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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확진자 수가 500을 돌파하면서, 코로나 때문에 syo는 연말까지 사실상 스케쥴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한적한 인생. 좋은 친구 만나서 수다 떨면 그렇게 좋은데, 세상은 내가 좋아하는 꼴 안 보려고 온갖 종류의 참신한 박해를 생각해내는 것 같다. 이렇게 쓰고 나니 마치 syo가 세상의 주인공이고 그 주인공에게 작은 난관을 제공하려는 절대자의 의지가 세상에 역병을 돌게 만든 것처럼 읽힌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어. 너는 원오브뎀오브빅뎀오브그레이트뎀오브올일 뿐이야. 이렇게 자꾸자꾸 현실을 주입시켜줘야 한다. 사람 얼굴을 발견할 기회가 거울을 들여다보는 순간 말고는 없는 하루를 이어나가다 보면, 어쩌면 내가 세상이라는 연극무대의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연극은 아무래도 <고도를 기다리며> 인 듯. 일단 재미없고,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온다.


  

나는 수용할 수 있는 만큼의 절망감을 유지하고 있었다우리는 절망한 상태로 살아갈 수 있고심지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으며이따금 한순간 희망의 바람에 실려가볼 수도 있지 않을까 자문하기도 한다그러니까 그런 질문을 던지고는 이내 부정으로 대답하고그럼에도 끈질기게 버티는 것이다실로 뭉클한 광경이다.

미셸 우엘벡세로토닌

 

그러다 그녀 이름으로 서명이 된 전보가 ― 난 그녀를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 ― 왔다. '라피도 5호 차월요일 오후에 와요.' 전보는 유고슬라비아의 루블라냐에서 온 것이었다.

  나는 기차역으로 마중을 갔다뒤에 가방을 든 짐꾼을 달고 플랫폼을 걸어오는 그녀를 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어떤 것들은 그저 처음에만 좋지만 그녀를 보는 건 늘 처음 같았다나는 그녀가 "자기야,"라고 말하리라는 걸 알았다나는 내가 "경애하옵나이다"라고 말하리라는 걸 알았다.

제임스 설터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스피노자는 인간의 주체적 오만을 질타하면서도역설적으로 인간의 주체적 자각을 촉구하기도 한다너를 끌어당기는 맹목적 충동의 주어는 네가 아니다인간의 의지는 신에게서 비롯한다그러나 꽃이 피는 현상이 봄의 의지인 동시에 꽃의 의지이기도 한 것처럼인간에게 투영된 신의 의지는 항상 인간의 주체적인 결단으로 실현된다스피노자의 명제를 따르자면신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나 욕망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금지하지 않는다결국 만물의 의지가 실현된 그 모든 현상들이 신의 뜻이라는신의 절대성과 인간의 주체성을 모두 끌어안은 전복의 신학은 훗날 현대 철학의 거장 들뢰즈에 의해 '철학자들의 그리스도'라는 숭고한 지위로 추존된다즉 철학의 신약은 스피노자부터이다.

민이언밤에 읽는 소심한 철학책

  

 

 

2

 

얼마 안 읽었지만, 스밀라는 아무래도 여간내기가 아닌 것 같다.


 

그건 단지 사소한 질문이다그렇지만 세상은 어쩌다 독신에다가 방패막이 하나 없는 여자가 내 나이대에 이르렀으면서도 결혼해서 귀여운 아기 둘을 기르면서 살고 있지 않은 건지 궁금해한다시간이 흐르면그런 질문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페터 회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스밀라는 나보다 어리겠는데, 똑똑하고 말도 잘하고 잘은 몰라도 뭔가 특별한 능력도 있어 보인다. 우리가 닮은 거라곤 주변 사람들이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뿐인 듯하다. 하지만 그걸 묻는 사람이 점차 줄어들 거예요. 그리고 조용하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겠죠. 이 개똥같은 세상 엿먹으라고 하고 우리 힘차게 살아봐요. 그리고 힘든 일 있으면 연락해요. 서재에 댓글 남겨요. 커피 한 잔 사줄게요. 저 스벅 벚꽃 피크닉 세트쿠폰 못 쓰고 가지고 있거든요. 벚꽃 필 때 받은 건데. 심지어 그 벚꽃 2019 벚꽃……. 아무튼 연락해요!

 

, 물론 거리 두기 1단계 되면요…….

 

 


3

 

책 읽는 사람이라면 독서량, 독서 방식에 관해서 저마다의 세계관이 있는 법이라, 다른 이들의 독서관이 내 관점을 침략하려 들 때, 독서가들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책 두어 권 들면 후들거리는 그 여리여리한 팔뚝을 드러내며 종주먹을 휘두르게 마련이다. 관련하여 장강명 작가님도 언짢은 일을 몇 번 당하신 건지, 아닌 듯 하지만 말씀에 날이 섰다.


사실 내가 종이책보다 전자책을 선호하고웬만하면 전자책으로 읽으려 한다는 말을 하면 놀라는 사람들이 꽤 많다어딘가 비석에 '진지한 독서가=종이책 애호가'라는 등식이라도 적혀 있는 모양이다.

  독서가들 중에는 손끝에 닿는 책장의 느낌이니 종이 냄새니 하면서 종이책의 물성에 대한 애정을 호들갑스럽게 과시하는 이들이 있는데나는 그게 이상한 자부심과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건 아닌가 의심한다책은 정보를 담는 매체지 시각이나 촉각을 만족시키려고 만든 기호품이 아닌데.

장강명이게 뭐라고

 

syo는 새 책을 사면,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공간에 숨어들어 문을 잠근 다음, 몸 안에 있는 숨을 할 수 있는 데까지 방출한 후, 책을 펼쳐 코를 박고 다시 할 수 있는 데까지 숨을 들이켜는 의식을 치른다. 그냥 평범하게 책 냄새를 킁킁 맡는 일도 자주 있고, 그런 간단한 정도는 남들 앞에서도 하곤 하지만, 저런 의식은 좀 남들 봬 주기가 아무래도 좀 그렇지. 하지만 이런 행동까지 이상한 자부심과 선민의식에서 비롯됐다고 하긴 어렵지 않을까?

 

그래서 장강명 작가님의 저 말을 물성파 입장에서 들으면 부당하게 가혹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 들긴 해도, 사실 스펙트럼의 관점에서 보면 저런 마음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냄새 맡는 syo’쓰다듬는 누군가를 당연히 이해할 수 있지만, 판권 페이지를 아래에서 위 방향으로 핥는 사람을 이해하긴 좀처럼 어렵고, 가장 야한 대목이 나오는 페이지에 페니스를 끼우고 책을 흔드는 방식으로 자위해서 30초 만에 사정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이대로 저 ㅅㄲ를 패고 시원하게 영창 갈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물성이란 진짜 무엇이며, 인간이란 어디까지 갈 수 있는 동물인가.

 

사람들이 전자책의 장점이라고 하는 다른 특징들은나는 잘 모르겠다멀티미디어 기능이라든가 읽어주기 기능은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도 않고 이용하지도 않는다색인을 쉽게 검색할 수 있다든가궁금한 점을 하이퍼링크로 바로 확인할 수 있다든가 하는 특징도 마찬가지다.

  사실 하이퍼링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다하이퍼링크는 단행본의 형식을 무너뜨리고 독서를 방해한다[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종이책의 물성이 아니라 책이라는 오래된 매체와 그 매체를 제대로 소화하는 단 한 가지 방식인 독서라는 행위다세상에는 그 매체를 장식품장신구장난감부적팬클럽 회원증후원금 영수증 등으로 소비하는 이들도 있다그것은 소비자의 자유겠으나그런 소비를 독서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같은 책

 

그럼에도 장강명 작가님의 책과 독서에 관한 관점은 일견 협소하다 싶을 만큼 꼿꼿한 데가 있어서, 뒤이어 이런 대목을 쓰셨으니 말씀드리고 싶긴 하다. 독서라는 행위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는 게 이상한 자부심과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건 아닌가 의심받으실 수 있음을.

