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일야 夢一夜

 

 

1 


빛 속에 빛나는 것이 없는 줄 모르고 빛을 헤집다 끝내 빛을 망쳐놓는 손. 그 쓸쓸한 손을 오래 달고 사느라 사는 게 퍽 쓸쓸할 때가 많았다.


존재한다는 것은 목이 마르지 않아도 마시는 것

아니 에르노세월 

 

 


2

 

새벽에는 꿈을 꾸었는데 오랜만에 그 사람이 나왔다. 하세월 만나지 못하고도 그의 얼굴을 잊지 않는 이유가 이렇다. 꿈 안에서,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던 그 시절처럼 그 사람을 사랑했다. 끝단과 끝단이 맞게 잘 개어놓은 수건처럼 우리의 시간도 끝과 끝이 접붙어 있었다. 개켜진 시간이 사랑을 침범하지 않았으므로,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고였다. 잘 지냈어? 어젯밤 같은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나는 잘 지내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 지냈든 그렇지 못했든 잘 지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만큼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만난 곳은 내가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남쪽 큰 바다 어느 이국의 작은 섬이었다. 물었다. 여기에 어떻게 왔어? 대답했다. 너 만나러 온 거지. 대답했다. 난 여기가 처음인데. 대답했다. 나 만나러 온 거지. 그는 나를 만나러 아직 내가 없는 이 섬에 도착했고, 내가 이 섬에 도착하기 전부터 나는 이 섬에서 그를 기다렸다고. 이 말도 안 되는 시간의 실뭉치는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우리의 사랑을 옮겨 심은 흔적인지도 몰라. 모든 사랑은 어느 정도 미쳐 있게 마련이지만 내 사랑은 유독 더 많이 미쳤으므로 기어이 이 미친 섬나라를 만든 것인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그 사람이 나를 만졌다. 나는 힘없이 붉어졌다. 봄인지 가을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속눈썹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는 부지런히 나를 만졌다. 이 섬이 봄인지 가을인지 어떻게 알 수 있어? 나는 물었다. 속눈썹이 대답했다. 노을을 봐야 해. 노을을 오래 보고 있으면, 노을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그리고 끝난 노을이 어둠을 밀고 우주를 한 바퀴 돌아 다시 도착할 때까지, 이 파도에 몸을 적시며 가만히 앉아 오래 보고 있는 거지. 그러면 알 수 있어. 언젠간 알 수 있어. 너는 노을을 잘 아는구나. 나는 놀랐다. 그가 웃었다. 나는 오래 보았거든. 여기서, 네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네가 나를 기다리기를 기다리면서, 매일 매일, 너보다 먼저 시작해서 너보다 늦게까지, 나는 참 많은 노을을 보고 있었거든. 나는 조금 울었다. 그리고 묻지 못했다. 왜 네가 나보다 먼저 노을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나는 너만 바라보고 있었을까. 왜 나는 너를 바라보느라 우리가 봄인지 가을인지도 알지 못했던 걸까. 어째서 너는 나보다 먼저 노을을 볼 줄 알게 되었을까. 그게 내 탓일까, 네 탓일까. 그가 다시 나를 만져주기 시작했다. 나는 그 손을 무엇보다 좋아했었는데, 그 손을 좋아하던 그 시절처럼 그 손이 좋았다. 동시에 그 시절의 끝처럼 슬펐다. 그때쯤 이 모든 게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다. 눈을 떴는데 여전히 새벽이었다. 두 시간도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그를 다시 만나는 데, 게다가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고작 두 시간이었다. 이제 다시는 그 사람 꿈을 꾸지 않겠구나, 생각하며 다시 잠이 들었다.

 


억새는 바람의 풀이다억새가 가진 것은 저 자신 하나와 바람뿐이다그래서 억새꽃은 꽃이 아니라 꽃의 혼백처럼 보인다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이 혼백 안에 가을빛이 모여서 반짝거린다작은 꽃씨 하나하나가 가을빛을 품고 있다가을 억새는 날마다 말라가면서 이 꽃씨들을 바람에 맡긴다꽃씨들이 모두 흩어지면 억새는 땅에 쓰러지고가을은 다 간 것이다.

김훈연필로 쓰기

 

  오크우드 애비뉴에서 모퉁이를 돌면서 나는 충동적으로 조지 오빠의 손을 잡아버렸다곧바로내 손을 꽉 잡는손가락들태양진분홍 무더기를 이루며 창문위로 드리워진 더욱 탐스러운 부겐빌레아 넝쿨그의 따뜻한 손바닥인도에 웅크리고 앉은 오렌지색 줄무늬고양이낡은 검은색 티셔츠 차림으로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활짝 열리는도시.

  우리는 인도에 도착했고손을 놓았다얼마나 바랐던가바로 그때온 세상이 건널목이기를.

에이미 벤더레몬 케이크의 특별한 슬픔

 


 

3

 

당신을 기다리는 일은 긴 기다림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일이다.

 


오래 바라보아도 다른 것이 되지 않는 식탁 위에서

제철 음식들이 놓쳐버린 계절

지금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았다

 

문은 계속 바라보아도 문이다

여기까지는 내가 말할 수 있는 슬픔이다

유계영횡단」 부분 

 


 

--- 읽은 ---

+ 헤겔 / 피터 싱어 : 78 ~ 200

+ 아무튼 식물 / 임이랑 : 7 ~ 146

 버지니아 울프 북클럽 이택광 : 131 ~ 263

 


--- 읽는 ---

- 철학의 슬픔 / 문성원 : 5 ~ 94

- 정신현상학 / 헤겔, 김은주 : 5 ~ 40

- 세월 / 아니 에르노 : 7 ~ 39

- 연필로 쓰기 / 김훈 : 5 ~ 66

-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 이승우 : 7 ~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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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2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2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16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16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실은 월초에 멘탈이 바스라지는 사건이 있었다. 그런 종류의 아픔은 보통 로 잊는다는 것이 중론이라, 공부에 몰입하여 힘들 시간도 없이 살아 보겠노라 다짐했지만 공부 그걸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론, 공부는 내 이 아니었던 걸로..... 그렇다면 슬픔을 잊게 해준다는 나의 은 도대체 무엇인가. 도리어 지난달보다 66.67% 증가한 독서량은 syo의 업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201905 : 40


 


1. 저급한 술과 상류사회 / 루스 볼 지음 / 김승욱 옮김 / 루아크 / 2019

: 이런 것을 미시사라고 하는 게 맞죠?

: 미시사를 읽다 보면 사람이 미시해지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굉장히 바람직한 일이다. 이 따위로 서른을 넘긴 시점에서 난 이미 거시적인 인간이 되기는 글렀다. 그렇지만 미시라면 아직 승부를 벌여볼 만하지. 이 책에서는 런던의 여관 주인, 마차로 편지를 실어 나르는 사람, 하다못해 저급한 술을 만들어 크게 한 몫 건져보려는 불한당 같은 인간들까지 당당히 역사로 자리매김하고 있거든. syo라고 못할 것이 없다. 역사적인 거물이 되겠다고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먹고 싶을 때 치킨 먹고 마시고 싶을 때 콜라 마시며 뚱땅뚱땅 살아도,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일이 주어지지 않으면 주어질 때까지 좀 쉬기도 하면서 그렇게 지내다 보면 나도 역사가 될 수 있겠구나 싶다. 만국의 미시인들이여 단결하자.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역사가 아니라 역사가다.

 

2. 마취의 시대 / 로랑 드 쉬테르 지음 / 김성희 옮김 / 루아크 / 2019

: 시대를 잘못 만나 흔해지고 흔해지다 이제는 거의 닳고 말았구나 싶기까지 한 열정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저자가 골랐더라면 이 책은 그저 그런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되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대신 흥분이라는 용어를 (올바르게) 채택한 데에 이 책의 존재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우리를 통제하는 외부의 힘은 우리의 열정을 꺾는 것이 아니라 흥분을 꺾는 방식으로 동작할 때가 많다. 이념이나 도덕을 휘둘러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마취제, 마약, 피임약, 그리고 그것들의 뒤에서 모든 것을 지휘 통제하는 자본주의가 우리의 육체와 정신을 호르몬으로 직접 타격하여 흥분을 삭제하는 것이다. 우리를 존재가치가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놓기 위해서. 새로 밝혀진 그 최신형 적군을 저자는 나르코자본주의라고 부른다.

 

3. 피로사회 / 한병철 지음 /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

: 역설적으로, 이 책이 외치는 여러 주장 가운데 골자라 할 수 있는 성과주체에 관한 개념이야말로 이 책을 굳이 읽을 필요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왜냐면 우리 사는 이곳이 바로 대한민국이거든.

