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 사진관

 

작년 오늘, 신림동에는 비가 왔다. 나는 옥상에 올라가 비를 보고, 듣고, 만지다가 슬쩍 젖어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유독 비가 많았던 여름, 파란 함석지붕 처마 아래서 누군가와 함께 비를 긋던 어느 여름을 떠올리며 짧은 글을 남겼다. 골목길 모퉁이를 돌다 그 여름과 마주치기라도 한 것처럼.

 

이미 지나간 여름을 오늘에 덧대는 일은 참 부질없다.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으깨진 빗방울이 더는 빗물이 아니라 그저 쏟아진 한 덩이의 물일뿐이듯이. 또한 구름으로부터 지상까지 젖은 허공을 그으며 떨어져 내리는 동안만 비가 비이듯이, 여름은 내가 그 안에 있는 동안만 여름이었다. 바깥에서 돌아보면 그것은 한낱 지나간 계절일 뿐이었다. 지나간 여름은 이제 여름이 아니다. 그 여름처럼 나를 뜨겁게 끓이지 못하기 때문에라도. 그러니까 비가 뭐든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셈이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느 애틋한 시절의 사진 한 장을 지니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사랑은 순간에 박제된다. 그날 그곳 그와의 사랑은 보존될 수는 있으나 재현될 수는 없다. 다시 그를 만나도 더 이상 그는 그가 아닐 것이다. 여기는 그곳이 아닐 것이다. 그때가 아닐 것이다. 기적처럼 그날 함석지붕 아래의 그 장면 속으로 다시 돌아간대도, 이젠 내가 그날의 내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사랑을 둘러싼 많은 조언들 가운데서도 좀 식상한 축에 들긴 하겠으나, 그저 아는 사람과 알고 나니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아는 사람은 셈이 다를 수밖에 없다. 오늘의 사랑이 어제와 다르다면 그건 오늘이 어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가 거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지붕 아래서, 나와 당신은 매순간 변하고 있다.

 

사랑을 크기나 무게의 문제로 여기는 순간 어제의 사랑이 오늘의 사랑을 목조르기 시작한다. 어떤 것도 무한히 커지거나 한없이 무거워지기만 할 수는 없으므로 변화는 종종 변질로 오해받고 변모는 얼른 소모로 읽히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사랑은 한 손에 붓, 다른 손에 자신이 좋아하는 색의 페인트 통을 든 두 사람이 커다란 캔버스 앞에서 만나 서로의 구도를 버무리면서 추상화를 함께 그려가는 과정에 가깝다. 당연히 그 그림은 형태와 색채가 계속해서 변할 테고, 우리가 오늘의 그림을 또다시 그려낼 확률은 어차피 극히 낮다. 그러니 나와 당신은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어깨를 붙이고 앉아 손에 든 커피 잔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수증기 너머로 오늘 우리가 그린 그림을 조용히 응시할 필요가 있겠다. 아무래도 다시 만나지는 못할 이 작품을 구석구석 살피고 만지고 알아채서, 오늘의 이 그림에서 내일의 새 그림이 시작될 것을 받아들이는 것. 내일의 그림은 조금 다를 것임을 미리 인정하는 것. 그리고 기대하는 것.

 

내일, 다음 주의, 그리고 그보다 더 먼 어느 날의 그림을 더 잘 그리려는 욕심에 오늘의 그림을 소홀히 그리지 않는 것.


오늘도 작년처럼 비가 온다고 한다. 하늘이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머그잔을 채우고 조용히 비를 기다리고 있다. 창틀에 화분 하나를 올려놓았다. 키 작은 줄기, 귀여운 잎사귀가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기는 대구다.


 


 

비는 당신 없이 처음 내리고 손에는 어둠인지 주름인지 모를 너울이 지는 밤입니다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광장으로 마음은 곧잘 나섰지만 약을 먹기 위해 물을 끓이는 일이 오늘을 보내는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한결 나아진 것 같은 귓병에 안도하는 일은 그 다음이었고 끓인 물을 식히려 두어 번 저어나가다 여름의 세찬 빗소리를 떠올려보는 것은 이제 나중의 일이 되었습니다

박준겨울비」 전문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던 작년 가을을 생각해본다천장에 금이 가는 줄도침대 밑에 먼지가 쌓이는 줄도 모를 정도의 사랑이었지만 악의와 당황 속에서 그 사랑은 어떻게 끝나버렸던가그러나 장차 우리를 죽이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다이는 현기증에 고생하던 남자가 택시에 치여 죽어버리는 경우와 비슷하다나는 낭비할 시간이 없음에도 내게 주어진 날을 낭비하고 있다.

존 치버존 치버의 일기

 

 

 

--- 읽은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 11 / 박시백 지음

본격 한중일 세계사 1 / 굽시니스트 지음

루쉰 문학선 / 루쉰 지음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 허수경 지음

누구를 위한 높이인가 / 박현찬, 정상혁 지음

 

 

--- 읽는 ---

인간 루쉰 / 린시엔즈 지음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고미숙 지음

멜랑콜리 해피엔딩 / 강화길 외

문장의 온도 /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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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4-23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오면 좋을 날씨인데...^^ㅎㅎ

syo 2019-04-23 13:46   좋아요 0 | URL
온다던데요? 3시쯤에는 온다고 네이버가.....

레삭매냐 2019-04-23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랑은 순간에 박제된다

캬하, 정말 멋진 표현인 것 같습니다.


비가 내리면, 밤중에 몰래 빠져 나가
닭똥집에 막걸리나 한 잔 하고 싶네요.

예전에는 참 비가 내리는 날을 좋아했
더랬죠... 그땐 그랬더랬죠.

syo 2019-04-23 14:07   좋아요 1 | URL
닭똥집에 막걸리를 먹어본 적은 없지만 어쩐지 입맛이 다셔집니다 ㅎㅎㅎ

동그란 양철 테이블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면서 가게 유리문 너머로 비 내리는 걸 보던 기억이 나네요.... 아, 좋은 그림이다.

설해목 2019-04-23 15:47   좋아요 2 | URL
얼마전 연남동에서 오돌뼈에 소주를 마시는데 정말 맛나더라구요.
오돌뼈가 좀 느끼할 수도 있는데 그 집은 파채를 곁들여서 진짜 중독되는 맛이었습니다! ㅎㅎ
비내린다고 하니 별의별 안주가 다 떠오르네요. 이렇게 나이를 먹는 건가요. 센치 대신 입맛 다시며...ㅋㅋㅋ

2019-04-23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3 16: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3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9-04-23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비가 왔으면 좋겠어요.
지금 밖이고 우산도 없지만..
비가 왔으면... 여기는 서울입니다^^

syo 2019-04-23 16:15   좋아요 0 | URL
여기는 소슬소슬 오는 중입니다.
비는 좋은 거니까, 우리 나눠 먹어요 ㅎ

설해목 2019-04-23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어디에 사랑이란 게 있지? 사랑은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사욕을 모르는 헌신적인 것 아닌가?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헌신적이어야 해, 인생을 바치고 고뇌도 마다 않는 그런 사랑은 결코 노동이 아니지. 일종의 기쁨인거야. ... 사랑은 비극일 수밖에 없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신비야! 그 어떤 삶의 안락, 계산, 그리고 타협도 사랑과 관련지어서는 안 되는 법이야˝ _ 알렉산드르 쿠프린의 <석류석 팔찌> 중에서...

오늘 외근길에 저런 글이 담긴 단편소설을 읽고 아침부터 사랑이 뭘까... 그러던 차에 syo님의 글을 봤네요.

서울과 대구의 물리적 거리만큼 syo님의 어떤 거리는 짧아졌으려나요. 아님 길어졌으려나요.
여기도 아직 비님이 올 기척은 없네요. 따뜻한 봄비 기다려지는 오후입니다. ^^


syo 2019-04-23 16:18   좋아요 1 | URL
뭔가 어마무시한 애정관이네요. 저러다 사랑이 없어지겠어요 ㅎㅎㅎ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정말.

사랑이란 게 답이 없는 것 치고는 사랑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에게 언젠가 어떤 형식으로든 보답을 해주는 놈이잖아요. 설해목님의 사랑생각을 응원하고, 계신 곳에 봄비 내리는 일도 응원합니다^-^
 

눈물의 에움길

 

 

1

 

도서관에서는 가끔 재미난 일이 벌어진다. 대체로는 사람에 관련된 일이다. 언젠가는 꼭 도서관에서 마주친 인물 군상과 그들이 촉발한 사소하고 소소한 사건들에 대한 에세이집을 출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뻔 했을 정도다. 할 뻔 했습니다. 하지 않았다구요.