 


 

밤하늘의 셀 수 없는 별들이 그러하듯 사람 마음의 모양은 전부 다 다르다선을 긋지 않는다는 건모양이 없는 액체 괴물처럼 살아가라는 말로 들린다그러니까 선을 긋는 건여리고 약한 혹은 못나고 부족한 내 어딘가에 닿았을 때 '나의 이곳은 이렇게 생겼어'라고 고백하는 행위다.

김이나보통의 언어들

 

 

 

 

--- 읽은 ---


 

223. 상대성 이론은 처음이지?

곽영직 지음 / 북멘토 / 2019

 

처음 아녜요.


수식이라는 게 하는 일이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면 저 과학자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수식으로 작업을 할 리가 없다. 수식은 이해를 도울뿐더러 수식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도 잔뜩 있다. 단지 그 도구를 사용하는 기술을 따로 배워야 한다는 문제만이 있을 뿐이다.

 

상대성이론을 수식 없이 설명하려는 과학책을 많이 봤다. 생각보다 잘하는 책도 있었고, ‘설명하려면 수식을 써야 하므로 여기에서는 더 깊게 설명하지 않겠지만하는 식의 주객전도가 이루어진 책도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언어는 수식보다 정밀하기 어렵다. 이과 나온 분들께는 권하지 않겠습니다.

 

 


 

224. 나의 첫 미술공부

최연욱 지음 / 메이트북스 / 2020

 

미술에 대해서 공부해 봐야지 하고 덤벼들었는데 막상 책이 진짜 공부시킬 듯이 덤벼드니까 덤비지 않을게 덤비지 마라 싶다. ‘공부한다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말아야겠다. 나는 진심 미술 공부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던 것으로.

 

 

 

 

225. 피그말리온

조지 버나드 쇼 지음 / 김소임 옮김 / 열린책들 / 2011

 

syo는 버나드 쇼의 그 쇼인지를 물어본 사람이 있었다. 그 쇼는 Shaw이므로 당연히 그럴 리가 없을뿐더러, syoShaw의 작품을 하나도 읽어본 적이 없는 상태여서 아주 간단히 아닙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었다. syo는 그간 Shaw에 대해서, 영국의 극작가이고,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고, 끝내주는 독설로 무장한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그의 글이라고는 그 유명한 한 줄짜리 묘비명 말고는 도무지 아는 바가 없었다.

 

큰 기대를 가지고 읽어 본 결과, 역시 극본이라는 건 뭔가 글로 보면 매력이 반감되는 걸 피할 길이 없다는 느낌과, 남자가 이런 멘트를 치면 여자가 왜 그렇게 대꾸하고 그 대꾸를 들은 남자는 또 왜 저렇게 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느낌과, 그래도 고도에 비하면 레알 삼백 배쯤은 재미있구나 싶은 느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앞으로 한동안은 극문학을 읽지 않겠구나 하는 느낌 등등이 휘몰아쳤다. , 복잡한 독서였다.

 

 

 

 

--- 읽는 ---

다시 미분 적분 / 나가노 히로유키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지구의 과학 / 신규진

인간의 흑역사 / 톰 필립스

길 잃은 시간여행자를 위한 문명 건설 가이드 / 라이언 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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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11-26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세로토닌, 재밌어요? 우엘벡이 모 아니면 도라서 말입지요. ^^;;
그리고... 흠흠흠.... 좀 야한가요? ㅋㅋㅋ

syo 2020-11-26 21:18   좋아요 0 | URL
전 모든 우엘벡이 다 개걸이어서..... 이번에도 개걸 느낌이에요.
그리고... 흠흠흠... 저는 어떤 기대치가 있어서 읽는 순서도 새치기 시켜줬거든요.
......아 괜한 짓을 했더라구요ㅋㅋㅋㅋ

초란공 2020-11-26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피노자 생일이 24일이더라고요^^ 코로나/감기 조심하시기를~!! ^^

syo 2020-11-26 23:29   좋아요 0 | URL
코로나의 마수로부터 안전한 연말/겨울 되시기를!

반유행열반인 2020-11-26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외로움은 하다하다 책 속 스밀라한테 추근덕거리게 만드는 것이로군요....

syo 2020-11-26 23:30   좋아요 2 | URL
그치만 당연히 연락 안 오겠죠? -_ㅠ

반유행열반인 2020-11-27 07:04   좋아요 0 | URL
저 아래 비밀 댓글 달리면 스밀라인 줄 알겠습니다 ㅋㅋㅋ

syo 2020-11-27 19:28   좋아요 1 | URL
안 달리는군요. ㅎㅎㅎㅎ 스밀라여.....

han22598 2020-11-27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식이 더 정밀할 순 있다고 생각하지만, 언어의 심오함을 대신할 수 없기에...그리고 (저도 이과생으로서) 나야 수식으로 이해하지만,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해선 언어를 사용해야기에 ㅠㅠ(글서, 수식없이 설명잘하는 것이 능력) 그저 애를 쓰며 언어사용 능력을 키워갑니다. (끙)

syo 2020-11-27 19:27   좋아요 0 | URL
훌륭한 이과생이시다.... han님의 분투를 응원합니다.
저는 타인을 이해시켜야겠다는 생각을 안 하기 시작했습니다..... 못된 이과생이다..

2020-11-27 2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29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20-11-29 15: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종이책도 전자책도 좋아하는 제 입장으로서, 종이책과 전자책은 읽는 쾌감의 비율과 효용이 다양하고 미세하게 다르다는 거예요.
전자책은 무엇보다 휴대성이 최고죠. 벽돌책도 내 손 안에😋, 배송 안 기다리고 읽고 싶은 즉시 사서 바로 읽을 수 있고, 다른 행위 중에도 귀로 들을 수 있는 멀티테스킹(때론 반강제ㅋ 들을 수 밖에 없뜸ㅋ)의 편의성, 가물가물한 부분을 키워드 단어 몇 개로 빠르게 찾아낼 수 있다는 점 등등.
종이책 경우 강한 물성의 매력으로 독서 분위기를 충만하게 해주고, 읽는 과정 속 충족감, 읽은 후의 여운을 깊게 해주는 거 같아요.
그냥 다 좋아하면 안 되나. 종이책 vs 전자책 얘기 나올 때마다 좌우 진영들이 흔히 ˝당신은 틀렸어!˝ 전제로 하는 말씨름 같아 저는 늘 좀 그래요^^;

syo 2020-11-29 23:22   좋아요 0 | URL
‘취향‘을 가지면서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즐거움 중에 가장 자극적이어서 도망치기 쉽지 않은 것이 또 ‘다른 취향 가진 사람들 비웃기‘ 잖아요. 차라리 ‘부먹/찍먹‘처럼 겉으로는 서로를 오랑캐취급하는 척 운동회를 즐기지만 실제로는 상대 취향을 가진 사람을 비웃지는 않는 그런 귀여운 취향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네요.

빠삐냥 2020-11-29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맞아요 고도는 재미가 없죠. 아무리 읽어도 재미가 없었어요! (←오늘 드디어 중고서점에 고도를 버리고 온 사람) 피그말리온 역시 글로 읽었을 땐 무덤덤했고 극으로는 본 적이 없지만, 마이 페어 레이디라는 명작 영화를 낳았으니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페레 보셨나요 마페레 좋아요.

syo 2020-11-29 23:23   좋아요 0 | URL
저도 지난 번 중고서점 방문시 고도를 버렸는데, 고도를 버린 사람들이 너무 많은지 균일가 취급을 받더라구요. 이제 아무도 고도를 기다리지 않는군요. 대신 고도가 사람들을 기다리네요.

