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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해야 syo일 뿐인데, 이론이 필요할까


지금 이 순간,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이라는 거미줄처럼 약하고 조금은 비참하기까지한 방패를 미리 받쳐들고 입을 떼야만 했던 사람들의 심정을 좀 알 것 같다. 이런 말을 하려고 한다.


syo는 말기 빨갱이에 열혈 맑빠지만, 솔직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엥겔스의 다소 미심쩍은 책 『가족, 사유재산(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이나 영문판으로 800페이지가 넘는 책 50권에 달하는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을 악착같이 뒤져, 여기저기에 정말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구절들을 들먹이면서 자신들의 두 성자를 페미니즘의 전당에도 은근슬쩍 밀어넣으려 분투하는 모습을 볼 때면 기가 찬다. 다 차치하고 마르크스가 살아 온 꼴을 보자. syo는 역사에 그만큼 큼지막하게 이름자를 박아 넣은 인물 가운데서 마르크스만큼이나 아내를 성적, 재정적, 직업적으로 착취한 사람을 알지 못한다. 마르크스의 아내 예니의 마음이야 syo가 가늠할 수 있는 바는 아니지만, 그 모든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가치를 남편에게서 찾아냈기 때문에 버티고 살았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아, 이런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게 아니라, 다시,


syo는 말기 빨갱이에 열혈 맑빠지만, 계급 투쟁이 성공하여 모든 생산 수단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아귀에 쥐어지는 순간, 자동으로 모든 부수적인 문제, 인종 차별이나 남녀 차별이나 이런 저런 갖가지 차별들이 일거에 해결될 것처럼 부풀리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은 좀 순진하거나 기만적이라고 본다. 물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러려면' 지금 이 시점부터 혁명이 성공하는 순간까지 살아 있는 모든 차별들을 잠시도 눈 감지 말고 주시하며 가야 하는데 그건 참 어렵고, '아니려면' 그냥 지금처럼 앞만 보고 달리면 되니까, 결과적으로 아니게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차별의 철폐에 불필요하거나 불편하고, 페미니즘의 이론은 혁명의 완성에 불필요하거나 심지어 족쇄가 될까?


안태근이 '그랬던' 이유는 물론 그의 품행과 인식에서 나오겠지만, 안태근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가진 권력, 그리고 권력을 가진 이들이 그의 편이라는 데 있다. 인사권. 그리고 2차 가해를 유발하는 사회적 힘. 고은이 '그랬던' 이유 역시 그의 품행과 인식에서 출발하지만, 고은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 또한 그가 가진 권력, 그리고 권력을 가진 이들이 그의 편이라는 데에서 생겨난다. 청탁권력. 그리고 역시 2차 가해를 유발하는 사회적, 문화적 힘. 


결국 이것은 다시 권력의 문제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 이 문제를 '문제'로 생각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다. 쓰레기 같은 남자들이 소수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쓰레기를 치울 뜻과 힘을 동시에 가진 남자들이 너무 소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어느 소수가 더 소수인지는 명백하다. 쓰레기보다 청소부가 더 많았다면, 이 모든 폭력들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해도 최소한 발생과 동시에 수면에 드러났을 것이다. 몇 년이 지나고, 몇십 년이 지나 이제야 겨우, 이렇게 힘겹게 싹을 틔어올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MeToo의 융단폭격 소리를 듣고 잠자던 청소부들이 이제 눈을 떴을까? 이제껏 눈 감고 못 들은 척, 기껏 들으면 치우는 둥 마는 둥 한없이 미적거리던 청소부들이 드디어 일제히 기립하여 손에 손에 목장갑을 착용하고 빗자루를 들까? 청소를 마치면 유니폼을 갈아 입고 경찰관이 되어,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단속하고 처벌하여 아예 쓰레기가 생겨나지 않도록 열과 성을 다할까?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가 등장하면 어떨까.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모든 생산수단을 점거하고, 부르주아지들이 사라지는(프롤레타리아트가 되는 셈이다) 순간 승전보를 울린다. 그렇다면 모든 권력을 여자들에게 주면 어떨까. 그건 안 되겠다. 생산수단을 잃는 순간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부르주아와는 달리, 남자는 권력을 내려놓아도 여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별만 바뀌어 유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권력을 반으로 나누면 어떨까. 자신을 아프게 하는 쓰레기를 치울 수 있게, 여성에게도 빗자루를 나누어주면 어떨까. 권력이라는 생산수단을 균형있게 나누어 가짐으로써 서로의 착취를 서로가 막을 수 있는 두 집단의 혁명 프롤레타리아트를 맞세워 놓으면 어떨까. 