 

syo가 다니는 도서관은 대구에서 가장 큰 시립도서관으로 2층에 종합자료실, 3층에 인문자료실이 배치되어 있다. 한 주에 한번 꼴로 가는데, 도서관 내 동선은 거의 일정하다. 2층 반납, 3층 반납, 3층 대출, 2층 대출, 마지막으로 다시 3층 대출. 3층 대출이 두 번인 이유는 3층과 2층의 신간 서가를 한 번씩 다 들여다보고 나서야 어떤 아이들을 업어갈지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3층에서 반납을 마치고 나면 가장 가까운 자리에 겉옷과 가방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서가 탐색에 나선다. 이번 사건은 바로 이 지점에서 벌어졌다.

 

syo가 가방을 내려놓은 맞은편에는 할아버지 한 분이 오른손 아래는 노트를, 왼손 아래는 한자가 득시글거리는 책 한권을 깔고서 서릿발 같이 꼿꼿한 자세로 필사에 집중하고 계셨다. 회색 바탕에 흰색 선들이 직교하는 무늬의 빵모자를 쓰셨는데, 그걸 그대로 들어 올린 다음 갓이나 탕건으로 바꿔드리면 순식간에 도서관이 도산서원이 될 것 같은 그런 노론소론한 인상이시랄지, 태풍이 몰아쳐도 읽던 책을 다 읽기 전에는 빨래를 걷지 않을 것 같은 매란국죽한 지조가 엿보였달지. 그런 할아버지였으나 syo가 내려놓은 가방을, 정확히는 가방에 붙어 있는 붉은색 핀버튼을, 더 정확히는 그 붉은 핀버튼 속에 그려진 수염 난 세 남자의 정체를 식별하고 난 후에는 마치 단발령 선포 소식을 접한 구한말 서당 훈장님 같은 표정이 되어 가방과 syo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세 번씩 바라보시었다. 못 본 척 하고 돌아섰지만 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이런 걸 가방에 달고 다니는 놈이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에겐 굉장히 불편한 일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특정 지역에는 불편할 사람이 유독 많을 수도 있고.

 

요기 요 빨간 것(출처 : 레닌전집 페이스북 페이지)

 

네 이놈,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당장 그 흉물스러운 것을 떼어버리지 못할까! 라고 저쪽에서 선빵을 날려 오지 않는다면 그저 불편한 눈길을 던지는 것을 가지고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걸 잘 알지만 이쪽은 또 원체 못되 쳐먹은 성품이라 짓궂은 장난을 치고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샘솟는 것이다. 그리하여 빌릴 생각도 없었던 이 책을 굳이 빌려서 책상 위에 떡, 할아버지가 제목을 잘 볼 수 있는 각도로 내려놓고서는 총총히 2층으로 내려갔다.


이 책

 

2층에서 몇 권을 빌려 다시 올라와보니 할아버지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떠나신 뒤였다. 사특한 syo의 군세를 척살하고 무너진 나라의 법도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의병을 모집하러 가신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그나저나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이제 이런 심보는 좀 고쳐야 하지 않을까.

 


  왜보통 내가 누구한테 상처를 줬을 땐 나도 모르게 그러는 경우가 많잖아물론 작심하고 할퀴고 싶을 때도 있지만 나는 사람들이 언제나 타인을 찢어발길 준비를 하고 산다고 생각하지 않거든?

 

  그렇다고 해도 내가 부지불식간에 타인에게 상처를 입힌 게 무죄가 되진 않아상처를 받은 사람이 과민한 게 아니라거기까지 미처 배려하지 못한 내가 무심했던 거라고 생각하는 게 현대 지성인의 자세 아닐까?

  

  그러니까 모르는 건 죄야.

  늘 죄인의 마음으로 살아.

김나연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2



이런 유형의 갖가지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끝끝내 불온한 핀버튼을 포기하지 않을 정도로 맑 선생님을 사랑하는 syo지만, 유감스럽게도 선생님은 인간적으로는 빼박 하자다. 무슨 하자하자 열매라도 드신 것 마냥 이 주제로 몇 번을 이야기해도 중복되지 않을 만큼 하자 에피소드가 풍부하신데, 이번 시간에 소개해드릴 에피소드는 충격! 맑스-엥겔스 결별설?’ 되겠습니다.

 

엥겔스 선생님은 보기 드물게 훌륭한 남자다. 당최 왜 이런 분이 저런 콧수염 달린 멧돼지 같은 불한당이랑 절친을 맺었는지, 전생에 무슨 업을 쌓았기에 돈 뜯겨(20세부터 계산하여 죽을 때까지 맑스가 쓴 돈의 과반은 엥겔스의 호주머니에서 나옴), 글 뜯겨(맑스가 악플 배틀이나 뜨며 재능을 낭비하는 동안, 마감이 코앞에 닥친 맑스의 원고는 엥겔스의 펜끝에서 나옴), 명예 뜯겨(맑스의 부인 예니가 임신하여 배가 부른 동안, 그 집 하녀 헬레네 데무트도 어쩐지 임신을 하였는데, 그 아이 아버지가 엥겔스인 것으로 쳤음’)..... 그러나 엥겔스는 일생 그런 대접을 당하면서도 딱 한번을 제외하면 결코 맑스를 원망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딱 한번이 이번 한번인데,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공장주의 아들이었던 청년 엥겔스는 공장 노동자 메리 번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교육받은 중간계급, 부르주아의 아들은 문맹의 노동자 여인을 그 여인이 죽는 순간까지(아마 엥겔스가 죽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사랑했다. 그 슬픈 순간은 18631월의 어느 날이었다. 마르크스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무어에게,

  메리가 죽었다네메리는 어젯밤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네리지가 자정 직전에 잠자리에 들다가 메리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았네이미 메리는 죽은 뒤였지아주 갑작스러운 일이었네심장마비나 뇌졸중 발작인 것 같아나는 오늘 아침에야 이야기를 들었네월요일 저녁까지는 아주 건강했는데내 감정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네그 가엾은 여자는 온 마음으로 나를 사랑했는데.

  FE

 

그리고 며칠 뒤, 엥겔스에게 답장이 도착했다. 그 편지는 위로라는 목적에 걸맞게 메리가 죽었다는 소식에 나는 경악했네. 그렇게 착하고 재치있고, 또 자네 곁에서 늘 마음을 써주었는데.”로 시작하긴 했으나 이내, 도대체 요즘 우리는 왜 이렇게 불행한가, 나는 요즘 갈피를 잃었다, 기금을 모아서 어떻게 해보려 했는데 망했다, 하도 외상을 져서 이제 아무도 외상을 안 준다, 애들 학비랑 집세 독촉이 끝도 없다, 이런 마당에 내가 어떻게 일을 계속 하겠는가, 따위의 길고 익숙한 신세한탄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다시 이런 때 이런 참담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매우 이기적인 일이지.” 라는 한 줄을 보태어 스스로의 이기심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이기심을 부정한 다음, 이게 다 내 불운을 알려 자네의 불운을 덜어보려는 동종요법의 일환이라는 식으로 깝치기 시작하더니, 전당포에 맡겨져 있는 자신의 옷들과 신발들에 대한 TMI를 제공하고, 이내 다음과 같은 기상천외한 멘트로 편지를 마무리한다. “메리가 아니라, 어차피 병도 들고 또 살 만큼 산 우리 어머니가 죽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 환경의 압박에 시달리는 문명인의 머릿속에는 별 이상한 생각이 다 찾아온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 안녕.”

 

아무런 답장을 받지 못한 닷새 동안, 아마도 맑스는 심장이 한껏 쫄깃쫄깃했을 것이다. 혹시, 엥겔스가 빡친 것은 아닐까? 내가 편지에다 무슨 실수를 한 건 아닐까? 어쩌지, 이틀만 엥겔스가 연락을 끊어도, 사흘 뒤부터는 밥을 굶어야 하는데, 아아아 나는 어쩌지...... 그러던 와중에 마침내 엥겔스로부터 답장이 도착했다. 늘 다정한 별명, ‘무어에게로 시작했던 기존의 편지를 떠올리면서, 맑스는 첫 줄부터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이번에는 내가 당한 불행과 자네가 그 일을 바라보는 차가운 태도 때문에 자네한테 더 일찍 답장을 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네자네도 그럴 만하다고 생각할 걸세내 모든 친구들과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일 뿐인 속물들까지도 이번에 나에게 깊은 충격을 준 이 일을 두고 내가 바랐던 것 이상으로 나에게 동정과 우정을 보여주었네하지만 자네는 이것이 자네의 냉정한 태도의 우월성을 보여주기에 적당한 기회라고 생각한 모양이지그럼 그렇게 하게나! 