: 그런데 피로사회가 피로(‘탈진의 피로’)의 사회인 줄은 다들 아시겠지만 그 피로사회를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또 다른 피로(‘무위의 피로’)라고 저자가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시는지요? ‘성과주체에 대한 설명은 선명하고 힘이 있는데, 해결책으로 내놓은 무위의 피로를 설명하는 대목이 되면 어쩐지 횡설수설 변죽변죽 겉핥겉핥 느낌을 받는데, 읽어보신 다른 분들은 어떠신지요? ‘무위의 피로가 와 닿으시는지요.....

 


  

4.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한나 아렌트 지음 /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

: 주술호응이 맞지 않는 문장이나 오타 같은 것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현재는 품절이지만 최근 한나 아렌트의 정치사상 세트(3)가 깔끔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출간된 것으로 아는데, 좀 손을 봤을까?

: 번역의 문제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김선욱 선생님이 구사해놓은 한국어 문장이 취미형독자에게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쓰는 쪽에서 반드시 쉬운 문장을 구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읽는 쪽에서도 굳이 기를 쓰고 어려운 문장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또 아니다.

 

5.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김선욱 옮김 한길사 / 2018

수학을 배우는 고등학생의 제일 큰 궁금증이 졸업하면 이걸 얻다 써계산기 쓰지듯이철학책을 읽는 독자의 제일 큰 고뇌는 당최 이걸 읽어서 잘난 척 하는데 빼고 어디 쓰지?’철학자가 배려 없이 쓴 어려운 책을 소화 가능한 크기로 분해하여 일반 독자들에게 뿌려주는 축복과도 같은 책들이 세상에는 많지만그런 책들이 다 그래서 이건 여기 씁니다를 가르쳐주는 것은 또 아니다근데 이 책은 그걸 한다이 책은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알기 쉽게 일러주는 책은 아니다그렇지만 얻다 쓰는지는 확실히 알려준다그러니까 우리는 이 책을 읽기 전에 한나 아렌트에 대해 조금은 알고 오는 게 좋다많이도 필요 없다조금이면 됩니다.

: 그리고 이 책이 김선욱 선생님의 번역 역량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아이히만 쟤는 대체 왜 그런 걸까?




6.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다 / 양자오 지음 / 조필 옮김 / 유유 / 2018

: 양자오 선생님의 책의 강의 책을 여러 권 읽었는데, 이 시리즈의 책은 단순한 요약정리가 아니라 저자의 관점이 꽤 많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고, 책을 많이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환영할 이야기이기도 하다. 관점은 늘 소중하다. 그런데 입문서를 찾아 도서관과 서점을 어슬렁거리는 새끼 북하이에나들에게는, 양자오 선생님의 책 딱 한 권을 읽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이 하고 싶다. 틀렸다는 게 아니라 달라서. 내 옷장에 옷이 이미 많다면 이다음에 살 옷은 남들과 다른 옷일수록 좋다. 하지만 내 옷장에 처음 들여놓는 옷은 남들과 너무 많이 다르지 않은 무난한 옷이 좋을 수 있다. 첫 정장은 검정. 장례식도 결혼식도 다 커버 가능한 검정이 좋다고 한다.

 

7. 개헌과 선거제도 개혁에 관한 모든 것 / 백성진, 김예찬 지음 / 루아크 / 2018

: 특출난 뭔가가 있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준수한 수준이었다. 근데 저자들이 나보다 어려. 잘하면 형인데, 아 자꾸 형이 생기네.

  

8. 중국 사상사 / 모리 미키사부로 지음 / 조병한 옮김 / 서커스 / 2018

: 사실은 중국정치사상사를 읽고 싶었던 것이다. 근데 걘 15만원에 4000페이지야. 그렇다면 한 입에 삼키기는 어렵고, 뭔가 적당한 크기로 잘라놓은 녀석이 필요한데, 하던 찰나에 이 책이 걸려들었다. 그러니까 얘는 애초에 애피타이저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까 뜻밖에 배가 든든해져서 한동안 4000페이지짜리 거대한 식탁은 안 받아도 될 것 같다. syo의 위장으로 소화하기에는 딱 이 정도가 좋은 듯(타협). 중요한 건 입에 넣는 게 아니라 소화하는 거니까(정신승리). 4000 저거 분명 비싼 돈 들여 차려놓고 다 먹지도 못했을 거야(신포도 전략).



 

9. 파리의 생활 좌파들 / 목수정 지음 / 생각정원 / 2015

: ‘좌파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도덕적 가치 채점이 편향된 희한한 나라에서 이 낙인과도 같은 단어를 살리기 위해 갖은 방식으로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다. 목수정 선생님은 항상 그 전열의 선두에 선다. ‘좌파라는 단어의 외연이 한껏 넓어지고, 나는 과연 이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쯤에 서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담금질하기에 좋다.

: 이론적 좌파가 되는 일도 쉽지는 않겠으나 어렵대봤자 어려운 책 몇 권 읽어낼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을 갖추는 것이 어려운 만큼만 어렵다. 하지만 생활좌파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책 속의 여러 생활좌파들은 그야말로 자신의 생활에 침입해오는 다종다양한 형태의 압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는 독창적인 방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생활좌파가 되었다. 요컨대, 생활좌파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세 가지 정도인 것 같다. 첫째, 생활의 시련. 둘째, 남들도 다 겪는 일이라 자위하며 참고 뭉개지 않고 시련을 시련으로 볼 줄 아는 예민한 눈. 셋째, 그 시련을 넘어설 수 있는 자기만의 기술을 고안하려는 부단한 고민과 노력. , 키보드 빨갱이로 사는 것은 쉽고도 달콤한 길이지만, 생활 좌파가 되는 것은 이리도 어렵구나.

 

10. 버지니아 울프 북클럽 / 이택광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

: 이택광 선생님의 성함이 자꾸 이광택으로 읽히던 시절이 있었다. 광택이 너무 나서 그랬던 것 같다. 말장난이 아니라 정말, 나는 이택광 선생님의 글이 좋았다.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쉬우면 쉬운 대로. 에이, 아무리 선생님이시지만 이건 좀 어거지 아닌가, 싶을 때조차 syo는 마냥 웃고 있었다! 그런 역사가 있는 작가의 책이라, 마음 내키는 대로 평을 쓰자면 오히려 불공정할 것 같아서 한 줄로 줄이려 한다.

: syo는 지금 솔 출판사에서 새로 출간되고 있는 버지니아 울프의 전집을 모으기 시작했다.

 


 

 

11.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 김진아 지음 / 바다출판사 / 2019

: 페미니즘 이론서는 읽고 나면 어쩐지 뿌듯해지고, 페미니즘 에세이는 읽고 나면 어쩐지 부끄럽거나 미안해진다. 이런 책과 저런 책들을 통해 내가 조금이라도 바뀌어왔다면, 분명히 뒤의 책들이 만든 각도가 더 컸을 것이다.

 

12. 감염된 독서 / 최영화 지음 / 글항아리 / 2018

: 조금은 더 센 목소리를 내셔도 될 것을, 조금쯤 더 거들먹거려도 누구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것을, 기필코 단정보다 다정을 따라가는 글길. 부드러운 강함인가 강한 부드러움인가. 모자라고 욕심만 많은 독자는 자꾸 그 글길에서 빗나가기만 한다.

 

13.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정약용 지음 / 박석무 엮음 / 창비 / 2009

: 아니, 이 책을 군대에서 훔쳐왔더라고요...... 제일 구석진 곳에 놓아둔 박스에서 찾아냈는데, 겉표지 넘기면 국방부가 장병들에게 드려요- 떡하니 쓰여 있다 보니 팔지도 못하고 굿바이 스페셜로 정독하고 스무 군데 정도 필사한 다음 내다버렸다. 이번 생은 얄짤 없이 망했구나 싶을 때, 특히 이 나이 먹고 기껏 된 것이 백수라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싶을 때, 그럴 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구절들이 굉장히 많았다. 일단 나는 유배를 당한 것도 아니고, 과거시험을 못 보게 된 것도 아니잖아. 그래, 힘내 보자! 할 수 있어! 그렇게 탈백수하고 승승장구하기 위해 이 책을 당당히 내버린 것이다(?)



 

14. 청춘의 문장들+ / 김연수 지음 / 금정연 대담 / 마음산책 / 2014

: 젊어서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면 되고 싶었다기보다 될 수 있겠거니 했다. . 알아요, 알아. 그치만 그땐 젊었잖아. 원래 젊은이들이란 미친놈과 비슷한 데가 있잖아요. 미친놈 잡는 데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옛말이 있었다. 미친 개였나? 어차피 좋은 말은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고, 하여튼 syo의 미친 작가병을 고쳐준 몽둥이가 두 개 있었는데, 바로 시몽둥이의 문태준, 소설몽둥이의 김연수였다. , 정말 대단해요. 오래 묵은 작가병이 정말 씻은 듯이 나았다니까요! syo는 두 사람을 정말 많이 사랑했고, 또 정말 많이 미워했다. 둘이 동네 친구였는지 고등학교 동창이었는지 뭐 그랬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두 사람의 유년 추억이 넘실거리는 경북 김천 쪽은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제일 싫어 김천, 지지 않아 논산.