추천하신 영화는 꼭 볼게요! 감사합니다 빠삐냥님~^-^
 

 

우리는 늘 보충수업이 필요해요

 

 

 

제발, 남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재능을 주지 않으시려거든, 별것 아닌 생각이 들면 그 생각이 별것 아닌 생각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는 지혜를 주세요. 지금보다 더 많이 읽다 보면, 얼핏 똑똑하고 있어 보이는 그따위 말이 실은 백 년 천 년 전부터 세상에 나와 있었고 그래서 그동안 비슷한 생각을 해 본 사람이 백만은 족히 헤아릴 흔하디흔한 구절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챌 수도 있겠으니, 더 많이 읽을 수 있는 시간과 끈기를 주세요. 아니면 제발 그럴 때마다 남들 모르는 뭐라도 깨달은 인간 마냥 호기롭게 나불대지 않을 수 있는 염치라도 좀 주세요.

 

제일 먼저 저한테 주시고, 되도록 잔뜩 주시고, 혹시 남겠거든 여기저기 좀 주세요. 시간이 흐르고 언젠가 어느 날에 저 사람들이 저처럼 쪽팔리지 않도록, 좀 도와주세요. 하실 수 있으시잖아요. 하실 수 있으시잖아요.

 

 

 

 

 

 

--- 읽은 ---

 


220. 카카오프렌즈 동네산책 : 서울

안또이 지음 / 시루 그림 / 대원앤북 / 2020

 

내용 자체는 거의 쓸모 없다시피한데, 제길, 애들이 너무 귀여워……. 이런 책 나오면 그냥 못 지나치고 참다 참다 결국 들춰보는 나도 좀 귀여워…….

 

 



221. 습관의 말들

김은경 지음 / 유유 / 2020

 

습관이 사람을 만드는 건데 사람이 습관을 만드는 거라서 습관을 만드는 사람은 습관을 만드는 습관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만 습관을 만드는 습관 역시 사람이 만드는 거고 그 사람은 습관이 만든다. 따라서 습관을 만드는 습관을 만드는 사람은 습관을 만드는 습관을 만드는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이게 닭-달걀 회로마냥 그저 어이없는 말장난 같지만, 실제로 해보면 습관을 만들고 나를 만드는 일이 대충 그렇다. 어지럽다.

 

결심이 필요하다. 습관-사람-습관-사람-습관-사람의 연쇄 사이의 어느 순간에 단절점을 만들고, 거기서 새로 시작하는 액션이 필요하다. 여기 그 단절점을 놓기 위한 말 말뚝이 잔뜩 있다. 그중 하나라도 내 쇠고랑에 맞아 들어간다면, 그래서 만들어진 습관이나 만들어진 인간 둘 중 하나로부터 달아날 수 있다면, 그건 꽤 남는 장사겠다.

 

 

 


222. 문장부호의 기원 : ? ! . ,

이병주 이음 / 큐니버시티 / 2019

 

제목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더 이상의 설명은 과잉입니다.

 

 

 

--- 읽는 ---

, 이게 뭐라고 / 장강명

리듬분석 / 앙리 르페브르

상대성 이론은 처음이지? / 곽영직

나의 첫 미술공부 / 최연욱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 제임스 설터

피그말리온 / 조지 버나드 쇼

잘 버리면 살아나요 / 손영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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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4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0-11-25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번과 이번의 syo님의 글은 저를 많이 각성하게 만드네요~~
왜이리 양심이 찔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글쓰기가 두려워집니다 ㅠㅠ

syo 2020-11-26 20:14   좋아요 1 | URL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누구 보라고 쓴 글은 아니고, 실은 써놓고 누가 볼까봐 조마조마했는데요.
보통 이런 거 보고 찔리는 사람은 안 찔려도 될 사람이고, 안 찔리는 사람은 찔려야 할 사람이라는 게 난점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11-25 0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좀 주세요. 하실 수 있으시잖아요?

syo 2020-11-26 20:14   좋아요 1 | URL
나눠 먹어요.

문모운 2020-11-25 0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 못해 안해 돌아가

syo 2020-11-26 20:15   좋아요 0 | URL
혹시... 토끼의 신이세요?

잠자냥 2020-11-25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네 산책> 같은 책은 누가 읽나 했는데 syo 님 처럼 귀여운 분이 읽는 것이었군요!

syo 2020-11-26 20:16   좋아요 0 | URL
읽으면 귀여운 사람 대접 받을 수 있는 책입니다.
그게 이 책의 유일한 장점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북깨비 2020-11-26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Syo님 좀 많이 귀여워요. ㅋㅋㅋㅋㅋ 😂😂😂

syo 2020-11-26 20:17   좋아요 1 | URL
저는 귀엽다는 말을 순도 100%의 칭찬으로 받는 흔치 않는 성인남성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시간문제집

 

 

1

 

내가 아는 것을 최대한 선명하게 쓰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글을 갖고 싶다. 하지만 그건 능력보다는 태도에 가까워서, 그렇게 살아오지 않은 사람에게는 말처럼 쉽지 않고, 그렇게 사는 사람은 너무 쉬워서 말을 않는다. 아는 것이 부족해서 모르는 것의 경계를 슬쩍 타 넘는 습관이 생긴 거라면 많이 읽어서 고치면 되겠지만, 내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를 몰라서 이러는 거라면 길고 고된 길이 기다리고 있겠다.

 

 

 

2

 

먹고 사는 일과 관련해서,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공부를 드디어 시작했다. 며칠 되지 않았다. 혼자 공부를 하다 보면 24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느끼게 되고, 여럿이 공부를 하다 보면 24시간이 얼마나 불공평한지 깨닫게 된다. 읽기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3

 

검은 책을 들고 있으면 어쩐지 지성이 깊어 보이고 검은 옷을 입으면 사람이 날씬해 보여서 좋지만 검은 컵을 사용하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다. 커피 한 잔 마시고 콜라도 한 잔 했나, 그러고 한 삼십 분쯤 뒀다가 보면 꼭 컵 주둥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가루들이 도포되어 있다. 빙 둘러가며 꼼꼼히도 발라놔서 다음 한 잔은 어디에 입을 대고 마셔야 할지 도무지 각이 안 선다. 나라는 녀석이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불결한 인간이었나 싶다. 이제 키스 같은 거 할 때마다 죄책감이 들게 생겼다.

 

안 하겠다는 건 아니다.

 

 

 

4

 

갑자기 겨울이다. 당국은 방역체계의 수위를 높일 예정이다. 바탕화면은 5분 단위로 바뀌면서 세계 곳곳의 아름다운 도시들을 보여준다. 마스크를 쓰지 않던 시절의 풍경이다. 그곳으로 쉽게 돌아갈 순 없을 것이다.

 

오늘은 구청에서 점심을 먹는다. 전 직장에 방문하는 기분은 오묘하다. 너희는 그 안에서 오늘도 힘든 일상을 보내겠지만, 그것조차 나한테는 좋았던 추억일 뿐이야- 하는 마음이랄까. 제대 후 부대에 놀러간 것도 세 번쯤 된다. 애기들이 작대기 하나씩 늘어서 어른인 척하는 모습을 보는 게 귀여웠다. 관두기 전에 서고에 잔뜩 쌓아놓았던 마스크들, 이제는 다 뿌려졌는지 보고 오겠구나.

 

 

 

--- 읽은 ---

 


217. 원자핵에서 핵무기까지

다다 쇼 지음 / 이지호 옮김 / 정완상 감수 / 한즈미디어 / 2019

 

핵이라는 게 어마어마하게 복잡할 것 같지만 원리 자체는 간단한 모양이다. 그저 그 원리를 확인하거나 최적의 이용 상태를 찾아내기 위한 실험이 위험하고 비싸서 그렇지. 그러니까 이 귀여운 책을 통해 그 원리를 차곡차곡 쉽게 이해했다고 해도, 이런저런 이유로 개인이 핵무기를 만들 수는 없겠다. , 이참에 소소하게 누클리어봠 하나 만들어보려고 그랬는데. 까비.

