못하고 이승의 어둠 속을 맴돌고 있던 수많은 영혼들에게. 그리고 아크는 미련 없이, 웃으며, 떠난다. 이 장면에서 나는 세월호가 떠올랐고, 여전히 아이들을 보내지 못하고 계신 부모님들이 떠올랐다. 그 아이들 중 한 명도, 아직, 아크처럼, 웃으며, 떠나지, 못했을 것만 같아, 마음이 저렸다.




상상 라디오를 읽으며 세월호가 생각났듯이, 416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크를 떠올린다. 아무 잘못도 이유도 없이 차가운 물 속에서 구해주러 오는 이들을 기다리다가 죽어갔을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나 또다시 죄인 된 기분에 휩싸인다. 


그러다 문득, 416의 목소리에서 부모님들이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어쩌면 아이들이 세상에 남기고 싶어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아크처럼, 그 아이들도, 계속 이 차가운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는 것 아닐까. 부모님들이 계속 아이들에 대해, 세월호에 대해, 4월 16일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누군가 그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준다면, 떠나지 못하고 어둠 속을 떠도는 아이들이 조금은 위로를 받지 않을까 싶어 마음이 더 많이 저려온다.


416의 목소리는 현재 5회까지 올라왔다. 이제까지 5회가 올라왔고 다섯 분의 어머님/아버님이 출연하셨다. 수학여행을 가서 돌아오지 못했던 경빈이와, 민지와, 건우와, 승묵이와, 영만이의 어머님/아버님. 솔직히 방송을 끝까지 다 듣는 게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방송이 더 널리 들려지고 퍼졌으면 좋겠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이들을 떠올려 주고, 세월호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역시 삶의 구석구석에서 세월호를 떠올리게 하는 순간을 만날 때마다 절대 잊지 않기를 약속하겠다고, 새삼 다짐해 본다. 후쿠시마 대지진으로 희생되신 분들의 명복을 함께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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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불량야구단
주원규 지음 / 새움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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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불량야구단. 신기한 제목이다. 천하무적인데 왜 불량하다는 걸까. 감독이 포악한가. 선수들이 사고를 많이 치나. 상식적인 선에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는 그 정도였기에, 궁금했다. 이것이 이 책을 집어든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 이유는 이 책의 작가가 주원규라는 것이었다. 혁명이나 변혁 같은 거대 담론이 낡아빠진 이야기가 된 시대라 그런지, 아직도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는 작가를 만나면 반가움이 먼저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의 전작 <열외인종 잔혹사>는 작가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책이었고, 혁명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은 작가가 아닐까 하고 짐작하게 하는 책이었다. 그런 주원규가 만들어낸 야구 이야기란 어떨까, 궁금했다.

그러나 예상 외로 이야기는 꽤 전형적인 '야구 소설'의 흐름을 따라갔다. 유명하지 않은 선수들을 열심히 훈련시켜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하는, 가난한 구단 삼호 맥시멈즈의 감독 김인석을 중심으로 이 소설의 이야기는 진행된다. 코리안시리즈에서 상대하게 될 팀은 가난한 모구단을 인수할까 말까 하고 있는 부자그룹 미성의 프로야구단 스틸러스. 최소한의 스포츠맨십마저도 자본과 생존의 논리에 따라 버리고 마는 맥시멈즈의 구단주와 주전 선수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승리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는 '괴팍한 감독'과 뭣도 모르고 그 감독의 일생을 건 승부에 말려 버린 과거의 4번타자 장석준, 철부지 파이어볼러 강태환, 어리바리 2군 선수들 다섯 명.

스포츠 소설이니까 당연히 주인공이 이길거야, 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리 봐도 맥시멈즈에게 너무 상황이 불리해 보여 후반부를 읽으면서는 이러다 지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참 변덕스러워서, 결국 맥시멈즈가 우승했음을 확인하고 나서는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힘이 좀 빠지기도 했다. 하, 결국 전형적인 야구 소설이구만. 온갖 난관과 고난과 역경과 시련을 극복하고 승리를 거머쥔 영웅들의 이야기...뭐 이런 거 아냐? 라는 생각에 조금의 배신감도 느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이길 수 없을 만한 상황을 초인적인 의지로 헤쳐가는 주인공의 승리를 확인한 후의 안도감이 지나가고 나면 '에이 소설이니까 이기지, 현실이라면 이길 수 없었어'라는 생각에 쌩하니 고개 돌리게 되는 것이 스포츠 소설을 읽고 나서 보통 느끼는 감정이다보니.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맥시멈즈의 승리는 정말 승리였을까. 맥시멈즈가 승리를 한 후, 구단의 패배를 확신(하다못해 소망하기까지)하고 있었던 프런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구장을 가득 채운 스틸러스 팬들의 반응이 말도 못하게 싸늘했을 것은 두말할 나위 없고. 공중분해되기 직전의 모그룹이 우승한 구단에게 특별한 보너스를 주었을 것 같지도 않고. 원래부터 인기팀도 아니었던데다가 한국시리즈가 진행되는 내내 중계진으로부터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들어먹었으니 언론의 보도도 호의적이지 않았을 테고. 감독은 그만둬, 승리의 주역들은 '콩고물'도 얻어먹지 못한 채 흩어져, 팀은 공중분해돼, 이게 뭔 승리야, 이런 걸 승리라고 할 수 있어? 