정말 어색한 비유였지만, 이 문제를 발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여성에게 권력을 주는 것 외에는 역시 방법이 없다고 syo는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면역이 떨어진 몸이다. 그래서 병까지 걸린 두 배로 불쌍한 몸이다. 우선 병을 쫓아내면, 반드시 면역력을 회복해야 한다. 대증요법으로 일관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아무리 안태근이니 최교일이니 고은이니 욕으로 두들기고 법과 도덕으로 처벌해도, 다시 그들의 자리에 그들이 가 앉을 수 있게 둔다면,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물론 단순하고 순진하며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생각이다. 그러나 당장 무엇을 행동으로 옮겨야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 아니, 내가 무슨 행동을 한다고 해서 조금 더 나은 세상이 오기나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syo 깜냥에,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겨우 이런 생각들이나 내면의 윤리학을 기름치고 조이는 소심한 노력 말고 뭐가 있을까. 그렇다면, 기껏해야 이런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하고 간단한 생각들을 하기 위해, 이런 책들이 과연 필요했던 걸까? 고작 이런 뻔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려고 저 무섭고 무거운 책들을 읽어야 했다면, 어쩌면 syo는 구제가 안 되는 덜떨이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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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8-02-20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옳은 이야기는 뻔해 보이기 쉽죠. 한동안 북플 소홀했더니 syo님의 글을 여러개나 놓쳤었군요 ㅠㅠ

syo 2018-02-20 12:14   좋아요 0 | URL
무플방지 위원회 독서괭님이시다 ㅎㅎㅎㅎ
 



자각몽을 꾸는 중이었다. 꿈 속의 syo는 요게 꿈이란 걸 알고 있었으므로 꿈을 쥐락펴락하며, 어차피 꿈인데 뭐 어때, 평소 한 번쯤 어떨까 생각해봤던 온갖 짓거리를 다 해 보았다. 어차피 꿈인데 한남대교에서 투신도 해 보고(미친 놈아), 어차피 꿈인데 사람도 막 쥐어 패 보고(으아, 미친 놈아!!!), 어차피 꿈인데 세상 사악한 표정으로 책을 한 장 한 장 뜯어 불살라도 보고(으아으아 왜 그랬어 미친 놈아아아!!!!!!!!!!!!), 뭐 이런 짓 저런 짓 다 해 봐도 역시 그건 꿈이었다. syo는 죽지도 않았고, syo한테 얻어터진 정치인은 암만 패도 한결같이 개소리에 개소리를 얹었으며, syo가 태운 책들도 여전히 책장에 기세등등 꽂혀 있었다. 자각몽을 꾸는 것은 신나면서도 허망한 일이군. syo가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지금 아등바등 살고 있는 이 세상도 꿈은 아닐까? 오늘 한 번 확 진짜 한강에서 확 그냥 막 그냥 응? 그러나 그럴 용기는 없었다. 아니면 어쩔 거야. 인생 한 갠데. 꿈 같은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해 똑바로 살아나가자, 이 험한 세상에. 아자아자 화이팅.


하고 힘차게 다짐했는데 눈 떠보니 그것도 꿈임.


자각몽은 몇 번 꿔 봤지만, 자각몽을 꾸는 꿈은, 심지어 '자각몽을 꾸는 꿈인데 그 자체는 꿈이라고 자각을 못하는 꿈' 같은 희한발광한 꿈은 또 처음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싸다구라도 한 대 먹여(먹어) 볼까 했지만 진짜 안 아플까봐 겁나서 못 하고, 대신 이렇게 일기를 남긴다. 하루의 시작부터 아주 야무지게 농락당한 느낌입니다.




 "사비에르는 내 동생입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노인은 잔인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검지를 쳐들었다. "사비에르는 존재하자 않소. 그저 환상일 뿐이오." 그가 방 전체를 껴안는 몸짓을 했다. "우리는 모두 죽었소. 아직도 그걸 몰랐단 말이오? 나도 죽었고, 이 도시도 죽었소. 전투, 땀, 피, 영광, 나의 권력, 이 모든 건 죽었소. 아무짝에도 소용없게 되어버렸소."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어떤 것은 영원히 남아 있어요."
 "뭐가 말이오?" 그가 따졌다. "그의 추억이? 당신네들 기억이? 아니면 이 책들이?"

 노인이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온몸이 오싹했다. 노인 무얼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발치에 있던 조그만 주머니 같은 것을 장화로 걷어찼다. 보니까 그건 죽은 쥐었다. 그걸 바닥에 굴리더니 조롱하는 투로 중얼거렸다. "아니면 이 쥐가 영원하다는 건가?" 노인이 다시 웃었다. 그 웃음에 내 몸의 피가 얼어붙었다. "난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다!" 노인이 부르짖었다. 그러자 목소리가 부드러워졌고, 나를 교수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깨웠다면 용서해주시오."
_ 안토니오 타부키, 『인도 야상곡』




오른손


어제는 아침에 일어났더니 오른손이 왼손을 막 꼬집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만 오른손을 써 보기로 했다. 밥이 자꾸 볼을 때렸다. 국물이 돌아오지 않는 번지점프를 시도했다. 밥 한 끼 먹고 났더니 거지꼴이 되었다. 위대한 오른손. 그럼에도 오른손을 포기하지 않았다. 뭔가 더 재밌고 웃긴 일이 벌어질 거라고 기대하며. 그러나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역시 날로 먹으려 한 것이 패착이다. 시트콤의 길은 지난하다.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제 칸트의 멱살을 노린다.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 베를린 연대기』는 당최 무슨 말을 하고 있나....