 

다 읽은 편지를 탁자에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 쉰 순간부터, 맑스 인생 최악의 몇 주가 시작된다. 그 와중에 예니는 맑스에게 왜 우리 형편이 이 모양 이 꼴인 것을 엥겔스에게 더 일찍 알리지 않았냐고 비난하고, 맑스는 엥겔스가 무슨 ATM기냐고 맞받는다(누가 할 소리를). 결국 부부싸움은 맑스가 법정에서 파산신고를 해야 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세부사항으로 첫째, 딸들은 가정교사 일자리를 알아본다. 둘째, 충실한 하녀 헬레네는 다른 곳으로 일자리를 옮긴다. 셋재, 맑스와 예니는 막내딸 투시를 데리고 빈민 구호시설로 들어간다. 이것이 런던의 맑스 패밀리가 내린 결론이었다. 아마 실제로 그렇게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기보다는, 엥겔스에게 보낼 사과편지에 그런 비참한 결정사항들을 첨부함으로써 동정을 사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의심할 만한 대목이다. 맑스는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낸다.


  자네에게 그런 편지를 쓰다니 내가 크게 잘못했네사실 편지를 보내자마자 후회를 했다네그러나 내가 그런 편지를 쓴 것은 절대 냉정해서가 아닐세내 아내와 자식들이 증언을 해주겠지만자네 편지가 도착했을 때(아침 일찍 도착했네나는 나에게 가장 가깝고 가장 소중한 사람이 죽은 것처럼 비탄에 잠겼다네그러나 저녁에 자네한테 편지를 쓸 때는 극도로 절망적인 상황 때문에 압박을 받고 있었네집주인은 고물상을 집 안에 들여보냈고정육점에서는 외상값을 받으러 왔고석탄과 양식은 떨어져가고어린 예니는 아파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네이런 상황에서 보통 내가 기댈 곳이 냉소주의밖에 더 있겠나. 

 

한 권이 800페이지가 넘는 책 50권으로 이루어진 마르크스-엥겔스 전집 속에 있는 서신들을 싸그리 뒤져 보아도, 맑스가 누군가에게 진심을 다해 사과하는 편지는 이것 이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다는 후문이다. 그리고 도대체 호인인지 호구인지 알 수가 없는 엥겔스는 평소와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이 편지에 또 마음을 풀고 다정하게 화답한다.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해줘서 고맙네이제 자네도 자네의 지난번 편지가 나한테 어떤 인상을 주었는지 알게 되었군한 여자와 오랫동안 산 사람이라면 그 여자의 죽음에서 엄청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네나는 그 여자와 함께 내 젊음의 마지막 자취를 묻어버린 느낌이라네자네 편지가 왔을 때는 아직 장례를 치르기 전이었네솔직히 나는 일주일 동안 그 편지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네머리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더군하지만 신경 쓰지 말게자네의 이번 편지가 모든 것을 씻어주었네나는 지금 메리를 잃는 과정에서 내 가장 오래 되고 가장 좋은 친구도 함께 잃지 않은 것이 기쁘다네.


어쩐지 안심의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있는 맑스의 모습이 떠오른다. 살았다! 호구가 돌아왔다! 엥겔스는 즉시 맑스 가족을 고난과 멸시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낸다. 자기도 여윳돈이 없는 처지라, 아버지 회사의 서류함에서 1백 파운드짜리 수표를 훔쳐 배서하는 방식으로......

 

보면 볼수록 하자. 그러나 사랑하는 하자. 아니, 어쩌면 저렇게 하자라서 더욱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맑스의 더티 섹시 그물에 걸려 파닥거리는 한 마리 나방 syo. 아니지, 내 옆에서 파닥거리고 있는 저 거대한 장수풍뎅이는 혹시 엥겔스 선생님이 아니신지. 하자라고 실컷 욕하면서도 좋아하는 이 헤어날 수 없는 감정의 요란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당신은 아십니까, 엥 선생님......

 

 

 

3



이 안에 네 개의 이름이 있다. 김금희, 박상영, 강화길, 김봉곤. syo는 언제나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그들의 글을 받아 읽기를 항상 앙망하옵는데, 그러다보니 어쩐 일인지 syo는 알라딘에서 이런 사람이 되었다.

 


이건 무슨 합성같군.

 

이 네 작가 중에 두 명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책이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빌리는데, 심지어 그 중 하나가 김금희라면 사실상 나머지 이름은 또 거들 뿐이다. 울면서 빌린다. 흑흑, 죄송합니다. 사지를 못하고 빌려 읽어서 죄송합니다......

 

 

 

4

 

그러나 사실, 이런 날 개구진 글을 올리는 것은 썩 개운치 않다.

  

젓가락내 마음은 황학주

 

 내 마음은 오래도록 바짝 마른 것에 가 있었다

 

 고아원이 밤의 굴뚝을 울려대는

 새 울음소리 뒤로 옮겨가고 없는 밤에

 나는 시름해진 꿈들을

 곧잘 눈에 잘 띄는 선반에 올려놓곤 하던

 젓가락처럼 몸이 긴 원장을 생각한다

 

 이런 날 내 마음은

 물배급차를 끌고 다닌 길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입에 물려 있던 물을 간신히 다른 입에 밀어 넣던 아이의

 희미한 이름도 간직하고 있다

 별이 두 개나 세 개씩 하룻밤에 떨어지면

 흙칠을 한 호수 옆에 묻어야 했던 그 길을

 

 가지고 있다 내 마음은

 물이 없어 문을 닫은 고아원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주면

 기력을 다한 살핏한 눈빛을 내 귀에 대고

 고맙다고 하던 아이는

 쪼개기 전의 나무젓가락처럼 두 다리가 바닥에 붙어 있었다

 

 지평선에 해 빠질 동안

 아이들을 세상 밖으로 가만히 달아나게 해주고 싶었다

 마른 발등이 병실을 옮기는 긴 허방 붉디붉어도

 우리는 무비나 에이즈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지만

 

 옮겨 심은 나무들이 더 이상 자라지 않아

 어느 귀신이 그걸로 새 젓가락을 만들고 있으리라

_ 황학주, 「젓가락, 내 마음은」전문

 

그날, 나는 파주에 있었다. 다 먹지 못하고 잘라 넣어놓은 생일 케이크가 아직 냉장고에 있었다. 남쪽 바다에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시각 서울 한복판에서도 역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있을 사랑하는 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보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사람이 다니던 학교에서도 여행을 계획 중이었을 것이다.

 

파주에 있는 한 원룸에서, 나는 다리를 끌어안은 자세로 바닥에 앉아 남쪽 바다를 생각했다. 그 바다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그 사람이 데리고 떠난 아이들이 갇혀 있는 상상을 했다. TV로 쓰던 모니터 속에서 배는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고, 방바닥 위의 나도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그날을 이렇게 기억한다. 저녁이 되자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와 불 꺼진 방 가운데 앉은 나를 가만히 안아 일으켜주었다. 우리 두 사람은 울지는 않았지만 이미 울고 온 마음이었다. 그날은 웃지 않았다. 그날은 유독 꼭 껴안고 잠이 들었다. 창문을 꼭꼭 닫아도 어디선가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빨래가 밤새 다 마르지 않았다. 아침에는 달리러 나가지 않았다. 제일 먼저 한 일은 TV를 켜는 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학교에 가고, 나는 남은 케이크를 마저 먹었다. 냉장고 속에 오래 든 케이크는 축축했다. 다시 울고 싶었다.

 

잊지 않겠다는 말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내가 잊지 않겠다고 한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날을 저렇게 기억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상상 속 바다에 빠뜨려보지 않고서는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었으므로, 내가 잊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은 아이들의 이름이나 사건의 진상 같은 것들이 아니라, 그저 그날 나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오늘이 그날이라고 누군가 말해주기 전까지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듣고 나서 제일 처음 떠올린 것도 다름 아닌 그날의 나였다. 그날 울지 못하여 차마 버리지 못한 슬픔 속에 웅크리고 있던 나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상상 속의 서러운 나와, 나와, 나와, 나와, 나였다. 그 모든 나를 불러내 하나하나 다시 거치고 난 후에야, 거짓 없이 슬픈 눈을 하고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내가 그런 사람이다. 남의 일에 진심으로 슬프기 위하여 먼저 해야 할 내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이다. 노란 리본을 가방에 걸고 다니기에는 부박하고 비루먹은 마음이다.