: 내게서 소설가의 꿈을 앗아간 김연수 선생님이 제발 천재였기를 바랬지만, 이 책에서 본인은 그 사실을 극구 부인한다. 더 얄미웠다. 김천을 용서할 날은 점점 더 멀어져간다.

 

15. 우리가 보낸 순간 : 소설 /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10

: 그런데 와 여러분, 제게서 소설가를 앗아간 김도둑님이, 그걸로는 모자랐는지 이제 독서가도 강탈하려 해요! 도와주세요! 누구 이 책을 읽으신(읽으실) 분들, 제발 이 양반이 범재인 척 하지만 실은 천재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세요. 살려주세요!



 

 

16. 도시를 보다 / 앤 미코라이트, 모리츠 퓌르크하우어 지음 / 서동춘 옮김 / 안그라픽스 / 2012

: 읽고 나면 도시를 걷는 동안 눈에 들어오는 많은 것들이 달라 보인다. 의미가 있고, 연관이 있고, 의미와 연관이 모두 도시라는 신묘한 덩어리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 도시에는 뭔가 있는 것 같다. 이제부터 그걸 좀 찾아볼 생각인데, 첫 발을 이 책으로 뗀 것은 행운이었다.

 

17. 도시인문학 강의 : 서울의 재발견 / 승효상 외 지음 / 페이퍼스토리 / 2015

: 우리에겐 여러 개의 강연이 묶인 책이지만, 저자들에게는 각자 단 한 번뿐인 강연이었으므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syo는 도시와 인간의 상관관계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상태로 읽었는데, 아무래도 좀 교양을 쌓고 돌아오면 더 많은 걸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강연이란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과 너무 많이 아는 사람의 딱 중간 지점에 있는 이들에게 제일 효용이 큰 법이니까.



 

18.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 박이소 옮김 / 현실문화 / 2011

: 이것은 미술책이 아니다. 미술이 아니라, 미술을 미술이게 하거나 미술이 아니게 하는 힘과 권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정치책인가? 이것은 정치책이 아니다. 정치는 생활이지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냥 책인가? 이것은 그냥 책이 아니다. 어마어마하게 좋은 책이기 때문이다......

 

19. 산수의 감각 / 조지 셰프너 지음 / 김수경 옮김 / 바다출판사 / 2018

: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후반에는 집중력이 떨어졌다. 왜일까. 저자는 간결하면서도 충분히 재미있는 문장을 구사한다. 그렇지만 후번에는 어쩐지 질렸다. 왜일까. 그야말로 산수를 통해 굉장히 많은 인생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는데, 후반에는 어쩐지 그것들이 별로 소중해 보이지 않았다. 왜일까. 정말 저도 몰라서 묻는 거랍니다..... , 분명 처음에는 정말 재미있고 동시에 유익하여 널리 널리 추천해야겠다는 마음이 막 샘솟았는데!

 


 

20. 화재의 색 /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9

: 이 책은 프랑스사람, 혹은 프랑스와 역사가 맞닿아 있는 유럽 사람들이 읽었을 땐 과연 장난 아니었을 것 같다. 배경이 되는 시대의 실제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사건들을 소설에 녹여 넣어 일종의 역사-소설, 혹은 소설-역사 같은 것을 만든 듯한데, 그걸 모르는 평범한 한국인에겐 매력 떡락.....

: 다른 소설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섹스 잘하는 남자가 나오는데, 여전히 이런 인간들이 부럽긴 해도 점차 그 강도가 약해지는 걸 보니 나도 늙긴 늙는구나 싶다. TMI 죄송합니다.

 

21. 뱀이 깨어나는 마을 / 샤론 볼턴 지음 / 김진석 옮김 / 엘릭시르 / 2015

: 이 장르를 잘 몰라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두 줄기로 흘러가는 이야기의 클라이막스를 엇갈리게 배치하는 데서 노련함이 엿보인다. 독자는 사건의 진상과 사람의 진상을 차츰차츰 알게 되는데, 뜻밖에 사건의 범인이 누군지보다는 범인이랄 게 없는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쪽이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앞의 책보다는 이 책이다.



 

22. 설국 /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

: 아름다움을 그린 소설이고 소설로 그린 아름다움이다.

: 세 번째 읽었다. ‘앞에 서른이 들어갈 때까지는 읽을 것 같다.

 

23. 보트 하우스 / 장정일 지음 / 김영사 / 2005

: 장정일 하면 뭔가 파격과 파란의 대명사 같잖아? 그런데 막상 이 책을 읽어보면 꽤 정통적인 소설이라는 느낌이 든다. 상징물이 상징하는 바가 정직하여 교과서적인 방법으로 해독해도 맞아 들어가는 데가 많다고 할지. 사실 이 작품이 처음 나온 게 언젠지를 생각해보면, 지금쯤 이렇게 (형식적으로) 무난해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syo는 차라리 정지돈이 훨씬 어렵고 무섭다.....

 


 

24. 세상을 바꾼 씨앗 / 장인용 지음 / 다른 / 2017

: 우리 엄마는 식물을 좋아하는데 책을 싫어한다. 그렇다면 식물에 대한 책은 어떨까?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 어른들보다는 아이들, 정확히는 고등학생쯤을 겨냥한 책으로 보였기에 이 책을 빌려 엄마에게 건넸다. 좀 보는 것 같더니 며칠이 지나도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다. 왜 안 읽는데 물었더니 母曰, 나는 꽃이 좋다, 씨가 아니라. 다음에는 꽃 책을 가져와봐. 그렇게 말하는 의 표정, 나는 꽃이 좋다, 책이 아니라. 다음에 또 책을 가져왔단 봐라. 포기하고 내가 읽었다. 역시 문제는 씨앗이 아니었던 것 같다.

 

25. 싸우는 식물 /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 김선숙 옮김 / 더숲 / 2018

: 그럼에도 아들은 엄마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 책을 바로 건네면 싸우자는 뜻으로 비칠까봐 전략을 수정했다. 내가 먼저 이 책을 읽고 흥미를 유발할 만한 이야기를 해서 엄마를 꼬시는 것으로. 마치 꽃이 꿀과 향기로 벌을 꾀듯이. 우와, 내가 식물인이 다 됐네?

: 엄마, 고구마랑 감자가 열매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았어? 당연하지, 땅 속에서 캐는데 그게 어떻게 열매야. 그럼 엄마, 고구마는 사실 뿌리가 변한 거고 감자는 줄기가 변한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 ? 그게 정말이야? 정말이야. 신기하지? 신기하네. 이 책에 그런 이야기 많이 들어있어. , 그래? 이 책은 뭐야, 고구마하고 감자하고 싸우는 이야기야? 아니, 그건 아닌데..... , 그럼 싸우는 이야기로 가져와, 난 싸우는 게 좋다. , 우리 엄마가 싸우는 걸 좋아하시는구나, 그래서 지금 나한테 싸움을 거는구나......

위의 대화에는 MSG가 소량 첨가되어 있습니다. 으하하하. 헤어날 수 없는 화학조미료 사랑.

그렇지만 우리 엄마는 실제로 싸우는 이야기를 정말 좋아합니다. 고등학교 때였나요, 함께 TV를 보던 엄마가 했던 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저것 봐. 락바텀 제대로 들어가는 거. 언더테이커는 이제 끝이야.”

 

26. 아무튼, 식물 / 임이랑 지음 / 코난북스 / 2019

: 그러고 났더니 이제 내가 식물에 관심이 생기고 말았다.

: 무릇 사람의 진짜 모습은 벌레를 상대할 때 드러난다고 믿는 편이다. 지렁이를 집 밖으로 내보내며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되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 기원하는 장면이나, 방바닥에 가만히 엎드려 있는 꿀벌에게 설탕물 한 방울을 먹여 소생시킨 뒤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 같은 것은 작가의 성품을 보여준다. 지니고 있는 물건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아 입사지원하는 상상도 마찬가지다. 이 사람은 전반적으로 따뜻하고 귀여운 사람,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형 인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 챌 수 있었다.