 

 

 


218. 내가 예민한 게 아니라 네가 너무한 거야

유은정 지음 / 성안당 / 2020

 

읽은 책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읽을 책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는 장르가 있다. 내 마음 때문에 내가 고생하는 일이라도 있지 않고서는, 고집쟁이들은 심리학책 보는 게 아니다. 많이는 아니어도 잊을 만하면 읽어주는 장르인데도, 덕 봤다 싶은 적이 한 번도 없다. 내 멘탈이 그만큼 건강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건 참 뜻밖인데?

 

 


 

219. 존리의 부자되기 습관

존 리 지음 / 지식노마드 / 2020

 

부동산이니 뭐니 깝치지 말고 연금저축펀드 들고 주식이나 하라는 이야기다.

 

 

 

--- 읽는 ---

진실에 복무하다 / 권태선

보통의 언어들 / 김이나

인류를 구한 12가지 약 이야기 / 정승규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생물학지식 50 / J. V. 샤마리

쇼펜하우어 평전 / 헬런 짐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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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11-23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아직 시작한 게 아니었군요 ..... 홧팅..! 그나저나 ‘안 하겠다는 건 아니다’ 어쩔 ...ㅋㅋ

syo 2020-11-24 23:28   좋아요 1 | URL
시작은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은 양적으로 ˝시작했습니다!˝ 라고 할 만한 정도가 아니었어서,
이제는 그 정도가 되었습니다.


안 하겠다는 건 아니라는 것은 하겠다는 뜻입니다!
하겠어요. 후후.

반유행열반인 2020-11-23 0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재테크책 에비 지지 버려ㅋㅋㅋ

syo 2020-11-24 23:29   좋아요 1 | URL
하도 붐이길래 한 번 읽어봤는데 내용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이 책 한 권으로 성인 연간 평균 독서량을 달성했으니 올해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겠다- 하는 사람들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추풍오장원 2020-11-23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 시작하셨군요^^ 합격같은 가시적 결과를 내는것이 필요한 공부가 사실 별 도움은 안되지만, 재미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syo 2020-11-24 23:30   좋아요 1 | URL
네... 사실 시작한지는 좀 되었사온데, 했다고 하기 민망한 수준이어서 그냥 입다물고 마냥 노는 척 하고 있었습니다.....

2020-11-23 2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24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24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24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디자인 오브 까치

 

 

 

1

 

비나 바다에 관해 쓰는 것은 채산이 잘 맞는 일이었다. 비와 바다에 관해서라면 누구에게나 남길 만한 추억 하나쯤 있는 법이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소한 나에겐 더욱 그래서, 비라는 것은, 그리고 바다라는 것은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액자 같았다. 물기가 부족한 날에 걸어두면 좋은 그림이 마음 안에 언제나 잔뜩이고, 비라고, 바다라고 적는 것만으로 내 좁은 영역은 촉촉과 축축 사이의 어느 지점을 단숨에 돌파해버린다. 그래서 아무래도 저 어휘들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비 오는 날에도 비를 찾고, 바다 앞에서도 바다를 그리워하다가 조용히 조용해질 운명이다.

 



  이러다가는 내일도

  바다가 나를 채갈 겁니다

  자꾸 울면

  내 눈에만 보이던 게

  내 눈에만 안 보일 겁니다

이원하, <나는 바다가 채가기를 기다리는 사람 같다부분 


 

 

2

 

아침이 웃음소리로 요란하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는 골목 너머 앞집에 사람이 잔뜩 들었다. 생신 각이다.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재롱둥이손주들 잔뜩 모여 아침부터 분주하다. 반면, 도움닫기만 제대로 하면 두 집 창문을 연속으로 통과해 우리 안방까지 다이렉트로 날아들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이 집에서는, 기모 자리 위의 기모 이불 속에서 기모 자켓을 입은 기모 인간 이 뒹굴며 핸드폰을 만지는 기묘하고 기모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제 그는 최근 주식으로 벌어먹었던 돈을 최근 주식으로 말아먹었다며 겁나 씁쓸한 표정을 하더니만, 잠시 후에는 또 단타로 치고 빠져서 금방 6만 원을 벌었다며 거실로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애가 방에서 나올 때부터 입가에 미소가 그득하길래 무슨 말을 하려나 했는데, 곧바로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어쩐지 속물 같아 보일까 봐 걱정이라도 한 건지, 아무 이유없이 싱크대를 30초 가량 내려다보며 시간을 끌다가 더는 못참겠다는 듯이 폭발적인 스피드로 6만 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 그 모든 과정 중에 입꼬리는 저기 입인가 귀인가 싶을 만큼 치솟아 있었고.

 

저렇게 일희일비하는 거 보면, 쟨 역시 커서 인물 되긴 글렀다. 저거 까딱 잘못하면 주식으로 탈모 오겠구나…….

 

 

 

3

 

성의 역사는 힘이 빠졌다. 푸코도 모를 소리를 하고, 그 모를 소리를 알아들을 만한 소리로 바꿔보겠다고 아등바등한 syo조차도 결국 모를 소리나 보태고 마는 거라면, 모를 소리를 위한 모를 소리만 늘리는 것보다 이미 있는, 거장의 모를 소리 하나만 유지하는 게 오히려 세상을 위해 이롭지 않나 싶기도 해서. 두어 페이지 틱 넘겨보다 턱 덮어놓고 다른 책으로 손을 뻗치게 된다.

 

올해 들어 스스로 자주 묻고 끝내 답을 낸 질문 가운데 하나는 나는 쓰기 위해 읽는가, 읽기 위해 쓰는가였다. 읽기와 쓰기가 한몸이며, 나선형으로 성장한다는 말은 쌀로 밥 짓고 배추로 김치 만드는 소리다. 아름답고 있어 보이는 두루뭉술한 말들은 산 중턱쯤 오른 사람들이 거기까지 오른 자신의 멋진 모습을 사랑하는 데 쓰기 좋게끔 만들어져 있어서 등산객의 발목을 잡아챈다. , 여기까지 올라와 보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느껴진다- 하는 감각은 잠깐 즐기고 말아야지, 아직 거기까지 오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말을 해주는 자신의 모습에 취해 오래 머물다가는 이번생은 그냥 거기 그 중턱에서 대충 묏자리 봐야 하는 꼴이 생긴다.

 

오래, 세심히 들여다보면 분명히 보인다. 모든 사람은 쓰기 위해 읽거나, 읽기 위해 쓰는 둘 중 하나다. 세상에 50cm짜리 물건이 있다는 것은 증명하기 어렵다. 50.00000001이나 49.99999999나 우리 눈엔 대충 50으로 보인다. 그건 어쩔 수 없지만, 60이나 4050으로 보는 무딘 짓은 하고 싶지 않다. 나는 확실히 읽기 위해 쓰는 사람이고, 내 쓰기의 최대 수혜자이자 유일한 수혜자는 나인 것 같다. 그저 내가 다음 책을 읽기 위해 내가 써야 한다.


 

 

생각건대 내 안에는 글쓰기가 다른 일보다 훌륭한 일이라는 믿음이 늘 잠복해 있었던 것 같다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결국에는 글쓰기가 더 훌륭하다는 게 입증되리라는 믿음이미망이라 해도 상관없지만나의 내면에는 우리가 했던 모든 것이그러니까 우리 입 밖으로 나온 말들맞이한 새벽들지냈던 도시들살았던 삶을 모두가 한데 끌려들어가 책의 페이지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고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그렇지 않으면 그건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는존재한 적도 없게 되고 만다는 위험에 처할 테니까만사가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때가 오면오직 글쓰기로 보존된 것들만이 현실로 남아 있을 가능성을 갖는 것이다.

제임스 설터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천변에 물은 흐르지 않았다나는 움직이는 물을 보고 싶었던 것인데.