맥시멈즈는 분명 한국시리즈를 이겼지만, 현실에서도 승자가 될 순 없었다. 김인석도, 장석준도, 강태환도, 2군 5총사도 우승을 통해 승리자다운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이 거둔 승리는 야구장 안에서의 승리였을 뿐이다. 장석준의 아들이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이야 감동스러웠다만, 장석준의 현실은 병원에서 쫓겨난 아들을 위해 병원 앞에 서서 1인시위를 하는 아버지인 것이다. 아, 슬프고 씁쓸하다...하면서 책을 덮기 직전, 마지막으로 <작가의 말>을 읽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조차 기회와 역전의 가능성이 주어진 각본대로 정해져 있다면, 그래서 패배가 결정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그 판을 아예 둘러엎고 우리들만의 새로운 판을 만들어야 할까요. 아님 그 판에 주어진 각본대로 적당히 순응하는 착한 선수가 되는 게 옳을까요? 이것도 저것도 아님 그 판에 머물러서 주어진 각본과 역할을 걷어치우고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버텨내는 '불량주전'으로 살아남는 게 좋을까요.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 p.431, <작가의 말> 중에서.


그렇다. 어려운 문제다. '그 판'을 좌지우지하거나 또다른 '판'을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의 능력 따위 조금도 없는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게 주어진 것이 매우 제한적이고 그 주어진 것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제한적임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판'을 만든 그 자들은 팔짱을 끼고 무표정한 얼굴로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져 있다고, 그러니 너는 그 기회를 잡아 노력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따라서 실패하거나 낙오한 사람들은 남들만큼 애쓰지 않고 게으름을 피운 사람이니 동정할 것 없다고 말한다. 또는 연민에 찬 눈빛으로 '지금 네 상황에선 어렵겠지만, 네가 내 말을 잘 듣는다면 너도 나처럼 될 수 있어. 아니, 내 뒤를 따라올 수 있어'라며 은혜를 베푼다. 역겹기 짝이 없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매일 고민한다.

어쩌면 작가는 나와 같이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비현실적인 야구 소설을 쓴 게 아닐까. 믿고 의지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싸움으로써 결국 나 자신에 대한 신뢰를 지킨 현실의 패배자들에게 불끈 쥔 두 주먹을 흔들어 보여주는 건 아닐까. 비록 그 싸움을 통해 '정말로 내가 얻은 것'은 없다고 할지라도, 함께 싸워 보자고. 지지 말자고. 버텨 보자고. 그래서 살아 내자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났더니, 이 이긴 것 같지도 않고 진 것 같지도 않은 이야기가 왠지 고마워졌다. 쑥스럽게도.


+ 사족
이 책의 또다른 재미는 역시 야구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 무사에 일부러 만루를 채우게 하는 것을 비롯, 온갖 기상천외한 김인석의 작전들, 초단기 2천스윙 특훈, 전형적인 캐스터와 해설자의 멘트 등등을 통해 작가가 야구를 꽤 많이 알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실제 선수들과 구단을 연상케 하는 부분들이 요소요소 숨어 있었다는 것도 쏠쏠한 재미를 주었다. 맥시멈즈를 볼 때는 넥센이, 스틸러스를 볼 때는 엘지+삼성이 생각났다.  김인석은 김인식과 김성근을 적절히 합쳐 좀더 괴팍하게 만든 인물 같다. 강태환은 김광현+류현진+돌아이인가 싶었는데 묘하게 김진우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장석준은 장종훈+양준혁에 좀더 극적인 요소를 섞은 인물 같고. 그 외에도 강선동, 유현종, 고형민, 박철수, 장민혁, (타자) 윤길현, 이동수 등등의 이름이 보일 때마다 킬킬거리며 몇몇 얼굴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전 메이저리거의 이름이 정지훈이라는 것도 재미있었고ㅋㅋ 야구팬이라면 깨알같은 유머에 즐거워할 수 있는 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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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크 로로의 심플한 정리법 - 세계적 베스트셀러 <심플하게 산다>의 실천편
도미니크 로로 지음, 임영신 옮김 / 문학테라피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1. 무엇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요?
'무언가'를 많이 가졌다는 것보다, 무언가를 '많이 가졌다'는 것에 더한 충족감을 느끼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비싼 옷이나 화장품, 이른바 '명품 백' 같은 것을 전혀-_- 구입하지 않는 나에게 재산은 이런 것들이리라고 생각하며 별 감흥 없던 책도, 더이상 듣지 않는 CD도, 받은 지 10여년이 훌쩍 넘은 쪽지도, 어릴 적 끄적거렸던 낙서조차도 모아 두었다. 