 


 

 

27. 심용환의 역사토크 / 심용환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

: 책 속에서 심 선생은 수많은 사람들과 역사 논쟁의 일기토를 벌이고 다니는 중이다. 그런데 심 선생은 입체적인데 비해 논쟁의 상대들은 2D 캐릭터처럼 평면적으로 팔랑거리고 있는지라 관객 입장에서 별로 흥미롭지 않은 싸움만 벌어진다. 아무래도 책이다 보니 실제로는 논쟁이 아니라 질의응답에 가깝고, 덤벼오는 질문 역시 대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그리고 그 대답으로 논쟁을 지켜보고 있는 독자들까지 설득할 수 있는) 질문들을 선정했다고 보는 게 당연하다. 애당초 역사관이라고 할 만한 게 거의 없는 syo의 입장에서 보면, 심용환 선생님이 제시하는 관점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을지언정, 이 판 자체가 작위적이라는 느낌은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28-29. 본격 한중일 세계사 2-3 / 굽시니스트 지음 위즈덤하우스 / 2018

그림으로도 절대 어디서 꿀리지 않지만작정하고 글을 쓰면 만화 없이 글만 가지고도 많은 고정팬을 거느리기에 충분할 것 같다일단 나를 거느리셨다.....

그렇지만 일본의 대유(大儒)’라 불리는 인물을 꼭 터질 듯한 가슴이 돋보이는 여캐로 그려야만 했는지는 의문이다(한 컷 나오고 사라지긴 했지만). 물론 대유라는 말을 들으면 퇴계 이황이라든지사물의 한 부분이나 특징을 들어 전체를 나타내는 수사법이라든지 하는 것들보다 먼저 터질 듯한 가슴이 뇌내 자동연관검색 되는 세상불상놈(....syo예요.... 그랬어요.... 죄송합니다.....)이 세상에 있(?)겠지만.....



30-34.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2-16 /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

: 완결이 보인다..... 그리고 의욕도 바닥을 보인다.....

 

35. 351 / 박시백 지음 / 비아북 / 2018

: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조선왕조실록에 비해 재미는 덜할 수밖에 없다. 어쩐지 허투루 훑고 지나가면 안 될 것 같다보니 읽는 입장에서도 괜히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만화라는 장르의 장점이 좀 희석되는 느낌도 없지 않다.

 


 

36. 늦은 인사 / 전윤호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

: 일상 속의 말과 다르지 않은 모양으로 짜인 담담한 시를 읽는 것은 암호문처럼 말을 뒤틀어놓은 복잡한 시를 읽는 것만큼 어렵다. 그것은 시는 시다워야 시다라는 편견과 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당연히 시인 것이 내겐 시로 당연하지 않을 때, 처리하기 쉽지 않은 어떤 마음이 생겨나는데, 그 마음을 근거 없고 자기중심적인 비난으로 해소하려 하면 일은 간단하다. 이건 시도 뭣도 아냐, 하고 책을 집어던지면 그만이니까. 그 반대 방향으로 일을 해결하려 하면 이제 아픈 것이다. , 뭐지, 시란 무엇일까, 글이란 무엇일까, 예술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나란 인간은 당최 뭐하는 인간일까......

 

37.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

: 시간의 더께를 흩어내는 업을 지닌 사람의 글 속에는 그 업 자체가 지니는 불가능성에 대한 탄식이 스며들어 있다. 고고학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역사의 단면을 발굴하지만 이야기 전체를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고고학은 소설가보다는 시인의 일에 가까울 수 있겠다. 시어가 유물이고 파편이라면. 이야기는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상상되는 것이라면.



 

38. 시로 읽는 경제 이야기 / 임병걸 지음 / 북레시피 / 2017

: 누군가는 이 책에 시도 있고 경제도 있다고 말할 것이다. 또 이 책에는 시도 없고 경제도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갈팡질팡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있다고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39. 시 읽는 법 / 김이경 지음 / 유유 / 2019

: 시 읽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어, 시는 저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읽는 거 아냐? 이게 책으로 나올 일이야? 바로 그래서 책으로 나올 일입니다. 정해져 있지 않으니까요.

: 내 생각과 다른 타인의 생각을 듣는 것이 중요한 일이듯, 내 독서법과 다른 타인의 독서법, 내 시 읽는 법과 다른 타인의 시 읽는 법을 보고 듣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시는 덤이고 실은 사람에 대해 배우는 셈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사람이 제일 재미있다.

 

40. 만화 동사의 맛 / 김영화 지음 / 김정선 원작 / 유유 / 2017

: 김정선 선생님의 책에는 늘 이야기가 있었다. 이상하지 않은 문장을 말하는 책도, 동사가 지닌 제맛을 드러내는 책도, 모두 이야기 위에 올라타 독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게 선생님이 사랑받는 이유인 것 같다. 그렇지만 syo의 감각은 김정선 선생님이 만드는 이야기에 늘 엇나갔다. 이야기가 없어도 너무 좋은 책들이고, 이야기가 있어서 더욱 좋은 책들일 것이었다. 그걸 아는데도 김정선 선생님이 만드는 이야기는 마치 역방향으로 털을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내 털이 이상한 방향으로 나서 그렇겠지, 늘 그런 결론이었다. 믿을만한 결론이었다.

: 그런데 그림이 쓰다듬는 손길의 방향을 바꾼 것 같다. 동사의 용법을 설명하는 책을, 그것도 지면상 원작이 가진 함량을 줄이고 줄여서 내놓을 수밖에 없었을 텐데도, 꼭 만화로 그려야겠다고 판단한 작가의 좋은 눈이 손보다 먼저 있었다. 그 눈이 제일 고맙다.

 



 

, 마치 짠 것처럼 40!

 

실은 짰습니다. 5월은 아직 몇 시간 더 남아있는데다가 실은 한 권을 더 읽었지만 6월로 토스.....


작위적인 인생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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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5-30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로사회>애 하신 말씀에 동의합니다. ^^

syo 2019-05-30 23:30   좋아요 1 | URL
그쵸?? 저만 이게 뭔 말이야 대체- 이랬던 거 아니죠?? ㅎㅎㅎㅎ 아 다행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북다님이랑 의견이 맞았다니 크게 안심입니다.

2019-05-30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30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알벨루치 2019-05-30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튼 이 양반, 알라딘의 핵이다! 독서에 대한 🔥 을 확 지르네!!! 수고많았어요 또 잘 준비하시공 잘자요 쇼군^^

syo 2019-05-30 23:31   좋아요 1 | URL
카알님도 좋은 밤 되세요 ㅎㅎㅎ 🔥🔥🔥🔥🔥

반유행열반인 2019-05-31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워지면 진짜 책이 잘 읽히는 신비! 저도 이십 권 가까이 읽었네요. (저 역시 그 중 9권은 조선왕조실록 만화고ㅋ뒤로 갈수록 재미없어요ㅜㅜ) 슬플 땐 독서죠. 어제 기생충 보고 너무 슬퍼서 오늘은(도) 책 봐야지.

syo 2019-05-31 10:32   좋아요 1 | URL
정말 뒤로 갈수록 재미가 떨어져요..... 특별히 이시백 선생님의 기력이 소진되어서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뒷쪽 역사가 재미가 덜한듯......

나도 기생충 보고 싶다.....
이렇게 쓰고 나니까 무슨 회충약 먹고 신문지 위에 응가하는 모습이 상상되면서 별루네요.

수연 2019-05-31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지니아 울프 북클럽 읽어 말아 읽어 말어 이러고 있었는데 마음 편히 오늘 룰루랄라_

syo 2019-05-31 10:31   좋아요 0 | URL
거짓말을 써 놓은 건 아니지만, ˝밤+이택광 선생님 = 격앙˝ 이런 개인적인 공식이 존재하는지라......

좀 정신을 차린 상태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버지니아 울프의 다양한 면모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지만, ‘내가 바로 이택광, 버지니아 울프의 면면을 속속들이 발견한 눈을 가진 남자지.‘ 이런 느낌도 꽤 선명해서 호불호가 있을 수도 있겠어요. 저는 이택광 선생님의 그런 면을 사랑하지만......

독서괭 2019-05-31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저도 시험 앞두고 멘탈 바스라짐을 경험한 적이 있어요. 제 경우는 공부에 몰입이 도움이 됐는데, 이것 땜에 시험을 망치면 너무 비참하고 억울할 것 같더라구요.
syo님은 독서량이 늘어난 걸 보니 진정한 독서중독자!! 덕분에 좋은 책들 담아갑니다. 멘탈은 잘 회복되셨길...

syo 2019-05-31 10:3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오락가락하지만 오락가락하면서 어디론가 잘 가고 있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독서괭님!!

2019-05-31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2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5-31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빵 터졌다 ㅋㅋ이시백에서 한 번 응가하고 회충 구경하는 모습 상상해서 또 한 번...시험 끝나고 재미나게 보아요(뭔가 약올리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런 뉘앙스 아님 ㅠㅠ)

syo 2019-06-02 00:02   좋아요 1 | URL
이시백 선생님과 잠시 각자의 시간을 가지기로......
웃으며 다시 만날 그날까지 안녕.....

stella.K 2019-05-31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20번에서 빵 터지는 건 어쩔 수가 없군요.
벌써 그러면 어떡합니까?ㅋㅋㅋ
그런데 그렇다기 보단 그런 내용의 소설이나 영화를 심심찮게 본 탓도 있지 않을까요?