  언제 이렇게 다 얼었는지언 물을 보고 있자니 얼마나 단단할지 궁금했다행여 발이 빠진다 해도 다시 나올 수 있을 테니이상한 모험심이 들었다나는 잠깐 올라서보기로 했다.

  밟고 올라서자마자 발바닥에 우지끈함이 느껴졌다깨지지는 않았다.

  이왕 물에 올라서봤으니그 위를 아주 걷는 것은 어떨까 싶었다물이 충분히 얼지 않은 것 같았지만나는 해결하고 싶었다순간의 충동설명되지 않는 고집하잘것없는 마음을충분히 지루해질 때까지 물 위를 걷고 싶었다나는 좀 지루할 필요가 있었다더 느리게더 늘어지고 싶었다.

김엄지폭죽무덤


 

 

4

 

까치라는 출판사는 더없이 좋은 책들에 더없이 구린 표지를 입혀서 세상에 내놓는 곳으로 유명했다. 아직도 클리셰처럼 떠도는 사람은 외모 보고 만나는 게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라는 충고 말씀과 엮어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사람은 책이다, 책은 사람이다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올곧은 출판사라 하겠다. 다 소싯적 이야기다. 지금 어떤 평을 듣는지는 모르겠다. 2020년 새로 출판된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의 표지는 뭐라 표현하기가 애매하지만 일단 내 눈에 구판보다는 나아 보인다. 고작 2년 전인 20181월에 개역되어 나온 같은 작가의 나를 부르는 숲이 조금도 나를 부르지 못하는 것과 비교하면서, 2년 사이에 출판사에 뭔가 좋은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할 뿐이다.



그런 까치에서 까치 책 표지 100개를 그대로 축소한 엽서 100장을 제공하는 이벤트를 시작했다고 한다


와정말갖고싶어요

 

이렇게 써 놓으면 비웃는 것 같겠지만, 막상 이벤트 창을 열어보면 (놀랍게도) 귀여워 보이는 애들이 꽤 있다! 그간 내가 알고 있던 나와 오늘의 내가 생각보다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자꾸 배우게 되는 요즘이다. 이참에 근대세계체제랄지, 지중해랄지 이런 애들 갖춰볼까? 어쨌든 정말 좋은 책들을 꾸준히 번역해 내놓는 든든한 출판사임은 틀림없으니까 뭔가 해주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굴뚝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나를 부르는 숲만큼은 피하고 싶다. 숲에 미친 빼빼 마른 안경잽이 식물학자가 밀짚 모자에다가 똥색 반팔셔츠와 반바지를 갖춰 입고(곤충채집망도 들었을 것이다) 숲으로 들어가 3년쯤 무단거주하다가 숲의 지배자 갈색곰한테 들통나 마지못해 쫓겨나오면서 기록한 회고록 같이 생겼다. 아아, 아임 쏘리 엉클 빌…….

 

 

 

--- 읽은 ---

 


214. 고양이 사용 설명서

미스캣 지음 / 임지영 옮김 / 재미주의 / 2017

 

표지가 귀여워서 한 번 읽어봤다. 아이 귀여워 아이 귀여워 아이 귀여워 이러다가 끝났다. 귀엽고 허망한 시간이었다.

 


 

215. 방구석 미술관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20

 

재독이다. 처음 읽었을 때만 해도 이 정도까지 될 책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10만 부를 넘겨 스페셜한 에디션으로 표지를 갈아입고 나타났다. 1회독 감상을 뭐라고 적어놨는지 가보겠다. 2년 전이었고, 미술 공부의 문을 작품보다 화가로 열어나가는 게 더 좋을 수 있다는 떨떠름하면서 우호적인 평을 남겨 놓았군.

 

이번이라고 딱히 다른 말을 덧붙이고 싶지는 않다. 화가들의 인생사 에피소드에 관한 기억이 그나마 오래 살아남았다가 또 얼마 못 가 사라지겠지.

 


 

 

216. 말장난

유병재 지음 / arte / 2020

 

말 잘하는 사람 중 글도 잘 쓰는 사람과, 글 잘 쓰는 사람 중 말도 잘하는 사람의 비율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클까? 뭔가를 끄적거리는 라이프를 오래 유지하다 보면, 아무래도 후자 쪽을 더 후하게 쳐주는 쪽으로 마음의 편향이 생겨나는 듯. 그러니까 전자의 유형에게는 말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글도 잘 쓰네?’ 하는 어쩐지 얕잡는 식의 칭찬을 하고, 후자에다가는 저 말하는 것 좀 봐봐, 글솜씨 어디 가겠어?’ 하는 당연하다는 식의 칭찬을 한달지.

 

말을 다루는 뛰어난 능력 때문에 오히려 글솜씨가 묻히는 느낌. 이 사람은 조만간 에세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딱 떠오르는 그런 유형의 에세이를 들고 돌아올 것 같다. 그치만, 이 함량으로 16,000원은 조금…….

 

 

 

--- 읽는 ---


성의 역사 1 / 미셸 푸코

내가 예민한 게 아니라 네가 너무한 거야 / 유은정

원자핵에서 핵무기까지 / 다다 쇼

존 리의 부자되기 습관 / 존 리

니체 / 정동호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 페터 회

아주 친밀한 폭력 / 정희진

불교는 왜 그래? / 장웅연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 제임스 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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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11-21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오늘의 재잘재잘은 왠일인지 집중해서 읽었습니다. 푸코를 몇 장 읽으시다 던져버리셔서? ㅋㅋㅋ저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옛날 표지판 가지고 있는데 아, 생은 다른 곳에 까치판 표지 생각보다 괜찮은데! ㅋㅋㅋ

syo 2020-11-23 02:26   좋아요 1 | URL
까치라는 출판사의 갈짓자 행보가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군요.....
옛날 거 중에서 제가 봐도 괜찮아뵈는 것도 좀 있긴 합니다.

잘잘라 2020-11-21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치 출판사 표지 얘기 읽다가 뿜, 뿜, 뿜이 멈추질 않아서 고생했습니다. 아이고.. 아직도 크헐럴.. 큰 웃음 주신 syo님께 큰 감사 드립니다.

syo 2020-11-23 02:27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다행입니다.
까치에서 이 글을 볼 리는 없겠지만, 본다고 해도 잘잘라님처럼 웃고 넘기셨으면 좋겠네요.....

stella.K 2020-11-21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유, 정말 그러네요. 220쪽 밖에 안 되는데 10% 디씨해도 쫌....
조만간 중고샵에서 후려칠거라서 미리부터 높게 책정한 거겠죠?
1,6천원대라면 예전 같으면 350쪽대는 됐는데...
아무리 중고샵 가격이라도 후달거려 못 사는 책도 더러는 있더군요.
딱 반가격이면 사겠는데 싶은. 30% 이하로는 절대 안 팔겠다는 서점.
허거 참...

syo 2020-11-23 02:28   좋아요 0 | URL
쪽수의 문제라기보다, 뭐랄까, 한 페이지에 삼행시 하나 들어가 있는 분량이라서요.....
후룩후룩 후두둑- 했더니 다 읽고 말았어요.

2020-11-22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23 0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0-11-22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츄천해주신 사라밀스의 푸코책 160페이지 무렵에가면 드디어 몸권력이 나와요. 으하하, 전 푸코가 너무 즐거워요. 어려운 남 이야기가 아니라 사는 것과 맞닿아 와닿는 이야기인데, 이게 생각을 하는 방식 자체를 따져물으니까 말이 어렵네. 모를 소리라고 치부하지 말아요. 저 도움됐다구용! 푸코 너무 중요해. 왜 우리는 자발적으로 다이어트를 하는건지 알려준다구.

syo 2020-11-23 02:31   좋아요 1 | URL
저도 푸코를 처음 읽을 때, 그렇게 느꼈습니다. 철학 계보도 잘 모르고 이런 저런 책들 뒤적거리던 꼬꼬마 시절이었는데, 철학책 중에 대놓고 사는 데 직접적으로 도움될 말씀을 때려넣어준다는 느낌을 받은 경우는 스피노자 이후로 푸코가 처음이었어요.