 

다시 오늘이 와도, 아마 나는 그럴 것이다. 내 눈을 먼저 적신 다음에야 그 사람들을 기릴 것이다. 나는 아직 슬퍼하는 방법을 더 많이 배워야 한다. 돌아가지 않고 바로 가기 위해서. 상상하지 않고도 타인의 슬픔에 기꺼이 몸을 적실 수 있기 위해서.


 

 "한 가지만 더 봐야겠어요."

 "서둘러주세요."

 "10분만 주세요."

 "알았어요."

 내가 막 돌아서려고 할 때그가 다시 말했다.

 "그냥 모든 걸 잊으세요그게 더 쉬워요."

 "뭐가 더 쉽다는 말이죠?"

 그가 담배를 창밖으로 던지며 말했다.

 "살아가는 것이요얼마나 더 봐야 합니까내가 당신의 수고를 덜어드리지요당신이 기억하는 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요잊는 게 최선입니다."

 "나는 더 이상 잊고 싶지 않아요. 10분만 주세요."

할레드 호세이니연을 쫓는 아이 

 

한 인간의 내적 삶에는 그가 포함된 사회의 온갖 감정의 추이가 모두 압축되어 있다한 사회에는 거기 몸담은 한 인간의 감정이 옅지만 넓게 희석되어 있다한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 슬픔은 이 세상의 역사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믿어야 할 일이다한 인간의 고뇌가 세상의 고통이며세상의 불행이 한 인간의 슬픔이다그 점에서도 인간은 역사적 동물이다.

황현산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 읽은 ---

마르크스 평전 / 프랜시스 윈 지음

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 김나연 지음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 이종산 외 지음


 


--- 읽는 ---

인간 루쉰 / 린시엔즈 지음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고미숙 지음

루쉰 문학선 / 루쉰 지음

자본을 넘어선 자본 / 이진경 지음

저녁의 연인들 / 황학주 지음

꽃을 보듯 너를 본다 / 나태주 지음

레닌 평전 1 / 토니 클리프 지음

도시재생 이야기 / 윤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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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4-16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로 주변에 맑스 같은 민폐형 인간이 있다면 참 싫을 것 같습니다만... 엥 선생님은 볼수록 정말 대인배 같습니다.

syo 2019-04-16 17:11   좋아요 1 | URL
정말 그렇습니다. 세상에 엥 선생님만 있고 맑 선생님이 없었더라면 <자본> 같은 위대한 책이 태어나지 못했겠습니다만, 그건 맑 선생님만 있고 엥 선생님이 없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습니다.

붕붕툐툐 2019-04-16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마주친 할아버지 묘사에서 빵 터졌네요~ 도산서원이라니...하하핫! 그나저나 대구의 저 도서관에 가면 syo님을 뵐 수 있는 겁니까?

syo 2019-04-16 19:38   좋아요 0 | URL
ㅎㅎㅎ 화요일의 아침 시간대에 저 도서관에 오시면 야생의 백수포켓몬 syo를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2019-04-16 2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4-18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드스타킹 남성 멤버 중에 철학을 혼자 공부하는 분이 있어요. 일전에 한 번 언급했을 거예요. 헤겔을 공부한다고요. 지난달에 중앙도서관에 갔는데, 그 분을 우연히 만났어요. 제가 뭐했냐고 물어봤는데, 열람실에서 책을 읽었다고 했어요. 아마도 두 분, 중앙도서관을 거닐다가 한 번이라도 스치듯 마주쳤을 거예요. 최근에는 독서실에 등록해서 프로이트 전집을 읽는 중이래요... ㅎㅎㅎㅎ

syo 2019-04-19 09:27   좋아요 0 | URL
그분의 열정과 공력에는 항상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syo가 언제나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꼭 전해주시길 바랍니니다 ㅎㅎㅎㅎㅎ

NamGiKim 2019-04-21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오쩌둥 평전 작년 이맘때쯤 공익근무하며, 근무시간에 소방서에서 읽었습니다. 물론 넘사벽 분량이린 읽는데 시간이 꽤나 걸렸지만요.

syo 2019-04-23 13:27   좋아요 1 | URL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평전이 새로 나왔잖아요.
NamGi님께서 그것도 읽고 저 평전이랑 비교해서 페이퍼를 올려주셨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쪽 계통으로는 또 NamGi님께서 탄탄하시잖아요.

그랬는데 복학을 하셔서 시간이 없으시군요...... 슬픈 소식 감사합니다.....

NamGiKim 2019-04-21 1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요즘 학교다니니 책을 읽을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ㅜㅡㅜ

NamGiKim 2019-04-21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닌전집 페이스북 페이지 저도 좋아요 해놓았는데.ㅎㅎㅎㅎㅎㅎㅎ

2019-04-21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3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토큰 2019-04-23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 님이라면, 사지 않고 빌려 읽으셔도 작가님들이 좋아하실 듯 합니다 :)

syo 2019-04-23 13:32   좋아요 1 | URL
아이구 ㅎㅎㅎㅎ 감사합니다.....만, 아마 아닐 걸요? ㅎㅎㅎㅎ

어떻게 댓글로라도 한 번 인사를 튼 작가님들의 책은 사서 읽는 주의긴 한데,
아는 작가님들이라 해 봐야 한 손에 꼽다 보니 그런 주의가 있으나 마나네요. 으하하하.
 

 

자신을 꾸미기 위해 역사를 오남용하지 말 것

 

 

1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듯이, 남루한 인생에도 생일은 온다. 따박따.

 

 

 

2

 

어른이 되는 일, 그것은 인생 한마당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는 서글픈 진실을 깨닫는데서 시작된다. 그걸 모르는 상태로는, 팔자주름이 알바에서 계약직, 계약직에서 정규직이 될 때까지 꾸역꾸역 살아봤자 어엿한 어른이 되지 못한다. 보험도 안 되는 중2병을 고2때까지 앓았던 syo에게 어른의 삶이란 한없이 요원한 것이었다. 당시 syo가 보건대, syo는 도저히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래야 아닐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잘 생기고(아니다), 이렇게 똑똑하고(틀렸다), 이런 역경 충만한 유년기(고만고만했다)를 보내면서도 착한 심성(아이고, 멍청한 놈아)을 유지하는 것은, 내가 책을 많이 읽어서(정석을 읽고앉았으니 성적이 안 나오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격이 저절로 도야된(맞고 싶냐?) 탓인가. , 젠장, 거기다가 글까지 잘 쓰다니(염병하네), 뭐지? 난 왜 이렇게 완벽하지?(, 정말 뭐지, 이 새끼는....)

 

 

 

3

 

요즘이야 핸드폰이 워낙 좋아서 마음만 먹으면 2019년이 아니라 2019세기의 추석 연휴까지 알아낼 수가 있지만, 이 단락에서 하려는 짧은 이야기는 핸드폰은커녕 무선 전화기조차 산업혁명 대접을 받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리고 syo가 하는 이야기가 언제나 그렇듯, MSG가 참 풍부하다. 취향에 맞게 거품을 걷어내고 드시기를 추천합니다.

 

한 해가 마무리 될 때쯤이면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입수된 새해 달력이 집에 쌓인다. 일단 달력이 손에 들어오면 설과 추석 연휴가 어떤 모양새로 포진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당연히 첫 번째 할일이었고, 그러고 나면 내 생일이 무슨 요일이 될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4월로 되돌아가곤 했다. 언제부턴가 내 생일 아래에 臨時政府樹立記念日이라는 기묘한 상형문자가 찍히기 시작했다.

 

아빠, 여기 이상한 거 적혀 있어. 내 생일 왜 이래? syo가 물었다. 아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해독을 시작했다. 보자..... .......립기념일? 시정...... 시정부..... , 임시정부수립기념일! 아빠가 신이 났다. 그렇지, syo엄마, 이거 임시정부수립기념일 맞지? syo엄마는 꿀도 안 먹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빠, 임시 그게 뭔데? 이번 벙어리는 아빠였다. 아놔, 이 엄마 아빠가 나 몰래 꿀 먹고 다니나? , 임시정부 좋은 거지, 훌륭한 거지. 그 일제시대에..... 일제시대가 뭐야? , 일본 놈들이 막 쳐들어와서..... 아빠, 나 그거 알아. 이순신 장군님이 물리쳤잖아. 거북선! 거북선! 아니, 그때가 아니라..... 그때가 아니야? 그럼 일본 놈들이 또 쳐들어왔어? 아빠, 일본 놈들은 왜 자꾸 쳐들어와, 쳐들어오길? 걔넨 원래 그래...... 그럼 일제시대도 이순신 장군님이 물리쳤어? 아니, 일제시대는 그러니까 김구...... 아빠, 김구는 뭐야? 아빠, 근데 나 요즘 학원에서 구구단 가르쳐준다? 이일은 이 이이 사 이삼은 육, 이사 팔, 이오 십오..... 하여튼 임시정부는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 나라를 되찾으려고 만든 훌륭한 단체야. 꼭 알아야 돼. 아빠, 그럼 임시정부가 좋은 거야, 정부가 좋은 거야? 다시 꿀 한 숟가락. ...... 아빠, 임시반장이 좋은 거야, 그냥 반장이 좋은 거야? 나는 반장이고, 영식이(가명)가 임시 반장이었는데......