언제부턴가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다 쓰지 못할 것 같은 검정색 펜들이 가득 들어있는 필통을 보면 숨이 턱턱 막혔다. 손 댄지 오래된 책들과 CD를 내다 팔고 이젠 필요 없는 자료들을 분리해 내는 건 쉬웠지만 그 이상은 잘 되지 않았다. 잡동사니들을 정리해 보겠다며 책상 서랍을 뒤집었다가 이건 그 때 걔가 준 거야, 이건 또 언제 필요할 지 몰라, 이건 나 말고 필요한 사람한테 줘야지…하며 하나하나 물건을 늘어놓다가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는 지쳐 버리기가 일쑤였다. 누군가 잘 버리는 방법을 좀 가르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용서를 원체 안 읽다 보니 뭘 읽어야 할 지 감이 안 잡혀 '정리'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책들을 무작정 골라 읽었지만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정말 실용적인 정보'보다 그 실용적인 방법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책들이 많았고, 그게 내가 실용서를 싫어하는 이유이다 보니ㅠㅠ '왜 정리를 해야 하는가?' '왜 버려야 하는가?' '왜 물건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도 정리해야 하는가?' 등등에 대해 책의 70% 이상을 적어놓고 있는 책들을 통독한 후면 허탈함에 몸서리쳤다. 아오 인제 그만 읽을까…싶을 때쯤 도미니크 로로의 심플한 정리법을 만났다. 이게 마지막이라고 중얼거리며 읽기 시작했고, 결과는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


2. 물건 대신 '나'를 채우는 삶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인생의 필요 없는 것들 정리하기'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1부에서는 '단순함'이 인생에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서술하고, '단순할수록 미래는 더 안전하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2부에서는 직접적으로 정리를 시작하기 전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한다. 1, 2부의 전체적인 주장을 요약하자면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낭비하지 않으며 좋은 것들을 골라서 취하고 자신을 귀하게 여기며 존중하는 삶을 살기 위해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일들을 피하고 우리를 어지럽히는 것을 소유하지 않기로 결단하라.'정도일 텐데, 사실 쉬운 얘기는 절대 아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심플한 삶이란 그 어떤 물질도 소유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편의와 즐거움을 위한 최소한의 것 이외에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삶이다. 그런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먹고 입고 쓰는 데 편안함을 느끼는지, 무엇을 하고 듣고 읽고 즐길 때 내 정신이 충만해지는지, 내게 필요한 최소한의 것 이상이라고 느끼는 '과도한 것들'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즉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취향을 가진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어야만 심플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지, 타인의 눈을 신경쓰며 살아가는 데 익숙해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이라면 심플한 삶 자체를 욕망하지조차 못하리라는 것.

무상의 우아함은 먼저 자기 자신을 소유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자기 자신에게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사람의 취향에 영향을 받기보다 자기 자신의 취향을 만들어나가야 하며, 자신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견하고 실제와 다른 어떤 존재인 양 가장하지 않아야 한다. (30쪽)


인간 관계에서도 이 정의는 그대로 적용된다. 함께 있는 순간에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이지, 더이상의 욕심은 부려서도 안 되고 부릴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에 만족했다면 그것으로 끝. 과거가 된 행복을 현재의 것이라 착각하고 집착해선 내가 추해질 뿐이다. 욕망의 대상이 인간이든 물질이든간에 '내 것'이라 생각하며 소유하려는 사람은 덜 성장한 것이므로 더 성숙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저자의 말이, 죽을 때까지 성장해야 한다고 믿는 나에게 좋은 가르침이 되었다.