AgalmA 2020-11-28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치 빌 브라이슨 새 커버는 까치출판사 맞나 싶게 깔끔하게 뽑은 거 같아요. 저도 까치출판사 엽서 갖고 싶어서 뭘 사나 하고 있어요ㅋㅋㅜ

syo 2020-11-29 23:24   좋아요 0 | URL
저도 이렇게 깠지만, 이상하게 그 엽서는 또 갖고 싶더라구요 ㅋㅋㅋㅋㅋㅋ 희한하다 ㅋㅋㅋ
 

 

 

20쪽만 읽고 쓰는 허무맹랑 푸코 이야기

 

 

 

0

 

이것은 푸코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푸코와, 푸코를 설명하는 이런저런 개론서와, 푸코와 관련없는 이런저런 다른 책들과, 혹은 30년 넘게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살아온 syo의 허튼 생각들이 버무려진 이야기라고 보는 게 옳겠습니다.

 

 

 

1

 


11장은 채 스무 페이지가 안 되는데도, 서문 역할을 하는 글이 다 그렇듯이 이 부분을 잘만 조지면 뒤는 안 읽어도 읽은 척을 할 수 있게끔 농밀한 내용을 품고 있습니다. 20쪽을 정리하면서 드는 걱정은, 남은 수백 쪽에 관한 페이퍼를 쓸 때도 이만한 분량이 나올 것인가, 그리고 이만한 열정이 남아있을 것인가 하는 점인데…….

 

 

 

2

 

푸코 또한 그랬던 것 같아요. 듣자니, 1976년 발간된 성의 역사 시리즈 제1권 뒤표지에는, 뒤이어 출간될 나머지 5권의 제목이 쭈욱 적혀 있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두 권(혹은 세 권)이 더 나오고 말았을 뿐입니다. 심지어 그 두 권 역시 애초의 기획과는 방향이 많이 달라져서, 성의 역사 1권과 2권 사이에 푸코 사상의 주제적 도약이 있었다고 보는 연구자들이 많지요. 푸코가 쓴 책을 주욱 늘어놓고 보면, 성의 역사1 : 지식의 의지는 어쩐지 감시와 처벌 2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책은 소위 말하는 권력의 계보학시기를 완결하는 작품으로써 사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의미의 역사책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계보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철학책은 곧 역사책일 수밖에 없고(역사책이어야 하고), 동시에 모든 역사책은 철학책이어야 하는(철학책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이 책을 또 역사책이 아니라고 단정하기도 그렇습니다…….

 

 

 

3

 

그렇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 책은 성에 대한 책이지만 성에 대한 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무슨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니…….

주제는 권력입니다. 영원한 주제는 권력-지식이죠. 그리고 이 책에서는 특히 권력-담론-쾌락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성이 아니라 다른 뭔가가 푸코의 눈에 띄었다면(이전에 광기가 그랬고 감옥이 그랬듯이), 푸코는 그걸로도 해냈을 겁니다. 성이 아니어도 좋았어요. 그러나 성이어서 좋았죠…….

 

 

 

4

 

이런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내가 제기하려고 하는 물음은 왜 우리가 억압받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가 우리의 가까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그토록 커다란 열정과 강렬한 원한을 품고서 스스로 억압받고 있다고 말하는가이다. (16)


그러니까 푸코가 겨냥하는 건 이런 것들이고, 또 이건 아니네요.

 

이전까지 자유롭게 행해지고 말해지던 성이 근대에 이르러 억압되었다는 담론의,

- 매력(O)

- 유독성(O)

- 진실 여부(X)

 

 

 

5

 

권력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우리 사전은 권력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권력 : 명사.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권력이라는 말을 쓸 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로 남을 억눌러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하거나, 하기 싫은 일을 하도록 강제하는 힘정도의 의미로 유통되는 것 같아요. 이런 정의는 최소한 두 가지 맥락에서 권력의 특성을 일부분만 설명하는 한계를 지닙니다. 첫째, 어쨌든 주체의 의사와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만이 권력인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둘째, 권력을 명사적 객체, 그러니까 소유했다가 잃었다가 되찾았다가 할 수 있는 어떤 덩어리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권력의 실체가 저 두 가지 시각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문맥에서만 드러나는 권력의 부분적 특성을 마치 전체상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다는 거죠. 이런 오해가 낳는 문제점은 실제로 권력인 것을 권력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권력을 행사하는 자를 감추어 주는 방식으로 자기도 모르게 권력에 복무하는 결과를 만들 위험도 있구요.

 

푸코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권력의 저 좁은 정의가 공식적으로 숨기(려 하), 권력의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작업을 오래도록 해왔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복잡하고, 모호하며, 추상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투명하다고 할 수 있을 권력관을 주장합니다.

 


푸코는 권력을 소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지 않으며사회 속에서 촘촘히 연결된 그물망으로 파악한다.

오생근미셸 푸코와 현대성

 

푸코는 권력을 소유물이 아닌 하나의 전략즉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한 개인(혹은 집단)이 수행하는 행위로 보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권력이란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행해지는 것이다따라서 권력은 국가나 정부와 같은 특수한 제도에 의해 점유되어 있다기보다는 사회 전체에 퍼져 있는 관계의 그물망이다.

사라 밀스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


 

 

6

 

그렇다면 갑자기 장(, Field)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쇳가루를 올려놓은 책받침 아래에서 자석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면 쇳가루들이 특정한 방향으로 배열되는 꼴을 볼 수 있습니다. 자석 주변에 분포하는 자기의 장이 하는 일입니다. 나침반은 지구가 하나의 커다란 자석이라는 점을 이용한 물건입니다. 북극 가까운 곳에 자북磁北이 있습니다. 정확히 북극과 일치하진 않구요. 자북은 지구라는 막대자석의 S극입니다. 따라서 나침반 바늘의 N극은 서로 다른 극이 당기는 원리에 따라 자북을 가리킵니다. 지구자기장이 하는 일입니다.

 

지구가 사과를 당겨서 사과가 땅에 떨어집니다. 중력입니다. 중력은 질량을 가진 물체가 질량을 가진 다른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있다고 하면, 그 공간에는 힘이랄 게 없습니다. 그러다 어떤 이유에선지 뿅 하고 공간 한복판에 지구가 나타났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공간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중력장이 함께 뿅 하고 생깁니다. 지구로 인한 중력장은, 그 공간의 특정 위치에 질량을 가진 물체가 들어섰을 때 그 물체가 어느 방향으로 어떤 크기의 힘을 받을지를 써서 그 위치에다 붙여놓은 포스트잇과 유사합니다. 예를 들어, 모눈종이 한복판에 있는 지구에서 북쪽으로 한 칸 떨어진 곳에 질량 “1”의 물체가 놓였을 때, 걔가 받는 힘이 남쪽 방향(지구가 당기니까 지구가 있는 쪽)으로 “4”의 크기라고 한다면, 지구에서 서쪽으로 두 칸 떨어진 곳에 질량 “1“의 물체가 놓이면 걔는 동쪽 방향(역시 지구가 있는 쪽)에서 ”1“ 크기만큼의 힘으로 자기를 당기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런 식을 모눈종이의 모든 칸에(심지어 칸과 칸 사이에) 그 위치에서 물체가 받을 힘의 방향과 크기가 써진 포스트잇을 붙이는 거죠. 대충 이런 걸 (고전역학에서의) 중력장이라고 부릅니다.

 

 

 

7

 

권력장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 개념으로서의 권력은 설명력이 커서 좋습니다.