프랜시스 윈, 『마르크스 평전』우리 마르크스가 대학생이 되었어요.

존 치버, 『존 치버의 일기』치버가 본격적으로 남자를 만나고 다녀요.

박민영, 『그러니까 이게, 사회라고요?』를 마침.

이진우 외, 『대통령의 책읽기』를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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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5 1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5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이 2018-02-05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자아자화이팅.

cyrus 2018-02-05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 <기생수>에 나오는 ‘오른손이‘처럼 syo님 오른손이 책을 읽을 수 있겠는데요. ^^

syo 2018-02-05 15:59   좋아요 0 | URL
제 오른손은 그만한 성능이 안 나옵니다.
보세요. 밥도 제대로 못 떠먹는 놈이 이놈이라구요.....

프리즘메이커 2018-02-05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른손잡이 좌파를 진지하게 필명으로 고민했었습니다...ㅎㅎ

syo 2018-02-05 16:01   좋아요 1 | URL
드디어 프메님과 저의 차이점이 하나 나왔군요. 손잡이가 다르네요.
그나저나 프메님 프로필 이미지하고, 위에 있는 사이러스님 프로필 이미지가 좀 많이 비슷해 보입니다.
프메님이 좀 더 잘생겼다는 게 결정적 차이네요.

마그리트 의문의 1패.

프리즘메이커 2018-02-05 18:00   좋아요 0 | URL
밍ㅠ 부끄럽구요 ㅎㅎ

유부만두 2018-02-06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 가 연상됐다고 쓰려니 넘나 가식적인 댓글 같네요;;;; 진짠데요...^^

syo 2018-02-06 11:57   좋아요 0 | URL
저는 프루스트를 안 읽어봤지만 어쩐지 들어서는 안 되는 거대한 말을 들어버린 느낌이네요ㅎㅎㅎㅎㅎㅎ

유부만두님 반갑습니당^^

토큰 2018-02-10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을 쥐락펴락 하고 싶네요. 흐흐흐

syo 2018-02-10 14:43   좋아요 0 | URL
흐흐흐^ㅠ^
 


헤어지는 장면들


1


그는 서울에서 컴퓨터를 공부하고, 그녀는 경남의 유서 깊은 도시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법을 배운다. 주고받는 이야기만으로 그는 그녀에게 빠졌다. 그는 시를 썼고, 책을 읽고, 그녀와 달리 사랑이 처음이었다. 그가 아는 누군가를 그녀는 좋아했었고, 버림받았다. 가을과 겨울을 옆에서 보듬다가 기어이 그는 그녀를 좋아하고 말았다. 세상이 갑자기 환하고 선명해졌다. 처음 겪는 감정이라서 오히려 확신했던 그와는 달리 그녀는 망설이는 중이다. 그 망설임이 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큰 빛이 내리면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법이다. 봄이 왔다. 무엇 하나 못박지 못하고 그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마음은 들뜨고 그저 이야기만 분주히 오간다. 그는 만지고 싶다. 상상만으로도 몸이 가득 차올라 터져버릴 것 같다. 낮으로 밤으로 봉오리가 부풀어 오르고, 무심히 벚꽃은 떨어진다. 보고 싶다는 말을 문자로 찍어보내고, 미처 다 보내지 못한 백만 개의 말들을 반지하 하숙방에 차곡차곡 쌓아올린다. 말들이 밀집하여 굳으면 그리움이 된다. 그리움이 겹겹이 쌓이면 그것만으로도 어엿한 사랑이 된다. 그의 사랑은 혼자서 깊다. 그녀는 내 생각을 할까. 그는 항상 생각한다. 서서 생각하고 앉아서 생각한다. 그런 생각들이 높은 곳에 가 닿는 때가 가끔 있다. 그녀가 서울에 온다. 그녀의 학교가 여의도로 학생들을 보내 시위할 예정이다. 아직 벚꽃이 다 지지 않았다. 운이 좋다면 잠깐, 아주 잠깐 그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손이라도 쥐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몇 개의 밤이 더디게 지나간다. 무리 가운데서 그녀를 한 번에 찾아낼 수 있을거라 확신했지만, 그가 여의도에 도착하고도 꽤 긴 시간을 그들은 엇갈렸다. 그와 그녀는 무수한 사람 가운데 하나와 하나일 뿐이었다. 벚꽃이 한 장씩 홀로 떨어지는 것처럼. 그는 하얀 봄 속을 헤맨다. 마침내 마주섰을 때, 이미 그들에게 남겨진 시간이라곤 채 10분도 되지 않았다. 왈칵 눈물이 난다. 안녕, 안녕. 그 말만 주고받은 채 두 손 맞잡고 그대로 5분이었다. 밤 되면 쌀쌀해. 응. 너무 소리 지르지 마. 응. 빨리 찾아내지 못해서 미안. 아니야. 작은 비닐 봉지나 은박지 같은 것들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그 위로 가끔 벚꽃이 내려 앉았다. 그러면 10분이었다. 안녕, 안녕. 손도 놓지 못한 채 입으로만, 안녕, 안녕. 다시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본다. 자꾸 고개를 돌리는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팔을 크게 흔든다. 봄이 진하고 진해서, 그 동작은 마치 깊은 늪 속에서 팔을 젓는 것처럼 힘겹다.