시험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건 얼핏 읽은 것 같은데 암튼 잘 보길 바랍니다.
저는 이제 서재질은 작파했습니다.
마음 먹고 성실해지니까 이제 웬만한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20번을 쓰지 않았다면 스쳐지나갔을 텐데 오늘 스요님 계 탄 줄 아십시오.ㅋㅋㅋ

syo 2019-06-02 00:0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스텔라님 서재 작파하지 마셔요.

그거 하느라 이거 작파하는 건 마음 먹고 성실한 것이 아니라 그냥 대상만 바꿨을 뿐 하던대로 성실한 거죠.
진짜 마음먹고 성실이라면 그것도 하고 이것도 하셔야죠.

이 좋은 데를 왜 떠나려 하시나요.
 

 

어디서 무엇이 되어

 

 

1

 

자아형성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에서, 사랑이란 놈은(주로 그 성공보다는 실패가) 교묘히 잠복하고 있다가 마주치는 인간의 가치관에 치명적인 타격을 때려 넣곤 하는 깡패에 가깝다. 그놈은 항상 진심이고, 전력을 다해 타격한다. 방어기술 따위 이 세상에는 없고, 그냥 맞다보면 익숙해지거나(어 또 눈물이 나네), 덤덤해지거나(아 맞다 나 헤어졌지) 할 뿐. 그렇게 syo는 사랑에 얻어터져 가며 오늘의 syo를 만들어왔다. 내 얼굴은 내 사랑이 남긴 흉터와 많이 닮았다.

 

 

 

2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나를 좋아하는 사람 중 누구와 연애를 할 것인가. 처음 누군가를 좋아하기 전의 syo는 어리바리들이나 모험가들이 대개 그러하듯 내가 좋아하는 사람 쪽이었다. 100일 동안 두 손에 꼽을 만큼도 만나보지 못하고 작살난 첫 번째 연애가 그랬다. 심지어 그땐 이래저래 악조건 투성이였다. 하나, 몸으로 못 배울 거였으면 글로라도 배워 둘 것을, 20년을 주구장창 연애무관심종자로 살다가 몸뚱이에 물도 한 번 안 찍어 바르고 거침없이 바다로 뛰어들었으니 그 연애에 쥐가 났다. , 하숙 생활하는 가난뱅이 새내기가 연애를 위한 기본적인 물질적 조건도 구비하지 못하였으니, 하부구조인 경제적 토대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변동시키는 막강한 동력으로 작동한다는 역사의 법칙에 따라 그 연애의 역사가 종말로 치달았다. , '롱디'라는 것은 삼생의 복업을 쌓아 하늘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으므로, 일종의 전생-잘살았나-테스트로 기능한다는 관점에 의하면, 500km에 달하는 내 장거리 연애가 망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내 전생도 현생처럼 칭찬받을 만한 삶은 아니었구나...... 그러나 실제로 내 첫 연애를 멸망시키는데 이 모든 악조건의 총합보다 더 강력한 폭탄 역할을 한 한 방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끝내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어찌 보면 허망하리만큼 간단한 사실이었다. 딱히 날 남자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나라는 인간을 잃기는 또 싫었던 그녀는, 곧 좋아하는 마음이 생길 거라는 희망 섞인 자기기망과 syo가 자기 마음을 움직여 줄 거라는 근거 없는 기대를 버무려 일단 걸어오는 연애를 받아주었다. 결국 좋아하는 마음이 그녀에게도 생기기는 했다. 항상 자기 옆에 있어주는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마음이. 이명박 정부 말기쯤 전해 들은 마지막 소식에 의하면 두 분은 결혼에 골인해 아주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아아, 당신들의 운명 같은 사랑에 조연으로 등장하여 감칠맛을 더해 주는 복업을 쌓고 말았으니 다음 생에는 나도 롱디에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안 할 거지만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감사고 나발이고 당시에는 어마어마하게 힘들었다. 한 달 만에 얼굴 보는 자리라 잔뜩 기대하고 나갔던 syo에게 벼락처럼 이별을 고한 그녀가, 그날 전까지는 정말 어떤 낌새도 흘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저쪽에서는 열심히 티를 냈지만 syo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스무 살짜리들은 사랑에 빠지면 종종 맹인이 되기도 하니까. 그녀는 동성로의 어느 돈가스 집에 syo를 불러 앉혀, 돈가스를 시켜놓고, syo가 돈가스를 절반 정도 먹은 시점에 눈물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미안하다고, 아무래도 너를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으니 우리는 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건 뒤에 내가 전 여친이 된 그녀의 미니홈피를 들락거리는 찌질함을 한껏 발휘하여 알아낸 사실이다. 알고 나니 다시는 들어가지 않게 되었지만. 물론 그녀를 이해할 수는 있다. 비슷한 경험도 있고. 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그때 그녀의 입장에 선 게 지금의 나라면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말을 해주었을 것 같다. 거짓말도 아니고, 그냥 니가 사랑스러워지지 않는다는 말보다 훨씬 절단면이 깔끔한데다가 상처도 덜 오래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스무 살짜리들은 결코 불가능한 착한 이별을 시도하는 멍청이가 되기도 하니까. 그녀는 다시 잠깐 울었고, 화장실에 들러 화장을 조금 고치고 돌아왔고, 우리는 일어났다. 그때 남겨놓고 온 돈가스의 절반은 어디로 갔을까. syo는 결코 썰어놓은 돈가스를 남기는 인간이 아닌데. 가게에서 나온 그녀는 농협인지 대구은행인지의 현금인출기에 들러 얼마간의 현금을 인출했고, syo는 괜히 뒤에 서서 그녀를 가려주면서 이게 다 뭐하는 짓이지 싶었다. 그리고 마치 달달했던 데이트의 마지막 장면처럼 버스 정류장에서 그녀가 타고 갈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syo35년 인생사 가운데 가장 등신 같기로 수위를 다투는 대사, “친구로도 안 되겠지?”를 시전했는데, , 그녀는 단호했고, syo는 그저 멋쩍게 웃고 말았지만 사실은 먼지가 되어 날아가고 싶었다. 이윽고 도착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떠나는 그녀, 이제는 심지어 버스 창 너머에서 손을 흔들며 살짝 웃기까지 했다. 스무 살짜리들은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아름답게 남기고 싶은 대책 없는 욕심쟁이기도 하니까. 나도 그때 손을 마주 흔들었던가, 아니었던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이 나는 것은, 그녀를 보내고 난 뒤 동성로 아카데미극장 옆 우리은행 앞 희한하게 생긴 거대한 조각상 아래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사람들이 지나가며 힐끗거리건 말건 멍청한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며 30분을 보냈다는 사실이다.

 

대학에 와서 맞은 첫 여름방학의 대부분을 방구석에 드러누워 실패한 사랑을 복기하는데 소진하였다. 결론은 간단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고른 것이 패착. 좋아하는 사람을 고르는 이들을 모험가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간단하다. 애초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나를 좋아하는 사람 중 누구와 연애를 할 것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개인의 투자성향을 체크하는 역할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고백했을 때 연애를 시작할 수 있는 확률 자체가 다르다. 저 질문 속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좋아한다는 가정이 전혀 깔려 있지 않기 때문에, 저 질문만 놓고 봤을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여 성공할 확률은 동성로 우리은행 조각상 아래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세고 있다가 100번째 행인에게 고백하여 당첨될 확률보다 크게 높지 않다. 반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해서 연애가 시작될 확률은 한없이 투명한 100퍼센트에 가깝다. 저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왜 다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 고백을 받아줄 거라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syo처럼 소심하고 위험 회피적 성향을 지닌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고르는 것이 천성에 맞게 사는 길인 셈이다.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사랑이 날린 펀치가 syo의 인생행로를 바꾼 최초의 사건이다.

 

그날 이후 syo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 정확히 말해서, 내가 판단했을 때 그 사람을 좋아하는 내 마음보다 나를 좋아하는 그 사람의 마음이 더 크다고 판단되는 모든 그 사람의 마음을 받아들였고, 그들 모두와 연애를 했다. 늘 사람을 쉬이 좋아하고, 한번 좋아하면 눈이 멀도록 좋아하는 syo에게 사랑하는 마음의 달리기 시합은 너무도 간단한 일이었다. 연애가 시작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syo의 마음은 먼저 달려 나간 마음들을 쉽게 따라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가면 그 시간을 따라 그 사랑들도 저마다의 이유로 지나가곤 했고, 그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크고 간명한 진리와 진실들을 배워가며 syosyo를 조각했다.

