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궁창의 뚜껑이 열린다
정치인으로서 승승장구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사람들이 모자란 건지 뭔지,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보면 상대방이 찬 똥볼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을 의외로 빈번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정치판인거라, 내가 뭘 잘 하면 좋지만 그렇다고 또 내가 뭘 잘 할 필요는 없다. 내가 잘한 일은 정치인의 입신출세에 있어서 그냥 양념 같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정치판은 1년 365일 중 364일 정도는 그냥 시궁창이다.
아들과 조폭이 맞붙었다. 아들을 지지하는 이들은 아들이 그럴 리 없고 조폭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고, 조폭을 지지하는 자들은 조폭은 실수지만 아들은 고의가 아니냐고 맞받는다. 조폭은 아들을 향해 적폐를 청산하자는 네가 바로 적폐라고 꼬집고, 아들은 조폭을 향해 너의 새정치는 과연 5공 시절에는 새로웠다고 놀려 먹는다.
신나고 익숙한 대한민국이다.
2. 니들 제발 정책 대결 좀 하라는 말을 하기 전에,
우리 한 번 정책 대결을 해보자고 말하는 자들이 실제로 정책 대결 한 번을 하지를 않는게 꼴성사납지만. 사실 유권자들의 사정이라고 딱히 더 나은 것도 아니다. 니들 제발 정책 대결 좀 해라, 보고 있는 우리 생각은 안 하냐고 타박하는 국민 대다수는 사실 정책을 내 놓아도 잘 모른다. 그냥 내가 관심 있는, 나의 이해득실에 직접 연관이 있는 정책만 모호하게 알고 있을 뿐이다.
심상정이 20-25세 청년들에게 1000만원씩 배당하겠다는 정책을 냈다는 기사가 나오면, 무슨 돈으로 그거 할 거냐는 댓글이 베댓이 된다. 분명히 상속세 5조 4천을 그대로 1000만으로 나눠서 54만명의 청년에게 지원하겠다고 밝히고 있는데. 안 읽는다. 읽었다면 어쨌든 정부 총 예산에서 5조 4천억을 줄여야 한다는 것인데 어느 부분을 줄일 건지를 물어봤겠지. 도통 안 읽는다.
"돈 준다 = 포퓰리즘" 이라는 등식이 자동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인간들은 보수의 심장을 가졌거나, 텅 빈 머리를 가졌으리라고 믿는다. 그냥 포퓰리즘이라는 있어 보이는 단어를 댓글창에 한 번 써보고 싶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소득재분배와 가처분소득 증대를 통한 시장활성화 같은 말은 빨갱이 잡소리라고 생각한다. 웃긴 건, 그런 사람들도 "낙수효과는 거짓말"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져나간 것은 또 아는지라, 또 그 말은 입에 올린다. 도대체 낙수효과도 아니고 분수효과도 아니라면 어쩌자는 말일까?
3. 정책으로 평가 하자는 당신의 정책을 평가하자면,
정책을 보고 대통령을 뽑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없다. 대선 전에 제시했던 공약을 당선이 되고 나서도 그대로 밀고 나갈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는 순간 호구 잡힌다. 대통령이 공약을 엎어도 비난 말고는 딱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게다가 정부 밖에서 만든 공약은 정부라는 플랫폼 안으로 들어가 정책이 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변동이 생기게 마련이다.
사람을 보고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성격이나 언동은 물론, 50년이 넘게 살아온 그 사람의 인생행로, 정치판에서 그 긴 세월에 걸쳐 제시해 온 가치들을 보고 대통령을 골라야 한다. 말은 바뀔지 몰라도, 안철수가 말했듯, 50넘은 사람은 바뀌지 않는 것이니까. 정책은, 그 정책이 그가 이제껏 추구해 온 것에 얼마나 부합되는지를 비교하여, 자신이 이룩하고자 하는 세상으로 가는 길을 얼마나 뚝심있게 걸어갈 것인가를 계량하는데 쓰는 것으로 족하다. 이를테면, 박정희의 딸로 태어나 박정희의 딸로 살다가 박정희의 이름에 올라타 정치인이 되어 박정희의 정치를 계승하려는 어떤 정치인이 대선후보로 나와 경제민주화를 정책이라고 내놓았을 때, 그 정책 자체의 합당함을 논할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마침내 박정희가 되기 위해 택도 없는 거짓말을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저 정책을 보니 알겠다-고 판단해야 한다.