2


그녀가 그에게 입술을 가르쳤다. 가슴을 가르치고 엉덩이를 가르쳤다. 그 모든 것이 가고 나도 한참을 안아줘야 한다고 가르쳤다. 속삭임을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배웠다. 한참을 이불을 덮은 채 돌아 누웠다가 부스스 그녀가 몸을 일으키면, 그들은 손을 잡고 거리로 나간다. 때론 아직 밝고, 때론 벌써 어둡다. 편의점에 들러 콜라 한 캔을 산다. 콜라가 두 입술을 오간다. 5분 전까지 서로를 직접 더듬던 입술이다. 거리를 채운 젊은이들은 흥청망청 흔들거리고 있고 그와 그녀도 젊은이다. 손을 맞잡은 두 젊은이가 뚜벅뚜벅 걷는다. 때론 봄이고, 때론 여름이다. 그녀의 집은 서울 밖이다. 지하철을 타고 큰 박물관이 보이는 데서 내린 다음, 그곳에서 다시 버스를 잡아타야 가는 곳이다. 자리가 나도 그들은 앉지 않는다. 문가에 서서 재잘대다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잠깐 입을 맞추기도 한다. 흥청망청 흔들거리고 있다. 젊음은 누구에게나 오고, 그래서 젊음을 통과한 그 누구도 그들을 손가락질하지 못하리라, 그는 그렇게 생각한다. 멀리 박물관이 보이고, 그의 집을 나오면서 잡은 두 손을 그들은 아직 한번도 놓지 않았다. 버스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맞아. 그러면 입을 맞춘다. 그럼 그냥 다시 돌아갈까? 그럴까? 그러면 다시 입을 맞춘다. 서서히 어둡고 여름이다. 늦게까지 매미는 울고 밤은 부옇게 망설이고 있다. 아직 버스는 오지 않는다. 우리 나중에 저기 살자.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이제 막 뼈대를 갖춘 키 높은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다. 우리 돈 많이 벌어야겠다. 정말 그래야겠다. 그러면 다시 입을 맞춘다. 이번에는 좀 길다. 버스가 도착하고, 머뭇머뭇 올라탄 그녀가 창가 자리에 앉아 손을 흔든다. 전화 해. 전화 할게. 버스 후미등이 저녁을 둘로 가른다. 꽁무니가 보이지 않을만큼 멀리 버스가 사라지면, 그제야 그 자리에 밤이 내린다.



3


그의 생일을 맞아, 그녀는 약간 무리해서 서울에 올라온다. 선물을 고르고, 케이크를 사고, 편지를 쓴다. 무얼 가장 좋아할까?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당연히 선물과 케이크와 편지를 들고 온 그녀다. 많이 걷지 않고, 이르게 숙소로 들어간다. 아직 오지 않은 밤을 벌써 끌어다 붙인다. 그들은 평화롭게 서로를 더듬고, 온몸을 뒤적거리며 그간의 안부를 확인한다. 모든 것이 나아지고 있어. 아직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해 미안해. 하지만 다 괜찮아질 거야. 같이 가니까 다 괜찮아질 거야. 서로가 가장 원하는 말이 무엇인지, 지금 가장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 저절로 알게 되기까지, 그들은 오래 만났고, 그래서 더 오래 만날 것이었다. 말은 아무것도 확실하게 해 주지 못한다는 세상의 파상공세 속에서도 말만으로, 그저 말만 가지고도 그 긴 시간을 빚어온 그들이었다. 오롯이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긴 믿음에 올라타 여기에 도착한 사람들이었다. 문서가 불필요한 사랑이었다. 큰 침대 위에 손 잡고 누운 한 쌍의 확신범이었다. 아침이 오면 그녀는 다시 대구로 내려간다. 어떻게 하면 아침을 죽여버릴 수 있을까, 그는 턱없는 고민 중이고, 그녀는 새근새근 잠을 잔다. 바람이나 욕심만으로 아침은 결국 살해되지 않았고 서울역은 만남과 이별로 왁자지껄하다. 두 사람은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를 나눠 먹고, 프레즐과 커피를 손에 들고 발차시간을 기다린다. 창가 자리야. 계속 손을 흔들 수 있겠군. 어쩐지 슬플 것 같지 않아? 뭐가 슬퍼.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니고. 그는 코웃음을 친다. 그러나 막상 그녀가 자리에 앉고, 플랫폼에 서서 차창 너머의 그녀를 보는 순간 그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그녀는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러나 그는 손을 흔들지 못한다. 곧 그녀도 손을 내린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반투명한 유리 한 장이 세상의 모든 장벽을 겹쳐놓은 것처럼 비통하다. 시선은 부질없다. 만져야 한다. 그는 전차 안으로 달려들어가 거칠게 입맞추는 상상을 한다. 그러나 눈물이 무거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도 이미 그녀의 눈물에 한없이 짓눌려 있다. 그들은 행복했다. 그러나 큰 슬픔은 언제나 행복의 한 가운데 있다. 그들은 기뻤으므로, 언제라도 울 준비가 되어 있는 두 마리 짐승이 되어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서로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오래 쳐다보고 있다.