얼추 저런 분위기였을 것이다. 아빠는 대충 알고, 엄마는 주방으로 슬쩍 물러나고, 동생은 배밀이를 시작하고, syo는 알고 싶은 것은 산더민데 구구단을 외우느라 긴 세월을 탕진하고...... 아름다우나 혼탁한 가정환경이었고, 구구단을 외우기 전에 이순신은 알아도 구구단을 외우고 나서도 김구를 모를 수도 있는 사회 환경이었고, 인터폰과 인터체인지는 있어도 인터넷은 없던 정보 환경이었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실체는 그저 희미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어쨌든 임시 정부는 수립기념일이 달력에 떡 박힐 만큼 좋은것이고, 그 좋은 날이 내 생일과 같은 날이라는 사실만이 뜻깊었다. 그것은 아무 날도 아니다보니 뜻 없는 甲午, 丙申 따위로 달력의 빈 공간만 채우는 날짜에 태어난 범인들과 syo를 차별화해주는 역사적 증거물이었다. 실제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syo는 누군가 생일을 물어오면 명확한 날짜 대신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이라고 알려주곤 했다. syo, 니 생일 언젠데? 임시정부수립기념일. ......? 임시정부수립기념일. ......그게 언젠데? ......? ......? ......모르냐? .......? ......모르네, 너 모르네. 한국 사람이 되서,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을 모르네, 저놈 저거. ......그래 모른다. 쯧쯔, 젊은이여, 널 보니 나도 모르겠다, 도대체 이 나라의 앞날이 어떻게 될려는지를. 뭐 이런 식이었다.

 

2병이 한참 절정일 때는 더욱 심각했다. 내 생일이 임시정부기념일이어서 내가 위대해지는 것을 넘어서, 마치 수립기념일이 내 생일이이서 임시정부가 위대해지는 것처럼 굴었다. 413? , 그날은 내 생일이고, 겸사겸사 임시정부도 수립되고 그랬지. 어느 해는 총선일까지 겹쳐 빨간 날 자격까지 받았는데, , 그때는 정말 눈 뜨고는 못 봐줄 정도였다. 이번 본인의 탄신일은 때마침 휴일이라 자네들이 참석하기가 참 맞춤할 걸세. , 국회의원 총선거라는 소소한 행사가 있다고 하니, 참석하기 전에 다들 가서 한 표씩 권리를 행사하고 오시게나. 본인의 탄신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국가의 안위 역시 그에 만만치 않게 중요한 일 아니겠는가. 아차차, 자네들은 아직 투표권이 없지?(지는) 그러면 그냥 휘 한번 둘러보시고 바로 걸음 하시게나. 주차 사정이 넉넉지 못하니 왠만하면 대중교통들 이용하시고. 아차차, 자네들은 아직 면허증이 없지?(면허증은커녕 민증도 없다허허허.

 

 

 

4

 

이런 종류의 만행들은 물론 살짝(살짝?) 기분 나쁠 수는 있었겠으나, 결국 친구들에게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이라는 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정책시행자의 의도를 제 멋대로 해석하는 소수 반골들이 있다는 데서 발생한다. syo, syo의 생일이 임시정부수립기념일임을 각인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이 syo의 생일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물으신다면, 2018년까지는 확실히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다. 그러나 때는 바야흐로 2019. 학계의 누적된 연구 결과와 그에 따른 지속적인 요구를 받아들여, 정부는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수립기념일을 기존의 413일에서 411일로 정정 발표하고 대대적인 행사를 벌였다. 옳고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어떤 곳인지도 잘 몰랐으면서 스스로를 반인반신으로 만들기 위해 그 권위를 이용하려 들었던 syo는 마침내 역사의 철퇴를 맞았다. 411, 임시정부수립기념일에 맞춰 전혀 예상치 못한 생일 축하 메시지를 몇 개 받고 만 것이다. 무려 20년에 걸쳐 만들어 낸 자승자박이다.

 

 

 

5

 

그러나 지금은 임시정부수립일을 빼앗겨 생일마저 빼앗기겠네.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속절없다는 말처럼 속절없이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않지 흐릿해지지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김사인화양연화(花樣年華)」 부분


때로는 한계가 가능성을 이겼고때로는 그 반대가 되기도 했다어쩔 땐 '이제 그만할까'하는 마음이 들었고어쩔 땐 '그래도 계속해 봐야지'하는 마음이 들었다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2년이 훌쩍 지나갔다나 자신과 지난하게 싸우며 지켜 낸 밀도 높은 시간이었다현재 점수는 이대일무승부서점을 그만두어야 할지 계속해야 할지 쉽게 판가름이 나지 않는다전반전에서 지나치게 힘을 쏟는 바람에 몸도 마음도 지치고 가벼운 부상까지 입었지만 덕분에 다음 시합에서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찾을 수 있었다이제 겨우 전반전이 끝났을 뿐이다.

정지혜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


이 세상에 살게 된 지 20년이 지나서야 이 세상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임을 알았다. 25년이 되어서야 명암이 표리인 것처럼 해가 드는 곳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서른이 된 오늘날에는 이렇게 생각한다기쁨이 깊을 때 근심 또한 깊고즐거움이 클수록 괴로움도 크다이를 분리하려고 하면 살아갈 수가 없다치워버리려고 하면 생활이 되지 않는다돈은 중요하다중요한 것이 늘어나면 잠자는 동안에도 걱정하게 될 것이다사랑은 기쁘다기쁜 사랑이 쌓이면 사랑을 하지 않던 옛날이 오히려 그리워질 것이다각료의 어깨에는 수백만 명의 다리를 지탱하고 있다등에는 무거운 천하가 얹혀 있다맛있는 것도 먹지 못하면 분하다조금 먹으면 성에 차지 않는다마음껏 먹으면 그다음이 불쾌하다.

나쓰메 소세키풀베개

 


--- 읽은 ---

이토록 보통의 / 캐롯 지음

단박에 조선사 / 심용환 지음

 

 

--- 읽는 ---

인간 루쉰 / 린시엔즈 지음

마르크스 평전 / 프랜시스 윈 지음

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 김나연 지음

루쉰 문학선 / 루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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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2019-04-13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생일이 4월달인대 뭔가 유사성이 느껴지네요 ㅋㅋㅋ

syo 2019-04-13 13:26   좋아요 1 | URL
ㅋㅋㅋ 앞으로는 짜라님이랑 생일이 같은 달이라는 걸 이용해서 제 위대함을 꾸며내야겠네요.

설해목 2019-04-13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 왕왕 축하해요. syo님.
제 아는 지인은 올해부터 바뀐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이라서 이제 절대 까먹지 않으려구요. ㅎㅎ
그 지인 생일을 기억하다보면 자연스레 옛임시정부수립기념일에 태어난 syo님 생일도 기억하게 될 것같아요. ^^
오늘은 좀더 특별하게 보내셔요. ^--^

syo 2019-04-13 13:3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ㅎㅎㅎ

지인 분이 제게서 임정수립일을 빼앗아가셨군요..... 축하의 말씀을 전해주시고, 저 대신 수립일한테 잘 해 주시라고도 전해주세요. 저 같은 놈 만나서 고생이 많았던 우리 수립일이..... 안녕, 행복해라....