 

 


3

 

기본적으로 인간은 인간에게 필수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체로 대체 가능하고, 꼭 저 사람이 내게 필요할 필요는 없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실제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살기에 너무 버거워서 나는 내 손으로 예외를 만든다. 네가 필요해. 그 말은 마치 주문 같다. 필요하지 않았음에도 필요를 외치는 순간에 필요가 생긴다. 필요는 필요의 어머니다. 자기를 속이는 일이거나, 허튼 최면을 거는 일이거나, 어쩌면 어이없는 말장난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인간이 인간에게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부정하기 위해 인간에게는 인간이 필요하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으로 그 일을 하는 경향이 있다.

 

요컨대 syo는 필요한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인 쪽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한 사람인 쪽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필요치 않은 사람을 더는 사랑할 필요가 없는 사람. 그렇게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다가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필요를 생각해볼 시간을 가졌다면, 과연 어떤 결론이 날까.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한 사람인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필요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에게 사람의 필요를 의심하는 일은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저 사람이 더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은 사랑이 이미 종료되었음을 깨닫는 순간과 같다. 반면 사랑하는 데 필요가 필요한 사람에겐 필요를 생각하는 일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상대방이 더는 필요치 않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면, 그제야 그는 사랑을 조금씩 삭제하기 시작할 것이다. 혹은 의외로 내 사랑에 필요는 필요하지 않았구나, 깨달으며 자신을 보는 관점을 조절할지도. 아무튼 두 사람이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상대방의 필요를 계산하다가 동시에 서로의 불필요를 깨달았다면, 그래서 두 사람이 만약 헤어진다면, 그 이별의 원인은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사람 때문이라는 뜻이다. 이게 내가 지금의 사랑을 하는 도중에 새롭게 업데이트한 가치관이다. 국면에 따라서는, 사랑하는데 필요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도리어 더 폭력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일 수 있다.

 

 

 

4

 

사랑에 대해서는 더 배우고 싶지 않았다. 많이 배우고 싶었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였다. 나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으로 내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동안 나도 생각한다. 생각은 늘 생각 같지가 않고, 생각의 꼬리를 문 생각은 꼬리를 물린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생긴 경우가 있다.

 

당신은 필요를 생각하러 갔다. 나는 그 생각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당신에게 완전히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이 났을 때,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 우리는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해놓지 않아도 정해져 있는 답일까? 당신이 필요를 생각하는 동안 나는 거기가 어디일지를 생각한다.

 

밤이 자꾸 쌓인다.



 

저녁의 연인들 / 황학주

 

침대처럼 사실은 마음이란 너무 작아서

뒤척이기만 하지 여태도 제 마음 한 번 멀리 벗어나지 못했으니

나만이 당신에게 다녀오곤 하던 밤이 가장 컸습니다

이제 찾아오는 모든 저녁의 애인들이

인적 드문 길을 한동안 잡아들 수 있도록

당신이 나를 수습할 수 있도록

올리브나무 세 그루만 마당에 심었으면

 

진흙탕을 걷어내고

진흙탕의 뒤를 따라오는 웅덩이를 걷어낼 때까지

사랑은 발을 벗어 단풍물 들이며 걷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어디 사는지 나를 찾지도 않았을

매 순간 당신이 있었던 옹이 박인 허리 근처가 아득합니다

내가 가고,

나는 없지만 당신이 나와 다른 이유로 울더라도

나를 배경으로 저물다 보면

역 광장 국수 만 불빛에 서서 먹은 추운 세월들이

쏘옥 빠진 올리브나무로

쓸어둔 마당가에 꽂혀 있기도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올리브나무로 내 생에 들러주었으니

이제 운동도 시작하고 오래 살기만 하면,


 

--- 읽은 ---

+ 시 읽는 법 / 김이경 : 62 ~ 205

+ 우리 마음속에는 저마다 숲이 있다 / 황경택: 4 ~ 205

+ 도시를 보다 / 앤 미콜라이트, 모리츠 퓌르크하우어 : 77 ~ 143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김진아 : 73 ~ 161

 

 

--- 읽는 ---

- 헤겔 / 피터 싱어 : 8 ~ 78

- 버지니아 울프 북클럽 / 이택광 : 5 ~ 131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유현준 : 11 ~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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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9 02: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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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9 07: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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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9 10: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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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9 12: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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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9 13: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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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30 22: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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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30 00: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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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30 23: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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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30 23: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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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30 2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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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울 이제 내겐 서울뿐이야.....

 

 

1

 

재능이 없는 사람은 글도 쓰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재능 있는 이가 쓴 글이 살아남을 거라고 말했지요. 재능이 없는 사람이 쓴 글은 읽힐 가치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는 글을 쓰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글을 읽습니다. 그것만이 이 엄혹한 읽고 쓰기의 아수라장에서, 읽고 쓰기에 관해 우리가 오차 없이 합의 할 수 있는 유일한 약속입니다. 당신에게 재능이 없거나 내게 재능을 알아보는 재능이 없는 것은 지구에 슬픔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아무래도 이것은 이번 생에 끝날 일도, 다음 생으로 끌고 갈 일도 아닌 시시한 충돌입니다. 어차피 내가 어쨌든 당신은 쓸 것이고, 당신이 어쨌든 나는 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글이 결국은 살아남을 글이라면 그 사실이 이번 생에 밝혀졌으면 좋겠습니다. 제때 알아보지 못한 부끄러움은 내가 감당하겠습니다. 어차피 그건 읽는 이들이 짊어지고 읽어나갈 괴나리봇짐 같은 숙명입니다. 그러니 재능을 부러워하며 끝까지 써나가시기를. 그것 역시 쓰는 이들이 펜을 놓는 날에야 같이 내려놓을 수 있는 끈질긴 두통 같은 숙명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말을 전해드리려 합니다. 제가 그 재능을 부러워하여, 애증하느라 20대를 오롯이 소진해야 했던 소설가의 말입니다.

 


금정연 재능이 없다는 걸 한탄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그게 오히려 재능이었을까요?


김연수 워낙 한 번도 글을 써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쓸 때마다 실력이 늘었어요쓰고 또 쓸 따름이었는데계절이 바뀌면 그간 글을 쓴 노트가 쌓인단 말이죠거기에는 시도 있고단편소설의 도입부도 있고짧은 평론도 있고심지어는 희곡도 있었어요모든 게 파편적이고 미완성이었지만어쨌든 글이 쌓여요그래서 전에 쓴 것들과 비교하면 이건 일취월장이라고 할 만큼 쓰는 실력이 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죠한탄할 겨를이 없었어요그건 아마도 내가 처음부터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 없이 글을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제게는 한탄이 허용되지 않았어요왜냐하면 원래부터 없었던 걸 없다고 한탄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대신에 글을 쓸 때마다 조금씩 뭔가가 생기기 시작하는데그건 정말 대단했죠.

_ 김연수, 금정연, 『청춘의 문장들+』

 

 

 

2

 

경험에 대해서는 말할 만한 것이 없었으므로 그 자리에서 대충 지어내 둘러댔다. 급조한 인생사는 쫄깃쫄깃한 맛이 없었으니 면접관의 시큰둥한 표정이 이해가 갔다. 그러자 나 역시 시큰둥해졌다. 실망스러운 나의 상상력아.....

 

내가 원하는 데 꽂아줄 것도 아니면서 합격하면 어떤 업무를 맡고 싶은지 물어왔는데, 예상하고 식상하고 범상한 그 질문에 미리 준비해놓은 답은 백악관이요, 였으나, 그짓을 저지를 호연지기는 차마 갖추지 못했으므로 요즘 도시재생에 관심을 두고 책을 읽고 있다고 온순하게 대답했다. 도시재생에 관한 질문의 창과 대답의 방패가 시시하게 몇 차례 부딪히다가 종국에는 도시재생과 젠트리피케이션의 길항관계에 관한 이야기에 도달했다. 나는 두 가지가 충돌하면 젠트리피케이션을 방어하는 쪽에 더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했고, 일단 무조건 밀어붙이는 식의 도시재생은 예쁘게 화장한 도시재개발일 뿐이라는 식의 첨언도 한 것 같다. 그렇다면 젠트리피케이션을 잡을 대안이 있냐는 질문이 들어왔는데, 그런 건 무거워서 들고 오지 못했다. 그것은 어려운 문제라 지금도 여기저기서 실패사례가 만들어지는 중인 줄 안다고만 대답해 확전을 피하려 했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른 채, 마땅한 대안도 없이 일단 비판만 하는 건 비생산적이지 않느냐며 매서운 창을 날리는 면접관. 아까의 그 시큰둥했던 표정은 어디가고, 이젠 열정이 다 느껴질 지경이었다. 부정적인 열정이. 때문에 이쪽에서는 열정적인 부정으로 맞받아, 방패를 들어야 할 타이밍에 창을 맞던지고 말았다. 모든 대안을 먼저 구비한 다음 비판하는 것은 천재의 일입니다. 저는 평범한 사람이고, 평범한 사람들은 비판 속에서 대안을 찾으려 노력합니다. 여기까지 내뱉자 내 언성이 조금 높아졌음을 나도 눈치 챌 수 있었고, 뒤이어 나올 뻔한, 나한테 방법이 있었으면 내가 syo하고 있겠냐 승효상 하고 있지, 라는 개소리만큼은 끝까지 참아낼 수 있었다.