            

마침내 시간이 몇 분밖에 남지 않았을 때 내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고, 아샤는 내가 울고 있는 걸 보았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말했다. "울지마. 안 그러면 나도 같이 울게 되니까. 나는 한번 울기 시작하면 너처럼 그렇게 빨리 그치지 못해." 우리는 힘껏 껴안았다. ...... 썰매에 올라타고 여기서 작별 인사를 하려다가 그녀에게 트베르스카야 거리 모퉁이까지 함께 타고 가자고 했다. 거기에서 그녀가 내렸고 이미 썰매가 출발하기 시작했을 때, 다시 한 번 대로변에 있던 그녀의 손을 내 입술에 대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서 있었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 역시 썰매에서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가 무섭게 곧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무릎 위에 큰 가방을 올려놓은 채 울면서 어두워져 가는 거리를 지나 역으로 향했다.

_ 발터 벤야민, 『모스크바 일기』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마침.

제임스 설터, 『가벼운 나날』에 수없는 밑줄을 그음.

존 치버, 『존 치버의 일기』를 꿋꿋이 읽어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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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2-02 1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좋다. 좋으네. 좋다요...
쇼님 오늘 감성 포텐 터졌네요. 팡팡 팡팡팡팡팡!!

syo 2018-02-02 15:20   좋아요 0 | URL
벤야민-설터-치버-좁아터진 고시원에게 이 영광을 돌립니다.

무슨 사람 울적하게 하는 버거-프렌치프라이-콜라-케찹 세트 같은 존재들이군요.

syo는 그저 한 장 냅킨일 뿐이구요. ㅎ

단발머리 2018-02-02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좁은 고시원에서도 이런 매력을 한껏 터뜨리는 syo님은 진정 누구인가요~~
누구신가요, syo님은~~~~^^

syo 2018-02-02 16:34   좋아요 0 | URL
고시생이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추억이나 들추며 소주대신 제로콜라 나발부는 망나니 고시생이요.....

단발머리 2018-02-02 16:39   좋아요 0 | URL
건전하다
이 고시생~~
소주 대신
제로 콜라~~

syo 2018-02-02 16:40   좋아요 0 | URL
못 마셔서 그런거지 마음만은 만취대취입니다! ㅎ

psyche 2018-02-03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너무 좋은데요!

syo 2018-02-03 08:34   좋아요 0 | URL
아 이런 너무 감사한데요!^ㅂ^~~ㅎㅎ

2018-02-12 1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12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가 사는 고시원 이 작은 방의 하나뿐인 창문은 욕실에 나 있다. 고시원을 전전하던 시절 syo가 들어가 살았던 방은 다들 침대 머리쪽에 창이 나서 밤에 누워 창문을 열면 좁게나마 밤하늘이 열렸었는데. 처음 이 방 문을 열어보았을 때, 창이 욕실을 통해 나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지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늘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땅만 내려다보며 허방 짚지 않고 한 발 한 발 디딜 자리를 찾기에도 바빴으므로. 어차피 하늘은 아무데도 가지 않고 거기 있을 거니까. 기다려줄 거니까. 나중에 늘어지게 한 번 올려다보면 되지 뭐. 하지만 한 달을 다 보내도 좀처럼 하늘을 올려다볼 일이 없는 방안에서의 삶을 살며 이제는 생각한다. 혹시 내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이제는 걱정한다. 잠깐 멈춰 하늘을 보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을, 어쩌면 하늘이 기다려주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고.


딱 한 뼘밖에 열리지 않고, 창틀의 꼭대기가 눈높이보다 낮은 곳에 있는 이 작은 창문은 보기 위해 있다기보다는 그저 있기 위해 있는 것 같다. 고시원에, 그리고 거기에 사는 어떤 인생에게 참 잘 맞는 창문이라고, 세수를 하며, 이를 닦으며,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그저 있기 위해 있는 삶. 어떤 구실도 하지 못하기에 어떤 구실도 갖다 붙이지 못한 사람. 설명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형용사가 겨우 '있다' 뿐인 사람. '있다'에서 다른 무엇을 거치지 않고 바로 '있었다'로 건너가는 옅은 사람. 저 창은 그런 사람을 위한 창이야. 저 좁은 하늘은 그런 사람에게 주어진만큼의 하늘이야. 하늘 보는 법을 잊은 사람들에게서 달아나느라 조금씩 작아지는 하늘의 먼 뒷모습이야.