겨울호랑이 2019-04-13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생일 축하합니다. 행복한 하루보내세요!

syo 2019-04-13 13: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언젠가부터 생일이 비생일보다 덜 행복하기 시작했지만, 모른 척 행복한 하루 보내고 말겠습니다 ㅎㅎ

몰리 2019-04-13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 축하합니다!
이 글을 읽은 저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거 같습니다.
무엇이든 바로 바로 잊을 수 있는 나이에 ˝이건 영원히 기억된다˝ 확신하는
기쁨 .... 잠시 맛보았습니다.

syo 2019-04-13 14:19   좋아요 0 | URL
그 기억이 하필 아무 쓸모 없는 날짜에 관한 것이라서 폐를 끼쳤습니다.
더 좋은 정보였으면 좋았을텐데요 ㅎㅎㅎ

단발머리 2019-04-13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생일 축하해요!! 학계의 누적된 연구결과가 얄밉네요. syo님 생일 끝까지 임정이랑 함께 할 수 있었는데... ㅎㅎㅎㅎㅎ
<풀베개> 문단은 저도 좋아했던 거예요.
... 조금 먹으면 성에 차지 않는다.
마음껏 먹으면 그 다음이 불편하다.
특히 이 두 문장^^

syo 2019-04-13 15:0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오늘은 생일이니까 성에 차도록 먹고 그 다음이 불편할 생각이에요 ㅎ

무식쟁이 2019-04-13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를 좋아하시는 쇼님.
꽃비가 내리는 오늘이 생일이시군요.
아름답기도 하셔라.

syo 2019-04-13 15:38   좋아요 0 | URL
오늘 대구도 날이 정말 좋네요. 제 생일 같은 날 써먹기에는 과분할 정도로 좋습니다. 임정기념일이 떠나지만 않았다면 거기다 갖다붙일만한 날씬데..... 허허허.

stella.K 2019-04-13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 축하합니다. 따박따박.ㅎㅎㅎ
뭐 생일이 별겁니까? 오늘 하루 잘 지내면 그게 생일이지.
365일 중 하루는 내 생일 아니겠습니까?
너무 심한가?ㅋㅋㅋㅋㅋ
암튼 생일 잘 보내십시오.^^

syo 2019-04-13 15:39   좋아요 0 | URL
너무 자주 오네요. 이놈의 생일. 한 몇 년쯤 안보고 지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ㅋㅋㅋㅋㅋㅋ

감사합니다. 날씨도 좋은데(여기는) 스텔라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stella.K 2019-04-13 16:58   좋아요 0 | URL
캬~! 그럼 2월 29일 날 태어나면 좋았을 것을...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쩌자고 이런 꽃피는 4월에...
역시 4월은 여러모로 잔인하네요. 그죠?ㅋㅋㅋㅋ

다락방 2019-04-13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생일 축하해요, 쇼님! 우리가 안지도 어언..... 얼마나 되었지요? 아무튼 작년 생일에도 축하했던 것 같은데 올해도 역시! 내년에도 후년에도 계속 축하해줄게요!

syo 2019-04-13 15:40   좋아요 0 | URL
생각보다 얼마 안됐습니다. 작년에는 축하할 수 있었지만 재작년에는 그러지 않았던 그런 정도.... ㅎㅎㅎ 앞으로의 꾸준한 축하가 중요하겠어요. 제쪽에서도 마찬가지구요^-^

반유행열반인 2019-04-13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13!! 이상하게 오래 지나도 못 잊는 날짜들이 있는데 구임시정부수립기념일과 syo탄신일이 그런 날짜에 추가 되겠네요. 축하합니다.

syo 2019-04-13 22:01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어차피 곧 잊어버리실 겁니다. 그러나 내년 이맘때쯤 또다시 리프레시가 되시게 제가 만들 거구요ㅎㅎㅎ

독서괭 2019-04-13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 축하드려요~~^^ 이렇게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본인 생일을 잊지 못하게 만드시다니 ㅎㅎㅎ 2번 글 넘 재미납니다. 공감도 가고요......

syo 2019-04-13 22:01   좋아요 0 | URL
개수작입니다. 내년에도 또 이 멍뭉이수작을 부릴 겁니다 후후후하하하하.

북다이제스터 2019-04-13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신 감축드립니다. ^^

syo 2019-04-13 22:02   좋아요 0 | URL
아이구 감사합니다요 ㅎㅎㅎ 생신 ㅎㅎㅎㅎ 참신하네요

나비종 2019-04-13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양연화」. .마음에 남는 문장들이네요. .
생일 축하드립니다, syo님. 님의 글은 언제 읽어도 막 조깅을 끝내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을 때 기분좋고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는 느낌입니다. 내 몸에 흘렀던 땀을 씻고 뭔가 다시 시작하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힘을 주세요. 삶이 지칠 때 읽으면 위안이 되는 글입니다. 이런 이유로 감사하고 찡하고 그렇답니다. .^^

syo 2019-04-13 22:03   좋아요 0 | URL
제 글이 그런 엄청난 글일 거라고는 정말 예상도 못했습니다.... 이거 엄청난 생일선물을 받았네요. 감사합니다 나비종님^-^

서니데이 2019-04-13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생일 축하합니다.
임시정부 수립일에서 어느 날부터는 이틀 뒤의 날짜가 되신거군요.
어느 날이든 매년 돌아오는 생일은 좋은 날이고 축하를 받아야 하는 날인 것 같아요.
한 해를 무사히 넘기고 새로운 시간을 맞는 거니까요.
좋은 일을 많은 한 해 되시고, 건강하시고, 그리고 축하 많이 받으셨지만, 좋은 선물도 받으시면 좋겠어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syo 2019-04-14 12:32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ㅎㅎㅎㅎ
사실 바깥세상보다 알라딘에서 축하를 많이 받은 것 같아요. 글을 쓰기 전까지는 스스로도 별로 축하하는 기분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뭐 나도 좀 축하해보자, 하는 느낌이 되었달지요 ㅎㅎㅎ
서니데이님도 주말 마무리 잘하시구요^^

쟝쟝 2019-04-14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신축하 드려요 ☺️

syo 2019-04-16 09:58   좋아요 1 | URL
앗 ㅎㅎㅎ 늦었지만 감사합니다. 생‘신‘은 어쩐지 귓구멍에 턱 걸렸습니다만😣

또 봄. 2019-04-15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msg 좋아요.^^

syo 2019-04-16 09:5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또 봄님^-^ 맛 좋고 몸에도 좋은 msg를 제조할 수 있게끔 열심히 살겠슺니다 ㅎㅎㅎ

2019-04-16 0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6 1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6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6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6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 선생과 맑 선생

 


1


비가 펑펑 내린다. 아유 좋아.

 



2



쪼개고 쪼개서 읽기를 며칠, 겨우 150쪽 남짓 읽었지만 정작 루쉰 선생은 아직 루쉰이 되기도 전이다. 장서우(樟壽)로 불리던 어린 시절을 청산하고, 세상에 나가 수런(樹人)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집안은 애저녁에 망했다. 과거에 급제해 집안의 자랑이 되었던 할아버지는 뇌물을 받고 다른 사람의 과거 입격을 돕는 부정을 저지르다 삭탈관직 당했다. 그때 이미 아버지는 과거에 도전하였으나 결국 급제하지 못해 낙오자의 인생을 살다 술로 몸을 망치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이었으니 과거라는 것에 장서우가 학을 뗐을 만도 하다. 결국 인간은 기술을 배워야 인간이 된다는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의 금쪽같은 말씀처럼, 수런은 우선 함선기관사가 되고자 수군학교에 들어갔다가, 학교에 실망하고 이번에는 광산철로기술자가 되고자 광무철로학당에 들어갔다가, 학교가 폭망하고 마침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길이다.

 

여기까지 그의 인생도 참 파란만장하지만, 이제부터가 우리가 잘 아는 루쉰, 펜이 칼보다 강함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인간 루쉰의 참 일대기가 펼쳐질 것이다. 난 이걸 왜 알고 있지? 알고 있는데 왜 읽고 있지? 허허허.

 

 

 

3


 

한편 이쪽 역시 기어가는 속도로 250쪽 남짓 읽었는데, 마르크스는 사생아를 만들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쌩을 깠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아이가 개성적이다 못해 독창적이기까지 한 제 아버지의 외모를 복사해 붙여 넣은 고로, 뉘집 자식인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고 전한다.


마르크스를 참 좋아하긴 하는데 그런 내 마음과는 별개로 이 양반은 참 하자다. 싸움은 참 좋아하고, 말로는 당할 자가 없다보니 어지간하면 이긴다. 필요하다 싶으면 상대의 견해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기도 하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거친 인신공격도 마다하지 않는다. 엊그제까지 둘도 없는 친구래 놓고, 한 번 틀어졌다 하면 언론과 출판계에서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사람 하나 순식간에 조져놓는다. 마르크스의 치명적인 펜놀림에 짓밟혀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을 반동 핵폐기물로 전락한 인간이 한둘이 아니다. 웬만하면 모르고 지내고 싶은 참 피곤한 성격이다


친구로서 하자라면 남편으로 두고 지내는 것은? 그렇다면 그 생은 스킵하고 싶다. 마르크스 본인이 자조 섞인 어조로 인정하듯, 그가 제일 잘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생식이다. 발효곡물 마시는 그 생식 말고 하는 거...... 방도 두어 개 뿐인 작은 집에 하녀도 살고, 이미 낳아놓은 애들 세 명이 지치지도 않고 좁아터진 집구석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데도 어떻게든 기회를 잡아 또 애를 만든다. 하녀가 세 아이를 데리고 산책이라도 나가면 여지없이 생식을 시도한다.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가면? 그래도 생식이다. 하녀가 있으니까. 기왕 무진장 낳았으니 부족함 없이 기르기라도 하면 이런 말을 안 할 텐데, 아픈 아이 치료할 돈은커녕 결국 죽은 그 아이의 관 값조차 없어 어딘가에서 꾸어야 했을 만큼 경제적으로 무책임한 가장이었다. 한평생을 그랬다. 공산주의의 위대한 아버지는 자식에겐 별 볼일 없는 아버지였다.