그랬는데, 지난 대선, 정책을 보고 박근혜에 투표한게 나라서 부끄럽다. 그리고 그 정책들은 온데간데 없고, 지금 청와대엔 주인이 없다.
4.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마라는 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마라
문재인이 세월호 추모곡에 내래이션을 한다.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일까? 그간 세월호에 대한 문재인의 태도에 비추어보면, 충분히 선의라고 평가할 수 있지 않나? 여기서 문재인이 세월호 추모곡을 발표한다고 해서 "그간 세월호에 관련해 문재인의 태도가 미진해서 지지하지 않았지만, 노래까지 하는 걸 보니 이제는 지지할 수 있겠다."라며 지지측으로 돌아서는 사람이 생긴다고 보는 것일까?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알고리즘은 조금 다르다. 세월호는 정치와 무관하게 우리에게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건을 덮고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유가족들을 억압하려는 시도가 발생한 순간 이미 정치가 되었다. 세월호는 정치다.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말은 절반만 옳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책임 소재를 가리는 것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모두 정치다. 그래서 나는 문재인이 세월호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세월호가 문재인을 이용하고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본다. 세월호를 둘러싼 정치는 이제야 시작되었고, 나야말로 세월호를 짊어지고 공론장에 들어가 마지막까지 투철하게 정치를 할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저 노래라면, 나는 그것이 올바른 정치라고 생각한다.
5. 안철수 정부의 여성정책을 짐작하며
김미경 교수가 고(故) 이순덕 할머니 장례식장에 찾아간 것을 나는 안철수의 정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으로서 김미경 교수의 의지였을 수 있고, 또 안철수 대신 찾아간 것이라 한들, 위안부 문제에 관한 안철수의 기존 태도로 비추어 보면, 정치적 의도 없이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같이 온 일행 중 한 명이 "안철수 대표 부인으로, 서울대 의대 교수인 김미경 교수님이세요."라고 소개를 한 순간, 안철수는 원격으로 정치적 행동을 하고 말았다. 표를 얻어보려 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이다.
오늘 네이버 기사에 잠시 떴다가 남성으로 추정되는 네티즌의 댓글 뭇매를 맞은 기사 중에, 문재인과 안철수의 출사표에 여성정책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었다는 주제의 기사가 있었다. 여성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여성차별이냐며, 꼴페미는 패야된다며, 남성 이야기는 했냐는 식으로 반응하는 병신같은 댓글들은 차치하고, 유력 주자들이 주장하는 여성정책이 구색 갖추기가 아니냐는 그 기사의 논조는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대통령이 남성이라면, 그 정권의 여성정책은 대통령의 성평등에 대한 인식 자체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수많은 정책가들이 심층적인 분석을 마쳐 내 놓은 여성정책이라도, 남자 대통령이 "아, 뭐 그렇게까지? 여자들은 그런 것까지도 차별로 본단 말야?" 하는 순간 엎어진다. 그리고 대통령의 성 인식은 그와 몇 십년을 살아온 영부인의 성 인식을 통해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다.
내가 김미경이었고 나를 소개할, 또는 소개받을 필요가 있고, 굳이 저 허접한 소개 멘트를 써야만 했다면, "안녕하세요. 김미경입니다. 서울대 의대 교수입니다. 대선 후보 안철수의 부인입니다." 순을 선택했을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국제정치나 전쟁범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성에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받은 고통은 전쟁피해자로서의 고통이기도 하지만 여성으로서의 고통임이 그 본질이다. 그런 자리에 내가 안철수의 부인으로서 표를 얻기 위해 간 것이 아니라 위로를 위해 찾아간 것이라면, 그리고 내가 여성이라면, 나는 나를 소개하는 데 무척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추측하게 되었다. 안철수 정부의 여성정책은, 김미경을 안철수 후보의 부인이고, 서울대 의대 교수이고, 김미경이고, 로 네이밍하는 지점에 말뚝이 박혀 있는 작은 원 같은 정책이 될 수 있겠다고.