좀처럼 만나보기 어려운 달이 뜬다는 소식을 듣고, 치약을 짜면서 창 밖을 훑다가 그 달과 눈이 마주쳤다. 내게 주어진 이 작은 하늘 안에 참 낯선 달이 떴다는 사실. 그건 아마도 몇 겹의 우연과 행운이 엉켜 이루어진 만남일 것이다. 창이 난 방향과 달이 뜬 방향이 만났다. 하늘이 그 만남에 구름을 보태지 않았다. 그 모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누군가 골방 안의 syo에게 알려왔다. 혼자 있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은 누군가가 있었던 것이다. 창이 낮고 달은 높아서, syo는 칫솔을 문 채로 욕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고개를 한껏 쳐들고 하늘을 오래 올려다보았다. 좁은 구멍을 통해 달이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낱낱이 훔쳐보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달과 달의 주변을 끈기있게 매만졌다. 달의 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 그만 만져. 양치나 해. 


두 시간 가까이 양치질하며, 잊어버린 하늘 보는 법을 차근차근 다시 배우고 있었다.  




어두운 시간이 찾아오면 당신을 구원하는 데 재산은 쓸모가 없다. 오랫동안 다녔던 스키장이나 시냇물에 이르는 오솔길도 마찬가지다. 그보다 더 위대한 무엇을 당신은 반드시 찾아내야만 한다.

_ 존 치버, 『존 치버의 일기』


성장한다는 것은 오직 보편성과 유사성, 존재의 유형에만 민감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숲, 산, 평야..... 그리고 자기 집 주변의 모든 것은 똑같아진다. 어른에게 산책길은 똑같이 광할한 풍경 속에 포함된다. 어른은 그가 살아온 햇수의 높이에서 모든 것을 본다. 경험의 전망이 모든 것을 평평하게 하고 압축하고 무미건조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다 똑같다.

_ 프레데리크 그로,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살아왔던 길을 모두 폐지하고 널따랗게 새로 뚫린, 뚫렸다기보다 침범해 들어온 큰길을 향해 우리를 너나없이 달려가게 하는 이 욕망은 실상 비어 있는 욕망이지만, 그 비어 있음을 가리기 위해서는 또 다른 욕망이 필요했다. 욕망이 욕망을 몰고 온다. 달려가는 사람들 속에서 잠시 비켜섰을 때에야, 또는 더 이상 그 발걸음을 따라길 수 없을 때에야, 문득 사람들은 뿌리도 없이 유령들과 싸우고 있는 제 처지를 곰곰이 생각한다.

_ 황현산, 『우물에서 하늘 보기』


난 달을 사랑해서 울어요, 그 사람이 말했다. 어렸을 때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었을 때 단 한 번 봤어요, 하지만 이 궁전에 갇혀 있어 달에 닿을 수가 없어요, 밤중에 풀밭에 드러누워 달빛에 입을 맞추기만 해도 좋을 거예요, 하지만 이 궁전에 갇혀 있어요, 어릴 때부터 이 궁전에 갇혀 있어요. 그리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_ 안토니오 타부키, 『꿈의 꿈』





윤성근, 『나는 이렇게 읽습니다』 마침.

고병권, 『철학자와 하녀』마침.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반환점.

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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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 2018-02-01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 창으로 넘치게 해가 들어오는 집으로
이사를

syo님도
나님도
가십시다.

6개월을 잘 보내야 하겠습니다. (묵념).

syo 2018-02-01 12:42   좋아요 0 | URL
그렇겠습니다......6개월 참 짧으면서 길면서....

페크(pek0501) 2018-02-01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치버의 일기』가 맘에 끌리네요. 그런데 9백 쪽이 넘다니...
끌리면서도 이 부담스러움!!! 때문에 고민에 들어갑니다.

달.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syo 2018-02-01 12:43   좋아요 0 | URL
저도 하루에 90페이지씩 10일에 돌파하자 해놓고 여직 100쪽 읽고 해메고 있습니다...... 좋다가 졸다가 막 그렇습니다.

cyrus 2018-02-01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에는 달이 잘 보였다고 하더군요. 반면에 남부 지역은 기상 여건이 좋지 않아서 달을 제대로 보기 힘들었어요. 저는 그럴 줄 알고 달 보러 밖에 나가지 않았어요. ㅎㅎㅎ

syo 2018-02-01 15:32   좋아요 0 | URL
잘 보여서 오래 봤습니다.
다음번에 만나려면 십 년 단위로 기다려야된다더군요.