 


 

4



새삼 느낀 거지만, 예전에는 지금보다 전례典例/前例를 중요시 여겼다. 신기할 정도다. 실록편찬 자체가 굉장히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훌륭한 인간으로 남고 싶은 최고 권력자의 압박에 맞서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고집은 사관에게는 목숨에 직접 관련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다. 그만큼 전례를 크고 무겁게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가령, 부인 장경왕후의 상제를 끝마치기도 전에 새장가를 들고 싶었던 중종이 가장 먼저 명한 일이 전례가 있는지 상고詳考해보라는 것이다. 전례가 있으면 비벼볼 수 있고 없으면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물론 나는 나고 옛날은 똥이라며 밀어붙이는 인간형은 언제나 있다). 잘된 사례와 망한 사례를 참고하여 일을 되게 만드는 방식으로 과거를 이용하는 요즘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옛 사람들이 시경詩經에 어쩌고 서경書經에 저쩌고 하며 오늘날 보면 택도 아닌 말로 제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5



  써놓고 보면 볼품없는 글이 대부분입니다특별한 사건도 없고뚜렷한 주제나 교훈도 없습니다종종 '이런 글을 왜 쓰냐?'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잊혀지는 것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보통 그런 것들은 근사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도리어 초라하고 남루한 경우가 많아굳이 들여다보고 싶어지지 않는 것들입니다문득 그 부재함을 깨닫지만특별한 감정은 생기지 않습니다없어져도 아쉽지 않은혹은 없어질 만했던 것들이라는 생각도 듭니다그래서 더욱 신경이 쓰입니다.

  저 역시 머지않은 미래에 자연스레 잊혀질 것이라는 걸 예감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그렇게 생각하니 저는 잊혀질 준비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마음의 준비 내지는 예행연습 같은 것이겠지요.

김보통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하필 발췌한 부분에서 중복 피동이 적발된 마당이라 이런 말을 하기 살짝 민망한 감은 있지만, 스스로 볼품없는 글이라 낮잡는 것을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라 믿기는 어려울 정도로 김보통 작가는 글을 잘 쓴다. 일단 온 세상이 칭송해 마지않는 간결한 문장, 쉬운 글을 구사하는데, 그 와중에 잘 웃긴다.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웃기는 것도 물론 어렵지만 간결한 문장을 구사하는 일은 syo에겐 특히 어렵다. 왜 안 되나 몰라. 늘 그걸 부러워하면서도, 늘 내 문장이 지저분하게 꼬불꼬불 길어진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대체 안 되는 건 왜 안 되지? 안 되는 게 되는 게 되면 왜 안 되지? 안 되는 게 되는 게 안 되는...... , 알겠다, 나는 왜 안 되는지.

 

세상에는 세 등급의 장난꾸러기(이하 장꾸)가 있다. 평범한 장꾸는 장난의 대상을 빼고 모두를 즐겁게 한다. 그리고 뛰어난 장꾸는 장난의 대상조차 포함해 온 세상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구린 장꾸는 지 혼자 재밌다. 그걸 알면 관둬야 되는데, 또 지는 재밌는지라 관두기가 어렵다. 그러니까 간결한 문장을 구사하기에, syo는 너무나도 장꾸인 것이다. 그것도 평장꾸도 뛰장꾸도 아닌 구장꾸...... 이러나저러나 소인배는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고 보면 필력의 지존, 이덕무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 굴리기를 좋아할 뿐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용 또한 여의주를 자랑하거나 뽐내면서 저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_선귤당농소

 

내가 너희를 비웃지 않을 테니, 너희 또한 그 말똥 같은 글이나 굴려가며 분수에 맞게 살라는 뜻으로 읽힌다.

 

 


--- 읽은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9 / 박시백 지음

군자를 버린 논어 / 공자 지음, 임자현 옮김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 김보통 지음

논어를 읽기 전 / 정춘수 지음

 

 

--- 읽는 ---

인간 루쉰 / 린시엔즈 지음

마르크스 평전 / 프랜시스 윈 지음

단박에 조선사 / 심용환 지음

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 김나연 지음

이토록 보통의 / 캐롯 지음

친절한 강의 대학 / 우응순 지음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 이종산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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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04-09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 혼자라도 재미있으면 경지에 오른 거죠. 불여락지자의 그 락지자네. 호우 좀 즐길 줄 아는 자인가...

syo 2019-04-09 21:30   좋아요 1 | URL
그렇게 보면 또 그렇군요. 은근 든든하다.....

독서괭 2019-04-09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크스가 그렇게 왕성한 사람이었나요? 게다가 무책임.. 허허
syo님이 구장꾸라니 무슨 그런 말씀을! syo님 글 읽으며 많이도 웃은 저는 뭐가 되나요!!

syo 2019-04-13 13:10   좋아요 0 | URL
독서괭님과 저의 장난질 코드가 맞아서? ㅎㅎㅎㅎㅎ
힘드시겠어요, 이런 비주류 코드를 지니고 사신다는 것이.....-_ㅠ

카알벨루치 2019-04-09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식이다 ㅋㅋㅋ

syo 2019-04-13 13:11   좋아요 0 | URL
맥락과 ‘ㅋ‘의 갯수에 따라 숨어있는 무의식을 해독하는 방법이 무궁무진하다고 합니다.
ㅋㅋㅋㅋ

2019-04-10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3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9-04-11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크스 평전 다 읽고 하염없이 마르크스 까고 싶네요. 생식이라니... 생식 ㅠㅠ

syo 2019-04-13 13:14   좋아요 0 | URL
우리 집 자식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랄까요.
마르크스는 그냥 타인으로서 따로 좋아하는 걸로......
 

 

불 속의 꿈, 꿈속의 불

 

 

1

 

이곳저곳에 큰 불이 일었다. 불붙은 산, 불붙은 들, 불붙은 집. 불붙은 마음들의 까맣게 타들어가는 목소리를 들으며 세 시간을 멍하니 앉아 있다 자리에 누웠다. 저 먼 곳에서 사람은 죽지 않고 오직 불만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나는 억지 잠을 청했다. 불 끄는 꿈을 꾸었다. 불 끄는 꿈이 아니라 불 못 끄는 꿈을 꾸었다. 불은 컸고, 거셌고, 인정도 사정도 볼 줄을 몰랐다. 이윽고 몸에 불이 붙었다. 나는 너무 놀랐고 놀라움을 허겁지겁 휘둘러 겨우 꿈을 찢고 나왔다. 새벽은 창밖에 고요했고, 이마와 가슴이 뜨거웠다. 미지근한 자리끼를 들이켜 급한 대로 잔불을 잡았다. 잠시 불을 켤까 망설이다 포기했다. 그것도 불이었던지. 이내 다시 잠이 들었다. 꿈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핸드폰을 살폈는데, 누군가 네이버에 강원도 산불 사망자 수를 검색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누군가를 내가 기억 못하다니. 아직 불이 남았다. 그런데 내 좁은 세상은 안온했다. 이 모든 일이 다 꿈인 것만 같았다.

 

 

한참을 달리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아서어느 집 대문 그늘 아래수거를 기다리고 있는 쓰레기들 뒤에 앉았다나는 울지 않았다더 울 필요도 없었다나는 두 눈을 감고 창피한 마음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나는 상상 속의 경찰을 불러냈다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경찰을그는 다른 경찰들에 비해 백만 배는 더 큰 덩치에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다심지어 그는 방탄차까지 몇 대씩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그와 함께라면 나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그는 나의 안전을 보장해줄 터였다그가 책임을 져줄 것이므로 이제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았다그는 아버지처럼 억센 팔로 내 어깨를 감싸주면서 내게 그렇게 여러 발의 총을 맞았는데 다치지는 않았는지 물었다나는 상처를 입었지만 병원에 가봤자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그는 한 손을 내 어깨에 얹은 채 가만히 있었다그가 나의 아버지가 되어 모든 일을 처리해줄 것만 같았다그런 생각을 하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그리고 내게 제일 좋은 방법은 현실이 아닌 곳에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에밀 아자르자기 앞의 생

 

친숙한 현실이 느닷없이 돌변할 때현실을 빚어내는 '양상', 이를테면 신의 섭리 같은 그 무엇이 깨져버렸을 때집단이 무너지고 구성원들은 제멋대로 놀며 타자들이 적의를 드러내고 살육에 취할 때우리는 흔히 '세상이 무너진 것 같다'는 표현을 쓴다그런데 정작 무너진 것은 세계도 아니요세계에 속한 그 무엇도 아니다무너진 것은 '우주적환상이다우리는 그 환상을 통해 사물의 본성을 생각해왔을 뿐이다.