 

면접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아무 데도 들르지 않고 곧바로 다시 대구로 내려왔다. 아무래도 나는 좀 망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는 서울시뿐이다......

 

독서 시간을 한 시간 더 줄이고 공부에 투입한다(엄청난 각오라도 하는 것마냥....)

 

 

 

3



비록 유명한 회사들은 최상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시장을 세분화하여 자사 제품을 홍보하지만 이런 전략이 늘 성공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업체들도 잘 알고 있다더구나 다수의 회사들은 구매자들이 이성이 아닌 감정에 따라 구매를 결정한다고 믿는다그 결과 많은 광고들이 소비자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기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려고 노력한다가장 흔한 방법으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2. 감정에의 호소 특정 상품을 소비자의 감정과 동일시하는 것이다예를 들면,

 패션=소속감·멋있음·섹스

 화장품=사랑 혹은 섹스

 음식=인정 혹은 섹스

 자동차=욕망·사회적 지위·자유·혹은 섹스,

이런 식인 것이다.

조지 셰프너산수의 감각 

 

인간들은 정말 대단하다. 웃기기 위해선 뭐든지 한다. 하다하다 이제는 산수까지 한다. 그러나 웃자고 쓴 것이 분명한 저 대목에서 차마 웃지 못한 syo. 왜 나는 섹스라는 단어만 보면 물 다 끓은 전기포트마냥 틱, 자동적으로 깊은 상념에 젖어드는가.....

 

 

 

--- 읽은 ---

화재의 색 / 피에르 르메트르 : 300 ~ 618

산수의 감각 / 조지 셰프너 : 124 ~ 244

피로사회 / 한병철 : 30 ~ 128

 

 

--- 읽는 ---

시 읽는 법 / 김이경 : 9 ~ 62

이야기 한국 미술사 / 이태호 : 124 ~ 188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김영민 : 4 ~ 72

도시를 보다 / 앤 미콜라이트, 모리츠 퓌르크하우어 : 55 ~ 77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 김진아 : 5 ~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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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5-26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부터 쪽수를 체크하네요 흠흠~

syo 2019-05-26 22:36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어차피 남길 기록인데 좀 더 상세하게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반유행열반인 2019-05-27 0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게 면접이에요 국가 미래 전략 회의에요ㅋㅋㅋ syo님! 서울 붙어서 같이 서울 시민 하십시다! 아이 서울 유. syo의 s도 손의 s도 서울 붙을 복선이에요ㅋㅋ(라고 내 맘대로...)

syo 2019-05-27 08:22   좋아요 1 | URL
그 복선 한번 믿어볼랍니다..... syo의 s는 아무래도 신뢰의 s니까요.

다락방 2019-05-27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화제의 색까지 읽으셨다니... 전 오르부아르도 아직이건만.....Orz

면접 보느라 고생했어요!

syo 2019-05-27 08:23   좋아요 0 | URL
저도 오르부아르는 아직인데요ㅋㅋㅋㅋ 이어지는 거 아니죠?? 아닐 거야 아니었어야 해.....

다락방 2019-05-27 09:09   좋아요 0 | URL
아닐겁니다.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문모운 2019-05-27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의 s는 그... 아닙니다.

syo 2019-05-29 00:04   좋아요 1 | URL
물의를 일으키려 시도하지 마syo.

반유행열반인 2019-05-27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의 그..상념이겠군요. 아 산수인가...

syo 2019-05-29 00:06   좋아요 1 | URL
산수로 할게요. 산수......
머릿속에는 자꾸 다른 단어가 맴돌지만 그래도 산수...
 

 

범인은 아렌트?

 

1 


시험은 이제 22일 남았다. 시간 새끼, 정말 잘도 가는군요.




2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8년 10월



이 책을 통해 syo는 총 4가지를 새로 알거나 고쳐 알게 되었다.


  

첫째, 타자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감수성이 늘 훌륭하지는 않았다는 썰. 특히 그의 저작을 읽은 이들이 예상하거나 기대하는 바를 생각해보면 이것 참 뜻밖이로세 싶을 정도.

 

1954년 미국 연방 대법원이 공립학교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해 교육하는 것은 미국수정헌법 제 14조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놓았다. 남부는 즉시 들끓었다. 이 판결로 학교를 갈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낸 엘리자베스 엑포드라는 이름의 14살 흑인 여자아이가 리틀록 센트럴고등학교로 등교하는 첫날, 195794, 주지사는 그녀를 막기 위해 총검으로 무장한 주 방위군을 그녀의 등교 길에 투입했다. 길에 늘어선 백인들은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위협했다



그러나 엑포드는 자신이 얻은 권리를 행사하는 데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그리고 그녀를 따라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백인들의 험한 표정이) 찍힌 사진이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자 마침내 한나 아렌트에게도 이 사건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뜻밖에도(이 뜻은 syo 뜻) 아렌트는 공립학교에 흑인과 백인의 통합 교육을 강요하는 연방정부에 대해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 정부는 사회적 차별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합법적으로 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부는 평등-사적 영역에서는 획득될 수 없는 원리-의 이름으로만 행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정부는 사회의 편견과 차별적 관행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 이런 관행들이 법적으로 강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권리일 뿐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다.

- 교육은 사적인 문제이어야 하며, 정부는 자신의 자녀를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지에 대한 부모의 결정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 만일 유대인인 내가 유대인 친구들과만 내 휴가를 즐기겠다고 한다면 이런 내 계획을 어떻게 누가 합리적으로 막을 수 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이는 마치 다른 휴양지 업소가 휴일을 보낼 때 유대인을 보고 싶지 않아하는 고객을 유치하면 왜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내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그녀의 태도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그러나 휴가를 함께 보낼 친구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과 관련된 (그다지 악성이 아닌사회적 차별과 흑인들이 일상적 삶에서 강제로 경험해야 했던 폭력적 차별을 비교하는 것은 극도로 무감각한 것이다아렌트는 정치적인 것사회적인 것사적인 것에 대한 자신의 구별을 잘못 강요했다. (...)

  아렌트의 둔감함이 당혹스러운 이유는 인종차별에 대해 더욱 공감할 수 있고 세밀하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그녀의 저술 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이다유대인과 흑인을 유비적으로 보는 방식은 조심해야 하지만그런데도 아렌트는 누군가가 유대인으로서 공격받을 때는 독일인으로서가 아니라 또 인권의 담지자로서가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고 선언했던 때의 자기 경험에 근거해 흑인 문제를 다루어야 했다. (86)


추후 아렌트는 그녀에게 쏟아진 다양한 비판들을 수용하고 부분적으로나마 자신의 견해가 올바르지 못했음을 인정했다고 한다. 인간의 조건의 저자이며 향후 몇 년 안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대한 무능력함을 강력하게 비판하게 될 거장조차 모든 순간 쉬지 않고 위대한 인간일 수는 없다는, 어찌보면 평범한(진부한) 사실의 진부한(평범한) 사례라고 해도 될까?

 

 

둘째, 알고 보니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속았지만, 오히려 속았기 때문에 악의 평범성이라는 기막힌 통찰을 길어낼 수 있었다는 썰.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예루살렘 재판정에서 보여준 태도, 광신적인 나치 분자보다는 평범한 관료에 가까운 모습, 상투어로 가득한 변론 등을 토대로, 내면에 수천 마리의 괴물이 들끓는 것이 악이 아니라 괴물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이 악이며, 그렇기 때문에 평범하거나 심지어는 선량하다는 평을 받는 사람조차 무사유의 허방을 잘못 짚으면 상상도 못할 크기의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경고를 우리에게 던졌다. 그런데 그 후로 아이히만의 행적이 더 상세히 알려졌는데, 독일을 탈출하여 아르헨티나에서 살던 때의 아이히만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해오던 평범하지 않은 악인의 모습에 가깝다고 한다.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뿐 아니라 '아르헨티나의 아이히만'까지 보았더라면 악의 평범성개념을 끌어낼 수 있었을까?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은 이렇게 판단했다.

 

나는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이 홀로코스트의 수많은 가해자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통찰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히만에 대해서는 아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자기연출 전략에 속았는데, 그럴 수 있었던 부분적 이유는 그가 흉내 낼만한 수많은 가해자가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98)


아이히만이 자기가 개새끼라는 데 당당한 개새끼였다면 악의 평범성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발견되었더라도 한나 아렌트의 작품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겠다고 봐도 될까?