비로그인 2018-02-02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있다’에서 다른 무엇을 거치지 않고 바로 ‘있었다’로 건너가는 옅은 사람.
이 구절이 마음 깊은 곳을 훅, 치네요. 밑줄 그어 봅니다...
그 앞과 뒤에 있는 문장들에도 조금씩.

syo 2018-02-02 07:59   좋아요 0 | URL
아니, syo의 문장에 밑줄씩이나요.....
슬프고 우울한 구절에 전혀 공감하지 않는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도 좋다면 좋겠지만, 그건 참 어려운 일이려나요.

아무튼, idahofish님 반갑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빨래를 하고, 옥상에 내려 앉은 눈 위를 삽작삽작 걸어보았다. 여전히 눈이 좋은 걸 보면 syo는 아직 애든가 개든가 그런가 봉가. 눈 내리는 신림 사거리의 밤은 적당히 분주하고 적당히 촉촉하여 내려다보기 참 좋았다. 오래 내려다보기에는 좀 추웠다. 네이버는 영하 1도라는데, 피부는 그 사실을 격렬하게 부인하고 있었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겨울이 혹독한 곳에서 두 번의 겨울을 온전히 보내고 돌아왔을 때, 늘어있는 거라곤 허세 뿐이었다. 영하 10도? 러닝 바람으로 구보하기 좋은 날씨지. 영하 20도? 슬슬 내복을 준비해도 좋겠어. 지금 생각해도 열라 웃기지만, 실제로 수은주가 영하 35를 찍는 모습을 육안으로 목격한 사람이라면 저 정도 패기는 보여줘야 할 것 같았어. 안녕, 나는 syo. 추위를 모르는 남자지. 사실은 영하로 내려가는 순간 1도건 10도건 100도건 무조건 춥다. 그리고 나이는 먹으면 먹을수록 더 춥다. 이젠 피부가 추운 게 아니라 뼈 안이 추워. 추운 게 아니라 시려 막......


카톡을 보냈다. 자기야 서울에 눈 온다 펑펑 온다. 답이 왔다. 오래 나와 있지 말고 얼른 들어가 춥다. 실은 온몸을 달달 떠는 중이었지만 아닌 척 답했다. 흥, 나는 추위를 느끼지 않지. 그러나 실제로 찍힌 문장은 이랬다. "흐ㅜㅌ 나능 트뤼를늑기지 ㅇ랂지"


그래서, 안녕하세요. 트뤼를늑기지 ㅇ랂는 남자, syo올습니다.



2018 1월 : 22권



1. 집안의 노동자

: 탄탄한 자료를 가지고 단지 몇 개의 명제만 힘있게 증명하는 책. 그것들이 뭔지는 안 알려드리지롱요. 그렇게 털어 먹는 거 아니예요. 전반적으로 <캘리번과 마녀>로 가기 위한 준비운동 같은 느낌이다.


2. 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
: 300쪽 되는 얇은(?) 책에 굵직굵직한 문학이론가들의 정수를 녹여넣어야 했으니 저자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만한 분량의 책으로 얻을 수 있는 최대치를 달성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이 제공하는 참고도서 목록이 또 독서 리스트에 추가되면서 이제는 이 놈들을 다 읽으려면 인생이 적어도 7개쯤은 있어야 되지 않나 싶은 상황이다.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자주 한다, 그 봉착.

3.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양자역학 지식 50
: 이걸로 양자역학을 다시 시작해보려는 생각은 역시 욕심이었다. 쉽고 간결하긴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은 것 같다. 양자역학이 입고 있는 신비의 옷이 조금도 벗겨지지 않았다.

4. 담론의 질서
: 솔직히 푸코가 쓴 건 진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이정우 선생님의 해설과 푸코 사상 전반에 대한 세심한 설명이 하드캐리했다.



5. 미술사 아는 척하기
: 아는 척하기 책을 읽으면 얼른 아는 척하고 싶어지지만 꾹 참고 여러 권 읽고 나면 알고 싶어진다.

6.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
: 하나도 신비하게 살지 않았지만 알면 알수록 신비한 남자 벤야민. 아리까리한 그림자를 잡힐 듯 말 듯 던져주고는 휙 돌아앉는 콧대높은 남자 벤야민. 반드시 뭔가 생각하게 하고 느끼게 하는 깊이 있는 남자 벤야민. 생전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지만 그에게 배웠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이 강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그런 남자 벤야민.

7. 나의 첫 젠더 수업
: `첫 수업`은 이미 수료한 상태라는 걸 확인했다. 훗.

8. 공부 중독
: 아, 요즘 사는 게 전체적으로 왜 이렇게 재미가 없어졌나 했더니. 아무것도 될 수 없는 공부를 하면서도 마냥 즐거웠던 그때를 다시 한 번.



9. 당신의 직업이 사라진다
: 이것 저것 다양한 분야의 재미난 일화들을 섞어 꽤 괜찮은 읽을 거리를 만들었으나, 역시 딱히 이거다 할 만한 통찰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10. 일자리가 사라진 세계
: 조목조목 불안한 전망을 제시하는데,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부분은 "대안"이라고 이름 붙은 챕터 안에 대안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대학을 개편하여 일자리가 사라진 사람들을 재빨리 교육시켜 다른 일자리에 투입할 수 있도록 만들자고 주장하면서, 과연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그 "다른 일자리"가 뭔지를 제시하지 못한다. 뭔줄 알아야 준비를 하지. 주술호응이 맞지 않는 문장도 꽤 있다.