 

권력은 누군가는 때리고 누군가는 얻어맞는 일방적인 힘의 소유관계가 아니라, 주체 간의 상호작용이 본질이라는 점이 쉽게 보입니다. 지구가 가운데 놓인 모눈종이 위의 한 점에 사과 한 알이 나타나면, 그 공간에는 사과로 인한 중력장 역시 형성됩니다. 그 두 중력장이 합쳐져서 그 공간의 새로운 중력지형을 만듭니다. 지구가 사과를 당기는 것처럼 사과도 지구를 당긴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아도 되는 그림입니다. 그리고, 힘이 다양한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쉽습니다. 중력은 당기기만 하지만 전자기력은 극성에 따라 밀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듯, 장에서의 권력은 장 위에 놓인 주체를 밀 수도 있고 당길 수도 있고 어떨 땐 회전시킬 수도 있겠구나- 하는 추측도 해볼 수 있습니다. 검열, 금지, 부인, 침묵의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 이외의 여러 현상 속에 숨은 권력의 작용을 엿볼 수 있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억압의 가설은 비록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지만, 그 주장 자체가 억압-해방이라는 하나의 담론을 이루면서, 억압 이외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기존 권력을 유지하는 하나의 장치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성을 긍정하는가 부정하는가, 금기를 내세우는가 허용을 명확히 표명하는가, 성의 중요성을 인정하는가 성의 효력을 부인하는가, 성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말을 억제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아는 것이라기보다는, 성에 관해 말한다는 사실, 성에 관해 말하는 사람, 성에 관해 말하는 장소와 관점, 성에 관해 말하기를 부추기고 말한 내용을 수집하고 유포시키는 여러 제도, 요컨대 성에 관한 전반적 "담론현상""담론화"를 고찰하는 것이 (적어도 최초의 논의에서는) 요점이다. 또한 어떤 형태로,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떤 담론을 따라 권력이 가장 미묘하고 가장 개인적인 행동에까지 이르는가, 어떤 노정을 통해 권력이 희귀하거나 거의 감지할 수 없는 욕망의 형태에 도달하는가, 어떻게 권력이 일상의 쾌락에 침투하여 일상의 쾌락을 통제하는가 거부, 봉쇄, 자격 박탈뿐만 아니라 선동과 강화일 수도 있는 결과와 함께 이 모든 것을, 요컨대 "권력의 다형적 기술"을 아는 것이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르게 된다. (18-19)


거부, 봉쇄, 박탈이 아니라 선동과 강화의 방식으로 권력이 일상에 침투하는 예를 뒤따르는 장들에서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성이 억압된 적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권력에 억압적인 특성이 없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권력 = 억압이라는 마음속 등식은 생각보다 큰 힘이 있습니다. 다양한 담론 영역에서 내 표적으로 쏟아지는 권력의 다양한 촉수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하는 행위 역시 권력적 행동임을 눈치채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몇 개 이상의 미시권력장 안에 발을 들여놓은 채 살아야 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 권력행동을 하게 되며, 때로 인간이 이기적인 유전자의 숙주에 불과해 보이는 것처럼, 주체는 권력-지식의 목적을 위해 동작하는 기계가 되기도 합니다. 그 무시무시한 일을 위해, 권력은 단지 부정적 양태의 기술만을 제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8

 

그런데 내가 "억압의 가설"이라고 부르게 될 것과 관련하여 세 가지 주목할 만한 의혹이 생겨날 수 있다. 첫 번째 의혹. 성의 억압은 정말로 자명한 역사적 사실일까? 맨 먼저 시선에 드러나고 따라서 하나의 가설을 출발점으로 제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성에 대한 억압체제의 강조일까, 아니면 17세기부터 이루어진 그러한 체제의 확립일까? 이것은 본질적으로 역사와 관계가 있는 문제이다. 두 번째 의혹. 권력의 메커니즘, 특히 우리 사회와 같은 곳에서 작용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은 요컨대 억압의 범주에 속하는 것일까? 금지, 검열, 부인은 아마 모든 사회에서, 그리고 확실히 우리 사회에서 권력이 일반적으로 행사되는 양상일까? 이것은 역사-이론적 문제이다. 끝으로 세 번째 의혹. 억압을 겨냥하는 비판적 담론은 그때까지 이의없이 가능한 권력 메커니즘의 통로를 차단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억압"이라고 부르면서 비난하는 (그리고 아마 왜곡할) 것과 동일한 역사적 망()의 일부분을 이루는 것일까? 억압의 시대와 억압의 비판적 분석 사이에 정말로 역사적 단절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것은 역사-정치적 문제이다. (17-18)


이후에 이어지는 여러 장들에서, 푸코는 스스로 제기한 이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하려 합니다.


1) 성의 억압이 자명한가?

2) 금지, 검열, 부인과 같은 억압적 방식이 권력의 일반적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는가?

3) 억압을 비판하는 담론에 권력을 위해 복무하는 지점이 있지는 않은가?

 

차차 알아보겠습니다. 이 장에서는 저기 위에서 최초로 언급한 질문, ”왜 우리가 스스로 억압받고 있다고 말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근대에 이르러 성이 억압되었다는 담론은 분명히 계속되고 있다이는 아마 주장하기가 쉽기 때문일 것이다. 이 담론은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엄숙하게 보증되고누구나 수백 년에 걸친 대담하고 자유로운 표현의 시기에 뒤이어 17세기에 억압의 시대가 출현했다고 하면서 이 담론이 자본주의의 발전과 시기를 같이한다고 생각한다이 담론은 부르주아 질서와 일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성과 성에 관한 타박의 짧은 역사가 곧장 생산양식의 엄숙한 역사로 변하고성에 대한 경시 현상이 사라져 버린다성을 설명하려는 논리가 이 사실 자체로부터 점점 구체화되어 간다성을 그토록 엄격하게 억압하는 이유는 성이 전반적이고 집약적인 노동력의 동원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노동력이 조직적으로 착취되는 시대에 노동력의 재생산을 허용하는 최소한으로 한정된 쾌락 이외에 다른 쾌락 때문에 노동력이 허비되는 것을 용인할 수 있었을까성과 성의 영향은 아마 읽어내기가 쉽지 않을 터인 반면에이것들에 대한 억압은 이처럼 표현될 수 있는 만큼 쉽게 분석된다그리고 성에 관한 명분가령 성의 자유뿐만 아니라 성에 관한 인식과 성에 관해 말할 권리라는 명분은 아주 당연히 정치적 명분의 존중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성 또한 미래의 전망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아마 성에 관한 이야기를 그토록 막강한 대부와도 같은 것으로 만들려는 그토록 많은 대비책에는 성을 부끄러워하는 아주 오랜 태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 자문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마치 그러한 담론이 말해지거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서로의 가치를 높이기라도 해야 하는 듯하다.

그러나 성과 권력의 관계를 억압적인 것으로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 그토록 만족감을 주게 되는 데에는 아마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인데그것은 그렇게 주장함으로써 이익이라고 할 만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성이 억압된다면다시 말해서 금지와 부재와 침묵에 귀착할 수밖에 없다면성에 관해 말하고 성의 억압에 관해 말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위반의 몸짓이 될 수 있다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권력에 대항하여 권력 밖에서 법을 위반하고 미래의 자유를 어느 정도 예견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오늘날 성에 관해 말할 때의 엄숙함은 이로부터 연유된다최초의 인구통계학자들과 19세기의 정신의학자들은 성을 환기할 필요가 있을 때몹시 저급하고 쓸데없는 주제에 독자의 관심을 붙잡아두는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해야 했다이와는 정반대로 우리는 수십 년 전부터 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 거의 언제나 약간 당당한 태도즉 기존의 질서에 도전한다는 의식스스로 전복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을 표시하는 어조현재를 넘어서서 미래를 앞당기려는 조급한 열정을 내보인다. 반항약속된 자유가까이 다가온 또 다른 법의 시대와 같은 말이 성의 억압에 관한 담론으로 쉽게 넘어간다. (12-13)


요약하자면, ‘억압의 가설을 채택하고, 성이 억압되었으니 해방하자고 주장하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세 가지입니다.