 

 

셋째, 이건 소소하고 개인적인 것이지만, 플라톤의 국가를 다시(똑바로) 읽어봐야 되겠다는 썰......

 

플라톤의 국가의 주요 주제는 철학과 정치 사이의 갈등즉 철학적 진리와 정치적 의견 사이의 갈등이다정치는 불안정하고 서로 충돌하는 의견들에 기초한 것이지 영원한 형상에 대한 참된 지식에 기초한 것이 아니므로, “진짜” 정치에서는 권력과 힘이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인다국가는 정의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논박하고참된 정의는 철학자들이 알기를 열망하는 이성적 진리의 영원한 기준에 부합할 때에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관적 논증으로 읽을 수 있다. (107)

 

일단 2500살쯤 먹은 책은 그 자체로 뜨악한 데가 있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syo같은 새빨간 유물론자와 이데아’, ‘영원한 형상같은 단어가 만나 일으키는 화학작용은 찌푸린 미간, - 하는 비릿한 웃음과 한쪽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유발하고, 그 결과 책은 결코 낮다고 할 수 없는 확률로 침대 한 구석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한다. 배배 꼬인 마인드를 견지하고 국가를 계속 읽어나가면, 결국은 철학자가 독재 정치해야 된다는 거잖아. 이건 철학자라는 양반들이 헤게모니를 획득하기 위해 짜내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군, 하는 시시껄렁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21세기의 관점에서 보면 철학자가 아니라 철학의 신이 강림하신다고 해도 그의 독재에 동의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정치체제를 다루는 책으로서의 국가는 그다지 매력이 없다,

 

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런데국가정의에 대한 생각거리로 쓰자고 들면, 좀 다른 결론이 날 수도 있겠다 싶다.

 

다른 누구도 아닌 철학자들이 정치를 해야 하는 이유가 그들이 정의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국가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가 정의 구현이라는 뜻이다. 정의는 불변의 실체일까, 합의의 결과일까, 강한 자의 이데올로기일까. 정의는 과연 이룩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더 이상 못 들어 올릴 것 같은데 자꾸 한 개만 더, 한 개만 더를 외쳐대는 트레이너처럼, 이룩할 수 있다는 희망만 주며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서는 데 의의가 있는 가상의 골인 지점일까.

 

결국 달리 생각하면 국가는 정의를 정의하는 토론회에서 어느 한쪽 참가자가 토해놓은 열변 같은 방식으로 읽을 수도 있었을 텐데. 누가 통치하는지의 문제는 현미경을 들이대고 숨겨져 있는 구조를 세세하게 살펴보면 재미있는 구석이 아직 많지만, 거시적으로 봐서는 거의 답이 나온 문제라 진부하다. 그러나 정의에 관한 이야기라면 유통기한이 없지. 어쩌면국가를 국가에 대한 책으로 읽어서 재미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앞으로는 책 좀 똑바로 읽어.....

 

 

마지막으로, 번역자 김선욱 선생님에 대한 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이 책의 역자가 같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주술호응이 어긋나거나 잘못된 조사가 사용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독히도 읽히지 않는 문장들이 가득해, 가뜩이나 없는 재미가 더 없었다. syo는 그것이 역자의 역량, 편집자의 역량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정말 건방지게도. 그런데 이 책의 문장은 깔끔하고 읽기에 무리가 없었다. 뭐야, 그러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그랬던 것은 한나 아렌트가 그런 거야? , 아렌트가 그랬어?

 

그러고는 뒤져봤더니, syo는 이미 김선욱 선생님이 쓰신 한나 아렌트의 생각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기억이 났다. 아주 괜찮게 읽었었는데. 그리고 그때의 평을 찾아보니 이렇게 써 놨다.

 

- 깔끔하다.

- 한나 아렌트 입문서로 몹시 훌륭하다.

- 핵심만 쉽게 꽂아놓았다.

- 그러다보니 원전을 왜곡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 한나 아렌트 입문 첫 책은 바로 이것.


이렇게 빨아놓고서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번역이 구리다고 깠다..... 왜 그랬을까. syo가 왜 그랬을까..... 여러분, syo라는 놈의 서평 능력이 이렇게 떨어집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맨날 잡글만 쓰는 거라구요(핑계)......

 

 



--- 읽은 ---

+ 심용환의 역사토크 / 심용환 : 78 ~ 294

+ 감염된 독서 / 최영화 : 54 ~ 306

+ 싸우는 식물 / 이나가키 히데히로 : 11 ~ 235

 

 

--- 읽는 ---

- 산수의 감각 / 조지 셰프너 : 38 ~ 124

- 이야기 한국 미술사 / 이태호 : 62 ~ 124

- 도시를 보다 / 앤 미콜라이트, 모리츠 퓌르크하우어 : 8 ~ 55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 7 ~ 46

- 소로의 일기 / 헨리 데이비드 소로 : 61 ~ 68

- 화재의 색 / 피에르 르메트르 : 11 ~ 302

- 책 쓰자면 맞춤법 / 박태하 : 5 ~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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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5-24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성인들의 이론적 한계를 알게 되면 그들을 멀리하기보다는 더 자세히 알고 싶어져요. 인간적인 그들을 알기 위한 인간적인 공부죠... ^^

syo 2019-05-24 13:2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전 어차피 까먹어서.... 나나 조심하고 살아야겠다- 하고는 얼릉 다른 책으로 넘어가는 스타일입니다 ㅎㅎ

2019-05-24 1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4 13: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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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05-24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렌트 너마저...남의 입장을 헤아린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인지 회의가 드네요. 자신과 어떤 최소한의 접점이 있는 소수자에게만 우리가 선택적 이입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박정희 초상 보며 유생 차림으로 절하는 할아버지에게 제가 공감과 위로를 보내지 못하는 것처럼요.) 타자 감수성이라는 게 정말 다른 누군가를 헤아리고 그들의 입장에 서는 능력이라기보다 다른 누군가와 자신이 조금이라도 닮은 부분을 (매의 눈으로) 낚아채는 능력이 아닐까(아니면 너도 나고 내가 너야 하고 스스로를 잘 속아?넘기는 능력이 아닐까)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선택된 민족이면서 핍박받은 민족 소속이라는 자기 인식에 갇힌 사람이 흑인 차별(혹은 차별 금지)정책에 대해 저런 소리를 한 게 아닌가 생각도 해 봅니다.(니들은 그래도 수용소나 학살은 안 겪어 봤잖아? 뭐 이런) 유대인도 흑인도 아닌 저의 뇌피셜이니 이것도 그냥 생각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자 입장이 되지 못하고 열심히 까기만 했던 또다른 1인으로서 반성해야 겠네요. (범인은 누구냐...)

syo 2019-05-24 15:19   좋아요 1 | URL
와, ‘속아넘긴다‘는 표현 탐나네요! 무릎을 탁 쳤습니다. 아야.....

당연한 이야기지만, 헤아릴 수 있으면 헤아리고 헤아리지 못하겠으면 그냥 들어야 될 것 같아요.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은 독서나 훈련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실효적으로는 경험과 부딪힘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일테니 의도적으로 획득하려 노력한다기보다는 그저 내가 만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욕심 정도를 갖출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요즘은 ‘헤아릴 수 있는 능력‘보다 ‘헤아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더 절실한 것 같아요.
그저 들어야 할 일에 먼저 말을 하는 것이 말해야 할 사람의 말을 막는 일이 될까봐 겁이 납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5-24 16:13   좋아요 0 | URL
탐나시면..바치옵니다ㅎㅎ착한 자기기만? 저는 착한 쪽도 나쁜 쪽도 잘 못하네요...먼저 말하지 않기, 말 한 마디 덜 하기, 한 마디 더 듣기, 나는 아직 쟬 잘 모른다 되새기기, 마음에 새기고 갑니다.

2019-05-24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4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9-05-26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대로 해석이 안 되는 소설을 읽고 나면 띠이용... 합니다. 한 번 더 들여다보다가 그래도 모르겠으면
나중에 뭔가 더 알 때 그때 읽자, 하고 독서를 끝냅니다. 소설가들의 뇌 구조가 궁금해집니다. 분명히 뭔가
말하려는 게 있을 텐데, 독자가 찾지 못하게 꼭꼭 숨겨 놓다니...

이번에 보르헤스의 짧은 소설을 모아 놓은 <픽션들>을 구입해 놨는데 이것도 어려울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으음~~~ 뭐 모르면 모르는 재미로 읽는 거죠.

syo 2019-05-26 22:35   좋아요 1 | URL
앗, <픽션들> 재미있습니다.

음, 평소보다 읽는 속도를 조금만 늦추시면 즐거운 독서 경험을 하실 것 같습니다!! ㅎㅎㅎㅎ

뒷북소녀 2019-06-03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제 장바구니에 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