프레데리크 시프테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2



  "이 작업을 하는 동안 제가 읽는 모든 책에서 발췌를 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마르크스는 그 뒤로 평생 이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이 시기 마르크스의 독서 목록은 그의 지적 탐사 작업의 폭을 보여준다법 철학을 쓰면서 달리 누가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예술사를 꼼꼼하게 공부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겠는가마르크스는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와 오비디우스의 트리스타니아를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혼자즉 문법책을 놓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다음 학기에는 민법 소성 절차와 교회법에 대한 교과서를 수십 권 읽으면서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번역했고프랜시스 베이컨을 읽었고, "라이마루스의 책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데동물의 예술적 본능에 대한 그의 책에 즐겁게 마음을 빼앗겼다."

프랜시스 윈마르크스 평전, 42 

 

삶이 순순히 져주지 않을 때, 상당히 종종 맞닥뜨리는 이런 시기를 syo는 평전에 기대어 통과하곤 한다. 처방전은 보통 두 갈래 길이다. 빨간 약, 나보다 더 열정적인 인간의 생을 읽으며 열정의 불씨를 나누어 받기. 파란 약, 나보다 더 심하게 망한 인간의 고통을 멀찍이서 지켜보며 저렴하게 안도하기. 그러나 정말 가끔씩, 도저히 답이 없을 만큼 위급한 상황이라 두 약을 동시에 처방해야 할 때도 있다. 빨간 약과 파란 약을 섞으면? 정답은 마르크스.

 

그런 이유로 하루 두 번 식후 30(syo는 두 끼 인간입니다), 마르크스 평전을 복용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효험을 보는 중이다. 저 양반도 딱 보니 젊을 때부터 크게 되긴(?) 글렀던 것이다. 저 정도 경지까지는 아니지만 syo도 비슷한 짓을 해 봐서 아는데, 저게 부인과 아이들(혹은 여자친구) 밥 굶기기 딱 좋은 독서법이다. 독서법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독서질이다. 독서짓이다. 아이고 맑선생아, 맑선생아, 철없는 맑선생아, 1818년생, 어린이날에 태어난 젊디젊은 맑선생아..... 아이고 syo......-_

 

 

 

3



  도덕을 도와 덕으로 나눴을 때 도를 이해하기란 쉽다는 길이다차나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길이니 항해길비행길이다더 나아가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인생길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이나 방법이 되는 길까지 다 아우르는 길이다.

  동양 사상이나 윤리학사회학에서 정의하는 도의 개념도 길이 갖는 이런 지향성이나 반복성연결성 같은 풍부한 함의를 활용한 것이다인간 행위나 정치 조직의 올바른 진로만물 생성의 원리보편적 진리 등 이런 식으로 정의되는 도의 개념은 모두 길의 비유로써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덕은 도처럼 뜻이 선명하지 않다도에 길이 대응하듯이 그렇게 대응하는 토박이말이 없기 때문이다그래도 억지로 찾아 붙이면 힘이다그냥 힘이 아니라 인간의 존귀함을 나타낼 수 있는 힘 또는 존귀한 행위나 관계에서 드러나는 힘.

  이때 덕은 나아갈 길을 알지 못하면 획득하기 어렵다도를 깨치고 이를 반복해서 실천하는 이가 갖게 되는 힘이 덕이다그것은 무력폭력병력 같은 물리적 힘이 아니다마력괴력 같은 주술적인 힘도 아니다매력이나 영향력협력능력 같은 인간적 힘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보면 도덕을 묻는 일은 어떤 길을 어떻게어떤 힘에 의존해서 나아갈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이 질문에는 삶이 길을 알고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그를 헤쳐 갈 바른 길을 찾고자 했던 간절함이나 절실함이 배어 있었다.

  그러므로 도덕을 찾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실천하면서 생겨난 도덕규범은 구별해야 한다도덕은 삶의 매 순간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새롭게 물을 필요가 있다도덕을 묻고 찾았던 시대 상황과 처지는 그때그때 변하기 마련이다.

정춘수논어를 읽기 전, 44-45

 

큰 기대 없이 읽기 시작한 책이 느닷없이 뒤통수를 후려칠 때, 독서가는 아픈 뒤통수를 쓰다듬으면서도 썩 기분 좋은 표정을 짓게 마련이다.

 

도덕, 그것은 똥이라고 syo는 늘 생각해왔다.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가 논의와 동의와 권력의 압력과 자발적 비자발적 순응의 과정을 모두 거쳐 도덕이 되는 데까지 필요한 시간이 너무나 길다보니, 결국 도덕으로 인정받아 인간 내면의 법전에 새겨진 시점에는 이미 옛날 물건이 되어버려 현실과는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도덕의 슬픈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도덕에 대해 더는 깊이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통용되는 도덕규범을 지키거나 말거나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도덕이 그놈자식이 어떻게 살았고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까지를 시시콜콜 알만큼 친하게 지내고 싶진 않은데, 그냥 살아있는지 확인만 하고 살지 뭐, 이런 마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냥 내가 욕 안 먹으려고 고분고분 지키고 사는 거지, 도덕이 그놈 그거 원래 태생이 고리타분하고 반동적인 권력의 앞잡이라니까? 하는 것이 syo의 도덕관이었다.

 

정춘수 선생님이 쓰신 위의 글은, 도덕의 출생에 대한 syo의 유치하고 초보적인 마르크스적(“모든 시대의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다”) 혹은 니체적(“도덕은 얼뜨기들을 허무주의로부터 보호했다. 각자에게 어떤 무한한 가치를, 어떤 형이상학적 가치를 부여하고 이 세상의 힘이나 위계질서와 어울리지 않는 어떤 질서로 편입시키면서 말이다”) 해석을 모두 껴안으면서도, 이런 비도덕적(?) 도덕관을 가진 인간 역시 항상 자신의 을 휘두르는 일에 주의해야 함을 선선히 일깨워 준다. 사실 저 말은 유학이든 유물론이든 실존주의든 뭐든, 아니 철학자든 아니든 상관없이 도덕과 정의에 대해 언급하는 모든 인간들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태도인 것은 아닐까. . 어쨌든 힘을 정갈하게 다루어라. 그건 단지 큰 힘을 가진 이들에게만 요구되는 폭 좁은 덕목이 아닌 듯하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을 한 사람이 큰 힘을 가진 스파이더맨이 아니라 그저 우리네 선량한 이웃 중 한 사람이었던 스파이더맨 삼촌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원래는 볼테르의 말이라고 하던데.

 

그나저나, 아니, 논어를 읽기 에 이래버리면, 그럼 논어를 읽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_

 

 

4




봄철 새소리는 화평하다가을철 벌레 소리는 처량하고 슬프다이것은 계절의 기운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당우(이상적인 태평 시대의 상징인 고대 중국의 임금 요와 순시대의 글은 순수하고 맑고 밝다말세의 글은 화려하나 경박하다그 기운을 어찌할 것인가. _이목구심서 2

이덕무 지음한정주 엮음문장의 온도

 

말세의 글이라굽쇼..... 이덕무 선생님 참 못된 사람. 당신의 순수하고 맑고 밝은 요순시대 글로 사람 여럿 말종 만드신다. 어찌할 것인가.....

 

화려하고 경박한 글이 말세급이면, 화려하지도 않고 경박하기만 한 글은 멸망과 멸종을 부르는 것인가요-_ㅠ 


근데 오늘 나 왜 계속 울지?-_

 

 

--- 읽은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6 7 / 박시백 지음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 정성희 외 지음

 

 

--- 읽는 ---

마르크스 평전 / 프랜시스 윈 지음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 김보통 지음

문장의 온도 /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음

논어를 읽기 전 / 정춘수 지음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 / 조현준 지음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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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9-04-05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 진짜 무서운 불입니다.. ㅠㅠ

syo 2019-04-06 08:05   좋아요 0 | URL
정말 무서웠습니다. 전 단지 영상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그랬는데 실제 열기까지 몸으로 느끼셨을 분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