 

1. 억압 메커니즘은 선명해서 주장하기도 쉽고 타격 목표를 정하기도 쉽다.

2. 억압된 의 해방은 억압된 자유와 권리의 해방이라는 좀 더 거대하고 정치적인 작업과 관련되어 있다. -> 폼 난다.

3. 억압된 성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만으로 깨어 있는 인간이라는 느낌,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투사라는 느낌, 내가 좀 전복적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 -> 개 폼 난다.

 

결론은 그러니까, 쉽고, 있어 보여서 그런다는 것이네요. 예나 지금이나 있어빌리티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경향이 있죠. 사랑받고 추앙받고 싶은 욕심에 남들보다 빨리 소수자들의 선봉에 섰다가 다수자들의 막강한 돌팔매질에 못 이겨 은근슬쩍 그쪽으로 기어들어가면서, 자기 변절의 이유를 소수자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많다…….

 

 

 

9

 

읽기에 다정하진 않은 번역입니다. 예를 들면, ”따라서 억눌린 성의 관념은 이론의 문제일 뿐만이 아니다.“(15) 라는 문장은 문맥상 따라서 성이 억눌려 있다는 관념은 이론의 문제일 뿐만이 아니다.“로 옮기면 오해의 소지가 덜합니다. 영어판에서 ‘The notion of repressed sex is ~”로 쓰인 문장이라 의미구조가 선명한데, 번역문은 성이 억눌렸다는 관념을 말하는지 성에 대한 억눌린 관념을 말하는지 모호합니다.

 

하나만 더 볼까요. 위에서 인용한 억압 가설에 관한 푸코의 첫 번째 의문, 그러니까 성의 억압이 정말로 자명한 역사적 사실일까? 하는 질문에 뒤따르는 문장을 보겠습니다.

 

맨 먼저 시선에 드러나고 따라서 하나의 가설을 출발점으로 제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성에 대한 억압체제의 강조일까, 아니면 17세기부터 이루어진 그러한 체제의 확립일까?”(17)


일단 전체적으로 뭔가 어색하고 우리말 같지 않은 모양은 차치하구요. 후반부의 성에 대한 억압체제의 강조일까, ‘아니면’ 17세기부터 이루어진 그러한 체제의 확립일까?‘ 하는 대목은, ’하나의 가설을 출발점으로 제시할 수 있게 하는 것1)강조 2)그러한 체제의 확립 중 어느 쪽일지를 묻는 것처럼 보여요다. 그런데 실제로 억압 가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푸코의 관점으로 보면, 1)2)는 택일의 문제가 아니고 강약의 문제에 가깝지 않을까 싶어요. 강조하다 못해 확립까지 했던 그것- 이런 뉘앙스랄까요. 영문판은 “Is what first comes into view-and consequently permits one to advance an initial hypothesis-really the accentuation or even the establishment of a regime of sexual repression beginning in the seventeenth century?” 로 번역해놓았네요. 제 눈에는 or를 중심으로 the accentuationthe establishment가 서로 싸우는 것 같아보이진 않는데. even이 한 몫 거들기도 하구요.

 

사실 영어 겁나 못해서 조심스럽네요.

 

 

 

10

 

아무튼지간에 계속 읽어나가겠습니다.

 

 

 

 

--- 읽은 ---

 


213. 폭죽무덤

김엄지 지음 / 현대문학 / 2020

 

소설과 시의 국경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나는 더 모르게 되었어…….

 

한순간에도 몇 번씩 인간의 머릿속에 켜졌다 꺼졌다 하는 생각들과 문학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또 어디에 있을까? 난 진짜 아무것도 모르게 되었어…….

 

 

 

--- 읽는 ---

미셸 푸코와 현대성 / 오생근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 미셸 푸코

방구석 미술관 / 조원재

클래식 가이드 / 세실리아

말장난 / 유병재

다시 미분 적분 / 나가노 히로유키

습관의 말들 / 김은경

내가 예민한게 아니라 네가 너무한 거야 / 유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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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푸코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거짓말
    from 게으른 독서생활자의 수기 2021-01-10 12:35 
    12월 부터 붙잡고 씨름하던 ‘성의 역사’ 1권을 끝내면서 푸코가 좋아져버렸다. 지금은 그가 싫어한다는 전기를 읽고 있다. 자살하고 싶어하는 꼬꼬마 폴-미셸이 서글프고 귀엽다. 세상에 그렇게까지 입시공부를 빡시게 했는 데, 네가 안 돌고 배기겠니. 덕분에 미래의 니가 쓴 책 읽다가 누님도 머리가 살짝 돌 뻔 했단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를 쓴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가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내 모든 텍스트는 자서전의 조각’이라고 했단다
 
 
다락방 2020-11-18 10: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출력해서 이천번 읽어봐야 될 것 같아요.. ㅜㅜ

syo 2020-11-18 13:28   좋아요 1 | URL
.... 그러지말고, 개론서를 읽는 게 좋겠어요. 역시 개론서도 아무나 쓰는 게 아니야.

수연 2020-11-18 11: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내가 예민한 게 아니라 네가 너무한 거야..... 내가 무지한 게 아니라 네가 너무 똑똑한 거야....

syo 2020-11-18 13:2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아니야.... 그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다 아니야

비연 2020-11-18 1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우째

syo 2020-11-18 13:30   좋아요 0 | URL
두산의 패배 떄문에 감정컨디션이 최상이 아니어서 그런 것 같은데? ㅠㅠㅠㅠ

단발머리 2020-11-18 1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출력쪽으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쇼님 인용하신 문단 중 하나가 저도 줄친 부분이라 그것 하나 자랑스럽네요 ㅎㅎ
수고많으셨어요, 쇼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syo 2020-11-18 13:30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도 단발님도 좋은 개론서 하나 놔드려야겠어요....

잠자냥 2020-11-18 1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째222222

잠자냥 2020-11-18 13: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해를 못해서 좋아요를 누를 수가 없어요.
왜 요즘 알라딘 자꾸 푸코해요. ㅋㅋㅋㅋㅋㅋ

syo 2020-11-18 13:3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한테 수학 배웠던 애들한테 갑자기 미안해지네요. 얘들아 니들 잘못이 아니었어....
이해를 못해서 좋아요를 누를 수 없다는 잠자냥님의 말씀을 이해했으므로 저는 이 댓글에 좋아요를 꾹 누릅니다.

추풍오장원 2020-11-18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푸코가 논리실증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ㅋㅋ 그 관점에서 비판받을 소지도 있지않나 하고 생각하구요. 당위를 말하기 싫어하는 지금 세상에서 오독하기 참 좋은 푸코인것 같기도 하고..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syo 2020-11-18 18:48   좋아요 1 | URL
비가 오는데 날이 춥지 않네요. 이것은 가을비인가요 겨울비인가요.. 알 수 없는 계절을 우리는 살고 있나 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로 2020-11-18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해를 못해서 좋아요를 누를 수가 없어요. 2

저도 딱 저 댓글을 달아야지 했는데 오늘도 한 발 늦었어요. 매번 뒷북,,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syo 2020-11-18 18:4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이해말고 애정으로 눌러줘요!

나무처럼 2020-11-18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해 못하면 좋아요 못 누르나요?

다락방 2020-11-18 18:3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나무처럼님? 저는 이해 못했지만 좋아요 눌렀답니다? :)

syo 2020-11-18 18:47   좋아요 0 | URL
이건 비밀인데, 좋아요는 좋을 때 누르는 거래요....

공쟝쟝 2020-11-18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의역사 읽기전에 개론서 겁나 읽고 있는 보람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글이로다 ㅋ

syo 2020-11-21 11:14   좋아요 0 | URL
개론서! 개론서가 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