11.현남 오빠에게
: 눈 녹은 물이 얼어붙은 언덕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길을 다 녹이는 일이 내 맡은 바가 되지 못하더라도, 언덕의 허리께에, 가장 미끄러운 자리에 단단히 서서, 넘어진 이들에게 내밀 따뜻한 손이 되어 기다려야겠다고.

12. 시옷의 세계
: 김소연은 손보다 눈일까. 산문이 손에 꼽을만큼 걸출한 시인은 아니지만, 그 다정하고도 깊은 그의 눈길만큼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13. 영화로 읽는 정신분석
: 사실 내 깜냥에 뭘 믿고 안 믿고를 따지겠느냐만은, 김서영 선생님은 역시 정신분석 분야의 믿을필더. 

14. 수학으로 배우는 파동의 법칙
: 그냥 디립다 외우기만 했었던 푸리에 수식 일당들의 정체가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분명히 학교 다닐 때 다 배우고 시험도 보고 했던 자식들인데 모르는 사이처럼 서먹서먹하다. 이 책으로 좀 친해진듯.

15. 꽈배기의 멋
16. 꽈배기의 맛
: 너 이 자식, 네가 그렇게 웃기다는 소문인데, 과연 그런지 어디 한 번 웃겨 봐 하는 태도로 눈을 가늘게 뜨고 보기 시작하면 웃기기도 어렵고 웃기도 어렵다. <베를린 일기>만큼 빵빵 터지지는 않았지만, 3할은 무난히 친다.



17. 마르케스의 서재에서
: 좋다. 좋은데 좀 현란하다. 현란한데 간혹 아름답고, 아름다운데 때로 졸린다. 졸다보니 오래 읽었고, 오래 읽다보니 가물가물하다. 

18.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 점을 이어붙이고 묻는다. 왜 잇지 못할거라 생각했나요? 잇고 나면 이렇게 두 개의 점이 아닌 하나의 선일 뿐인데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조금 더 넓은 눈으로 글을 쓸 수 있다.

19. 난 네 편이야
: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한 사람이 내 편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 또한 너무 든든한 일이다.

20. 정치는 뉴스가 아니라 삶이다
: 애들 읽히고 싶다. 읽힐 책은 있는데 애들이 없다. 그건 좋은 거 아닌가? 만세!?


21. 모스크바 일기
: 눈. 작은 것을 만나면 놓치지 않는 수준을 뛰어넘어 작은 것 안에서 기어코 큰 것, 많은 것을 읽어내는 벤야민의 눈.


22. 역사 고전 강의

: 이것은 역사 고전에 대한 강의기도 하지만 사실은 엄정하고 폭넓게 읽는 법에 대한 강의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좋은 책이 되기 위해서는 책 자체의 함량만큼이나 읽는 이의 함량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강유원 선생님께 배우고 싶은 것은 사실 잘 읽는 법 쪽이다.




22권이면 선방일까? 작년 기준 한 달치의 1/3~1/4 수준이다. 내 입장에 이것도 많은 것 아닐까. 이러다 망하는 거 아닐까. 아닐까? 으아아아아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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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1-31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예요. 책 안읽고 공부만 할것처럼 그러더니, 공부는 안하고 책만 읽은 거 아닙니까!!!!!!!!!!!!

syo 2018-01-31 11:51   좋아요 0 | URL
그런 거 같습니다!!!!!! 으아아아아안돼

단발머리 2018-01-31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안의 노동자>와 <캘리번과 마녀>를 함께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가까이 있어서 참 좋네요.
전, <캘리번과 마녀>를 먼저 읽었는데, 이제 <집안의 노동자> 읽으면 되겠죠? ㅎㅎㅎㅎㅎㅎㅎ

공부는 살살 하세요~~~^^


syo 2018-01-31 14:06   좋아요 0 | URL
2월에는 꼭 캘리번과 마녀 읽는 게 목표입니다!!

아 소박하다ㅎ

2018-01-31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31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졔졔 2018-01-3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뼈가 시립니다...ㅠㅠ 건강조심하세요. 연말부터 독서가 주춤했는데, syo님 만큼은 아니지만 분발해서 좀 읽어야겠습니다. <집안의 노동자> <공부중독> 읽고싶네용ㅎ

syo 2018-01-31 16:43   좋아요 0 | URL
시린 뼈를 부여잡고 분발합시다!! 저는 공부를 하고 최졔님은 독서를 하시고......ㅎㅎ

책읽는나무 2018-01-31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엄지 척!!!👍👍
요런 이모티콘 처음 사용했어요!
넘 멋져서요^^

syo 2018-01-31 19:57   좋아요 0 | URL
가....갑자기요? ㅎㅎㅎㅎ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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