많이 소유할수록 우리는 더 쉽게 상처받게 된다. 반면 영적으로 더 진보할수록 소유나 사람에 대한 욕망은 줄어든다. 물질적으로 초연해지는 것은 그것과 얽힌 관계까지 포함하여 모든 영역에서 자유로워지도록 해준다. "지금 나는 이 사람과 있어서 정말 행복해. 하지만 그를 소유한 것은 아니야. 내가 감옥의 간수도 아니고, 나와 함께 있든 떠나든 그에게는 자유가 있어." (33쪽)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려고만 들지 않는다면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혹사시키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심지어 사랑조차도 늘 소유하려 든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우리의 삶에 전반적으로 악영향을 미친다. 요행을 바라며 세상으로부터 헛된 기대를 품다 세상을 원망하거나, 사람이나 물건으로 우리의 욕구를 채우려 애쓰다 정작 우리 스스로를 잃고 상처받게 된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바깥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 자신 안에 있다. (36쪽)


그렇다면 지금 여기 내게 필요한 것만이 가져야 할 물건일까? 이에 대해서도 저자는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여 '쓰잘데 없는 건 다 버려라'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알려준다.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사용할 때마다 즐거움을 주고 공간에 생동감을 불러일으켜주는 물건, 즉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물건이므로, 기능성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라는 것. 이 애정을 돈을 잃는 것 같은 두려움이나 가난하게 보일 것에 대한 두려움, 나중에 후회할 것에 대한 두려움과 착각해선 안 된다는 충고까지 덧붙인다. 

자신의 물건에 왜 이렇게 많은 애착을 갖는지, 어떤 가치가 결부되어 있는지 자문하라. 우리가 버릴 물건 중에는 어쩌면 버리고 나서 후회하게 될 물건도 한두 개쯤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 익숙해져야 한다. (107쪽)



3. 심플한 정리법, 실전!
가장 마음에 들었던 3장의 제목은 '심플한 정리법'! 1, 2장이 이론이라면 3장은 실전이랄까. 그야말로 정리를 위한 실용적인 팁들이 가득가득 들어 있다. 부엌에 꼭 필요한 물건은 무엇이며 있으면 좋아 보이지만 별로 필요하지 않을 것이 뻔한 물건은 무엇인지, 손님을 대접할 땐 어떻게 해야 되는지, 장식품은 어떻게 구비해야 할지, 도저히 뭘 못 버리겠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하는 것이 좋은지 등등. 잡동사니를 담을 서랍은 한 칸만 마련하라, 수량의 상한선을 두라(중복해서 물건을 갖지 말아라), 물건을 그룹화하라, 계절에 따라 버려라, 결정은 아침에 내려라, 소비에 시간을 투자하지 마라, 여행을 버리는 기회로 활용하라 등등. 이사나 독립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선물해 주면 딱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자신에게 어떤 정서적 의미가 없거나 적은 외부의 물건, 물질적인 것들부터 비워나가기 시작하라. (207쪽)

잡동사니로 가득 찬 서랍 한 칸이나 상자 하나를 공략할 떄는 탁자나 바닥 위에 내용물을 모두 쏟아놓자. 이렇게 모든 물건이 한눈에 드러나면 몸은 저절로 반응해서 그것을 원래 있던 곳에 집어넣는 대신, 내용물의 90퍼센트를 버리게 된다. (208쪽)

어떤 물건을 버리기 전 아직 애착이 느껴지거나 더 이상 필요하지않으리라는 확신이 서지 않을 경우…그 물건을 정성껏 포장해서 차고나 지하실에 이런 물건을 모아둘 장소를 정해놓는 것이다. 그리고 상자에 날짜를 써두라. 1년 동안 그 상자의 물건을 찾으러 가지 않았다면, 그것은 버려도 된다. (209-210쪽)

사고 싶은 물건의 목록을 적어서 30일을 기다리자. 시간이 다 될수록, 그 물건을 왜 그토록 원했는지 더 이상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263쪽)

감정적 에너지를 소모하고 스트레스와 육체적인 고통까지 불러일으키는 물건들을 주의하자. (244쪽)

소비를 줄이는 것은 지구를 구하기 위해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사회 참여라고 할 수 있다. (272쪽)

결국 이 책 전체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지점은 변하는 물질과 의미 없는 과거에 매달리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진정으로 의미 있는 존재에 집중함으로써 정신적 충일함을 맛보고 성숙한 인간이 되라는 것이리라. 이제까지 쥐어 왔던 쓰레기들-물질과 기억 모두-을 치우고, 내 안에 빈 공간을 마련해 놓고,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삶을 살아나가려고 노력하라는 메시지. 되돌아가지 않고, 멈춰있지 않고, 천천히 성장하는 인간이 되어야 할 테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는 데, 이 책이 두 걸음 정도는 도움을 준 거겠지? :D
 


물건은 순환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보다 더 오래 남아 있다가 빛이 바래고 낡아서 아무도 울어주지 않는 가운데 사라지게 될 것이다. 자고로 물건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잠깐 맡은 것이며 계속 순환되어야 한다. 자신이 맡았을 때 잘 누리면 된다.

-리디아 플렘의 『수런거리는 유산들』 중에서, 도미니크 로로의 책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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